9

쯔시마에도 봄이 왔다.

대륙은 이제 겨우 봄의 첫 기별을 받고있건만 남쪽바다가운데 길게 누운 이 섬은 어느덧 늦은 봄이였다. 하얀 오얏꽃이 한창 흩날려 떨어지고있었다.

도주의 집 깊숙한 후원을 감싸고있는 키높은 담장너머로 그 어디서인지 오얏꽃잎이 날려들어와 어순의 발치에 한잎두잎 떨어지고있었다.

밝은 세상과 차겁고 을씨년스러운 이 후원을 영영 갈라놓을듯이 우뚝 솟은 담장밖에서만 꽃피고 향기를 풍기다가 그냥 지나가버리는줄 알았던 봄이 끝내 어순이에게 애절한 봄기별을 전하고있는것이였다.

《아!》

어순이는 속절없이 날려와 발치에 떨어지는 오얏꽃잎을 바라보며 혼자서 소곤거리였다.

《이 봄도 다 가는구나!》

낯설고 물설은 이 섬에 끌려와 도주네 집 담장안에 갇힌지도 어느덧 두해, 계유년, 갑술년이 악몽처럼 지나고 오는양 없던 을해년의 새 봄도 벌써 담장밖으로 지나가버리고마는것이였다.

흘러간 2년동안 앉으나서나, 자나깨나 어순이는 그리운 고향 울릉도와 포촌마을의 정다운 사람들을 잊은적이 없었다. 더우기 이 섬에 한달나마 갇혀있다가 왜놈차사의 배에 실려 부산으로 간 룡이 오빠와 어둔오빠가 애타게 그리워졌다.

이들 두사람은 이 세상에 남아있는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였다. 부모를 잃고 외롭게 자라던 철부지시절부터 업어주고 달래주며 그를 키워준 한없이 다정한 오빠들이였다. 더우기 룡이 오빠는 뜨거운 마음을 기울여 자기를 사랑해주는 이 세상 둘도 없이 미더웁고 귀중한 사람이였다.

(지금쯤 모두들 무사히 지내는지?)

발치에 날려와 쌓이는 오얏꽃잎을 보자 문득 자기의 머리와 어깨우에 소복이 내려쌓이는 배꽃을 조심히 털어주던 룡이 오빠의 부드러운 손길이 생각났다.

아, 그날 밤에는 내가 왜 그리도 철이 없었을가? 울기는 왜 울었을가? 다대포로 가면 영영 다시 오지 못하기나 할것처럼 흐느껴울면서 공연히 룡이 오빠의 마음만 아프게 해주었지…

어순이는 저고리안고름에 단단히 비끄러매여서 가슴에 품고다니는 옥가락지를 살그머니 만져보았다.

몸의 온기를 받아 부드러운 살결처럼 따스하고 매끈거리는 촉감이 손끝에 마쳐오자 어순이는 저도 모르게 그 옥가락지를 왜도적에게 빼앗기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배에 실려 낯선 섬으로 끌려오던 그 무서운 밤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옥가락지를 다시 찾은 룡이 오빠가 후원별채에서 그것을 자기 손가락에 정성들여 끼워주던 일, 도주의 집에서 먼저 빠져나가라고 그토록 안타깝게 타이르던 일들이 눈앞에 삼삼히 떠올랐다.

(무사하기나 한지… 울릉도일은 어떻게 되였는지…)

일을 끝낸 하나에가 젖은 손을 치마에 문대며 어순이곁으로 다가왔다.

《또 안상 생각이우?》

《아니…》

어순이는 애써 눈물을 감추며 밝은 웃음을 지어보이였다.

하나에는 낡고 기운데가 많은 어순의 옷을 생각깊은 눈길로 살펴보고있었다.

이곳으로 끌려올 때부터 입고있는 조선치마저고리였다. 낡은 무명옷 한벌을 해를 넘기며 입었으니 깁고 덧기운데도 여러곳 생기고 땀과 재물에 삭은 천이 오리오리 헤여져서 더 손질할 여지가 없이 되였다. 다른 옷을 입으라고 여러번 말해보았으나 어순이는 그냥 그 옷만을 입었다.

