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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위관 홍중하가 가지고온 례조의 복서를 받은 차왜 다찌바나 신죠는 죽도가 일본의 지경이라고 한것이며 죽도에 갔던 어부들에게 죄를 지우고 다시는 그 섬에 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한것들이 다 바라던대로 되여서 매우 흡족하였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첫머리에 《우리 나라 울릉도》라는 글자가 눈에 띄웠다.
우리 나라 울릉도? 그러니 죽도는 너희 섬이지만 울릉도는 조선의 섬이라는 뜻이였다. 그런데 울릉도와 죽도는 하나의 섬이 아닌가.
만약 사실이 드러나면 이 문구가 큰 말썽이 되여 죽도를 차지하지 못하게 될수도 있었다. 무른 떡속에 가시가 박힌 셈인데 서뿔리 삼켰다가는 그 가시가 목에 걸릴수 있었다.
다찌바나는 오래 망설인 끝에 례조의 복서를 홍중하에게 돌려보내면서 《울릉》이라는 두자를 삭제하기전에는 받을수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홍중하도 쯔시마차왜쯤은 우습게 여기는 조정의 관리인지라 례조의 복서를 함부로 고칠수 없다고 끝끝내 뻗치였다.
그리하여 달포가 지나고 두달이 가까와오도록 일은 매듭을 짓지 못하고있을뿐아니라 언제 아퀴를 짓겠는지 알수 없는 형편이 되고말았다.
다찌바나는 생떼를 쓰며 기다리다못하여 그냥 받아가지고 돌아갈가 하는 생각도 가끔 해보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쯔시마를 떠나올 때 도주가 하던 말이 생각나서 몸서리를 치군 하였다.
《만일 일이 성사되여 울릉도가 쯔시마의 차지가 되면 너의 공로를 높이 쳐줄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도주는 여기서 말을 끊고 살기어린 눈길로 자기를 쏘아보았었다.
《너의 증조할아버지의 일을 잊지 않았을테지?》
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증조할아버지처럼 죽음을 면치 못할것이고 멸족의 화를 당하게 되리라는 암시였다.
도주의 이 말을 생각할 때마다 다찌바나는 물컥 풍겨오는 피비린내를 맡군 하였다.
이를 사려물고서라도 례조의 복서를 기어이 고쳐서 받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나 쯔시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목숨과 자기 가문을 위하여 피를 물고 날뛰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이였다.
미닫이문밖에서 관수왜(왜관의 우두머리 왜인)가 다급히 찾는 소리가 들렸다. 다찌바나는 흠칫 놀라며 성급히 미닫이를 드르륵 열었다.
《왜 그러는가?》
《큰일났소이다.》
관수왜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딱한 표정을 지었다.
《토옥속에 가둔 조선어부 한사람이 거의 죽어가고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상처가 곪다못해 거멓게 썩어가고있는데 아무리 목숨이 질긴놈이라두 오늘래일을 넘길것 같지 않소이다.》
(큰일났구나!)
다찌바나는 무딘 도끼등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듯 천정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자들이 왜관토옥속에서 죽으면 두 나라사이에 시끄러운 문제가 생길뿐아니라 그 책임은 호송을 맡은 자기가 홈빡 뒤집어쓰게 될것이다. 그렇다고 그자들을 서뿔리 내놓으면 막부장군의 서계를 빼앗은 사실이 드러나서 그렇지 않아도 될지말지한 일이 중도에서 아주 비틀어질수 있었다.
(그래도 별수가 없다. 내놓을수밖에… 하지만 그놈들이 나가서도 살아남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다찌바나의 가느다란 메밀눈에서 광기가 번뜩 하였다.
이튿날 그는 왜관왜인에게 뢰물짐을 들려가지고 동래부사를 다시 찾아갔다.
마침 혼자있는 부사 리희룡에게 공손히 절을 한 후 《약소하나마 소인의 성의로 알고 받아주시오.》하며 뢰물함을 두손으로 고여올리였다.
