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피어린 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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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쵸는 봄철을 맞으며 불면증에 시달려 항상 눈이 벌개있었다. 절기가 바뀔 때마다 천성적으로 잠을 이루기 힘들어 줄창 수면제를 복용해왔는데 미군철거문제가 안팎으로 들썩거리기 시작해서 도무지 잠자리에 들어도 편안치 않다.
어둠이 서린 고요한 방안에서 재깍거리던 시계가 두점을 친다.
(이제야 2시냐?) 무쵸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맡 상두대우에 있는 전등을 켰다.
그는 또 수면제를 먹을가 하다가 생각을 바꾸고 잠옷바람으로 방안을 거닐기 시작하였다.
미군철거문제가 지난해 《국회》에 상정된걸 겨우 묵살해버려 한 고비는 넘겼는데 또 소장파 의원들이 들고일어날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제 또 한차례의 곤욕을 치르어야 할 일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진저리가 난다.
년초에 대사들의 모임에 참가하려고 워싱톤에 갔을 때 애치슨이 따로 만나하던 말이 떠올랐다.
《무쵸대사, 하지중장은 여러가지 잡음이 많았지만 그런대로 미국이 부여한 사명을 수행하였소.
이제는 당신차례요. 미국무성이 대통령의 신임이 큰 무쵸씨를 이번에 서울대사로 류임시킨것은 식민지관리에서 군부우월론을 제창하고있는 펜타곤의 코대를 꺾어놓자는데도 있소. 이걸 잊지 마시오.》
외교관들의 교만이 로골적으로 집약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쵸-대통령이 천거한 네가 서울에서 얼마나 솜씨를 보이는가 똑똑히 셈을 치르겠다는 엉큼한 속내와 질투가 어려있다는것을 무쵸는 알고있었다.
국무성과 백악관에 뻗쳐있는 그의 정보통들에 의하면 맥아더는 자기의 정책보좌관이였던 애치슨에게 벌써부터 자기와 감히 엇서나가는 무쵸를 이번에 트루맨의 2기 행정부가 출범된 후 각국의 대사를 재임명할 때 갈아치우라고 단단히 훈시질했다고 한다.
그런데 애치슨의 제기를 받은 트루맨은 《무쵸를 소환하면 애치슨 당신이 서울에 틀고앉소. 당신이야 맥아더의 원동파에 속하지 않소. 서울에는 주먹이 센 사람이 아니라 수완군이 필요하오.》하며 무테안경속에서 싸늘하게 웃어버렸다.
그런데 지금껏 무쵸는 트루맨의 그 신임에 보답할만 한 치적거리가 없다.
미국무성으로부터 수완가라는 말은 고사하고 괜찮다는 정도의 평가도 받아볼만 한게 없다.
남조선은 계속되는 반미항전의 열풍으로 폭발전야에 있으며 정계는 태풍속의 갈숲처럼 우실렁거리고있다.
더욱 불안스러운것은 세상의 뒤소리는 흉흉하더라도 그런대로 미국의 식민지정책집행에서 기둥으로 되여온 미군을 즉각 철거시킬수 있는 위험이 나날이 커가고있는것이였다.
미군만 철거하면 서울은 석달도 견디지 못한다는 말은 애치슨이 내지른 비명만이 아니다.
무쵸를 더욱 긴장시키는것은 미군철거설이 통치집단의 량기둥인 《국회》와 행정부안에서도 크게 울려나오는것이다.
항쟁자들이 반미구호를 들고나선데 대하여 무쵸는 워싱톤의 도전인물들에게 어느 나라의 정치에서나 흔히 있을수 있는 리념적반대파들의 소동에 맞장구치지 말라고 어벌쩡하게 넘겨 미국여론의 불을 가까스로 꺼버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통치권조차 그냥 반미구호를 고집한다면 할 소리가 없다.
지난해 《국회》에 상정된 철거안이 심의도 되지 않았는데도 미국회가 소란을 피우고 유엔총회에서까지 그걸 빌미로 국가승인문제를 거부해나선것이 우연이 아니다.
하는수없이 미군은 곧 철거한다는것을 리승만으로 하여금 발표하게 하여 국가승인문제는 가까스로 통과되기는 하였지만 이제 또 《국회》가 이 문제를 재론하면 정말 야단이다.
그래서 리승만과 리범석, 신익희까지 따로따로 불러다놓고 이제 다시 철거문제가 《국회》에서 상정되면 미국도 어찌할수가 없다고 최후통첩장을 흔들어댔지만 그 떨거지들이 그칠길 없는 권력싸움에 지쳐 돌아나 보고있는지 모를 일이다.
요즈음 그를 불안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우환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미국무성에서 애치슨이 국무장관으로 되면서 다시 끌어들인 원동중시론자들이 일시에 밀려나고 애치슨만 남아있는것이다. 믿음직하던 무쵸의 후방전선이 허물어진것이다.
무쵸가 백악관에 있을 때부터 백악관 안전보장회의와 국무성에서는 유럽중심파와 원동중심파사이에 심각한 의견대립이 표면화되여왔다. 유럽파는 미국의 외교적중심은 반드시 쏘련권을 견제하고 유럽을 장악하는데로 나아가야 한다는것이 기본주장이였다.