처음에는 몸에 익지 않은 왜옷이여서 그러려니 하고 범상히 생각하였으나 고향의 향기와 정취가 느껴지는 그 조선옷을 한순간도 몸에서 떼여놓을수 없어하는 어순의 그 마음이 차차 짐작되였다.

그래서 하나에는 옷을 바꿔입으라는 말을 더는 하지 못하였다.

그대신 기어이 조선치마저고리 한벌을 새로 지어주리라 마음다지고 남편과도 그런 의논을 하였다.

그랬지만 천을 구할 도리가 없어서 여러달을 미루어오다가 이제야 겨우 천을 얻었다. 남편이 발씨고운 무명 한필을 구해왔던것이다.

그날 저녁, 두 녀인은 밤이 깊도록 등불밑에 마주 앉아 옷을 짓고있었다. 하나에는 무릎우에 바느질감을 펴놓고 부지런히 바늘을 놀리고있는 어순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있었다. 입술을 꼭 다물고 가끔씩 버릇처럼 바늘끝을 가리마밑에 살근살근 문지르면서 온 정신을 쏟아부어 한뜸한뜸 누벼나가는 처녀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왔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영영 빠져나갈수 있었던 그 순간에도 약혼자와 오빠를 생각하면서 혼자서는 떠날수 없다고 하더라던 그 눈물겨운 사연을 남편에게서 들은 다음부터 하나에는 어순이를 더욱 무심히 대할수가 없었다. 여리고 연약하게만 보이는 처녀의 그 어디에 그처럼 뜨겁고 굳센 마음이 간직되여있었을가. 언제나 조용하고 깨끗하고 말수가 적고 부드러우면서도 지내보면 더없이 인정이 깊고 뜨겁고 그런가 하면 또 차돌같이 굳고 결백한 마음을 지켜가는 처녀인것이였다.

어느날 밤, 남편은 잠자리에서 은근히 자랑을 섞어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에 갔을 때 들어보니 조선녀자는 예로부터 〈외유내강〉이라 하여 겉은 부드러워두 속은 굳세다우. 조선사람들은 그것을 녀자의 제일가는 미덕으로 치는데 아마 어순이도 그런 처녀인가보우.》

《정말 그래요. 아직 나이도 어린데 얼마나 서러울 때가 많고 집이 그립겠나요. 그래도 언제한번 사람들앞에서 눈물을 보인적이 없구 오히려 우리를 위해주려고 애쓰는것을 볼 때면… 그게 다 우리 일본녀자들은 따르지 못할 성품이지요.》

《옳은 말이요. 안상과 어순이가 그날 밤 제 나라 섬을 지키려구 한목숨을 바치구 나서는것을 보면서 평생 눈물을 모르던 내가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우. 정말 더 말할수 없는 사람들이지…》

그때 하나에는 남편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감동의 더운 눈물을 흘리였었다.

참말 인정깊고 뜻이 굳세고 지내볼수록 더욱 따르고싶어지는 사람들이였다.

남편이 조선사람의 구원으로 살아돌아온 다음부터 하나에의 가슴속에서 남몰래 싹터자라고있던 이 마음은 저도 모르게 룡복이와 어순이로 하여 나날이 더욱 뜨거워지고있었다.

이마에 잔구슬같은 땀방울이 맺히는것도 모르고 바느질에 온 정신을 다 쏟아붓고있던 어순이는 이윽고 하얀 이발로 실을 물어끊었다.

《저고리는 다되였어요. 어서 좀 봐주세요.》

하나에는 저고리를 받아들고 살펴보았다. 눈처럼 희고 빳빳한 동정과 주름 하나없이 반듯하게 붙은 깃과 앞섶, 자를 대고 그은듯이 곧바른 등솔기와 그아래로 휘우듬이 돌아간 도련, 일매진 바늘뜸… 나무랄데 없는 솜씨였다.

그 옷을 짓는데 어순이가 바느질재간이나 정성만을 바친것이 아니라는것을 하나에는 알고있었다.

