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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꾸에서 나는 빛좋고 보드라운 누비돗자리를 깐 호끼주관사의 널직한 방, 주홍빛비단휘장을 드리운 구석쪽에 수놓은 삼층방석을 깔고 나무장침에 의지하여 한 중늙은이가 앉아있었다. 몸집이 자그마하고 해사한 얼굴에 가로세로 잔주름이 건너간 사람이였다. 그는 머리칼이나 겨우 가릴만 한 바리깨같이 둥글납작한 모자를 눌러썼는데 모자우에 솟은 뾰족한 꼭지에는 옻칠을 한 까만 나무비녀가 가로질리고 그뒤로 길이 한자남짓, 너비 두어치가량 되는 외가닥뿔이 휘우듬히 늘어져있었다.

이른바 《일각모》라고 하는 관모로서 당시 막부장군이하 각주 태수들이 다 이런 모자를 쓰고있었다. 일각모를 쓰고 중의 장삼같이 길고 소매가 넓은 검정옷에 알락바지를 받쳐입은 호끼주 태수 마쯔다이라 신따로는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두눈을 감은채 움직일줄을 몰랐다.

그의 뒤자리에는 얼굴이 해사한 종자녀석 둘이 무릎을 꿇고앉아서 분부를 기다리고있었다.

내리덮인 얇은 눈가죽이 파들파들 떠는것을 보던 마쯔다이라는 지금 매우 상서롭지 못한 생각에 잠긴것이 분명하였다.

쥐죽은듯 고요한 방안에 그의 거친 숨소리만 들리였다. 그 거친 숨소리가 방안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든다기보다 아주 살벌하게 만들고있었다.

《우둔한놈… 미련하기라니…》

그는 지금 오끼시마 도주에게 눈먼 욕을 퍼붓고있었다. 오끼시마도주가 조선어부 두사람을 끝내 굽혀내지 못하고 자기에게 넘겨버린것때문이였다. 아주 두말을 못하게 해서 돌려보내라고 했더니 어떻게 우둔하게 드다루었는지 그자들이 돌아가기는 고사하고 기어이 흑백을 따질 잡도리일뿐아니라 그 기세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닐수 없었다.

물론 울릉도는 조선의 섬이다. 그러나 벌써 오래전부터 그 섬은 비여있으나 다름이 없고 조선측에서도 거의 내버려두다싶이 하고있다는 섬이였다.

그렇지만 조선에서 그 섬에 대한 령유권을 아주 포기한것은 아니였다. 수십년전에 쯔시마도주가 조선정부의 태도를 알아보려고 그 섬을 조사해보겠다고 했다가 단호히 거절당한것이 그 뚜렷한 증거인것이다.

하지만 그후 쯔시마사람들은 조선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도적고양이처럼 섬으로 자주 드나든다는 소문이 있었다. 물산이 특이하고 기름진 그 섬에서 품질이 좋은 해산물과 목재 등을 가져다 큰 리익을 본다는것이였다.

그런데 그 섬에서 제일 가까이 자리잡은 호끼주가 그것을 보고 느침만 흘리며 앉아있을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끼시마와 호끼주해안의 장사치들을 은근히 부추겼더니 몇해전부터 그들이 울릉도로 슬금슬금 드나들면서 희귀한 해산물까지 가끔 가져다바치군 하였다.

그래도 조선측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조금만 손을 쓰면 아주 차지할수 있으리라는 기미가 느껴지자 부쩍 욕심이 생기였다.

그래서 점점 큰 선대를 들여보내서 쯔시마놈들의 기세를 누르는 한편 섬의 특산물들을 진상품으로 해마다 막부에 올려보내군 하였다. 그러면서 그것이 다께시마(죽도)에서 나온것이라는 표찰을 잊지 않고 붙여보내였다.

이렇게 해를 넘기고 또 넘겨가느라면 막부에서는 자연히 다께시마를 호끼주의 섬으로 알게 될것이고 자기는 계속 울릉도의 특산물을 가져다먹는 재미를 볼수 있을것이다.

아니, 일이 잘 번져지기만 하면 울릉도가 영영 호끼주의 차지로 될는지도 알수 없는 일이였다. 다만 조선측에서 계속 지금처럼 침묵을 지켜주기만 한다면 점차 모든 일이 뜻대로 될듯싶기도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 울릉도에 갔던 오오다니의 선대가 섬에 발도 붙여보지 못하고 쫓겨왔고 붙잡혀왔는지 제발로 따라왔는지 (졸개들의 말을 다 믿을수 없었다.) 조선어부 두사람이 선대에 묻어왔던것이다.

