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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이른아침부터 섬에 사는 장정들이 급히 포구로 모여왔다.
밤새 무섭게 태질하던 바다는 새벽부터 잠들기 시작하였는데 검차관이 타고온 배는 어느 틈에 섬을 떠나가버리였는지 보이지 않았다.
모여온 사람들은 열네댓살 나는 총각애들까지 다하여 모두 여라문밖에 되지 않았으나 뭍에서 온 두 배의 사람들까지 한데 어울리니 40여명의 장정들이 포구에 모이게 되였다.
룡복은 여기저기 흩어져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왜놈들이 섬을 차지할 흉계를 꾸미고있는데 관가에서는 도리여 우리를 나오라고 합니다. 섬을 내버리고 가면 왜놈들이 빈집처럼 기여들어 로략질을 하겠는데 그래 우리가 손을 털고 나앉을수 있습니까. 이 섬이야 우리네 섬이 아닙니까. 량반들한테는 이 섬이 바다가에 내버린 조약돌보다 못해보일런지 모르지만 우리 배군들한테는 제 살점이나 같단 말입니다.》
《옳으이. 우리 섬사람들한테는 목숨과 같은것이네. 그러니 우리가 섬을 지켜야지 누가 지키겠나. 이 사람들아, 안 그런가?》
최서방이 이렇게 말하자 섬사람들이 일제히 호응하였다.
《좌상님말씀이 옳소이다!》
룡복은 더욱 힘을 내여 말을 이었다.
《그러니 모두들 힘을 합쳐서 왜놈들을 막아냅시다. 우리 두 배사람이 모두 서른명이고 섬사람들까지 합하면 장정 마흔명이 넘는폭인데 왜놈들의 배 몇척쯤 막는것은 어려울게 없습니다. 왜놈들이 조총을 휘두르며 거센체 하지만 무서울것이 없는 놈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고 아무리 날뛰여도 그놈들은 남의 집에 뛰여드는 도적의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인이 도적을 겁낼 까닭이 있습니까?》
《옳거니. 우리가 섬에 살면서두 섬을 지켜나설 생각을 못한게 부끄럽네. 여보게들, 이제라도 우리가 주인구실을 해야겠네.》
최서방이 이렇게 말을 하자 모여앉은 섬사람들쪽에서 저으기 면구스러워하는 가벼운 기침소리들이 들려왔다.
룡복은 잠시 끊었던 말을 계속하였다.
《우리가 용기를 내고 힘을 합쳐서 막아내지 않으면 왜놈들이 섬을 아주 차지하고맙니다. 섬을 차지하고나면 반드시 우리 나라를 통으로 먹으려고 덤빌것인데 우리가 하는 일이 어찌 섬 하나를 지키는 일이겠습니까!》
《옳소. 옳은 말이요!》
《왜놈들이 다시는 덤벼들지 못하게 단단히 잡도리를 합시다!》
룡복은 왜놈들이 당장 섬에 들이닥칠수 있다는것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보통 청명이 지나서 5월까지는 동북풍이 오래 계속되여 바다길이 열리며 9월부터 10월까지 다시 같은 바람이 얼마간 불기때문에 바다길이 다시 좋아진다.
왜놈들은 언제나 이때를 틈타서 우리 나라로 기여들군 하였다.
그래서 수군들은 3월부터 5월까지를 《큰물때》라 하고 9월부터 10월까지를 《작은물때》라고 하면서 이때에는 해안경비에 각별히 주의를 돌리군 하는것이였다.
지금이 바로 《큰물때》였다. 왜놈들은 틀림없이 이때를 리용하여 섬으로 기여들것이였다.
《그러니 모두들 서둘러 왜놈 막을 준비를 갖추어야겠습니다.》
《옳소! 그렇게 합시다.》
룡복은 지난밤에 최서방과 의논하고 밤새워 곰곰히 생각해둔 방비책을 내놓았다.
섬에는 배를 대일만 한 포구가 한곳뿐이므로 이 포구를 단단히 지키면 다른 곳으로는 왜놈들이 붙을수가 없었다.
