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어순이는 쪼그리고앉아 화로우에서 끓고있는 약단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있었다. 거멓게 젖어오른 나무뚜껑우에는 재티가 하얗게 내려앉아있었다.
지금 약단지에서는 어둔이에게 가져갈 탕약이 끓고있었다. 도주의 집일을 맡아보는 집사라는자가 도주의 불같은 독촉을 받고 며칠전에 지어온 약이였다. 나흘째 이 약을 달여먹이였다.
어순의 정성이 지극한탓이였던지 약효험이 나서인지 어둔의 급한 병세는 얼마간 숙어졌다. 열도 좀 내리고 미음도 몇술씩 받아먹었다.
(제발 무사했으면…)
어순이는 호―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고있던 부들부채로 살근살근 불을 부쳤다. 한동안 하얀 재티만 날아나던 화로에서는 이윽고 빨간 숯불이 이글이글 피여올랐다.
어순이가 약시중을 들어주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열흘이 가까와온다. 하루에 두번씩 약을 가지고 후원 별채로 가군 하였다.
그동안 어순의 뇌리에서는 후원별채에 갇힌 두사람을 어떻게 하면 구원할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한시도 떠난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자신이 갇힌 몸이나 다름없는 처지여서 부엌채가 있는 중대문안에서나 움직일수 있을뿐이고 그밖으로는 나다닐수 없었다.
두길도 넘는 저 높은 담장밖에는 무엇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이 집으로 끌려오던 날 보아둔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긴 다리 하나를 건너서 여러층으로 된 돌계단을 올라서야 이 집 대문에 이르게 된다는것만 알고있을뿐이였다.
혼자서 마음속으로 바재이는 동안에 무정한 시간은 기어이 닥쳐오고야말 그 어떤 불상사를 향해 달음질쳐가는것만 같았다.
그런데 바로 어제 아침녘이 좀 지나서였다. 도주가 부른다기에 조선말을 잘하는 재판벼슬을 맡은 왜인과 함께 관사대청으로 나갔었다.
도주는 한동안 말없이 싸늘한 눈길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병자도 많이 나아졌다는데 이제는 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약혼자를 설복해보았는가? 마음을 돌리고 잘못을 빌겠다고 하던가?》
어순이는 아무 대답도 할수가 없었다.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고 대답하면 당장 목을 베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런데 도주의 입에서 그 무서운 말이 끝내 터져나오고야말았다.
《좋다! 마음을 돌리지 않겠다면 다른 수가 없다. 사흘간 말미를 주겠으니 그동안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그때는 끝장이다. 네년도 무사치 못할줄 알아라. 알겠는가?》
어순이는 떨리는 가슴을 움켜잡고 쫓기듯이 물러나왔다.
물론 간사한 도주가 으름장을 놓느라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할수도 없었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저 지독한 도주놈이 무슨짓인들 못할것인가.
가슴을 집어뜯으며 바재이고있던 어순이는 그날 낮에 약을 가지고 별채로 들어갔을 때 룡복의 앞에 가서 엎어지듯이 주저앉았다.
《룡이 오빠, 이 일을 어찌하면 좋아요? 왜놈들이 기어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야말것 같아요.》
룡복은 파랗게 질린 어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놀라운듯이 물었다.
《무슨 일이요?》
《…왜놈들이 사흘안으로 대답이 없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요. 그러니 어쩌면 좋겠어요?》
참으려 한 눈물이 저도 모르게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룡복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신음소리를 내며 맥없이 벽쪽으로 돌아누워있는 어둔이며 어깨를 떨며 괴로와 흐느끼고있는 어순이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동안 룡복은 도주를 만나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도주는 한사코 만나기를 피하면서 마음약한 어순이를 위협하여 끝끝내 굴복을 받아보려고 꾀하고있는것이였다.
