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불 붙는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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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기의 집대문을 처음으로 두드린것은 까만 바지에 하얀 여름샤쯔를 경쾌하게 차려입은 길철이였다.

길철은 정시명앞에 깨끗이 정서한 한통의 문건부터 내놓았다. 《5. 10단선》에서 선거된 이른바 《제헌의원》들을 여러 각도에서 조사분석한 자료였다.

당파별로는 리승만이 회장으로 있는 《독립촉성국민회》가 54석으로 제1당이 되고 그다음으로는 김성수의 《한민당》이 29석, 리청천의 《대동청년단》이 12석, 리범석의 《민족청년단》이 6석을 차지하였다. 흥미있는것은 무소속이 85석을 차지한것이다. 사회성분별로는 지주출신이 압도적이고 로동자, 농민은 한명도 없었다. 지역별로는 전라도와 서울이 앞섰다.

문건을 훑고난 정시명은 《여기를 비집고 들어가야겠군.》하며 무소속란에 손끝을 박았다.

《빨리 손을 써야겠습니다. 최근에 〈한민당〉패거리들이 제1당이 될것을 목표로 〈국회〉좌석을 돈으로 사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돈으로 좌석을 사다니?》

《무소속으로 출마한자들은 대체로 제 돈주머니를 털어내서 선거를 치른지라 선거를 치르고나니 알거지가 되였지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눈이 새빨개서 돈구멍을 쑤시기 시작할판이지요. 부자동네인 〈한민당〉이 이통에 살판이 났습니다. 무소속〈국회〉의원들에게 돈을 찔러주어 자기 당으로 끌어가고있습니다. 어제 점심까지 60을 웃돌고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많이… 날랜데… 그러다가 우리가 들어설 자리를 놓치는게 아니요.》

정시명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김승원선생이 좋은 소식을 안고올겁니다. 며칠전에 만났는데 〈한민당〉에서 탈퇴할 소리를 합니다. 아무래도 무소속으로 있어야 〈국회〉안에서 행동반경이 커질것 같다고 하는데 일리가 있는것 같습니다.》

길철은 남의 일이라 더 말을 비치지 않고 다시 맡은 일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날자가 얼마 없었는데 빨리 해냈구만. 수고했소.》

《크게 뛴것이 없습니다. 우리 동무 하나를 새로 신설된 〈국회〉운영위원회에 들여보냈는데 그 동무가 묶어낸 자료를 들고왔을뿐입니다.》

길철은 정시명의 치하를 받는게 쑥스러운듯 얼굴을 붉히며 뒤덜미를 슬슬 긁었다.
《그런데 이것 보오.》

정시명은 문건에서 고개를 들고 그에게 담배갑을 내밀며 화제를 돌리였다.

길철이 사양하지 않고 담배 한대를 뽑아물었다.

정시명도 곰방대에 쌈지의 담배를 꽁꽁 다져넣기 시작하였다. 길철이 혁명가로서의 량심과 열정과 패기로 단호히 일축해버렸던, 이미 그의 생활에서 지워져버렸을지도 모를 이성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털어내는게 베찼던것이다.

정말 권혜숙이라는 녀성이 이제는 길철의 심장에서 자리를 비웠겠는가.

정시명은 다져넣은 담배를 다시 손가락으로 꽁꽁 누르며 어떻게 말꼭지를 뗄가 하고 바재이였다. 그는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인 후 그 성냥불을 길철에게 넘겨주고는 볼이 훌쭉해지도록 길게 빨았다. 코구멍으로 파르스름한 연기가 가슴속에 차있던 답답한 심정을 밀어내듯 뿜어져나왔다.

길철이도 담배를 붙여물고 여느 때없이 말머리를 떼기 힘겨워하는 정시명의 시름겨운 표정을 흘깃 쳐다보고는 흰 종이로 도배를 한 천정의 한점을 생각없이 쳐다보았다.

《담배란건 가만히 보면 기분좋을 때보다는 뭐이 다 씨원치 않을 때 더 맛이 나는것 같구만.》

정시명은 이렇게 저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고는 인차 길철의 앞에서 공연한 소리를 했구나 하고 후회를 하였다.

길철이 다시 정시명의 낯빛을 살피였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자 다시 천정에로 눈길을 돌렸다.

