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주먹은 타더라도 기발은 들어야 한다
3
제주도에서 첫 보고가 올라왔다.
정시명은 김정원이 보내온 보고를 보자 다소 마음이 놓이였다.
…19련대가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련대장 한렬을 신문 《제주민보》 기자와의 회견장에부터 내세웠다.
《동족상쟁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쌍방사이에 평화교섭을 조건부없이 곧 진행할것을 호소한다.》
한렬의 선언은 이쪽저쪽에서 살펴야 다른 언질을 잡힐게 없었다.
한렬의 애국적호소에 19련대 전체 장병들이 호응해나섰다.
제주도빨찌산 대장 김달삼과 한렬사이에 회담이 진행되였다. 여기에는 김정원도 참가하여 상대방들의 립장을 조정하였다.
회담에서 김달삼은 제주도를 틀어쥔 항쟁군의 지도자답게 고압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한렬측의 양보를 봐주는 의도적인 자세였다.
김달삼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제주도민중의 타도목표는 미국놈들과 그 앞잡이가 되여 도민학살에 날뛰는 경찰깡패들이다. 경찰이 일본놈때부터 민중에게 저지른 학대와 폭행을 궁신들도 알것이다. 경비대는 가난한 로동자, 농민자식들로 무어져있으니 우리 도민이 항쟁에 떨쳐나서지 않을수 없는 정치사회적상황을 잘 알것이다. 그러니 서로 적대시하지 말고 호상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협약부터 맺자.》
그러면서 이미 김정원과 협의를 한 4가지 당면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1. 《단독선거》, 《단독정부》수립반대
2. 경찰의 완전무장해제, 경찰에서 끌어온 본토깡패집단 철수
3. 반동테로단체들의 즉시해산
4. 피검자의 석방, 부당한 검거, 투옥, 학살의 중지
김달삼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유격대는 무장을 해제하고 산에서 내리며 정상적인 생활에로 돌아갈것이라고 정중하게 언명하였다.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는것이 우익계의 립장에서 볼 때도 흠할데가 없었다.
김정원은 김달삼을 따로 만나 핵심들을 당분간 본토에 피신시킬데 대한 정시명의 이야기를 전달해주었으나 김달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것만은 거부하였다. 싸움이 고조에 이르렀는데 핵심들을 빼돌릴수는 없다는것이였다.
그리고 자기는 지금의 분위기가 시한부적이지 반드시 미국놈들은 제주도에 불의 세례를 안길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김정원은 경비대총사령관의 파견대표로서 김달삼의 요구사항을 공개적으로 서울에 보고하였다.
송호정은 보고를 접수하자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을 불러놓고 협의하였다.
그들은 첫째사항에 대하여서는 정치인들의 결단에 맡기기로 보류조건을 제시하고 나머지문제들에 대해서는 동의하기로 합의하였다.
송호정은 총사령관의 명의로 곧 김정원에게 그 정형을 통보하고 그대로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협의결과를 보고받은 하지가 대노하였다.
보고하려온 조병옥을 세워놓고 반란자들의 요구사항이 새 국가의 출범을 앞둔 시각에 안보위기를 초래할수 있으므로 묵살해버리라고 눈이 빠지게 욕을 해댔다.
하지는 송호정을 쉽게 움직일수 없다는것을 알자 조병옥에게 비밀리에 경찰력량은 군대와 유격대와의 합의사항에 구속되지 말고 유격대에 대한 《토벌작전》을 재개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시작을 잘한 김정원과 한렬을 비롯한 장병들의 노력은 빛을 잃고말았다.
경찰대와 본토에서 쓸어간 망나니들이 또다시 피비린 살륙전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유격대와의 정면충돌에서 묵사발이 되여온 경찰놈들은 무고한 주민들을 대상하여 비렬한 복수전을 벌렸다.
사태가 원점으로 돌아가고있다는 보고를 받은 정시명은 송호정을 부산에로 급히 내려보냈다.
송호정은 부산려단장 최원기에게 제주도형편을 설명해주고나서 파악이 있는 대대장이 지휘하는 대대를 제주도에 급파하여 김정원의 지시를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하지에게 제주도의 19련대를 돕기 위해 한개 대대를 증원파견하였다고 통보하였다.
