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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스름한 달빛이 옥살창사이로 밝게 비쳐들고있었다. 보름을 갓 넘기여 한쪽허리가 약간 이지러진 달이건만 보름달 못지 않게 밝고 아름다왔다.
듬성듬성 풀이 돋은 마당이며 반나마 허물어진 돌담우에 달빛만 소리없이 내려앉고있었다.
가끔 지나가는 바람결에 나무잎새가 설렁거리는 소리가 가늘게 들리다가 사라지군 할뿐이였다.
헌 거적을 깔고 새우처럼 등을 꼬부리고 누워 고달픈 쪽잠에 든 리생원의 여윈 잔등으로 달빛은 천천히 옮겨가고있었다.
룡복은 깊은 생각에 잠겨 꼬부리고 누운 리생원쪽으로 눈길을 돌리였다. 불쌍한 늙은이, 집도 처자도 다 버리고 이 세상에 한을 품고 풍류방랑으로 보낸 20년세월… 맞은 눈비는 얼마이며 받은 천대와 멸시는 또 얼마였으랴.
세상을 통탄하며 풍류방랑의 길에서 허구많은 세월을 흘려보내는 동안에 다 삭아빠진 《생원》이라는 빈 허울만 남고 량반의 냄새같은것은 몸이나 마음에서 아주 자취를 감추고만 사람이였다.
어려서부터 이러한 리생원에게서 글도 익히고 세상리치를 깨우쳐왔기때문에 룡복은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았다.
아이적에 아버지가 하던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저 어른이 이름은 량반이라지만 량반체신같은것은 다 집어던진 어른이야. 우리같은 상놈들과 마주앉아 술상이면 술상, 바둑이면 바둑… 무슨 일이나 꺼림이 없구 가슴속에 원한이 맺힐수록 오히려 웃음으로 넘기는 어른이야.》
아버지가 사망된 후 룡복이가 철이 들면서 지내보니 정말 그러했다. 나날이 삐뚤어져가는 세상을 비웃기도 하고 통탄도 하면서 비분강개한 마음을 품고 살아온 리생원이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옥으로 끌려들어온 리생원의 기진한 모습을 보는 순간 룡복은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10년은 더 늙고 허약해진 늙은이를 본것이였다. 여러 십년동안 허물어져가는 마음을 간신히 지탱해주던 그 무엇을 잃어버린듯 허탈상태에 빠진 리생원이였다.
옥으로 끌려들어온 날 저녁, 리생원은 룡복을 보자 땅을 치며 통곡을 터뜨리였다.
《룡복이 이사람, 이 세상은 다된 세상일세, 다된 세상이야.…
아, 이 나라에 뜻있는 사람은 다 어디로 가고 피도 없고 얼도 없는 허수아비들만 남아서 나라를 왜도적에게 내맡기고있단 말인가. 이 나라는 텅 비였네, 텅 비였어. 어허이구!》
룡복은 넋을 잃고 울부짖는 리생원을 겨우 진정시키였다.
그제야 리생원은 쯔시마차왜가 다시 나타나고 왜도적두목인 요시라놈과 박충량의 집에서 도망쳤다던 왜놈들이 왜관담장을 넘어들어간 사실, 왜관수문지기에게 면박을 당하고 봉수대에 올라 불을 지폈다가 미친 놈으로 몰리여 잡혀온 경위를 낱낱이 이야기하였다.
《그래, 내가 미친 놈인가? 눈앞에서 날뛰는 왜도적을 못 본놈들이, 아니 보고도 못 본체 하는 놈들이 미친 놈인가? 임자가 어디 말좀 해보게.》
리생원은 맥없이 한숨을 내쉬였다.
《이제는 몸도 늙고 마음도 약해지고 힘도 없네. 저 간악한 왜놈들이 이 가슴에다 독침을 박구 피를 빨구 뼈를 갉아먹어도 소리 한마디 칠 기력이 없네.》
리생원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마땅히 주인노릇을 해야 할 명색이 량반관리란것들이 다 곯아빠졌으니 이 나라는 이젠 틀렸네. 주인없는 나라일세.》
긴 한숨을 내쉬고나서 더는 말할 기력도 없는지 그 자리에 누워버리였다.
량반벼슬아치들을 그토록 못미더워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기대를 걸어온 리생원이였던것이다. 그 기대가 허물어지고 이제 더는 바랄만 한데가 없다는것을 절감하자 리생원은 헤여날길 없는 허탈상태에 빠져버린것이였다.
