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주먹은 타더라도 기발은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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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뚝섬은 꽃속에 묻혀있었다. 이른 봄철에 뽐내던 개나리와 진달래가 흐무러지고 지금은 여기저기에 하얀 벗꽃과 연분홍 살구꽃이며 빨깃한 복숭아꽃이 한창이다.

이날 《흥국상회》에서는 반나절의 휴식이 선포되였다. 그 시간에 뚝섬에서 야유회를 하니 다들 오라는 전갈이 날아갔다.

권혜숙이 길봉례와 함께 아침을 치르자마자 자리를 잡느라고 먼저 뚝섬에 나왔다.

처녀는 련락온 례영이더러 길철이와 마주칠걸 생각해서 자기는 몸이 아파 나가지 못하겠노라 했다가 한참이나 나무람을 받아야 했다.

《어째 그리도 속통이 졸아들었어. 선생님들이 그러잖아도 언니네때문에 걱정들인데 얼마나 섭섭해하겠어. 뭐가 켕겨. 길선생님소리만 들어도 10리나 달아빼니 말이야. 못난이! 언니가 그렇게 자꾸 속태우면 나도 안갈테야.》

그 말에 혜숙이는 귀밑이 새빨개져서 더 도리질을 못하였다.

《흥국상회》가 이날 만사를 뒤로 미루고 야유회를 하게 된데는 연고가 있었다.

……

김승원이 정시명의 곁에서 자고간 이튿날 아침이였다.

밥상을 물리자 정시명이 례영이를 불러들였다. 느닷없이 너한테 도움을 받을일이 있노라고 했다.

《혜숙이를 좀 돌려세워주렴.》

《혜숙일 돌려세우다니요? 어떻게 말입니까?》

례영은 정시명의 부탁이 인차 가닥이 잡히지 않은듯 눈이 둥그래져서 물었다.

《길철선생이 혜숙일 찾아갔다가 문전에서 쫓겨왔다는구나.》

《길선생님이 쫓겨나요? 호호…》 례영이 정시명의 이야기를 듣자 깔깔거리다가 정색해서 물었다.

《그러니 길철선생님은 마음이 돌아섰다는거지요?》

《글쎄, 뭐 찾아간거야 그래서였겠지. 그래서 말이다. 네가 가서 혜숙의 마음을 돌려세워야겠다. 이 일은 너밖에 맡아줄 사람이 없구나. 원 무슨 놈의 애꾸러기들인지. 이쪽에서 한발 내짚느라면 저쪽에서 비켜서고 저쪽에서 내짚으면 이쪽에서 물러서고… 이게 아이들 숨박곡질이냐.》

《호호호… 길선생님도 한번 고민이란걸 해봐야 해요.》 례영은 여전히 생글거리며 좋아서 어쩔줄 몰라한다. 그러면서도 제 동무의 역성을 드느라고 생색을 한다.

《얘, 이게 어디 웃게 됐니. 이제 또 큰 싸움을 벌려야겠는데 집안일로 속들을 썩게 해서야 어디 될법이냐. 나도 통 그 사람들 생각만 하면 어수선해지는게 좋지 않아.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거다.》

정시명은 자못 심란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 제가 갔다오겠어요. 공연히 한번 씩둑해보는거지요 뭐. 혜숙의 심정도 리해하여주세요. 길철선생이 돌아섰다니 참 다행이예요.》

례영은 고운 마음씨 그대로 이쪽저쪽의 속셈을 다해준다.

《오냐, 오냐. 리해하구 말구. 혜숙의 마음이 오죽이나 복잡하겠느냐.》

례영은 사뭇 날아갈듯 한 가벼운 걸음으로 권혜숙을 찾아 달려갔다. 코노래까지 부르며 혜숙의 방에 들어간 례영은 무작정 그의 손목을 잡고 뒤뜰에 있는 대숲으로 갔다.

두 녀자는 머리수건을 깔고 무릎을 쭉 펴고 잔디밭우에서 마주 앉았다.

《언니, 축하해. 난 이런 날이 오리라는걸 믿었어. 축하해.》

례영은 이렇게 열에 뜬 어조로 말을 시작하며 혜숙의 큰 손을 모두어잡았다.

《축하?… 오, 례영이도 무슨 말 돌아가는걸 듣고 온게로구나. 그런데…》

《언니!…》 례영은 혜숙이가 도리머리를 하며 갑자르자 되알진 소리로 막아버렸다.

《그러지 말아, 난 길철선생님이 마음을 돌렸다는 소리를 듣고 춤을 추며 달려왔어. 언니가 뒤걸음질한다는게 정말이야? 언니까지 이렇게 하면 정말 세월을 넘겨온 언니네 일을 그예 깨버리겠다는거야?

길철선생님은 훌륭한분이야. 그분의 뜻을 리해해주어야 되지 않을가. 갈라지려던 그 마음에도 다시 돌아선 그 마음에도 사람들을 울리는 고상한것이있어. 이제는 그 얘기 옛말로 남겨야 하지 않을가.》

《례영이, 그 문젤 가지고 나를 가르칠 생각은 하지 말아. 난 네가 이렇게 기뻐서 달려온 까닭은 리해되지만 그 마음을 곱게만 받아들일수 없구나.

남자가 결심하면 헤여질수도 있고 합쳐질수도 있다는 그것부터 난 마음에 들지 않아. 그분은 나의 스승이고 동지이고 선배야.  모든 면에서… 일찌기 집을 나와버린 난 그분을 아버지처럼, 오빠처럼 따르고 의지해왔어.

하지만 그인 녀성의 인격에 대해서는 너무도 몰라. 한번 서리맞은 꽃은 다시는 자기 빛갈을 가질수 없어.