그의 중심인물은 국무성의 정책국장으로 트루맨이 수재형의 정책두뇌라고 특별히 귀애하는 죠지 케난이였다. 2차세계대전후 케난은 줄곧 유럽중심론을 제창해왔는데 다시 제 자리를 차지하자 자기의 직속상관인 애치슨앞에서도 더 코를 세우고있었다. 하기는 애치슨에게 밀려났다가 트루맨이 다시 등용한 인물이니 애치슨의 눈치를 볼리가 없었다.
케난은 이 시기 베를린에서 쏘련의 봉쇄작전이 진행되여 서부베를린에 대한 물자공급을 수백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보장하는 극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쁘라하에서 좌익세력이 군사적힘으로 친미정부를 뒤집어엎는 사변들이 벌어지고있는것을 걸고 유럽에서 쓰딸린의 공세를 전면적으로 봉쇄하는 정책을 미국의 외교정책의 중심에 세울것을 제창하였다.
유럽주둔 미군사령관 크레이는 서유럽전체가 쓰딸린의 통제하에 들어간다고 련일 백악관에 급전을 날렸다.
워싱톤에서는 쏘련에서 원자탄의 개발이 마지막단계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완성되면 전쟁이 시작될것이라고 아우성이였다.
국제정세가 이렇게 랭전의 곬을 타자 백악관은 두파간의 공방전에서 유럽파의 팔을 들어주고 맥아더와 애치슨의 후원을 받아 등용된 국무차관과 극동국장과 차관보를 전격적으로 해임시켜버린것이였다.
무쵸는 제반 상황이 찌그러져간다고 개탄하였다.
새로 임명된 륙군장관 로이얄이 곧 서울에 온다는 통보도 날아왔다.
트루맨이 두파세력의 가운데서 대세를 관망하면서 명백한 의사표명을 하지 않고있는 로이얄을 파견한 의도가 미군존재전망을 확인하는데 있다는것은 군설명이 없이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요즈음에는 서울에 와있는 《유엔조선위원단》에서도 상서롭지 않은 정보가 들어왔다.
미군주둔의 필요성문제가 저들끼리 자주 론의된다는 자료였다.
오늘 점심무렵에 하도 불안스러워 맥아더에게 전화를 했더니 적어도 50년 여름까지는 미군을 물러나게 해서는 안된다고 호통을 쳤다.
무쵸는 맥아더의 계략을 안다. 맥아더는 조선반도를 통채로 깔고앉자는것이다.
동양에서의 미국리권의 총 대변자로 희떱게 자처하는 이 호전광은 38선에 주저앉아서는 유라시아대륙의 동쪽관문을 옳게 열어나갈수 없다고 주장하고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리승만에게 든든한 군대를 마련해주고 북을 공격할수 있는 실력을 키워놓은 다음 미군이 슬쩍 비켜앉아 북의 후각을 마비시켜놓은 후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달려들어야 한다는것이 맥아더전략이다. 실제로 맥아더사령부를 중심으로 모사군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작전이 준비되고있었다.
이러루한 큰 선에서는 트루맨의 지지도 유도해낸것 같은데 국제적반향을 고려하여 문서에 올리지 않고 있을뿐이였다.
(50년이라… 아직은 한해를 견지해야 하는데…)
무쵸는 우수에 잠겨 아직도 어스름한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리였다.
그때까지는 미군을 붙잡아놓고 북과의 관계도 조용히 해나가면서 야금야금 남조선의 힘을 키워야 한다.
(당장은… 미군철거론을 분쇄하는것이다.)
생각이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자 무쵸는 다시금 머리가 쑤셔났다.
노불이 리승만과 리범석을 아침저녁으로 따로 만나고있는데 아직은 그 무슨 기발한것을 내놓지 못하고있다.
노불이 또다시 씨 아이 에이도 동원시키겠노라고 하여 무쵸는 레코라우스처럼 일을 꾸밀바에는 아예 걷어치우는게 좋다고 미리감치 경고를 해두었다.
(내가 하지의 전철을 밟아가는게 아닌가.)
조용히 뒤전에서 점잖게 끈이나 쥐고있으려고 했는데 어찌할수 없이 이 나라의 정치의 현장에 들락날락해야 하는 자기의 궁색한 처지를 두고 무쵸는 이렇게 개탄하면서 아침산보나 하려고 휘장을 걷어올리고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응접실에서는 언제 들어와있는지 서기가 부석부석한 얼굴로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긴급보고입니다.》하고 그는 노불이 보내온 정보문을 내밀었다. 노불은 이따금씩 《긴급정보》라는 말로 머리칼을 곤두세우게 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또 긴급이야?… 읽으라구.》
무쵸는 신경질이 나서 그가 내미는 정보문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리승만계가 김구에 대한 암살을 준비하고있음.》
《뭐라구?…》 무쵸는 뜻밖의 소리에 섬뜩해지는 전률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노불의 얼굴이 언뜻 떠오른다.
엉큼한 속내가 짚이였다.