《아!》
룡복은 머리를 싸쥐고 몸부림쳤다. 리생원이 저 지경이 된것도 다 자기탓인듯 마음이 괴로왔다. 막부의 서계를 그대로 가지고왔으면 부사나 접위관이 아무리 덜된자들이라 하더라도 감히 할 말이 없었을것이다.
그 서계를 증거로 삼아 울릉도를 차지하려던 왜놈들의 간사한짓도 짓부셔버릴수 있었을것이고 어순이를 구원할수도 있었을것이 아닌가.
룡복은 머리카락을 잡아뜯으며 백번천번도 더한 그 괴로운 생각속에 다시 잠겨버리였다.
실책은 두가지였다. 왜놈들이 서계를 써주고 순순히 물러갈 놈들이 아니라는것을 너무 뒤늦게야 깨달은것이 첫째 실책이고 그래도 제 나라에 와서 그동안의 억울한 사연을 밝히면 관가나 조정에서 일을 바로잡으려니 믿었던 그것이 둘째 실책이였다.
물어뜯기에 버릇된 원쑤를 잘못 본것이 원통한 일이였고 허수아비를 주인으로 믿은것이 더욱 분한 일이였다.
믿을것이 없었다. 오직 제힘을 믿고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룡복은 옥살창에 드리운 희미한 달빛을 내다보며 생각하였다.
하기는 내 한몸의 힘으로야 황소 한마리도 못 들지… 그렇지만 제 나라 땅을 귀중히 여길줄 아는 사람이 어찌 이 땅에 한둘뿐이랴. 울릉도를 지키려고 활과 화살을 만들고 창을 벼리던 그 미더운 사람들의 힘이야말로 얼마나 큰것이였던가.
룡복의 눈앞에는 문뜩 왜선에 활을 쏘아 불을 지르고 승리의 환성을 올리며 춤을 추던 사람들의 모습이 얼른거리였다. 그때에도 왜놈들은 그 사람들의 뭉친 힘에 눌리워 도망쳤던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울릉도를 지켜낼 힘은 그 힘밖에 없다! 옥에서 풀려나기만 하면 기어이 기울어진 일을 바로잡고 어순이도 찾아오자. 이번에는 실수 없으리라! 옳고그름도 가릴줄 모르는 저 사모쓴 량반들을 더는 믿지 않을것이고 구미여우같은 왜놈들의 간사한짓에 속지도 않을것이다.
다만 그때까지 어순이만 무사해주었으면… 어순이만 마음을 굳게 먹고 기다려주었으면…
어느덧 상념은 머나먼 쯔시마에로 나래쳐가고있었다.
어순이를 마지막으로 본것은 쯔시마에서 떠나기 이틀전이였다. 그날 마지막으로 약을 들고들어온 어순이는 쯔시마도주가 우리 나라에서 막부에 보내는 례물을 중간에서 잘라먹고있다는것을 알려준 후 여느때와 다름없이 앓아누운 어둔이와 룡복의 얼굴을 정겹게 바라보고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으로 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 다음날 새벽에 룡복이와 어둔이는 차왜의 배에 실려 부산으로 압송되였던것이다.
아, 어순이. 또다시 홀로 남게 된 어순이!
룡복은 옥살창으로 스며드는 달빛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절절히 불러보았다.
울릉도를 차지하려는 왜놈들의 흉계를 꺾는데 어떻게하나 힘을 보태보려고 쯔시마도주의 죄행을 낱낱이 탐문해서 알려주던 그 또릿하고 챙챙한 목소리가 지금도 귀가에 정답게 들려오는듯 하였다.
옥살창밖에서는 여전히 푸르스름한 달빛이 소리없이 쏟아져내리고있었다. 잡풀이 듬성듬성 돋은 옥마당과 돌담… 그 어디에서나 달빛과 달빛때문에 생긴 어스크레한 그늘이 깔려있었다. 그 그늘속에 무엇인가 웅크리고 앉아있는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보아서 그런지 컴컴한 담장 그늘밑에서 무엇인가 희슥희슥한것이 얼신거리는것 같았다.
잘못 본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뜨며 다시 살펴보았으나 분명 희슥희슥한것이 이쪽으로 발볌발볌 다가오고있었다. 녀인의 자태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으나 녀인의 자태는 사라지지 않았다. 담장 그늘밑에 가리웠던 녀인이 달빛이 밝은 마당쪽으로 나서자 쓸치마를 머리에 쓴 요염한 자태가 환히 드러났다.
