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불 붙는 대지
5
무쵸는 3박 4일의 체류일정을 빳빳하게 마치자 곧 피곤에 지친 몸을 끌고 김포비행장에 나갔다.
무쵸는 부임직전에 현지를 밟아보는만큼 더 깊은 료해를 하기 위하여 방문날자를 연기해달라고 백악관에 전문을 보냈으나 수석비서관은 트루맨이 기다리고있으니 제 기일안으로 무조건 돌아오라고 지시하였다. 트루맨도 제주도일이 못내 궁금하고 미군존재문제가 목에 걸려있는 모양이였다.
하는수없이 무쵸는 이미 계획하였던 하지와의 2차 회담을 파기해버리고 떠나지않으면 안되였다.
지난 4일간 무쵸는 미군철병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리승만과 김구를 비롯한 정계의 명사들과 련쇄회담을 벌리였다. 《국회》의원들도 만나고 어느 자그마한 가게방에 들려 그 주인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3. 8선부근에 나가서는 일선참호에 나가서 상대방의 진지를 장시간 살펴보기도 하였다. 미군정장관 띤과 정보국장 노불도 만났다. 미중앙정보국의 현지기관대표인 레코라우스도 만났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는 각계의 인물들을 만나 될수록 격식없이 담화를 나누면서 이 나라에 대하여 하나라도 더 알기 위해 고심을 하였다.
미군존재에 대해서는 량쪽으로 나뉘여져 있었다.
레코라우스를 비롯한 일부 인물들은 앞으로 미군이 굴욕적으로 철수하는 사태가 일어날수 있다는데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러면서 이 나라에서 일찌기 발을 빼는것이 필요하다고 조심스럽게 건의하였다.
그 리유로 남조선의 정치상황이 총칼의 란무로 가까스로 몰아가는 현 시국의 발전추이를 뒤집어엎고 민중혁명에 의한 미군철거가 공론으로 된다면 쫓겨날수 있다는것이였다. 이것은 미군이 지구상에서 당하는 첫 굴욕적인 후퇴로 된다는것이다.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도 이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좌익권인물들도 만났는데 그들은 미군철거에 대하여 더 강도높이 주장하였다. 지금 벌어지고있는 민중항쟁의 총부리가 미군을 겨누고있는것을 당신들이 모르는가, 모르는체 하는가고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띤과 노불 그리고 지방의 군정장관들은 맹렬히 반대하였다.
미군이 철병하면 이 나라는 더는 미국의 우방으로 되지 않을거라는것이였다.
미군철병은 이 나라에 대한 미국의 정치, 군사적리권을 포기하는 경우에만 이루어져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러면 어느 때까지?… 그에 대해서는 그들도 입을 다물군 하였다.
리승만과 《한민당》당수 김성수와 그들의 지지세력들이 여기에 합세하였다.
리승만은 미군철병문제를 꺼내놓자 금시 죽을상이 되여가지고 덤벼들었다.
그는 피가 꺼꾸로 솟는듯 눈알이 새빨개가지고 이렇게 소리 질렀다.
《특사, 미군철병이라니 그건 천만당치않은 주장이요. 난 걱정이 많은 사람이요. 걱정중에서도 제일 큰 걱정거리가 바로 그거요. 미국사람들이 대양 건너에서 반도정세를 오판해서 군력을 뽑아가면 그보다 더 큰 실책이 없다는겁니다. 난 미국이 이 나라에 우호의 손을 뻗친것이 백년전인줄로 알고있소.
나 리승만으로 볼것같애도 미국과의 돈톡한 맥을 이어오는데 한평생을 바쳐왔소. 이 나라의 국민을 실망시키지 말고 끝까지 보호자가 되여주시오.》
리승만이 시퍼런 피줄이 동아줄처럼 얼기설기 질러간 손을 내밀며 장광설로 간원을 할 때는 눈귀에 눈물까지 찔끔거리였다. 그래 웬간한 일에 부닥쳐서는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쵸도 깊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복이 되여버렸다.
그 자리에서 무쵸는 리승만과의 간격이 퍼그나도 줄어든것을 내심으로 느끼며 《난 당신의 평생의 우인으로 되고싶습니다.》하며 코안경까지 벗어들고 그의 꺼칠한 손목을 잡았다.