다만 천부동포구에 매생이나 야거리배와 같은 작은 배를 대일수 있을뿐인데 그것은 거기 사는 다섯집에서 밤낮으로 경계를 하고있다가 적정이 생기면 급히 봉화를 올려 신호를 하면 될것이였다.
그리고 많지 않은 사람으로 여러척의 왜선을 막자면 무엇보다도 멀리 가는 화승총이나 활이 있어야 하였다.
그런데 섬과 배에 총은 한자루도 없고 긴칼이 서너자루 있을뿐이였다.
외진 섬에서 총을 당장 만들수는 없으므로 우선 100보정도 나갈만 한 활을 만들고 화살과 창을 넉넉히 마련하여 마흔명 장정이 모두 무장을 갖추는것이 첫째일이였다.
활과 화살은 섬에 흔한 대나무를 쓰면 쉽게 만들수 있으나 살촉과 창날은 쇠붙이가 있어야 하므로 집집에서 쓰지 않는 농쟁기나 깨진 쇠그릇등속을 모아오기로 하였다.
야장도구를 가지고있는 최서방이 사람 몇을 데리고 야장간을 꾸려놓고 살촉과 창날을 벼리는 한편 활과 살도 만들기로 하였다.
총지휘는 룡복이와 최서방이 하며 급한 련락은 쇠동이또래 애숭이들 셋이 맡아나섰다.
《자 그럼, 그렇게들 알구 모두 힘을 합쳐서 왜놈들을 막아냅시다. 왜놈들의 배가 오늘 올지 래일 올지 예측할수 없는 형편이니 서둘러야겠소.》
룡복이가 말을 마치자 최서방이 섬사람들에게 할일을 분부하였다.
《야장간은 래일부터 불을 지피겠으니 쇠붙이는 생기는 족족 가져오게. 그리구 천서방은 숯을 구워둔것이 있으면 서너섬 급히 실어다주게.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살대감과 창대감을 베여 다듬고 문서방은 나와 함께 야장을 해야겠네.》
《잘 알아들었소이다! 자, 그럼 빨리들 서두르세!》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헤여져들 갔다.
룡복은 온몸에서 힘이 부쩍 솟아나는것을 느끼며 헤여져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과라면 아무리 미쳐날뛰는 왜놈들이라도 단매에 물리쳐버릴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든든해지였다.
그날 밤부터 베수건으로 상투를 질끈 동인 최서방과 문서방은 포구에 넘어와 룡복이네와 거접을 같이하면서 야장간을 꾸리였다.
다음날 한낮때부터 웃설미만 대강 한 야장간에서 풀무소리와 야무진 쇠망치소리가 가락맞게 울려나오기 시작하였다. 섬사람들은 뭍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그 소리에 가락을 맞추듯이 성수가 나서 살대감을 베여오고 활을 만들 준비도 하였다.
온 섬이 새 숨결로 약동하고있었다.
망치를 거머쥐고 쇠모루를 두드려대던 최서방이 잠시 일손을 멈추고 활기띤 섬모습을 바라보더니 흰수염을 흔들며 감개무량한듯 부르짖었다.
《허허… 여러 십년 살아도 산 흔적을 못 내던 섬이 오늘에야 허리를 펴고 큰숨 한번 내쉬는구나!》
이때 룡복이가 야장간으로 들어섰다.
《어, 동래총각인가? 어서 오게. 임자가 이 섬에 큰 경사를 안아왔네그려.》
《경사라니요?》
룡복은 풀무질을 하는 문서방의 일손을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섬이 숨을 내쉬는게 안보이나? 사람이 끊쳤던 숨을 다시 내쉬면 그건 천이나 만에 하나도 보기 힘든 기적이라 할것이지만 여러 십년동안 숨을 죽이고있던 섬이 이제야 큰숨을 내쉬고있으니 이거야말루 큰 경사지 어디 보통일인가. 임자가 아니였다면 우리가 섬에 태를 묻고 살면서도 섬을 지켜볼 생각이나 해보았을텐가.》
룡복은 웬일인지 최서방의 이 말을 듣기가 면구스러웠다. 자기는 이들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사람이였다. 오로지 어순이를 찾으려는 생각으로 가슴을 불태우며 섬으로 달려왔고 어순이를 빼앗아간 왜놈들을 천백배로 복수하려고 섬에 눌러앉아 싸움준비를 갖추고있을뿐이였다.