녀인은 옥살창으로 소리없이 다가오고있었다.
(사람인가, 귀신인가?)
룡복은 얼른 살창에서 물러서며 누워있는 리생원을 조용히 흔들어깨웠다.
《생원님, 저것 좀 보시오.》
리생원이 눈을 비비며 룡복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니, 저게 웬 사람인가?》
두사람이 다 무슨 잡스러운 꿈에 빠진것 같아서 여러번 눈을 비비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녀인을 바라보았다.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고 그윽한 향내까지 풍기는것으로 보아 산 사람이 틀림없었다.
《웬 사람이요?》
룡복이가 나직이 소리를 지르자 녀인은 흠칫 놀라며 멈춰섰다. 옥안에서 내다보고있는줄은 몰랐던것 같았다.
《저… 말씀 좀 묻겠어요.》
녀인의 목소리가 떨리였다.
《여기에 안룡복이라는이가 계시는가요?》
《누구라구요?》
룡복은 너무 뜻밖이여서 되물었다.
《안룡복이라구…》
《그런데 그녁은 대체 뉘시우?》
《저…》
녀인은 사죄하듯이 빙그레 웃어보이였다.
《저… 이 고을에 사는 녀자옵니다. 그분에게 급히 알려드릴 일이 있어서 왔으니 좀 찾아주세요.》
《이 젊은이가 룡복인데 대체 무슨 일인가?》
리생원이 의아한 눈길로 녀인을 바라보며 대답하였다.
《아이, 그러세요?》
녀인은 반갑게 웃으며 살그머니 쓸치마를 벗었다. 옥같이 희고 아름다운 얼굴, 반회장노랑저고리와 불붙는듯 한 다홍치마…
《저… 밤중에 당돌하게 찾아왔다구 나무라지 마세요. 약간한 패물로 옥지기를 구슬리고 간신히 들어왔으니 긴 말을 여쭈지 못하겠어요.》
그 녀인은 목소리를 낮추면서 왜관에 다시 나타난 쯔시마차왜라는자가 졸개들에게 동래옥에 갇힌 안룡복을 죽여없애라고 하였다는 뜻밖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러니 부디 귀한 몸을 조심하세요. 소녀의 할 말은 이것뿐입니다.》
녀인은 품속에서 비단천으로 곱게 싼 자그마한 물건을 룡복의 손에 살그머니 쥐여주었다.
《단검이니 보신용으로 간직하세요.》
녀인의 눈기슭에서는 눈물같은것이 반짝이였다. 무엇인가 절절한 말을 더 하고싶어하는듯 하였다.
《그럼 부디… 장한 뜻을 꼭 이루어주세요.》
녀인은 눈굽을 훔치며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저… 잠간만, 나 좀 보시우.》
룡복은 급히 녀인을 불러세웠다.
《알려주어서 고맙소만 그 말을 어디서 들었소?》
《저의 동무의 오라버니가 왜관에서 통사노릇을 하는데 우연히 왜놈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답니다. 제발 천한 녀자의 말이라고 흘려듣지 마시고 몸을 조심하세요.》
《정말 고맙소. 덕분에 목숨을 구하게 되였으니 그녁은 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소. 대체 뉘시우?》
녀인은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없이 고개를 숙이였다. 동백기름으로 결태를 내여 뒤에 쪽진 탐스러운 머리봉, 달빛을 받아 령롱하게 빛나는 산호룡잠, 눈같이 흰 버선에 받쳐신은 꽃당혜, 얼굴과 손의 희맑은 살갗… 례사로운 려염집녀인같지 않았다.
《천한 녀자이니 굳이 묻지 마세요.》
녀인은 애원하듯 룡복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럴수가 있겠소. 이름자라두 알려주오.》
녀인은 잠시 주저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의 이름은 진향이예요.》
《진향이?》
《관청에 매인 몸이니 더는 묻지 마세요. 후날 보시더라도 천한 녀자라고 괄시하지 마세요.》
녀인은 마지막으로 빙긋 웃어보인 다음 쓸치마를 다시 쓰고 소리없이 돌담그늘밑으로 사라졌다.
(진향이, 진향이라구?)
처음 듣는 이름이였다. 대체 어떤 녀자일가?
