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피와 눈물의 바다를 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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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얄은 완전히 봉쇄된 공간에서 3박 4일의 방문일정을 마치였다.
권영호는 접촉기회를 마련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으나 그가 출발하는 아침까지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로이얄의 주변에는 언제나 신변호위라는 구실로 무장경찰들이 울타리를 치고 안팎으로 노불이 늘어놓은 정보원들이 피눈이 되여 돌아쳤다.
정시명은 권영호더러 《동향회》원 련명수표가 있는 화평통일결의안과 편지를 써서 문진국을 통하여 넘겨주는것이 어떠냐고 권했으나 권영호는 그냥 제가 나서야 한다고 우기였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신할수 없다는것이였다.
권영호의 말이 옳기는 하였다. 로이얄에게 주는 영향에 있어서 그 누구도 《동향회》의 부회장이며 《국회》의 분과위원장직까지 가지고있는 권영호가 직접 만나는것을 대신할수 없었던것이다.
정시명은 권영호의 단호한 결심을 무턱대고 막아서기도 난감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놔두었다가는 사람을 영 떼울것만 같아 괴로웠으나 당자가 요지부동으로 나서니 어쩌는수가 없었다.
권영호는 마지막으로 비행장에서 그를 기습적으로 만나기로 하였다.
권영호는 례영이 알선해준 택시를(일전에 리창순이와 조우하였던 때 권총을 기념으로 주었던 운전사의 차였다.) 타고 집요하게 뒤따르는 미행을 떨구어놓고 비행장에서 미리 대기하였다.
권영호는 비행장에 도착한 로이얄이 2층에 있는 귀빈실에 들어서는 순간 계단에 오르는 수행원들속에 끼여들었다.
경비경찰이 그를 때늦게 발견하고 달려와 문을 막아나서며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권영호가 몸을 홱 돌려 불덩이같은 눈으로 쏘아보며 벼락같이 고함을 쳤다.
《이놈! 난 〈국회〉의원이야. 어따가 손을 대는거야. 〈국회〉의원 함부로 다쳤다간 가막소 간다는법 몰라?》
권영호의 사나운 기상과 위엄에 달려들던 놈이 움츠러들며 목덜미를 놓았다. 그런데 계단을 뒤따르던 서울경찰청 부청장 최운하가 무작정 곤봉으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권영호는 불의의 호된 타격에 눈앞이 아찔해오고 머리가 빠개지는듯 아팠으나 그놈을 힘껏 떠밀어 계단밑으로 데굴데굴 굴러가게 하고는 류창한 영어로 웨쳤다.
《로이얄장관! 난 〈대한민국국회〉 징계분과 위원장 권영호입니다. 당신과의 상면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여왔지만 끝내 성사되지 않아 무례하지만 이렇게 왔습니다.》
리범석과 이야기를 나누던 로이얄이 그에게로 마주왔다.
그는 경비경찰 두놈에게 두팔을 잡힌채 결연히 버티고있는 권영호를 보자 영문을 알바없어 하면서도 리범석에게 말했다.
《이분을 놔두게 하시오. 어쨌든 나의 손님이 아닙니까.》
리범석이 사태를 알아차렸으나 미국의 고관앞에서 망신스러워 누구라없이 엄하게 소리질렀다.
《물러가! 물러가!》
권영호는 그에게 자기의 명함장부터 보여주었다.
《말씀하시오, 위원장각하.》
로이얄은 그의 명함장을 도로 내밀며 호기심을 보이였다.
《난 장관각하에게 우리 〈국회〉에서 73명을 망라하고있는 〈동향회〉의 위임에 따라 다음 회기 〈국회〉에서 정식 심의하게 되는 결의안부본을 드리게 된 영광을 지니게 되였습니다. 난 〈동향회〉의 부회장입니다.》
《〈동향회〉?… 오, 말을 들었습니다. 나도 이번 서울에서 당신들을 만나자고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습니다. 자, 앉으시오.》
로이얄은 맞은편 쏘파를 가리키며 자기도 쏘파에 앉았다.
《우리는 미군의 즉시철거를 요구하며 북과의 회담을 통해 통일정부를 세우고 완전통일독립국으로 되여 미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들과 사이좋게 지낼것을 바랍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 하여 나의 동료들은 다수 체포되였으며 이제 나도 체포되게 될것입니다. 난 각하가 우리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한 결의안을 트루맨대통령과 미국회와 우리 반도문제에 관심이 있는 모든 기관들에 전달해줄것을 희망합니다.》
권영호의 말씨가 빨라졌다. 이제 놈들이 끌어내면 할 말을 다 할수 없다는 생각에 초조해났던것이다. 한줄기의 피가 그의 목덜미에서 흘러내리고있었으나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채 말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각하를 통하여 각하가 대표하는 미군부와 미합중국정부에 엄중히 경고합니다. 우리 〈국회〉는 미군철거를 반드시 결정하고야 말것입니다. 우린 당신들에게 석달이라는 생각할 시간을 주려고 이미 결정했습니다. 석달! 석달입니다. 미군은 이제라도 물러나는것이 쫓겨났다는 더 큰 수치를 면할수 있는 득책이라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국회〉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우리는 전국민적투표를 호소할것입니다.》
권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주먹을 머리우에 불끈 올렸다. 그는 이 나라의 존엄을 지켜나선 불굴의 기상으로 비장하고도 엄숙하게 선언하고는 그에게 문건이 들어있는 가죽가방을 정중하게 내밀었다.