나는 이게 분해. 뭐 그렇게 짓눌러놓고는 이제 와서는 생각을 고쳐 한다구? 그래 제편에서 생각을 고쳐한다면 다라는거야?  녀자는 달라는대로 주고 끄는대로 끌려가는 그런 인생으로밖에 안된다는거야?》

처녀의 눈가에 물기가 핑하니 돌았다. 그는 격해오르는 흥분을 다잡지 못하고 울음에 반죽이된 소리로 그동안 속에 차돌처럼 몽쳐있던 설음을 단숨에 쏟아놓았다. 그리고는 례영의 손을 잡아 거기에 자기 볼을 비비며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언니. 울어… 씨원히 소리치며 울어. 그동안 속에 두텁게 깔린 설음의 얼음장이 다 씻겨내리도록 어서 울어.…

그렇지만 내 말을 들어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면 될 일도 안된다고 했어.

길철선생님을 너그럽게 용서해줘. 난 그걸 바라서 찾아왔어.》

《례영이, 이제 와서 용서구 뭐구 하는건 내게서는 떠나간 얘기야. 난 가정에서도 벌써 광복전에 버림받았어. 소녀때였지.  그걸 난 수치로 생각하지만 슬퍼하지는 않아. 나를 가정에 묻어두어 집안의 화를 피하려 했던 아버지와 오빠의 구속을 박차고 나온것은 아무쪼록 잘된 일이였어. 그래서 난 혁명의 대하에 뛰여들게 되였고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분들을 만나 통일애국자라는 헐치않은 인생을 누리게 되였어.

허지만 이건 딴 문제야. 내가 그렇게도 몸과 마음 다 바쳐 사랑하리라고 골백번이고 마음 다져온 인간으로부터 버림을 받은건 수치이기도 하지만 내 인생의 파멸과도 같은거야. 그 리유가 고상하다구?… 한 인간에게 수치를 주고 모욕을 준 그 리유가 무슨 빛갈로 채색이 되던지 그건 고상한것이 될수 없어.

그렇다고 날 위로할건 없어. 난 이번에도 일어설거야. 꼭 다시 일어나구말구. 아니 일어났지. 마음속의 도전은 이미 끝났어.  나는 다시 시작할거야.

인생을 다시… 난 애국의 길에서 이젠 절대로 헛눈을 팔지 않고 곧추만 갈거야.》

터져나오는 오열을 마구 휘뿌려던지듯 갈피가 없이 엮어가던 혜숙이는 례영의 가슴에 왈칵 얼굴을 묻고 소리내여 울기 시작하였다.

례영이도 그 설음에 겨운 눈물이 가슴에 진하게 젖어들어 그를 마주 부둥켜안은채 함께 울고야말았다. 그러나 정시명의 부탁을 생각하고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랭철하게 리성을 가다듬느라고 하였다. 례영은 투실투실한 혜숙의 잔등을 살틀히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달래기 시작했다.

《그래도 언니를 길선생님이 그렇게 쉽게 떠날수가 있어? 그렇게 가볍게 지워지는 정도 사랑이라 할수 있어?… 제발 이젠 울음을 그치고 내 말을 들어줘. 우리 아버님이 크게 걱정하셔.

사실은 나도 아버님부탁으로 달려온거야. 아버진 제주도에서 돌아오시면서도 줄창 언니를 걱정하시였어.

마음을 돌려줘. 엉, 내가 빌어. 내가 그분을 대신해서 빌고 또 빌어.》

《례영아!》

《혜숙아!》

그들은 또다시 부둥켜안고 눈물에 젖은 볼을 비비였다.

《난 례영이가 부러워. 마동지가 보고싶다.》

《언니, 딴소리 꺼내지 말아. 아버님이 말씀하셨어. 큰 싸움을 앞에 두고 집안일에 속들 썩여서야 될법이냐고 하셨어.》

《정선생님은 정말 좋은분이시지. 내 일생에 그런분의 지도를 받는건 행복이야. 그래서 난 서글픈 생각이 들면 빨찌산으로 들어갈가 하다가도 그분께 꼭 죄를 끼치는것만 같아 생각을 돌리기도 해. 난 그분을 위해 자기 행복을 뒤로미룬 례영이가 부러워. 그리고 자랑스러워.》

《또 또… 딴 소리… 난 돌아가야겠어. 아버지가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계셔. 난 언니가 마음을 돌렸다고 말씀 드리겠어. 그런줄 알아.》

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이야기에 못을 박아놓으려는것이였다.

사실 이야기할것은 다 꺼내놓았다. 그러나 혜숙은 여전히 한걸음도 드티지 않으려고 하였다.

혜숙이 도리질을 하자 례영은 차츰 얄미운 생각이 났다. 과부설음은 염천에도 서리를 치게 한다는데 실련당한 처녀의 마음이란 그보다도 갑절 매운가 보다. 옆의 사람들의 생각도 해주어야지 어떻게 제 생각에만 옴해서 아버지의 성의마저 무시한단 말인가.

《너무하지 않아, 언니!》

례영의 부르짖음은 그자신도 놀라리만치 야멸찼다.

《례영아, 그러지 말아.》 이번에는 혜숙이 애절하게 빌었다. 《난 정말 모두 이렇게 하면… 모두에게 걱정감이 되면 빨찌산으로 가버리는수밖에 없어.》 혜숙은 례영의 싸늘한 모습에 억이 막혀 다시 두볼에 더운 눈물을 좌르르 굴린다.

