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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룡복이가 동료들과 함께 형틀에 매워 피를 흘리고있던 이 시각, 왕실과 조정은 과연 무엇을 하고있었는가.
왜적을 막아나서라는 력사의 경종은 이미 울리였건만 량반관리들은 울릉도가 어떤 섬인가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피비린 당쟁의 진탕에 뛰여들어 허우적거리였고 다홍치마 두른 녀인들의 끝없는 시앗싸움에 골머리를 앓고있는 왕실은 세월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갑술년(1694년) 봄에 잡혀들면서 왕실과 조정은 더욱 뒤숭숭해졌다.
처음에는 궁담안에서만 소리없이 술렁거리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점차 궁담밖으로 번지였다. 뒤숭숭한 소문과 억측과 수군거림은 궁녀들과 무수리들의 입을 거쳐 정승과 대신들의 안방으로 흘러들고 그것이 다시 남인, 서인으로 갈라져서 피의 암투를 벌리고있는 조정신하들의 귀에 들어갔다.
임금이 인현왕후의 시중을 들던 무수리 최씨를 총애한다는 소문이 나돌던 그때에 벌써 눈치빠른 서인들은 인현왕후를 잊지 못해하는 임금의 마음을 넘겨짚고 《민씨복위》(민씨를 다시 왕후로 삼으려는것)를 구실삼아 조정의 실권을 쥐고있는 남인들을 꺼꾸러뜨릴 은밀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항간에서는 별의별 소문이 다 떠돌았다. 그러한 소문중에서도 남인들의 간담을 제일 서늘하게 한것은 서울 잣골에 사는 점쟁이 림후라는자가 점을 쳐보고 한 말이였다.
《금성은 왕성하고 화성은 쇠미하다. 금성은 서에 속하고 화성은 남에 속하니 남인은 패하게 될것이요 서인은 뜻을 이루게 될것이다. 갑술년 4월에 남인이 패할것이니 지금이 바로 그때가 되였다.》
이 말을 들은 의금부 판사 류명현이 불에 덴듯이 놀랐다. 그도 남인이였던것이다. 남인 우의정 민암 등은 이 사실을 전해듣자 사건을 크게 만들어 서인을 무리로 쓰러뜨릴 계책을 꾸미고 의금부 판사 류명현, 지사 정유학, 동지사 목림일 등이 임금을 찾아가 참언을 류포시켜 민심을 동요케 한자들을 엄중히 다스려 사태를 수습하게 해달라고 상주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친림한 가운데 의금부에서 국청을 설치하고 잣골점쟁이 림후와 그를 사촉한 한중혁, 김춘택 등 서인들을 잡아다가 심문하는 소동을 벌리였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을 눌려보려던 남인들의 옅은 꾀가 드러나고 임금의 미움까지 사게 되여 대세는 남인들에게 더욱 불리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다가 임금이 대전별감을 세번씩이나 페비된 민씨의 집에 내보내여 정상을 살펴보게 하면서 민씨복위를 뚜렷이 찬성하는 방향으로 나가자 대세는 벌써 명백해졌다. 잣골점쟁이의 말은 뜬 소문이 아니라 기정사실로 되여가고있었다.
드디여 임금은 4월 초아흐레날, 비망기를 내려 민씨의 무죄를 밝히고 15일에는 가마를 보내서 민씨를 대궐로 맞아들이였다.
그리하여 페위된지 6년만에 민씨는 대궐로 다시 돌아와 왕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였다.
무수리 최씨를 독속에 넣어 죽이려던 간악한 장씨는 희빈의 자리에 도로 물러앉게 되고 장씨의 아비는 옥산부원군의 관직을 삭탈당하고 오래비 장희재는 제주도로 쫓겨갔다.
그런데 대궐안의 소동은 결코 이것으로 끝날수 없었다. 장희빈이라는 빨래줄에 발톱을 걸고앉아 조정을 쥐락펴락하던 남인관료들은 그 빨래줄이 끊어지자 하루아침에 허공중으로 흩어져나갈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것이다.
