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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채일을 휘둘러치고 칠빛이 번들거리는 진주자개박이 가구들을 알맞추 들여놓아 호화롭게 꾸린 방에 비단이불을 덮고 누운 어둔이는 잠이 오지 않았다.

우선 방치장이 놀랍게 호사스러운것이 거북스럽고 아까 문앞에서 헤여진 룡복에게 별일이 없을가 하는 위구심도 없지 않았다.

몸은 편히 누워있으나 마음은 말할수없이 괴로왔다. 왜놈들과 마주앉아 마음에 없는 술잔을 들고 말을 주고받는 일이 원래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어순이를 구해볼가 하는 생각으로 룡복이를 훌쩍 따라나섰는데 왔다는데가 쯔시마는 아니고 왕청같은 오끼섬이 아니면 호끼주땅이여서 어순이를 구하기는 고사하고 그림자도 볼수 없는 형편이였다. 거기다가 간데마다 간사한 왜놈들의 꼴을 참고 보아야 할뿐아니라 낮과 밤도 분간할줄 모르는 그 도적놈들과 목에 피대를 돋구며 시비를 가린다는것이 당초에 될성부르지 않는 일인데 입
에서 신물이 나서 더는 보고있을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왜놈들이 울릉도에 다시는 기여들지 못하게 하겠다고 애쓰는 룡복에게 지청구를 할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할 말도 못하며 참을수 없는 일을 하루이틀도 아니고 달포가까이 참고 견디자니 몸이 달아서 목구멍에서 단내가 펄펄 날 지경이 되였다.

(에라, 육실할… 이럴 때 탁배기나 한동이 있었으면…)

하루에도 이런 생각을 몇번이나 하는지 몰랐다.

눈만 감으면 안해의 얼굴이 떠오르군 하였다. 집을 떠나오던 날 안해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밥풀이 동동 뜨는 약주 한사발을 놋주발에 정히 부어주던 일이 생각났다.

여느때는 술마시는것을 그렇게 질색하던 안해가 그날은 제손으로 술을 부어주며 자기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는것이였다. 시집을 온지 이태가 지나도록 자기앞에서는 말 한마디 변변히 하지 못하던 안해가 그러는것을 보자 마음이 별스러워졌다. 어둔이는 그 독한 약주를 단숨에 쭉 들이키고 김치 한쪽을 와작와작 씹으며 안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다른 때 같으면 부끄럼을 타며 돌아앉았을 안해가 입덧이 나서 핼쑥한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띄우며 정답게 바라보고있었다. 어둔의 눈에도 그 모습이 별로 밉게 보이지 않았다. 무엇인가 정다운 말 한마디 해주고싶었으나 얼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이렇게 묻고말았다.

《언제야?》

《뭐가 언제예요?》

《그 애 말이네.》

어둔이는 싱글싱글 웃는 눈길로 안해의 불룩한 배를 가리켰다.

《애개개… 망칙도 하지… 몰라요.》

안해는 귀밑을 붉히며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체, 잘은 모르겠군. 요것을 그저…》

어둔이는 집게같은 손가락으로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 물든 안해의 볼을 살짝 꼬집으려 하는데 삽짝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밖에 나갔던 아버지가 마당으로 들어서는것이였다.

《어마나! 아버님이 오셨어요.》

안해는 화닥닥 놀라서 놋주발이며 김치사발을 치마폭에 싸안고 얼른 일어섰다. 어둔이는 내밀었던 손을 내리우고 황급히 부엌으로 사라지는 안해의 뒤모습을 벙글벙글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날에 있었던 일이 집생각, 안해생각이 날 때마다 자주 떠오르군 하였다.

젠장, 그날 술맛은 별루 좋았지…

종잡을수 없는 생각들이 자꾸 떠오르면서 종시 잠을 이룰수 없었다.

창밖에서 훈훈한 밤바람이 불어지나는듯 싱그러운 나무잎새들이 설렁대는 소리가 들리였다. 이름할수 없이 훈훈한 꽃향기가 방안으로 흘러들었다.

(육실할… 왜놈들이 창밖에 무슨 꽃나무를 심은 모양이군… 어-)

길게 기지개를 켜고 큰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데 문득 아까 몇잔만 마시고 만 왜술생각이 났다.