《그건 도피야. 비렬하고… 너절하고… 그리고 자기 보신이고 리기주의고… 빨찌산이 뭐 머리아픈 내인들이 속세가 귀찮아 모여드는 수도원이야?》

이렇게 생각나는대로 마구 탕탕 내쏘아버린 례영은 그냥 서있다가는 또 혜숙이를 끌어안고 엉엉 소리쳐 울것만 같았다. 그래 흐르는 눈물을 감씹으며 숲속길로 달음박질해 사라졌다. 돌아오면서도 그 큰 눈에서 펑펑 쏟아지던 혜숙의 눈물이 그냥 앞을 가리워 자주 눈앞이 뽀얘지군 하였다.

례영은 돌아오자 정시명에게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였다.

정시명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래도 례영을 보내놓고 마음 한귀퉁이가 들리는듯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당초에 길철이 돌아서면 이 문제가 끝이 날것으로 생각한게 오산이였다.

권혜숙의 반발이 처녀의 자존심에서 오똑해진것으로, 련인들사이에 흔히 일고잦는 사랑싸움정도로 받아들였는데 젊은이들의 심리를 너무도 모르고 서뿔리 다쳐놓은셈이다. 아무 일에서나 다 공정이 필요한데 너무 뛰여넘어 당사자들을 와뜰 놀라게만 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다.

《음 복잡하구나. 그러니 어쩐단 말이냐. 이게 난사는 난사가 아니냐. 부부리별에는 공자맹자도 속수무책이라더니 참말로 휘여내기 베찬 일이구나.

그래 혜숙의 마음속엔 그리도 길철이, 그 사람이 없더냐? 혜숙의 눈에는 길철이 그 사람이 그리도 못난이로 되여있더냐?》

정시명이 속이 답답해서 이렇게 탄식을 하며 방바닥이 꺼질듯 한숨을 내쉬였다.

《아닙니다. 혜숙이 길철선생님을 그렇게 보는것은 아닙니다. 거저 너무, 너무 사랑해왔으니 분한 마음도 더 큰것 같습니다.》

《식자가 있는 사람들이 돼서 그런가. 뭐 애초에 사랑해왔으면 될 일이지 무슨 거기에도 깊은 철학이 있다더냐.》

정시명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쉬이 떠오르지않아 답답한 소리만 했다.

《아버지, 제가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떤 생각을?… 어서…》

정시명은 물에 빠진 사람 짚오래기에라도 매달리는 심정이 돼서 례영의 말에 기대를 걸며 재촉하였다.

례영의 눈이 초롱불같이 빛났다. 그는 잠시 머뭇머뭇거리다가 입가에 웃음부터 곱게 담는다.

《얼려서 안되면 내리먹이십시오.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사람이 서로 끌리는 정은 있으면서도 그 정때문에 사이를 버그러지게 하려고 속을 썩이는데,

거저 당사자들에게만 맡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제 혜숙이 돌아서면 길철선생님이 또 울뚝해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겠습니까. 그러다간 두분이 정말 갈라지지 않겠습니까.》

《그건 옳은 말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 그르칠수도 있다. 그러니 더구나 답답한 일이 아니냐.》

《왜 다른 일은 결심을 하시면 그대로 내밀어가는데 이 일에서는 큰분들이 쩔쩔 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억지결혼이라도 시켜야할가 봅니다.》

《억지결혼? 하하하…》

《저희들에게 렬차에서 상을 차려주신 일이 생각납니까?》

《아 그거야… 너희들이야 사정이 달랐지.》

《혜숙이네도 달리는 되지 않을겁니다.》

《아 그렇다?…》

정시명이 례영의 입에서 힘들지 않게 튀여나온 소리에 웃몸을 들썩거리면서 한바탕 웃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뒤엉킨 삼검불을 풀어낼 실마리를 찾아주었다. 머리에 펑끗 한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좋아! 네 말이 옳다.… 내리먹이자. 회장권세를 휘둘러 보자꾸나. 하하…》

례영이도 정시명이 기뻐하자 다소 긴장되던 마음이 풀린듯 해시시 웃었다.

《제 머리 제 손으로 깎지 못할진데 옆에서 깎아주는게 인정이고 도리이겠다.… 됐어, 어머닐 찾아오너라. 좋은 일이야 서두를수록 더 좋아지는 법이지. 허허…》

정시명은 다시 몸을 들썩거리며 방안이 떠나갈듯 유쾌하게 웃었다.

……

이렇게 되여 부랴부랴 휴식이 선포되고 야유회라는 간판을 걸고 당자들 몰래 일이 꾸며지게 된것이였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민순임이 례영이와 량손에 참대바구니를 무겁게 들고 나타났다. 잇달아 승원이 몸이 장대한 남편과는 대조가 되게 몸매가 날씬하고 깔끔하게 생긴 윤미향과 함께 돗자리 네잎과 묵직한 보따리를 맞들고 허궁 다리를 건너왔다.

혜숙이는 길봉례와 함께 뚝섬의 제일 유축진 곳에 가지가 무성하게 드리운 아름드리 느티나무밑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가 《흥국상회》식솔들이 줄레줄레 나타나자 신이 나서 마중을 했다.

《아유. 동서네가 돗자리까지 마련해왔구만.》 민순임이 김승원이 드르르 펴놓는 돗자리를 보자 환성을 올렸다.

《좋구만! 나도 솜씨를 보입시다. 사모님, 나한테도 일감을 주시오.》

김승원은 느티나무밑에 벌써 민순임이 펴놓기 시작한 음식들을 보더니 팔소매를 걷어 올리며 텁텁하게 참견해나섰다.

《아유, 당신은 사람구경이나 하다가 잡수어나 주세요. 누굴 망신시킬려고…》

윤미향이 눈을 빨며 퉁을 놓자 김승원은 《그럴가…》하며 멋적은듯 걷어올린 팔소매를 내리는바람에 녀자들이 입을 싸쥐고 깔깔거렸다.