남인 우의정 민암은 서인을 몰아내려고 그토록 애를 썼으나 끝내 사약을 받고 쉰여덟의 아직 버리기 아까운 생명을 속절없이 날려보냈고 좌의정 목래선은 일흔여덟의 늙어 지친 몸을 끌고 먼 벽지로 류배가는 꼴을 당하고야말았으며 령의정 권대운을 비롯한 수십명의 남인관료들이 류배죄인으로 굴러떨어졌다. 한편 인현왕후의 복위와 함께 서인관료들이 다시 득세하여 정권을 쥐게 되였는데 《기사환국》때 좌의정에서 물러난 소론의 우두머리 남구만이 령의정으로, 박세채, 윤지완이 좌의정, 우의정으로 등용되였다.
이렇듯 기사년에 왕세자책봉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서인을 꺼꾸러뜨리고 정권을 쥐였던 남인들이 6년만에 다시 서인에게 깔려 넘어졌으니 이것을 력사에서는 《갑술옥사》라는 이름으로 전하고있다.
물론 초록은 동색이라고 남인이나 서인이나 다 같은 량반관료들로서 정치리념이나 정견이 다른것도 아니고 주의, 주장이 다른것도 아니였던것만큼 《갑술옥사》가 나라의 정치정세를 크게 변동시킬수 없었다는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리생원이 《갑술옥사》의 소식을 들은것은 이해 5월 중순도 훨씬 지나서였다. 대구감영에서 아전살이를 하는 어떤 사람이 친척의 제사보러 동래로 왔다가 그런 말을 펴놓고 간것이였다. 그런데 뒤이어 그 말이 사실임을 증명한듯이 경상좌수사 장우영이와 동래부사 리희룡이가 다 좌천되여나갔다.
정자나무그늘에 앉아 바둑이나 두고 시줄이나 고르며 한담으로 세월을 보내던 촌량반유생들이 모두 뒤숭숭해서 서울서 무슨 선전관행차라도 뜨지 않나하여 매일같이 목을 빼들고 량산, 밀양쪽으로 뻗은 먼지뽀얀 행길만 내다보고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라는 딸은 아니 오고 외통며느리만 온다더니 서울쪽에서는 별소식이 없고 오히려 부산 왜관쪽에서 뜻하지 않던 소식이 날아왔다. 몇달전에 자취를 감추었던 쯔시마차왜가 다시 나타났다는것이였다.
그사이 례조의 복서에서 《울릉》이라는 두 글자를 빼달라고 넉달동안이나 왜관에 버티고앉아서 갖은 간사한짓을 다하다가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한 그자는 차후행동을 모의하기 위하여 쯔시마로 가버렸던것이다.
그리하여 접위관 홍중하도 조정에 올라가 례조의 복서를 전달한 사실을 복명하였고 조정에서는 그것으로써 더는 말썽이 없으려니 믿고있었다.
그러나 차왜는 쯔시마도주로부터 기어이 《울릉》이라는 두 글자를 삭제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다시 부산에 나타났던것이다.
(차왜라… 룡복이와 어둔이를 끌어다 왜관토옥속에 가두고 감히 조정의 답서를 고쳐달라고 앙탈을 부리다가 돌아갔던 그 왜놈이 무슨 일로 다시 나타났을가?)
리생원은 낡은 삿갓을 깊숙이 숙여쓰고 깊은 시름에 잠겨 동래성문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답답한 가슴을 풀어보려고 문루로 천천히 올라갔다.
멀리 황령산, 화지산이 마주보이고 그 산을 굽이돌아 동남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범어천의 맑디맑은 물이 봄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거리였다. 그 범어천줄기를 따라 그냥 올라가면 신라 문무왕시절에 해동화엄종(불교의 한 종파)을 창시한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하는 단청 찬란한 범어사가 나지고 그 범어사 바로 뒤에 동래 진산인 금정산이 우뚝 솟아있었다.
지금도 파르스름한 봄안개속으로 멀리 보이는 금정산!