《어순이, 왜놈들이 우리를 감히 건드리지 못하니 안심하우. 왜놈들은 어순이가 이렇게 눈물로 우리를 돌려세우기를 바라고있소. 마음약한 꼴을 보이면 간사한 왜놈들이 더욱 기승을 부릴것이니 마음을 굳게 먹소.》
룡복은 이렇게 어순의 마음을 진정시켜주려 하였으나 한번 놀라 뛰기 시작한 처녀의 마음은 좀처럼 잠들줄 몰랐다. 어순이는 애써 눈물을 감추며 별채에서 물러나왔다. 지금 앉아서 약을 끓이고있지만 마음은 갈곳을 잃은 배처럼 허둥거려졌다. 초조한 눈길로 해를 쳐다보니 어느덧 저녁녘이 가까왔다.
도주가 말미로 준다고 한 시간은 래일과 모레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화로에서 빨갛게 타오르는 숯불을 들여다보는 어순의 눈빛은 더욱 초조하게 불타고있었다.
어순이는 약이 끓어넘는것도 느끼지 못하고 골똘히 무슨 생각엔가 잠겨있었다.
《아이구나! 약이 넘는줄도 모르구…》
부엌문을 열고나오던 하나에가 기겁한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어마나!》
어순이는 그제야 벌떡 일어서며 재빨리 약단지뚜껑을 열고 허옇게 끓어넘는 약거품을 주저앉히였다.
하나에는 축축히 젖은 어순의 눈기슭을 측은한 눈길로 살피고나서 한숨을 쉬였다.
《너무 마음이나 쓰지 마우. 하늘땅이 뒤번져도 살수가 나진다질 않소.》
어순이는 급히 하나에의 팔소매를 잡으며 귀속말로 소근거리였다.
《하나에아주머니, 집주인을 좀 만나게 해주세요.》
《아니, 우리 주인을?》
《그래요. 급히 의논할 일이 생겼어요.》
어순의 정상이 너무도 절박하게 느껴졌는지 하나에는 더는 아무 말도 묻지 않고 그달음으로 부엌채 뒤곁으로 뛰여갔다. 잠시후에 돌아와서 말소리를 낮추며 소곤거리였다.
《저기 뒤뜰 허청간안에서 기다리고있으니 어서 가 만나우. 약은 내가 봐주겠소.》
어순이는 갑자기 후두두 떨리는 가슴을 애써 달래며 급히 뒤뜰로 달려갔다. 반쯤 열린 허청간문안에서 우마무라가 기다리고있었다. 어순이가 들어서자 부러진 노를 손질하고있던 우마무라가 허청간문을 닫으며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요?》
어순이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가슴만 들먹이며 서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입을 열고 도주가 별채에 갇힌 두사람을 기어이 해칠것 같다는것을 말하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우마무라는 조리를 신은 큼직한 두발을 이리저리 옮겨디디며 안절부절하였다.
《이럴 때 그 사람들을 그저 내버려둔다면 내가 무슨 사람이겠소. 그러니 무슨 수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어순의 눈빛이 번뜩이였다.
《다른 길은 없어요. 죽는 한이 있어도 마음을 돌릴 사람들이 아니니 여기서 빠져나가게 하는 수밖에 없어요.》
《빠져나가다니? 도망친단 말이우?》
《그래요.》
놀라운 눈길로 어순이를 바라보면서 우마무라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건… 힘든 일이우. 담장안에 또 담장이 둘러있고 거기다가 한사람은 운신을 할수 없는 형편이니…》
어순이는 정신없이 우마무라의 팔을 붙잡고 흔들며 간절히 부르짖었다.
《제발 부탁해요. 저를 도와주세요. 별채에 갇힌 사람들을 구원 못하면 내가 살아서는 무엇하겠나요.…》
우마무라는 다시한번 놀라운 눈길로 어순이를 바라보았다. 마음 연약하고 부드럽기만 한 처녀로 알았던 어순이가 갑자기 천길벼랑에서 뛰여내리는것도 서슴지 않을 불덩이같은 처녀로 변한것을 알아본것이였다.
우마무라의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뜨거운것이 꿈틀거리였다.