《얘, 얘, 웃지들 말아… 손탁 센 마누라앞에서 대장부가 따로 있다더냐.》

김승원이 아직 웃고있는 혜숙이와 례영이를 보며 능청을 떠는바람에 그만 민순임과 길봉례까지도 허리를 쥐고 소리내여 웃고말았다.

그들에게서 물러난 김승원은 돗자리의 깃을 맞추며 돌아갔다. 김승원이 바깥에 나서면 세상에 다시없는 점잖은 량반이고 고명한 인물들도 휘젓는 사람이지만 집에 들어가면 판판 달라지는 모양이다.

민순임이 큰 대사를 도맡은 주부답게 녀자들을 휘동해서 이구석저구석을 살피며 잔소리를 했다.

《나그네들이 오기 전에 얼른 자리마련을 해야겠다. 너희들도 터진 팥자루처럼 입 벌리고 서있지만 말고 떡고물이라도 묻혀라.》

그래서 또 한바탕 잔디밭우에는 녀인들의 청 맑은 웃음소리가 터져올랐다.

《상만 고이면 잔치상 같겠구나.》

혜숙이 돗자리우에 펴놓은 음식들을 보다가 무심결에 한마디 하였다.

사실 민순임은 지금 잔치상을 차리고있었다. 신랑신부가 앉을 자리에는 결혼상 못지않게 시루떡, 찰떡, 절편이며 당과류와 과실 등속을 높직이 고여놨는데 한가지 빠진게 있다면 결혼상에 의례히 오르는 닭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빨간 고추를 물린 두마리의 닭도 다 마련되여있었다. 혜숙이 지레 기겁을 할듯싶어 아직은 바구니속에 얌전히 앉아있을뿐이였다.

최남수가 마음을 썼다. 김승원의 부탁을 받고 술도 음식도 고급료정인 아서원의 일등품으로 마련해주었다.

민순임이 혜숙의 새삼스러운 소리를 듣고 씨익 웃고있는데 례영이가 《정말 여기에 누굴 앉혔으면 좋겠는데…》하고는 깔깔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민순임이 그의 뒤잔등을 손가락으로 꾹 찔러서 주의를 주었다. 례영이 웃음을 뚝 그치고는 다시 입을 싸쥐며 킬킬거리다가 그릇들을 바구니에 주어담고 강변으로 씽하니 달려갔다.

이윽고 길철이와 안지생이 술과 음료병이 들어있는 무거운 상자를 들고오고 잠간 동안을 두고 정시명과 김명호가 이야기를 나누며 허궁다리에서 내려섰다.

정시명은 느티나무밑에 와서 사위를 휘휘 둘러보고는 녀인들이 서두르는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섬의 여기저기에 봄날의 휴일을 즐기는 들놀이군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흥겨운 한때를 보내고있었다.

김승원이 정시명에게로 다가갔다. 김명호가 자리를 피해 주느라고 녀인들에게로 갔다.

《국회》사업과 관련하여 그동안 해놓은 사업들을 구체적으로 보고하고 난 김승원은 문득 화제를 돌려 물었다.

《우리 동생을 만났습니까?》

《만났소. 정원이 그 사람이 조금도 달라진게 없더구만. 금줄을 두른 모자까지 척 쓰니 큰 장군이거던. 어려운 일인데 잘해낼거요. 그래도 그 사람들을 보내게 되니 제주도사람들에게 빚진걸 조금이나마 갚아주는것 같구만.》

정시명은 제주도이야기가 곁묻어나오자 아직도 속이 허우룩한듯 짧게 한숨을 내쉬였다. 여기로 오기전에 정시명은 《모나리자》다방에서 헌병사령부의 김정원과 그가 장악하고 있는 19련대장 한렬을 만났었다.

19련대는 하지의 명령으로 제주도에 긴급 출동하게 되였었다.

정시명은 그들을 따로따로 만날가 하다가 제주도에 가면 김정원의 지휘밑에 한렬도 움직이게 되여있어 두 사람을 함께 불러냈다. 그동안 《국방경비대》총사령관 송호정은 정시명의 부탁을 받고 《토벌대》의 기본주력으로 되는 19련대의 련대장으로 한렬을, 헌병대장으로 김정원을 임명하였다.

정시명은 제주도에서 벌어지고있는 사태에 대하여 목격한 그대로 여러시간에 걸쳐 개괄하여주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지시를 주었다.

《무엇을 해야 되겠는가?… 이건 동무들이 현지에 가서 스스로 찾아내시오.

동무들이 간다고 해서 물론 사태가 수습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소. 그러나 여하튼 우리가 가능한껏 항쟁에 떨쳐나선 애국자들을 지원해야 될것이 아닌가.

우리의 부탁으로 받아주고 최선을 다해주오.

무슨 문젤 제기할게 없소?》

정시명은 자기의 이야기에 끌려들어 얼굴빛갈이 긍지로, 분노로, 슬픔으로, 다양하게 바뀌여지는 김정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짧게 깎은 머리칼밑에 약간 옆으로 튀여나온듯 한 넓은 이마와 그밑에서 싸늘하고도 영민한 빛을 뿜는 눈이 첫눈에도 록록치않아보이는 젊은이였다.

입술이 얄팍해서 말이 많을것 같은데 입이 무겁고 말이 간단명료하며 행동이 민첩해서 믿음이 가고 호감이 갔다. 베이징에서 헤여진 후 조국에 와서는 처음으로 만나지만 정시명은 스스럼없이 그를 가까운 지기처럼 대하였다.

《없습니다. 륜파선생님의 지시를 조국이 저에게 내린 첫번째 명령으로 접수합니다. 임무수행에 곧 착수하겠습니다.》

김정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하게 결의를 다졌다.