머나먼 태고적에 그 금정산우에 솟은 높이 세길이나 되는 바위우에 맑디맑은 우물이 있었는데 하늘에서 금빛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와 헤염을 치자 물빛은 황금빛으로 변하고 아무리 가물어도 우물은 마를줄 모르게 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우물을 《금정》이라 부르고 그 산을 금정산이라고 하였으며 하늘에서 《범어》가 내렸다고 하여 절간이름도 범어사요 개울이름도 범어천이 된것이다.
하지만 그 전설때문에 범어사가 삼남일대에는 물론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친것은 아니였다. 임진왜란때 승병의 본거지가 된 다음부터 사람들은 불경소리를 듣기 위해서라기보다 절간에 깃든 애국충정에 더욱 귀를 기울이면서 끊임없이 찾아왔던것이다.
리생원도 령남으로 오면 언제나 잊지 않고 금정산부터 찾아보군 하였다. 물론 임진왜란이 있은 때로부터 100년세월의 풍상이 흘러지나간 절간에서 의병들이 애국의 칼을 갈던 숫돌 한개, 싸움에로 부르는 창의문 한장 찾아볼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절간의 구석구석에서 대웅전앞 7층석탑의 이끼오른 옥개돌과 절간입구 왼쪽에 놓인 자그마한 하마석에서까지 그 뜻이 느껴졌으니 아, 애국충정이란 이런것이였던가!
세월이 흘러도 영원불멸하는 그런것이였던가!
리생원은 문루를 떠받들고 선 배부른 붉은 기둥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이 문루에도 애국의 피가 스며있었다.
임진년 4월 열사흩날, 불의에 달려든 왜적들에게 동래성이 함락되게 되자 부사 송상현이 바로 이 문루에 올라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던것이다. 그리고 그의 최후를 목격한 동래부의 김섬이라는 기생도 그자리에서 왜놈들과 꿋꿋이 맞서 싸우다가 최후를 마치였다.
그들의 갸륵한 애국충혼이 지금도 단청 찬란한 저 대들보와 두공 짬짬에 아름답게 서려있으려니… 아, 그 어디에 가보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길가에 나뒹구는 돌 하나에도 애국의 넋이 속속들이 스며 생동하는 이 나라, 하지만 주인없이 텅 빈 이 강산. 왜적은 아직도 무인지경처럼 싸다니고 뜻있는 사람은 모두 죄인으로 몰아 목에 칼을 씌워 내치는 이 통탄하지 않을수 없는 현실.
리생원은 후― 길게 한숨을 토하며 성문밖으로 뻗은 행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한창 바쁜 농사철이건만 길에는 사람이 그칠새 없었다. 하기는 진해, 밀양, 량산쪽에서 부산포나 해운포쪽으로 가려고 해도 다 이곳을 거쳐서 가게 되였으니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사람이 그칠수 없는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성문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오는 두 사나이가 보이였다.
그냥 지나갈줄 알았던 두 사나이가 문루앞에 서서 무엇인가 수군거리며 서성거리였다.
그 거동이며 차림새가 좀 이상스러웠다. 둘 다 머리에 쓴것은 없고 흰 수건으로 상투를 가리웠는데 수건속에 든 상투봉우리가 별로 커보이는데다가 희번떡거리는 눈찌며 이상한 행동거지가 리생원의 눈길을 끌었다. 문루쪽으로 마주선자를 보던 리생원은 (아니, 저놈이?) 하고 깜짝 놀랐다. 울산에서 도망친 백운산왜도적이였던것이다. 지난 가을 한양 륙의전앞에서 얼핏 본 그자였다. 그놈과 마주서있던 놈도 낯익은 왜놈이였다. 왜도적들에게 잡혀 백운산속에서 여러날 졸경을 치를 때 보니 제놈들끼리 《요시라사마.》(요시라님)라고 부르던 두목놈이였다. 지렁이처럼 시뻘건 칼자국이 가로 건너간 그놈의 흉악스러운 낯짝을 다시 보자 그놈들에게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던 그때의 일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아니, 저 왜도적놈들이 백주에 버젓이 싸다니다니…)
리생원은 너무 뜻밖의 일을 당하여서인지 저도 모르게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였다.