(그게 이럴 때 한종발만 있어도…)

마른 입술을 쩝쩝 다시며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데 널마루를 자박자박 밟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미닫이문이 사르르 열리더니 두손에 소반을 받쳐든 왜계집이 소리없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건 뭐냐?)

어둔이는 이불을 차던지고 벌떡 일어나앉았다.

계집은 하얀 짜개버선을 신은 발로 누비돗자리를 사뿐사뿐 밟으며 어둔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앉아 납신 절을 하였다. 허리를 펴면서 할끔 쳐다보는 계집의 분바른 볼에 상그레 요염한 웃음이 피여올랐다. 아까 술시중을 들던 낯익은 계집이였다.

《아닌밤중에 이건 무슨짓이냐?》

계집이 간사한 왜말로 뭐라고 종알거리는데 말뜻을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어둔이가 어정쩡해 앉아있으니 계집이 하얀 손등으로 빨간 입술을 살짝 가리우고 방싯 웃으며 이번에는 그리 서툴지 않은 조선말로 말했다.

《태수님이 보내는것이니 받으세요.》

계집은 소반에 담아가지고 온 자그마한 나무궤를 두손으로 들어바치였다.

반들반들 옻칠을 한 궤를 열고보니 큼직한 은덩이 세개가 번쩍거리고있었다.

어둔이는 이렇게 큰 은덩이를 눈앞에 보기가 처음이였다. 눈짐작으로도 한덩이가 줄잡아 쉰냥은 잘 될것 같았다.

은 1냥이면 《상평통보》 옆전 200잎이고 그것이면 백미 10말을 바꾸는 시절이였다. 그러니 쉰냥짜리 은 세덩이면 옆전 3만잎인데 그것을 흰쌀로 치면 천오백말이요 상목으로 치면 백쉰필폭이다.

어둔의 얼굴에는 사뭇 놀라운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잠시후 어둔이는 말없이 은궤를 밀어내놓으며 계집에게 소리를 질렀다.

《육실할것들… 나한테 이런것은 왜 가져오는거냐? 당장 가져가거라!》

그럴줄 알기라도 했다는듯이 계집은 공손히 은궤를 도로 받아서 한옆으로 치워놓더니 이번에는 소반에 담긴 술항아리를 두손으로 받쳐들고 어둔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계집의 몸에서 야릇한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술은 재물이 아니오니 사양말고 드세요.》

어둔이는 술이라는 바람에 귀가 번쩍 열리였다.

《태수님이 인사로 보낸것이니 사양마세요.》

계집이 거듭 권하자 아무말없이 앉아있던 어둔이가 술항아리를 흘끔 돌아다보았다.

(마시고 한잠 자고나면 그만이 아닐가? 별것 있나? 에라, 모르겠다.)

어둔이는 한걸음 썩 나앉으며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부어라!》

어둔이는 마시고 계집은 붓기를 연방 대여섯번을 넘기고나자 방안에는 제백술의 그윽한 향기가 가득 퍼지고 어둔의 몸에는 차차 술기운이 번지여 얼굴이 벌거우리해졌다. 그에 따라 마음도 차차 헤퍼지고 말도 헤퍼졌다. 물고기안주를 긴 대저가락으로 때맞추 집어주며 입안의 혀처럼 곰살궂게 돌아가는 왜계집의 웃음도 싫지 않아서 어둔이는 껄껄 웃으며 한마디 했다.

《이년, 잠은 혼자 자도 술은 혼자 마시지 못한다는데 너도 한잔 들지 않을테냐?》

《호호… 소원이라면야 무엇을 주저하겠나요.…》

계집이 몸을 꼬며 깔깔거리고나서 연거퍼 두석잔을 마시였다. 그러더니 숨을 할딱거리며 어둔의 곁으로 바싹 기여들었다. 어둔이는 아주 억망으로 취하고말았다. 까닭없이 마음이 들뜨기도 하고 구슬퍼지기도 하고 떠오른 생각이 저절로 입술로 슬슬 쏟아져나왔다.

《허허… 육실할 년, 왜계집이 분을 바르구 연지를 찍고… 쥐를 잡아먹었느냐? 주둥이는 왜 그 모양이냐. 이 어둔이가 술을 아무리 마셔두 뼈까지 녹지 않으니 걱정은 없어. 그렇지 않구… 술이 뭐 뼈를 녹이는 약이라더냐. 마음이야 훈훈해지지만… 이년, 또 부어라!》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어둔이는 문득 어순이 생각이 떠올라서 술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후- 긴 한숨을 토하였다.

