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피어린 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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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명은 일요일에 《흥국상회》성원들을 뚝섬으로 불렀다.
그는 례영과 안지생과 함께 아침 일찍 낚시대를 들고 뚝섬으로 갔다.
혜숙이와 길철의 결혼상을 차려놓고 행복이 무르녹던 잊을수 없는 추억이 서려있는 버드나무숲이였다.
초여름에 잡아든 숲은 푸르싱싱하고 아침의 숲공기는 청신하였다. 섬을 감돌아 흐르는 강물은 깊고 맑았고 물밑에서 유유히 꼬리치는 물고기들이 들여다보였다.
정시명은 잠시 한강의 장엄한 흐름에 심취되였다.
아침해살이 한강의 잔잔한 물결우에 깔려 반짝반짝 뒤채고있었다. 물밑에 있는 감탕과 모래와 돌부리와 나무뿌리들과 온갖 허겁스레한것들을 가볍게 일렁거리는 물결로 다 눌러버리고 오로지 맑고 도도하고 장엄한 물결만이 넘실거릴뿐이였다.
한강은 그 발원이 강원도 금강군의 옥전봉기슭과 태백산의 심산오지이며 아호비령산줄기의 두류산이라고 한다. 거기서부터 숱한 시내와 하천들이 합쳐져 북한강과 림진강이 되고 그것들이 다시 모아져 한강의 장엄한 흐름을 이루고있다. 어찌 보면 한강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의 북과 남을 거침없이 꿰질러 흐르면서 이 나라는 억만년토록 하나의 강토라고 이 나라의 주인들에게 변함없는 물결소리로 깨우쳐주는것만 같다. 강물은 섬주변에 이르러 깊고 느릿느릿하게 흐르고있는데 물속에서는 크고작은 물고기들이 북으로 남으로 떼를 지어 자유로이 오갔다.
정시명은 평산의 고향마을 동구밖의 작은 시내도 금성천에 이어지고 금성천이 림진강을 거쳐 여기 한강의 장엄한 물결에 이어질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저 물고기들은 한강을 거슬러 림진강으로, 금성천으로, 고향의 내가에로 오가며 그 누구도 끊어놓을수 없는 강물의 하나됨을, 하나의 강토의 유구함을 한껏 향유할것이다. 미국놈들이 철조망으로 차단한 남북을 이은 길도 이 한강물결처럼 다시 거침없이 남으로 북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땅의 생명들은 마땅히 하나의 강토에 안겨사는 하나의 무리들이다.
정시명은 새삼스럽게 갈마드는 절박한 생각에서 헤여나 낚시에 미끼를 꿰여던지였다.
그는 곰방대에 담배까지 재워물고는 이미 완성시켜온 새로운 단계의 작전구상을 마지막으로 곰곰히 점검하며 미흡한 구석을 메워나갔다.
승리와 좌절과 패배속에서 찾은 경험과 교훈으로 해서 《흥국상회》의 모임을 앞둔 정시명의 얼굴은 신중하고 심각하였다.
정시명은 마지막결사전에 나서는 1선부대 지휘관들이 체험하는 그런 비장한 심정으로 이번 투쟁을 설계하여왔다.
국내외정세가 무르익었다고 판단이 갔다. 자체의 력량도 그만하면 자신이 있었다.
《국회》투쟁을 담당한 김승원도 미군철거안이 좌절된 후 다시는 자기는 재목감이 못되는 놈이니 이제라도 든든한 지휘관을 자기우에 앉혀놓아달라고 우는 소리를 했지만 지금까지의 투쟁에서 눈에 뜨이게 세련된것은 바로 그 사람이다.
하나같이 야심만만한 날고 긴다는 젊은 정치가들을 일흔명이나 묶어세우는것이 좀해서 되는 일인가. 오히려 김승원의 실력과 근기였기에 반동의 소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권을 행사할수 있는 애국집단을 무어낼수 있었다.
