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울 릉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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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는 강원도 울진군 죽변리 해안으로부터 동쪽으로 350여리 떨어진 우리 나라 동해에서는 제일 큰 섬이다. 성인봉을 중심으로 섬전체가 하나의 둥실한 봉우리를 이루고있어서 마치 그 누군가가 바다 한가운데 우연히 떨어뜨리고 간 푸르고 아름다운 큼직한 구슬이 물결에 허리를 잠그고 조용히 떠있는듯이 보인다.
기온이 따스하고 비가 많이 내리기때문에 대나무, 동백나무, 측백나무와 같은 사철 푸른 나무들과 여러가지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겨울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있으며 기슭을 빙 둘러싸고있는 흰 바위벼랑은 마치 섬을 지켜선 천연의 성벽처럼 보인다.
옛기록들에 보이는 《울릉》, 《우릉》, 《울수》, 《울이국》, 《우산국》 하는것들은 다 울릉도를 가리키는 이름들인데 섬사람들은 한강토에서 사는 한겨레로서 력사의 비바람을 함께 헤쳐왔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게 되였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은 흘렀다.
섬사람들은 고려태조13년(930년)에 백길과 토두라는 두사람을 보내여 토산물을 바치였다. 고려조정에서는 그들을 후하게 맞이하여 백길에게는 정위벼슬을 하사하고 토두에게는 정조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후 덕종원년(1032년)에 다시 도주의 아들인 부어다잉랑이라는 사람이 직접 찾아와 공물을 바치였다.
나라에서는 많은 농쟁기를 섬에 보내여 섬사람들의 편리를 살펴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섬과 뭍은 물화와 정을 나누며 한강토로 수백년간을 평화로이 지내였다. 하지만 영원한 안정이란 없었다. 력사의 수레는 언제나 평탄한 길로만 구을러간것이 아니였던것이다.
그후 다시 10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다음인 고려의종11년(1157년)과 13년(1159년)에 김유립이라는 사람을 보내여 조사하여보니 섬은 이미 불타버리고 묵은 페허만 남아있었다. 부락자리 7개소와 쇠종, 석탑 등이 발견되였을뿐이였다.
한때 창궐하여 안팎을 소란하게 하던 동녀진해적이 섬을 략탈한것이였다.
하지만 아무리 해적의 발굽이 사나왔다 해도 이 아름다운 섬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애정은 어느덧 끊을수 없는것으로 굳어져있었으니 고려중엽인 신종왕때에 이르러 사람들은 다시 섬으로 건너가 새 생활을 가꾸기 시작하였다.
력사는 또다시 수백년의 세월의 풍상을 헤치며 순조로이 구을러갔다.
조정에서는 세금과 부역을 피하여 많은 사람들이 섬에 들어와 산다고 하여 김린우를 《안무사》로 파견하여 섬사람들을 모두 실어내갔던것이다.
섬사람들은 선조의 뼈를 묻으며 대대로 살아오던 정다운 섬을 쉽사리 버릴수 없었다.
실어내가면 다시 모여들고 모여들면 다시 실어내가고… 이러기를 거듭하던 끝에 조정에서는 세종20년(1438년)에 수백명의 군사를 풀어 섬을 낱낱이 수색한 다음 김범 등 70여인을 잡아내갔다.
이리하여 섬은 사람들의 삶의 보금자리가 되여온 천수백년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박탈당한 거주의 금지구역으로 되고말았다.
외적도 아닌 제 나라 량반관리들의 편협한 처사때문에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제 나라 강토에서 마음놓고 살지 못하게 되였으니 이것은 외적의 수난에 못지 않은, 아니 그보다 더 가슴저리고 눈물겨운 수난이 아닐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섬을 등지였으나 숨어사는 고통을 당하더라도 섬을 떠나지 못하고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몇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빈 곳이나 다름없이 된 섬은 우울한 적막속에 잠기고말았다. 마치 소박당한 녀인마냥 울릉도는 먼 바다 한가운데서 이 원통한 설음을 그침없이 하소연하였지만 그 하소연을 알아줄만 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은 백년, 이백년을 흐르고 다시 삼백년의 년륜을 새기며 고달프게 흘러가고있었다. 그동안에 빈집 드나들듯하며 섬을 로략질하는데 재미를 붙인 왜놈들은 마침내 섬을 아주 차지해보려는 흑심을 품고 칼을 갈기에 이르렀으니 이제 이 력사의 물음에 누가 대답해줄것인가.