김정원과 한렬은 이미 출발에 앞서 정시명과 토론한 방향에 따라 둘째방안으로 넘어갔다. 경비대력량을 산으로 내몰아 경찰토벌대의 작전에 혼란을 주고 유격대의 행동에 유리한 기회를 마련해주도록 하였으며 필요한 무기와 식량을 넘겨주기도 하였다. 김정원은 별도로 자기가 장악한 여러명의 하급장교와 사병들을 수하에 두고 작전통보를 사전에 유격대에 전하게 하였다.
어느날 19련대관하의 문상길중위가 김정원을 찾아왔다. 더는 참을수 없다는것이였다. 실력행사에 넘어가겠으니 승인하여 달라고 열렬하게 요구하였다.
그의 애인인 서귀포의 꽃같은 해녀가 유격대지휘부 련락원으로 있었다. 그런데 며칠전에 경찰들에게 잡혀 갖은 희롱을 당하다가 젖가슴을 도려내고 팔다리를 찢기워 학살되였다는것이다.
전신을 부르르 떨다가도 피발이 선 두눈에 용접불꽃과도 같은 섬광을 번뜩이는 청년의 피타는 복수의 갈망을 들으며 김정원도 치를 떨었다. 그러지 않아도 19련대의 일부 력량을 유격대에 합류시키려고 했던 김정원은 곧 한렬과 만났다. 한렬은 문상길의 의거에 찬동을 표시하였다.
문상길은 자기를 따라나선 백여명의 장병들을 데리고 한렬의 동의밑에 련대무기고를 점거하고 미국놈들이 넘겨준 무기들로 무장하였다. 그들은 도처에서 경찰토벌대를 무자비하게 타격하면서 한나산으로 향하였다.
그밖에도 많은 장병들이 장교들의 묵인밑에 유격대에 호의를 보이면서 총성과 연기를 올려 《토벌대》들의 위치와 병력규모, 공격목표를 알려 주었다. 모슬포에 주둔한 한 중대에서는 무기를 통채로 유격대에 넘겨주고 습격을 받아 밤중에 인원들만 바삐 퇴각했노라고 상부에 보고하였다.
빨찌산지휘부도 우호적인 경비대와의 충돌을 피하였고 그들의 입산을 환영한다는 구호를 사처에 내걸고 평화협정을 지키자고 호소하였다.
최원기가 보낸 5려단 2대대도 려단장의 명령대로 움직이고있었다. 그 대대 대대장은 오일균이라는 소령이였다.
그는 지시받은대로 섬에 도착하자 인민탄압의 앞장에서 날뛰고있는 도경찰청장을 찾아가 평화협정을 준수할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경찰청장이 출동요청을 하자 《우리의 임무는 평화협정을 리행하도록 군사적힘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하며 경찰대를 응징할수도 있다는것을 로골적으로 시사하였다.
한편 오일균은 적응훈련을 한다면서 경찰대의 앞에 종횡무진으로 나타나서 놈들의 출격을 제지하고 못되게 노는 경찰지휘관들은 잡아다가 며칠씩 영창살이를 시켜 내보냈다.
김정원은 마지막보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살륙전은 계속되고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어디에서 끝날런지 묘연합니다. 이제 곧 부대를 배비변경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날 송호정도 운전사를 《모나리짜》다방에 보내왔다.
운전사는 정시명에게 이런 편지를 내놓았다.
《리승만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제주도민을 모조리 죽여버리라고 악에 받쳐서 고아대는데 걱정이 큽니다. 하지도 련일 전화를 걸어옵니다. 경비대는 더이상 믿을수 없으니 자기가 진두지휘하겠다고 벼릅니다. 미군장교들도 파견하고 〈토벌대〉의 지휘관들을 전면적으로 심사해야겠다고 합니다.》
정시명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지시를 주면서도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대안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송호정의 운전사에게 지시문을 주고난 정시명은 해결책이 없는 제주도문제를 끌어안고 속을 썩이다가 앞도로에 나가서 택시를 불러세웠다.
그가 뒤자리에 오르는데 어느새에 따라섰는지 례영이가 제주도의 신균이 대나무로 만들어준 접이낚시대를 들고 앞문에로 오른다.
