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영원한 사랑의 찬가
4
너를 보는 나의 눈
《×월 ×일》
《숙, 너는 어떤 녀자냐?》
그대는 언제인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것은 버들개지 토실토실 살지던 한강변에서였습니다.
그대가 사랑의 고백을 하던 그날은 비가 내리였습니다.
실가닥같은 비가 소연하게 내리였습니다.
나는 그때 대답했지요. 왜서인지 울고싶어 눈물이 자오록해서 대답했어요.
《나는 몰라. 내가 어떤 녀자인지.》
숙, 너는 정말 어떤 계집이냐. 어째서 집을 탈가하고 오늘은 철의 사랑도 뒤에 남기고 이 길에 나섰냐.
사랑하는 철… 나는 이제 그 물음에 량심의 고백을 하려구 해요.
숙아, 이제부터 너를 지켜볼테다. 네가 산으로 오른 리유에 대하여, 너를 이 길로 떠민 보이지 않는 손길에 대하여 그리고 이 길에서 살아가는 너의 일거일동에 대하여 지켜보고 분석을 하고 판단을 내릴터이다.
녀성의 변덕으로 이 길에 나선것은 아닌가. 한달도 지탱못하고 후회하지 않겠는가. 네가 정말 이 싸움의 무대에서 얼마를 버티여낼수 있겠는가.
숙, 너는 정말 어떤 계집이냐?
《×월 ×일》
이 밤은 까아만 밤, 칠흑같은 밤.
한시간후이면 우리는 매복전에로 떠난다. 함양경찰대가 쳐들어온다고 한다.
지금 내곁에는 남도의 소문난 녀걸 리점분대장이 지도를 들여다보고있다.
매복대를 잠들게 해놓고는 자기는 광솔불밑에서 열심히 지도를 들여다보고있다.
철! 내 모습을 보면 철은 뭐라고 하실가?
머리에는 군모를 눌러쓰고 혁띠를 바싹 조여매고 양복상의를 입고 권총을 차고 쪽잠을 청해보는 숙.
아마도 장하다고 하실거야.
아, 철, 난 잠시전 짧게 펼쳤던 꿈의 나라에서 당신을 보았다.
날 꼭 그러안고 뜨거운 숨결을 부어주는 당신의 품에 든 그 달콤한 시간이 어찌 그리도 짧았던지… 깨여나니 꿈인데 너무도 아쉬워 지금도 애써 그대품을 그려본다.
아, 내가 지금처럼 그대를 사랑해본적이 있었던가.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달려가고싶은 마음, 그대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밤새도록 쉴새없이 그 무엇이든지 얘기하고싶어지는 이 마음.
어째서 나는 그대를 떠나왔을가? 잘한 일일가? 잘못한 일일가? 지금도 이 물음앞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숙, 대답해봐. 정말 철을 버리고 떠나온 길, 민족을 등진 가정의 비극을 끌어안고 가장 격렬한 통일전쟁터에 나서서 치욕을 씻고저 하는 너의 행동이 철의 가슴에 어떤 상처를 남길런지 …
숙아, 너 정말 대답해봐.
너에겐 너의 명예와 너의 슬픔만이 중하다는거냐.
그만하자. 리점분대장이 지도를 거두고있다.
《출발준비!》 이제 저이가 짤막히 구령치면 우리는 저일 따라 매복전에 나선다.
《원쑤를 치자요. 통일을 막아나선 미국놈과 매국노를 사정을 보지 말고 치자요.》
그녀는 내가 입대를 청원하던 날 나의 입산리유에 대해서는 크게 달가워하지는 않으면서도 빨찌산선서를 시키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의 밑에서 지내자고 하면서 입대기념으로 브로닝권총 한자루를 주는것이였다.
나는 이제 그 권총을 들고 매복전에 나선다.
통일을 막아나선 자들에 대해서는 나의 권총은 사정없이 불을 토할것이다.
내가 겨눈 과녁에는 오빠도 있다.
-사정을 보지 말라-이것은 대장의 명령이다.
아니 민족이 우리에게 부여한 과제이다.
숙, 너는 어떤 녀자냐? 오늘 저녁 싸움에서 그 대답 하나가 튀여나올것이다.
나의 브로닝이 대답할것이다.
《×월 ×일》
그대앞에 서면 난 항상 커다란 어린애였고 바보였지요.
그대의 마음속에 항상 나만이 밝게 웃으며 나만이 그대의 마음을 헤아려주며 나만이 그대를 애무할 권리만이 있다고 주장했지요.