룡복은 리생원을 바라보았다. 리생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창기가 분명하네. 우리 나라 복색법에 창기는 삼회장을 입을수 없고 옷소매는 협수(좁은 소매)에 배례의 곡선이 없으며 치마는 홍상(붉은 치마)을 하고 왼편으로만 여미게 되여있는데 그 녀인의 차림새가 바루 그렇지 않던가?》
《그런데 관가의 몸인 녀자가 무슨 일로 이 밤중에 옥중까지 찾아와 그런 소식을 알려줄가요?》
《글쎄, 그 리유는 아직 불문에 붙이는 수밖에 없네만 보검까지 남기고 간것으로 보아 분명 곡절이 있는 일일세.》
룡복이도 짚이는데가 없지 않았다.
차왜라는자가 막부의 서계사건을 영영 묻어버려야 하겠기에 그런 발악을 함직도 했다. 박어둔이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였으니 룡복이만 없애면 그 사건의 진상은 영영 비밀로 묻혀버리게 되는것이였다.
그러니 사건의 진실을 밝힐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룡복은 진향이가 주고간 단검을 으스러지게 거머쥐고 살창밖을 노려보았다.
그날 밤에는 별일이 없었다. 룡복은 그 다음날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지키였다. 흘러가는 검은구름뒤에 숨었던 달이 얼굴을 내밀 때마다 어둑컴컴하던 사방이 불을 켜놓은 방안처럼 환해지다가도 달이 구름뒤에 숨으면 사방은 다시 컴컴해지군 하였다.
자정도 훨씬 지났을 때였다. 반나마 허물어진 돌담우에서 무엇인가 시꺼먼것이 옥마당으로 훌쩍 날아떨어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없었다. 컴컴한 어둠속을 눈여겨 살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길을 돌리려는 찰나에 다시 시꺼먼 그림자가 박쥐처럼 옥살창앞으로 미끄러져와서 땅바닥에 찰싹 엎드리는것이 보이였다.
룡복은 어두운 구석쪽으로 몸을 숨기였다. 리생원의 코고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 엎드려있던 검은 그림자는 나는듯이 살창에 붙어서면서
소리없이 빗장을 뽑아내였다.
문이 열리였다.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숨소리처럼 씨근덕거리는 거친 숨소리, 희번뜩거리는 살기띤 눈빛, 손에 쥔 칼에서 비치는 시퍼런 섬광…
검은 그림자는 구석에 숨은 룡복은 보지 못하고 잠든 리생원쪽으로 다가서서 칼을 천천히 쳐들었다.
룡복은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이놈! 죄없는 사람을 해치지 말라. 내가 여기 있다!》
검은 그림자가 놀라서 《악!》 소리를 지르며 펄쩍 주저앉았다가 재빨리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때마침 구름속에 숨었던 달이 불쑥 얼굴을 내밀자 사방이 환해졌다. 그자의 얼굴이 똑똑히 보이였다.
물어뜯을것처럼 드러내놓은 누런 이발, 왼쪽볼로 가로 건너간 지렁이같은 칼자리상처.
룡복의 입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요시라 이놈! 네놈이였구나!》
요시라는 시퍼런 칼을 쳐들며 룡복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래, 내가 왔다. 전날에는 네놈이 운수가 좋아서 살아남았지만 오늘은 어김없이 황천구경을 하게 되였으니 참, 인생이라는게 알다가도 모를것이 아닌가!》
《개수작 말라!》
룡복은 비수를 힘껏 거머쥐고 마주다가섰다.
《네놈들이 어리석게도 나 하나를 해치면 죄행을 영영 묻어버릴것 같이 여기지만 어림도 없다! 이 나라 사람치고 네놈들의 죄행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바로 네놈이 어순이를 잡아간것을 내가 잊을수 있겠는가!》
룡복은 비수를 거머쥔 손을 쳐들었다.
바늘 한개 쥔것이 없으려니 했던 안룡복의 손에서 비수가 번쩍거리는것을 보자 요시라는 흠칫 놀라 뒤걸음을 치기 시작하였다.
이때 잠을 깬 리생원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 짐승같은 놈아! 여기가 어디라구…》
비록 목에 무거운 칼을 쓴 사람들이지만 두사람이나 앞뒤에서 조여들자 요시라는 승산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화닥닥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저놈 잡아라!》
《왜도적이다!》
룡복이와 리생원이 목에 걸린 칼을 안타깝게 잡아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어둠속에서 와르르 돌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였다. 그러더니 뒤이어 선잠을 깬 옥지기가 《도적이야!》하고 다급하게 내지르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옥안팎이 발칵 뒤집히여 술렁거리였다.