그것은 마음약한 처녀조차 저토록 두려움을 잊고나서는 그 길에 선듯 나서겠다고 대답해주지 못한 자책감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 찬비 쏟아지던 을씨년스러운 날, 자기를 업어다 목숨을 구원해준 안룡복이와 박어둔의 고마운 마음이 생각키우고 관가에 알려지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그 위험속에서도 죄많은 자기를 숨겨주고 살뜰히 간호해주던 인정깊은 리씨와 룡이의 잊을수 없는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기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윽고 우마무라는 힘을 주어 조용히 말하였다.
《어순이, 내 기어이 무슨 수를 생각해볼터이니 너무 걱정말구 기다리우.》
《고마워요. 꼭 힘써주세요.》
어순이는 급히 허청간밖으로 사라지는 그의 뒤모습을 지켜보며 오래도록 서있었다.
다음날 한낮이 좀 지나서 눈에 벌겋게 피가 진 우마무라가 어순이를 찾아왔다.
어순이를 데리고 허청간으로 들어간 우마무라는 목소리를 죽여가며 말하였다.
《다 마련해놓았으니 오늘 밤에 거사를 해야 하우. 빠져나갈수 있게 수구문에 박힌 쇠살창도 다 뜯어놓았소.》
어순이는 긴장한 낯빛으로 우마무라의 말을 듣고있었다.
《내 말을 명심해서 듣소. 오늘 밤 자정이 지나면…》
우마무라는 잠을 자지 못하여 벌겋게 피가 진 눈을 비비며 빈틈없이 짜놓은 탈출계획을 차근차근 이야기하였다.
…자정이 가까울 무렵에 하나에가 이미 얼굴을 익혀둔 별채파수군에게 독한 술을 먹여서 곯아떨어지게 한 다음 우마무라가 어순이와 함께 별채로 들어간다. 안룡복이와 우마무라가 어둔이를 들것에 담아들고 나와서 담장 동쪽모퉁이에 있는 구정물이 흘러나가는 수구문으로 빠져 개울로 나간다. 개울을 따라 동쪽으로 두어마장쯤 내려가면 부두에 이르는데 부두가에는 뜸집배 한척이 매여있다. 세사람이 그 배에 올라 날이 밝기 전에 어둠을 리용하여 해안에서 멀리 벗어나 북쪽으로 부지런히 노를 저으면 이틀후에 부산포에 들어설수가 있다.…
《알겠소? 안상한테 미리 알려서 실수없이 해야 하우.》
《알겠어요.》
어순이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만 끄덕이였다. 더는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가슴이 놀란 새처럼 세차게 뛰였다.
《어순이, 진정하구 자정이 될 때까지 부엌방에서 기다리다가 문밖에서 기침소리가 나면 아무도 몰래 빠져나오우. 알겠소?》
《네, 걱정마세요.》
어순이는 놀라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대답하였다.
우마무라가 급히 허청간에서 나가자 어순이는 정신없이 부엌방으로 돌아왔다. 마침 비여있었다.
어순이는 맥이 진한 사람처럼 벽에 기대앉았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리였다.
가슴속에서는 기쁨과 불안과 희망이 서로 뒤치락거리면서 싸우고있었지만 마음은 무엇인가 큰일을 해놓은듯 한 기쁨과 안도감으로 설레였다. 아무리 애써도 진정할수가 없었다. 날개가 있다면 아무데건 막 날아보고싶었고 홍수처럼 넘쳐나는 마음속의 감격을 당장 달려가서 룡이 오빠와 나누고싶었다.
문득 막부의 서계를 기어이 찾아가야 한다고 하던 룡이 오빠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자 룡이 오빠가 막부의 서계를 찾지 않고서는 떠날수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남모르는 걱정이 저도 모르게 가슴속으로 갈마들었다.
그러나 어순이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룡이 오빠를 구원해야 하는 이 위급한 때에 그는 다른것은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룡이 오빠만을 생각하고싶을뿐이였다. 이것은 세상에서 사랑만을 제일 귀중한것으로 여기는 녀성의 리기심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외곬으로 흐르는 녀성의 이 불붙는듯 한 마음은 그 무엇으로써도 돌려세울수 없는것이였다.