이역땅에 살고있어도 조선녀성의 밝은 모습을 고이 지켜가려는 그 뜨거운 열망과 고향 그리운 마음을 깡그리 바친것이였다. 아닌게아니라 어순이에게 있어서 그 옷은 단순히 몸을 가리워주는 천쪼각이 아니였다. 외로운 마음을 덥혀주고 감싸주는 말없는 동무였고 그리운 고향과 고향사람들의 정을 언제나 몸가까이 느끼게 하는 마음의 의지이기도 하였다. 그랬기때문에 그 치마저고리가 아무리 낡고 해져도 깁고 다리여 언제나 깨끗이 하여 입은것이였고 지금도 고향 그리운 마음을 깡그리 쏟아부어 그 옷을 지은것이였다.

《아유, 곱기도 해라. 녀자의 마음은 바느질에 내비친다는데… 어순이 솜씨가 정말 대단하우. 내 옷도 좀 지어주겠나?》

하나에가 기뻐하자 어순이의 얼굴에도 활짝 웃음이 피여났다.

《그러세요. 일본옷 지을줄은 잘 모르지만…》

《아니, 나도 조선옷을 해입겠어. 얼마나 맵시있는 옷이우. 이 옷을 입으면 마음까지 예뻐질것 같다니까…》

두 녀인은 마주보며 밝게 웃었다.…

어순이가 새 무명치마저고리를 해입은지 이틀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상판이 설익은 말고기처럼 벌거죽죽한 집사라는자가 능글능글 웃으며 부엌에 나타났다. 어순이에게 지분거려볼 기회만 노리고있는자였다.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게슴츠레한 눈길로 어순의 옷모양부터 살펴보고있었다.

《흐흐흐… 어순이나 새옷이나 해입었는가? 나까나까 기레이네. (정말 곱구나)》

변변치 않게 하는 조선말을 왜말에 섞어서 번져보는 꼴이였다. 온몸을 샅샅이 훑어보는듯 한 집사의 징그러운 눈길을 느낀 어순이는 그만 소름이 끼치는듯 하여 등을 돌리고 돌아서버리였다.

《흐흐흐… 그런데 참 안되였다. 조선옷이나 입지 말라는 도노사마의 분부가 내렸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조선녀자가 조선옷을 입는것이 어쨌다구 그러나요?》

하나에가 너무도 어이없어서 대신 나서며 대꾸를 하였다.

《네년은 닥치고있어. 일본옷으로 갈아입으라는 분부이시다. 이집 울타리안에서는 그 옷을 못 입는다는것이다. 알겠는가?》

어순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홱 돌리며 쏘아붙였다.

《왜옷을 입으라는건가요?》

《그래, 일본옷이나 좋은것이다.》

《나는 조선옷이 더 좋아요. 몸에도 맞구…》

《뭣이? 말이나 듣지 않겠는가?》

《그런 말은 안들어요.》

《요씨, 그럼 내가 벗겨줄테다.》

집사가 두팔을 걷어붙이며 다가들었다.

지꿎은 장난거리가 생긴것을 기꺼워하는듯 그자의 시뻘건 얼굴에는 징그러운 웃음이 떠돌았다.

집사는 탐스럽게 부푼 처녀의 가슴이며 동실한 어깨며 날씬한 허리노리를 감싸고있는 옷을 마구잡이로 벗겨내칠 잡도리를 하고 한걸음 한걸음 다가들었다.

《아니, 어쩌자구 이래요?》

옆에서 보고있던 하나에가 당황하여 소리를 질렀다.
《쿠소! 네년은 참견말구 물러가라!》

집사는 하나에를 문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아버렸다. 어순이는 달려드는 집사를 피하여 뒤걸음질쳤다.

부뚜막이 막혀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게 되였을 때 뒤로 뻗친 손에 문뜩 칼도마의 식칼이 닿았다. 어순이는 엉겁결에 그 식칼을 거머쥐였다.

집사의 갈퀴같은 손이 저고리고름을 움켜잡으려고 할 때 어순이는 식칼을 불쑥 내들며 소리를 질렀다.