정시명은 곰방대의 담배가 다 타들도록 말이 없다가 불이 꺼지자 재털이에 재를 툭툭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앉음새를 바로하고 말을 시작하였다.

《이거 보오, 길철동무. 싸움은 이제부터 진짜라는 생각이 드는구만.》

《예?》

길철은 무슨 소리냐는듯 의아쩍게 반문하였다.

《제주도에 가니 숱한 사람들이 죽고 생활터전이 온통 쑥밭이 됐더란 말이요. 제주도의 동지들이 참 걱정스럽소. 크게 도와줄 방책이 서지 않거든. 그런데 우리가 제일 걱정을 해온 위험이 당장 눈앞에 다가왔소. 미국놈들은 드디여 민주의 페허우에 제놈들의 사생아정권을 만들어내게 되였소. 동무가 가져온 자료가 보여주듯이 서울의 〈정부〉라는게 앞으로 어떤짓을 하게 될는지 과히 가량이 되거든. 이제 군대가 서고 폭압기관들이 자기 형틀을 다 갖추어놓을거요. 미국놈들은 아직도 물러갈 차비가 아니거든. 제주도사람들은 자기들이 미군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들었으니 미군이 물러가기 전에는 다른 해결책이란 없는 싸움이라고 선언하였소. 그러니 우리앞에는 큰 싸움이, 진짜로 사생결단해야 할 큰싸움이 기다리고있소.》

《예, 큰싸움입니다.》

길철은 전례없이 무거운 시름이 얼찐얼찐 비끼는 정시명의 이야기에 다소 얼떠름해져서 짧게 응수하였다.

《그러니말이요. 중요한건 우리 사람들 한사람이 백천을 당하는거요. 이게 승리하는 비결이요. 그런데…》

정시명은 여기서 말을 끊고 다시 곰방대를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는 빈 곰방대를 든채 길철의 옆모습을 일별하였다.

길철의 표정도 점점 굳어져갔다. 무엇인가 자기를 두고 정시명이 속을 쓰는것 같다. 되게 비판을 하려고 우정 폭을 넓게 그려놓고 천천히 그물코를 죄여드는것만 같았다.

길철은 자기볼에 와닿는 정시명의 예리한 눈길을 감촉하자 요즈음 진행한 사업들을 재빨리 점검하여 보았다. 정시명의 치하를 간단히 뿌리치긴 했으나 사실 이 한통의 문건을 작성하기 위하여 이 며칠 철야로 뛰여다녔다. 197명이라는 의원들의 사상동향으로부터 성격적기질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그들과의 사업가능성을 타진할수 있도록 묶어내는게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줄창 그 일에 파묻히다보니 딴일에 눈을 팔새도 없었다.

(무슨 일일가? 어째서 이렇게도 심중해지는가. 무슨 질책인들 내가 새기지 못할 사람인가.)

길철은 이렇게 불만스러운 생각이 가지를 치자 은근히 노여워졌다. 그는 정 참을수 없어 불평 비슷하게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아무거라도 좋습니다.》

속에 뭘 꿍져놓고서는 참아내지 못하는 길철이 직통으로 들이대는 말을 듣고서야 성문같이 무겁던 정시명의 입이 열리였다.

《큰 싸움을 앞두고 동무가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러오.》

《그렇게도 심중한겁니까?》

《그건 뭐 생각나름이고 받아들이기탓이지. 혜숙이문제요.》

《예?… 혜숙이문제?… 후- 난 또… 허참…》

그 어떤 엄청난것을 예견하였는데 왕청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바람에 길철이 인차 안색을 확 풀면서 어이없는듯 씨익 웃었다.

그러나 정시명의 태도는 점점 모가 서고 말투가 진지해졌다.

《그렇소. 혜숙이문제요. 동무가 자기보다 더 좋은 사람을 골라 짝을 무어주든지 그게 싫으면 동무가 혜숙이를 끌고 신방에 가서 화촉을 올리든지 하루이틀안으로 마련을 보란말이요. 시간을 오래주지 못하겠소.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일때문에 달을 넘기고 해를 보낸단말이요. 이 일을 마무리짓기 전에는 난 책임자로서 동무에게 더는 일감을 주지 않겠소.》

《아, 정향선생님! 그거야 다 끝난 문제가 아닙니까. 일감을 안주다니요. 이건 너무 억지입니다.》

길철이 아직은 정시명의 말을 건성 들으며 엉너리를 쳤다.