부사 리희룡은 그간 조정의 회답복서도 받지 않고 표표하게 나오던 차왜가 이렇듯 곰살궂게 소인을 고여올리며 뢰물까지 들고온것을 보자 어지간히 마음이 풀리였다.
리희룡은 천천히 수염을 내리쓸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성의를 보여 거듭 례물을 보내오니 감사하오. 어서 편히 앉으시오.》
다찌바나는 뢰물짐을 통인에게 넘겨주고 다시 무릎을 꿇고앉아 리희룡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표류해왔던 어부들을 속히 돌려보내달라고 여러번 훈도와 역관들을 보내신것으로 보아 관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부사대인의 어진 마음에 감동을 금할수 없었소이다. 하지만 어부 두사람중 한사람이 심히 앓아 몸을 움직일수 없는 지경이라 하옵기에 선듯 보내지 못하였으니 널리 통촉하여주시기 바랍니다.》
《허― 사정이 그러하였다면 누가 탓하겠소. 우리 어부들이 왜관에 오래동안 류치되여있다는 소문이 항간에 떠돌아 민심이 다소 흉흉해지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둘째치고 그 무지한것들이 이웃나라에 가서 갖은 행악을 다했다는 도주의 편지도 받은바 있기에 나라의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리려고 보내달라고 했을뿐이오.》
리희룡은 될수록 차왜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서로 좋게 지내는 이웃간의 의리를 귀중히 여기는 부사대인의 너그러움에 탄복할뿐입니다. 표류해왔던 어부들을 순순히 돌려보내는것은 이웃사이에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무지한 어부들이 죄를 면해보려고 거짓말을 능사로 하고 관원속이기를 식은죽먹듯이 하고있으니 부사대인께서 그 정상을 깊이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저희들이 우리 막부의 서계까지 받았던듯이 거짓말을 하고있으니 실로 아뢰이기 황송할뿐이옵니다.》
《아니, 막부의 서계를 받았다니! 그런 엄청난 거짓말로 이웃나라 관원을 속인단 말씀이오?》
《그렇소이다. 우리 나라 법으로 다스린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죄에 속합니다.》
《허― 불학무식한것들이 자작지얼도 분수가 있지. 막부의 서계라면 국서에 속하는데 제놈들이 언감생심 국서를 받들고오다니 어디 그럴법한 일인가?》
리희룡은 저으기 분기가 치밀어 반백이 된 수염을 후들후들 떨며 차왜를 내려다보았다.
《그대는 그것들이 앓는다고 사정을 두지 말고 전례에 따라 당장 보내주기를 바라오.》
《알겠소이다. 우리 나라의 법으로 다스린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줄 아옵니다.》
《여하간 죽이든 살리든 그것은 내가 알아서 조처할터이니 두말할것없이 속히 보내주오. 우리의 법에 따르더라도 범월죄인이니 죽음을 면할 도리가 없을것이오.》
《지당한 말씀입니다.》
다찌바나는 갑삭갑삭 머리를 조아리였다. 이쯤하면 설사 안룡복이가 열입을 모아 고해바쳐도 동래부사가 다 속이는 말로 들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다찌바나는 왜관으로 들어가자바람으로 관수왜에게 토옥속에 갇힌자들을 죽기 전에 동래부에 넘겨버리라고 분부하였다.
저녁녘에 동래부에서 형방아전이 사령 대여섯을 데리고 왜관수문에 와서 안룡복이와 박어둔이를 받아갔다.
의식을 잃은 어둔이를 들것에 담아든 사령놈들은 며칠씩 굶고왔는지 20리 되나마나한 길을 해질저녘까지도 채 대여내지를 못하여서 동래성문으로 들어설 때는 어느덧 캄캄 어두웠다. 동헌에 이르니 부사, 판관이하 6방관속이 다 퇴사를 한 뒤여서 형방아전은 《죄인》들을 끌고오던 길로 옥에 가두고 저도 집으로 가버리였다.