×
1693년(계유년) 3월 초여드레날, 푸르디푸른 동해, 도라지빛 물결우에 돛을 올린 고기배 두척이 떠가고있었다.
서생포앞바다도 지나고 울산 개운포며 버들포도 훨훨 스쳐지나 어느덧 난바다에 나왔건만 그물을 풀념은 하지도 않고 배는 줄곧 북동쪽으로 달리기만 하였다.
누구도 그 배에 관심을 돌리는 사람은 없었다. 기껏해야 청어떼를 찾아가는 고기배려니 여길뿐이였다.
청어떼는 대체로 3월초에 함경도앞바다에 나타났다가 4~5월경에는 울릉도쪽을 지나 울진, 울산앞바다로 내려와 제주, 목포쪽으로 흐르는것이다.
그러니 청어배로는 좀 이른감이 있으나 그렇다고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배가 계유년으로부터 정축년(1697년)에 이르는 근 5년간 이 나라 조정을 뒤흔들고 일본의 막부우두머리들과 그아래 태수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을뿐아니라 우리 나라 중세력사와 대일외교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장식한 장엄한 력사의 풍운을 안고가는 배인줄은 그때 그 누구도 알수 없었다. 배를 타고가는 사람들자신도 그것을 예측하지 못하고있었다.
앞선 배는 경상좌수영소속의 방패선인데 그 배에는 안룡복이가 휘동하는 젊은이들이 스물가까이 타고있었고 뒤따르는 배에는 울산아근의 어부 열댓나마 타고있었다.
목서방이라는 귀얄수염달린 늙은이가 그 배의 도사공인데 그는 울릉도에 진귀한 해산물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한번 가보았으면 하였으나 뜻이 맞는 사람이 없고 또 나라에서 금지하는 곳이여서 선뜻 나서지 못하고있다가 안룡복이를 만나자 두말없이 따라나선것이였다.
사공들은 모두가 나이 지숙하고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였다.
하지만 안룡복의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가 파랗게 젊은 사람들이고 대부분이 총각들이여서 울릉도에 갔던 일이 드러나면 볼기가 터지게 곤장맛을 보아야 할지도 몰랐으나 그런것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망망한 바다를 건너 미지의 섬으로 찾아가는 랑만과 호기심에 가득차있었다.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다. 바람은 순풍이고 돛폭은 터질듯이 부풀었는데 살진 파도가 굼실거리며 배전으로 흘러흘러 지나간다.
이어싸 이어도싸나
이어처아 배오른다
뒤어차아 닻 감아라
동녘하늘 밝아온다
앞선 배에서 구성진 사공의 노래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이어싸 이어도싸나
이물맡은 이사공아
고물맡은 고사공아
뒤따르는 목서방네 배에서도 웅글은 노래소리가 들리였다. 하지만 앞선 배와는 딴판으로 무겁고 구슬픈 음조가 느리게 흐느끼였다.
어허디야 어허디야
어기여차 배 띄여라
우리 인생 죽어지면
모든것이 허사로다
…
수중으로 다니기는
륙지같이 다니면서
해중풍파 다 겪다가
아차 실수하게 되면
고기밥을 면할소냐
어허디야 닻 감아라
돛 달아라 배 띄여라
앞뒤배에서 부르거니 받거니 구성지게 뽑아올리거니, 구슬프게 받아넘기거니 하는 사이에 순풍에 돛단 배는 둥실둥실한 큰 물마루를 타고넘으며 쉼없이 달리고있었다.