이튿날 아침, 신임부사가 이 소식을 듣고 성이 상투끝까지 치밀어서 펄펄 뛰였다. 부임한지 한달도 못되여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부임벽두부터 징조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것이였다.
더구나 전 부사가 잘못 처리한 일때문에 자기의 체면이 깎이는것이 더 분하였다.
조사를 마친 부사는 판관이하 륙방의 아전들까지 모두 데리고 사건현장을 돌아보고나서 형방아전을 개몰듯 몰아대였다. 허물어진 돌담을 다시 쌓고 파수를 물샐틈없이 세우며 죄가 분명치 않은자들을 가두어 공연히 백성들의 원망을 살것이 없으니 따져보아서 놓아줄것은 다 놓아주라고 분부하였다. 잘못된 일은 다 전 부사에게 밀어버리려는 속심이였다.
그바람에 리생원은 봉수에 불을 달려다가 잡힌 실성한 선비로 판명되여 며칠후 무사히 옥에서 풀려나오게 되였다.
룡복을 그냥 남겨둔채 홀로 옥에서 풀려나온 리생원은 나오자바람으로 청청개인 가을하늘을 쳐다보며 기막힌듯이 껄껄 웃었다. 잡힌것도 실성한 사람으로 인정되여 잡히고 놓여나기도 실성한 사람으로 치부되여 놓여나왔으니 그 《공명정대》한 정사를 웃지 않을수 없는 일이였다.
그럴뿐아니라 가을걷이할것이 하나도 없는 메마르고 맥빠진 이 세월을 또한 웃지 않을수 없었다. 수십년래의 큰 흉작이 헐벗은 들판, 메마른 밭등성이마다에 무겁게 드러누워있었다.
곡식값이 한창 떨어져야 할 가을에 벌써 쌀 한말값이 150냥으로 뛰여올랐다. 봄에 가서 그것이 200냥으로, 200냥에서 다시 250냥으로 천정을 모르고 뛰여오를판이였다.
굶주린 사람들이 벌써 사방으로 헤여져 나돌았다.
령남이나 호남, 호서가 흉년이 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기근이 심한것은 령남이였다. 해마다 령남지방의 쌀이 《공작미》라는 이름밑에 일본으로 수많이 실려가고있기때문이였다.
일본과의 공무역에 쓰이는 무명천 1 200동중에서 300동값은 쌀로 주기로 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공작미》라는것이였다. 그런데 이 공작미만 해도 해마다 1만 2 000여섬에 달하였다.
거기다가 해마다 40여척씩 오가며 머무르는 일본의 세견선(무역선)들에 식량으로 주는 쌀까지 합치면 매해 1만 9 500여섬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가고있었다.
이 막대한 쌀을 다 동래, 기장, 경주, 대구, 초계 등 경상도안의 17개 고을들에서 보장하였기때문에 풍년이 든 해에도 이 지방 백성들의 쌀뒤주는 언제나 비여있는 형편이였다. 그런데 흉년까지 들었으니 다른데보다 몇배나 무서운 기근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관가에서 춘궁기에 내여주는 쥐똥섞인 환자쌀도 얼마 안 가서 밑창이 나고 풀은 돋는 족족 모조리 뜯어먹고 나무껍질은 물이 오르는 족족 벗겨먹어서 사람뿐아니라 산과 들까지 누렇게 말라가고있었다.
룡복의 집형편도 말할수없이 어려웠다. 룡복이가 근 두해가까이 돌보지 못한탓에 그래도 오붓하던 삼간초가는 이영이 고삭아 주저앉고 벽이 떨어지고 울바자가 쓰러지고 삽짝이 떨어져 볼꼴없이 되였다. 쌀 한알, 땔나무 한가치 없는 부엌에서는 언제나 찬바람이 휘돌았다.
어머니 리씨가 아들에 대한 근심이 말미가 되여 앓아누워버리자 룡이는 매일같이 종다래끼를 끼고 바다가에 나가 조개와 미역따위를 주어오고 검불을 긁어다 끼니를 끓이면서 근근히 살아가고있었다.
옥에서 풀려나온 후 여러날째 어디론가 나가다니던 리생원이 어느날 두어되박 되나마나한 좁쌀을 구해가지고 들어와 룡이에게 주었다.