《끝난 문제라고?… 길철이는 총각으로 있고 혜숙이는 처녀로 남아있는데도 끝난 문제라?… 항차 한쪽에서는 마음도 얼굴도 자꾸만 야위여가는데 이게 그래 끝을 본 이야기요?》

《전 이 문제를 놓고 전날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는수밖에 없습니다.》

길철은 정시명의 이야기가 심각하게 힐난조로 흐르자 자기도 정색을 해가지고 코를 세웠다.

《무슨 옹고집이요?》

《옹고집이 아닙니다. 저는 뭐 후련한 마음으로 그런 결심을 하였고 지금은 뭐 제속이 가벼워진것 같습니까. 그러나 뭐 량심에 크게 후회남을게 없는 문제이니 그것으로 자기를 달래는것이지요.》

《뭐요, 량심?… 량심에 크게 후회남길게 없다구?… 여보, 한 사나이의 그 알량한 량심때문에 한 처녀의 순정이 짓밟히고있소. 그래 이것도 량심이요? 량심가진 사나이가 할짓인가? 이건 도무지 무슨 생먹은 소린지 모르겠구만. 자기 가슴에 생긴 상처도 가셔내지 못하고 도대체 겨레와 나라에 생긴 종처는 어떻게 씻어내겠다는거요?》

정시명의 말소리가 높아져갔다.

《아, 정향동지!》

《가시오. 혜숙이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내앞에 나타나지 마시오. 난 제주도에서 돌아오면서 단단히 결심하였소. 내가 우선 동무들앞에서 량심없는 인간이 돼버렸소. 사랑으로 울고있는 젊은가슴들을 달래지 못하고 일만 시키고있으니 이런 인간이 무슨 책임자고 무슨 전우겠소. 동무도 방금 말하지 않았소. 자기 가슴속도 편하지 않다구. 그게 바로 인간 길철의 진짜 량심인줄 내 안단 말이요. 인간은 마땅히 그렇게 되여야 하는거요. 혁명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너무 자신을 박대하지 마오.

오늘 저녁중으로 당장 혜숙이를 찾아가오. 결과를 가지고 래일 만납시다. 명호동무의 말이 생각나는구만. 동무도 좋고 혜숙이도 좋으면 그게 사랑이지 뭐가 그리도 복잡한가 말이요.》

정시명은 이렇게 분연히 꾸짖고나서 곰방대에 다시 담배를 재우고 책상안에 밀어넣었던 문건을 꺼내놓았다.

길철은 이야기가 끝났음을 알고 자리에서 무겁게 일어나 허리를 구부정한채 경황없어 인사도 없이 아래방으로 내려왔다.

마침 마당안의 우물가에서 봄배추를 씻어가지고 들어오던 민순임이 부엌문을 빼서 열다말고 가마뚜껑소리를 냈다. 방가운데서 길철이 얼굴이 수수떡처럼 벌개서 두다리를 말장처럼 뻗지르고 서있는게 말붙이기가 거북스러웠던것이다.

길철이 큰소리로 찾았다.

《사모님, 나 랭수 한사발.》

민순임이 얼른 물을 떠가지고 들어갔다.

《웬일이세요, 길철선생님? 저 량반이 성까지 내시다니…》

민순임은 랭수 한사발을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버리는 길철의 어두운 표정을 걱정스레 살피다가 웃방문을 향해 눈을 쭝깃해보였다.

《허 참!…》

길철이 민순임을 보며 입을 쩝쩝 다시였다.

《사모님, 제가 꾸지람 당할 일을 하였지요.》

길철은 허거픈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민순임이 좀 쉬다가 저녁상을 받고 가라고 황황히 고무신을 끌고 마당에 나갔으나 벌써 길철은 보이지 않고 대문간에서 방울소리만이 달랑거리였다.

길철이 대문 여닫는 소리를 들은 정시명은 한동안 방문을 열고 담장우로 내다보이는 청청한 하늘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길철에게 너무 모진 소리들만 골라한것 같아 속이 알찌근하였다. 길철이 그 모든걸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좀 더 따뜻하게 타일러도 될 일이 아니였는가. 어쨌든 길철이 사랑의 결별을 선언한 리유는 그 무슨 도덕적규범으로 옳고그른 판결을 내릴 여유를 주지 않고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심금부터 울려놓았다. 그로써 그의 결단은 공정한 여론의 재판을 받은것으로 인정되게 된셈이였다.