《리승만이라…》
무쵸는 대기실쏘파에 서기와 나란히 앉아 창밖으로 련련히 펼쳐진 산발들을 내다보며 리승만과 만났던 일을 떠올려놓고 여러가지 복잡한 심회에 젖어들었다.
만나본 현지인들중에서 제일 살색이 멀쑥하고 살집이 좋은 김성수는 리승만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였다.
《우리 〈한민당〉은 리승만을 내세우려는 미국의 의향을 잘 알고있습니다. 우리도 반대의사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미국과 상대할수 있는 사람도, 현 시국의 중심에 틀고앉아 국가의 기틀을 세워야 할 사람도 리승만이라는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번에 우리 〈한민당〉이 리승만계를 누르고 일당으로 되였지만 우리 당은 친일적인 색채가 강하므로 그 자리를 넘보는것은 국민의식에 둔감한 자살행위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리승만의 실용적가치에 대하여 정확한 평가를 내려야 합니다. 그에게는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화된 자리면 됩니다.
그에게 정치의 키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리승만은 이 나라를 파멸시키고 미국의 영상도 걷잡을수 없는 만신창으로 되게 할것입니다.》
그때 통역으로 참가했던 그 당 선전부장 김승원이 김성수의 말에 주해를 담아 부언한 말이 인상에 깊다.
《리승만은 독립운동가입니다. 그 이상의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항간에서는 대통령중심제의 헌법이 론의되고있다는 말이 돌고있는데 미국이 리승만을 그러한 정치방식의 중심에 들어앉히려 한다면 장차 미국을 웃기기 전에 이 나라 사람들을 웃기게 될것입니다.
난 리승만에게 매달리는 미국의 작태를 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더 깊이 알게된것 같습니다. 진날에 개를 사귀여야 바지가랭이밖에 추해질것이 없습니다.》
무쵸는 김승원의 유모아가 신랄하고도 자극적이여서 김성수를 돌아보기까지 하였다.
김성수는 그의 눈길에서 경계심을 느끼자 쓰겁게 웃으며 한마디로 해명을 주었다.
《이 사람은 나의 밭은 친척이요. 〈한민당〉을 떠받들고 있는 량기둥중의 하나입니다.》
적지않은 인물들이 리승만에 대하여 경멸감을 표시하고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서 무쵸는 정말 미국이 그 인간을 대통령으로 밀어주고 권력을 집중시켜주었다가 추한 꼴이 되지 않을가 크게 걱정이 되였다.
김구는 어디서 귀동냥해 두었는지 미국사람들은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을 대사관의 말단직원으로 쓰지 않는다는데 하물며 대통령재목감을 이 나라의 혼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양인녀성과 살고있는 인간으로 선택하는 저의가 무엇이냐고 슬쩍 에돌아 미국을 꼬집는것이였다.
하여튼 무쵸는 리승만에 대하여 좋다는 말보다 나쁘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그래서 미군정장관이나 노불과 같은 인물들이 리승만을 버쩍 춰세워줄 때 백악관은 아직 그 누구에게도 대통령명함장을 주지 않았노라고 오금을 박아놓았다.
(좀 더 두고 보자.)
무쵸는 조선문제에 한해서는 절대적인 발언권을 행사하는 맥아더와 도꾜에서 다시 만나 철병문제와 대통령후보문제를 다시금 론의해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아직도 모든게 석연치 않다. 어느것하나 맥이 짚이지 않는다. 이제 워싱톤에 돌아가서 트루맨에게 자신을 가지고 주장을 내세울만한게 없다. 마치나 운무에 휘감긴 도시를 굽어보고 떠나는듯 싶다. 하긴 하지까지도 아직 이 나라 국민에 대해 미지수가 많다고 실토하였으니 고작해야 사흘밤 나흘낮을 지내보고서야 겨우 뚜껑이나 뗐다고 할수있다. 밑바닥까지 헤쳐보자면 시간이 필요하다. 지겨운 일이라도 이 나라의 통치권을 행사하자면 아무튼 그 일부터 해야될것 같다.
그래 지금 그는 트렁크안에 책 한보따리를 넣고 간다.
노불더러 이 나라를 알수있는 자료를 부탁했더니 자기의 선물이라면서 오늘 아침바람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이번 순행길에 하나만은 똑똑한 느낌을 가지고 간다. 앞으로 자신이 맞다든 나라가 만만치 않으리라는 판단이다.