《다가서지 말라!》

집사는 《악!》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물러섰다.

불길이 펄펄 이는듯 한 어순의 눈과 식칼만 번갈아볼뿐 얼어붙은듯이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였다.

《이게 무슨짓이우?》

우마무라와 하나에가 급히 뛰여들어왔다.

집사가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우마무라! 저 지독한년의 옷을 벗겨라!》

《처녀의 옷은 왜 벗긴단 말이우? 급히 알릴 말이 있으니 저리 좀 나갑시다.》

우마무라는 상사말처럼 날뛰는 집사를 이끌고 문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기자 어순의 손에서 식칼이 덜렁 떨어졌다.

어순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하나에의 가슴에 쓰러졌다.

이런 일이 있은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 우마무라는 남몰래 어순이에게 거의 한뽐가량되는 장도칼 한자루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을랑 몸에 지니구있소. 그러면 마음이 한결 든든해지구 무서움도 덜해질거요. 내가 만든거요.》

까만 옻칠을 한 고운 칼집이며 은테를 두른 칼자루며 날이 퍼렇게 선 칼몸에서는 어순이를 지켜주려고 끔찍이도 애를 태우는 그의 고마운 정성이 그대로 어리여있었다.

《고마와요, 정말 고마와요.》

어순이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장도칼을 받아들었다. 순간 그의 가슴속에서는 왜놈들의 그악한 행패속에서 자기를 깨끗이 지키는 길은 오직 목숨을 끊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무섭게 소용돌이치고있었다.

그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처절히 예감해온 생각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 생각은 어차피 닥쳐오고야말 최후에 대한 순결한 희망으로 되고말았다. 그 희망을 이루지 못할가 겁을 낸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장도칼을 가졌으니 그것을 겁낼것이 없게 되였다.

어순이는 싸늘한 빛이 감도는 파란 칼날을 들여다보며 오래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하나에는 남편에게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안룡복이와 박어둔이를 호송해가지고 조선으로 갔던 다찌바나차사가 돌아왔는데 도주에게 하는 말을 들으니 박어둔이는 죽은 몸이 되고 안룡복이는 동래옥에 갇혀있다는것이였다. 그런데 도주는 안룡복이마저 죽여없애라는 분부를 주어서 차사를 다시 조선으로 보냈다는것이였다. 안룡복의 신변이 걱정되기도 하였지만 어순이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놀라고 괴로와할것인가 하고 생각하니 좀처럼 마음을 종잡을수가 없었다.

차라리 어순이에게는 알리지 않는것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녀자들의 마음이란 그런것이 아니였다.
자기도 남편의 소식을 몰랐을 때에는 얼마나 가슴을 태웠던가. 아무리 험한 소식이라도 모르는것보다 알고 견디는것이 나은것이였다.

하나에는 며칠간 바재이다가 끝내 어순이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어순이의 낯빛이 너무도 하얗게 질리고 무서울 정도로 피기가 가셔지는것을 보자 그는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즈음 어순의 태도에서 이상스러운 느낌을 자주 받군 하던 하나에였다. 안룡복이와 박어둔이가 조선으로 실려간 다음부터 왜인들의 행패가 나날이 심해갈수록 어순의 눈빛에서는 외로움의 고통뿐아니라 자기를 깨끗이 지켜내려는 필사적인 고민과 몸서리치게 싸늘한 그 어떤 무서운 결심이 번뜩이는것을 그는 자주 보았던것이다.

그러한 어순이가 이 무서운 소식을 전해들었으니 과연 어떻게 그 고통을 참을는지… 아니, 어떤 모진 마음을 먹을는지… 하나에는 그 소식을 알려준것을 저으기 후회하면서 어떻게하나 어순의 마음을 다른데로 돌려보려고 애를 썼다.

《어순이, 마음을 크게 먹소. 죽을수가 나지면 살수도 나진다질 않소? 글쎄… 녀자들이 마음 썩이는것을 누가 알아주겠나. 앉으나 서나 늘 걱정뿐이지. 나도 우리 주인이 잘못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밤낮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니까…》

하나에는 까맣게 물들인 이발을 반짝이며 애써 웃어보이였다.