로이얄은 젊은 투사다운 그 기개와 론리정연한 이야기와 류창한 열변에 저으기 압도되여 자리에서 일어나 사뭇 경건한 자세로 가죽가방을 받아들고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위원장각하, 약속합니다. 당신의 희망대로 이 문건을 배포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들 〈국회〉의 결심을 우리 대통령에게 보고하겠습니다.》
로이얄은 한동안 신비한 눈으로 그 름름한 몸매와 광채가 반짝이는 눈을 보다가 따라온 대사관 무관에게 큰 소리로 지시를 했다.
《당신은 위원장각하를 모시고 즉시 미군병원으로 가시오. 치료를 잘해주시오.》
권영호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역사문을 나서는데 여러명의 무장경찰들이 달려들었다. 그놈들 뒤에는 리승만의 특별지시를 받고 로이얄의 경비조직을 지휘하여온 서울경찰청 부청장 최운하와 검찰청 부장검사 오성도가 서있었다.
《이건 뭡니까? 이건 린치요. 이 사람은 우리 사령부병원으로 가야한단 말이요.》
무관이 륙군장관의 명령을 방금 받은터라 무례하게 덮쳐드는 경찰들을 막아서며 항의하였다.
오성도가 그들에게로 천천히 다가가 명함장을 보여주었다.
《난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 오성도입니다. 〈국회〉의원 권영호씨를 〈국가보안법〉에 따라 검속하게 되였습니다. 경찰들이 우리 법기관의 법시행을 집행하도록 도와주기 바랍니다.》
오성도는 매끄러운 눈으로 무관을 깔끔하게 쏘아보며 구속령장을 흔들었다.
무관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멍청히 서있는사이에 경찰들이 욱 달려들어 권영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권영호는 놈들을 번쩍거리는 눈알을 둘둘 굴리며 노려보았다.
《가자! 가자! 이놈들! 이 땅에서 애국을 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가야하는 곳이라면 나도 갈테다. 네놈들 좀 똑똑히 상통을 봐두자. 이 땅이 합쳐질 때 내 네놈들을 빠짐없이 묶어가지고 그리로 끌고갈테다. 누가 죄인인가, 어디 그때 가서 따져보자!》
권영호는 이렇게 고함을 지르며 팔을 움켜잡은 경찰들을 홱 뿌리치고 자꾸만 앞으로 무겁게 떨어지는 머리를 거연히 들고 경찰차로 걸어갔다.
권영호가 끌려갔다는 보고를 받고난 정시명에게로 안지생이 또 급한 소식을 알려왔다. 인천쪽에 피난해갔던 김승원이 돌아와서 긴급히 만나줄것을 바란다는것이였다.
《서울에는 왜 나타났다오? 온통 잡혀가는 판에 어쩌자는거요?》
정시명은 권영호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방금 받은 직후라 속이 좋지 않아 언짢은 소리를 했다.
그들은 곧 강가에서 만났다.
정시명은 권영호가 체포된 소식부터 알려주고 얼마간 그곳에 있을거지 왜 올라왔느냐고 나무랬다.
그러나 김승원은 정시명의 나무람에는 개의치 않고 나직이 한마디 하였다.
《이제는 제가 나설 차례가 되였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요? 어딜 나선다는거요?》
《아, 글쎄 제 알아보니 〈유엔조선위원단〉에 이번 사건자료들을 종합하여 넘겨주기로 된 의원이 겁기가 나서 덜덜 떨고있습니다.》
《그러니 어쩐단 말이요. 다른 사람을 보내면 될게 아니요?》
《핵심들이 다 끌려갔으니 뭐 적임자가 없습니다. 이번에 가서는 저놈들이 벌려놓은 3월보고서놀음도 폭로하구 로이얄방문정형도 통보하고 석방결의안도 제시하고 리승만의 〈북벌〉기도도 폭로하고 뭐 떨떨한 사람을 보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시 준비시키자면 기회를 놓치겠구요. 기회를 놓치면 〈국회〉투쟁의 파장이 줄어들것 같구요.》
《그래서 김선생이 가겠다는거요? 수배령이 내렸는데두… 안되오!》
김승원이 자기가 꼭 나서야 할 필요성을 단숨에 내리엮자 정시명은 미간을 찌프리고 말을 가로챘다.
《뭐 콩밥 먹는것도 한시절의 재미지요.》
김승원은 안심을 시키려는듯 씽긋 웃었다.