어순이는 룡이 오빠의 마음을 미리 건드려놓으면 일이 틀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입을 다물고있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날 마지막저녁밥과 약을 가지고 후원별채로 갔을 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룡이 오빠!》하고 기쁨에 넘쳐 한번 불러보았을뿐이였다.
어순이는 부엌방으로 돌아와 때가 되기를 기다리였다. 잘 때가 되자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지만 늙은 왜인아낙네가 잠이 들자 어순이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앉았다. 방안도 창밖도 칠흑같이 캄캄하였다. 하지만 어순의 가슴속에서는 때아닌 화창한 봄날이 밝게 펼쳐지고있었다.
얼마나 그리워지고 가고싶던 고향땅인가! 아무리 애써도 가슴속에서 기쁨에 겨워 우짖는 봄종다리를 달랠수가 없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그 뜨거운 우짖음이 랑랑히 들려올것만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문득 문밖에서 하나에의 조심스러운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오라는 신호였다.
어순이는 소스라치듯 놀라 일어섰다. 구석쪽에 쪼그리고 누워자는 늙은 녀인을 조심스럽게 살피고나서 자그마한 베보퉁이를 옆에 끼고 문밖으로 나섰다.
밤은 깊을대로 깊었다. 부엌채 모퉁이로 돌아서자 하나에가 어둠속에서 속삭이였다.
《파수군은 곯아떨어졌으니 안심하우. 그리구 이 옷을 가지고가오.》
하나에는 옷보퉁이를 어순의 가슴에 안겨주었다.
《일본배군의 옷 세벌이요. 혹시 흰옷을 그냥 입고가다가 도중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지 알겠소? 그러니 모두 이 옷을 갈아입소.》
《고마워요. 잊지 않겠어요.》
어순이는 웬일인지 눈물이 왈칵 솟았다.
《가서 안상하구 잔치하구 잘 살라구.…》
하나에는 눈굽을 훔치며 어순이를 바래웠다.
어순이는 부엌채 뒤모퉁이에서 기다리고있던 우마무라와 함께 급히 별채쪽으로 달려갔다.
파수군은 보이지 않았다.
우마무라가 문을 열고 들것을 먼저 들이밀면서 어순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룡복이가 마주 나왔다. 우마무라가 나직이 부르짖었다.
《안상, 얼마나 고생했소?》
《아니? 이게 누구요?》
두사람은 손을 부둥켜잡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우?》
룡복이가 놀라운 목소리로 물었다.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소. 파수군은 술을 먹여놓구 수구문에 가로질린 쇠살창도 다 뜯어놓았으니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우. 부두에 타고갈 배도 한척 마련해두었으니 자, 빨리 서두르오.》
우마무라는 누워있는 어둔의 곁에다 돛천으로 만든 들것을 펴놓으며 서둘렀다.
《빨리 박상을 여기다 옮겨야겠소.》
룡복은 우마무라와 어순의 모습을 살펴보고나서 잠시 아무말없이 서있었다.
《자, 빨리 서둘러야겠소. 날이 밝으면 포구를 벗어나기 힘들어지니…》
우마무라는 다시한번 독촉하였다.
그러나 룡복은 여전히 움직일념을 하지 않았다. 침울한 눈길로 말없이 어순이를 바라보고있었다. 이런 일을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는가 하는 가벼운 질책이 느껴지는 눈길이였다.
어순이는 안타까이 부르짖었다.
《룡이 오빠!》
어서 이 무서운 곳에서 피해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였다. 그리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고싶은 절절한 마음의 호소이기도 하였다.
룡복은 이 순간, 한발자국만 내짚으면 자신이 그처럼 바라왔고 어순이가 절절히 부탁하던 그 모든 소원을 이룰수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상처입은 어둔이도 구원할수 있다는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한발자국을 내짚을수가 없었다. 이루 말할수 없이 크고 무겁고 절박한 그 무엇이 가슴을 뜨겁게 옥죄이고있었다.
룡복은 우마무라의 손목을 잡으며 나직이 말하였다.
《정말 고맙소.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되오. 여기서 도망쳐서는 안되우.》
《안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우마무라는 너무도 뜻밖인듯 어쩔바를 모르고 서있었다.