리기주의자, 질투쟁이, 욕심꾸러기…
그러나 그대는 언젠가 너그럽게 말했어요.
《질투없는 녀자의 사랑이란 허위라는 말있는데 나도 뭐 반대가 없어.》
철, 나는 당신의 언제나 흔들림없는 모습이 보기좋아요. 당신의 깨끗한 모습이 보기좋아요.
리점분대장이 어제 저녁 잠자리에서 물었어요.
《애인이 있어?》
《예.》
《좋은 사람이야?》
나는 서슴없이 대답했어요. 《그인 좋은 사람이예요. 난 그이를 영영 떠나자구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요. 어째서 날이 갈수록 더 그리워질가요? 난 그이앞에 영원한 결별을 고했는데 어째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기가 이리도 힘들가요. 그이도 날 지금 생각하고있을가요?》
리점분대장이 대답해주었어요.
《남자의 사랑이란 폭포와도 같고 녀자의 사랑은 내물과 같다는 말이 있지. 가늘게 시작되여 흘러가며 깊어지고 넓어지는것이 녀자의 사랑이야. 하지만 그분도 혜숙일 그리워하고있을거야. 이제라도 마음을 돌리는게 어때?》
정말 그럴가요?
숙, 마음을 돌리는게 어때? 리점분대장은 실없는 소리하는 녀자가 아니야. 어때, 숙?…
숙아, 탕개를 조여. 너의 결심은 옳았다. 결단코 나선길을 돌아서지 말아.
철은 우리의 한 전구를 맡아나선 사람이야.
지휘관의 심장이 녀인의 신변잡사로 떨려서는 안된다. 통일대전은 온갖 진부한것을 부정하고 온갖 비민주주의적이며 비애국적요소들을 그것이 아무리 쓰리고 아쉬운것이라도 무자비하게 뛰여넘을 때만이 이길수 있다.
철, 나를 잊어달라. 그대의 심장에서는 통일전의 노래만이 울려야 한다.
한푼어치의 얄팍한 인정때문에 투사다운 결단이 필요할 때 생각이 복잡해진다면 우리 혁명이 용서하지 않을것이다.
철! 나를 밟고, 사랑의 고민거리를 확 털어버리고 회장선생님과 더불어 의연하게 나가주세요.
《×월 ×일》
숙, 너는 어떤 녀자야? 너를 보는 나의 눈이 언제나 맑게만 빛나다오.
너를 보는 나의 눈이 흐려진다면 너는 이 신성한 대오에서 자기를 지탱해낼수 없어.
나는 오늘 200리 행군에서 여러번 주저앉고 쓰러졌다.
어느 산릉선에서 종시 나는 한 남동무의 등에 업혔지.
그는 내가 미끄러내릴 때면 투박하게 성을 냈다.
《서울아씨, 정말 이제는 자기를 끝내고싶소?》
리점분대장이 달려와 맵짜게 소리쳤다.
《어디서 엉석질이냐. 다시 주저앉으면 쏘아죽일테다.》
아, 무정한 녀대장! 저렇게 독하니 대장노릇하지.
숙, 난 이십리나 되는 산길을 남동무의 등에 업혀 오면서 울었지.
나는 다시 물었어. 너는 어떤 녀자냐? 자기를 이겨내라. 가정의 울타리를 단연코 뛰여넘은 숙답게 용감하라! 대담하라! 굳세라!
회장선생님이 너를 지켜보신다. 전우들이 지켜보신다. 그분들을 욕되게 하지 말아.
훌륭한분들속에서 투쟁과 행복과 사랑을 찾은 숙의 모습… 장하다!
《×월 ×일》
철!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숙과 철, 그대와 나… 인연을 끊으려고 백번을 다짐하였건만 이책에도 다시는 그대와 마주서지 않으리라 했건만 우리의 인연은 어찌 이리도 련련할가요.
숙아, 넌 정말 어리석은 계집이였구나.
당신의 생명, 당신의 숨결, 당신의 피는 그리도 지워지지 않고 나의 마음, 숙의 피와 몸속에 그대로 생동하게 있으니 정말 어쩌면 좋담!
간고한 행군끝에 찾아든 휴식시간에 대장이 날 조용히 찾았다.
《혜숙이, 이제부터 우리 전구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업을 맡아해야겠다.》
《싫어요. 난 그냥 일선좌지에 서있겠어요.》
《그 몸으로?》
《내 몸이 어쨌다구 그래요?》
《원 내 몸이 어쨌다고? 안되겠다. 네 아래배를 내놔. 불룩해지는 네 배를…》
《피, 언니도…》 난 갑자기 엄격한 녀대장을 언니로 부르며 픽 웃었다.