그런데 그것이 섬사람들에게 이토록 힘이 되고 기쁨이 될줄은 몰랐다. 어순이를 위하는 일이 이토록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과 련결되여있고 울릉도의 운명과 하나로 잇닿아있는 일인줄은 미처 몰랐었다.
섬사람들의 운명과 잇닿아있는 그 일을 어순이를 위하고 자기를 위한 일로만 여겨온것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룡복은 최서방과 문서방앞에서 아니, 온 섬사람들앞에서 진심으로 머리를 숙이고싶었다. 그들이야말로 울릉도와 자기들의 운명을 한시도 떼여놓고 생각해본적이 없었을 사람들이 아닌가!
룡복은 말없이 쇠메자루를 거머쥐며 한걸음 나섰다. 걷어붙인 그의 팔뚝에서 굵은 피줄이 울툭불툭 일어섰다.
최서방은 집게로 벌겋게 익은 쇠붙이를 재빨리 집어서 쇠모루우에 올려놓았다.
쩡! 하고 첫 메질소리가 울렸다. 시뻘건 불꽃이 사방으로 튀여났다.
두번, 세번 힘찬 메질이 계속되였다.
룡복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뚝뚝 흘러 떨어졌다. 그러나 메질을 멈추지 않았다.
쇠모루우에서는 한자루의 날카로운 쇠날창이 번쩍이고있었다.
룡복은 땀을 식히려고 밖으로 나왔다. 문서방이 풀무질을 하며 흥얼거리는 노래소리가 가락에 맞게 들려나왔다.
어허로 풀무야 불어라 딱딱 풀무야
나라근심 많아서 풀무목이 쉬였네
들어온다 들어와 왜놈의 종자 들어온다
그후 며칠이 지나는 사이에 야장간에서는 활과 창을 20여개씩 만들고 화살수백개를 만들었다. 쇠붙이가 생기는 족족 화살 한개라도 더 만들려고 야장간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있었다. 수백개의 화살중에서 절반가량은 불화살로 만들었다.
불을 달아 쏘면 생나무라도 태우고야마는 화살이였다. 왜놈들의 배를 물우에서 요정내버리자면 불화살이 있어야 한다는 룡복의 의견을 좇아서 만들기 시작한것이였다.
어느날, 야장간에서 밤을 새워가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맛좋은 물고기라도 대접할 생각으로 룡복은 어둔이와 함께 야거리배를 타고 대섬쪽으로 노를 저어나갔다.
대섬은 포구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크지 않은 섬이였다. 둘레가 5리가량되는 평평한 섬우에서는 키높은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있었다. 울릉도에서 제일 좋은 대나무산지가 바로 이 섬이였다.
섬주변에서는 여러가지 물고기도 많이 잡히고 해삼, 전복, 조개도 많았다.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아득히 수평선은 구름 한점없이 개인 푸른 하늘을 떠이고 한가로이 누워있었다. 어디를 보나 망망한 바다, 고요한 정적…
너무도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 모든것이 도리여 불안스럽게 느껴지였다. 쯔시마 왜놈들은 왜 아직도 나타나지 않을가? 그 요시라라는놈이 거짓말을 한것은 아닌지… 혹시 그 렴탐군놈들이 도망쳐가서 다른 꿍꿍이를 하는것이라면?
삐걱 삐걱! 어둔이가 노젓는 소리만 동안이 뜨게 들려왔다.
배가 북쪽기슭으로 꺾어들 때 쇠동이의 매생이가 마주 떠왔다. 매일 포구로 넘어와 룡복이네와 함께 지내는 쇠동이였다.
《어디로들 가우?》
쇠동이가 노질을 멈추고 서서 벙글벙글 웃었다.