《어머님께 죽이라도 쑤어올려라. 그간 오래비소식은 없었느냐?》
《없었어요.》
룡이는 자기 모녀에게 짐이 될가보아 어디론가 나가다니며 말 못할 고생을 겪다가 돌아온것이 분명한 리생원의 축간 얼굴을 민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생원님, 시장하시겠는데…》
《내 걱정 말고 어서 어머님께 미음이나 쑤어드려라.》
리생원은 웃칸으로 올라가며 사이문을 닫았다.
룡이가 부엌으로 내려서는데 문밖에서 《계세요?》 하고 주인을 찾는 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룡이는 지게문을 빠끔히 열고 내다보았다. 말쑥하나 그리 색스럽지 않은 옷을 빠진데 없이 차려입은 낯선 녀인이 떨어진 삽짝옆에 서있었다.
《누굴 찾으세요?》
《저― 이 집이 안룡복이라는이네 집이냐?》
《그래요.》
《집에는 아무도 안계시느냐?》
《어머님이 앓아누웠어요. 나는 동생이구요.》
《그러냐?》
녀인의 얼굴에는 반가와하는 기색이 떠돌았다.
《내가 어머님께 여쭐 말씀이 있으니 좀 들어가도 되겠느냐?》
뒤울안 배나무에서 까치가 깍깍 울었다.
낯선 녀인이 룡이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리씨가 일어나앉으며 앞에 와 나부시 절을 하는 녀인을 살펴보았다. 나이는 스물네댓쯤 나보이고 살결이 희맑고 얼굴이 예쁘장한 미모의 녀인이였다.
《아드님 소식을 가지고 왔어요.》
《아니? 우리 룡복의 소식을?》
리씨는 앓던 사람같지 않게 무릎걸음으로 녀인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너무도 반가와서 낯선 녀인이 누구인지를 물을 겨를도 없었다.
목침을 베고 웃방에 누워 지친 몸을 쉬고있던 리생원도 귀가 번쩍 띄워서 아래방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저는 관가에 자주 드나드는 몸이여서 댁의 아드님이 문초를 받는것두 보았구 옥에 갇혀 지내는것도 보았어요. 몸은 무사하니 안심하세요.》
진향이는 그동안 자기가 보고들은것들을 리씨에게 차근차근 이야기하였다.
《정말 죄없이 잡혀온 숱한 〈죄인〉들을 보았지만 댁의 아드님처럼 떳떳하구 대바르구 기개높은분은 처음 보았어요. 도적의 소굴인 왜땅에 끌려가서도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고 왜놈 태수들과 당당히 맞서서 끝내 막부의 서계까지 받았다니 얼마나 큰 공을 세웠어요. 나라에서도 못한 일을 댁의 아드님이 홀몸으로 해냈으니 마땅히 영웅으로 떠받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저 량반관리들은 죄인으로 몰아 옥에 가두고 갖은 곤욕을 다 들씌우고있으니 얼마나 분한 일이예요. 량반벼슬아치들이 아무리 잘난체 해도 댁의 아드님의 발치에도 못 갈 위인들이라는걸 저는 똑똑히 보았어요. 그런 량반들의 시중을 들며 살아온것이 지금처럼 부끄럽게 생각된적은 없었어요.
천한 녀자의 몸이지만 나도 나라를 위해 떳떳한 일을 하구싶은 마음이 간절하구… 댁의 아드님같은분을 도와 무슨 일이든 하고싶기도 하구…》
그 어디에도 하소연할수 없던 마음의 진정을 쏟아놓은 진향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고있었다.
《그만 진정하게.》
리씨는 진향의 손을 잡고 다정히 어루만져주었다. 마음을 의지할데 없는 젊은 녀인의 피타는 몸부림을 리씨는 리해하고도 남았다.