《그런 몸으로 2백리를 달리다니… 넌 동지들을 어떻게 아는거야.》
녀대장은 철빛얼굴에 성을 돋쳐가지고 엄격히 따지고들었다.
나는 창피한 생각부터 들어 얼굴에 열감이 느껴졌다.
그러자 나를 지켜보던 녀대장의 고운 눈이 반짝거리고 말씨가 유순해졌다.
《아들을 낳아다오.》
《참 언닌… 하지만 전 후방으로 안갈래요.》
《가야 한다. 우리 빨찌산의 규률이다.》
《됐어요. 언니 그런 규률이 어디 있어요. 제가 정 급하면 가겠으니 규률로 떠밀지는 말아요.》
《안돼, 우리 백운산빨찌산선서에 동지를 사랑하고 동지를 아끼라는 규정이 있어. 동지를 사랑하는건 우리 빨찌산의 도덕이기전에 규률로 그렇게 새겨져있는거야. 동지에게 날아오는 총탄을 제몸으로 막아주는것도 우리에겐 하나의 규률이요, 의무란 말이다. 그래 배가 함지박만해지는 널 끌고다니다가 이 대장을 규률위반으로 빨찌산심판대에 올리고싶으냐?》
우리 대장은 규률이라는 소리를 잘한다. 규률에 숱한 의미를 두고 뜻풀이를 하며 대오를 강철같이 묶어세운다. 이런 때 보면 그 규률이라는 개념이 너무 람용이 되는것 같다.
할수 없다. 난 래일부터 학교로 가야 한다.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총쏘기보다 나에겐 익숙된것이니 걱정할건 없어.
그러나 야단이다. 이를 어쩌나. 하루가 다르게 몸이 무거워진다.
내가 왜 이걸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가.
빨찌산에 부담을 주게 될줄이야.
나는 아래배에서 꿈틀거리는 새 생명의 태동을 느끼며 야릇해지는 불안과 기쁨에 잠긴다.
철! 이는 우리의 사랑의 열매이다. 그런데 난 왜 그 신비스러운 생명을 두고 걱정하는것일가.
리점분대장이 속을 헤아렸는지 벌써 봉긋해져오르는 나의 몸을 바싹 끌어당기더니 이렇게 속삭인다.
《얼마나 좋아! 혜숙아, 우리가 빨찌산을 무은 후 네가 세번째의 빨찌산의 자식을 낳아준다. 잘 키워보자. 난 그 애들을 위해서도 싸우고 또 싸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군 해. 나도 광복전에 산에서 둘째애를 낳았는데 그때 우리가 잘 싸우기만 했더라면 어째서 미국놈이 쳐들어 오고 우리가 다시 총을 메고 다니겠니.
이제 두고봐라. 그 애들이 지금은 어머니등에 업혀 힘들게 자라지만 커서는 더는 이런 길을 걷지 않을게다.
아들도 좋고 딸도 좋아. 너같이 건강하고 눈이 억실억실하고 이목구비 번듯한 멋쟁이만 낳아다오. 빨찌산이 낳은 자식은 멋쟁이가 돼야 한다. 이것도 규률이야.》
호호…나는 웃었다. 그러나 녀대장은 그 웃음에 성나서 말했다.
《왜 웃어? 멋쟁이 낳지 못할바엔 낳지 말아. 멋쟁이를 낳아야 난 그날 우리 백운산빨찌산에 휴식을 선포하겠다. 부자놈들 자식낳이 부럽잖게 상도 차려주고 큰 턱도 낼테야. 이건 규률이야. 하지만 혜숙아, 난 믿는다. 우리 빨찌산이 낳는 애들은 다들 멋쟁이가 될거다.》
나는 또 웃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쑥스럽지도 않다. 그저 즐겁다.
리점분은 내 봉긋한 아래배를 다독거리다가 마치도 아기의 숨소리를 듣기라도 할듯 귀까지 갖다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나를 끌어안고 한바탕 큰 소리로 웃었다.
아, 빨찌산의 정서, 빨찌산의 향기, 빨찌산의 웃음! 얼마나 희망차고 아름답고 장쾌한것인가.
난 대장이 좋아. 정말 이런 때는 꼭 장난꾸러기 사내애들 같애. 빨찌산이 낳는 자식은 멋쟁이가 돼야 한다는 규률, 이런 규률이 세상에 또 있을가?
