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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왜 다찌바나 신죠는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방안에서 조급히 맴돌며 이를 갈았다.
모든 일이 뒤틀려질것 같은 무서운 예감때문에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해지였다. 다 요시라라는 그 변변치 못한 놈때문이였다. 빈것이나 다름없는 옥안에 갇혀있는 놈을 요정내지 못하고 도리여 쫓겨나오다니…
안룡복을 요정내지 못하고 쫓겨나온 요시라의 그 미욱한 상판을 메주덩이처럼 짓이겨주고싶었다. 만약 안룡복이가 새로 온 접위관에게 사건의 진상을 다 밝혀놓은 뒤라면 도주의 요구대로 례조의 복서를 고쳐서 받기는 고사하고 이제껏 외기둥우에 집짓듯해오던 일이 터진 꽈리신세가 되고마는것이다.
그런데 그사이에 조선의 조정이 뒤바뀌운데다가 뢰물로 삶아놓은 동래부사가 좌천되여가고 접위관 홍중하대신 유집일이란 사람이 내려왔다고 하니 벌써 일이 외로 비틀어지고있는 판인데 죽여없애려고 했던 안룡복이까지 시퍼렇게 살아남았으니 모든 징조가 불길하였다.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관복을 차려입고 왜관왜인 한사람을 뒤딸려가지고 동래로 향하였다.
초량에서 동래까지 20리남짓한 길을 어떻게 왔는지 알수 없었다. 어느새 황령산고개를 넘고 범어천다리를 건넜는지… 수염빠진 바퀴처럼 걸음걸이도 허둥거렸다.
동래성 남문을 들어설 때 문루우를 쳐다보니 붉고푸른색으로 단청을 입힌 두공들이 마치나 저를 삼키려고 날름거리는 룡의 혀바닥처럼 무섭게 보이였다. 주칠을 하여 붉은빛으로 번쩍거리는 문루의 배부른 기둥, 날아갈듯이 썩 쳐들린 처마, 처마끝에서 번쩍거리는 귀면을 부각한 막새, 그 막새마다에서 무서운 눈을 뚝 부릅뜨고 내려다보는 귀면들…
오늘따라 이 모든것들이 자기를 당장 깔아뭉갤듯이 위엄차보이고 기운차보이고 서슬푸르러보이였다. 정교하게 쌓은 홍예문을 지나 들어갈 때 그것이 왈칵 머리우에 쏟아져내릴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황급히 줄달음을 치기까지 하였다.
뒤따라오던 왜인이 천둥소리에 놀라 뛰는 개를 바라보는듯 한 눈길로 자기를 바라볼 때에야 그는 얼마간 정신을 차렸는데 정신을 차리고보니 시중드는자가 이상한 눈길로 자기를 바라보는것이 보이였다. 첫 순간에는 부끄러웠고 다음순간에는 악에 받치였고 조금 지나자 저놈의 모가지를 칼로 탁 쳐버릴가부다 하는 무분별한, 그러나 누를길 없는 잔인한 욕망이 가슴속에서 부직부직 괴여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의 변덕에 지나지 않았다. 동래관아가 마주 보이자 마음은 다시 불안해지고 초조해졌다.
문득 어디선가 우뢰소리같은 말소리가 들려오는듯 하였다.
《이놈아,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우지 못한다!》
쯔시마에서 압송하여올 때 안룡복이가 배우에서 자기를 보고 피타게 부르짖던 의미심장한 말이였다.
그 말이 우뢰소리처럼 귀전에 들려와서 잠을 자다가 놀라 깬적도 여러번이였다. 그 말이 들려올 때마다 마음은 바람앞에 선 초불처럼 불안해지고 다섯척도 되나마나한 자기의 보잘것없는 몸뚱이가 더러운 먼지처럼 이 세상밖으로 날려가는듯 한 무서운 환각에 사로잡히군 하였다.
삼문을 지나 동헌에 이르렀을 때 부사와 접위관이 쯔시마차사를 접대하는 례절에 따라 정중히 맞아주었건만 그는 무어라 말할수 없는 위압감때문에 몸가짐조차 바로할수가 없었다. 안룡복이로 하여 한번 뒤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간단한 접대의 격식이 끝난 후 유집일은 례조의 두번째 회답편지를 다찌바나에게 정중히 전달하였다.