《정말 고맙네. 내 아들이 변변치 못해두 소식이나마 전해주니 정말 고맙네.》
《그런 말씀 마세요. 댁의 아드님은 참말 장한 사람이라 할만 해요. 전장에 나가 피를 흘려야만 애국장부이겠나요. 모든걸 다 바쳐 도와드려야 하겠건만…》
《말만 들어두 고맙네. 나라에서도 모르다는것을 임자같은 아녀자가 어찌하겠소. 그래, 부모친척은 있나?》
리씨는 련민의 정이 가득어린 눈길로 진향이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원래 동래관가에 매여서 종이를 뜨는 지장이노릇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일곱살나던 해 좋은 종이를 내기로 유명했던 송광사라는 절에 지장이가 없다하여 아버지, 어머니와 그때 종이뜨는 일을 갓 배운 열여덟살난 오라비까지 다 끌어가고 저는 목청이 곱다하여 관청기생방에 넣어 훈련을 받게 해서 그만 생리별을 당했어요.》
《저런, 기막힌 일이라구야…》
《그후 저는 끝내 관기로 박히구 나이 스물이 넘도록 부모소식을 알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해인가 송광사에 심부름을 갔다온 통인아이가 하는 말이 아버지는 재물가마에 빠져 숨지고 어머니는 녀승방 불목한이노릇을 하다가 중으로 변색하고 다니던 왜놈한테 몸을 더럽힌후 목매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구하더군요.》
《쯧쯧… 그럼 오라버님은 살아계시겠구려.》
《살아있으면 나를 꼭 찾아오련만 벌써 스무해가 가깝도록 소식이 없는걸보면 분명 잘못되였어요. 하긴 찾아와도 제가 이름까지 바꾸었으니 알도리가 없을거예요.》
진향이가 옷고름으로 눈굽을 훔치고있는데 웃방문이 벌컥 열리며 리생원의 얼굴이 나타났다.
진향이가 급히 일어나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리생원이 만류하였다.
《길가던 손님이니 놀라지 말게. 말을 듣고보니 임자가 그날 밤 동래옥에 찾아와 룡복이를 만나고 간 녀인이 분명한데?》
《아니? 그걸 어찌 아세요?》
진향은 그제야 얼굴을 들어 리생원을 바라보는데 귀밑이 발그레 물들고있었다.
리생원의 얼굴에는 감개무량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도 그날 밤 옥에 갇힌 신세여서 임자를 보았네. 장하이! 비록 기안(기생의 명부)에 이름박힌 몸이나 의를 도와나서는 그 뜻은 실로 갸륵하네.》
리생원은 진향이가 왜놈들의 무서운 흉계를 미리 알려주어서 룡복이가 화를 면하게 된 사연을 리씨에게 이야기하고나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임자의 성씨를 어떻게 부르우?》
《이름은 진향이옵고 성은 석씨옵니다.》
순간 리생원의 얼굴에 기쁜빛이 확 피여올랐다. 래력도 그렇고 성씨도 그렇고 순천 송광사에서 만났던 뢰헌이와 인연이 있는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면 석경래라는 이름을 들은적이 있소?》
《예? 석경래라니요? 소녀의 오라버님의 이름이 경래였어요.》
《그렇거니… 허허허… 틀림없구나!》
리생원은 무릎을 절컥 치며 껄껄 웃었다.
《기뻐하게. 임자의 오라버니가 살아계시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내가 순천 송광사에 갔다가 그분한테서 신세를 많이 지었어. 승적에 올라 이름도 뢰헌이라 부르지만 상승(장사중)으로 배를 부리며 험한 일로 사시우.》
《정말이옵니까?》
《허허허… 정말 아니면…》
《아이구, 오라버님!》
진향은 두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였다. 뜻밖의 일을 당한 리씨도 눈물이 글썽해서 진향의 잔등을 어루만져주며 진심으로 위로하였다.
돌아갈 때 진향은 허리에 차고있던 큰 노리개 한삼작을 기어이 풀어놓고 갔다. 옥향갑, 옥나비, 은장도 이 세가지가 노리개 한삼작인데 그것을 쌀과 바꾸면 두세식구가 한동안 기근을 면할수가 있었다.
리생원은 멀리 사라져가는 진향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탄식하듯 혼자소리로 부르짖었다.
《〈충신은 출어고문이요 렬녀는 항다천첩이라〉―충신은 외로운 집안에서 많이 나고 의로운 녀자는 항상 천한 녀자들속에서 많이 생긴다는 말이 그른데가 없구나! 기생으로 호구를 하는 천한 녀인도 저렇듯 나라 위한 갸륵한 마음을 간직하고 사는것이 이 나라 백성의 어여쁜 습속이렸거든 아, 나라가 이 지경이 된것이 어찌 백성의 죄겠느냐!》
그 이튿날에도 뒤울안 배나무에서는 까치가 깍깍 울어예였다.
기근으로 생기를 잃은 이 강산에도 봄은 찾아오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