두 왜놈은 성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갑자기 부산진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리생원은 급히 문루에서 내려와 두놈의 뒤를 따랐다. 범어천나무다리를 건너 곧장 황령산고개길로 들어섰다. 산굽이 하나를 돌아서면 고개마루가 나질판인데 문득 앞서가던 두 왜놈이 보이지 않았다. 놈들을 놓칠가보아 도포자락을 활활 나붓기며 급히 산마루에 올라서니 뜻밖에도 두놈이 길옆 나무그늘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땀을 들이고있었다.
머뭇거리면 놈들이 이상스럽게 생각할수 있겠기에 리생원은 삿갓을 푹 숙여쓰고 그냥 옆을 스쳐지나갔다.
지나가면서 보니 요시라놈이 훌훌 내젓는 부채가 낯익었다.
(아니, 저 부채?)
순천 송광사에서 뢰헌스님이 어머니를 죽인 원쑤를 잊지 않으려고 간수하고있었던 왜인들의 부채면에 《부상국이 밭의 냉이라면 울릉도는 물에 뜬 부평초라네.》라는 글 한줄이 씌여있는 그 미심쩍은 부채. 수상한 부채까지 보고나자 리생원의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저 왜놈들이 무슨 쪼간이 있는 놈들이 분명하구나. 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가. 차왜놈이 다시 나타나자 저놈들도 나타났으니 서로 연줄이 있는게 틀림없구나!)
리생원은 길옆 풀숲에 몸을 숨겼다가 놈들이 지나가자 다시 먼 발치로 뒤를 따랐다.
어느덧 왜관울타리가 나타났다. 저놈들이 저안으로 들어가면 그만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는찰나에 두놈이 두릿두릿 사방을 살피더니 분명히 뒤를 따르는 리생원을 보았으련만 아무 꺼리낌없이 왜관울타리를 타고넘는것이였다.
그제야 리생원은 아차하고 무릎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저놈 잡아라, 왜도적이다!》
그러나 누구도 리생원의 다급한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두 왜놈은 어느새 왜관울타리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리생원은 헐떡거리며 왜관수문쪽으로 달리였다. 달려가보니 수문을 지키는 군사가 긴 창을 무릎사이에 세우고 앉아서 끄덕끄덕 졸고있었다.
《이눔아, 뭘하구 앉았느냐? 백주에 도적이 담을 넘는데…》
졸던 군사가 눈을 번쩍 뜨고 리생원을 흘끔 쳐다보더니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나서 《웨 그러우?》하고 물었다.
《웨 그러다니! 왜도적이 담을 넘어들어가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
《허허… 별 싱거운 늙은이가 다 있군…》
《뭐가 어째? 이눔 말버릇봐라.》
《말버릇이 어째서? 거기서는 어째 첫마디부터 이눔, 저눔 하우? 흥, 그 꼴에두 량반이랍시구… 퉤!》
수문을 지키던 군사는 리생원의 낡은 삿갓과 다 해진 도포자락을 아니꼬운듯이 흘겨보았다. 리생원은 분을 참지 못하여 발을 탕탕 구르며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이눔아, 그래 나라에서 내주는 료미만 받아먹구 대낮에 왜도적이 빈집드나들듯 하는데 본체만체 한단 말이냐? 세상에 불충무법도 분수가 있지…》
《흥, 료미를 내주기는 언제 내주었소? 집에서는 자식새끼들이 굶어서 얼굴에 호박꽃을 피우고 늘어졌는데 여기 나와 멍하니 서있는 눔이 못난 눔이지. 그렇게 잘 지키겠으면 거기서 한번 때식을 굶고 와서 파수를 서보시구려. 짐승같은 놈들을 사람이 무슨 수로 지킨단 말이요?》
《아니, 뭐가 어째?》
《글쎄, 아무리 도적이야 해두 들어줄 사람 하나 없으니 참견말구 어서 가던 길이나 마저 가시우.》
《허, 기막히구나!》
리생원은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였다.
《개문납적이라더니 과연 도적이 들라구 문을 열어놓는 처사로구나!》
리생원의 마음은 가랑잎에 불달린듯 하였다. 왜관담장안을 아무리 기웃거려보아야 닭쫓던 개 담장 쳐다보기지 별수가 없었다.