아니, 아니야. 그건 자랑이고 긍지고 신념이다.
빨찌산이 하는 일은 다 세상에서 제일 훌륭해야 한다는 그 녀자의 소원이다.
통일운동의 선각자들은 누구나 다 개체가 의젓하고 하는 일도 의젓해야 한다는것이 대장의 주장이다.
알았지 숙, 멋쟁이를 낳지 못하면 규률위반이야.
난 자신이 있다.
철, 난 정말 멋쟁이를 낳고 어요. 우리 대장이 내는 큰 턱을 받고싶어.
철, 난 지금 울면서 이 글을 써요.
왜 눈물이 나올가요. 기쁨의 눈물이란 이런것일가요?
《×월 ×일》
사랑하는 철, 오늘은 그대를 꼭 만나고싶다.
막 보고싶어 못견디겠다. 무슨 아무런 리유도 없는데 못견디게 보고싶어.
난 부모를 원쑤들에게 빼앗긴 두 어린이를 꼭 끼고 누워서 당신생각에 온밤을 지새웠어.
당신도 꼭 내 생각을 하시겠지.〈고집쟁이, 괄랭이!〉 이제 만나면 당신은 우뚤해서 성을 내시겠지. 〈그렇게 쉽게도 날 떠나간걸 어째서 날 찾아왔느냐?〉아니, 당신은 그렇게 야한 얘기 모르는 사람인걸.
모든걸 리해하고 모든걸 너그러이 용서하실걸.
당신은 언제나 그러했어요. 나를 한껏 위해주고 용서해주고 고무해주고…
아니 숙! 네가 지금 무슨 새빠진 얘길 하는거냐. 더 바라지 말아야 한다.
철은 나에게 새로운 행복을 주었다. 이 세상 제일 귀한 녀인의 행복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내가 당신에게서 받아안을수 있는 최상의 복이다.
난 당신의 얼굴,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걸음새를 갖춘 그런 사내를 낳으면 더 한이 없겠다.
더 바랄게 무어냐.
당신을 위하여 당신의 사랑을 포기한 나의 선택을 당신에게 드릴수 있는 사랑의 보답으로 귀중히 아끼고 지켜갈것이다.
철, 부디 나를 잊어달라.
《×월 ×일》
정말 우리는 끊을수 없는 인연속에 살고있는가.
오늘 점심무렵에 리점분대장이 찾아왔다.
그는 학교의 뒤산기슭에 흐르는 맑은 골개수에 나를 데리고갔다.
그는 수정같이 맑은 물에 통실통실한 종다리를 잠그고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혜숙동무, 륜파동지를 알아요?》
《륜파동지?!》나는 순간 귀가 멍해졌다. 륜파동지! 륜파동지!…
나는 륜파라는 가명으로 빨찌산에 보내는 회장선생님의 통보문을 여러번 작성하였다.
그런데 리점분대장이 어떻게 알고있을가?
나는 순간 너무도 그리운 모습에 목이 메여 눈굽에 물기가 핑그르해짐을 느끼며 고개를 까딱거리였다.
《륜파동지가 파견한 련락원이 왔어요. 혜숙동무가 와있다면 소식을 보내달라고 했어. 남도의 빨찌산을 다 뒤졌대.》
나는 그만 얼굴을 싸쥐였다. 손가락짬으로 눈물이 새여나왔다.
회장선생님! 그리운 모습들이 일시에 떠올랐다.
사모님! 례영이! 부회장선생님들! 그리운분들! 나는 여전히 그분들의 마음속에 살고있었구나!
《잘 돌봐달라구 말씀하셨다는구만. 언젠가 데려가겠다고 말씀하셨대.》
《언니!》
나는 더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녀자의 실팍한 무릎에 얼굴을 묻고 몸을 떨었다.
《됐다, 됐다.》 대장도 나의 등을 어루만지며 갈린듯 한 소리로 나직이 달래주었다.
나는 시내물에 얼굴을 씻고 나에게 기울여준 그 귀중한분들의 사랑과 믿음과 보살핌에 대하여 처음으로 다 이야기하였다.
리점분은 연신 혀를 차며 두서없이 엮어대는 나의 이야기를 점도록 들어주었다.
《너도 모진 녀자구나.》
리점분은 다시 나를 끌어안더니 정을 담아 속삭이였다.
그래, 나도 안다. 숙-너는 모진 계집이냐?… 모진 계집-광복전에는 집을 버리고 오늘은 애인을 버리고…
아니야, 아니야. 나는 모진 녀자가 아니야. 나는 그렇게 단언했다.