《내 말을 듣소. 우리가 없어진것을 알면 파수군에게 술을 먹이고 문을 연 당신이 당장 잡히고마우.》
《그런 걱정은 마우. 나야 이미 죽었던 사람이나 다름없지 않소? 이제는 죽어도 사람답게 죽겠으니 한이 없소.…》
《진정하우. 그 마음은 알만 하지만 이렇게 할 일이 아니요. 당신이 목숨을 잃을줄 알면서 우리가 어떻게 떠나가겠소?》
룡복은 캄캄한 문밖에 첩첩히 펼쳐진 어둠을 잠시 지켜보다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
《나는 막부의 서계를 찾지 않고서는 떠날수 없는 사람이요.》
《안상!》
우마무라가 안타까이 부르짖었다.
《지금 그런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요. 도주가 안상, 박상의 목숨을 노리고있소. 당장 무슨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별수 없지 않소?》
룡복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었다. 희망을 안고 안타까이 쳐다보는 어순의 애절한 얼굴이며 우마무라의 흥분에 떠는 모습을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자기를 구원해내려고 이토록 애를 태우는 사람들앞에서 떠날수 없다는 말 한마디밖에 할수 없는 자신이 더없이 민망스러웠다. 그 뜨겁고 절절한 마음을 말 한마디로 무참하게 밀막아버리는것보다 더 용렬하고 무지한짓이 없다는것을 그는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밖에 할수 없는 룡복이였다. 달리는 대답할수 없는 이 마음을 누가 리해해줄것인가.
아, 어순이는 리해해주겠는지…
룡복은 풀길없는 깊은 고민이 어린 눈길로 어순이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어순이, 부디 리해해주오. 달리는 할수 없는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믿소.)
그리고는 우마무라에게 부탁하듯이 조용히 말하였다.
《달리는 할수가 없구려. 그러니 부디 내 마음을 알아주오.》
우마무라의 손에서 들것이 맥없이 털썩 떨어졌다. 더는 룡복의 뜻을 굽혀낼수 없음을 알아차린것이였다.
《그러니 다 꾸며놓은 일을 이젠 어떻게 한단 말이요.…》
우마무라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듯이 어순이를 돌아다보았다.
어순이는 별안간 두손으로 얼굴을 싸쥔채 소리없이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가슴을 허비는듯 한 어순의 그 흐느낌소리를 더는 듣고있을수 없었던지 우마무라는 룡복에게 다시한번 간절히 말하였다.
《안상, 어순이를 생각해서라두 부디 마음을 돌려보우. 이 시각을 놓치면 그만이요. 어순이까지 구원하지 못하구마오.》
《그럼 내 부탁을 들어주오.》
룡복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힘들겠지만 어순이만이라도 부산포로 실어다줄수 없겠소?》
흐느끼던 어순이가 갑자기 옷보퉁이를 가슴에 꽉 끌어안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룡이 오빠! 그게 무슨 말이세요?》
어순이는 노여움이 서린 목소리로 울먹이면서 말하였다.
《저도 알아요. 룡이 오빠가 그렇게밖에 할수 없다는걸 말이예요. 룡이 오빠를 전 조금도 탓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나혼자 가라니… 룡이 오빠와 상처입은 어둔이 오빠를 남겨두고 나 혼자 어떻게 가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말이예요.》
어순이는 안타깝게 몸부림쳤다.
룡복은 말없이 어순의 두손을 꽉 부여잡았다.
《어순이, 내가 왜 어순의 그 마음을 모르겠소. 하지만 먼저 돌아가주오. 그러면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것이 아니겠소?》
어순이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쓰러지듯 룡복의 발치에 꿇어앉았다.
《룡이 오빠! 부탁해요. 나를 곁에 있게 해주세요. 옥바라지와 약시중을 들면서 끝까지 함께 있게 해주세요. 그게 내게는 집으로 가는것보다 더 큰 행복이예요. 더 큰…》
캄캄한 어둠속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어순의 가냘픈 목소리는 마치 우뢰소리처럼 룡복의 가슴을 들부시고 우마무라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두사람은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불붙는듯 한 처녀의 마음을 돌려세울수 없다는것을 온몸으로 깨달은것이였다.
