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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바람이 모질게 부는 날이였다. 하늘은 먹장같이 흐리고 찬 비방울까지 흩날려 떨어지고있었다.
이날 한낮이 기운 다음이였다. 무슨 일때문인지 뒤산에 올라갔던 쇠동이가 멀리로 떠들어오는 왜선들을 보고 포구로 바위돌처럼 굴러내려오며 소리질렀다.
《왜선이 들어온다! 왜놈들이다!》
짬짬이 전복과 해삼따위를 따들이고있던 목서방네 사공들도 이날은 날씨가 나빠서 바다로 나가지 않았고 룡복이네 일행도 멀리 나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쇠동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40여명의 장정이 활과 창을 둘러메고 포구에 모여들었다.
《개놈들, 온다온다하더니 기어이 기여들었구나!》
《오늘은 어디 쓴맛을 좀 봐라!》
사람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며 웅성거리고있을 때 대섬쪽에서 흰 돛을 편 왜선들이 줄레줄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저것 보게. 모두 여섯척일세.》
《아니 일곱척이네. 섬뒤쪽에 하나 더 있지 않나?》
독나비날개같은 일곱개의 흰돛이 검푸른 바다우에서 희뜩희뜩 움직여 들어오고있었다.
룡복은 물가에 나가 긴장한 눈초리로 왜놈들의 행동을 살피고있었다. 최서방과 목서방이 곁으로 다가오고 어둔이와 쇠동이도 그의 곁에 서서 왜선들을 노려보고있었다.
왜선쪽에서도 물기슭에 하얗게 널려선 사람들을 알아본 모양이였다. 검은 옷을 입은 왜놈들이 배우에서 황급히 뛰여다니는것이 보이였다. 섬쪽을 손가락질하며 뭐라고 지껄이는 놈도 있었다.
배가 섬쪽으로 점점 다가올수록 다치면 터질듯 한 긴장이 배와 섬사이에 서려돌았다.
문득 맨앞에 선 배에서 탕! 하고 조총소리가 터지였다. 그것을 신호삼은듯 뒤이어 조총소리가 탕, 탕! 하고 몰방으로 터지면서 왜선들의 갑판우에서 흰연기가 물씬물씬 피여오르는것이 보이였다.
《아니, 저 죽일 놈들이… 도적이 매를 든다고 제놈들편에서 먼저 총질을 해댄단 말인가?》
누군가 격분을 참을수 없어 소리를 질렀다. 룡복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목청껏 웨쳤다.
《놀라지들 마우. 우리를 총소리로 놀래워놓고 섬으로 기여들려구 잔꾀를 부리는것이니 놀라지들 마우.》
《흥, 그 개방귀같은 조총소리로 누굴 놀래워보려구? 육실할 놈들…》
성미 급한 어둔이가 활시위를 우쩍 당기며 분이 치밀어 펄펄 뛰였다.
룡복은 불이 이는듯 한 눈초리로 왜선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앞선 배 두척은 이미 활 한바탕 거리안에 들어있었다.
《살을 날려라!》
룡복은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활을 가진 사람이 20여명이였으므로 스무개의 화살이 거의 동시에 왜선으로 날아갔다. 빗나가는것도 더러 있었으나 화살 십여개는 갑판과 돛대와 배전 여기저기에 들이박히였다.
왜놈들은 뜻밖에 우박치는 화살이 쏟아지자 황급히 돛폭뒤에 숨어서 되는대로 조총을 쏘아댔다.
철환이 날아와 모래불에 박히고 화살이 날아가 배전에 박히기를 거듭하는 사이에도 왜선은 바람에 밀려 기슭으로 점점 가까와지고있었다.
갑판우에서 갈팡질팡하는 왜놈들의 얼굴까지 알아볼 정도가 되였다.
《쇠동아, 모닥불을 피워라! 궁수들은 내 말을 듣소!》
룡복은 활을 쏘는 사람들에게 다시 소리를 질렀다.
《살에 불을 달아 돛폭을 맞히우. 불화살을 쏘시우!》
《옳거니 그것 참, 임자 지휘하는 솜씨가 참 신통할세!》
룡복의 곁에 있던 최서방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발을 구르며 신명을 돋구었다.
《이 사람들아, 모두 불화살을 놓게. 불화살로 왜선에 불을 지르게.》
검은 연기를 펄펄 날리며 불화살이 날아가기 시작하였다. 송진과 기름에 끓인 불심지는 한번 불이 당기면 여간해서는 꺼지지 않을뿐아니라 배전이나 돛폭에 맞으면 기름과 송진이 녹아흐르면서 끝끝내 불을 달아놓고야마는것이였다.