이것은 전에 없던 일로서 매우 상서롭지 않은 징조였다. 그러나 따라온자들이 공식관원도 아니고 섬에 고기 잡으러 왔던 어부에 지나지 않는자들이라니 한번 엄하게 다스릴 뜻만 보여도 두말없이 돌아갈줄 알았었다. 그런데 그자들이 기어이 울릉도가 조선의 지경이라고 하면서 굽어들지 않는것으로 보아 불집을 크게 일으킬 잡도리인듯 하였다.

마쯔다이라는 저으기 초조한 마음으로 생각을 더듬고있었다. 지금의 형편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번 사실이 크게 번져지지 않게 하는것이 상책이였다. 이번 사실이 조선의 조정에 알려지게 하는것은 자는 범의 수염을 건드려놓는것이나 다를바 없는 어리석은짓이였다.

또한 이번 사실이 막부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것인가?

지금의 도꾸가와막부는 일어선지가 겨우 90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동안에 막부정권은 일본 66주에 널려있는 지방할거세력들을 자기 날개밑에 몰아넣으려고 전력을 다하였으나 아직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기는 도꾸가와 이전의 가마꾸라막부나 무로마찌막부들도 그 통치기간은 수백년간에 이르렀지만 일본 전국에 대한 통일적인 지배를 실현하지 못한채 무너지고말았으니 90년이라는 기간이 무엇이랴!

지금 도꾸가와막부는 어떻게 해서라도 일본 전국에 대한 지배를 실현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하고있었다. 그런만큼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정세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특히 제일 가까운 이웃인 조선과의 《선린관계》를 유지하는것은 막부통치를 순조로히 확립하기 위한 관건적조건의 하나로 되지 않을수 없었다.

력사발전의 이러한 피치 못할 요인들로 하여 도꾸가와막부는 조선과 관계되는 크고작은 모든 일을 매우 신중히 처리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아직 《미소정책》의 자세를 조금도 변화시킬 엄두를 내지 못하고있었다.

호끼주태수 마쯔다이라 신따로는 이 모든 정세발전의 추이들을 깊이는 리해하지 못했으나 교활하고 간특한 인간들에게서 남달리 예민하게 발달하는 륙감으로 이 모든것을 낱낱이 가늠하고있었다. 때문에 이번 울릉도의 사실이 알려지면 막부는 틀림없이 울릉도출입을 금지시키려고 서두를것이라는것도 넉넉히 짐작할수 있었다.

마쯔다이라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번 사실을 감추어 말썽없이 처리하여야 한다. 그러자면?…)

갑자기 마쯔다이라의 숨결이 높아졌다. 조선어부 두사람을 쥐도새도 모르게 처리해버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문뜩 떠오른것이였다.

그러나 잠시후 그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울릉도에서 두사람이 배에 실려오는것을 40여명의 조선사람들이 다 보았다고 하니 그들을 잘못 처리하여 도리여 일이 더 크게 부르터질수 있었다. 일이 두 나라사이의 관계로 번져지면 일본막부와 조선정부라는 만만치 않은 두 돌틈에 끼여 화를 입을것은 자기밖에 없을것이다.

다시 눈을 감고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마쯔다이라는 이윽고 뒤에 꿇어앉아있는 종자녀석들을 돌아다보았다.

종자녀석들은 매를 본 까투리처럼 황급히 고개를 무릎사이에 틀어박으며 엎드리였다.

《급히 장로사마를 불러오너라!》

한 녀석이 깍듯이 대답하고 갑삭 일어서더니 세짝미닫이를 소리없이 열고 나갔다.

잠시후 석장(중의 지팽이)을 짚고 걸어오는 장로승의 느린 발자취가 들리였다. 종자녀석이 무릎을 꿇고앉아 두손으로 문을 열어주자 반반히 깎은 맨머리에 자색나는 장삼을 입고 그우에 가사를 걸친 늙은 장로승이 들어왔다.