이젠 권영호도 돌아섰고 그의 영향하에 있던 의원들까지 《동향회》에 참군하였으니 이만하면 결사전의 선봉군은 든든하다.
김명호도 유엔위원단과의 사업을 크게 전진시켰다. 소리만 내라고 한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였다고 한다.
얼마전에 김구도 명쾌하게 말했다.
《〈한독당〉은 준비되였네. 불을 걸게. 기회를 놓치지 말고 구령을 내리게.》
그래 불을 걸어야 한다. 구령을 내려야 한다.
정시명은 이번에 벌리게 되는 투쟁은 립체전으로 되도록 했다. 전선과 후방이 따로없고 주력군과 지원군이 따로없이 모두가 자기의 공격목표와 과제를 안고 실력과 담력과 열정을 터뜨려 자기 전구에서 개가를 올려야 하는 대정치전이다.
첫 포성은 역시 김승원이 올리게 될것이다.
이번에 정시명은 종전의 교훈을 살려 투쟁방법과 수법도 새롭게 구상하였다.
우선 《국회》가 새로 제기하는 결의안을 놓고 거사전부터 소란을 피우게 하도록 하였다.
비밀을 보자기에 싸안고있을 필요가 없다. 사전에 《동향회》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미군을 내쫓기 위한 결의안을 준비하고있다는것을 내외에 공개시키도록 해서 《국회》가 열리기전부터 정계와 사회계의 주목을 끌도록 해야 한다. 그까짓 《국회》에서 또다시 통과되지 못하여도 좋다.
전번에는 《국회》의정에 상정시키다가 흐지부지되였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하든지 《국회》연단에서 미군을 내쫓는 문제를 놓고 공방전이 벌어지게 해서 무쵸와 트루맨이 껑충 뛰게 해야 한다.
결의안내용도 한걸음 전진시켜 나가자. 보다 뚜렷하고 원대한 리상을 내세워 반대파들을 극소화하고 지지세력을 극대화하여야 한다.
미군철수는 우리의 궁극적목표가 아니다. 나라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과 완전독립국가건설이야말로 우리의 꿈이다. 그러니 미군철거를 전제로 한 조국의 통일에로 이어지는 보다 발전하고 높은 단계의 요구를 반영한 결의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결의안 제목부터 《미군을 철거시키고 나라의 평화통일을 실현할데 대하여》로 붙여놓으면 사회적공감대도 훨씬 넓어질것이다.
정시명은 이에 대해서는 안지생과 한번 의논해보았는데 그 총명한 젊은이는 대번에 거기에 담겨진 자기 지휘관의 뜻을 알아맞추고 벌써 그렇게 해야 할것이였다고 못내 아쉬워하였다.
정시명은 김승원이 울리게 될 첫 포성을 전격적이며 진공적인 포성으로 내외를 진감시켜 나가기 위한 구상도 면밀하게 해왔다.
우선 미국의 정계가 서울에서 울린 포성을 받아물게 해야 한다.
미국회와 행정부가 저들의 식민지의 공개적인 연단에서 미군을 내쫓을데 대한 문제가 공개적으로 론의되고있다는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준비된 동무들을 여러명 사전에 미국에 파견하여 대기시켜놓자.
유엔도 알아야 하며 온 세상이 다 알도록 해야 한다.
마동열이네도 국제적판도에서 교포사회계를 대상한 여론전을 벌리게 하자.
서울의 신문과 방송들도 받아물고 좌익과 중도, 우익정당들도 이에 합세하도록 《흥국상회》산하의 모든 집단이 공세전을 면밀히 벌려나가야 한다.
이렇게 되자면 김승원이네가 될수록 진폭이 크고 우렁차게 첫 포성을 울려놓아야 한다.
정시명은 김승원이 맡은 소임을 문제없이 해나갈것이라고 믿었다.
이윽고 《흥국상회》성원들이 뚝섬에 한명두명 나타났다.