《안되오. 체포될줄 알면서도 나선단 말이요? 권영호를 막아나서지 못한것만 해도 통분한데 김선생까지 보낸단 말이요. 다른 사람을 준비시킵시다.》
《참 제 이러실가봐 보고없이 떠날가 하다가 이번에 떠나면 여러달이 걸리겠는지 여러해가 걸리겠는지 예측할수 없어 회장선생님얼굴이나 한번 더 보고 또 사모님의 토장국 뚝배기맛도 더 보고싶어 왔는데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뭐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잡혀갔는데 제가 숨어서 어정거리는 꼴딱서니도 재미꼴 없구. 다시한번 누가 나서서 소리를 더 크게 내야겠구… 뭐 이 김승원이 일생 받아보지 못한 휴가 한번 주었다 생각하십시오.》
《허참 사람두…》
김승원이 례사롭게 척척 섬겨대는 소리에 정시명은 속이 확 더워올라 목소리가 갈리기 시작하였다. 김승원이 지금 폭탄을 안고 뛰여들겠다는 소리다.
터지면 끝장이 날줄 알면서도 이렇게 벙긋거리기까지 하면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들이대며 성미대로 늘어붙는다.
《뭐 별일이 없을겁니다. 들어가서 처음 감옥살이 해보는 친구들도 만나주는것도 좋을상 싶구요. 그까짓 요사이 잠만 밀려왔는데 둬달 콩밥 먹으며 잠이나 실컷 자주고 올랍니다. 사업인계는 장의원에게 해놓았습니다. 김명호부회장이 아는 사람이니 련계를 가지면 됩니다.》
《에 에 사람두. 가막소를 유희장으로 생각하는게 아니요?》
정시명은 끝내 자기 마음속을 홀가분하게 해주고싶어 왼심을 쓰는 김승원의 너스레에 기가 막혀 웃고 말았다.
김승원이 정시명이 져주는게 마음이 흡족한듯 큰 소리로 웃었다.
《에잇, 사람두…》
김승원이 《국회》투쟁을 지도할 재목이 못된다고 사정봐달라고 떼를 쓰던 일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그때로부터 거의 한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금 김승원은 그 복잡하고 예민한 투쟁을 승리에로 진두에서 이끈 로숙한 지휘관으로 당당히 자라났다. 미군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속에서 《동향회》도 크게 자랐고 김승원도 헌신적인 투사로, 애국충신으로 우뚝 솟아올랐다.
《국회》투쟁의 승리는 김승원의 공로이며 그의 지혜와 열정과 근기가 가져온 열매이다.
지금은 또 마지막 백병전에 나서려고 이렇게 죽음도 웃으며 맞받아나섰다.
정시명은 이런 생각으로 그냥 속이 더워졌다.
《뭐 일본놈가막소에도 들락날락했는데 제 동포가 차려놓은 가막소에서야 견뎌내지 못할라구요.》
김승원이 돌아가려고 하자 정시명이 그의 옷섶을 잡았다.
《우리 집 뚝배기장맛을 보겠다 하지 않았소.》
정시명은 다문 얼마간이라도 김승원과 더 마주앉고싶었던것이다. 베이징시절부터 소리없이 정이 붙고 그게 깊어져 손아래 동생처럼 믿음이 가고 사랑이 가는 인물로 가까와졌다.
《아, 참 그랬었지요.》
김승원이 빙긋 웃었다.
《하긴 사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또 부탁드릴것도 있지요.》
그들은 강변을 떠나 서병남의 집에 들어섰다.
민순임이 부랴부랴 차려놓은 밥상에 마주앉았다.
방안에는 김이 문문 오르는 뚝배기 두그릇이 놓여있었다.
례영이가 놋잔을 들고와서 술을 따랐다.
그런데 잔을 입술에 가져가던 김승원이 도로 내려놓았다.
《왜 그러오? 우린 아직 승리를 축하해서 축배도 들지 못하지 않았소. 이번에 정말 김선생의 공이 컸소.》
《에 에 말도 마십시오. 그게 어디 저의 공이겠습니까. 하여튼 이 잔을 들지 않겠습니다. 어쩐지 고별잔 같애서…》
《원 사람두…》
정시명은 김승원의 소리에 명치끝이 찡 저려들었으나 그도 잔을 내리고 숟가락을 잡았다.
김승원은 잠간새에 뚝배기토장국을 말끔하게 치웠다.
민순임은 문턱에 턱을 고이고 앉아서 김승원이 토장국을 숟가락에 푹푹 떠서 입에 가져가는것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였다. 그는 지금 연신 벙글거리는 저 사람이 이 길로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결사전에 나선다는것을 모르고있었던것이다.
《사모님, 나 뚝배기 하나 더 주시오.》
《예?… 에그머니, 저걸 어쩌나…》
민순임이 두그릇만 끓인터이라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 하였다.
《하하… 내가 요즈음은 배집건사를 잘못해 노상 출출해다녔지요.… 그리고 이제 가서 기운 뽑을 일이 있구요. 하하… 하는수 없지. 돌아와서 한그릇 더 청하지요.… 사모님, 내 가막소 가있는새에 우리 사람 불러다가 이 뚝배기장 만드는 법 잘 익혀주십시오.》
《예?…》
《그리구… 제 부탁이라는게 다른게 아닙니다. 하는일 없는 이 사람은 자꾸만 배가 나오는데 일감에 묻혀 오만시름에 묻혀사는 회장선생님은 자꾸 여위여가니 이게 전 불만입니다. 회장님 잘 모셔주십시오.》
《예! 예!》
민순임은 여느때없이 말수더구가 늘어난 김승원의 부탁에 영문을 모르면서도 어쩐지 그 거동이 례사롭지 않아 어정쩡하게 말을 받았다.