첫날 하지는 저녁만찬자리에서 맥아더가 자기를 파견할 때 이 나라 국민을 과거의 낡은 타성에 사로잡혀 갓 쓰고 다니는 족속들이라 비하하던 이야기를 고담처럼 들려주면서 맥아더야말로 시대에 한물진 로망든 늙은이라고 꺼리낌없이 조롱을 하였다.
체류기간은 짧아도 무쵸는 하지가 이 나라 국민의 정치기상도를 높이 부르는 리유가 리해되였다. 그런데 리해되지 않는것은 그에 대처한 하지와 그 세력들의 통치방식이다.
이번에 치뤄진 《5. 10단선》때 사상자가 수천명이고 구속자가 5천을 넘어섰다니 이게 어찌된 수자들인가.
아직도 제주도에서는 반미항전세력이 총칼로 대항해나서고 남조선전역의 험한 계곡마다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있다니 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기에 이 꼴로 만들었는가.
이게 과연 정치적감각이 선진국에 짝지지 않는다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용납이 되는가.
노불에게 리유를 물었더니 그는 중핵적인 대답은 회피하는듯 대수롭지않은 소리로 건성 대답하는것이였다.
《이 나라에는 명사들이 많아서 기를 눌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족되는게 많은줄 알면서도 독재적성향이 우세한 리승만을 천거하는것입니다.》
무쵸는 어쩐지 서울에 들어설 때는 즐겁고 환희 비슷한 감정이였는데 떠나가는 이 순간에는 가슴안이 무직한게 꼭 체기를 받은 기분이다.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것은 남도의 섬 제주도였다. 무쵸는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제주도부터 시찰하였다.
허름한 미군소령옷을 걸치고 하지가 특별히 마련한 군용직승기에 한개 소대의 호위까지 받으며 갔다왔다. 워싱톤정계를 뒤흔들어놓은 불 붙는 대지를 신비함에 잠겨 돌아보았다.
첫 인상은 이제 서울에 부임하면 이곳에 자그마한 별장이나 지어놓고 주말휴가를 즐기고싶어지는 아름다운 풍경이였다.
제주도의 군정장관도 만나고 미군 부대장도 만났으며 본토에서 넘어온 우익세력의 우두머리들도 만났다. 불타버린 경찰지서들이며 파괴된 투표소와 여기저기 나붙은 빨찌산의 격문도 직접 읽어보았다.
차츰 첫 인상은 지워지고 두려움이 짙어갔다. 어데선가 금시 빨찌산의 보총사격총성이 울릴듯 한 땅을 돌아볼수록 오금이 저려났다.
(예가 내가 다스려야 할 곳이란 말인가.)
무쵸는 그 불 붙는 대지의 통곡을 분명 들었다.
- 미국은 손을 떼라!
- 미군은 물러가라!
불에 끄슬은 바위며 중둥이 부러진 로송이며 외로이 흐르는 시내물도 그렇게 소리치며 분노를 터뜨리는것만 같았다.
그러나 무쵸는 한나산초입의 아직도 초연내가 서린 너럭바위우에서 코안경을 벗어들고 백록담두리에 진을 치고있다는 빨찌산근거지를 노려보며 분명한 대답을 주었다.
- 미국은 손을 떼지 않을것이다.
따라서 미군은 물러가지 않을것이다!
현지에 와있는 미국인들도 하나같이 떠들었다.
《미군이 물러나는것은 이 땅을 포기하는것이다. 이 땅을 지배하려면 미군을 얽어매두어야 한다. 문제는 세상을 납득시킬수있는 구실을 만들어내라.》
지금도 무쵸는 코안경을 벗어들고 아이들 주먹만한 코줌방을 손끝으로 살살 만지며 그 스산한 살풍경을 그려놓고 오한에 걸린듯 몸을 떨었다.
모든것이 종잡을수 없고 어수선한게 앞날이 걱정스럽기만 하다.
마침 구내방송원이 서투른 영어로 일본하네다공항으로 가는 손님들은 개찰구에 나가라고 알렸다.
기다린듯 대기실문이 열리더니 그동안 안내겸 통역을 맡아준 노불이 들어섰다. 그뒤로 하지와 군정장관 띤이 들어섰다.