룡복은 키를 잡고 고물쪽 도사공자리에 앉아있고 어둔이는 그곁에 서서 푸른 수평선을 바라보고있었다.
배전에서 유난히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물고기들이 풀쩍풀쩍 날아올랐다. 몸길이가 한뽐나마 되는것들이 달리는 배를 쫓아오면서 물우로 휙휙 날아가는데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였다.
배 앞코숭이에서도 옆에서도 온통 날아다니는 물고기천지였다.
《야! 저게 무슨 물고기냐? 막 나는구나!》
애어린 총각 하나가 저도 그 물고기처럼 펄펄 뛰면서 환성을 질렀다.
《흥, 저녀석이 돌치를 모르는군.》
《아직 사공소리를 듣자면 된장 몇독은 더 먹어야겠어.》
젊은이들이 이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다.
《저게 돌치라는 물고기요? 야, 그것참 멋지구나!》
돌치는 주로 더운 물줄기를 따라 떼를 지어 다니는 물고기인데 먼바다에 나오지 않고서는 볼수가 없는 어족이였다. 물우로 한길씩 뛰여올라서 무려 10여m이상 나는것도 있는데 고기배를 만나면 멀리멀리 쫓아오면서 승벽내기로 날뛰는 습성이 있었다.
돌치를 만난것을 보면 배는 퍼그나 먼바다로 나온것이 분명하였다.
해는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었다. 돌치떼도 아득히 뒤로 물러나고 배는 망망한 바다우로 소리없이 달리였다.
룡복은 용천줄을 꽉 틀어잡고 바위처럼 묵묵히 앉아 바람세를 살피며 침착하게 배를 몰아가고있었다.
울릉도… 어순이… 울릉도… 머리속에서는 무어라 종잡을수 없는 가슴찢는듯 한 생각이 토막토막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다시 떠오르군 할뿐이였다.
철썩철썩, 배전을 치는 물결소리… 동서남북 그 어디를 보나 그저 끝없이 푸르고 망망한 바다… 바다…
무료함을 감새길수 없었던지 돌치를 보고 기뻐날뛰던 총각녀석이 돛대에 등을 기대고앉아서 애끓는 목소리로 청승맞게 리별가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세상에 리별이 많다지만 살아 생리별은 생초목에 불이 일듯이 가슴타고 서러운것이라는 노래였다.
그 애끓는듯 한 노래를 듣고있던 룡복의 얼굴빛은 천천히 어두워지고있었다.
그 모양을 흘끔 살펴보고난 어둔이가 더는 참고 들을수 없었던지 노래부르는 총각쪽으로 걸어갔다. 멀리 서쪽수평선우에 비낀 검붉은 노을이 불안스럽게 너울거리였다.
《육실할… 배군이라는게 기껏 한다는 소리가 생초목에 불이 붙는다는건가?》
《흥, 그럼 어디 박서방이 한마디 하소.》
리별가를 애끓게 불러내치던 총각녀석은 벙글벙글 웃으며 노래 잘하는 어둔이를 은근히 부추기였다. 하지만 어둔이는 그냥 얼굴빛이 무거워서 먼 서쪽하늘만 불안스럽게 바라보았다.
《어째 하늘모양이 신통칠 않구나.》
모두가 검붉게 타번지는 서쪽수평선을 걱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기풍제를 지내지 않았다구 룡왕님이 노염을 내려는게 아니우?》
뒤따르던 목서방네 배에서도 무슨 불안을 느꼈는지 이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어허-이여 늦바람이다. -늦바람이여-》
서남풍이 불리라는 소리였다.
《여보게 어둔이, 여기가 어디쯤 될듯싶은가?》
룡복이가 물었다.
《글쎄, 아직 울진을 못미쳤을텐데…》
그러니 이제는 배머리를 바싹 동쪽으로 돌려야 한다. 룡복은 부지런히 뒤따르는 목서방네 배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두 배가 다 폭풍전야의 무거운 정적이 깃든 바다를 묵묵히 달리기만 하였다. 서쪽하늘에서 불타는 노을은 점점 컴컴하게 변해가고있었다.