장로는 천황의 관명을 받아 각주 태수들의 일을 보좌하는중이였다. 태수들은 무슨 일이든지 다 장로승의 조언을 받아 처리하였다. 장로는 막부의 명령서라든지 태수들이 막부에 올리는 장계문같은것들을 받아주고 써주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 66주의 태수들이란 다 인격이나 학식이나 수완이 남보다 뛰여나서 태수로 된자들이 아니고 대를 두고 세습으로 도주의 자리를 물려받은자들이여서 그중에는 오끼시마도주같은 우직하고 무식한자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 바보천치이거나 아주 글을 모르는자도 있었다. 그래서 글이나 가려볼줄 아는 중들이 곁에서 돌보아주지 않고서는 《정사》라는것을 제대로 볼수 없는 형편이였던것이다.

물론 호끼주태수 마쯔다이라 신따로는 바보천치도 아니고 글을 모르는자도 아니였다. 오히려 등치고 간을 빼먹는 따위의 일도 능사로 할줄 아는 위인이였다.

태수는 장로가 옆자리에 와 모로 꺾어앉는것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장로사마, 어찌 생각하오? 오끼시마도주놈이 우직스럽게 휘둘러놓아서 일이 부르터진듯 한데 어떻게 조처하면 좋겠소?》

늙은 장로는 목에 건 념주를 만지며 한동안 흉물스럽게 눈만 껌벅거리고 앉아있다가 귀간지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말씀드린바이지만 소승의 생각에는 조선어부 두사람이 울릉도 일에서 물러서도록 잘 설유하는것이 상책인줄로 압니다. 그래야 이번 일이 더 크게 번져지지 않을것이 아니옵니까.》

《장로의 말이 그럴듯 하오. 하지만 과연 저자들을 울릉도 일에서 물러서게 설유할 도리가 있겠는지… 그게 걱정이오.》

《태수님은 원래 사람다루는 솜씨가 령롱하신데 그까짓 조선어부 두엇쯤이야 무슨 걱정이겠나이까. 소승의 생각에는 그 조선어부라는자들이 울릉도가 제 나라 섬이라고 하면서 비록 장한체 하지만 근본이 천하고 무식한 배군에 지나지 않을줄 압니다.》

《아무렴, 그야 이를데 없지. 그자들이 무슨 관명을 띠고 온것도 아니고 사사로 울릉도에 와서 고기를 잡던 잡놈들이니까.…》

《그러하온즉 그자들을 주먹으로 다스리기보다는 재물로 다스리는것이 계책인줄로 압니다. 후하게 대접하고 값나갈 물건이나 쥐여준다면 구태여 저희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섬에 대한 일은 가뭇없이 잊어버리고 말썽없이 돌아갈줄로 아옵니다.》

늙은 장로는 주글주글한 알머리를 조아리였다.

《장로사마의 말이 옳다. 천하고 막된 어부들이라 제 배가 부르고 제 한몸이 편하면 그만이겠지 다른 생각을 할법이나 있겠는가.》

마쯔다이라는 종자녀석이 가져다바치는 차잔을 들고 천천히 마시다가 못미더운듯 한 눈길로 장로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조선사람이란 빈부귀천을 가릴것없이 일본에 대해서는 임진년의 원한을 오늘까지 잊지 않고있으니 저것들이 비록 상것들이라지만 무른 호박같지는 않을것이다.》

《지당한 말씀이오. 소승도 그것을 말씀드리고저 했소이다. 허지만 다 태수님의 사람다루는 수완에 달린것이니 그쯤한것은 손바닥 뒤집기나 마찬가지일줄 믿소이다.》

《그야 글쎄 두고보아야지…》

발라맞추는 장로의 말이 그리 싫지 않았던지 마쯔다이라의 얼굴에는 기꺼워하는듯 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데 내가 일본사람은 능히 다루어보았지만 조선사람은 아직 다루어본적이 없으니 어떨는지…》

《하하하…》

장로가 간드러지게 웃었다.

《태수님께서 너무도 겸사의 말씀을 하시옵니다. 사람이란 누구라 할것없이 다 저를 위하여 살다가 죽는 물건이온데 어찌 나라가 다르다고 그것까지야 다르겠소이까. 사람이란 남녀로소와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자기를 알고서야 남을 알며 자기일 다음에야 세상일을 알게 되옵니다. 세상에 영웅렬사가 있고 애국자라고 일컫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도 따지고보면 다 자기 한몸때문에 피도 뿌리고 몸도 바쳤을뿐 자기의 리해관계를 떠나서는 영웅도 애국자도 없는것이옵니다. 인간의 본도가 이러하온데 하물며 고기잡이로 입에 풀칠을 하는 저 어부놈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소이까. 제 한몸에 큰 리가 생긴다면야 굳이 고생을 사서 할 까닭이 없지 않겠소이까.》

마쯔다이라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둑어둑해오는 창밖을 내다보고있었다.