이윽고 어순이는 북받치는 설음을 간신히 다잡고 일어서며 흩어진 옷자락을 바로잡았다.
《룡이 오빠, 날 욕해주세요. 고집이 아니예요. 나도 내 마음을 어쩔수가 없군요. 정말… 어쩔수가…》
《어순이!》
룡복의 두눈에는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고이고있었다. 웬일인지 마음은 한량없는 감동으로 뜨거워졌다.
몰라보게 마음 굳세여진 어순이를 발견한 기쁨이고 감격이였다. 불같이 뜨겁고 아름답고 억센 마음을 지닌 이 처녀를 모든것을 다 바쳐 지켜주고싶었다.
룡복은 어순의 두손을 차마 놓을수 없었다. 그의 뜨거운 몸과 마음을 한품에 힘껏 안아주며 가슴속에 넘쳐나는 사랑을 마음껏 쏟아붓고싶었다. 그리고 이 험하고 낯선 왜땅에서도 곁에 있어주면서 온기를 주고 다함없는 사랑을 주고있는 그 뜨거운 마음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싶었다.
이윽고 어순이는 땅에 떨어진 보퉁이를 집어들고 일어섰다. 말없이 우마무라의 팔소매를 잡고 문쪽으로 이끌어나갔다. 우마무라는 어망결에 들것을 찾아들고 문밖으로 이끌려나왔다.
쇠를 잠그고 빗장을 지르는 그의 커다란 손이 후들후들 떨리였다. 그는 안에 남은 룡복을 향해 목메인 소리로 부르짖었다.
《이보우, 안상! 안상의 마음이나 어순의 마음이나 내 다 알았소. 부디 마음 굳게 먹구 큰일을 성사시키시우. 어순이는 내가 살펴줄터이니 조금도 걱정을 마우.》
우마무라는 어순이와 함께 천근같이 무거운 걸음을 내짚었다. 그의 수염많은
너부죽한 뺨으로 굵다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애써 꾸며놓은 일이 허사로 되였다는 아쉬움보다도 한없이 아름답고 뜨거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본 감격이 가슴을 세차게 울려주고있었다.
참으로 상상도 할수 없는 사람들이였다. 자기 목숨보다도 나라를 더 귀중히 여기고 비록 살길이 나지여도 자기 한몸보다 남을 더 위해주려 하는 이 갸륵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 이 사람들에게는 벌써 죽음같은것은 없었다. 죽음을 딛고 아득히 멀리 올라선 사람들이였다. 그런 사람들을 죽음으로 위협하다니… 얼마나 어리석고 하잘것 없는짓인가. 이런 사람들은 그 무슨 힘으로도 굴복시킬수 없는것이다.
우마무라는 어순이에게 이끌려 부엌채쪽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놓고있었다.
벌써 희미하게 동녘이 밝아오고있었다. 어디선가 멀리 담장밖에서 새벽닭이 첫 홰를 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이로부터 사흘이 지난 어느날 아침, 억류해두고있는 조선어부들을 더는 굴복시킬수 없다는것을 깨달은 쯔시마도주 소 요시미찌는 급히 사람을 띄워 다찌바나 신죠라는 왜인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한낮때가 되여서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마흔을 갓 넘긴듯 한 키 자그마한 사나이가 맨발바람에 들어와 엎드리였다. 앞에 와 엎드린 사나이의 퍼렇게 밀어버린 앞머리와 긴 상투자루를 내려다보는 요시미찌의 심정은 매우 착잡하였다.
얄궂은 운명의 희롱으로 저 사나이가 지금은 비록 이름도 없고 세도도 없이 지내고있지만 그의 집안은 본래 일본의 황실과 깊은 인연을 맺은 오랜 귀족가문이였다.