《무엇하려 두분이 다 나오셨습니까. 난 조용히 떠나려고 했는데…》
번거로운것을 싫어하는 무쵸는 서울에 와서도 자기 홀로의 시간을 갖고싶어서 공식적인 초대들에는 일체 응하지않고 소리없이 자기 볼장을 보아왔다.
떠나면서도 하지의 부관실에 전화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노불만 동행하여 호젓이 서울을 빠져나온지라 그들의 환송이 그닥 반갑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 봉사를 소홀히 한것 같습니다.》
하지가 인사치례로 미안쩍은 흉내를 내였다.
《나야 뭐 대접받으러온것은 아니니깐… 나흘동안 쉬임없이 뛰였더니 그런데 눈 팔 경황도 없었지요.》
《그래 보실 일은 원만히 되였습니까?》
무쵸는 하지가 대통령에게 보고할 사항들을 은근히 내탐하고 싶어 한다는것을 감촉하자 아닌보살을 하였다.
《웬걸요. 난 현훈증이 일도록 숨차게 보고듣고했지만 석연한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장사업을 잘못하였습니다.》
《아니지요. 난 당신들이 준비해주는 보고서를 접수하러온것은 아닙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유연하게 응답을 하는 무쵸의 말에 하지는 그만 목덜미가 벌깃하게 타들었다.
그동안 하지는 노불을 통하여 무쵸의 일정을 구체적으로 보고받아왔다.
그리고 은근히 무쵸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하여 자기의 주장을 일치시키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하였다.
사실상 무쵸의 보고서는 어떻게 보면 이 서울에서 해놓은 3년간의 군정통치에 대한 검토료해서나 평가보고서로 될수 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이것은 서울에서 물러난 뒤의 자신의 거취를 백악관이 결정하는데서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것이다.
하지는 펜타곤에 들어가서 아시아담당의 작전계통에 들어가는것이 소원이였다.
그러나 악평을 더 많이 받아온고로 십중팔구가 군복을 벗고 나앉기가 십상이다.
그런 경우에도 하지는 조선에서 배운 정치적경험을 살려 국방성이나 륙군성의 차관보로 들어가면 크게 더 바랄것이 없을것 같았다. 차관보로부터 국방관계행정고위직은 다 사복쟁이들이 가로타고있으니 식민지총독에 군단장출신인 자신이야말로 그런 자리를 쳐다볼수있는 당당한 자격이 있는것이다.
그래서 무쵸의 서울방문의 결과가 자신의 전도와 직결되여 있으리라고 접근하려 했는데 상대가 틈사귀를 보이지않아 안달이 났다.
노불의 보고에 의하면 무쵸는 무슨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노불의 조언투의 이야기에는 도무지 호기심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지는 필경 특사의 불의의 출현이 다른 내적인 사명을 띠고있는듯 싶어 그걸 꼭 알아내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노불은 그것도 종시 알아내지 못하였다.
무쵸는 개별인물들과의 담화는 언제나 자유로운 공간을 달라고하면서 노불의 립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통역이 필요한 경우에도 될수록 담화대상자가 골라서 중간에 세우도록 하였다. 로회한 외교관인 무쵸는 흔히 통역들이 자기들의 리해관계로부터 출발한 이러저러한 기도를 실현하기 위하여 통역이라는 언어의 전달공간을 통하여 롱간을 부리기도 한다는것을 여러번 체험한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노불을 통역으로 세워놓고 이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면 필경 이 나라 사람들의 진맥을 짚게되는것이 아니라 노불의 맥으로 일관된 오진을 하게 될것이였다.
무쵸는 지금 하지가 자기가 내린 진단과 처방을 알아내고저 마지막기회를 노리고 달려왔다는것을 간파하고 겉으로는 태연자약한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잔뜩 신경을 도사리고있었다.
《일선에 나가보셨다고 하던데요?…》 띤이 심술스럽게 불거져나온 입을 실룩거리며 물었다.
무쵸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는데 띤이 제잡담 얘기를 엮어놓기 시작하였다.
《용케 가시였습니다. 거긴 사실상 초긴장상태입니다. 아마 미군만 새짬에 없었더라면 려단장 김석원이 북쪽 상대인 최현장군과 맞붙은지 오랠겁니다.》
이번 출장길에 광복전에 일본군 련대장을 하다가 간삼봉이라는데서 항일유격대에 얻어맞고 만신창이 되였던 김석원을 만난바있는 무쵸는 그를 만났던 일이 생각나 미소를 지었다.