새로운 싸움을 앞두고 저으기 흥분된 전우들을 돌아보며 정시명은 엄숙하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지금 미군은 남북인민의 드세찬 항거와 세계의 비발치는 공세에 몰리워 벼랑턱에서 버둥거리고있소. 버팀줄이 두개 있는데 하나는 무쵸가 물고늘어지고 다른 한줄은 리승만이 한짝이 돼서 필사적으로 잡아당기고있소. 우리가 이 마지막버팀줄을 썩뚝 잘라버립시다. 력사의 전진을 막아보고저 악을 쓰는 반동들과 다시 맞붙어봅시다.
승산이 보이는 싸움이요. 수천수만 항쟁투사들과 남북 삼천만이 달라붙어 침략자를 벼랑턱에 몰아붙였는데 마지막 자빠뜨리는 일이야 우리가 못하겠는가.
이렇게 합시다. 이미 상정시킨 결의안을 수정합시다.
최근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외세를 몰아내고 조국을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할데 대한 방안을 또다시 제시하시였습니다.
자주, 평화, 통일-바로 이것이요. 우리의 결의안을 더 전진시켜 평화통일안으로 완성시켜 제기합시다. 그 다음에는 김승원동무네가 시급히 〈국회〉에 상정시키는 사업부터 하시오. 첫 포성은 그쪽에서 울려놓아야 하오. 오늘 밤으로 〈동향회〉지도성원들이 모여 구체적인 작전안을 검토합시다. 나도 모임에 참가하겠습니다.》
《알았습니다. 저도 승산이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길철동무는 〈국회〉사업에서 손을 떼고 전반적인 자료수집을 미군철거투쟁에로 지향시켜 적들의 기도를 사전에 알아내서 분쇄하도록 해야겠소. 그리고 미국과 일본에 사람들을 미리 내보내였다가 〈국회〉에 결의안을 상정시키는 즉시로 해당 정계와의 사업을 벌리도록 해야겠소. 이번에 홍콩에도 사람을 내보냅시다. 마동열동무와 안우생동무더러 유엔과 국제무대에서 소리를 내도록 합시다. 일을 보다 적극화해야겠소.》
《알았습니다.》
길철이 얼른 대답하였다.
정시명은 《아차 내가 실언을 했군.》하고 인차 후회하였다. 보다 적극화하라는 말은 결국 길철의 사업이 최근에 소극적이라는 비난을 담고있는것이 아니겠는가.
혜숙이 잘못된 후로 길철이도 확실히 달라졌다.
모임에 참가했어도 말수더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자꾸만 볼이 꺼지는 얼굴에 애써 웃어보이는게 옆에서 보는 사람들의 속을 바짝바짝 마르게 한다.
혜숙의 소식을 접한 후 며칠간 쉬라고 했더니 동래에 처남을 앞세우고 갔다가 왔다. 혜숙의 집에 가서 무슨 일을 하고 돌아왔는가는 뻔한 일이였다. 돌아와서는 더 많은 일거리를 달라고 한다. 일속에 파묻혀야겠다는 속내였다.
그런 속마음이 헤아려져 정시명은 우정 일감을 만들어서라도 그에게 듬뿍 안겨주었다.
그런데 요새 그가 하는 일에 빈틈이 많다. 수하의 숱한 성원들에 대한 장악이 잘되는것 같지 않고 수집되는 자료에서 스치는것이 많다.
그건 아마도 정세의 변화에 대한 진지하고도 세심한 연구가 없다는것을 말해준다. 커다란 정신적상실이 그에게서 신문을 파고들고 방송에 귀를 기울일 마음의 여유를 앗아간것이다.