어순이는 아무말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들고 멀리 담장너머로 아득히 펼쳐진 북쪽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마음을 든든히 먹구 기다리우. 안상은 그렇게 잘못될 사람이 아니야.》

하나에는 험하게 터갈라진 손바닥으로 어순의 손등을 쓸어만지였다.

《안상같이 인정깊은 사람은 잘못되지 않으니 념려말라구. 하늘이 살펴주어 무사할테니까…》

문밖에서 을씨년스러운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먼 하늘가에 뽀얗게 바람꽃이 피여나고 창문들이 불안하게 덜커덩거렸다. 한산한 부엌방에서 어순이를 혼자 남겨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던지 그날 저녁 하나에는 어순이와 함께 자면서 말동무를 해주었다.

《가슴을 허비는 생각은 그만하구 내가 살아온 이야기나 좀 들어보라구. 우리 주인이 나를 어떻게 홀려냈는지 아나? 참, 기막힌 일이지…》

주름살이 얼기설기 건너간 하나에의 얼굴에 알릴듯말듯 웃음이 떠올랐다.

도주의 집 부엌에서 늙어온 고달픈 그의 인생에도 아름다운 한줄기의 추억은 남아있는 모양이였다.

《우리 쯔시마에서는 녀자가 나이차면 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이 있는데 그걸 〈가네〉라고 한다오. 나는 17살나던 해에 동갑또래들과 함께 이를 물들이고 절에 가서 중의 념불을 들었어. 말하자면 어른이 되였다는 뜻이였지. 나는 그때 한마을에 사는 어떤 배사공 젊은이를 남몰래 마음에 두고있었는데 그 젊은이도 나를 좋아하는 눈치였어. 하지만 서로 이름도 몰랐지. 그날이 바로 칠월칠석 하루 전날이였다우. 어순이, 내 말을 듣소?》

하나에는 곁에 누운 어순이를 돌아보았다. 어순이는 컴컴한 천정 한끝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나직이 대답하였다.

《들어요. 계속하세요.》

하나에는 한숨을 쉬고나서 계속하였다.

《칠석 전날 저녁에 칠석제를 드리는데 저마다 자기 소원을 색천에다 써서 제단에 세운 대나무에 매달았다가 칠석날 아침에 강물에 띄워보낸다우. 그 대나무가 바다로 떠가서 은하수에 닿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거요. 나는 남몰래 마음드는 총각에게 시집가게 해달라고 써서 달아두었다가 칠석날 아침에 강물에 띄워보냈지. 그날 사람들은 모두 강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고 옷을 헹구고 소와 말에 물을 끼얹고 우물을 가셔내면서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다린다우. 그런데 그날은 비가 한방울도 내리지 않았소. 칠석날 비가 내리지 않았으니 역병이 생길것이라고 모두들 걱정하는데 나는 역병도 걱정이지만 강물에 띄워보낸 대나무가 은하수에 가닿지 못할가 걱정이 되더라니까… 그래서 그날밤 남몰래 집뒤곁에 서있는 늙은 유자나무아래 엎드려 칠석님께 빌었지.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구… 한창 정신없이 비는데 먼 하늘우에서 어떤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겠나.

참,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려온다니까…》

하나에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어순이쪽을 돌아다보았다. 어순이는 여전히 숨소리를 죽이고 천정 한끝을 바라보고있었다. 하나에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말인즉 〈너는 우마무라에게 시집가거라!〉 이런단 말이우. 그런 말소리가 세번 들렸어. 나는 그만 눈앞이 캄캄해지더구만. 칠석님이 끝내 내 소원을 듣지 않고 딴 사람을 점지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나는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대답하였소. 〈분부대로 하겠소이다만 우마무라가 누군지 소녀는 모르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껄껄하는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겠나. 너무도 놀랍고 무서워서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무성한 유자나무잎사이로 은하수만 우렷이 떠올랐지. 칠석님도 참 야속하구나. 점잖지도 못하구… 이렇게 생각하고있는데 또 말소리가 들렸어.