인생이란 원칙이나 리념만으로는 엮어지지 않는 복잡한 과정이다. 생활에서는 비도덕적인것이 원칙이나 법조항으로 둔갑을 하여 생활의 아름다움을 유린하는가 하면 도덕적인것이 불법무도한것으로 규탄을 받는수도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길철이네의 사랑은 어떤 자막대기로 판단해야 하겠는가. 확실히 기존의 생활관이나 도덕관을 가지고 따지고든다면 그들의 사랑에도 남들의 말거리에 오를만 한것도 있다. 남녀이성의 교차가 정상적인 곬에서 빠져나간것은 사실이다. 길철은 이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두 이성이 사귀는 방식은 열가지, 스무가지로만 고정되여있는것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의 생활이 기성의 틀, 기존의 례에만 얽매인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무미건조할것이냐. 생활은 부단히 새롭게 창조되는것이며 그속에서 사랑도 가지각색으로 줄기를 뻗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것이다.

혜숙이네 문제도 이렇게 혁신의 안목에서 봐야 풀려나갈수 있을게 아닌가. 생활이라는 아름다운 꽃밭속에서 망울을 터친 한떨기의 색다른 꽃으로 보면 될것 같다. 그 꽃의 향기와 빛갈이 특이하다고 하여 뽑아버린다면 꽃밭은 그만큼 빛을 잃게 될것이다. 그것을 가꾸고 열매 맺도록 하는것이 원예사의 몫이고 자랑이다.

그러니 그네들이 결합되는 방법이 어떠하든 나역시 마음 쓸게 없다. 나의 귀중한 사람들의 사랑이 열매를 알차게 여물구는데 도움이 되였다면 무엇이 어쨌다고 누가 탓하랴.…

정시명은 길철에게 미안쩍은 생각을 이렇게 루루이 달래면서 새로운 일거리에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했지만 거친숨을 씩씩거리며 물러가던 그의 모습이 그냥 눈앞에 맴돌았다. 그러다보니 김승원이 방안에 들어서는것도 몰랐다.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방안을 가볍게 울리는 김승원의 인사에 정시명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다림발이 선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중절모를 척 눌러쓰고 물씬 향수내까지 풍기는 김승원에게서는 상류사회에 한발을 걸치고사는 정객다운 체취가 풍긴다.

그러나 쉰목소리며 푹 꺼져든 볼이며 아직도 충혈이 풀리지 않은 눈에는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난 피로가 력력히 비껴있었다.

《아, 김선생, 어서 오시오. 언제 왔소?》

정시명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오기는 안지생동무가 일러준 시간에 왔는데 길철선생이 있는것 같아서…》

《그러니 나가는걸 보고 들어왔소?》

《예, 저기 버들방천에 나가 좀 뜸을 두었다가 들어왔습니다. 어째 길철동무의 걸음이 무거워보였습니다.》

《하하… 김선생이 바로 본것 같소. 그 사람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감을 맡았소. 이제 알게 될거요. 어서 앉소. 금빼지(남조선 〈국회〉의원들의 휘장) 따내는 일이 정말 헐치 않았던 모양이구만. 무척 상하였소.》

《허허… 지쳤지요. 원 〈국회〉선거라는게 꼭 전쟁판이라니까요. 물고뜯는 싸움인데 에에… 내 직성에는 맞지 않습니다. 상대편에서 날 온통 어떻게 꼬집어내는지… 내 못난것만 가지고 걸고드는데 괜히 이 놀음에 끼여들어 얼굴 깎이는짓만 한다고 정선생님을 속으로 수태 욕했지요. 이번에 길철선생과 최남수선생이 제일 수골했지요. 저야 뭐 써주는 원고나 줄줄 읽고 길철선생의 훈수대로 움직였을뿐이였지요. 길철선생은 아마 하루에 한시간이상은 자본적이 없었을겁니다.》

언제나 제 수고는 뒤전에 밀어놓는데 습관이 되여있는 김승원은 지금도 반죽좋게 자기이름을 가리우고 전우들부터 내세워준다. 내세워주면 스스로 무안을 타며 성과에 대해 어벌쩡하게 넘겨버리는 그 정직성과 대범한 성미가 언제나 마음에 든다.