《그래, 더 많은 일을 주자. 일만이 저 사람을 춰세울수 있다.》
정시명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길철선생이 급히 해야 할 일이 또 있소. 미국에서 륙군장관이 온다니 동향을 알아내야 하겠소. 어떤 인물인가, 왜 오는가, 누굴 만나게 되는가, 좋기는 옆에다가 우리 동무를 붙여주면 좋겠는데…》
《하겠습니다. 동향장악은 뭐 좀 하고있습니다.》
《앞으로 〈국회〉쪽에서 로이얄을 직접 대상하여 공작을 들이대는 문제도 연구해봅시다. 그리고 군사관계자들과도 련계를 회복해야겠소. 송호정, 최원기… 다 소식이 없소. 리범석의 숙군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시급히 세워야겠소.》
《알았습니다.》
《김명호선생은 유엔위원단에서 더 크게 소리를 내게 해야겠소. 미군철거가 그 내부에서 울려 유엔무대까지 흔들어대게 하고 미국회도 들썩거리게 해야 하오. 미국놈들이 껑충 뛰게 합시다. 정당들과 사회단체들도 합세하도록 미리 대기시켜놓읍시다. 신문과 방송들도 잘 준비시켰다가 승원동무가 소리를 내면 그 메아리를 열배, 백배로 크게 해서 왁짝 떠들게 해야겠소. 이번에는 결의안이 준비되고있다는것을 비밀에 붙이지 말고 공개시킵시다. 그래서 이것때문에 좌익도 들썩거리고 우익에서도 몸살이 나게 하고 미국놈들도 급해맞아 뛰여다니게 합시다. 이 사업도 김명호 부회장이 맡아줘야겠소.》
《알았습니다.》
《안지생동무는 백범선생이 〈동향회〉를 계속 후원하도록 하고 〈한독당〉의 의원들을 장악해야겠소. 그리고 오늘 모임에서 토론된 내용을 필요한만큼 알려드려 백범선생이 신심을 가지고 배심있게 나가도록 잘 도와드리오. 새로운 투쟁을 위해 련락체계도 다시 점검해보고 보강하고 빈틈이 없도록 해야겠소. 그리고 김승원동무네에 대한 신변관리를 잘 엄호해줘야겠소.
전번에 우리가 이걸 놓치고있다가 리승만이 경무대에서 〈동향회〉원들을 한밤중에 불러들여 각개격파하는것도 몰랐고 테로를 하는것도 놓치고있었소. 〈국회〉가 열리기 15일전부터는 〈동향회〉원들이 집체생활로 이전하도록 했는데 뒤에서 신변엄호를 책임적으로 해야겠소. 김창기동무와 김아성동무를 동원시켜야겠소. 지금부터 잘 준비시켜 우리의 피해를 적게 해야겠소. 이번 싸움에서 결사대는 〈동향회〉요. 적들이 우리의 투쟁을 봉쇄하기 위해 회의의 움직임을 피눈이 되여 추적하면서 날뛰고있다는것을 잊지 마오.》
《알았습니다.》
《이상이요. 제기할 문제들이 있으면 더 연구를 무르익혔다가 나와 개별적으로 마주 앉읍시다. 다들 명심합시다. 침략자를 내쫓기 위해 수천수만의 우리 동포들이 쓰러졌다는것을 말이요.》
정시명은 군설명이 없이 새로운 단계의 투쟁에 대한 지시를 엄숙하게 마치였다.
그는 더 알려줄것도 해설할것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필요성은 모두의 뼈에 사무쳐있는것이다. 목표도 선명하다. 각오도 높고 기세도 높다. 하나같이 미더운 전우들이였다. 모두가 투쟁에서 높은 조직적수완과 전개력을 겸비하고있다. 각자가 정황에 부닥쳐가지고 길을 자신있게 열어갈것이며 길을 열면서 막아서는 장애물을 걷어내고 출로를 제손으로 찾아낼것이다.
《제가 이 자리에서 제기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정시명이 회의를 끝내려고 하는데 제일 뒤자리에서 얌전하게 앉아있던 안지생이 나섰다.
안지생은 전우들의 눈길을 받으며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양복 웃주머니에서 차곡차곡 접은 한장의 미농지를 꺼냈다.