개성, 옹진지구의 경비려단장인 김석원은 옹진바다가의 풍치절묘한 도래굽이에 대합조개불고기를 마련해놓고 그를 청하였다.
그는 1937년도에 간삼봉에서 김일성장군부대에 두드려 맞고 혼쭐이 났던 이야기를 한바탕 들려주었다. 무인다운데가 있는 인간이라는 판단이 갔다.
김석원은 미군주둔과 관련하여 무쵸가 언뜻 던진 낚시에 걸려들어가지고 우직하면서도 진속 그대로 툭툭 털어놓았다.
《난 일본놈들도 크게 믿지는 않았지만 뭐 미국사람들도 믿지는 않습니다. 사실상 당신들이 뭐 〈해방자〉라고 떠들지만 이 좁은 반도에서 대포 한방 터뜨린게 있습니까, 졸병 한놈 피를 토한게 있습니까.
어째서 미군이 해방자입니까? 난 그까짓 물러가도 좋고 있어도 좋습니다.
우리도 당당히 군력을 가지게 되였는데 당신들이 물러간다고 제나라 땅이야 지켜내지 못하겠습니까. 사실 솔직한 말로 난 아침저녁으로 평양으로 쳐들어갈 생각만 합니다. 그저 무기만 넘겨주고 가시오. 여긴 우리가 지켜 낼터이니깐.》
그리고는 시누런 금이발을 드러내고 호탕하게 웃으며 휘발유냄새가 나는 대합을 빠개서 우적우적 씹었다.
《김석원은 미군주둔에 대해 대단히 랭소적이였습니다.》
무쵸는 자기의 속심을 묻어둔채 하지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려놓았다.
예상했던대로 하지는 무쵸의 말꼬리를 얼른 물고 늘어졌다.
《김석원을 뭐 려단장자리에 올려놓기는 했어도 그게 정치를 아는 인간입니까. 난 철병문제를 놓고서는 보다 심각한 관계자들의 론의를 걸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나는 이 나라에서 력사적인 진통기를 평정한 미군사령관으로서의 사명을 끝내가는 사람입니다. 다음차례는 아마 군복쟁이들이 아니라 사복쟁이들의 몫으로 될겁니다.
그러나 파견관이 어떻게 바뀌던지 미국의 리권을 떠난 정책이 결정되여서는 안될줄로 생각합니다.》
《당신은 지난달에 대통령이 인가한 륙군성의 보고서를 념두에 둡니까? 내가 알건대는 그 보고서의 취지는 이미 오래전에 당신과 맥아더장군의 공동의 발기라고 알고있는데요.》
다소 온화하기까지한 무쵸의 이야기에 하지는 세모진 턱을 부르르 떨었다.
《거야 뭐…》 하지의 이마가 막 꾸겨놓은듯 쭈그러들고 눈빛이 거칠게 번뜩거렸다.
무쵸의 말이 옳다. 그것은 오유였다. 심각한 정책적오유였다.
- 극동방어선이 너무 길다. 군비삭감압력도 받고있는데 조선과 일본주둔군은 무익한 군력랑비다. 조선반도와 중국대륙에서 손을 떼라.
- 남조선의 과도정부를 인정해버리고 손을 떼라. 신탁통치가 리상적인 방안이므로 거기에 밀어버리자.
- 남조선의 전략적가치는 백악관이 노리여온바와는 거리가 있다. 전쟁이 발발하면 남조선은 종심이 얕고 방어하기 힘들다. 특히 남조선의 무질서와 혼란이 계속되면 미군이 동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발을 더 묻어 빼내기 힘들기전에 물러나라.
이것이 8. 15직후의 하지와 맥아더의 립장이였다.
그러나 점령통치를 몇해 하고나서 립장을 반대쪽으로 급선회시켰다.
무쵸가 그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뗀다. 백악관도 그렇게 알고있는가.
- 미군이 물러서면 조선반도는 통채로 공산권에 흡수된다.
- 조선반도의 전략적의의는 대륙공략의 교두보라는 의미에서 반론할 여지가 없다.
- 미군철수는 쏘련권에 대한 명백한 후퇴이다.