《최남수선생이 귀한 공돈을 수태 뿌렸습니다. 선거경쟁이라는데 뛰여들어 몸으로 부닥치고보니 꼭 금전싸움판입니다.》

《하여튼 축하하오. 이제 그 금빼지가 들인 투자보다 열배, 백배의 리윤을 가져올거요.〈5. 10단선〉에 대한 전체적인 륜곽을 그려주오. 제주도에서는 미국놈들이 쓴맛을 봤소. 어느 투표소도 저들 뜻대로 운영된것이 없었소.》

정시명은 무엇보다도 선거의 실태를 그대로 알고싶어 인차 말머리를 돌렸다.

《한마디로 이번 선거는 이남 전체 인민과 미국놈들을 위시한 반동들과의 전면적인 대결이였습니다.》

김승원은 이렇게 결론부터 내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인류의 법력사에 전무후무한 위법과 폭압의 〈선거〉였습니다. 당일에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서울하늘에는 미군공군기들이 스산하게 돌아쳤습니다.

난 서초구투표소에 나갔는데 내가 보는 앞에서 잠시사이에 투표를 마치고나오는 차제로 곤봉쟁이들에게 란타당하여 피를 토하고 쓰러진 사람들이 열한명이였습니다. 매맞은 리유야 뻔하지요. 리승만일파에 반대를 하였겠지요.》

《음, 제주도에서는 경찰들이 쪽을 못썼다는구만. 좌, 우 싸움으로 간곳마다 피가 흐르고 주검이 널려있었소.》

《이제야 전국적으로 합계를 뽑은 자료가 들어왔습니다.》

김승원은 서두름이 없이 손가방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들고 미제가 벌려놓은 《5. 10단선》에 대하여 보고하기 시작하였다.

《〈5. 10단선〉은 이처럼 폭력에 의한 불법, 무법정치행위였으며 말그대로 망국선거였습니다.》

김승원은 커다란 주먹을 휘두르며 격노한 어조로 말하였다.

《난 〈유엔조선위원단〉패거리들속에서 무슨 고양이소리같은거라도 나오지 않을가 기다렸는데…》

그쪽일은 김명호에게 돌아가기는 했으나 김승원이 원래 주관하던 일이라 정시명은 이렇게 말하였다.

《일이 잘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국놈들이 경호라는 구실로 〈유엔조선위원단〉의 매 성원에게 헌병들을 붙여놓고 행동을 완전히 구속해버렸는데 선거감시가 다 무업니까. 미국놈들이 이미 그들과의 사업에서 쓴맛을 봤던지라 이번에는 주민들과 만나는것조차 차단하고 지어는 위원단에 보내는 우편물까지 엄격히 검열하였습니다. 유엔위원단이 선거당일날 가본 곳이란 군정청관리들의 안내로 서울과 인천, 대전에 있는 세개의 투표소였는데 여기엔 경비대와 경찰관계학교에서 선발된 학생들이 사복을 갈아입고 질서정연하게 투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유엔조선위원단〉의 감시속에 민주주의적으로 선거가 치르어졌다는 문구를 만들어냈지요. 이러하니 그속의 우리 동무들이 날고긴다 한들 용빼는 재주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걸 제가 사전에 예고하고 필요한 대책을 강구해야 되겠는데 미처 손 쓸새가 없이 되고말았습니다. 〈유엔조선위원단〉과의 사업은 이번에 완전히 실패입니다. 부회장선생이 고생만 했습니다.》

《음, 그랬댔구만… 그래도 어느 한 사람이라도 걸고들게 해야 하는건데… 그들의 입에서 〈선거〉를 규탄하는 소리가 가늘게 나와도 그게 유엔무대에 전해지기만 하면 벼락같은 효과를 낼수 있단말이요.》

정시명은 락심천만해서 이렇게 나직이 중얼거리였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리승만에게 맞세울 인물을 지금부터 내세우고 밀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리승만이 지금에 와서는 대통령이 다 된듯이 미군의 장기주둔을 정식으로 제창하는가 하면 사흘전에 열린 〈독촉〉중앙회의에서는 〈북벌〉에 대해서도 떠들었다고 합니다.