《모임에 앞서 어느 한 동무가 저에게 보내온것입니다. 이건 동지들에게 제가 통보해야 할 성격의 자료이므로 회장선생님을 걸치지 않고 제기합니다. 보고문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안지생은 이렇게 류다르게 서두를 떼고는 웬일인지 정시명을 흘깃 쳐다보았다.
정시명은 안지생이 여느 때없이 눈치보기를 하는것이 답답해서 어서 하라고 손을 저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례영이 다짐을 어기고 리창순을 만났던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았는가 저으기 념려스러웠다. 안지생이 아마 그런 통보를 받고 자기 선에서 깔아버리는것이 마음에 차지 않아 이번에는 직접 모임에 들고온 모양이다.
여럿이 지켜보는 속에서 안지생은 보고문을 읽었다.
《어제 밤 자정무렵에 미중앙정보국 남조선책임자 노불의 참가밑에 리범석이 주최한 안보관계자협의회가 열렸다.
협의회에서 한 리범석의 발언:
나는 지난해 하지의 송별연에서 서울에 정시명이라는 거물급인물이 암약하고있다는 통보를 받은 후 그를 추적해왔다.
최근에는 좌익계중앙위원 서완구를 체포하였는데 그 역시 진술에서 정시명이라는 인물이 좌익권의 대표인물로 되여있으나 상면한 일은 없다고 하였다.
지난해에 있은 미쏘회담이 패배를 거듭한것이나 4월남북련석회의 성공과 같은 굵직한 사건에서 그리고 최근 벌어지는 〈국회〉의 사건들에서 그 배후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는바 일부 측에서 이야기하는 공산당계 조정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그런데 아직도 정시명이라는 미지의 인물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있다.
정시명이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안지생이 여기까지 읽고 나서 잠시 숨을 가라앉히듯 동안을 두자 좌중이 술렁거렸다.
《정말 정시명이란 인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구만.》
《리범석이 꼬집어낸 사건들은 우리가 벌려온것이 아닌가.》
《그래야 장님 코끼리구경이구만. 이름 석자 가지고 한양성에 가서 김서방찾기지.》
안지생이 그들의 말을 담담하게 막으며 《문제는 다음에 있습니다.》하고 자료보고를 계속하였다.
《내무장관 김효석의 발언:
총리각하의 지시에 따라 경찰청에서 수사를 벌렸으나 정시명이라는 인물은 아직도 묘연한 존재로 되여있다.
우리는 〈흥국상사〉 사장 정향이 정시명의 가정인물일수 있다는 노불서기관의 의견에 류의하여 이미 전국적인 수배령을 내리고 조사를 심화시켜 일련의 문제점을 포착하였다. 그런데 정향은 수사기관의 움직임을 내탐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빨찌산에 들어갔다는 정보도 있다.
리범석의 발언:
정향은 장개석의 밑에서 활동하던 그릇이 큰 인물이다.
내가 료해한데 의하면 그의 가까운 지인 두명이 사라졌고 제주도에 갔다왔다는 자료도 있다. 제주도에 파견된 총사령부 대표가 출발직전에 접촉했다는 소리도 있다.
그는 이미 죽었다. 그가 서울에 와서 정착했던 집주인은 사라졌고 그의 아들은 빨찌산과 접선하던 장소에서 체포되여 자결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판단하건대 정향은 공산당계 빨찌산과는 일체 종적관계가 없다고 인정된다. 제반 자료에 비추어 나는 정향과 정시명이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노불의 발언:
나는 귀측에 정시명을 즉시 체포하기 위한 특별수사본부를 조직할것을 건의한다.