《날씨도 좋은데 한그물 후려보려구.》
《그래요? 나두 함께 가겠소.》
쇠동이는 야거리배로 훌쩍 건너오며 어둔이의 손에서 노를 넘겨받았다.
쇠동이의 빈 매생이가 목맨 강아지처럼 뒤에서 홀로 출덕거리며 끌려오고있었다.
《천부동앞바다루 가우. 그쪽이 좋소.》
《그래라. 네 마음드는 곳으루 가자.》
룡복은 한창 신록으로 봄단장을 해가는 아름다운 섬기슭이며 해빛이 스며들어 황홀하게 금빛으로 어룽거리는 맑디맑은 물속을 들여다보고있다가 쇠동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쇠동아, 정말 좋은 곳이로구나!》
쇠동이는 벌씬 웃었다.
《우리 아버지도 사람살기는 이만 한데가 없다구 그랬소. 그런데 난 좀 사람구경도 하구 세상구경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소.
어쩐지 갑갑한게 죽을 지경이우.》
《흥, 저녀석이 바람이 났구나. 싱거운 소리를 탕탕 하는걸 보니…》
창막이 널에 걸터앉았던 어둔이가 능글거리며 쇠동이를 시까스르기 시작하였다.
《이 섬에는 계집애들이 없니?》
《계집애는 갑자기 웬 계집애 말이요?》
쇠동이가 얼굴이 불그레해져서 어둔이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갑사댕기를 드린 계집애지 무슨 계집애겠니?》
《댕기 드린 계집애가 우리 세 집사이에도 둘이나 있소. 코를 쭐쭐 빠는것들이…》
《허허… 그러니 네가 야단줄에 빠졌지. 코빠는것들 말고는 없니?》
《흥, 어둔이형님이 또 누굴 놀리려구 그러우?》
《놀리긴, 내가 할 일이 없다더냐?》
《체, 상투값을 하느라구 그러는지 어째 능글맞소.》
《싱거운 소리 말아라. 그래, 계집애가 없니?》
쇠동이는 또 얼굴이 불그레해진다.
《있긴 있소. 지금 우리가 가는 천부동에도 셋이나 있소. 말같은것들이…》
《그럼 됐구나. 이번에 우리가 그 계집애를 하나 업어다 줄가?》
《그건 업어다 뭘하우?》
《총각 바람난데는 그게 약이야.》
《싱거운 소리 좀 그만하우. 그 생말같은것들한테 누가 치여죽는걸 보자구 그러우?》
《하하하…》
어둔이와 룡복이는 허리를 꺾고 껄껄 웃었다.
《네가 계집애들한테 그렇게 주눅이 든걸 보니 병에 걸려도 단단히 걸렸다. 그게 총각병이라는게다.》
《듣기 싫소. 세상에 그런 병이 어디 있소?》
쇠동이는 얼굴이 벌겋게 되여 부지런히 노만 저었다. 노대를 당길 때마다 땀에 삭은 베적삼소매밑에서 힘살이 울근불근 든든한 팔뚝이 드러나보이군 하였다.
《네가 지금 천부동쪽으로 가는것이 다 쪼간이 있어서 간다는걸 모를줄 아니?》
룡복이도 싱글벙글 웃으며 쇠동이를 놀려주기 시작하였다.
《쪼간은 무슨 쪼간이우? 물고기가 많으니 가는게지…》
《글쎄, 물고기는 가보면 알겠지만 섬년이라는 얼굴 곱다란 처녀애가 거기 있다는걸 나도 알아.》
《아니, 그건 어떻게 아우?…》
쇠동이는 얼굴을 붉히며 쥐구멍에라도 기여들어갈듯이 쩔쩔맸다.
룡복은 껄껄 웃을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전 쇠동이 어머니가 룡복에게 쇠동이 장가들일 걱정을 하면서 천부동에 섬년이라는 얌전한 처녀가 있는데 한번 슬그머니 가서 보고오라고 부탁한적이 있었던것이다.