다찌바나는 례조의 복서를 받아들고 서둘러 읽어보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 강원도 울진현에 부속섬이 있어서 울릉도라고 한다. 멀리 동쪽바다가운데 위치하여 풍파가 심하고 바다길이 불편하므로 그곳 백성들을 옮기여 그 섬을 일시 비워두었다가 때때로 공식관원을 파견하여 조사해보고있다.
이 섬은 산봉우리가 륙지로부터 똑똑히 보이며 그 산천과 지형과 백성들이 살던 자리, 토산물 등이 다 우리 나라 〈여지승람〉에 적혀있으니 력대로 전해온 사적이 명백하다. 이번에 우리 나라 어민들이 섬에 갔는데 귀주사람들이 제나름으로 국경을 침범하였다 하면서 도리여 우리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우리 나라 어민들이 고기를 잡던 곳은 울릉도로서 그곳에 대나무가 많기때문에 죽도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한 섬에 대한 두가지 이름일따름이다. 이 사실은 우리 나라 서적에도 기록되여있을뿐아니라 귀주의 사람들도 다 알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보낸 편지에서 죽도를 귀국의 지방이라 하면서 도리여 우리 나라 어민들의 출입을 금지시켜달라고 할뿐 귀주사람들이 우리 나라 지경에 침범하여 우리 어민들을 체포해간 잘못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론의하지 않고있으니 어찌 선의를 가지고 대하는것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깊이 요망하건대 이 사건을 강호(에도)에 전달보고하고 귀주의 변경 바다가사람들을 단속하여 다시는 울릉도에 출입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을것이다.》
읽기를 마친 다찌바나의 손에서 편지가 맥없이 미끄러떨어졌다.
(이 편지를 받아가는 날이면 나는 멸족의 화를 면치 못한다.)
그는 무릎우에 흘러내린 편지를 다시 집어들고 들여다보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제는 울릉도를 죽도라고 속여 회답편지를 받을 아무런 가망도 보이지 않았다. 첫번째 편지에서 《울릉》이라는 두 글자를 삭제해받으려다가 도리여 혹을 붙인셈이 되였다.
절망에 빠진 다찌바나는 머리를 세차게 가로흔들었다. 안룡복의 그 무서운 목소리가 다시금 우뢰소리처럼 들려오는듯 하였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우지 못한다!》
그 말 한마디가 이토록 자기의 넋을 불사르는듯 하는것은 거기에 담겨져있는 움직일수 없는 진실때문이라는것을 그는 어렴풋이 느끼였다. 아무리 작은 불티라도 그것은 광명인 까닭에 누리를 덮은 캄캄한 어둠도 순식간에 들부셔내는 힘을 가지고있는것이다.
그러한 광명의 불티가 이 나라에 있었다.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 불길에 증조할아버지가 타없어졌고 이제 자기도 타버릴지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찌바나는 이발을 사려물고 머리를 쳐들었다. 가느다란 메밀눈에서 파랗게 독기가 피여올랐다.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례절을 지켜 주고받는 편지에 〈간섭〉이니 〈체포〉니 하는 무례한 말이 들어있으니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바입니다. 이 말을 삭제하기 전에는 받을수 없으니 청컨대 첫번째 편지를 고쳐서 다시 받게 해주신다면 실로 다행으로 여기겠소이다.》
다찌바나는 례조의 복서를 무릎앞으로 슬그머니 밀어내놓았다.
이 모든것을 가증스럽게 쏘아보고있던 유집일의 얼굴에 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대가 한 나라의 국서를 마치 아이들 장난감처럼 여기며 이리저리 고치려들고있으니 어찌 가소롭지 않겠는가! 첫번에 보낸 답서를 고쳐달라고 청하기에 일부 잘못된 사실을 모두 바로잡아 답서를 다시 만들었으니 그대의 청에 대한 대답으로는 넉넉한줄 아오.》
다찌바나는 온몸을 와들와들 떨며 물어뜯으려는 말처럼 누런 이발을 드러내놓으며 대들기 시작하였다. 일본이 그 섬에서 고기잡이를 한것이 이미 오래전부터였는데 이제까지는 아무말도 없다가 갑자기 출입을 금지하라고 하는것은 무엇때문이며 례조의 첫번째 복서에서는 죽도를 일본의 지경이라고 했는데 왜 지금 와서는 조선의 지경이라고 하는가 등등 되지도 않은 《의문》을 꺼들어대면서 동서남북을 모르는 저자거리 아낙네들처럼 떠들어대기 시작하였다. 차사의 체면이나 외교상 례절같은것은 다 집어버린 파렴치한 수작이였다.