《불쌍한 년이지… 아비에미를 왜놈에게 다 잃고… 가엾은 년이지… 인젠 룡복이를 새서방으로 맞이하구 락을 보게 됐구나 했더니 저꼴이 되구말았지. 육실할 대마도놈들, 도적질을 하다 못해 사람까지 잡아가? 인두겁을 쓴 짐승같은놈들, 당장 가서 찾아올터이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두 어순이를 구원할터이다. 이놈들…》

피발이 벌겋게 일어선 어둔의 눈에서 눈물이 드르르 굴러내렸다.

《룡복이 이 자식아, 너는 여기서 그냥 왜놈들과 입씨름이나 할 생각이냐? 내게는 울릉도보다 어순이가 더 중하다. 뭐 어째? 나라두 모르는 개놈이라구? 흥, 나는 상. 놈이야. 너는 뭐 개발바닥보다 못한 상놈이 아니냐? 대대로 천하디천한 능로군이지. 나라일은 량반눔들이나 하라구 해라. 나는 어순이를 저렇게 왜땅에 내던지고는 못살겠다. 가슴이 터지구 뼈가 부서지는것 같아서 못살겠단 말이다. 육실할… 누가 널 보구 울릉도를 지켜내라더냐? 덜된 자식! 네가 어순이를 잊을수가 있니? 안 잊었다구? 그럼 인제라두 어순이만 찾으면 두말없이 돌아가겠니? 돌아가지 않구. 난 돌아가겠다. 이년, 부어라!》
어둔이는 눈이 말똥말똥해서 제 말에 귀를 기울이는 계집앞에 빈잔을 내던졌다.

《호호… 그만 취하셨나봐요.》

《뭐? 내가 취했다구? 허허허… 고년, 네년이나 취했지.…》

《호호… 정말 취했어요. 그런데 어순이라니 그건 누군가요?》

《어순이? 그거야 내 녀동생이지. 룡복이와 약혼했단 말이다. 약혼이라는게 뭔지 알기나 하니? 왜년이 뭘 알겠니… 이년, 부어라.》

계집은 짐짓 취한체 어둔의 어깨에 화끈 단 볼을 비비며 아양을 떨었다.

《이번에 태수님의 말만 잘 들어주면 무슨 소원이나 다 들어주겠다고 하니 한번 태수님을 조용히 만나보세요. 기회를 만들어올릴터이니… 그렇게 하지요? 네? 대답을 해요. 원하는것은 다 드리겠대요. 아유- 더워…》

계집은 어둔의 무릎우에 몸을 실리며 펴놓은 이불쪽으로 다리를 펴고 비스듬히 쓰러진다. 어느 서슬에 허리띠를 풀었는지 기모노앞섶이 활짝 벌어지면서 빨간 고시마끼(일본녀인들이 속에 입는 짧은 치마)사이로 허연 알몸이 드러났다.

《엉?》

그것을 본 어둔이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에는 이상한 빛이 이글거리였다.…

갑자기 흐리터분하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났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있나.…)

무딘 도끼등으로 머리를 후려치듯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오르자 어둔이는 계집의 부드러운 몸뚱이에 깔린 한쪽 무릎을 스르르 뽑으며 뒤로 물러앉았다.

눈에서 시퍼런 불빛이 이글거렸다.

《어서 대답해요. 그러겠다고 대답만 하면 한평생…》

《이 구미여우같은 왜년!》

어둔이는 이를 부드득 갈며 천천히 팔을 뻗쳐 나무뿌리처럼 억센 손으로 묵직한 술항아리를 꽉 거머쥐였다.

눈치빠른 계집은 악!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머리우로 번쩍 쳐들리는 술항아리를 보자 계집은 겁에 질려 비단을 찢는듯한 소리를 내지르며 미닫이를 열고 밖으로 내뛰였다.

《쾅, 쟁그랑!》

문턱에 날아가 맞은 술항아리가 산산쪼각이 났다.

열린 문으로 찬바람이 휙- 불어들어오면서 은초대우에서 가물거리던 초불을 꺼버렸다.