무쵸가 지난해와 올해초에 두차례에 걸쳐 맥아더와 련명으로 제출한 이러한 보고서는 보지못할리 없으련만 먼지오른 고문서를 까짚어거드는 리유는 무엇인가.
《난 이 땅에 와서 정치를 좀 배웠습니다. 정치가의 정치적론조는 언제나 정세의 흐름에 돛을 올려야 한다는 링컨대통령의 명담쯤 외워두기도 했지요. 우린 이미 8. 15직후의 론조들을 버린지가 오래됩니다.》
하지는 상대방의 직함을 고려하여 부글부글 끓고있는 모욕감을 가까스로 누르고 이렇게 가시돋친 어조로 반응하였다.
무쵸는 상대의 충격적인 도전이 재미있는듯 여전히 입가에서 미소를 거두지않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나 역시 공감한다. 미군철거는 시기상조이다. 그렇게 되면 이 무쵸는 서울에 발붙이기 바쁘게 쫓겨나게 될것이다.》하고 맞장구를 치고싶었다.
그러나 무쵸는 그가 보다 속을 털어놓고 또 자기의 립장을 굳히게 하고싶어 표정의 변화가 없이 하지의 세모난 이마와 세모꼴눈을 더듬을뿐이였다.
하지는 무쵸의 엉큼한 속궁리에 말려든채 이 사람이 앞으로 대사로 부임되는 경우 주둔군의 존재가 불편하리라는것을 먼저 타산하는듯싶어 그냥 속이 부글부글 하였다.
사실상 점령군대는 여러모로 그 나라를 조종하는 외교대표들의 업무에 불편을 주는것이 상례다. 그래서 지금 남아메리카에 파견된 미국대사들은 한결같이 자기 관할지역에 파견된 미군을 철수시켜달라고 국무성을 부추긴다고 한다.
하지는 얄팍한 입술을 강물고 있다가 보다 격렬한 어조로 말을 계속하였다.
《방금 우리가 무슨 회의를 하고온지 아십니까. 제주도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국방경비대의 정규무력을 파견할 제안을 검토하였습니다. 30만이 될가말가한 크지않은 섬이 통채로 항쟁자들의 수중에 넘어갔습니다.
우리는 본토에서 1 500이나 되는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조직적인폭력인원들을 파견하였는데 이번에 선거도 치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 이런 땅을 두고 미군을 철거시키는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는지 리해가 가지 않습니까.
미군이 철병하면 남조선은 한달안으로 자체의 좌익권에 장악될것이고 미국의 극동방어선은 일본으로 밀려납니다.》
《아, 아… 이제는 나도 비행기에 나가봐야겠습니다.》
무쵸는 화가 돋친 하지의 설명을 심중히 들어주는척 하다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띤이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무쵸를 만류하였다.
《일없습니다. 비행기리륙시간을 각하가 비행기에 오르는 시간으로 눌러놓았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요, 소장! 당신이 감히 국제항로에 오르는 비행기의 리착륙시간을 마음대로 변경시킨단 말이요?》
무쵸는 자기때문에 비행기리착륙시간까지 제멋대로 늦추어놓은 현지장군들의 방약무도한 행위에 짐짓 성을 내는척 하면서 고집스럽게 일어났다.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지요.》
무쵸는 신사연한 정중한 어조로 장군들의 오만한 처사를 랭담하게 질책을 하고나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하니…》 무쵸는 한마디 더해서 점령군의 분별을 잃은 독선, 독주가 이 나라의 민심을 분개하게 하고 제주도의 반란도 불러낸 요인이라고 맵짜게 입침을 놓을가 하다가 그들이 따라서기를 기다려 한결 기대와 정이 든 어조로 말했다.
《중장, 난 당신을 리해하오. 자기 립장을 견지해주기를 바라오.》
그 소리에 하지가 어안이 벙벙해서 어깨를 흠칫거렸다.
《그러면 특사각하도 미군주둔에 대해서는?…》
하지는 그 세모눈을 횅하게 해가지고 아무런 특색이 없는, 특색이라면 류달리 큰 코라고 할수있는 무쵸의 둥글둥글한 얼굴을 지켜 보았다.
《하하…》
무쵸는 그의 뒤말을 막으며 자기의 진속을 너털웃음으로 가리웠다.