그날 밤을 내내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어둔이는 새벽녘에 이상하게도 정신이 맑아졌다.
《룡복아, 여기가 어디냐?》
어둔이가 조용히 물었다.
《동래옥이다.》
《동래?… 끝내 돌아왔구나.…》
어둔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였다.
《이젠 죽어두 제 나라, 제 고향에 묻히겠으니… 육실할… 마음놓구 죽겠다.…》
《쓸데없는 생각을 말구 조금만 견디여내게. 제발 이를 악물구 견디여내라구. 나를 따라나섰다가 이 지경이 되였으니 나를 탓하게. 나를…》
한동안 룡복의 얼굴을 바라보던 어둔이는 나직이 대답하였다.
《어찌 네탓이겠니? 다 왜놈들탓이지… 하지만 분한것은 왜놈들의 간사한짓에 속히운것이로구나. 나를 용서해다우. 내가 그만 그 육실할 놈의 술에 빠져서 하지 말아야 할 소리를 마구 지껄인탓에 서계를 빼앗기구 큰일을 그르쳤으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것이 가슴에 걸려 눈을 못 감겠구나. 다 내탓이야.…》
어둔이는 마음이 괴로운듯 눈을 감고 가쁜숨을 몰아쉬고있었다.
《그런게 아니니 마음을 놓게.》
룡복은 어둔이가 영영 눈을 감아버릴것 같아서 급히 대답을 하였다.
《그런게 아니라니까… 왜놈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서계를 빼앗았을거네. 그런 생각을 말라구.》
《아니… 날 위로하지 말게.》
어둔이는 다시 눈을 뜨고 허옇게 조갈이 든 입술을 힘겹게 움직이였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울릉도를 찾겠다구 나서는 너를 우습게 여겼다. 네나 내가 량반이기를 하냐 벼슬 한자리 하기를 하냐. 그저 한평생 칠성판을 지고다니는 배군인데다가 능로군의 천역을 지고 사는 상놈중의 상놈이지. 나라일을 생각할 놈은 따로 있는데 육실할… 우리가 대체 뭐냐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왜땅에 가서 왜놈들이 울릉도를 먹으려구 별별 간사한짓을 다 하는것을 겪고나니 생각이 달라지더구나. 우리 나라에는 어째 주인이 없을가. 왜놈들이 빈집 털어가듯이 덤비는데 나서는 놈이 하나 있나, 역성들어줄 놈이 하나 있나, 상놈이래두 우리같은 사람들이 나서지 않으면 이 나라는 무인지경이구 빈집 한가지로구나… 이런 생각도 들더란 말이다. 육실할… 제 동생 하나를 찾자구 허둥거리는 이 어둔이 놈보다 제 나라 섬을 지키자는 네가 옳더란 말이다. 알겠니? 네가 하는 일이 옳단 말이다.》
어둔의 눈귀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어순이도 네 마음을 꼭 알 때가 있을게다. 어순이를 위해서라두 울릉도를 기어이 지켜다우. 이게 내 마지막부탁이다! 죽어도 이 말만은 꼭 하자구 했다.…》
어둔이는 말을 마치자 가쁜숨을 몰아쉬며 맥없이 눈을 감았다.
그때 옥담장밖 누구네 집에선지 새벽닭이 우렁차게 우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가물가물 정신이 흐려가던 어둔이가 문득 감았던 눈을 뜨고 그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는듯 하더니 입속으로 중얼거리였다.
《아- 잘두 우는구나!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어째 주인이 없을가… 어째서…》
그러고는 맥없이 눈을 감아버렸다. 영영 뜨지 못할 눈을…
《어둔이, 눈을 뜨라구. 이게 웬일인가. 어둔이!》
룡복은 식어가는 어둔의 몸을 흔들며 통곡을 터뜨리였다…
한낮때가 거의 되여서야 어둔의 아버지 박지삼로인과 어머니 조씨가 어둔이가 옥사한 소식을 듣고 허둥허둥 달려왔다. 뒤미처 동네젊은이 하나가 빈 소달구지를 끌고왔는데 달구지뒤에 아기를 업은 어둔의 안해와 룡복의 어머니 리씨 그리고 그동안 룡복의 집에서 묵고있던 리생원이 따라왔다.