그의 가문의 먼 조상은 일본 원명천황시절 《대감제》라는 축제때에 천황으로부터 귤쪽을 띄운 향기로운 술잔을 친히 하사받은바 있었다. 그래서 《다찌바나》(귤)를 성으로 삼았으며 그후에는 민달천황의 현손인 미노왕에게 출가하여 갈성왕을 낳아 황실과 인척관계로 얽히게 되였던것이다.
그런만큼 지금 비록 앞에 엎드려 소인을 고여올리고있지만 속은 시퍼렇게 살아있으리라는것을 요시미찌는 짐작하고있었다.
《네가 다찌바나 신죠이더냐?》
《그렇소이다.》
속마음은 어떠했는지 모르나 겉으로는 매우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너의 몇대전 조상에 야스히로라는이가 있지 않았느냐?》
뜻밖의 물음을 받은 다찌바나는 분명 놀라는 눈치였다.
《소인의 증조할아버지되는분이 바로 야스히로였소이다.》
《그렇겠지… 그래, 너의 증조할아버지가 정해년에 쯔시마사신으로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국서를 가지고 사절의 파견을 요구하여 조선에 갔던 일이 있었다지?》
《그렇소이다.》
요시미찌는 무슨 말인가 더 하려고 하다가 다찌바나를 흘끔 바라보더니 급히 입을 다물어버리였다.
그가 마저하지 않은, 아니 마저 할수 없었던 말이 무엇이였던가를 다찌바나는 벌써 짐작하는듯 하였다.
조선을 꺾어보려고 이렇게 갖은 수단을 다하며 날뛰던 야스히로도 결국 조선의 사절을 청해오라는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뜻을 실현하지 못한 죄로 당시의 쯔시마도주에게 죽음을 당하고 그의 가문은 멸족의 화를 입었던것이다.
그러니 이야기를 더 펼쳐보면 결국 두 가문은 한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원쑤라는 사실만 밝혀질뿐이였다. 그것은 서로 까밝힐수 없고 더이상 이어나갈수 없는 이야기였던것이다.
《그래 네가 조상선대로부터 명망높은 사절의 집안에서 나왔으니 한번 증조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뜻을 이루어 큰 공을 세워보지 않겠느냐?》
도주의 말을 듣고있던 다찌바나의 눈에서 시퍼런 불빛이 번뜩이였다.
《소인은 조상의 치욕을 백분의 일이나마 씻을수 있다면 목숨을 바친다 해도 아까울것이 없소이다.》
《그러면 이리 가까이 오너라. 너는 이제 중한 일을 맡아가지고 조선으로 가야 한다.》
요시미찌는 울릉도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들과 그에 대한 막부와 쯔시마의 립장을 낱낱이 알려준후 조선어부 두사람을 호송하고 조선으로 가서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우선 조선어부들이 울릉도가 아니라 죽도라는 일본섬에 들어왔다고 요란하게 떠들면서 저나라 조정이 죽도가 일본의 섬이라는것을 인정하게 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소이다.》
《조선례조와 동래부사에게 보내는 편지도 다 그렇게 꾸며진것이니 일을 성사시키고 못시키는것은 다 너의 수완과 계책에 달려있다.》
《도노사마의 뜻을 어기지 않겠소이다.》
《피를 물고 날뛰지 않으면 저나라를 굴복시킬수 없고 그렇게 되면 너도 증조할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다는것을 명심하라.》
《알겠소이다.》
다찌바나는 두통의 편지를 받아들고 관사에서 물러나갔다.
문밖으로 나가는 그의 뒤모습을 지그시 쏘아보던 요시미찌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였다.
다찌바나가 범이라도 잡을듯이 물러나갔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이 순조롭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것이다. 흰것을 검다고 해야 하는짓과 조금도 다를바없는 일인만큼 다찌바나가 아무리 영악한자라고 해도, 아니 희세의 영웅이라 해도 그것을 순조로이 이루어낼수 없으리라는 생각만 지꿎게 갈마들었다.
하지만 별수가 없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니 그렇게라도 꺼보지 않을수 없는것이였다.
요시미찌는 다시한번 불안짙은 한숨을 내쉬며 컴컴하게 흐린 하늘을 무거운 눈길로 내다보며 오래도록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