김승원은 대문을 나서면서 중절모를 벗어들고 바래주는 사람들에게 허리를 깊이 꺾어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그가 멀리 신작로에 들어서서 시야에서 벗어지자 민순임이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저… 김선생님이 가막소라는건 웬 말씀이시우?》
정시명은 얼굴이 뚝해서 신작로쪽에 그냥 눈길을 보내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저 사람이 지금 사지판을 찾아가고있소.》
《예?…》
민순임이 소스라치듯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럼 왜 그냥 보내시우. 붙잡으실거지…》
민순임은 기가 막혀서 나직이 부르짖었다.
《붙잡는다구?… 내가? 어떻게?…》
정시명이 성이 나서 소리쳤다.
그 소리는 위험을 맞받아 육박하는 전우에 대한 애모쁜 사랑과 련민, 그의 운명에 대한 불안과 공포, 그러면서도 그를 막아설수 없고 그를 지켜줄수 없고 그를 대신해줄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불만과 야속함이 압축된 쓰라린 고뇌의 폭발이였다.
이 작별이 또 이제 일생토록 가슴을 후벼내는 후회와 자책으로 페부에 새겨지지 않을가. 그런데 난 어찌하여 저 사람을 그저 심상하게 떠나보냈을가.
이제라도 끌어안고 볼을 비비며 돌아오라고 당부하고싶다.
지금 결사전에 불사신처럼 뛰여드는 저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삶을 사랑하고 생활을 즐길줄 알며 꿈이 많은 인간인가. 마음씨는 또 얼마나 선량하고 진실하고 다감한가.
어째서 나의 주변에는 저렇게 어질고 순박하고 착한 인간들만 모여들어 이렇게도 뼈마디를 저리게 하고 더운 눈물을 짜내게 할가… 아, 아, 우리의 싸움이 저런 인간들만을 불러내는것일가. 우리의 위업이 저렇듯 아름답고 순박하고 남을 위해 자기를 초개처럼 던질줄 아는 인간들만을 골라서 전렬에 세워주는것일가!
정시명은 격렬하게 일고 잦는 이런 불같은 생각에 묻혀 그냥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민순임은 전에없이 성깔이 돋친것 같은 남편의 컴컴한 얼굴을 흘깃 쳐다보다가 얼른 고개를 떨구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남편의 눈굽에 눈물이 촉촉히 고여있었던것이다.
저녁 여섯시.
《유엔조선위원단》청사정문은 김승원의 체포를 위해 대기하고있는 여러명의 경찰들과 마중나온 수리아, 오스트랄리아, 카나다 대표들과 그들의 보좌관들, 서울안의 주요신문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여섯시 정각이 되자 소형뻐스가 청사정문앞에 와서 멈춰섰다.
경찰들과 기자들이 서로 몸싸움을 벌리는 속에서 김승원과 동행하게 된 그의 처 윤미향을 비롯한 서너명의 기자들이 내려섰다.
그런데 그속에는 김승원이 없었다.
김승원은 벌써 두시간 전에 뒤문으로 들어가 인디아대표의 방에 들어가서 대기하고있었던것이다.
모두가 어리벙벙해있는데 인디아대표의 보좌관이 나와서 《국회》의원 김승원선생의 회견이 회의실에서 시작되였다고 알렸다.
정문에서 웅성거리던 대표들과 기자들 그리고 경찰들이 우르르 청사의 3층에 있는 회의실로 달려갔다.
회의장에서는 이미 김승원이 《유엔조선위원단》대표들과 역원들을 다 앉혀놓고 미군철거를 위한 《국회》투쟁의 마지막 결사전을 벌리고있었다.
1949년 6월도 바쁘게 저물고있었다.
간고하고 피어린 나날들이였다. 힘겹고 복잡했던 나날들이였다.
정시명에게도 반가운 소식들이 련이어 날아들었다. 김석원의 1사단은 송악산에서 불질을 하다가 최현에게 얻어맞아 수백의 주검을 내고 주저앉고말았다 한다. 해주에 특수무장대를 파견하고 원산쪽에 호림부대를 들이밀어 무장폭동을 일으키려 했던 리범석의 흉계도 산산이 부서졌다.
설상가상으로 남강원도의 내륙산악에 위치했던 강태무, 표무원대대가 무장을 한채 북으로 의거입북하였고 해군 부산기지에서는 애국적인 해군들이 부산해군기지 사령관까지 묶어가지고 소해정을 타고 북으로 들어갔다. 김포비행대에서는 애국적인 비행사가 애인과 함께 금방 사들여온 최신형해군경보기를 몰고 유유히 38선을 넘었다.
게다가 빨찌산부대들은 유격전구를 넓히며 서울을 위협하고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북벌》의 첫번째 나팔수였던 김석원이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리승만앞에서 《북벌무용론》을 과감하게 주장해나섰다.