《어허이구, 이 사람 룡복이,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근 한해만에 돌아왔다는게 죽어왔으니… 이 어미가 가슴이 터져서 어찌 살겠나, 응? 어허이구 하늘두 무심하지…》
조씨가 허둥지둥 옥안으로 뛰여들어와 이미 굳어진 어둔의 가슴을 흔들며 통곡을 터뜨리였다.
어둔의 안해도 아기를 업은채 남편의 시체우에 엎어져 몸부림을 쳤다. 등에 업힌 백날을 겨우 넘긴듯 한 아기까지 잠에서 깨여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하였다.
옥안팎이 울음소리로 가득차고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는 슬픔과 설음이 소나기를 머금은 구름처럼 무겁게 서려돌았다.
(아!)
룡복은 두눈을 꼭 감고 주먹을 꽉 부르쥐며 이 가슴 찢어지는듯 한 광경을 더는 볼수 없어 머리를 돌리였다.
《이 사람 룡복이, 너무 상심말게.》
박지삼로인이 룡복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제 명이 모자라서 죽은것이니 어찌하는 수가 있나?》
룡복은 오열을 삼키며 부르짖었다.
《다 내탓입니다.》
박지삼은 긴 한숨을 내쉬였다.
《자네가 마음을 얼마나 썩였겠나. 우리 어둔이가 저 모양이 되는것이며 왜놈들이 하는 온갖 간사한짓을 자네가 다 당해보았을터이니 애간장인들 얼마나 탔겠나. 지금 내 가슴이 무너지는것 같네만 자네 가슴엔 숯만 남았을걸세.》
바다바람에 거멓게 그슬은 박지삼의 얼굴로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 반백이 된 수염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래, 우리 어순이는 어떻게 하고 왔나? 살아있기나 하던가?》
룡복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고향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도 풀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가슴무너지는듯 한 슬픔만 안고왔다는 무거운 자책감으로 머리를 들수가 없었다.
《어순이는 무사히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구원해내지는 못했지요.…》
《흠― 무사히 살아있다니… 더 바랄게 없지. 너무 상심말라구. 살아있다니 꼭 찾을 날이 있겠지…》
박지삼은 두 아낙네와 아기의 울음소리로 뒤덮인 아들의 시체곁으로 터벅터벅 다가가더니 갑자기 밑둥을 잘린듯이 그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돌덩이같은 주먹으로 땅바닥을 두드리였다.
《어허이구. 이 불효자식아, 이 늙은 아비어미를 남겨두고 어떻게 그 길을 먼저 간단 말이냐!》
참고참았던 설음이 돌사태처럼 늙은이의 가슴을 들부시며 무너져내리는것이였다.
룡복은 더는 볼수가 없어서 옥살창을 거머쥐며 돌아섰다.
살창밖에 어머니와 리생원이 말없이 서있었다.
《룡복아!》
리씨는 아들의 이름만 부르고는 아무 말도 더 잇지 못하였다. 차라리 무서운 질책을 퍼붓는다면 마음은 덜 괴로울것만 같았다.
리생원이 살창앞으로 다가왔다.