리승만의 광기를 꽉 누르자면 어차피 총리재목으로 리승만과 겨룰만 한 인물을 골라내야 할것 같습니다.》

《미국의 립장은 어떻소?》

《글쎄요. 〈한민당〉을 버쩍 춰세워왔는데 김성수는 실권없는 총리직은 생각이 없노라고 딱 잘랐답니다.》

《〈한민당〉당수가 총리면 과남하지 왜 총리가 실권이 없다는거요. 국무원을 총괄하는 수석자리가 아닌가.》

《김성수가 그럴만 합니다. 대통령중심제하에서는 그게 사실상 허수아비자리입니다. 리승만이 대통령자리를 내다보는 형편에서 그놈은 권력의 분할을 허용하지 않을겁니다. 그래서 〈한민당〉은 은근히 내각책임제방식을 취하라고 하지에게 들이대고있습니다.》

《대통령중심제라… 연구해봅시다. 잘 연구하면 재미있는 일거리가 생겨날수 있소. 아무튼 우린 문제설정을 현실에 발을 붙이고 타당성있게 해야 하오. 리승만이 주축이 될 행정부나 〈국회〉를 타도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 차라리 그것들의 힘을 빌어 미군부터 내쫓아놓고 미국의 식민지예속화정책에 타격을 줌으로써 완전통일독립국가건설의 지름길을 마련하는데 이바지하는것이 우리 〈흥국상회〉가 할수 있는 투쟁방식이 아닐가. 애국의 길에 보탬이 된다면 자그마한 요소라도 놓치지 말고 손을 내밀어 힘을 합치는것이야말로 우리 〈흥국상회〉의 절대절명의 원칙이요. 어떻소, 김선생?》

《예, 옳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내외를 둘러보아도 미군을 내쫓기 위한 싸움이 본격화되고있소. 제주도사람들은 자기들의 싸움은 미군을 내쫓기 전에는 해결이 없을것이라 했소. 우리도 이 싸움에 어깨를 들이밀어야겠소. 〈미군은 물러가라!〉, 이 구호를 듭시다. 적들의 내부에서 철병구호가 나오게 해야 하오.》

《옳습니다, 옳습니다. 새로운 단계의 투쟁에서 미군철거를 기본으로 내세우려는 정선생님의 주장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럴 때가 되였지요.》

김승원은 또다시 커다란 주먹으로 허공을 쳐갈기며 흥분을 금치못해 하였다.

《똑 똑.》

사이문을 가볍게 울리는 손기척에 그들의 열기오른 이야기는 끊어졌다. 두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춰 가벼이 때리는 독특한 울림으로 보아 례영이 같았다.

《무슨 일이냐?》

《저녁상을 마련했습니다.》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는가?…》

이야기도 끝났음으로 그들은 마주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방에 차려놓은 두리반에 마주 앉았다.

상에는 쌀보리밥에 햇나물김치가 올라있고 술병도 놓여있었다. 례영이 부엌에서 김이 실실 오르는 토장국뚝배기를 큰 다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이크, 토장국이로구나. 내가 글쎄 걸음발을 잘 옮겨놓았지. 사모님한테 와야 뚝배기장국맛을 본다니까. 자, 사모님두 어서 올라오십시오. 례영이 너도 밥그릇 들고 올라오너라. 시집까지 보냈는데 아직도 내우냐.》

김승원이 팔소매를 걷고 밥상에 바투 나앉으며 부엌에 대고 소리질렀다.

《어서 잡수세요. 이 집 안주인이 어찌나 싹싹한지 저녁전에 또 토장을 들고왔더군요. 그래서 얼른 장국을 끓였는데 뭐 김선생님이야 제가 만든 허드레음식을 맛으루야 잡수시겠나요. 동서처럼 뭐 한가지 차려도 알뜰하게 차려놓아야 되는건데… 평산산골에서 배운게 뚝배기장국밖에 없다나니…》

민순임이 부엌문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제 성의를 언제나 푸지게 받아주는게 고마와서 어진눈에 미소를 담고 인사말을 하였다.

민순임과 서울신문사에서 기자로 있는 김승원의 처 윤미향은 자주 어울려서 서로 형님, 동서로 부르며 터수없이 각근히 지내온다. 도회지물을 먹으며 자라난 윤미향은 음식솜씨가 정갈하여 민순임이 자주 외우군 하였다.