(허, 도적은 칼을 품고 눈앞에서 날뛰는데 누구 하나 아노라는 사람이 없으니 이게 변이 아니고 무엇이냐. 변이라두 큰 변이다.)
리생원은 당황함을 감출수 없어 사방을 두리번거리였으나 구원해줄만 한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 황령산봉화대에서 한가롭게 피여오르는 한줄기 가느다란 연기만 조으는듯 하늘로 천천히 퍼져오르고있었다.
(아니? 저 봉화대는 이런 변도 모르구 그저 무사태평이란 말이냐?)
리생원의 얼굴에는 말할수 없는 분노가 이글거리였다.
황령산봉화대는 동래관하의 남쪽 동평봉화대와 동쪽 간비오봉화대사이에 있는 봉화대로서 이 봉화의 신호에 따라 남해변방의 정세가 대구감영에 알려지고 그것이 다시 중로의 수많은 봉화대들을 거쳐 경기도 광주 천림산봉화대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서울로 전달되는것이였다.
봉화대에서 피여오르는 연기가 한줄기면 적정이 없어 무사태평이라는 뜻이요, 두줄기면 적정이 있다는 신호요, 세줄기면 적이 국경으로 쳐들어온다는 급보요, 네줄기면 적이 국경을 침범했다는것이요, 다섯줄기면 이미 싸움이 벌어졌다는것을 뜻하는것이였다.
(그래 왜도적이 백주에 칼을 품고 눈앞으로 싸다니는데 봉화대는 한가하게 무사태평만을 고하고있으니 8도의 감영, 병영이 다 졸고 조정도 졸고 임금도 졸고 나라는 주인없는 천지가 될수밖에… 에끼, 이 눈뜬 소경같은 놈들!)
리생원은 황령산봉화대를 향해 두주먹을 부르쥐고 달리였다. 처음에는 아무 작정도 없이 격분을 참을수 없어 달리기 시작하였지만 봉화대가 점점 가까와지자 한번 흥분하기 시작한 마음이 가랑잎에 불달린듯이 활활 타올랐다.
당장 봉수에 불을 지펴 이 변보를 온 거리에 알리고싶은 무분별에 가까운 충동에 사로잡히였다.
리생원은 가쁜숨을 몰아쉬면서 정신없이 달리였다.
(이 봉수군놈들아, 일이 났다. 일이 났어. 어서 봉수에 불을 지피지 못하겠느냐.)
늙은 몸이라 마음만 앞섰지 빨리 달릴수는 없고 길은 축나지 않는데 땀만 비오듯 철철 흘러내려 낡은 도포자락을 적시였다.
나무가지에 옷을 뜯기우고 얼굴을 할퀴우며 허둥지둥 봉화대에 이르니 번을 서는 봉수군들이 나무그늘에 네활개를 펴고 자빠져 코를 골며 자고있었다. 시큼털털한 탁배기냄새가 풍기는 빈 질항아리 한개가 머리맡에서 나뒹굴고있었다.
(에끼, 죽일 눔들같으니…)
리생원은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씻을 경황도 없이 답답하게 지척거리는 삿갓을 벗어 땅바닥에 탁 내던진 후 곧바로 봉수가마로 달려가 후둘후둘 떨리는 손으로 부시를 쳐서 불을 달았다. 수십년동안 잠자던 두번째 봉수가마가 드디여 연기를 토하며 숨을 쉬기 시작하였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하늘 한끝으로 높이높이 치솟아오르고있었다. 그 연기를 바라보는 리생원의 얼굴은 희열로 타번지였다.
아, 해동삼천리강역아! 어서 잠을 깨거라. 어서 눈을 뜨고 나라의 목줄을 물어뜯으려고 날뛰는 저 왜도적을 무찔러다우, 저 왜도적을…
리생원의 눈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장쾌하였다. 무엇인가 큰일을 해놓은듯 한 기분이였다.
땀에 젖고 나무가지에 갈기갈기 찢어진 도포자락이 이따금 부는 바람에 펄럭이였다.
이때 골아떨어졌던 봉수군 하나가 벌떡 일어나앉더니 눈을 화등잔같이 부릅뜨고 괴이하기 짝이 없는 리생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있었다.