칠흑같이 캄캄한 방안에서 뼈가 으스러지는듯 한 어둔의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아, 육실할 놈의 술…술…》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바람에 어둔이는 천근같이 무거운 눈을 떴다.

세면물을 떠가지고온 종자녀석의 얼굴이 보이였다.

뻐개지는듯이 아픈 머리, 비단이불… 문득 지난밤 일이 어지러운 한마당의 꿈처럼 되살아났다.

이불을 거두고 어지럽게 널린 깨진 사금파리들을 주어가지고 나갔던 종자녀석이 잠시후 아침상을 들고 다시 들어왔다.

제백술을 큰잔에 찰찰 넘게 부어놓자 어둔이는 구역질이 나는듯 이마살을 찌프리였다.

《생각이 없다. 찬물이나 한사발 가져오너라.》

종자녀석이 조리를 찰찰 끌며 급히 나갔다가 물을 떠가지고 돌아왔다.

물 한그릇을 다 마시고나니 조금 정신이 드는듯 하였다.

《나와 함께 온 사람은 어디 있느냐?》

《지금 태수님께서 부르시여 갔을것입니다.》

《태수한테 가있단 말이냐?》

《예.》

《그럼 그리로 가자.》

어둔이는 그때까지 방바닥에 그대로 내버려져있는 은덩이가 든 나무궤를 집어들고 일어섰다.

태수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룡복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어제밤도 룡복이와 함께 있었으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것이였다.

지난밤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꺼림직하였다.

왜놈들이 나를 어떻게 볼가.

조선사람들을 대체 뭘로 보겠는가.

나라나 고향은 안중에 없고 술밖에 모르는 놈으로?

어둔이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육실할… 나도 나라 귀한줄은 아는놈이다. 량반놈들 미운 생각때문에 좀 게정을 부려본것이지만… 나라구 왜 태를 묻은 제 고향을 모를수 있겠는가.

어둔이는 괴로운 생각에 잠겨 힘들게 걸음을 옮기였다.

그런데 종자녀석을 따라 관사로 나와보니 룡복은 보이지 않고 수방석을 깔고 장침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던 태수가 상글상글 웃으며 맞이하였다.

《어서 오시우. 그래, 밤은 편히 지내셨소?》

어둔이는 그 말뜻을 모르기도 했지만 굳이 알고싶지도 않은듯 아무 응대도 없이 손에 들고있던 나무궤를 태수앞 누비돗자리우에 털썩 내던졌다.

《아니, 어째 도루 가져오셨소?》

태수의 말을 종자녀석이 대강 번져주자 어둔이는 마쯔다이라의 정수리를 노려보며 부르짖었다.

《어째 가져왔느냐구? 육실할… 그걸 몰라서 묻느냐?》

어둔의 말뜻을 제나름으로 대강 짐작한 태수가 간사하게 웃었다.

《아, 알겠소. 그게 너무 약소해서…》

마쯔다이라는 꼭같이 생긴 나무궤 두개를 더 꺼내놓으면서 여전히 상글상글 웃었다.

《너무 약소한 물건인줄은 나도 아오만 그만 돌아가자고 안상을 잘 설복해준다면 얼마든지 더 드리겠소. 녀동생을 잃은 박상이나 약혼녀를 잃은 안상에게는 조금도 손해될것이 없는 일이니… 그렇게 해주시겠소?》

(뭐라구? 약혼녀를 잃은 룡복이라니… 이놈이 그걸 어떻게 아는가? 그것을 구실로 설복을 해보자구?)

어둔이는 흠칫 놀라며 온몸이 굳어졌다. 눈앞에는 취중에 자기가 하는 말을 낱낱이 귀기울여 듣던 왜계집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아, 술에 빠졌던것이 아니라 왜놈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구나! 눈앞이 캄캄해왔다.

저 새노란 삵의 눈알을 번뜩거리며 안절부절 대답을 기다리는 태수놈… 눈앞에 벌려놓은 은덩어리들… 아양을 떨던 계집들과 진수성찬… 술… 이 모든것이 무엇을 뜻하는것들인가가 문뜩 깨달아졌다. 그 모든것들은 왜놈들이 지금 울릉도를 차지하려고 얼마나 피를 물고 날뛰는가를 말해주는것이 아닌가.