《아니 난 정말 사모님이 끓여주는 이 뚝배기장국맛이 일품이올시다. 원래 안사람들의 음식솜씨라는건 바깥사람의 입맛이 까다로와야 느는건데 내가 원래 타고난 걸구라 그 사람 음식솜씨라는게 고작 만두빚는 재주와 기지떡 만드는 재간이 다랍니다. 우리 집사람이 하도 내가 뚝배기, 뚝배기하니 시샘이 났던지 한번 하느라 했는데 에, 안되겠더라구요.》

김승원은 민순임의 말을 입심좋게 받아넘기고는 술을 쭉 마시였다.

모두가 김승원의 귀맛좋은 너스레에 소리내여 웃었다. 정시명까지 이따금 의뭉스러운 소리로 좌중에 화기를 돋구어주는 김승원의 정이 가는 모습에 벙글써 웃음을 짓는다.

김승원은 토장국 한숟가락을 훌훌 불며 입안에 넣더니 또 입귀가 들렸다.

《하… 역시 뚝배기장국맛이란 이렇게 구수해야 하는건데…》

김승원은 부엌문에 나란히 서있는 민순임과 례영을 돌아보며 못내 흡족한듯 껄껄 웃었다. 그는 나무군들밥처럼 무드기 쌓아올린 쌀보리밥을 꾹꾹 다져 숟가락이 부러지도록 듬뿍 떠서 입안에 가져갔다. 원래 몸이 좋고 보기 좋게 배까지 나온 그는 대식가였다. 베이징대학시절에 정시명이 사준 짜장면 네그릇을 앉은 자리에서 요정을 낸게 우연이 아니다. 그는 잠간사이에 밥사발밑굽을 냈다.

민순임은 풋나물김치까지 탐스럽게 우적우적 씹으며 맛나게 저녁을 들어주는 손님의 모양새를 정겨운 눈길로 살피다가 정시명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자 (우리 나그네는 언제면 저렇게 밥그릇을 축내줄가.)하고 서글픈 생각을 하면서 부엌문을 꾹 닫고 물러섰다.

사실 민순임에게는 그게 늘 걱정이고 불만이다. 언제봐야 작은 밥사발에 담은 밥을 말끔히 지워버리는 법이 없다. 게다가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까끈히 묻는다. 어데서 났느냐, 우리가 이런걸 먹고 있을 형편이 되였느냐, 다시는 이런걸 받지도 말고 구해오지도 말아라, 난 보리밥 한공기에 마늘짠지 두쪽이면 된다고 다짐을 둔다.

속상해서 어느 날 의원을 찾아가 주인의 건강상태와 습성을 이야기해주고 처방을 부탁해보았다. 그런데 허연 수염발을 길게 드리운 의원이 하는 말이 《양이 성하고 기가 눌리우는 신경으로 오는 위병이니 약보다도 밤샘 같은것을 하지 말고 생각에 파묻히는 버릇을 떼며 늘 기분을 좋게 가지고 주야불문 절제있는 생활을 하는 섭생이 처방이요.》라고 하였다.

민순임이 돌아와서 그 말을 그대로 전했다.

정시명이 의원이 내린 처방에 폭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그 의원이 명의는 명의구려. 신통한 처방을 내렸소. 한데 그렇게 되면 당신 나그네는 여불없이 절간의 부처님신세라 거야말로 불치의 병이니 어찌하겠소.… 걱정할게 없소. 살만큼 살아가지 않으리.》

민순임은 그때의 생각을 하며 길게 한숨을 내긋고는 례영이더러 숭늉을 갖다드리라고 일렀다.

김승원이 숭늉그릇까지 다 내고 일어서려는데 정시명이 《돌아가는 길에 길철선생한테 좀 들려주오.》하고 부탁했다.

《길철동무요?》

김승원이 잠시전에 이집에서 나갔던 길철에게 들려야 할 리유가 뭔지 궁금한듯 허리를 굽힌채 묻는듯 한 눈길로 정시명을 바라보았다.