〈지난 소정월(정월보름)날 새쫓기를 하다가 담모퉁이에서 마주친 사람이 생각나느냐?〉

〈예, 생각나옵니다.〉

나는 얼른 대답하였어. 그게 바로 내가 마음에 두고있던 총각이였거든.

〈그 사람한테 시집을 가라는것이니 어떠하냐?〉

〈예, 칠석님 분부대로 하겠소이다. 소원을 들어주시니 정말 고맙소이다. 정말 고맙소이다!〉

나는 너무도 기뻐서 무릎을 꿇고앉아서 자꾸 절만 했지. 그런데 이때 머리맡에서 쿵! 하고 무엇이 떨어지지 않겠나. 내가 악!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려는데 하늘에서 떨어진 시꺼먼 그림자가 내 허리를 꼭 껴안으며 껄껄 너털웃음을… 아유, 지금 생각해도 간이 막 떨어지는것 같소.》

저도 모르게 이야기에 끌려들었던 어순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앉으며 물었다.

《그게 누구였어요?》

《누군 누구겠소? 우리 주인이였지. 글쎄 나를 놀려주느라구 유자나무우에 웅크리고 앉아있었지.》

하나에는 눈가에 주름살을 지으며 웃음어린 눈길로 어순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걸 왜 몰라봤어요? 목소리라두…》

《글쎄, 빈 단지를 입에 대구 귀신의 목소리를 흉내냈으니 깜빡 속을밖에… 사내들이란 다 그렇게 엉큼하구 내숭스럽다우. 이제 안상도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어순이를 데리고 갈것이니 걱정마우.》

어순이는 새벽녘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치락거리였다. 그러다가 동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올무렵에 밖으로 나왔다. 밤새 미친듯 불어대던 바람은 멎었으나 애처롭게 흩날려 떨어진 꽃잎이 하얗게 널린 후원뜰에는 사나운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처참한 흔적이 뚜렷하였다.

문득 후원 담장밑에 웅크리고 앉은 신당안에서 새여나오는 불그레한 불빛이 보이였다. 도주가 또 기도를 드리는 모양이였다. 죄없는 사람을 죽여없애라고 했다는 저 구렝이처럼 징그러운 살인마, 병들어 시든 몸을 이끌고 새벽마다 신당안에 엎드려 대체 무엇을 빌고있을가? 기도를 드리는 도주의 무서운 모습을 한번 본 다음부터는 너무도 징그러워서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기조차 저어하던 어순이였으나 룡이 오빠를 죽이려는 모략을 꾸민 장본인이 바로 도주라는것을 알게 된 지금은 그의 행동을 하나도 심상하게 넘겨버릴수가 없었다.

어순이는 발볌발볌 신당쪽으로 다가갔다. 신당안에서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려나왔다. 왜말에 퍼그나 익숙한 때여서 말뜻을 대강 짐작할수 있었는데 울릉도를 쯔시마의 차지가 되게 해달라고 여러 천신과 조상신에게 비는것이였다.

(아니, 저놈이?)

어순이는 온몸이 무섭게 떨려왔다. 그러니 저 도주놈이 몇해째 이 신당안에 엎드려 울릉도를 차지하게 해달라고 빌고있는것이였다. 한 울타리안에 있으면서도 나는 그것도 모르고 무엇을 했을가.

어순이는 가슴에 품은 장도칼을 꼭 거머쥐고 몸을 떨다가 부엌으로 급히 뛰여들어왔다.

널뛰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곰곰히 생각을 더듬어보았다. 도주놈이 저렇게 피를 물고 애를 쓰는것을 보면 놈들이 아직도 그 흉악한 뜻을 이루지 못한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룡이 오빠는 여전히 굴하지 않고 무사히 건재해있다는것이 아닌가!

어순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부엌문밖으로 멀리 펼쳐진 북쪽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열렬히 부르짖었다.

(룡이 오빠, 부디 굴하지 마세요. 그리고 내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세요. 어순이도 한몸을 굳건히 지켜나갈 길을 알고있어요.)

문밖에서는 철이 지난 꽃잎이 여전히 무너지듯 흩날려 떨어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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