《이 사람, 그동안 옥중고초를 다 겪으며 얼마나 고생을 했나?》
《고생을 했으면 무엇합니까. 면목이 없소이다.》
《하기는 임자가 무슨 힘으루 그 간사한 왜놈들을 꺾어누르겠나. 지금 대마도에서 차왜가 건너와서 울릉도가 저의 나라 섬이니 조선어부들의 출입을 금지시켜달라구 조정에 서계를 올리면서 임자네들이 울릉도에 간 사실을 걸고들어 불법월경했다고 떠드는 모양일세.》
《불법월경이라니요?》
《적반하장(도적이 매를 든다는 뜻)일세. 조정에서는 교리 홍중하를 접위관으로 내려보내서 대마도차왜와 교섭을 하게 한 모양인데 홍중하가 가지고온 례조의 복서에는 불법월경한 어부들에게 죄를 주어 다시는 죽도에 출입시키지 않겠다는 소리도 있다구 하네. 그러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나?》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옵니까?》
눈물이 고였던 룡복의 두눈에서 갑자기 불길같은것이 이글거리였다. 가증스럽고 검질긴 왜놈들이 그동안 일을 이렇게 뒤집어놓을줄은 몰랐다.
왜놈들은 쯔시마에서 50일간, 왜관토옥속에서 다시 40일동안이나 두사람을 가두어두고 그사이에 조정을 속여넘기고 울릉도를 영영 차지할 꿍꿍이를 벌린것이였다.
그 꿍꿍이에 넘어간 조정에서는 죽도를 저들의 섬이라고 우기는 왜놈들을 두말 못하게 눌러놓을 대신 말썽이나 나지 않게 하려고 어물어물하면서 도리여 울릉도에 갔던 죄없는 사람들에게 죄를 씌우려 하는것이였다.
이 사태를 바로잡을 사람은 누구인가?
왜놈들의 흉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사람은 자기였다. 자기만이 왜놈들의 죄행을 만천하에 밝혀놓을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아니면 어둔이가 제 나라의 령토를 지켜 떳떳이 싸우다가 목숨을 빼앗긴것을 세상에 증명할 사람이 없었다. 헤아릴수 없이 무거운 책임이 두어깨에 실리는것을 느끼였다.
사람들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하며 또 하지 않을수 없다는 이 가슴뜨거운 생각이 무엇인지 그도 아직은 알수 없었다. 다만 이 책임을 다해야만 이 나라 백성으로서 떳떳할수 있고 어둔이나 어순이나 섬사람들의 믿음도 지켜갈수 있다는것만을 뚜렷이 느낄뿐이였다.
룡복은 옥살창을 꽉 부여잡은채 마음속으로 절절히 부르짖었다.
(어둔이, 고이 눈을 감게. 내가 살아있는 한 이 사태를 그냥 두지 않겠네. 왜놈들이 자네 한사람은 죽일수 있었지만 대낮같이 밝은 진실을 영영 묻어버릴수는 없네. 왜놈들의 죄행을 만천하에 고발하고 울릉도를 기어이 지켜내고야말테니… 부디 눈을 감게…)
이것은 그가 어둔이 한사람의 령전에서만 하는 맹세가 아니였다. 그보다 더 크고 숭고한 그 무엇이 이 순간 그의 넋을 깨우쳐주고있었던것이다.
이날 한낮이 훨씬 기울어서야 어둔의 시신을 실은 소달구지가 동래성문을 빠져나와 포촌으로 향하였다.
구슬픈 통곡소리에 휩싸여 점점 멀어지는 소달구지를 옥살창밖으로 바래우고있는 룡복의 두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목에 걸린 스물닷근짜리 큰 칼을 점점이 적시고있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푸실푸실 눈이 내리였다. 이해의 첫눈이였다.
내리다가는 멎고 멎었다가는 다시 내리여 마치나 포촌사람들의 구슬픈 눈물인듯이 낮에 밤을 이어 내리였다.
크지 않은 눈송이들은 땅에 내려앉기를 저어하는듯 허공중에서 이리저리 떠돌며 갈팡질팡하다가 땅에 내려앉기만 하면 어느새 형체도 없이 녹아버리군 하였다.
구름과 땅사이가 얼마나 넓고 얼마나 먼지… 그 먼길을 날아내릴 때는 그래도 무엇인가 바라는것이 있어 내렸으련만 종당에는 이렇게 흔적도 못 남기고마는 눈송이…
이해의 첫눈은 왜 이리도 애절한지…
내리듯마듯 하던 그 눈이 그래도 밤을 자고나니 산과 들을 하얗게 덮어버리였다.