그날밤.
불안하게 술렁거리는 바다우에 어둠이 내려덮이는것과 때를 같이하여 무서운 바람이 터지고야말았다. 시꺼먼 바다가 온통 죽가마끓듯 끓어번지고 배는 물에 뜬 가랑잎처럼 밀려가기 시작하였다.
짐작컨대 바람은 강한 남서풍인듯 물은 동북쪽으로 상사말처럼 날뛰며 흘러가고있었다. 흐르는 물을 따라 배는 울릉도쪽으로 밀려가고있는것이였다.
목서방네 배에서 불방망이를 흔드는것이 보였다. 서로 갈라지면 이 태풍속에서 영영 갈라지고말수도 있었다. 룡복이도 불방망이를 만들어 목서방네 배쪽에 대고 흔들었다. 두 배는 바람과 물결에 운명을 맡긴채 그냥 흘러갔다.
바람은 날밝을무렵에 이르러 기세가 한결 수그러지더니 해돋이에는 아주 멎었다.
남쪽으로부터 점차 씻은듯이 개인 하늘이 열려오기 시작하였다.
저녁무렵에 사람들은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섬을 발견하였다. 지는 해빛에 불그레 물든 엷은 구름이 비단자락처럼 천천히 걷히자 보이지 않던 섬이 문득 자태를 드러냈던것이다.
《섬이다!》
이물쪽에 앉아있던 한 젊은이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울릉도다!》
사람들은 와르르 이물쪽으로 달려나가 천천히 자태를 드러내는 미지의 땅을 바라보고있었다. 무성한 수림으로 뒤덮인 푸른 섬. 드높은 그 산허리에는 아직도 불그레한 명주필같은 안개가 휘감겨 너울거렸다. 마치나 부끄럼타는 첫날색시처럼 천천히 너울을 벗으며 사람들앞에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듯 하였다.
동남쪽 안침진 포구에 닻을 내리였다.
섬은 그 어디나 여러길되는 바위벼랑으로 둘러싸여있어서 배를 댈만한 곳은 이곳뿐이였다.
바다가에는 흰 모래불과 자갈밭이 넓게 펼쳐져있었다. 검은 바위가 드문드문 박힌 그 자갈밭뒤로 퍼그나 넓고 깊은 골짜기가 열렸는데 골짜기에는 어느덧 저녁어스름이 깃들고있었다. 갈매기 두어마리가 돛대우를 낮게 감돌며 기웃기웃하다가 그도 잠자리를 찾아 어디론가 가버리였다. 섬은 아주 빈것처럼 조용하였다.
왜도적의 배는 어디로 갔을가? 불안과 초조감이 룡복의 가슴으로 숨막힐듯이 밀려들고있었다.
왜놈들이 배를 보이지 않는 후미진곳에 감춘것은 아닐가?
어둠은 섬기슭을 천천히 내려덮고있었다. 룡복은 밀려드는 불안을 애써 누르며 왜놈들이 섬에 숨어있는지 알수 없으므로 아무도 섬에 내리지 말고 하루밤을 배에서 지내기로 목서방과 의논하였다. 두 배사람들은 갑판우에 나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밤이 깊어서야 모두 배칸으로 내려가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녘에 누군가 급히 흔들어깨우는 바람에 룡복은 소스라쳐 일어났다.
《룡복형님!》
《웬일인가?》
《수상한놈이 나타났소.》
《어디?》
《섬에.》
룡복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오줌을 누러 밖으로 나갔다가 방금 들어온 총각은 겁에 질려 숨을 헐떡거리였다.