맨 상투바람에 헌 도포를 걸치고 봉수를 바라보며 무엇이라고 념불외우듯 중얼거리며 울고있는 늙은 선비.
아니 저게 귀신인가, 사람인가? 벌겋게 피가 진 눈을 몇번이나 비비고 다시 보아도 틀림없는 사람인데 사람이라도 그저 사람이 아니고 꼭 실성한 사람이였다.
그런데 봉수가 두개 치솟는것을 본 봉수군은 불에 덴듯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거기 섰는 놈은 웬놈이냐?》
고함소리에 잠자던 다른 봉수군도 일어나고 리생원도 눈물을 거두고 돌아섰다.
《웬놈이 함부로 봉수에 불을 지폈느냐?》
《내가 지폈다. 적정이 있고 나라에 변이 닥쳤는데 백주에 술을 처먹고 자빠져있을법이 어디 있단 말이냐? 고현 놈들!》
리생원이 추상같이 호령했으나 두 봉수군은 놀라기는커녕 그저 수상쩍은 눈길로 바라볼뿐이였다.
《이 늙은이가 실성한게여. 변은 무슨 변이야. 간비오봉수가 잠잠 무소식인데…》
봉수군은 간비오봉수대쪽을 의아쩍게 바라보았다. 이 황령산봉수대는 간비오봉수를 받게 되여있으므로 간비오가 무사하다는 한줄기뿐인데 황령산에서 두줄기를 올릴 까닭이 없다는것이였다.
《이사람, 천득이, 큰 일이 나겠네. 어서 저 봉수를 끄게.》
뒤늦게 일어난 젊은 봉수군이 급히 뛰여가 리생원이 지핀 봉수를 끄기 시작하였다.
《이놈들, 그 봉수는 못끈다! 왜도적들이 득실거리는것을 못 보느냐?》
리생원이 소리를 질렀다.
《흥, 이 늙은이가 실성한게야. 왜도적이 어디 있소? 함부로 봉화를 올려 온 나라를 소란케 하면 늙은이 목이 붙어있을상싶소?》
《내 한목숨이 두렵겠느냐. 나라가 존망지추에 달하였는데 내 비록 일개 포의지사에 불과하나 어찌 이 판국을 보고만 있겠느냐. 너희들은 나라의 위급을 보고도 못 본체 하고있으니 벌써 죄인이로다.》
불이 펄펄 이는듯 한 눈으로 봉수군들을 노려보던 리생원은 꺼진 봉수를 다시 지피려고 덤비였다.
《여보, 늙은이. 가만있지 못하겠수?》
《일이 났는데 가만있으라니… 에끼, 이 죽일 놈들…》
리생원은 봉수군들을 손가락질하며 준절히 꾸짖었다.
《너희들이 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봉수군으로서 어찌 왜도적이 백주에 칼을 물고 싸다니는것을 못 본체 하느냐. 총포를 쏘아야 일인줄 아느냐? 손톱눈이 곪는줄은 알아도 염통 곪는줄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눈에는 띄우지 않지만 지금 나라는 염통이 곪는것이나 다를바없는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사태를 수수방관하면 장차 나라와 백성이 화를 입을터인데 너희들은 그것이 두렵지 않느냐. 내 봉수에 불을 지피고 잡혀가도 할 말이 있으니 너희들은 참견하지 말어라!》
리생원은 기어이 봉수에 불을 달려고 덤비였다.
당황해난 봉수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 천득이, 안되겠네. 저 미친 늙은이를 묶게!》
천득이라는 젊은 봉수군이 바줄을 집어들고 달려들었다.
《아니 이놈들아, 이게 무슨짓이냐?》
리생원이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을 쳤으나 끝내 바줄에 꽁꽁 묶이우는 신세가 되고말았다.
아무리 무서운 욕을 퍼부어도 두 봉수군은 미친 사람으로 치부하고 들은체 하지를 않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하다못하여 리생원쪽에서 스스로 맥을 놓고말았다.
그날 저녁. 리생원은 봉수군들에게 끌리워내려와 동래옥에 갇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