 

그 이튿날 저녁이였다.

룡복이와 어둔이는 심부름을 온 얼굴 해사한 종자녀석을 따라 왜관사로 향하였다. 관사 뒤뜰로 들어가자 여러가지 화초와 보기 좋은 나무를 심어 운치있게 가꾼 정원이 나지였다.

이것이 이른바 일본 에도시대에 관리들과 무사들은 물론 일반서민들속에까지 널리 류행되였다고 하는 왜인들의 정원인것이였다.

그 정원을 지나자 처마가 나직한 안채가 나타났다. 사치한 문양이 돋힌 미닫이문안에서 쏟아져나오는 환한 불빛에 비치여 널마루는 거울알처럼 알른거리였다.

《이리로 들어가세요.》

종자녀석은 쌍상투를 튼 머리를 곱삭 숙여 절을 하고는 어디론지 사라져버리였다.

룡복은 섬돌에 신을 벗어놓고 마루우에 올라섰다. 그러자 쌍미닫이가 저절로 소리없이 열리였다. 꽃과 나비를 수놓은 알락옷을 입고 머리를 높이 틀어올린 왜계집 둘이 량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가 문을 열어준것이였다.

룡복은 열린 문으로 방안을 살펴보았다. 누비돗자리를 깐 네모반듯한 널직한 방, 그 한가운데 옻칠을 한 길다란 상이 놓이고 상우에는 음식그릇이 놓여있었다. 흰 벽에는 족자 두엇이 걸려있고 그 아래에 놓인 옻칠을 한 대우에는 화분 두개가 청청한 빛을 뿜고있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육실할 놈들이 이건 또 무슨짓일가?》

어둔이가 룡복의 어깨너머로 방안을 살펴보며 어리둥절하여 중얼거렸다. 룡복이도 이럴 때는 어떻게 처신했으면 좋을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여간 들어가세.》

룡복이가 먼저 들어가서 상을 마주하고앉자 어둔이도 매우 거북한 몸가짐으로 덩지큰 몸을 엉거주춤하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안에 들어와 자세히 둘러보니 꽃과 새를 그린 접이병풍이 휘둘러쳐있는 안쪽에 다른 방으로 통하는 미닫이문이 보이였다. 그 문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문틈으로 들여다보는듯 한 느낌도 들었다.

(간사한 왜놈들의짓이니 별수 없겠지…)

룡복은 가소로운 눈길로 그 모든것을 일별하고나서 시치미를 떼고 음식그릇들을 둘러보았다. 옻칠을 한 나무접시에 몫몫이 담은 음식을 눈대중해보니 저편에서는 세사람이 나올 잡도리였다. 아니나다를가 안쪽 미닫이가 스르르 열리면서 세사람이 상앞으로 나왔다. 앞서나오는 키 자그마한자가 태수일것이고 가운데 선 알머리는 장로승일것이고 뒤따르는자는 무엇하는자인지 알수 없는 그닥 늙지 않은 왜인이였다.

태수는 상앞에 마주앉자 우선 한번 빙그레 웃어보이였다.

《잠간이나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룡복은 태수의 해사한 얼굴을 얼핏 바라보았다. 첫눈에도 우직스러운자가 아니라는것이 알리였다. 고양이같이 노란 눈알을 재빨리 굴리며 상글상글 웃는것이 벼룩의 간이라도 빼먹을것 같았다. 이런자와 마주앉기가 난생처음이여서 저으기 마음이 조여졌다. 하지만 아무리 간사하다 해도 어릴 때부터 이에 신물이 나게 보아온 왜관왜놈들과 같은 보잘것없는 왜놈의 족속이겠지 다른것은 아닐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으면서 넌지시 물었다.

《대체 뉘신지요?》

《아, 참 그렇구려. 하하하…》

태수는 정말 우습다는듯이 깔깔 웃었다.

《이것참, 동방례의지국 손님들앞에서 실례를 했소구려. 내가 일본국 호끼주태수 마쯔다이라 신따로이니 그리 알아주시오.》

태수는 구차스러운대로 자기 소개를 먼저 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 그러시우?》

룡복이도 빙그레 마주웃었다.