《웬놈이 바위뒤에 숨어서 우리 배를 살펴보다가 후닥닥 달아났소.》
《짐승을 잘못 본게 아닌가?》
《아니우. 두발루 뛰는 짐승이 어디 있소?》
《그럼 나가보세.》
밖으로 나오자 먼동이 훤히 텄으나 골짜기에는 아직도 밤빛이 그대로 남아 어둑어둑하였다. 차고 시원한 맑은 공기가 가슴으로 기분좋게 밀려들었다.
《저기 저 바위뒤에 숨어있었소.》
총각은 바다가에 가까이 보이는 꺼먼 바위를 가리켰다.
《어느쪽으로 달아났나?》
《저 골짜기 왼쪽으로 달아났소.》
《왜놈의 차림이던가?》
《그런것 같기도 하구…어두워서…》
두사람이 밖에서 두런거리는바람에 새벽잠에 곯아떨어졌던 사람들이 다 깨여서 온 배가 술렁거리였다.
《놀라지들 말게. 아마 어떤놈이 우리 배의 동정을 살피고 간 모양인데 날이 밝으면 다 알게 되네.》
룡복이가 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했으나 그때부터 누구도 다시 잠들지 못하고말았다.
날이 아주 밝자 룡복은 어둔이와 함께 아까 사람을 보았다던 총각을 데리고 배에서 내렸다. 검은 바위뒤로 가보니 모래불에 사람이 쭈그리고앉았던 자취가 남아있었다. 거기서부터 모래판에 깊숙이 찍힌 사람의 발자국이 골짜기안으로 향하고있었다.
세사람은 발자국을 따라 새벽안개가 자욱한 골짜기로 들어섰다.
만약을 생각하여 어둔이와 룡복은 왜도적에게서 빼앗은 칼 한자루씩 허리에 찌르고 나섰다.
길쭉길쭉하고 큼직한 사나이의 발자국은 급히 뛰였기때문에 앞쪽이 깊이 패여있었다.
자갈밭을 지나 왼쪽산기슭에 이르자 발자국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발을 붙일만 한 곳을 골라 어림짐작으로 펑퍼짐한 산중턱에 이르렀다. 잡초가 콱 우거져있었다.
《이게 집터로군.》
어둔이가 발끝으로 주추돌인듯 한 넙적한 돌을 툭툭 차며 말하였다.
무성한 잡초속에 규모있게 놓인 주추돌과 퇴마루돌들이 보였다. 마당 한쪽에는 나직한 돌탑이 서있었다.
《돌탑을 보니 절간자리네. 옛적에는 이 섬에도 사람이 번창하였다더니 그게 사실이군.》
돌탑밑에는 불태웠던 자리가 두어군데 있었다. 등성이를 하나 넘자 실개울이 흐르는 깊은 골짜기가 나타났다. 개울옆 펑퍼짐한곳에 밭이 보이였다. 지난해까지만도 조인지 수수를 심었던 그루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사람이 살고있다는 흔적이였다.
실개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허리꼬부라진 향나무가 서있는 샘터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샘터에서 웬 사나이 하나가 불쑥 일어서서 이쪽을 살펴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흰옷 입은 그 사람의 등뒤에서 총각머리태가 흔들거리였다. 조선사람인데다가 총각이라는것까지 분명해졌다.
《여보게 총각, 게 좀 서라구.》
룡복이가 소리를 질렀다.
몇걸음 달아나던 그 총각은 무춤 서서 경계하는 눈길로 세사람을 살펴보았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오?》
무트럽게 물었다.
《뭍에서 왔네.》
총각은 룡복이와 어둔이가 허리에 찌른 긴 칼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관가에서 왔소?》
《아니 보면 모르겠나? 풍파에 밀려왔네.》
그제야 총각은 좀 안심되는지 샘터쪽으로 머뭇머뭇 다가왔다.
《사람을 보고 범 본 노루처럼 달아나기는 왜 달아나나?》
룡복은 싱그레 웃으며 총각의 앞으로 다가섰다. 열일여덟살되였을가 말았을가 한 총각인데 허우대는 어른만큼이나 컸다. 총각은 웬일인지 놀란 눈으로 룡복의 얼굴만 뚫어지게 살펴보고있다가 《동래 포촌마을에서 오지 않았소?》 하고 물었다.