더 큰 사랑을 위해, 더 큰 품을 위해 숙, 너는 단연코 자기를 지켜간다.
숙아, 너무 슬퍼말아. 모질지 않고서는 자기를 지켜낼수 없는 오늘이니 오늘의 모진것은 아름다움의 변형된 모양새가 아닐가.
회장선생님! 사모님! 례영이!
저를 아껴주는 그 사랑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살아도 그 사랑의 품에서…
숙이 올리는 감사의 절, 고마움의 절, 영원한 따름을 언약드리는 절을 받아주세요. 저는 행복합니다.
정시명의 눈앞에서 권혜숙의 장한 모습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뀌여지며 주마등처럼 삼삼히 그려지고 흘러갔다.
일기장의 제목을 구태여 《너를 보는 나의 눈》으로 달아놓은 혜숙의 심중이 짐작이 갔다.
혜숙이 그 어려운 결사전의 나날들에 추호의 동요나 변심이 있을세라 량심이라는 깨끗하고 대바르고 매서운 리지의 눈초리로 자신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고 오직 한길로 그냥 《너》, 혜숙이를 몰아간것이다.
이것은 인간고유의 아름다움을 읊조리는 고상한 노래였다.
그 아름다움을 지키려는 순결무구한 넋의 몸부림이였다.
아름다움의 세계에서 아름다운 인간만이 부를수 있는 인간찬가였다.
《아-》
믿어마지 않았던 그 의연한 심장에서 열렬하게 울려나오는 사랑과 충정과 의지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선률에 취하여 정시명의 심장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 사랑스러운 가락들을 다시 음미해보듯 한페지를 넘기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새로운 페지를 넘기군 하였다.
《×월 ×일》
꿈인가! 생신가! 오늘 리점분대장이 《서울신문》을 가지고 달려왔다.
《권영호… 이 친구가 못나게 놀았다지?!… 혜숙아, 턱을 내.》
리점분이 여느때없이 수다를 떨며 신문을 내 눈앞에서 뱅글뱅글 돌리며 턱을 내라고 야단이다.
나는 신문을 받아보았다.
오빠의 사진이 크게 실려있다. 《량심선언》이라는 주먹같은 제목부터 이상스럽다. 이게 뭔가? 량심선언이라니. 어떻게 된 량심을 선언한다는건가.
나는 단숨에 읽었다. 두번세번 읽었다. 읽으면서 울었다. 울면서 또 읽었다.
오빠, 이게 오빠의 소리가 옳은가요?
침략자와 매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당당히 선언한 오빠!
어지러운 과거와 결별을 선언한 오빠! 당신이 정말 내 오빠 권영호인가요?
나는 그 자리에 폭삭 주저앉아 울었다.
《에잇 울보! 빨찌산에 들어와 우는 법만 배운것 같아.》 이렇게 시까스르는 리점분대장의 목소리도 울기에 젖어있었다.
나는 그 소리에 웃었다. 눈물을 머금고 웃었다.
《원 혜숙이가 그렇게 웃으니 정말 예뻐지는구나.》
《언니는 참.》
나는 서울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흰 구름이 둥실둥실 떠가고있었다. 푸른 바다에서 헤염치는듯 싶은 흰 구름에 실려 이제 당장 오빠를 찾아가 이게 실말이냐고 다시 묻고싶다. 그렇게도 미워지던 오빠가 이렇게도 자랑스러워지다니… 오빠는 분명 나를 부르고있다. 소리쳐 웨치고있다.
《내 너를 따라서리라. 내 너의 동지가 되여 따라서리라.》
오빠의 재생에 어떤 은혜로운 손길이 이어져있는지 나는 알수 있다.
오빠를 위해 기울였을 회장선생님의 극진한 정이 헤아려져 나는 속안이 달아올랐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철앞에 당당한 혜숙일 내세우고저 드바쁜 일속에서도 시간을 내시고 땀과 지혜를 모아주시였을 선생님의 모습이 삼삼하다.
철! 아마 당신의 지성도 고여있겠지요. 고마와요, 철.
혁명은 우리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어요.
고마운분들을 위하여, 우리모두의 꿈인 통일조국을 위하여 혜숙인 영원히 조국의 참된 딸이 될것입니다.
《×월 ×일》
리점분대장이 또 날 찾아왔다. 륜파동지로부터 통보가 왔다고 한다.