지난해부터 노불은 김구를 정계에서 조용히 제거할데 대하여 건의하였다.
리승만에게 제일 거치장스러운 인물이라는게 기본리유이겠는데 리승만과 한동아리에 매워있는 노불은 그 중핵적인 언급은 피하고 《국회》소장파의 배후인물이라거니, 려수항쟁에 관여하고있다거니, 아직도 평양에 기웃거린다거니 하고 주어섬겼다.
제거방법은 여러가지인데 깊은 산중에 들이몰아 절간의 중노릇 시키든지 아니면 려운형처럼 없애버리는것도 수라고 하였다.
무쵸는 우선 중앙정보국의 현지책임자라는게 계속 리승만의 풍에 놀아나고있는것이 불쾌하였다.
더구나 대사라는건 리승만의 과대망상적인 독주를 견제하기 위하여 두 김씨의 정치복귀를 추진하고있는데 보좌관이라는게 직계소속이 다르다고 대사의 뜻을 거슬러 자객질을 하겠다니 버르장머리가 고약하였다.
그래서 무쵸는 노불을 점잖게 다불러댔다.
《난 정치테로를 비렬한 짓으로 보오. 정치는 고급한 인간들의 고급한 무대란 말이요. 여기서 흉기를 내두르고 피를 보이면 관객들은 질겁해서 도망치고 말게요. 노불, 김구에 대한 테로가 이 나라의 민심의 정치적파동에 어떤 영향을 주겠는가부터 타산해봐야지.》
그랬는데 이렇게 집요하다. 한번 결심하면 기어이 해내는것이 정보국의 체질이라는데 노불도 구질구질한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번에는 리승만의 이름을 내걸고 자기는 그 뒤에 엎디여서 대사의 수표를 바라는것이다. 최소한으로 입을 다물어줄것을 바라는것 같다. 안될걸.… 그는 서기에게서 정보문을 뺏아들고 그 꼭대기에 개미들이 기여다니는듯 한 필체로 한구절 갈겨썼다.
《노불, 내가 김구를 어떻게 다루려 하는가를 리승만에게 똑똑히 말해줄것.》
그걸 서기에게 던져주고는 《또》하며 턱을 들어올렸다.
《신익희〈국회〉의장이 워싱톤 입국비자를 요구함. 내각제개헌문제를 가지고 미국회에 직접 호소할것이라 함.》
서기가 다 읽고 공손한 자세를 하고 상전의 저락된 기분상태에 신경을 쓰며 지시를 기다렸다.
무쵸는 그에는 반응이 없이 묵묵히 응접실을 나섰다.
서기는 그의 무거운 심기를 생각하여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없이 뒤를 따라섰다.
무쵸는 측백나무가 잘 다듬어진 뒤뜰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이건 긴급소식이라고 볼게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노불은 이 소식을 긴급으로 보고하여왔는가?
그래, 역시 노불은 리승만쪽이다. 신익희가 틀림없이 리승만의 곁에서 물러섰군. 그러니 대책마련이 있어야 되겠다는건가?
원래 신익희는 김구쪽의 사람이라 한다. 광복후 김구와 엇서서 리승만곁에 가붙었는데 리승만의 용인술에 놀아날 사람이 아니다. 신익희는 리승만에 비하면 개화파 량반이다.
언젠가 무쵸가 그를 초청하여 리승만의 독재적인 인간상을 비난하자 이렇게 공명해나서는것이였다.
《옳게 보았습니다. 리승만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상투냄새 풍기는 량반입지요. 그 사람은 코흘리개도 옥좌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던 왕권통치방식을 가지고야 대통령노릇을 할수 있는 위인입니다. 내각제는 유럽의 자유화된 정치방식인데 왕권통치보다 백배로 힘든 그 어려운걸 리승만의 실력을 가지고서는 펴나가지 못합니다.》
그때 무쵸는 리승만독재의 저의를 깨끗이 파헤쳐놓는 신익희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정치적소신을 내놓을줄 아는 그 기개가 놀랍고 대통령을 정확히 평가하는 견해가 마음에 들었다. 바로 그런 인물들을 대거등용하여 정계와 통치권의 요소요소에 세워놓아야 정치의 어지러움을 막을수 있고 안정된 정치를 연출할수 있다는것이 무쵸의 주장이다.
(그러니 노불은 신익희의 돌출이 마뜩지 않다는건가?)
무쵸는 또다시 신경질적으로 서기에게서 정보문을 받아들고 꼭대기에 다시 갈겨썼다.
《보장해줄것.》
무쵸는 서기가 허리를 굽석거리며 돌아서자 그가 정원밖을 나서는것을 바라보다가 휘연하게 열린 서울의 새벽하늘에로 눈길을 보냈다.
구름쪼각들이 여기저기 제멋대로 떠돌고있는 서울하늘은 해돋이를 기다리며 조용히 밝아오고있었다. 동녘에서 줄을 뻗은 노을빛이 점점 선명해지며 구름장에 어울려 피빛으로 타고있다.
무쵸는 생리적으로 붉은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을씨년한 하늘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발을 돌려 집으로 어정어정 걸어갔다.
불쾌한 아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