게다가 리범석도 북과의 회담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내놓아 《동향회》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밑에서 문진국과 조태준이 열심히 쑤셔놓았던것이다.
북과의 대결에서 쌍기둥처럼 버티여왔던 두 인물까지 이렇게 나오자 백악관과 리승만은 혼비백산하였다.
리승만은 하는수 없이 우선 7월 15일로 예정해놓았던 《북벌》을 중지하기로 하였다.
미국도 손을 들지 않을수 없었다.
1949년 6월 20일.
안팎으로 얻어맞아 미군주둔의 명분을 송두리채 잃게 된 미국대통령 트루맨은 륙군성대변인을 펜타곤의 기자회견장에 내보내여 미군철거와 관련한 미국의 립장을 공식 발표하게 하였다.
트루맨이 아시아에서 제왕으로 행세하고있는 맥아더의 강한 반발을 무시하고 드디여 립장변화를 보인데는 물론 불원한 장래에 조선반도에서 울리게 될 전쟁의 포성을 앞두고 차라리 내외의 규탄을 받고있는 남조선주둔군을 당분간 철수시키는것이 바람직하다는 로이얄장관과 그 주변인물들의 달라진 정책적립장에 동조한데도 리유가 있었다.
륙군성대변인은 내외기자들로 초만원을 이룬 회견장에서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선언하였다.
《미합중국정부의 위임에 따라 포츠담협약과 모스크바3상회담합의에 기초하여 남조선에 주둔하고있는 미군을 올해 미국의 독립기념일전으로 철수시킨다는것을 공포한다.》
륙군성대변인은 이때로부터 20일후 같은 자리에서 다시금 짤막하게 통보하였다.
《미합중국정부는 지난 6월 20일부 결정에 따라 남조선에 주둔하고있는 병력을 7월 4일 미국독립기념일까지 전부 철수하였다. 현재 남조선에는 현지군을 교육할 사명을 띤 2천명의 고문단이 해당 정부의 요청으로 잔류하고있다.》
이날 륙군성대변인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고 뺑소니치듯 퇴장하여 버렸다.
미국놈들의 발표가 거짓인지 진짜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지만 분명한것은 드디여 미국놈들이 자기들의 패배를 시인한것이다.
비밀시효가 지나 세상에 공개한 미국무성문건 《한국보고서》에서 당시 남조선미군주둔과 관련한 저들의 참패에 대하여 미국무성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로써 미군의 남조선주둔의 법적당위성은 완전히 상실되였다. 다시는 미군이라는 모자를 쓰고서는 남조선에 들어갈수 없게 된것이다. 따라서 그때로부터 한해후에 있은 조선전쟁에도 〈유엔군〉이라는 모자를 써야 하였다. 그 뒤날에도 〈유엔군〉이라는 구차스러운 이름을 빌려야만 하였다.》
이 력사적인 승리에 바쳐진 《흥국상회》의 투쟁을 감회깊이 돌이켜보는 정시명과 그의 전우들의 가슴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련일 비통한 소식들이 전해왔다.
김승원이 감방에서 옥사했다는 소식이 왔다. 그리고 서울지방법원 1심에서 황철산과 권영호는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나머지 열두명의 《동향회》핵심들은 5년부터 15년까지의 징역형을 받았다.
신익희가 권영호에게 했던 약속대로 비상국회를 열어 체포된 《동향회》원들의 석방안을 상정시켰으나 88대 87이라는 표 하나의 차이로 아쉽게도 석방투쟁이 실패하였던것이다.
옥에 갇혔던 《동향회》의원들은 그후 조국해방전쟁이 시작된 3일후 서대문감옥에 돌입한 인민군대에 의하여 전원이 구원되여 북으로의 길에 올랐으며 정의와 통일애국의 길에서 행복하게 자기의 인생을 빛내였다.
비보는 이것뿐이 아니였다.
뙤약볕이 쏟아져내리는 초복의 어느날이였다.
인적없는 남한산성의 로송나무밑에 《흥국상회》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나무밑에는 네모난 제상이 돗자리우에 차려져있었다. 그앞에 둘러친 흰 비단천에는 여러명의 낯익은 사람들의 사진이 검은 테에 들리여 정히 걸려있었다. 상앞에는 고인들이 인생에 남기고 간 향기런듯 잘게 썬 향나무가 진한 향기를 풍기며 실실 타고있다.
그 두리에는 붉고 푸르고 노랗고 흰 들꽃들이 소담하게 놓여있다.
맨앞에는 정시명이 무릎을 꺾고 앉아있었다. 그 뒤에는 례영이 금시라도 쏟아져나올것 같은 통곡을 짓씹느라고 오른손을 입에 꽉 물고 서있다. 그옆에는 민순임과 김승원의 처 윤미향이 피가 나오도록 아래입술을 감쳐물고 서있다.
불과 몇달어간에 사랑하는 남편과 시동생을 련이어 잃은 윤미향은 며칠새 두볼이 가라앉고 눈두덩이 퉁퉁 부어있는데 새까만 윤기가 함치르르하던 머리칼에 때일찍 흰오리가 생겨나고 눈귀에 실주름이 가닥가닥 잡히여있었다.