군부에 있는 전우들속에서 정시명은 《륜파》라는 가명으로 통하고있었다.

《〈토벌대〉는 언제 떠나오?》

정시명은 한렬에게 물었다.

《〈국회〉개원식전으로 떠나라는 지시가 내렸습니다. 총사령관이 래일 아침 우리 련대에 내려와 직접 부대를 사열하고 환송한다고 합니다.》

《〈국회〉개원식이라면 이제 사흘이 남았는데…》

《하지놈이 관계자모임에서 헌법이 발표될 7월 중순까지 기본적으로 평정을 하고 국가가 선포될 8. 15전까지 제주도를 완전히 장악하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 모임에 저도 참가하였습니다.》

《부탁하오, 동무들! 가거들랑 항쟁지휘부와의 련계를 잘 가지시오. 내 생각같아서는 핵심인물들은 섬에서 빼냈으면 좋겠는데 현지에 가서 협의들을 해보오.》

정시명은 그들의 손목을 꼭 잡아주었다.

제주도를 위해 이렇게밖에 할수 없는것이 그의 뇌리를 아프게 찔렀다.

……

《자, 우리도 이젠 갑시다. 모두 우리 오기를 기다리는것 같구만. 끝난 다음에 더 이야기를 나눕시다. 이번 단계에서 우리 사업의 중심무대는 어차피 그쪽으로 될것 같소. 그러니 이번 싸움에서 지휘관은 김승원동무가 해야 할것 같소.》

《제가요?》

김승원은 무거운 표정으로 되받는데 정시명이 이야기가 끝났다는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승원도 자리에서 일어나 느티나무밑으로 걸어갔다.

《어이구. 이거 굉장한걸. 야유회좌석으로는 분수에 넘구. 자, 모두 앉읍시다. 우리 안주인들의 일솜씨가 이만하면 괜찮소.》

정시명은 잘 차려놓은 음식을 보며 흡족해하였다. 김명호가 앞자리로 그의 등을 떠밀었다.

《저게 내 자리요?… 좋소. 거 뭐 앉아 봅시다.》

정시명은 사양하지 않고 헌헌하게 받아들이며 주빈석에 성큼성큼 걸어가서 올방자를 틀고앉았다.

그러자 좌중에서 가벼운 웃음소리, 박수소리가 났다.

정시명은 모두들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하고는 앞에 차려놓은 음식을 한점한점 들여다보고 나서 민순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째 기본이 빠진것 같구려. 닭까지 올라야 구색에 맞겠는데.》

민순임이 《예, 이제 다 차례가 있습니다.》하고 례영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례영이 얼른 일어나 하얀 보자기를 씌워놓은 싸리바구니를 풀었다.

《허, 그렇구만. 그런데 이 자리에 나 홀로 앉기는 불편한데… 길철선생, 여기로 나오시오!》

《제가요?!… 아, 그 자리야 사모님을 모셔야지요.》

《원 선생님두… 제가 뭐길래 선생님들 다 모인 자리에서 거기에 앉겠나요. 제가 그 자리에 앉았다가 떡 한짝 축내겠나요.》

민순임이 덴겁을하듯 손을 내두르는바람에 모두들 왁짜그르 웃어댔다.

《어서 나가십시오.》

안지생이 등을 떠밀어 길철이 엉거주춤거리며 정시명의 왼쪽에 자리잡는것을 본 민순임이 《아니 길선생님자리는 오른쪽인데…》하며 손으로 가리켰다.

또다시 웃음판이다. 길철이 웃음에 실려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 이름이 야유회인즉 자리도 구색에 맞아야지. 이 옆자리에는 누굴 앉힌다?…》

정시명이 또다시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권혜숙이 눈길을 받자 얼른 례영의 등뒤에 얼굴을 묻었다.

《권혜숙이!…》

《예? 제가 말입니까?》

무엇인가 례사스럽지않은 낌새를 아까부터 느껴오다가 자리가 정돈되여가자 더욱 몸을 도사려오던 권혜숙이 정시명의 부름을 받자 오똘 놀라서 이렇게 반문하며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래, 혜숙동무가 나와야겠소. 자, 어서…》

혜숙이가 모두의 눈길을 받고 얼굴이 금시 감빛으로 물들었다.

례영이가 그의 실팍한 종다리를 손가락으로 토닥거리였다.

《어서 나가봐. 모두들 기다리지 않아.》

혜숙이 하는수없이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허둥지둥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를 부축하여 례영이 초례청에 나서는 둘러리마냥 따라섰다.

안지생이 그제서야 무슨 눈치를 차렸던지 박수를 쳤다.

이 자리에서 야유회의 진짜 성격을 알지 못하고 따라온것은 당사자들과 안지생, 길봉례였다.

모두가 기쁨에 젖어 박수를 쳤다.

때아니게 일어난 박수소리는 혜숙을 더욱 몸둘바를 모르게 하였다. 처녀는 마치도 구원을 찾는듯 허둥지둥거리는 눈으로 사위를 둘러보는데 마주치는 눈길마다 기쁨이 함뿍 어려있다. 처녀는 더욱 수집어서 정시명의 곁에 와서 앉을듯말듯 바재인다.

례영이 그를 눌러앉히고는 사뭇 기쁨에 들떠서 생글거리며 길봉례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난 동무들의 문제를 우리 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오. 오늘부터 동무들은 부부요. 우리 상회가 보증하면 되는거지 따로 관청을 찾아가 절차를 받을거야 없지 않소.》

정시명이 웅글은 어조로 장중하게 선포하자 또다시 좌중은 우렁찬 박수로써 지지와 공감을 보냈다.