《네가 언제?…》
정시명이 의아해하자 례영이는 벌써 앞걸상에 얌전하게 앉아서 《운전사아저씨, 여의도 강숲으로!》하고 제법 녀서기답게 틀잡힌 지시를 내린다.
《허, 참…》정시명은 이제는 자기의 일정을 《훈시질》해나서는 례영의 당돌한 태도에 어이없어 씩 웃었을뿐 잠자코 있었다.
운전사는 례영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더니 지체 높아보이는 미모의 아가씨에게 홀리운듯 눈자위가 휘딱해졌다.
《예, 냅다 달리지요.》 그는 공손히 대답하고 기분좋게 택시를 몰아갔다.
서울시가지의 봄철풍경이라야 가벼워진 사람들의 옷밖에 새로운것이 없는데 여의도섬에 들어서니 강변을 따라 록음방초가 우거지고 제법 수려한 멋이 있었다. 강변의 수양버들이 치렁치렁한 가지들에 새파란 잎새들을 매달아가지고 강바람에 산들거리고 그 사이사이로 아카시아꽃이 구름같이 피여 꿀벌들을 부르고있다.
여느 때 같으면 례영이가 정시명의 속을 밝게 해주는 이야기를 꺼내놓으련만 지금은 제주도일때문에 꾹 닫겨진 마음의 문이 열릴것 같지 않다. 그래 앞만 살필뿐이다.
기실 정시명은 제주도를 떠나온이래 한시도 의로운 주먹을 높이 쳐든 항쟁의 섬을 잊어본적이 없다. 그러나 제주도에 대한 그나름으로의 지원포사격은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어려운 극한투쟁을 벌리는 그네들을 도와야 한다는 스스로 짊어진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한가닥의 모지름일뿐이였다.
제주도에서 목격했던 가슴저리게 하는 참상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다리 하나, 팔 하나 잘리우고서도 쓰러진 엄마의 젖꼭지를 물고있던 어린이, 가슴팍이 터진채 전주대에 매달려있던 아낙네들의 시체, 구천에 사무친 원한을 재워 분노의 총성을 울리는 유격대원들의 굴함없는 모습들, 제주도의 풀 한포기, 바위 하나에도 애국의 피가 배여있어 어느것 하나 무심히 스칠수 없던 그 땅이 더 큰 시련을 당하게 된다.
《이거야 무슨 마련을 봐야지 않겠습니까?》
분노에 푸들푸들 떠는 입술을 다물지 못하고 가슴을 텅텅 치던 경찰청 부청장 신균의 거센 절규가 귀전에 쟁쟁하다.
그 사람도 막내동생과 조카 둘, 형수 하나를 잃었다고 했다. 여차하면 자기도 한나산에 들어가버리겠다는걸 겨우 달래서 지금은 자기 위치를 지키는것이 빨찌산 백명도 할수 없는 일이라고 박아놓고왔는데 어찌 되였는지 근심스럽다.
쓰라린 회억의 장면들이 삼삼히 떠오를수록 정시명은 숨쉬기가 가쁘고 심장이 쿵쿵 뛰였다. 마련을 봐야 한다, 마련을 봐야 한다, 류동명의 떨리던 목소리도 귀에 선하다.
리승만은 모조리 쏘아죽이라고 한다. 하지는 숱한 군력을 쓸어보내고도 성차지 않아 제놈이 민족말살을 진두지휘하겠다고 이를 갈고있다.
맥아더까지 덤벼든다. 트루맨이 혼비백산해서 특사를 부랴부랴 날려보내여왔다.
그런데 무쵸의 해결책이란게 뭔가? 미군의 장기주둔이다. 불은 불로 다스리겠다는건가. 이 땅에서 3년간 받아온 랭대에 그런 식으로 한풀이를 하자는건가?
적은 맹렬히 공격해오고있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발악에 발악을 이어대고 애국세력을 초토화해가고있다. 이제는 《국회》도 만들어냈으니 제법 정예로 진을 꾸리고 덤벼들것이다.
적의 공세가 강해질수록 애국세력의 반발은 커질것이다. 제2, 제3의 제주도가 불타오를것이다.