배전과 돛폭 곳곳에 불이 당기여 검은 연기가 피여올랐다. 왜놈들은 꼬리에 불달린 짐승처럼 그것을 끄느라고 총을 쏠 겨를이 없이 돌아쳤다. 갑판에 떨어진 불은 발로 비벼끄고 배전에 달린 불은 작대기로 털어버리기도 했지만 높은 돛대우에 당긴 불은 어쩔수가 없어서 쳐다보며 소리만 지르고있었다.
룡복은 궁수들에게 다시 소리를 질렀다.
《높은 곳을 쏘시우! 높은 곳을!》
불화살들이 돛대꼭대기를 향해 날아갔다. 드디여 돛폭에 불이 당기고야말았다. 두목인듯 한 왜놈이 당황하여 칼을 뽑아들고 불을 끄라고 졸개들을 몰아대는것이 보이였다.
(어리석은 놈들…)
룡복은 이발을 부득부득 갈며 왜놈들을 쏘아보았다.
(울릉도를 그렇게 쉽사리 차지할줄 알았더냐?)
이때 불붙는 돛이 두목놈의 등뒤에 사태가 쏟아지듯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돛천이 타고 마루줄과 용천줄이 끊어지자 불붙는 돛이 헌 넝마처럼 무너져내린것이였다.
《앗!》 비명을 지르며 비켜서는 두목놈의 잔등에서도 연기가 피여올랐다.
급해맞은 두목놈이 소리를 질렀다.
《빨리 배머리를 돌려라! 빨리!》
배머리가 천천히 포구밖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먼 발치에 서있던 왜선들도 눈먼 총질을 탕탕 해대며 꽁무니를 빼기 시작하였다.
《왜놈들이 도망친다! 도망친다!》
섬기슭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이놈들, 불화살맛을 좀 더 보지 않구 벌써 삼십륙계 줄행랑이냐?》
최서방이 흰 수염을 후들후들 떨며 호통을 쳤다. 어둔이도 얼굴에 흐르는 땀을 팔소매로 씻으며 껄껄 웃었다.
《변변치 못한 놈들… 조총질을 좀 더 해보지 왜 그냥 도망치느냐? 육실할 놈들 같으니…》
왜놈들의 배 일곱척이 다 살맞은 구렝이처럼 대섬뒤로 꼬리를 감추며 사라지고있었다.
사람들은 통쾌한 마음을 걷잡지 못하여 발목까지 빠지는 모래불에서 덩실덩실 마구잡이춤을 추며 돌아갔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강강수월래》 노래소리가 터져나왔다.
둥둥! 두리 둥둥-
북소리가 울리였다. 젊은이들이 손을 맞잡고 모닥불둘레를 빙빙 돌아가며 춤을 추었다.
《우리도 추세나!》
서방이 흰 수염을 내리쓸며 룡복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럽시다!》
룡복은 북을 치는 젊은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여보게, 북소리를 더 크게 울리라구!》
룡복은 최서방과 함께 춤판에 뛰여들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춤이 되지 않았다. 마음껏 발을 구르고 어깨를 흔들며 춤을 추는 젊은이들의 머리우로 끝모르게 펼쳐진 캄캄한 밤하늘만 눈앞에 밟혀왔다.
비록 오늘 섬에 기여드는 왜놈들을 쫓아버리기는 했으나 저 캄캄한 밤하늘밑 낯선 섬에 끌려간 어순이는 과연 이밤을 어떻게 지내는지…
기뻐 날뛰며 춤추는 저 사람들속에 어순이가 있어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룡복은 더는 어울릴수 없는 춤판에서 조용히 벗어져나와 바다기슭으로 걸어나갔다. 발길은 저도 모르게 포구 한쪽 구석에 있는 바위앞에 멎어섰다.
어린 시절의 잊을수 없는 한토막의 추억이 깃들어있는 바위였다.
룡복이가 아버지와 함께 울릉도에 처음 왔던 바로 그때의 일이였다.
어른들이 바다로 나간 다음에는 룡복이가 어린 어순이의 동무가 되여 포구에 남군 하였는데 어순이는 땅에 묻힌 엄마 생각이 나서 자주 울먹이군 하였다.
그래서 룡복은 흰 모래불에 바위가 듬성듬성 널려있는 이곳으로 어순이를 데리고 와서 첫날색시가 타는 가마처럼 생긴 이 바위우에 어순이를 태우고 흔들면서 《이걸 타면 고운 색시가 된단다.》 하고 달래군 하였다.