《선생님,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런 법도 있습니까?》

권혜숙이 아직도 부닥친 일이 기연가미연가싶어 하다가 또다시 울려퍼지는 박수소리에 정신이 펀뜻 든듯 고개를 다소곳이 떨군채 꺼져드는 어조로 중얼거리였다.

《이런 법이 있소. 빨찌산식이요.》 정시명이 부러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했는데 나도 이런 법이 있다는걸 배웠소. 거 백운산빨찌산 녀대장 리점분에게서 말이요.

자, 동무들! 우린 구태여 신랑신부의 잔을 받느라고는 하지들 맙시다. 주례사도 생략합시다. 우린 벌써 한식솔이 되여 살아 왔으니 무슨 인사가 더 필요하겠소.

자, 김승원선생, 이 좌석에 나를 제쳐놓으면 년세가 그중 있으니 좋은 말한마디 해주시오. 원래 박정인선생이 이 자리에 계셨더라면 무척 좋아하셨겠는데…

떠나면서도 이 일을 매듭짓지 못했느라 무척 아쉬워하셨소.

난 중매군노릇 다했으니 이 자리에서 물러나겠소.》

정시명이 중간자리에서 움쭉 일어나서 안지생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김승원이 일어나려는데 민순임의 곁에서 벌어지는 일이 꿈인가 생시인가싶어 쿵쿵 뛰는 가슴을 부여안은채 굳어져 있던 길봉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치렁치렁한 무명치마꼬리를 배허벅에 찔러놓고는 잠시 머뭇거리였다.

정시명이 할 얘기가 있으면 어서 하라는듯 고개를 끄덕여 고무하여주었다.

그제서야 그는 두눈에 눈물을 질적거리며 신랑신부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의 손목을 자기의 두손에 모아잡고 어루쓰다듬기만 하였다. 그러더니 그들에게 술병과 술잔을 들려주며 말했다.

《아니올시다. 정선생님, 술을 받아주시우다. 이 은혜를 어쩌면 다 갚겠습니까. 세상에 참 이런일도 있습니까. 얘들의 마음에다 제 마음까지 합쳐 절을 올립니다.》

사실 그동안 속을 써온것으로보면 길봉례도 당자들 못지 않았다. 오히려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누이삼아 어머니삼아 지내온 오랍동생이다. 혜숙이에게 얽힌 정도 짝지지 않는다. 벌써 광복전에 부모의절하고 길철이를 알게된 이래 봉례를 시누이가 아니라 친동기간으로 의지해온 혜숙이다. 혜숙이 아무리 길철이와 맺은 정을 물린다 해도 자기에게는 남남이 될수 없는 처녀다.

그래 량쪽의 애바른 심정을 다 끌어안고 하루한시인들 마음 편한적이 있었던가. 아니아니한 심정으로 이을락끊을락 위태로운 그들의 사이를 숨죽여 지켜보던터였다. 그런데 정선생이 이렇게 꿈같은 자릴 마련해놓고 그간 서려든 한을 일석에 부신듯이 털어내니 그 고마움이 더욱 눈물겹기만 하다.

혜숙이 자꾸 눈앞이 흐려와 몸을 가누지 못하자 촉기빠른 례영이 얼른 일어나 다시 혜숙이를 거들어주었다.

《원 아주머님, 무슨 은혜라고 이름 지을게 있습니까. 벌써 이렇게 돼야 하는건데 우리가 모두 통 생각들이 무디여 걱정만 하면서 해를 넘겨보냈지요. 정말 아주머님이 속 많이 썩였지요. 죄송합니다.》

정시명이 손을 내젓다가 하는수없이 잔을 받으려고 일어섰다.

그 소리에 길봉례가 눈물이 핑그르르한 눈지방을 슴벅이며 흑흑 흐느껴 울었다.

혜숙이는 길철이 따르는 술을 정시명에게 내밀며 울음을 간신히 씹어삼키고 《선생님, 저를 욕해주십시오.》하며 고개를 외로 틀었다.

《원, 욕하다니… 난 그저 동무들이 고맙소. 전우들의 성의를 이렇게 선뜻 받아주는게 정말 고맙단 말이요. 정말 빨찌산식이요. 난 사실 오늘의 이 좌석에서도 신랑신부가 재치고 줄당기기를 하면 어쩌나하고 근심이 산같았는데 이젠 시름이 풀리오. 정말 고맙소. 자, 울지들 마오. 이 기쁜 날에… 동무들을 축하하오. 백년해로하라구.》

정시명은 그가 내미는 잔을 받아들고 감개무량해서 신랑신부의 앞날을 축복하였다.

정말 정시명은 기쁘기 한량없었다. 또 하나의 거창한 투쟁을 설계하면서 옭맺혀서 좀처럼 풀기가 어려웠던 문제가 이렇게 시원스레 풀릴줄은 그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었다.

그는 잔을 비우고나서 그들에게 넘겨주고는 례영의 얼굴을 찾았다.

례영은 눈길이 마주치자 자기 이야기를 꺼낼가봐 걱정스러운지 입에다가 손가락을 세우고 주의를 준다.

정시명은 빙그레 웃어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신랑신부가 한순배 돌리려고 걸음을 옮기자 김승원이 중매군이 대표로 받았으면 되였다고 소리쳤다.

《어서 제 자리에 가 얌전히 앉아서 그동안 잊어먹을번 했던 얼굴들이나 새겨보소.》

그래서 좌중에서는 웃음이 터지고 신랑신부도 제 자리에 돌아가 정말 얌전하게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김승원이 여럿의 눈길에 떠밀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생각없이 지내왔다가 잔치술만 받아마시니 나도 그저 꿈만같고 감격스럽습니다. 신랑신부, 그동안 속들은 썩였지만 그게 젠장, 난 부럽소. 우리야 뭐 어디다가 들려줄만 한 련애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요.