어느 때에야 불은 꺼질려나. 대답은 명백하다. 조국이 하나로 합쳐지는 그때다. 이 땅에 외세가 남아있고 민족을 반역한 도배들이 절반땅에 도사리고있는 한 제주도의 참변은 그칠 길이 없다. 이 땅전체가 저놈들이 벌려놓은 살륙의 피비린 도가니에 들게 될것이다. 반격을 가해야 한다. 반동들의 저 무모한 횡포에 그대로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인민은 도탄에 울고 분렬의 곬은 깊어만진다. 겨레가 당하는 불행의 화근을 뿌리채 들어내야 한다.
타격의 중심목표는 어디인가? 어느 지점을 타격해야 될것인가?
정시명은 자동차안에서도 여의도의 버들숲을 거닐면서도 격앙된 흥분속에 줄곧 이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모든것의 화근은 미국놈들에게 있다. 어떻게 하든지 미국놈들을 들어내야 한다. 미국놈들이 없었다면 애당초 남조선에서 반동들이 지금처럼 활개치지 못했을것이고 따라서 지금과 같은 혼잡한 정국도 없었을것이다. 그놈들만 없었더라면 리승만과 같은 친미광신자가 어떻게 정상을 바라보고있겠는가. 그놈들만 없었다면 광복을 위해 일제와 맞섰던 이 나라의 애국자들이 다시 볕을 피해 산으로 지하에로 들어가는 민족적비운이 없었을것이며 대구며 제주도의 항쟁이 터지지도 않았을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남전역이 《미군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들고나선것이 아닌가.
우리도 이제는 이 구호를 전면에 내들어야 한다. 이 구호를 들고 본격적인 싸움을 벌려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가 맡아안을 몫을 옳게 찾아서 떠안아야 한다.
어데서부터 불을 걸것인가? 투쟁무대를 어디에 둘것인가? 이것이 먼저 확증되여야 한다. 그래야 진을 재편성하고 과녁을 정확히 선택하며 옳은 전술을 구사할수 있는것이다.
문득 그의 뇌리에는 무쵸의 서울방문과 리승만의 도꾜행각과 관련한 자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며칠전에 류동명이 들려준 이야기도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떠올랐다.
길철은 종합한 자료들을 다음과 같이 분석평가하여 보고하여 왔었다.
지금 워싱톤이 안절부절해하는것은 미군존재문제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놈들은 진퇴량난에 처하여있다. 맥아더와 무쵸와 같은 백악관과 펜타곤의 대조선관계자들은 반미항전으로 불타오르는 이 나라에서 미국의 리익을 지켜내자면 미군주둔이 필수적인 요소라고 인정하고있다.
여기에 미군을 저들의 통치지반이라고 믿고있는 리승만일파의 사대매국적립장이 쌍으로 얽혀들어 미군주둔이 기정공론으로 굳어져가고있다.
그런데 놈들의 기도는 미군을 몰아내라는 안팎의 무자비한 도전에 부닥쳐왔다.
그러면 무쵸로 대표되는 백악관, 맥아더로 대표되는 펜타곤, 리승만으로 대표되는 국내반동들은 탈출구를 어디서 찾고있는가. 이놈들이 걸고있는 마지막희망은 이미 세워놓은 《국회》와 이제 조작될 행정부이다.
여기서 미군주둔의 합법성을 확증할 명분을 세워보려고 할것이다.
미국의 정객들은 저들의 어용기구에서 그와 같은 모략정도는 쉽게 통과되리라고 믿고있다.…
분석과 평가가 예리하고 사태의 본질을 군더더기없이 정확히 파헤치고있다.
《〈국회〉!… 바로 이것이다!》
정시명은 이렇게 나직이 부르짖었다.
우리의 금후투쟁무대는 적들이 지금 무사태평하게 자기의것으로 인정하고있는 그곳이다. 그곳에서 미군주둔이 아니라 미군철거의 구호가 나와야 그놈들이 배포유하게 의지하고있는 버팀목을 뭉청 꺾어버릴수 있다.
옳다, 우리의 투쟁은 다르게 돼서는 안된다. 우리는 적들이 미군주둔을 합법화할수 있는 바로 그곳- 반동의 아성을 미국을 내쫓는 합법적인 연단으로 만들고야 말것이다.