무쵸는 그의 손을 잡아주고는 수십쌍의 눈초리가 눈총을 쏘고있는 비행기에로 뚜걱뚜걱 구두발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그는 승강기에 천천히 오르자 안내원이 서있는 비행기문앞에서 배웅하는 하지와 노불을 굽어보았다.
그러나 사실 이 순간 무쵸는 코안경너머로 5월의 훈훈한 바람이 대지를 어루만지고있는 이 나라의 산천을 바라보고있었다. 산발마다, 골짜기마다 숱한 걱정거리를 안고있는듯 싶다.
《음-》
부지중 무쵸는 신음소리처럼 무겁고도 긴 한숨을 내그었다. 그리고는 자기의 발밑에서 무엇인가 자기를 향해 준엄한 도전장을 던지는듯 한 이 나라의 산과 들을 향해 씹어뱉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군대를 철거시키겠다고? 흥! 그건 안돼. 미군주둔만이 이 나라를 짓누를수 있다. 빨리 대통령을 내오고 정부를 세워 국회에서 미군주둔을 법으로 고착시켜 놓자. 그래서 이 나라가 미군의 군복자락을 물고 늘어지게 해야한다.
그것만이 이 나라의 평정을 미합중국의 의도대로 할수있고 총독으로서의 나의 력사적사명을 다하게 할수있다.》
그는 이렇게 다지며 환송객들을 향해 중절모를 벗어 정중히 례를 표한 후 비행기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기밀서류가방에 미국대통령 트루맨에게 제출할 《남조선시찰보고서》와 《국무성문건 〈에스씨-8〉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할데 대한 건의서》가 들어있는것은 아무도 모르고있었다.
미국무성이 이때로부터 40년후 비밀유효기간이 지나 공개한데 의하면 건의서의 한 토막은 다음과 같이 되여 있었다.
…
남조선의 제반상황은 현 단계에서 미군철수가 절대로 허용되여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도출하고있다. 제주도에 조성된 목전정세가 그를 확증해준다.
이에 대하여 주둔군사령관 하지와 친미적현지인물들이 대다수 공감을 표명하였다.
문제는 미군의 남조선주둔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수있는 법적가능성을 찾아내는것이다.
미군주둔을 합법화할수있는 조건은 충분하다.
요컨대 갓 선거된 현지국회가 미군주둔을 우리 정부에 정식 요청하는 문건을 채택하고 두 나라의 행정부가 협약을 체결하는 방법으로 세계여론의 리해를 받을수있을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미군정을 시급히 철페하고 남조선을 국가로 승인하는 국제법상 절차를 밟아야 할것이다.
이에 대하여 미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장군과도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
무쵸는 건의서의 마지막구절을 위하여 일본 하네다공항에 내리자 곧장 맥아더를 방문하였다.
그는 문건을 보여주면서 수표를 해줄것을 요구하였다.
맥아더는 문건을 훑더니 미군주둔이라는 문구옆에 《시한부적》이라는 단어를 삽입해놓고 - 아써 맥아더 - 라고 제 이름을 멋지게 갈겨썼다. 그리고는 무쵸의 손을 잡고 무뚝뚝하게 부탁하였다.
《트루맨더러 아시아를 잘 봐달라고 하시오. 바야흐로 태평양시대가 밝아오고있소. 태평양을 미국의 호수로 만드는것이 맥아더의 꿈이라고 전하시오.》
무쵸가 서울을 떠난날 저녁에 《국방경비대》총사령관 송호정한테서 정시명에게 기별이 왔다.
류동명이 긴급히 만나자고 한다는것이였다.
류동명은 여전히 군정청 통위부장으로 있었는데 이제 행정부가 서고 군대가 조직되면 국방부의 고문으로 돌아앉을것으로 내정되여 있었다.
그들은 김명호의 처가 경영하는 명월리발관의 고급리발칸에서 만났다.
류동명을 만나본지가 여러달되였는데 그동안 여러가지 나라의 재난을 겪으면서 속을 썩여온탓으로 퍼그나 상해보였다.
《정처장, 이번에는 어떤 싸움을 벌리려 하시오?》
류동명은 김명호의 처가 가져온 차 한잔으로 혀를 추기고나서 곧 화제거리를 꺼내놓으려 하였다. 언제나 간단명료한 명령과 복종에 습관되여온 오랜무관으로서의 기질이 살아있는 류동명은 몇달만에 만나는 정시명이지만 인사말이 따로없이 직통으로 물었다.