그랬더니 한번은 《그럼 오빠두 한번 타봐》 하고 어순이가 졸랐다.
《남자가 색시가 되란 말이냐?》
《남자는 색시가 못되나?》
룡복은 싱그레 웃었다.
《남들이 웃는단다.》
《일없어. 나와 함께 타. 오빠두 색시가 되구 나두 색시가 되면 더 좋지 않아?》
룡복은 할수 없이 어순이와 함께 가마바위에 올라앉았다. 몸을 흔들자 바위가 앞뒤로 흔들리면서 마치 가마가 움직여가는듯 하였다.
그러자 어순이는 깔깔 웃으며 좋아하였다.
어순이는 다 큰 처녀로 자란 후에도 가끔 이 가마바위이야기를 하군 하였다.
한번은 다대포 룡바위우에 나란히 걸터앉아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고있는데 어순이가 느닷없이 물었다.
《룡이 오빠, 울릉도 가마바위가 생각나세요?》
《생각나지.》
《호호호… 그걸 이제 한번 타봤으면…》
《허허… 그러니 또 나와 함께 타야 하겠군?》
《어마나! 누가 함께 타쟀나요? 아이참…》
어순이는 활짝 붉어진 얼굴을 룡복의 잔등에 파묻으며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아무래두 타게 될걸… 그것도 진짜 가마를 말이요.》
《아이… 몰라요. 난 안 타요.》
처녀의 불같이 뜨거운 숨결이 봄날의 향기처럼 잔등으로 따스하게 스며들었다.
《그래, 그사이에 무슨 재미나는 일이라두 있었소?》
룡복이가 이렇게 묻자 어순이는 잔등에 얼굴을 묻은채 쓸쓸히 대답하였다.
《무슨 재미나는 일이 있겠어요? 다대포마을 최진사네 집에서 침모살이를 하는 늙은이가 있는데 글도 잘 알구 책도 많이 읽어요. 물론 우리 나라 언문글로 쓴 책이지요. 나도 가끔 빌려다 읽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어떤 글이 있는지 아세요? 호호호…》
어순이는 얼굴을 붉히였다.
룡복은 자기에게서 언문을 배우느라 매일같이 바다가 모래불에 손가락으로 긋고 지우며 애쓰던 일이 어제같은데 그동안 책까지 읽게 되였다는 어순이를 놀라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래, 어떤 글이 있었소?》
《참 재미있고 우스운 글이예요. 인조왕시절에 어떤 사람이 지은 시조라든가…》
《그걸 들려주오. 글이라는거야 혼자만 알고있자는게 아닌데…》
어순이는 룡복을 힐끔 쳐다보며 앵돌아진 소리로 말하였다.
《그럼 룡이 오빠는 왜 많은걸 알고있으면서두 나한테는 알려주지 않나요? 깔보나요? 난 이를 악물고 글을 읽었어요. 룡이 오빠한테 지지 않으려구.》
《허허… 내가 정말 큰 죄를 지었군. 아무러면 그렇다구 내가 어순이를 깔볼가?》
《깔보지 않으면? 이 어순이 생각은 다 잊었을테지요?》
룡복은 빙그레 웃었다.
잊다니… 어느 한순간도 잊은적이 없었다. 하지만 기다려지고 그리워지는 어순의 마음을 가득 채울만큼은 생각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그저 말동무나 되여주고 친절히 굴어주는것만으로는 불만스러울 어순의 저 뜨거운 마음, 한갖 처녀애가 아니라 활짝 핀 꽃과 같이 숙성한 처녀의 감미로운 그 심정을 미처 몰라주었는지도 모른다.
룡복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이였다.
《어순이, 혹시 잊을 때도 있는지 모르지… 하지만 꿈마다 난 어순이를 보우.》
어순이는 룡복이 몰래 방싯 웃고나서 여전히 뾰로통한체 하였다.
《거짓말이예요. 꿈에 본다는 말은…》
어순이는 잠시 생각을 더듬으며 시조 한수를 외우려는듯 하다가 그만 부끄러운듯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웠다.
《어서 말해보우. 그 시조라는 글에 그런것이 적혀있는 모양인데 한번 들려주오.》
어순이는 누가 들을세라 부끄러움을 타며 룡복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소곤거리였다.