대결하자, 다시 미국놈들과 맞붙어보자.
《미군철수를 위한 〈국회〉투쟁!》 새로운 작전의 제목부터 불뚝 튕겨져나왔다.
정시명은 저으기 흥분되였다. 그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으며 저력있게 부르짖었다. 나라의 《국회》라는게 미국놈들이 만들어낸 물건짝이지만 명색이 국민의 의사를 대변한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있으니 여기서 미군철거구호가 터져나오게 해야 한다.
바깥에서는 이미 총칼을 들고 이 땅은 더는 미국놈을 원치 않는다는것을 세상에 대고 선언하고 안에서도 제도권이라는데서 법이라는 조항으로 소리를 내면 안팎으로 강점자들에게로 향한 주먹이 합쳐질것이다. 그렇게 해서 무쵸와 맥아더와 트루맨의 흉계를 짓부셔야 한다.
제주도에서부터 안개속에 가리워있던 새로운 작전의 서막과 종막이 그림처럼 선명해졌다. 투쟁목표가 확정되고 투쟁무대도 정확히 선정되였다.
그러나 작전의 세부를 그려나가자니 다시 머리가 무거워졌다.
이번 선거에 당선된 《국회》의원들에 대한 료해보고서와 김승원의 활동보고를 생각하느라니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다.
《국회》라는 무대가 발붙이기 어려운 빙산인것이다. 선거된 의원들중 어느놈치고 애국대오에 세워놓을만 한 여지를 찾아볼수 없는 반동들이다.
김승원도 아직은 서울안의 의원들을 두루 만났는데 투쟁에 인입할 재목감을 한명도 찾지 못했다 한다. 《국회》개원식전에 서너명정도라도 끌어당겨서 소집단을 무으라고 했는데 오늘까지 소식이 없으니 성과가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개원식에서부터 리념적계선을 명백히 그을수 있는 문제거리를 찾아내서 초당파적견지에서 당파와 출신지역과 경력을 뛰여넘어 한동아리에 묶어세울수 있게 준비를 갖추라고 했는데 이것도 안된 모양이다.
(정말 김승원이 이 싸움을 주역이 돼서 꼬아나갈수 있을가? 아니 우리가 너무 엄청난 객기를 부리는것이 아닐가. 현실성이 없는 계획은 필요없는 희생만 치를수 있다. 더구나 김승원에게이 싸움을 맡겨놓을수 있겠는가?)
김승원의 둥글넙적한 얼굴이 떠오르자 정시명은 얼마전에 그가 찾아왔던 일이 느닷없이 생각났다.
그날 정시명은 《국회》에서 애국적이며 자주적이고 통일지향적인 강력한 집단을 무어내고 그에 토대하여 새로운 투쟁을 벌릴데 대한 구상을 펼쳐보이고는 《이번 투쟁에서 총지휘는 김선생이 담당해야겠소.》하고 다시금 말해주었다.
그런데 당자가 껑충 뛰였다.
《그건 안됩니다. 원 제가 그렇게 커다란 중임을 맡다니요. 어느 부회장선생께 맡겨주십시오. 난 전일에 뚝섬에서 선생님이 한번 말씀하시기에 그 무슨 누굴 도와주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건 너무 제힘에 부칩니다.》
김승원은 손을 홱 내젓기까지 하며 난색을 지었다. 듣고보니 임무가 거창해서 지레 겁부터 난 모양이였다. 사람이 너무 좋아 어디 가서나 누구에게서나 호인이라는 평판을 받고있는 김승원은 가뜩이나 겁기가 있어보이는 큰눈에 걱정이 한아름 실려있었다.
《자기를 과소평가하지 마오. 두루 돌아보오. 이번 싸움에서 김선생같은 적임자가 어데 있다고 그러오.》
《글쎄 할만할걸 하겠다고 하지요. 저야 뭐 지금껏 시키는 일이나 했지 그런 막중한 일을 감당한적이 있었습니까. 연설이나 강의에나 출연하라면 누구 짝지지 않게 하겠습니다만… 아니 제가 어떻게 코대가 정수리에 올리붙고 세상천하를 눈밑으로 굽어보는 그 명물들을 후려낸다는겁니까. 전 그런 재목이 못됩니다. 그런데서는 수가 모자라는 놈이지요. 큰일 맡겼다가 무슨 랑패를 보실라고 제게다 그런짐을 얹자고 합니까. 선생님이야 절 잘 알지 않습니까.》
김승원은 증언부언하며 사정을 봐달라고 뒤걸음질을 했다.