《나는 조선 동래부에 사는 안룡복이고 이 사람은 나의 동료인데 박어둔이라고 하오.》

《아, 안상, 박상… 좋소, 좋소. 하하하…》

태수는 다시 깔깔 웃은 다음 그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기다리고있는 계집들에게 어서 시작하라는듯이 눈짓을 하였다.

두 계집이 종종걸음으로 잠시 나갔다가 옻칠을 한 붉은 소반우에 그림채색이 아롱진 술항아리와 술잔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술항아리는 구다니야도꾸리라고 부르는 목이 긴것이고 술잔은 흙으로 빚어 불에 구은 불그레하고 접시모양으로 우가 벌어진것이였다. 왜인들은 이 잔으로 술을 권하는것을 존경의 표시로 여기면서 연회때나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에만 쓴다는것이였다.

술을 부어놓고난 계집들은 룡복이와 어둔이옆에 무릎을 꿇고앉아서 두손으로 잔을 받쳐올렸다.

《어서 드시오. 향기로운 제백술(당시 일본에서 좋은것으로 치던 술.)이니 사양 말고 드시오.》

태수는 저도 잔을 들며 여전히 술집 계집처럼 상글상글 웃었다.

《태수어른이 권하는것이니 어찌 사양할수 있겠소.》

룡복이와 어둔이가 빈 술잔을 내려놓자 태수는 다시 깔깔거리며 웃고 계집들은 다시 날렵하게 잔에 술을 부었다.

《어서 들고 먼길의 피로도 풀고 심중의 시름도 잊으시오.》

장로가 이렇게 말하자 룡복은 빙그레 웃었다.

《우리가 일본땅에 찾아온것은 제백술이나 마시려고 온것이 아니라 태수어른께 여쭐 말이 있어서 온것이오.》

《아, 안상이 찾아온 뜻은 다 알만 하오. 하지만 향기로운 술과 음식이 가득한 이 자리에서 그 말은 어울리지 않겠으니 오늘은 이 늙은 사람의 성의나 받아주시오.》

태수는 거듭 술과 음식을 권하면서 일본과 조선은 먼 옛적부터 이웃하여 가까이 지낸 나라로서 조선의 풍습과 문화가 일본에 전래된것이 많다느니 특히 호끼주지방은 조선과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곳이여서 더욱 그렇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을 길게 늘여놓기 시작하였다.

《우리 일본말에 장가들지 않은 젊은이들을 〈쭁가〉라고 하는데 이것은 〈총각〉이라는 조선말을 받아들인것이고 조선에서는 고구려때 된장을 〈밀조〉라고 불렀는데 그 말을 받아다가 일본에서는 지금도 된장을 〈미소〉라 하고있으니 두 나라사이가 어떠하다는것을 넉넉히 짐작할수 있지 않겠소.》

장로도 태수의 말에 발을 맞추면서 주어섬기였다.

《지금 일본땅에 널리 퍼진 불교만 해도 그렇지요. 그게 다 옛적에 백제를 거쳐 일본에 전해진것이고 고구려의 승려인 담징이라는이가 일본 법륭사의 유명한 벽화를 그려준것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지 않소이까. 조선은 우리 일본에 크게 빛을 베푼 나라라고 아니할수 없소이다.》

사양끝에 한잔두잔 받아마신 술이 얼마나 되였는지는 모르나 룡복이와 어둔이는 어느 사이에 거나해지고 시간도 퍼그나 흘러갔다.

태수와 장로가 능갈치게 엮어나가는 귀맛좋은 말을 듣다보니 룡복은 하려고 별러오던 말은 끝내 입밖에 내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숙소로 돌아오니 벌써 화려한 비단이불이 펴져있었다.

어둔이는 비단이불우에 네활개를 펴고 쓰러지자마자 코를 골았다. 하지만 룡복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호끼주태수를 만났던 일을 처음부터 돌이켜보았다. 꼭 무슨 마술에 걸렸다가 풀려난것처럼 모든것이 아리숭하였다.

왜 그전처럼 마음속에 별러오던 말은 한마디도 못했던지. 울릉도에 침입한 왜놈들의 소행을 낱낱이 까밝히지 못한것은 무엇때문이였던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휘황한 빛을 뿌리는 은초대, 울긋불긋한 금병풍, 향기로운 술과 기름진 음식, 호화로운 이부자리… 이 모든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을 요구하는것들인가.