쇠동이는 배머리를 북쪽으로 돌리고 노를 저었다. 저동포구 입구에 하늘을 찌르고 솟은 초대바위가 보이였다. 좀더 지나가자 십여길되는 바위절벽에서 하얀 물안개를 일쿠며 떨어지는 봉래폭포가 멀리서 보이였다. 중봉마루에서 졸졸 흘러내리던 샘물이 내를 이루고 개울을 이루다가 바다가 절벽에 이르러서는 다 이렇게 폭포로 변하고마는것이였다.
섬주변을 둘러막은 벼랑 곳곳에 크고작은 이런 폭포들이 많았다. 이름난것만 해도 섬동쪽에 봉래폭포가 있고 서쪽에 복호폭포가 있었다.
북쪽으로 더 가자 먼발치에 섬이 보이였다. 5리둘레가 모두 절벽으로 둘러싸여서 사다리를 놓아야 오른다는 대섬이였다.
대섬뒤에 또 하나의 작은 섬- 관음섬이 보이였다. 그리고 뒤미처 하늘을 찌르고 솟은 삼선암이라는 세개의 큰 바위가 물가운데 우뚝 솟아있었다.
여기를 지나서부터는 벌써 천부동앞바다다.
배머리는 어느덧 서쪽으로 돌아섰다. 천부동을 그냥 지나쳐나가면 누군가가 무지개모양의 구멍을 내놓고 정성들여 쌓아놓은듯 한 구멍바위가 나지고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곧추 세운 창끝같은 일선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얼마전에 문서방의 안내로 섬을 한바퀴 돌면서 다 눈익혀둔것들이였다.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는 폭포들… 흰 절벽에 뿌리박고 푸르싱싱 설레이는 향나무들, 양지바른 산기슭에 무성한 동백나무, 후박나무, 참대나무, 벼랑 곳곳에서 흰 파도에 씻기우는 묘하게 생긴 동굴들, 수정같이 맑은 물속에서 자라는 붉고 푸른 바다풀…
아름답기 그지없는 섬이였다.
천부동앞바다에 이르자 바다가모래불에 떨기떨기 우거진 해당화숲이 보이였다. 쇠동의 눈길이 자주 그쪽으로 가는것을 보고 룡복이와 어둔이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흰저고리에 깜장무명치마를 입고 옆구리에 종다래끼를 낀 웬 처녀가 배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무엇에 놀랐는지 해당화숲뒤로 얼른 숨는것이 보이였다.
《저, 처녀가 섬년인게로구나.》
어둔이가 넘겨짚자 쇠동이는 픽 웃을뿐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엉큼한 녀석!》
어둔이는 쇠동이에게서 노를 빼앗아쥐고 기슭쪽으로 배를 몰아갔다.
세사람이 기슭에 내렸으나 섬년이는 해당화숲뒤에서 나서지 못하고있었다.
《얼른 가서 색시감을 데려오너라.》
룡복이가 손바닥으로 궁둥이를 철썩 갈기자 쇠동이는 하는수 없이 해당화숲쪽으로 걸어갔다. 해당화숲뒤에서 쇠동이와 섬년이가 주고받는 말소리가 바람에 실려 도간도간 들려왔다.
《난 몰라… 혼자 오겠다 하구선…》
부끄러움에 젖은 처녀의 목소리.
그러더니 끝내 지고말았는지 처녀는 쇠동의 등뒤에 숨어서 아장아장 따라나왔다. 크지는 않으나 어지간히 무거워보이는 보퉁이를 들고있었다.
사박사박 하얀 모래불을 밟는 곱게 결은 여섯날꽃메투리, 아마도 쇠동이가 삼아준것이리라.
룡복이와 어둔의 곁으로 다 올 때까지도 처녀는 눈길을 들지 못하는데 해빛에 그을은 가무스름한 뺨이 익은 능금알처럼 붉게 타고있었다.
《안녕하세요?》
까맣고 서글서글한 눈을 살짝 치떠서 룡복이와 어둔이를 정답게 살펴본 후 처녀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금방 봉오리를 터치려는 꽃송이처럼 아직 화려하지는 않아도 순결하고 끝모를 아름다움을 간직한 모습이였다.