《아니, 그건 어떻게 아나?》
룡복은 총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쇠동이요. 룡복형님!》
《아니, 쇠동이? 네가 문서방네 쇠동이냐?》
《그래요.》
총각은 룡복의 팔에 매달리며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룡복형님, 우리 울메로 간대. 복숭아 따먹으러 같이 갈가?》 하던 그 쇠동이였다. 십여년세월이 쇠동이를 이렇게 몰라보게 자래운것이다.
울릉도에 가면 문서방과 쇠동이를 만날수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뜻밖에 만날줄은 몰랐다.
《코방울에 콩알사마귀를 보니 네가 쇠동이가 분명하구나!》
어둔이는 쇠동이를 그러잡고 껄껄 웃으며 손바닥으로 잔등을 철썩철썩 두드려주었다.
《그래, 아버지 어머니는 다 무고하시냐?》
룡복은 문서방소식이 궁금하여 물었다.
《다 잘 계세요. 여기 와서 동생 하나 더 늘구 할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시구…》
《그랬구나.》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들 왔수?》
《왜도적의 배가 제멋대로 섬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쫓아왔다.》
《그것 참 잘 왔소. 왜놈들 성화에 몸살이 날 지경이우. 그런걸 난 관가에서 잡으러 왔는가 했소.》
《그래서 달아났니?》
쇠동이는 싱그레 웃었다.
《새벽에도 네가 물녘에 나와 동정을 살폈니?》
《내가 그랬수. 저녁녘에 배 두척이 들어오는데 돛을 보니 왜놈배는 아니구 아무래도 관가에서 온것 같아서 자세히 살펴보려구 물가로 나갔지요. 그런데 배우에서 웬 사람이 불쑥 나서는 바람에 도망쳤소.》
《허허허… 그런걸 우리는 왜놈들이 섬에 숨어있는가 했구나. 그런데 요즈음 왜놈들의 배 한척이 들어오지 않았더냐?》
《얼마전에 웬 수상한 배가 하나 들어왔댔소. 배모양은 왜놈들의 배가 아닌데 타고온것들은 왜놈들이 틀림없더란 말이우. 이상한것은 그놈들이 고기를 잡거나 전복을 따는짓은 전혀 하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섬을 샅샅이 돌아보기만 하더란 말이우. 나는 숨어서 그놈들의 동정만 살피고있었는데 사흘째되는 날에 배 한척이 또 들어오더란 말이우. 이번에는 틀림없는 왜선이였소. 왜놈들은 그 왜선에다 짐을 옮겨싣더니 다음날에 간다온다 소리없이 배 두척이 다 달아나버리지 않겠소.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게 웬놈들인지 짐작이 가지 않소. 더우기 이상한것은 그 배에 웬 녀자가 타고있더란 말이우. 왜선에다 옮겨실을 때 그 녀자가 몸부림을 치자 상판에 지렁이같은 상처가 있는 왜놈이 발길로 차서 선창밑에 밀어넣더란 말이우.》
《아니, 그게 정말이냐?》
룡복이가 낯빛이 거멓게 질리면서 다급히 물었다.
《정말이우.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질 않소. 도망치던 날 너럭바위우에서 술을 처마시는것을 보았는데 상판에 지렁이같은 상처가 있는 그놈이 두목인듯 하였소. 졸개들이 모두 그놈한테 굽신거리더란 말이우.》
《어이구!》
어둔이가 비명을 지르며 갑자기 밑둥을 잘린듯이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버리였다.
(한발 늦었구나!)
무서운 실망은 룡복의 가슴속으로도 사정없이 밀려들고있었다. 울릉도에서 어순이를 찾을수 있으려니 했던 한가닥의 희망은 돌담무너지듯 허물어져내리였다.
(아, 어순이는 끝내 그 무서운 왜도적의 소굴로 끌려갔구나!)