아, 거저 상투쟁이들이 모여앉아 아래동네 곱단이가 여사여사한 즉 과시네 배필이기로서니 짝을 무어 살아라 하니 예잇-한거지. 안 그렇습니까, 사모님?》

《에에… 선생님은 그저 신통한 말씀만 하십니다.》

민순임이 손을 내저으며 흘깃 정시명쪽을 훔쳐보는바람에 좌중에는 또 폭소가 터져올랐다. 김승원의 처 윤미향도 남편의 말에 눈을 빨다가 입을 싸쥐고 웃고말았다.

김승원의 너스레에 그 녀자가 눈을 샐쭉거릴만 하다.

사실 윤미향은 아래마을 곱단이가 돼서 김승원의 지붕밑에 들어선게 아니다.

그들은 베이징의 대학시절에 눈이 맞아 결혼까지 성사시킨 사람들이다. 《흥국상회》의 안사람들속에서 제일 개명하고 식견이 높다.

그들사이에 들려줄만 한 련애거리가 없는것도 아니다.

김승원의 앞에서 태가락을 부리는 처녀를 돌려세우느라고 마침 형을 찾아왔던 김정원이 발이 닳도록 뛰여다녔어야 했다.

속이 푸지고 알차게 영글지 못한 김승원이 안팎이 다른 처녀의 재세에 락심천만해서 허둥거리다가 나중에는 《절교선언》까지 하려고 했는데 형수감을 한번 만나본 동생 정원이 《에익, 형님은 이런 때에 보면 맹물단지요.》하고 화를 내기까지 해서 그들사이의 아슬아슬했던 고개를 넘겼다고 한다.

우스개소리에 처음으로 꼭 다물렸던 혜숙이의 입귀도 햇조가비 빠그러지듯 갸웃이 들리고 또렷한 선을 이루었던 입술에 꽃같은 미소가 담긴다. 그걸 감추느라고 고개를 푹 떨구는바람에 머리칼이 갈라지면서 분홍빛으로 물든 민틋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김승원은 좌중에 웃음소리가 잦아드는것을 기다렸다가 별안간 높고 거센 탁성으로 한가락 뽑기 시작하였다.

 

                봄이 왔네 봄이 와

                숫처녀의 가슴에도

                나물 캐러 간다고 아장아장 들로 가네

                산들산들 부는 바람 아리랑타령이 절로 나네

                음-  음-

 

제잡담 흥에겨운 가락이 터져 또다시 잔디밭우에는 행복의 웃음소리가 봄아지랑이 가물거리는 하늘가로 울려갔다.

     

                괭이 들고 밭 가는

                저 총각의 가슴에도

                봄은 찾아 왔다고 피는 끓어 울렁울렁

                코노래도 구성지다 멋들어지게도 들려오네

                음-  음-

 

학생운동시절에 대중운동가로 활약한 김승원은 분위기를 이끌고나가는데도 솜씨가 있었다. 그는 팔과 다리를 좌우앞뒤로 흔들거리며 소리를 뽑는데 그 흥취가 대번에 좌중을 흔들흔들거리게 했다.

김승원이 멋들어지게 막을 올리니 다소 무거워있던 공기가 대번에 날아나버렸다.

이날에는 모두가 취흥이 도도해져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내세우니 저마끔 장기가있는 놀음군들이다.

례영은 춤가락을 가지고 푸른 잔디를 무대로 바다의 갈매기처럼 팔을 너울거리며 돌아갔다. 버들가지처럼 나긋나긋한 몸과 팔을 경쾌하게 흔들며 아릿답고 재치있는 률동을 그려나갈때면 사람들은 《좋다! 좋다!》하며 손벽으로 장단을 쳤다.

제 동무의 경사에 기쁨을 금할수없어 얼굴가득히 웃음을 남실거리며 잔디밭우로 헤염치듯 발끝으로 누비는 례영이를 보던 민순임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옷고름으로 눈굽을 훔쳤다.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아릿한 감정이 두눈굽에 눈물이 찔끔 돋치게 했던것이다.

(저것이 신나게 돌아가는건 어쩌면 제 마음의 아픔을 지워버리려는 모지름이 아닐가. 그래서 여느때없이 저 얌전때기가 웃고 까불며 있는 재간 다 털어내는게 아닐가.)

례영이 어느결에 눈굽으로 손을 올리는 민순임을 띄여보았다. 그는 허리를 갑신거려 인사를 하고는 민순임에게로 춤추듯 뛰여왔다.

《어머니, 이 기쁜 날에 왜 그러세요.》

민순임이 방글거리는 례영의 티없는 얼굴을 안개 자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머니, 웬일이세요. 웃으세요. 난 다 알아요. 오늘은 혜숙의 날이 아니예요. 남들이 보겠어요.》

민순임이 누가 엿들을세라 귀에 대고 속살거리는 례영이를 살그머니 끌어안았다.

《에그, 이것아. 네 마음은 어쩌면 그리도 비단결이람… 동열이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내는지, 네가 어째 따라가지 않고 어미속 이리도 태우느냐.》

민순임이 나직하게 푸념을 늘여가는데 례영이 그의 입에 과줄 한잎 냉큼 물려주고는 물기 촉촉한 눈으로 방긋 웃어보인다.

잔디밭우에서는 김명호의 곱새춤이 장관이다.

그는 잔등에 작은 싸리바구니를 들이밀고 꺼뜰꺼뜰 돌아가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였다.