사랑이 거짓말이 님 날 사랑이 거짓말이
꿈에 와 뵌단 말 그 더욱 거짓말이
날과 같이 잠 아니오면 어느 꿈에 와 뵈오리
외우기를 마치자 어순의 얼굴은 활활 불타는듯 붉어졌다.
그는 물새처럼 바위우에서 뛰여내리더니 달빛이 드리운 하얀 모래불 저쪽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룡복은 달려가는 어순의 등뒤에서 갈팡질팡 춤추는 붉은 댕기며 탄력있는 하얀 종아리를 휩싸며 펄펄 날리는 치마자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저렇듯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처녀로 자라난것을 비로소 알아본것이 자기로서도 놀라운 일이였다.
룡복은 달빛속으로 멀어지는 어순이를 쫓아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하얀 모래불을 밟으며 나는듯이 달려갔다.…
행복의 순간들은 왜 그리도 짧았던가. 어찌하여 그 잊을수 없는 추억이 깃든 이 가마바위앞에 어순이는 오지 못하고 나 홀로 서있게 되였는가.
룡복은 손바닥으로 바위우에 널린 흰 모래를 천천히 쓸어내리였다.
하염없이 바위를 쓰다듬는 그의 묵직한 손은 진정할수 없이 떨리고있었다.
모닥불둘레에서는 아직도 흥겨운 춤판이 벌어지고있었다. 두리둥둥 북소리, 노래소리, 기세좋은 웨침소리…
하지만 룡복은 그 소리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듯 바위만을 꽉 움켜잡고 서있었다.
룡복을 찾아헤매던 어둔이가 바위곁으로 다가왔다. 웬일인지 비틀걸음이였다.
《육실할… 네가 여기 와있으면 내가 혼자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란 말이냐?》
어둔이는 룡복의 괴로와하는 낯빛을 흘끔 살펴보더니 모래불에 두다리를 쭉 펴고 주저앉으며 일부스러운 혀곱은 소리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아, 육실할… 술이란게 좋긴 좋구나. 시큼털털한 탁배기지만 왜놈들을 몰아내고 마시니 꿀처럼 달구 시원하더란 말이야. 참, 희한한것을 보았어.
그 수염 허연 최서방이 곱새춤을 춘다는데… 허허허… 육실할… 승전고가 둥둥 울리구 술도 있는 이밤에… 넌 대체 뭐냐? 육실할… 골방샌님이냐, 새침떼기냐?》
룡복은 더 참을수 없는듯 갑자기 주먹으로 바위를 내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젠장, 그만 지껄이라구, 듣기 싫네.》
어둔이는 혀곱은 소리를 뚝 그치고 머리를 숙인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목메인 소리로 울부짖었다.
《나라구 왜 그 애 생각이 안 나겠나? 그 애 생각이 너무 나서 춤을 추었어. 탁배기두 마시구… 이 기쁜 날 그 애를 이 섬에서 보지 못하다니 이게 웬말인가?》
어둔의 뺨으로 굵은 눈물이 드르르 굴러내리였다.
정신없이 몸부림치는 어둔이를 부축하고 초막으로 돌아오는 룡복의 눈가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고있었다.
그날 밤, 사람들은 포구안 여러곳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을 새우며 섬을 지키였다. 왜놈들이 멀리 가지 않고있다가 밤중에 다시 기여오를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러나 무사하였다.
그다음날도 별일이 없었기때문에 사람들은 해삼, 전복을 뜯으려 다시 가까운 바다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왜놈들이 아주 도망쳐가버린것이 확실하였던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날, 이 생각을 뒤집어놓는 사건이 벌어졌다.
룡복은 해뜰녘에 어둔이와 함께 매생이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다. 며칠전처럼 대섬쪽으로 가는데 도중에서 쇠동이의 매생이를 만났다.
《이 녀석, 또 천부동으로 가는구나.》
어둔이는 만나자바람으로 롱질을 시작하였다.
《뭐 못갈데루 가우? 최서방 심부름을 가는데…》
《흥 뽕딸 구실이지… 육실할 녀석같으니…》
벌거우리해진 얼굴을 쳐들고 뭐라고 대꾸를 하려던 쇠동이가 《앗!》 하고 다급한 소리를 질렀다.
《룡복형님, 저게 웬 배요? 왜선이 틀림없소.》
고물쪽에 등을 돌려대고 앉아있던 룡복은 벌떡 일어서며 쇠동이가 가리키는쪽을 바라보았다.
놈들의 배 한척이 매생이를 향해 곧추 다가오고있었다. 쫓겨간줄 알았던 왜선들이 모두 대섬뒤쪽에 숨어있는것도 보이였다.