정시명은 그 녀자를 《흥국상회》에 참가시켜 권혜숙이 하던 일을 맡기기로 결심하고 오늘 이 자리에도 참가시켰다.
처녀시절부터 김승원과 함께 조직적세련을 받아온 윤미향은 웬간한 녀인들이라면 태를 치고 목놓아 울어버릴 자리련만 아래입술을 사려물고 용케 뼈저린 고통을 이겨내고있다. 다만 이따금 고통스러운 경련이 입술로 지나가고 종이장처럼 창백한 이마아래로 가늘게 지나간 눈섭이 푸들푸들 뛰였다.
그 뒤로 김명호, 길철, 안지생, 최남수, 서병남이 고개를 푹 떨구고 서있었다. 유독 길철만은 높게 들린 파아란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고 눈길을 그 한끝에 박고있다.
첫 사진에는 활짝 웃고있는 혜숙의 얼굴이 있다. 새하얀 적삼을 입고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그 큰 눈을 가늘게 쪼프리고 입을 곱게 벌려 명랑하게 웃는 꽃같은 모습이다. 웃음을 떼여놓고서는 생각할수 없었던 혜숙이였다.
이 사진은 방금전에 길철이 내놓은것이였다.
추모제장소를 둘러보고난 길철이 흰천에 걸려있는 사진들을 보다가 말없이 이 사진을 꺼내놓았다.
례영이 그 사진을 받아들고 밝게 웃고있는 애인의 사진을 걸어놓고싶어하는 길철의 그 마음에 또다시 눈물을 펑펑 쏟으며 사진을 갈아걸었다.
혜숙의 사진옆에는 소령계급장을 단 군복차림의 김정원의 사진이 있었다.
그 군복이 보기싫어 다른 사진을 찾았으나 없어서 그대로 군복사진을 걸어놓았다. 놈들을 끌어안고 달리는 렬차에서 자결한 이 강직한 인간은 지금은 군복속에서 조용히 미소를 짓고 동지들을 바라본다.
그 옆에 나란히 자리잡은것은 김승원의 사진이다.
김승원의 사진은 《유엔조선위원단》 회의실에서 윤미향이 찍은것이였다.
주먹을 머리우에 쳐든 불사신의 모습이였다. 이 세상에 남긴 그의 마지막모습이다.
정시명은 지금토록 그의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다가 눈을 꾹 감았다.
나들이 떠나는 사람처럼 빙긋 웃어 하직인사 남기던것이 방금전 같은데 이렇게 고인이 되여 나타나다니… 놈들의 고문에 두팔이 떨어지고 창자가 터졌다고 한다. 어느 한 의원이 놈들의 악착스러운 고문에 못이겨 김승원이 《동향회》의 실질적인 지도인물이라 부는바람에 그에게 수사의 초점이 모아졌다고 한다.
《국회》사건을 담당한 오성도는 김승원의 배후가 공산당계가 아니라는것을 확인하자 정시명과 련결된 인물이라고 단정하고 련일 고문을 들이댔다고 한다.
그러나 김승원은 억척으로 버티였다. 구뎅이에 밀어넣어 목까지 흙을 처넣고 대라고 했으나 이렇게 대답하였다.
《〈동향회〉는 우리 회원들의 애국적결단으로 무어진 조직이다. 설사 뒤에 누가 있다 한들 이 김승원의 입이 열릴줄 아느냐!》
다시 그를 파가지고 고문대에 데려갔다.
눈알이 쏟아지고 사지는 찢겼어도 그는 동지들을 웃음으로 고무하였다고 한다.
악에 받친 교형리들은 집단적으로 달려들어 때려죽였다.
옥중에서 김승원은 이런 글을 보내여왔다.
《형님을 모시고 님을 뵙고저 했건만 중도에서 넘어지는 절 부디 용서하십시오. 조국통일 만세!》
김승원은 이렇게 갔다.
일찌기 재산가의 집문턱을 홀연히 넘어 풍파사나운 언덕길을 꿋꿋이 걸어온 사람이였다.
그와 더불어 얽혀온 사연들이 펑끗펑끗 스쳐갔다. 베이징반점에서 짜장면 네그릇을 게눈감추듯 해버리고는 제풀에 크게 웃던 그 선한 얼굴, 《보안법》이 채택된 후 표호성같은 노성을 터뜨리던 모습, 혜숙이네 결혼이 그리도 기뻐서 어깨를 흔들거리며 좌중을 웃기던 그 쾌남장부의 기개가 얼마나 보기좋았던가.
갖가지 모습을 다 지우며 마지막결사전에 가볍게 나서던 모습이 앞을 막아선다.
이제라도 김승원이 그 름름한 얼굴에 벙긋 웃음을 담고 《김승원이 가막소에서 한잠 자고 왔수다.》하며 불쑥 나타나 뚝배기장국을 찾을것만 같다.
그러지 않아 민순임은 김승원이 떠나는 날 뚝배기 한그릇 더 대접못하고 떠나보낸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울었다.