차왜의 해괴망칙한 수작을 지켜보고있던 유집일의 눈빛이 무섭게 번쩍거리였다.
《그대가 끝내 이렇게 분별없이 막되게 야료를 부릴 생각이라면 우리는 막부에 직접 글을 보내여 서계를 가진 우리 어부들에게 함부로 간섭한 사실과 동래옥에 자객까지 들여보내여 사람을 해치려 한 사실 등을 알릴수밖에 없소. 그리해도 좋겠는가?》
다찌바나는 갑자기 중풍맞은 사람처럼 사지를 떨며 입을 다물었다. 칼물고 뜀뛰는 자기의 발밑을 간신히 고여주던 마지막 벽돌장이 빠져나간것을 깨달은것이였다.
(내가 졌구나. 그 안룡복이라는자가 끝내 사실을 밝혀놓았으니 나는 그자에게 진셈이다!)
다찌바나는 갑자기 이마를 마루바닥에 조아리며 유집일의 턱밑으로 기여들기 시작하였다.
원래 무슨 일에서나 승산이 보이면 하늘높은줄 모르고 날뛰다가도 일단 약점만 잡히면 순식간에 굽어들어 갑삭거리는것이 섬 왜인들의 버릇이였다.
《접위관대인께서 널리 통촉해주시기 바랍니다. 도주의 분부를 받고 온 몸이니 다른 도리가 없소이다. 삼가 청하건대 첫번째 편지를 고쳐서 돌려주신다면 백골난망이겠소이다.》
유집일은 이 검질긴 작자를 하루빨리 제 소굴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이였다.
《그대의 가긍한 정상을 가히 짐작할만 하오. 그런데 만일 례조의 복서를 일단 받고 상선연(귀국하는 배에 오르기 전에 의례상 차려주는 송별연회.)까지 받는다면 내가 조정에 다시 상주하여 힘써보겠소. 어떠시오?》
상선연을 받으라는것은 어서 돌아가겠다는것을 약속하라는 뜻이였다. 하지만 다찌바나는 그런것은 따져볼 경황이 없었다.
《고맙소이다. 꼭 다시 상주하여주시기를 바랄뿐이옵니다.》
다찌바나는 세번네번 거듭 고개를 조아리면서 물러나왔다.
이튿날 그는 데리고온 왜인 몇몇과 함께 연향정에 가서 울며 겨자먹기로 상선연의 쓰디쓴 잔을 들고야말았다.
이제는 조선측과의 외교상접촉은 끝난셈이고 오직 돌아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이 기다리고있는 쯔시마로 그저 돌아갈수가 없었다.
접위관 유집일은 상선연을 마치자마자 자기의 소임을 다했다는듯이 서울로 가버리였으니 더는 만나볼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죽고 사는것이 결정지어질 때에 멍청히 앉아서 감떨어지기를 기다릴수도 없었다.
다찌바나는 매일같이 동래부사에게 편지를 써보내지 않으면 통사를 보내여 례조의 회답편지를 고쳐서 받게 해달라고 땅파기로 조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는사이에도 세월은 멈춤없이 흘러 여러달이 지났으나 차왜는 한본새로 검질기게 졸랐다. 그야말로 피를 물고 날뛰는 판이라 동래부사는 시끄럽고 성가신 그 시달림에 지칠 지경이 되였다.
이 딱하고 가증스러운 사정을 사흘이 멀다하게 조정에 보고하기도 하고 차왜가 보낸 편지의 등본을 올려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시끄러워서 차왜의 문건들을 아주 거절하여 받지도 하였다.
그랬더니 비변사와 승정원에서는 또 차왜의 문건을 등본하여 보내지 않고 자의로 거절하였다 하여 죄를 주겠다고 을러메였다.
명색이 도주의 차사인데 매로 쫓을수도 없고 말로 구슬려도 듣지를 않았다.
조정에서는 할수없이 역관 박재흥을 쯔시마에 보내여 차왜를 불러갈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닭을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놓기가 일쑤인 쯔시마도주가 과연 어떻게 대답하겠는지…
조일 두 나라사이의 중대한 외교적사건으로 일정에 오른 울릉도문제는 왜놈들의 검질긴 태도와 조정의 우유부단한 립장으로 하여 결속을 보지 못한채 무한정 시간만 끌고있었다.
울릉도문제가 이렇게 착잡하게 얽히여 해결을 보지 못하고있었던 이해(1696년) 봄, 2년나마 칼을 쓰고 옥에 갇혀있던 안룡복은 드디여 풀려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