하얀 눈이 얇게 뒤덮인 황령산기슭으로 어둔의 상여가 천천히 움직여가고있었다.
슬프디슬픈 상여소리가 들리였다. 장례술에 얼근히 취한 상여군들의 구슬픈푸념인듯… 통곡소리인듯…
높지도 낮지도 않은 상여소리는 한껏 구슬프게 울리였다.
북망산이 멀다더니 건너산이 북망일세
어허어허 어허이요―
인제 가면 언제 오리 올 날이나 일러주소
어허어허 어허이요―
석새 거친 베로 상복을 지어입고 벼짚내 풍기는 노란 새끼로 허리중등을 동이고 대지팽이를 짚은 어둔의 안해가 상여뒤를 따라가다가는 몸부림을 치고
몸부림을 치다가는 다시 쫓아가며 애끓는듯 한 목소리로 통곡을 터뜨렸다.
《여보― 어느 놈이 당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소? 아주 가지 말고 일어나주오. 어느 놈이 당신을… 아하이고…》
상여를 뒤따르는 조객들의 눈기슭에도 더운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어둔의 친구들인 능로군 젊은이들과 마을 안팎이 모두 떨쳐나 어둔의 상여를 뒤따르고있었다.
삿갓을 숙여쓴 리생원도 상여를 뒤따르고 그옆에는 거의 실성한 어둔의 아버지 박지삼로인과 갓난 손자를 품에 안은 조씨도 허둥지둥 넋빠진 걸음으로 따라가고있었다.
이윽고 양지바른 산기슭 금시 파놓은 묘자리옆에 상여가 멎어섰다.
하얀 눈우에 벌겋게 파헤쳐진 너무도 생생한 흙! 억울한 죽음을 너무도 뚜렷이 강조하고있는듯 한 그 흙을 보는 순간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는 다시 걷잡을수 없는 슬픔의 파도가 세차게 일어났다.
구슬픈 호곡소리가 무겁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고인은 땅에 묻히였다.
봉분을 다지는 달구질소리도 멎고 제사도 끝났을 때 어둔의 아버지 박지삼로인은 제상앞으로 비척비척 다가섰다.
늙은이의 거치른 볼을 타고 흘러내린 두줄기의 가느다란 눈물자국이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흔들었다.
《어둔아, 자식의 장례에는 부모가 참례치 않는 법이라지만 네가 가는 마지막길을 내가 아니 볼수가 있느냐. 그래서 이렇게 왔다. 네 아들 갑손이도 오구…》
박지삼은 상돌앞에 쭈그리고앉아서 마치 땅속에 누운 아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듯이 목메인 소리로 나직이 말하였다.
《네가 제 명을 다 못살고 가는것을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지구 가슴이 찢어지는듯 하구나. 더구나 옥에 갇힌 룡복이 저 사람은 이제 무슨 곤욕을 다 겪게 될는지… 그걸 생각하면 네가 눈인들 편히 감을수 있겠느냐. 아, 기막힌 일이로구나!》
슬픔을 하소할데 없는 늙은이의 비통한 탄식이였다.
《그만 진정하시우. 어둔이나 룡복에게는 아무 죄도 없어요.》
우럭지게 생긴 능로군젊은이가 박지삼을 부축해 일으켜세우면서 바다사람다운 걸걸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다 그 왜놈들탓이지요. 우리가 비록 천한 능로군이라 해두 제나라 땅을 먹으려드는 놈들을 가만두어야 옳겠어요. 장한 일을 하다가 간 사람인데 우리가 원쑤를 갚아주어야 땅속에서라도 눈을 감을거웨다.》
《옳거니, 우리 배군들이 모두 정신을 차리구 나서야지 누가 나서겠소.》
《옳은 말이요.》
사람들의 슬픔은 가슴아픈 깨달음으로 변해가고있었다.
아주 멎은듯싶던 눈이 다시 소리없이 흩날려 떨어지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