갑자기 쇠망치로 후려치는듯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받아마신 몇잔의 술때문만이 아니였다.

무엇인가 끝없이 귀중한것을 놓치고 헤여날길 없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한것 같은 기분이였다. 룡복은 말없이 마음속으로 몸부림쳤다. 왜놈들의 간사한 꼬임에 빠질수 없는 자기였다. 그 꼬임에 빠지기에는 자기의 가슴속에 너무도 큰 원한과 아픔과 괴로움이 소용돌이치고있는것이였다.

어찌 잠시나마 그것을 잊을수 있단 말인가. 그것을 잊으면 자기는 얼을 잃은 사람이 되고만다.

룡복은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섰다. 가슴이 답답하여 창문을 열자 구질구질 내리는 여름비소리가 들리였다. 룡복은 캄캄한 어둠을 지켜보며 주먹을 부르쥐였다.

마음을 도사리고 왜놈들앞에서 떳떳해야 하리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물론 간사한 왜놈들과 떳떳이 맞서자면 자기의 기지와 담력과 림기응변하는 수완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놈들앞에서 떳떳치 못할 근거가 없는 자기였다. 제 나라 섬에 기여드는 도적을 쫓아왔으니 모든데서 당당하고 떳떳하였다.

룡복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한낮이 기울도록 왜놈들은 두사람을 다시 찾지 않았다.

룡복은 심부름을 들어주는 종자녀석에게 태수를 만나야겠으니 지체하지 말고 전하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에 두사람은 왜관사로 안내되였다.

《편히 쉬셨소?》

태수와 장로가 웃으며 두사람을 맞이하였다.

룡복이와 어둔이는 수놓은 방석을 깔고 태수와 마주앉았다. 어둔이는 어제 저녁의 술자리와는 달리 눈에 익지 않은 왜관사의 방치장이며 관복차림으로 마주앉은 사람같지 않은자들이 다 눈에 설고 역겨운것이여서 얼마동안은 매우 거북스러워하였다. 그러나 침착하게 태수와 마주 앉아있는 룡복이를 보자 저으기 마음이 가라앉는지 큰 몸집을 쭉 펴고 바위덩이처럼 무겁게 자리에 눌러앉아있었다.

룡복은 태수의 간사한 얼굴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태수어른을 만나자고 한것은 다름이 아니라 몇가지 해야 할 말이 있어서였소. 태수어른도 아시겠지만 울릉도는 먼 옛날부터 우리 나라 지경으로 선조의 백골이 묻혀있는 땅이요. 그런데 일본의 어부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며 고기를 잡고 나무를 베여가니 이런 무도한짓이 어디 있겠소. 얼마전에는 배 일곱척이 조총을 쏘아 섬사람들을 위협하면서 섬에 오르려 한 일도 있었기에 우리가 태수를 만나 이 사실을 밝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려고 찾아왔소. 그런데 저 오끼도주라는 사람은 우리를 도리여 죄인취급을 하려고 하였으니 도적이 매를 드는 격이라 아니할수 없소. 도주나 태수라면 다 이 나라의 관원인데 한 나라의 관원으로서 이웃나라 사람을 그렇게 대한다면 두 나라사이의 교린관계에 큰 허물이 아니겠소.》

류창한 왜말로 사리정연하게 들이대자 태수와 장로는 뜻밖이였던 모양으로 매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일시 당황해하던 순간이 지나자 볕을 본 구렝이가 똬리를 풀듯이 태수의 얼굴에는 다시 간사한 웃음이 피여났다.

《안상이 하시는 말씀의 뜻은 짐작할만 하오.》

문밖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있던 계집들이 종종걸음으로 차와 과일따위를 차려들고 들어왔다.

《자, 어서 들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기 바라오. 나는 예로부터 교린관계가 두터운 이웃나라에서 오신분들이기에 안상, 박상을 귀한 손님으로 여기고있소. 손님은 주인의 환대에 따르기마련인데 마음껏 쉬고 즐기다가 돌아가면 고맙겠소. 물론 가실 때는 나의 인사가 따로 있을터이지만… 그러니 굳이 섬이니 지경이니 하는 말로 마음을 번거롭게 할 까닭이 어디 있겠소. 그런 일은 다 론의할 자리가 따로 있을것이니 그만 잊어주기 바라오.》

《태수님 말씀이 옳소이다.》

장로가 알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나라의 관직을 맡은 태수님께서도 번거롭게 여기시는 그런 일을 고기잡이로 생업을 삼는분들이 즐기시다니… 그럴 법이 어디 있겠소이까. 옛 성인들도〈안부수정〉(자기 직분에 맞게 처신하는것.)하는것이 백성의 도리라 하였으니 자기 직분을 지키는것이 제일인줄 아옵니다.》

룡복의 얼굴에 쓰거운 웃음이 떠돌았다.