행동이 진중하고 몸이 비대한 김명호가 그 커다란 배를 뚱깃거리며 곱사둥이의 흉내를 그럴듯하게 내여서 녀인들은 배를 끌어 안고 대굴대굴 굴었다.

정시명도 민순임과 함께 나란히 서서 《도라지》를 불렀다.

결혼식날에도 불러보지 못한 노래였다. 마주선이래로 처음 불러보는 쌍창이였다.

민순임은 지나간 허무한 세월에 대한 원망과 자기 설음과 행복에 취하여 떨리는듯 한 어조로 노래를 불렀다.

이날의 주인공들인 신랑신부의 노래가 제일 인기였다.

두 사람이 일어섰는데 혜숙이 자꾸만 떨어지려고 해서 김승원이 나서고 례영이까지 달라붙어 신랑신부가 팔을 꼭 끼고 붙어서게 했다.

좌중에 또 기쁨의 박수가 터지고 뒤따라 김승원이 손장단으로 건들어지게 꾸미는 전주가 장고소리처럼 경쾌하게 울렸다. 그는 손장단을 치면서 늘어진 소리로 덕담을 엮었다.

《자고로 경상도 가시내와 전라도 개똥쇠는 수화상극이라 마주 세우지 말라했거늘 우리 괄량이 저렇게 붙어 서서 노래가락 뽑게 됐은즉 그 말도 헛말이로다, 어절싸 좋구나.》

웃음속에 길철이 선창을 떼자 혜숙이도 눈길을 다소곳이 떨군채 따라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탈이 났네

 

《그래그래, 길철이 십리도 못 가고 발탈이 났지.》

정시명이 한소리 흥겹게 내질러 잔디밭우에는 또 한고패 웃음이 돌아갔다.

평소에는 그리도 언행이 진중하고 범접하기조차 어렵던 나그네들이 몸에배인 틀거리를 다 허물고 웃고 떠들며 노래하며 기쁨에 겨워하는것을 보며 길봉례만은 내내 눈물만 줄줄이 쏟았다.

신랑신부가 2절로 넘어가는데 고음에 가까운 길철의 가락을 은근하고 부드러운 혜숙의 저음목청이 차분히 감싸안고 제법 구성지게 화음을 이루어 봄날의 하늘우로 꽃보라처럼, 구름처럼 흘러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뚝섬의 느티나무밑에서는 행복이 무르녹아갔다.

이따금 길철의 눈길이 혜숙의 눈길을 붙잡느라고 허둥거리는데 혜숙이 지꿎게 눈길을 주지않는다. 용서를 비는 말 한마디라도 속삭이고 싶은데 그건 좌석에 어울리지 않고 혜숙의 기분만 잡쳐놓을듯싶어 저어하였다.

그러나 처녀의 심장은 길철의 그 눈길, 그 고마움을 벌써 끌어안고 대답하고있었다.

《알아요, 다 알아요. 이젠 헤여지지 말자요. 이제는…》

해가 서산마루에 걸터앉아 마지막잔광으로 하늘가를 가물가물 태우고 있을 때에야 사람들은 한바탕 운명적인 격전을 치르고 난 후련하고 장쾌한 마음으로 자리를 털었다.

녀자들을 먼저 보내고나서 정시명은 전우들과 마주 앉았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문제인데 우리 집단의 명칭을 정식으로 〈흥국상회〉라고 부릅시다. 그리고 천도매소는 〈흥국상사〉라고 부릅시다. 동지들사이에서는 이것이 명백히 구분되게 하고 바깥에서 보면 같고같은것으로 인식되게 합시다.

가령 나로 말하면 우리들사이에서는 〈흥국상회〉 회장이요, 도매소에서는 〈흥국상사〉 사장이 될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회장으로도 될수 있고 사장으로 될수도 있소. 동무들의 직함도 이렇게 좀 혼란스럽게 합시다.》

정시명이 돌아보자 모두가 찬성하는 빛이였다.

《오늘은 술병깨나 냈으니 긴 얘기는 하지 맙시다. 새로운 단계의 투쟁은 길철동무가 혜숙동무의 집에 다녀온 후에 토의합시다. 선거놀음때문에 정세는 급전직하로 바뀌여졌소. 그러니 덤비지 말고 각자가 맡은 부문에서 전망적인것과 당면한 투쟁과제를 잘 만들어가지고 모여앉읍시다. 뭐 다른게 없겠습니까?》

길철이가 인차 말문을 열었다.

《혜숙동무가 집에 가려고 하겠는지… 탈가한 딸이 대처에 돌아가다가 알건달사내 하나 달고왔다고 또 방망이찜질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당장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같은데 천천히 갔다오겠습니다.》

길철이 우스개소리로 설명하자 좌중에는 가벼운 웃음이 지나갔다.

《아니, 찾아가시오. 인륜에 어디 그렇게 돼있습니까. 혜숙이 아무리 장한 일에 몸을 실었어도 제부모 이어놓은 피줄을 소홀히 해서야 안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김승원이 길철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김명호도 한마디 하였다.

《내려가 보는게 옳겠소. 그 부모인들 딸을 쫓아내고 여직 소식 한장 받지 못했으니 여북하겠소. 혜숙동물 잘 달래가지고 신혼나들이 겸 머리도 식히고 오시오.》

《그렇게 하오. 이 기회에 부녀간의 인연도 다시 이어주도록 하오. 난 길철선생과 같은 끌끌한 사위가 토방에 올라서면 장인이 어떤분인지 몰라도 버선바람으로 달려나올것 같구만. 자, 그러면 우리도 떠납시다.》

정시명의 소리에 일행은 가벼운 웃음을 남기고 느티나무밑을 떠났다.

길철은 더는 사절을 못하고 혜숙이와 함께 남도에 내려가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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