지금 다가오는 왜선도 모퉁이를 지키는 고양이처럼 대섬뒤쪽에 숨어있다가 매생이를 보고 달려나온것이였다.
(속았구나!)
룡복은 잔등으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리는것을 느끼였다.
(저놈들이 왜 이쪽으로 달려들가? 섬에 오르지 못하게 되니 사람이나 해치려구? 아니, 섬사람들을 바다로 끌어내려는게 아닐가?)
룡복은 머리에 떠오르는 의문을 미처 풀지 못한채 쇠동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저놈들을 맞받아가서 곡절을 물으며 시간을 끌터이니 너는 그사이에 급히 포구로 가서 왜선이 들어온다는것을 알려라. 절대로 바다로 나오지 말구 포구에서 막을 차비를 하라구 최서방한테 일러라. 바다에 나오면 왜놈들의 배는 많고 우리 배는 적어서 견디지 못한다. 알겠니?》
《알겠소. 하지만 왜놈들 배로는 못가우. 위험하우.》
《걱정말아. 시간이 급하니 어서 떠나거라.》
쇠동이는 룡복이와 어둔이가 노를 잡고 왜놈들의 배를 맞받아가는것이며 다가오는 매생이를 보자 왜놈들이 배전으로 우르르 몰려나오는것을 살펴보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포구쪽으로 노를 저어 달리기 시작하였다.
잠시후 등뒤에서 탕, 탕! 하고 조총소리가 두어번 들리였다.
쇠동이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쇠동이로부터 급한 소식을 들은 포구의 사람들은 한동안 어쩔줄 모르고 발을 구르며 당황해할뿐이였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소. 저 사람들 둘이서 왜놈들을 막을 도리가 있겠소?》
《그렇긴 하네만 룡복이 그 사람이 바다로는 절대로 나오지 말라구 당부를 하였는데 무턱대고 나갈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최서방도 흰 수염을 후들후들 떨며 안절부절할뿐이였다.
이때 누군가 《왜놈들의 배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왜선이 대섬쪽으로 빠져나가고있었다. 갑판우에서 서성거리는 여러명의 왜놈들이 보이였다.
《아니, 저게 룡복형님이 아니우?》
쇠동이가 왜선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저것 보우. 왜놈들속에 흰옷 입은 사람이 둘이 섞여있소.》
《옳네, 그 사람들일세.》
《끝내 잡혔구나!》
사람들이 발을 구르고 손을 흔들며 안타까와 소리를 질렀다.
《룡복이-》
《어둔이-》
왜선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아이구, 큰일났구나. 저놈들이 사람을 싣고 그냥 달아나는구나!》
이때 멀어지는 배우에서 흰옷 입은 두사람이 크게 손을 흔드는것이 보이였다.
《저 사람들이 손을 흔드는걸 보니 붙잡힌것이 아닐세. 붙잡혔다면 손을 흔들 경황인들 있겠나? 그렇게 호락호락 잡힐 사람들이 아니지…》
생각깊은 최서방이 이렇게 말하자 쇠동이가 울먹거리며 투정을 섞어 대답하였다.
《붙잡히지 않았으면 왜놈들의 배에는 왜 올랐겠어요? 틀림없이 잡혔어요.》
쇠동이는 눈물을 훔치며 매생이에 뛰여올라 미친듯이 노를 저어 왜선을 쫓아가기 시작하였다.
《룡복형님, 못가우, 못가우-》
노가 부러질지경으로 배를 저었으나 왜선은 점점 멀어지기만 하였다. 시꺼멓게 흐린 하늘에서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기진맥진한 쇠동이는 노를 내던지며 매생이우에 쓰러졌다. 찬 비방울이 눈물범벅이 된 그의 얼굴우에 후둑후둑 떨어졌다.
이때 무엇인가 시꺼먼것이 배전에 와서 쿵 하고 부딪쳤다. 룡복이와 어둔이가 타고나갔던 주인잃은 배가 바람에 밀려온것이였다.
텅 빈 배우에는 아직도 살아서 펄펄 뛰는 물고기와 후리그물이 실려있었다.
《룡복형님! 어둔형님!》
쇠동이는 빈 배를 붙잡고 몸부림쳤다.
(저 짐승같은 왜놈들에게 잡혀갔으니 이제는 끝장이로구나!)
쇠동이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리는 눈으로 무섭게 날뛰는 시꺼멓게 흐린 먼 바다만 망연히 바라보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