《그러니 고기잡이군이 나라일에 나서는것이 분수에 넘는 일이란 말인데 고기잡이군도 제 나라 바다가 있어야 고기를 잡을것이 아니겠소. 스님은 제 나라 땅이 없다면 허공중에 서서 념불을 하시겠소? 념불같은 빈 넉두리도 허공중에서는 못할터인데 고기잡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소.》

장로는 눈길을 상밑에 떨구고 마른 기침만 톺았다.

《허허… 안상, 박상. 그러지 말구 내 말을 좀 듣소.》

태수가 저 혼자 차를 몇모금 마시고나서 말을 이었다.

《내게 생각이 다 있으니 죽도니 울릉도니 하는것은 부디 잊어버리구 어서 식기 전에 향기로운 차나 드시오.》

룡복은 어처구니가 없다는듯 천정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러니 몇잔의 술이나 차대접으로 제 나라 섬을 잊으라는것인가요? 우리 선조에 멀리로는 박제상이 있고 가까이로는 리순신장군이 계신다는것을 모르지는 않을터인데 어찌 그렇게 욕된 말을 기탄없이 한단 말이요?》

《하- 곡해하지 마시오. 신라의 박제상이나 충무공 리순신장군을 우리가 모를리 있겠소이까.》

장로가 조심스레 룡복의 얼굴을 훔쳐보며 말하였다.

《하지만 두분은 국록을 받는 관원도 아니요, 량반도 아닌데 굳이 그러실것이 있겠는가 하는것이지요. 만일 두분이 이번 울릉도의 일을 아주 잊어주기만 한다면 태수님께서는 한평생 배불리 먹고 즐겁게 지낼만 한 재물까지 주실 의향이시니 천재희유의 이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랄뿐이요.》

《우리는 한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소.》

룡복의 눈에서는 노기가 번뜩이였다.

《우리가 량반도 아니고 관원도 아니지만 분명 조선사람이요. 만약 태수도 오끼섬도주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성의없이 대한다면 할수없이 막부에 상소를 할수밖에 없소. 그리고 이번에 울릉도에 침범한 호끼주사람들이 저들의 죄를 쯔시마에 넘겨씌우려고 한 사실도 막부에 알리는수밖에 없소.》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마쯔다이라는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시치미를 떼지 마시오. 이번에 울릉도에 침범한자들이 저들은 쯔시마에서 왔다고 우리를 속였으니 그것은 후날에라도 책임을 쯔시마에 넘겨씌우려는것이 아니고 무엇이오?》

마쯔다이라는 말문이 막히였다.

선대를 떠나보낼 때 두목놈에게 만일 일이 부르터질것 같으면 쯔시마배인듯이 꾸미고 도망쳐오라고 일러보낸것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것이였다.

그것이 막부와 쯔시마도주에게 알려지면 일이 어떻게 될것인가?

마쯔다이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발뺌을 해보았다.

《그럴리 없소.》

《그것은 선대의 두목이라는자를 불러오면 당장이라도 증명할수가 있으니 그렇게 하겠소? 분명히 말하오만 우리가 일본땅을 밟은 이상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울릉도에 일본배를 보내지 않겠다는 대답을 받기전에는 돌아갈수 없다는것을 미리 다짐두는바이니 똑똑히 알아두시오.》

마쯔다이라는 알았다는 뜻으로 머리를 가볍게 끄덕이였다.

《안상이 비록 고기잡이에 매인 몸이지만 간직한 그 높은 뜻을 가히 짐작할만 하오. 내 관복입은 50늙은이로 나라를 위한 그 기백과 용기를 부럽게 여기는바이오.》

태수는 서둘러 감동된 표정을 지으며 하던 이야기는 후날 마저 하기로 하고 오늘은 우선 돌아가서 푹 쉬라고 간청하였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선 룡복은 태수와 헤여져 마당으로 나섰다. 젊은 왜인이 급히 뒤따라나오며 귀빈으로 모시라는 태수의 분부가 있었으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였다.

두사람은 후원별채로 안내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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