《아니, 갑자기 왜들 이러우? 그놈들이 대체 웬놈들이우?》
절망에 빠진 룡복이와 어둔이를 의아하게 바라보고있던 쇠동이가 물었다.
룡복은 괴로운 마음을 간신히 다잡으며 대답하였다.
《그놈들이 섬을 렴탐하려고 들어온 왜놈들인데 꼭 잡아야 할것을 그만 놓쳤구나. 한발늦어서 그만 놓쳤구나!》
《왜놈 붙잡을 일이라면 이제도 늦지 않았으니 념려마우. 이맘때면 꼭 섬으로 기여들군 하니까…》
《육실할 놈의 자식…》
어둔이는 성을 삭일수없어서 쇠동이를 흘겨보았다.
《그게 그저 왜놈들인줄 아니? 룡복이 저사람의 색시감을 싣고 달아난 놈들이다!》
《뭐요? 그게 정말이우? 그럼 그 녀자가?…》
《그게 바루 이 섬에 살던 어순이다. 왜놈들한테 죽은 박서방네 딸을 모르겠니?》
《아니, 그게 어순이였단 말이우?》
쇠동이는 너무도 뜻밖의 일인듯 할 말을 찾지 못하고있었다.
룡복은 낯빛이 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없이 서있었다. 가슴이 얼어들고 온몸이 굳어지는듯 하였다.
어순이를 발길로 차서 선창밑으로 밀어넣더라는 상판에 지렁이같은 상처가 있다는 그 왜놈! 그놈이 바로 박충량의 집에서 놓쳐버린 왜도적의 두목이 아닌가. 틀림없었다. 칼에 찍힌 그 징그러운 상처자욱.
어순이에게서 옥가락지를 떨구었을 때, 우마무라가 짐을 옮겨실을 때 보았다던 요시라라는 왜놈이 바로 그놈이였다. 그렇게 찾던 원쑤놈을 놓쳐버리다니?
그놈이 어순이를 쯔시마로 실어보낸 후 다시 백운산소굴에 들어가 숨어있은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어순이를 실은 배가 울산에서 사흘전에 떠났다고 한 박충량의 말은 거짓이였다. 적어도 이달초에 떠나왔어야 그 요시라라는 놈이 다시 돌아가 백운산소굴에 숨을수가 있는것이다.
순간 룡복의 머리속에서는 속히웠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치듯 떠올랐다. 요시라라는 왜놈이 밤중에 도망친것은 다 박충량의 작간이였다는것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요시라와 박충량이가 오래전부터 련통하고있었다는것도 짐작되였다.
아, 그 더러운자들에게 속히우다니, 이렇게 분하고 원통한 일이 어디 있는가. 그 원쑤놈을 손아귀에 쥐였다가 놓친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이가 갈리였다. 이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그 요시라놈을 기어이 찾아내여 복수하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는 심정이였다. 막 날뛰며 울부짖고싶었다. 그러나 그놈이 어디로 도망쳐갔는지 지금은 전혀 알수가 없었다.
이제는 어떻게 할것인가! 룡복은 아득히 먼 수평선만 애타게 바라보고있었다.
그 먼 수평선너머에 쯔시마라는 왜섬이 있고 어순이는 그곳으로 끌려가버린것이였다. 어떻게 할것인가!
아직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둔이는 땅바닥에 주저앉은채 일어설념도 하지 않고 쇠동이는 두사람을 무슨 말로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서 발끝으로 안타깝게 땅만 후비며 서있었다.
룡복은 애써 무거운 마음을 다잡으며 따라온 젊은이쪽으로 돌아섰다.
《이보라구. 포구에 가서 모두들 배를 기슭에 붙이구 아침을 끓이라고 이르게. 우리도 이내 뒤따라 가겠네.》
《알겠수.》
젊은이가 말없이 포구쪽으로 떠나가자 룡복은 쇠동이를 앞세우고 어둔이와 함께 문서방네 집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