키꼴도 몸통도 《흥국상회》에서 누구보다도 대틀인 김승원이 멀끔한 얼굴에 걱정이 실려 안절부절하는 그 솔직하고도 순박한 모양새가 우스워서 정시명은 껄껄 웃고말았다.
실상 김승원은 지금껏 정시명의 밑에서 대체로 보조타격전선에서 단독으로 움직이면서 공작하는데 습관되여왔다. 매사에 느릿느릿하고 과단성도 부족하다. 사람들앞에 나서서 열변을 토하고 사람들을 불러일으키는 호소력이 강한 인간이였지만 고도로 복잡하고 예민한 특수사업을 직접 조직하고 박력있게 추진해나가는 손탁이 센 수완군은 못되였다.
그러나 정시명은 자기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 투쟁에서 김승원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제 마련해줄수 없는 여러가지 장점을 가지고있다.
우선 그는 《국회》에 몸을 담고있으므로 행동반경이 넓고 원활하다. 이미 공개되여있는 사회적지위로 하여 정객들과의 공개적인 사업도 얼마든지 벌려나갈수 있다.
그리고 집단안에서는 누구도 비교가 안되는 박식가이며 청중의 심금을 울리는 웅변가이고 때와 환경에 따라 소탈하고도 점잖고 인정이 많으면서도 대가 바르고 풍모가 단정하면서도 품위있게 처신할줄 아는 인격자이다. 뿐더러 《흥국상회》성원으로 들어온 이상 언제까지 누구의 수하에서만 움직이겠는가. 김명호와 길철이처럼 큼직한 전선을 통채로 떠메고 경험과 교훈을 쌓아가며 수완있고 로숙한 지휘관으로 나서야 한다.
정시명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정색을 하고 다소 정중하게 타일렀다.
《김선생, 자신을 과소평가하지도 말아야겠지만 우리의 싸움에서 자기 힘과 재능과 정력을 아낄 생각은 더구나 하지 마오. 난 뭐 꼭 자신이 있어서 회장노릇 맡아하오? 〈한민당〉의 쌍기둥으로 공인받는 승원선생이 무슨 약한 소리를 하는거요.》
정시명은 이렇게 김승원이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하게 엄하고도 간곡하게 꼭 눌러놓았다.
……
(정말 승원선생이 해낼수 있을가? 우리가 정말 치뤄낼수 있을가?)
정시명은 사정을 좀 봐달라고 떼를 쓰던 김승원의 모습을 그냥 그려보며 이렇게 자기의 결심을 다시 저울질해보았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그래, 주먹은 타더라도 기발은 들어야 한다. 아직은 타산부터 앞세우지 말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건 필요성이고 절박성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일이 너무 완만하다. 서둘러야 한다. 뚫고나갈 장애는 너무도 많다.
아무래도 김승원이 《국회》에 든든히 뿌리를 박기전에는 머리회전이 민활하고 요긴한 자료원천을 거머쥐고있는 길철이를 붙여주어야 할것 같다.)
의원은 기구편제상 두명의 보좌관과 한명의 서기를 두게 되였으니 길철이를 역원으로 두면 《국회》출입도 별문제 없을것 같다. 거기에 최남수까지 보좌역으로 묻어다니게 하느라면 그 당자를 투쟁에 한걸음 더깊이 참여하게 하는데도 좋고 김승원에게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는데도 무리가 없을것같다.
(그런데 길철이가 웬일일가… 여기 사정 아는 사람이 이리도 걸음이 뜰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는가.… 그러지 않고서야 길철이 어디 가서 한가롭게 엉뎅이를 붙이고있을 사람인가?)
정시명은 강밑에 낚시대를 드리워놓은채 초생달이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소용돌이하는 사색을 하나하나 조용히 다듬어가며 《흥국상회》모임에 내놓을 투쟁방안을 완성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