내가 정말 미련한 놈이였구나, 어순이를 위한다고 하면서 눈뜬 소경이 되여 무슨 일을 저질렀나. 생쥐같은 왜놈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다니… 릉지처참을 당해도 할말이 없는 놈이 되였구나, 취중에 지껄인 말은 다시 주어담을수도 없으니 이걸 어찌한단 말인가, 룡복아, 이 못난 놈을 죽여다우.…

어둔이는 눈앞이 캄캄하여 한동안 몸을 움직일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갈퀴같은 두손을 천천히 내뻗치여 은덩어리가 든 나무궤를 꽉 움켜쥐고 태수의 낯짝을 노려보았다.

《이놈아, 그래 사람을 대체 뭘루 보구 이따위 수작이냐? 나더러 룡복이를 설복시켜 돌아서게 하라구? 네놈들이 하는 수작을 보고나니 설복은 고사하고 내가 도리여 분통이 터져서 못 견디겠다.》

눈치빠른 종자녀석이 이 말을 그대로 번져놓을수 없어서 벌벌 떨기만 하는 바람에 마쯔다이라는 어둔의 말뜻은 짐작하지 못하였지만 표정이며 행동거지로 미루어보아 당장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것을 재빨리 눈치챘다. 흠칫 물러앉으며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무슨짓인가?》

《뭐가 어째? 이 생쥐같은 놈아, 그래 이 어둔이는 제 누이동생과 술이나 은덩이밖에 모르는 놈인줄 아느냐? 제 고향두 알구 제 나라두 안다. 그게 다 제 살점이나 같다는것두 안단 말이다.》

어둔의 두눈에는 불덩이같은 눈물이 어룽거리였다. 량손에 움켜쥐고있던 나무궤를 마쯔다이라의 면전에 힘껏 내던졌었다.

《이 더러운 물건은 네놈이나 가져라!》

번쩍거리는 은덩이들이 와르르 굴러나와 마쯔다이라의 발치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어둔이가 술에 취하여 쓰러지던 그날밤, 룡복이가 든 방에서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었다.

은덩이와 술병을 든 왜계집이 분내를 날리며 들어와서 울릉도의 일을 더 말하지 말고 돌아가주면 태수가 재물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는데 생각을 다시 해보는것이 어떤가고 온갖 요사를 떨었다.

하지만 룡복이가 껄껄 쓰겁게 웃고나서 능숙한 왜말로 이웃나라 사람을 그렇게 례절에 어긋나게 대하는것은 아무리 천한 심부름을 하는 녀자의 처지라해도 부끄러운 일이라는것을 알아들을만 하게 말하자 계집은 벌써 술이나 은덩이에 꺾이울 사나이가 아니라는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부어놓은 술잔과 은궤를 버려둔채 방에서 나가버리였던것이다.

다음날 아침에 룡복은 그 은궤를 세면물을 떠가지고 온 종자녀석에게 주었다.

《이것을 너희 태수에게 도루 가져다 바쳐라.》

《무엇이라고 말씀 전할갑쇼?》

《그저 가져다 바쳐도 뜻을 알것이다. 하지만 구태여 묻거들랑 천만금으로도 살수 없는것이 세상에 있다는것을 모르는것이 참으로 가련하다고 하더라구 전하거라.》

《알겠소이다.》

종자녀석은 갑신 절을 한 후 조리를 찰찰 끌면서 관사쪽으로 향하였다. 잠시 생각을 굴려보던 룡복은 그를 다시 불러세웠다.

《한가지만 조용히 묻겠다. 너희네 막부가 있는 에도(오늘의 도꾜)가 여기서 몇리나 되느냐?》

종자녀석은 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한동안 머뭇거렸다.

《륙로로는 어디까지 가고 배길로는 또 몇리를 가야 하는지 모르겠느냐?》

분명 알고있는듯 했으나 종자녀석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잘 모르겠사와요.》

《그럼, 이 성안에 조선사람들이 살고있는 곳을 좀 알려줄수 없겠느냐?》

종자녀석의 눈에는 더욱 의심하는 빛이 어리였다.

《모르옵니다.》

《그렇다면 다른데 가서 물어볼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구나.》

룡복은 종자녀석이 들으라는듯이 혼자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나서 《내가 이런걸 묻더란 말을 어디 가서두 하지 말어라. 알겠느냐?》하고 여러번 다짐을 두었다.

종자녀석은 종종걸음으로 태수가 거처하는 관사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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