《어떻소, 혜숙동무를 저대로 놔둘수 없지 않소. 그래 내가 아까 좀 몰아댔소.》

《아, 그래서 아까 부회장의 어깨가 처졌댔군. 하긴 우리가 옆에서 보기가 딱한데 당자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붙여주어야 할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는 소리요. 래일저녁까지 말미를 주었소. 가서 속도 좀 풀어주고 부채질도 해주오. 인정 끊는게 칼로 물베기라는 말이 있지 않소. 한바탕 욕은 퍼부었지만 돌려보내고나서는 속이 알찌근한게 좋지 않구만.》

《예,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 저도 나서보겠습니다. 원체 전일에 우리가 그 일에서 물러서는게 아니였지요. 제 끝장을 보도록 힘껏 곁에서 풀무질을 해보겠습니다.》

김승원은 정시명의 무거운 속을 덜어주고싶어 당장 가서 일을 낼듯 기세를 올리며 떠나갔다.

박정인의 자리가 비게 되자 정시명은 집안에서 제기되는 여러가지 사말사를 자연히 김승원과 의논하게 되였다. 집안에서 나이가 그중 많은데다가 김승원이 생김새부터 박정인과 비슷한데가 있었다. 풍류객처럼 보이면서도 붙임성이 좋고 노죽도 있고 소탈한데가 있어 《흥국상회》집안일을 즐겨 맡아 안군 하였다.

김승원은 더구나 이번일은 둘다 파악이 있는 대상들이고 보니 자신만만해서 받아들였다.

다음날 정시명은 김명호를 만나 정당들과 《유엔조선위원단》과의 사업정형을 청취하면서도 자꾸만 대문에서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나는가 귀를 기울이군 하였다. 길철이가 혜숙이를 찾아갔는지, 갔다면 어떤 결말을 가지고 오겠는지 못내 궁금하였던것이다. 이제는 정말 그들의 문제에 좋은 결실을 보기 전에는 다른 일감이 잡히지 않을것 같았다.

그런데 통행금지를 알리는 싸이렌소리와 함께 대문간에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기다리는 길철은 나타나지 않고 김승원이 들어섰다. 밤시간에는 《흥국상회》성원들이 서로 왕래하는것을 엄금하여왔는데 통금시간에 맞추어 나타난것으로 보아 길흉 두갈래소식이 있는 모양이다.

정시명은 그를 맞아들이자 례영이더러 이부자리부터 펴게 하였다.

《자, 통금시간이 지났으니 돌아가기는 틀렸고.… 누워서 이야기나 합시다.》

정시명은 제먼저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김승원은 불을 끄고 옆에 나란히 눕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이거 참 야단이 났습니다. 혜숙이네말입니다.》

《혜숙이네가?… 그래 그 일때문에 김선생이 일부러 이렇게 왔소?》

《어떻게 하겠습니까. 길철선생이 들고다닐 체면도 못되고하니…》

《그래 어쨌다는거요?》

정시명은 뒤말이 궁금해서 재촉했다.

《어제 여기를 물러나는 길로 길철선생을 찾아갔습지요. 가본즉은 정선생님이 걱정하시는게 우연이 아니더군요. 좀 고민을 하는것 같습디다. 그래 회장동지말씀대로 저도 옆에서 부채질을 했습니다. 소뿔은 단김에 뽑는다고 그 길로 떠나게 했지요. 헌데 오늘 저녁무렵에 전화로 알아보니 랑패더군요. 길철선생의 대답인즉 퇴박을 맞았다나요.》

《퇴박? 어째서?…》

《서병남동무의 부인을 내세워 찾아왔다는 선통도 했는데 웬걸 면허를 딱 자르더랍니다. 사업상문제라면 자기의 상급인 안지생선생을 통하여 전달하며 사적인 용무라면 바빠서 만날수 없다는겁니다. 허 참 이거…》

《사적용무라, 허허… 하긴 길철선생도 한번 사랑의 쓴맛을 보게 해야 돼. 하여튼 길철동무가 어려운 걸음을 뗐으니 다행이요. 난 그 사람이 그냥 고집을 쓰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래일 례영일 보냅시다. 혜숙이가 길철의 풍에 쉬이 놀아날 처녀요? 길철이 오늘밤은 다 잤군.》

정시명은 어쩐지 그들 문제가 쉽사리 풀릴듯 싶어 속이 훈훈해져서 얼굴에 가득 미소를 담았다.

김승원도 뜻밖에 정시명이 흐뭇해서 자기말을 받아주자 속이 홀가분해져서 이내 코를 드르렁거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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