《에잇, 승원이! 당신은 이렇게 우리 가슴에 못을 박자고 그렇게 떠나갔는가. 이렇게도 가슴을 허벼놓자고 웃음만 떨궈놓고 떠나갔소?!》
정시명은 그 듬직하고 믿음이 가던 인간의 모습을 그냥 눈길로 어루 더듬으며 피방울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속깊이 탄식하였다.
김승원의 옆에는 흰두루마기를 걸치고 안경을 쓰고 그 누구에게 당장 호령이라도 내릴듯 엄엄한 기상을 한 김구의 사진이 걸려있다.
미국놈들과 리승만은 김구마저도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리승만은 평안북도 룡천대지주의 아들로서 광복후 《서북청년단》에 들어가 못된 짓을 하다가 서울로 도망친 안두희라는 깡패를 내세워 미륙군장관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김구에 대한 암살작전을 여러차례 시도하였다.
놈들은 안두희를 김구에게 접근시키기 위하여 그와 한 고향사람인 《한독당》조직부장에게 뢰물을 먹여 비밀당원으로 입당시켜놓았다. 첫 습격은 1949년 6월 23일 밤에 진행되였다. 그러나 경교장을 지키고있던 김구의 측근세력에 의하여 저지되였다. 놈들은 다시 6월 25일 김구가 공주에서 진행되는 《건국실천원양성소》개소식에 참가하러 가는 기회를 리용하여 수원의 병점고개에서 그를 저격하려하였으나 개소식이 취소되는바람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놈들은 그 다음날 백주에 안두희로 하여금 버젓이 포병사령부 소위옷까지 입혀주고 김구를 찾아가게 하였다.
안두희놈은 김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연 권총을 뽑아들고 4발의 총탄을 김구의 가슴팍에 날렸다.
무쵸와 리승만놈은 제놈들에게로 쏠리는 여론의 비발치는 규탄을 다소나마 피해보기 위하여 부랴부랴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안두희놈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놈들은 1950년 10월 시국이 혼란한 기회에 그를 석방하였다.
안두희는 일후에 고속승진을 거듭하면서 호화방탕하게 살았다.
그러나 력사는 언제나 진실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죄는 죄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1987년 4월 27일, 안두희는 일생동안 그놈을 추적하여온 애국국민 권중희라는 사람에 의하여 력사의 심판을 받고야 말았다. 력사의 추물들에게 내리는 민족의 엄정한 심판이였다.… 정시명은 지금 김구의 엄한 얼굴을 보면서 피살되기 며칠전에 인천의 해수욕장에서 그와 마주앉았던 일이 생각났다.
김구는 드디여 미국놈들이 물러가게 되였다고 좋아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정회장, 이제는 내가 뭘 했으면 좋겠소?》
정시명은 롱조로 받았다.
《이제야 계룡산 마곡사에 들어가셔야지요.》
《에, 에, 정회장이 여직 그 일 잊지 않으셨군. 뒤날에 김장군님 뵈오면 제발 그 말만은 올리지 말아주오. 그게 내 한생에 실언치고 가장 큰 실언이 될번 했어. 난 말일세. 요새 평생길 자주 돌아보군 한다오. 뭐 무사분주히 뛰여왔건만 겨레앞에 해놓은 일 뭐냐?… 똑똑한 나라를 세워놓았나, 백성의 밥상을 기름지게 했나, 동포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거두게 했나… 큰산을 움직였더니 들쥐 한마리라… 허허 내 꼴 꼭 그꼴일세. 헌데 이젠 눈뜰라 하니 내 나이 너무 차서 앞이 없는거요. 그래 내 생각을 몇고패 다시 했소. 두배, 세배, 열곱으로 살아야 되겠다 하고 말이요. 여생을 달음박질해야 하겠다구 말이요. 허허…》
그 소박하고 미더운 속삭임에 어떻게 대답했더냐.
《년세가 무슨 대수입니까. 선생님 정력이 지난해보다 썩 좋아졌습니다. 이제 30년은 넉근합니다. 우리 어찌하던지 이 남녘땅이 북녘땅처럼 살맛 도는걸 꼭 봅시다.》
《30년은 넉근하다구? 허허… 살맛 도는 세상이라… 참 좋은 말일세. 옳소. 그런 세상 만들어놓고 죽어야지… 암 그때까지 살아견뎌내야지.》
… …
이게 그와 나눈 마지막얘기다. 그 약속을 남겨놓고 이렇게 떠나다니… 30년은 넉근하다는 소리에 주름살을 쭉 펴던 그 모습이 력력한데 이렇게 고인의 모습으로 되다니… 정시명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고개를 떨구고 서있는 전우들을 묵묵히 눈길로 더듬었다. 그들의 얼굴마다 피눈물이 고여 흐르고있다. 심장만 커다란 울림으로 가슴들을 쿵쿵 흔들뿐이다.
추모사도 없고 누구의 말 한마디도 없다. 모두가 죽음의 길로 흔연히 떠나간 동지들과 미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인민적항쟁에서 쓰러진 수천수만의 애국렬사들의 령전에 고개를 숙이고 그들과 마음속의 이야기를 나누며 북받치는 오열을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아내고있었다.
《동지들!》
드디여 정시명이 가야금처럼 팽팽해진 비분의 금선을 툭 튕겨놓고야 말았다.