정시명의 줄이 정계와 군부, 사회전반에 깊이 뻗쳐있다는 실정에서 군, 경, 검 합동수사를 벌려 단 시일안으로 미국과 현 집권세력의 배후에서 활동하고있는 좌익세력권을 분쇄해야 한다. 협의회에서는 특별수사본부를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본부장으로 노불의 제안에 따라 최근년간 사찰계에서 1인자로 명성을 날리고있는 서울지방 검찰청부장 검사 오성도가 임명되였다. 오성도는 안주시태생으로 올해 서른다섯이 되는 야심이 큰 인물이다. 그는 1939년에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신의주의 지방법원에서 판사로 있다가 광복후 서울에 도망쳐와서 좌익세력탄압에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노불은 오성도에게 첫 임무를 다음과 같이 주었다.
정향을 체포하라. 정향이 하지까지 만나봤고 하지가 그를 남조선정계의 배후조종인물로 내세우려 한바있는 덩지 큰 인물이라 할 때 그를 통하면 정시명에게 접근할수 있다는 총리의 판단이 옳다.
이상입니다. 한가지 더 첨부할건 심양에서 같이 지낸 리창순이가 경찰청의 개가 되여 서울에서 냄새맡으며 싸다니다가 회장동지와 한번 조우한 일이 있다는것입니다. 전 회장선생님이 이러한 문제들을 〈흥국상회〉에 보고하지 않고있는데 대하여 수수방관할수 없다고 봅니다.》
안지생이 이렇게 결연하게 말을 끝내자 모두는 한동안 얼음덩이들을 한덩이씩 삼킨듯 선뜩한것을 안은채 묵묵히 정시명에게로 눈길을 모았다.
정시명은 어마어마하게 신변가까이에 육박해오는 놈들의 추적소동에 속이 후두두해왔다. 그러나 그는 흔연히 소리내여 웃고는 크고 걸걸한 목소리로 무거워진 방안의 공기를 흔들었다.
《흠! 내 몸값을 너무 비싸게 매겨놓는구만. 하지만 뭐 개의할게 없소. 정향이 숨어지내서야 그놈들이 매겨놓은 몸값을 언제 지불하겠소. 일없소. 그래봐야 하늘에 막대 겨냥이고 숲에서 바늘 찾기요. 자, 일에 착수합시다. 오늘은 햇점심이 없으니 돌아들 갑시다.》
정시명이 이렇게 헌걸찬 어조로 이야기하며 크게 웃어넘겼으나 누구 하나 따라 웃지 않고 자리 뜰념없이 열이 뻗쳐 앉아있었다.
숨가쁜 침묵을 먼저 깨뜨린것은 길철이였다.
《완전지하로!… 그렇소. 완전지하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련락과 교통이 원활한 서병남선생댁에 자리잡고 완전한 밀페생활로 이행하여야 합니다. 우물쭈물 말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길철이 격렬하게 부르짖자 정시명이 나직하게 반박했다.
《길철선생, 내 손과 발을 그렇게 꽁꽁 묶어둘바에야 내가 여기에 무엇때문에 필요하겠소. 동지들에게 제가 약속합니다. 절대로 모험하지 않겠다는것을, 안전담보가 없이는 움직이지 않겠다는걸 약속합니다.》
《회장선생님!》 뚝한 얼굴로 앉아있던 김명호가 푸접없이 정시명의 말을 툭 가로챘다.
《동지들, 결정을 내립시다. 길철선생 제기가 옳습니다. 나는 부회장의 한사람으로서 제기된 정황의 심각성을 스쳐보낼수 없습니다. 이런 일에서 요행을 바라는것은 너무도 무책임한 일입니다.》
《좋습니다.》 정시명은 전우들이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을양으로 윽윽하자 타협조로 말했다.
《결정을 내려주시오. 헌데 말미를 좀 주시오. 미군철거를 위한 이번 투쟁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라도 나에게 활동공간을 마련하여주시오. 나의 최저한의 이 요구만이라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난 그런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소.》
정시명은 고집스러운 어조로 모두에게 부탁하였다.
모임은 결정채택은 시한부로 보류하고 《흥국상회》를 보위하기 위한 실무적조치들을 더 보강하기로 하고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