정시명은 아직은 자기의 머리속에도 선명한 목표와 방략이 서있지 않았으므로 《글쎄요-》하고 자신없이 대답하였다.
《그렇다는거겠소.…》
류동명은 정시명이 4월남북련석회의후에 아직은 똑똑한 과제를 설정하지 않은것이 다행이라는듯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 실은 무쵸를 만났댔소. 트루맨의 특사로 그 사람이 온것을 알고 계시오?》
《예, 왔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는데 왜 왔느냐하는 소리는 똑똑히 알지 못하고있습니다. 미군정청이 이제는 볼장을 보게 됐으니 정권이양과 관련한 실무적인 문제를 안고오지 않았을가요?》
《음, 딴은 그렇기도 하겠지만 뭐 그것도 정통을 찌른건 못되고… 사실은 미군을 여기에 눌러놓을 명분을 세워보자고 온것 같소. 나와 무쵸사이의 담화에는 노불이 통역으로 참가했는데 낌새가 그렇더구만. 내가 제주도일을 걱정하니 대뜸 무쵸가 한다는 말이 〈그래서 미군을 눌러놓자는것이 이 나라의 안전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하고 제깍 말꼬리를 잡더구만.》
《그게 무슨 쓸개빠진 넉두리랍니까. 제주도사람들의 총부리가 저들을 겨누고 있다는걸 모른답디까?》
정시명은 무쵸가 했다는 말에 어지간히 속이 끓어올랐다.
류동명도 속이 타드는듯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담담하게 엮어나갔다.
《그놈의 밸굽을 다 파고싶어 나도 그런 소리를 했지요. 여사여사해서 미군이 더이상 물러앉기 틀렸으니 이게 걱정이라고 한마디 던져봤지요. 그랬더니 무쵸는 엉큼하게 웃기만 하고 노불이 한다는 수작이 제주도폭동이야말로 미군주둔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켜 주었다는거요.
세상바람결에 다 흔들려서는 대의를 도모할수 없다나. 미군을 주둔시킬수있는 명분을 당신들이 만들어 내라, 이 나라 국민이 원한다면 백악관도 양보하게 될것이다, 세상여론이 이 나라 국민의 목소리를 거역할수는 없지 않느냐,
국회에서 그런걸 만들어 내는거야 힘들게 없지 않느냐… 뭐 이러루 했소. 난 이게 심상치 않거던. 아마 리승만과도 이러루한 이야기가 있고 약조가 돼있지 않을가? 그놈이 벌써부터 대통령이 다된것처럼 떠들고 있다는데 그놈의 입에서야 다른 소리가 나올탁이 없지.
여하튼 우리가 이놈들의 수작질을 귀에 흘려보내서는 안될게 아닌가. 하지쪽에서는 미군정을 한해 더 하는것이 바람직하다는 소리도 나온다고 하오. 내 그래서 만사전페하고 처장을 만나자고 했소. 무슨 마련이 있어야지.》
《옳습니다. 류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미군정연장도 안될 일이고 미군주둔도 더이상 방임해둘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옳거니! 그래서는 안되지요. 미국놈들이 안나가겠다는 앙탈이 분명하오. 제발로 안가겠다면 억지로라도 몰아내야지, 이제 더는 보고만 있어서는 안되우. 지난 3년간 미국놈들짓거리 보며 난 페부에 새겼소. 미국놈들은 당초에 해방자도 원조자도 아니요, 침략자요, 강탈자라는걸 말이요.》
류동명은 저으기 숨소리가 높아지고 길고 흰 장미가 푸들푸들거렸다.
정시명은 류동명의 두손을 말없이 움켜 잡았다. 겨레의 머리우에 드리운 비운을 두고 절통함을 금치못해 하는 늙은이의 비분강개한 모습에 깊이 머리가 숙여질뿐이였다.
정시명의 뇌리에 섬광처럼 무엇인가 번쩍거리였다.
미군주둔을 놓고 적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추구하는 흉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류동명과 헤여진 뒤 정시명은 길철에게 보내는 지시문을 썼다.
《무쵸의 서울방문과 관련한 자료를 시급히 종합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