《전우들을 잊지 맙시다!》
고개를 떨구고 슬픔과 분노를 누르고있던 전우들이 하나둘 젖은 얼굴을 들었다.
정시명은 그들을 둘러보다가 뭐라고 또 자기의 쓰라린 감정을 터뜨려놓으려 했으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목이 꺽 잠겨버렸다.
가까운 사람들이 자꾸만 곁에서 사라져간다는 류다른 감정이 가뜩이나 저려드는 가슴의 상처에 덧개를 끼얹어 자기에게로 눈길을 돌린 전우들모두를 한품에 끌어안고 볼을 비비고싶었던것이다.
이제 한해가 지나면 이들중에서 누가 또 자리를 비우게 될것인가. 아-얼마나, 얼마나 정이 들고 귀한 사람들인가! 죽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간다.
혜숙이, 승원이, 불같은 사랑을 안고 추억의 한가운데 눈물겹게 자리잡은 벗들이다.
사랑을 위해, 깨끗한 사랑을 지켜, 자기들의 사랑을 겨레에 대한 더 큰 사랑으로 불태우며 서슴없이 죽음을 선택한 그 인간들을 만년이 간들 억년이 간들 뉘 잊을소냐.
잊어서는 안된다!
잊어서는 안된다!
얼마나 조국앞에 열렬한 인간들이였더냐!
한생을 조국을 위한 외통길만 줄곧 달음질쳐온 승원이… 살아갈 길 막막해서도 아니요, 누가 떠밀어서도 아니요 스스로 받아멘 애국의 짐을 한생토록 걸머지고 그걸 위해 죽음을 맞받아 큰 공을 떨쳤으니 그들의 령전에 꽃묶음 하나만 놔주는것이 죄스럽기 그지없다.
김구가 걸어온 인생의 자욱에는 또 얼마나 수난이 차있느냐.
그래도 백범은 백범답게 이 나라 만백성의 뜻을 모아 살려고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모지름을 썼으니 력사에 의연히 거인으로 우뚝 솟은 그 모습이 장하다. 어찌 이들뿐이냐. 지금도 철창속에서 놈들의 야만적고문에도 끄떡없는 권영호와 황철산이며 유명무명의 영웅들은 그 얼마랴.
모두가 태를 묻은 내 나라 강산에서 장하게 살다가 의롭게 생을 마감짓는것을 최상의 락으로 간직해온 이 땅의 장한 아들딸들이다.
참으로 이들보다 더 마음씨 곱고 정직하고 선한 인간들이 세상에 또 있으랴.
생활을 즐기고 사랑을 고결하게 여기며 내 나라, 내 겨레를 금지옥엽처럼 아끼는 이네들의 착하고 비단결같은 마음들이 끝내 이땅을 어지럽히는 추악하고 비렬하고 악스러운것을 이겨내고야 말았다.
그래, 선은 악을 이겨냈다. 선은 약해보이지만 악스러운것을 이겨내고야 만다.
사람들은 잊지 않을것이다. 우리 후손들은 이들을 길이 전해갈것이다. 그리고 이들처럼 착하고 대바르게 살기 위하여 애쓸것이다.
하지만 도적무리들은 이겨냈으나 의연히 통일의 길은 순탄치 않다. 넘어온 피와 눈물의 바다를 이어 또 어떤 시련의 폭풍길을 헤쳐야 하겠는가?… 정시명이 흉중에 가득찬 비분을 토하지 못하고 또다시 눈물을 짓자 끝내 례영이가 《언니야!》하고 혜숙의 사진을 끌어안고 소리내여 울기 시작했다.
그것이 마치나 신호나 된듯 녀자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잔디풀을 박박 뜯으며 《애고-대고-》 통곡을 터뜨렸다.
남정네들도 흑흑- 소리내여 울기 시작했다.
길철은 입을 두손으로 싸쥐고 비칠비칠거리며 숲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이날 《흥국상회》는 두가지를 결정하였다.
첫째로, 정시명과 길철이 완전지하로 들어간다.
둘째로, 《흥국상회》 회장 대리로 김명호를 선출한다.
…
모임이 끝났을 때 정시명은 그에게 한통의 사진필림통을 내놓았다.
《사람의 일을 어떻게 알겠소. 김선생이 〈흥국상회〉를 대표할 때에 여기에 있는 미농지를 꺼내 붉은 별이 있는 지점을 찾으시오. 거기엔 회장으로 넘겨받아야 할 극비문건이 있소.》
극비문건이란 《흥국상회》의 성원명단이였다.
김명호는 무심중 그것을 받아들다 말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격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설마 그런 일이?… 그걸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나도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오. 그런데… 어찌 알겠소. 백범선생, 려운형선생, 김승원선생, 혜숙이, 정원이, 박영수… 그 금쪽같이 귀한 사람들이 잘못되리라고 나나 동무나 생각이나 해봤소?》
정시명은 침중한 어조로 말하며 김명호에게 엄숙하게 넘겨주었다.
김명호가 말없이 넘겨받는데 두손이 후들후들 떨리고있었다.
- 제3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