이 섬이 제 모양처럼 구김살 하나 없이 길러낸 섬처녀! 그 모습과 말소리와 웃음소리속에서는 이 섬의 아름다움과 향기와 빛갈이 그대로 느껴지는듯 하였다.
쇠동이와 섬년이!
망망한 바다가운데 외로이 솟아 버림받은듯 하던 이 섬속에서도 얼마나 아름다운 생활이 남몰래 꽃피고있었는가.
룡복은 문뜩 가슴속으로 따스한 물결이 스며들어 어리광치는듯 한 느낌이 들었다.
《저… 이걸…》
섬년이는 얼굴을 붉히며 손에 들고있던 보퉁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게 뭐냐?》
룡복은 보퉁이를 받아들며 물었다.
《쇠붙이예요. 야장간에 보내는거예요.》
베보자기를 풀자 작은 솥 한개와 모지라진 호미와 식칼 한자루가 나왔다.
솥은 까맣게 윤기가 흐르는데 아침을 끓일 때까지도 쓰던것인듯 했다. 호미와 식칼도 모지라지긴 했으나 아직 쓸만 한것들이였다.
《이거야 쓰는것들이 아니냐? 쓰는것을 왜 가져왔느냐?》
《일없어요. 그것 없이는 살아두 섬 없이는 못살지 않아요? 모두들 그렇게 말해요.》
《!…》
룡복은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들인가. 섬년이, 쇠동이, 그리고 문서방과 최서방… 그네들의 저 뜨거운 마음을 과연 누가 따를수 있겠는가. 그들은 자기보다도 섬에 더 가까와진 사람들이였고 누구도 따를수 없는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였다.
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들로 하여 섬은 더욱 아름답고 소중한것으로 자기의 가슴속에 자리잡혀가는것 같았다.
룡복의 마음속에서는 끝없는 감격이 물결쳤다.
(고맙다. 네가 내 마음을 깨우쳐주는구나. 정말 고맙다!)
룡복은 섬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이윽고 룡복이와 어둔이는 배에 올랐다.
《우리는 저 바위끝에 나가 후리질을 할테니 너희들은 여기 도래굽이에서 작시미질을 해라.》
쇠동이와 섬년이를 기슭에 남겨둔채 룡복은 노를 저어 바다로 나왔다. 잠시후 그들이 탄 매생이도 도래굽이를 따라 천천히 떠나왔다.
이따금 그쪽에서 섬년이의 청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군 하였다. 그때마다 룡복이와 어둔의 얼굴에는 그윽한 웃음이 비끼군 하였다.
얼마간이 지나자 섬년이의 노래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또렷이 들려왔다.
저 뭍이라 이 섬이라 귀하디귀한 땅
꽃피여 수수만년 자랑도 많건만
백두산 한지맥이 제일 자랑이라누나
룡복은 일손을 놓고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였다. 어순이가 부르던 울릉도의 노래였다. 처량하기도 하고 사무치게 애끓는듯도 한 노래소리가 먼 수평선가로 울려갔다.
아하이요 아하이요 꿈엔들 잊을소냐
섬아 섬아 울릉도섬아 내 사랑 섬아
룡복은 푸른 섬, 푸른 바다, 푸른 하늘을 천천히 휘둘러보았다.
어디를 보나 끝없이 푸르다. 마음조차 푸르러지고 온 넋까지 푸르러져 자기 한몸도 이 땅, 이 물, 이 하늘과 한덩어리로 변하고마는것 같았다.
아, 세상 더없이 좋은 고장이로구나!
문뜩 어순의 말소리가 귀가에 쟁쟁히 들려오는듯 하였다.
《룡이 오빠, 우리 울릉도에 가서 살지 않겠어요? 참 좋은 곳이예요. 어머니랑 룡이랑 함께 가서 해삼, 전복을 따 말리구…》
룡복의 얼굴에는 끝없는 서글픔이 서려돌았다.
어순이가 곁에 있다면 그러자고 다시 대답해주련만…
맑게 개였던 하늘이 천천히 흐려오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