이번에 《국회》의원조사단이 유격전구에 대한 시찰을 가게 되니 유격구의 생활을 가능한껏 개방하여 놈들이 빨찌산투쟁을 놓고 벌리는 악선전을 분쇄할수 있도록 편의를 보장해줄것을 부탁해왔다 한다.
그런데 오빠가 그 조사단의 단장으로 오게 된다고 하였다.
남매간의 상봉을 극비밀리에 보장해주고 뒤따라 서울에 돌아올수 있도록 협조해달라는 부탁도 왔다고 한다.
《혜숙아, 그동안 고마웠다. 너를 보내자니 가슴이 알알한데 어쩌겠니. 이젠 더는 널 붙잡고있지 못하겠다. 떠날 준비를 갖추어라. 조사단이 이틀후에 온다니 인차 떠나도록 인계를 해야겠다.》리점분은 작별의 서러움을 짓씹으며 말했다.
나는 산속에서 간고분투하는 녀대장과 헤여지게 된것이 괴로웠다.
《제가 어떻게 여길 뜬다고 그러세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리점분대장은 정을 끊으려구 애를 쓰듯 눈을 빨며 단언했다.
《안돼, 가야 해. 륜파동지로부터 우리 빨찌산이 얼마나 요긴한 방조를 받는다고 모처럼 전해온 부탁을 내가 마다한단 말이냐. 군소리말고 떠날 차비를 해, 대장이 결심하면 움직일수 없어. 빨찌산의 규률에 흥정을 하자는거냐.》
철! 이제 한주일 아니 사흘후에는 난 당신께로 달려갈것이다.
어쩌면 어제 보았던 그 흰 구름보다 내가 먼저 서울땅에 들어설것이다.
철! 이젠 당신과 나, 철과 숙은 비로소 정의가 가리키는 길, 애국이 떠미는 길에서 헤여지지 말자!… 나는 서둘렀다. 의원조사단이 오므로 유격전구의 여기저기를 보여준다. 《학교와 병원, 토지개혁의 혜택을 받아 풍작이룬 밭과 주민들의 집을 다 보여주자. 놀고먹는놈없는 골짜기들을 다 보여주자.》 대장의 지시다.
유격전구의 사람들은 한사람같이 말한다.
《경찰놈들이 도회지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있어 모든것이 바르게 산다. 그러나 살맛이 있는 우리네 세상이다.》
우리네 세상! 얼마나 좋은 말이냐. 조사단이 살맛 있는 우리네 세상의 소식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니 오빠가 큰 일을 하는 셈이다.
《×월 ×일》
철! 나에겐 시간이 없어요.
십분, 십분이 있다. 내 생애, 길지않은 생애에 남아있는 십분, 이 십분간 당신과 작별을 해야 한다.
그대의 품에 영원히 안기는 그런 작별을 하련다.
《국회》조사단의 도착을 앞두고 충청남도의 경찰대가 유격전구를 공격해왔다.
아마도 유격전구의 활기있고 질서정연한 모습이 조사단에 알려지는것이 두려워진것이다.
나는 학생들을 이끌고 뒤산의 동굴로 들어와있다.
동굴밖에서는 지금 경찰대놈들이 문을 지키고서서 우리가 나오지 않으면 입구를 폭파해치우겠다고 하면서 십분간의 시간을 준다고 하였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을 다 내보냈다.
우리 녀대장이 그리도 사랑해주던 그 애들을 어떻게 동굴속에 묻어버리겠는가.
그 애들은 통일조국에서 살아야 할 애들이다.
나가도 함께 나가고 있어도 함께 있겠노라 큰 애들이 품에서 떨어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지금 굴안에는 나만이 남아있다.
철! 용서하시라. 철의 심장에 아픔만 남기고 철의 사랑을 안고 하직의 인사를 올리는 못난 계집을 용서하시라.
그러나 믿으시라. 숙은 죽으면서도 철을 사랑했고 철을 그렸고 철의 사랑을 지켜냈고 철의 이름을 자랑으로, 행복으로 불렀다는것을… 오빠를 용서해주시고 내가 섰던 자리에 세워주세요.
오빠! 뒤날을 돌아보며 울지 말고 앞날을 향해 웃으며 가요.
무익했던 어제날을 봉창하기 위해 제몫까지 열몫을 맡아줘요.
철! 그리운 철!
저를 위해 이날 이때토록 정을 주신 회장님께 저의 마지막인사를 전해주세요.
그리운 사모님, 례영이, 안녕히! 우리의 몫까지 합쳐 부디 행복해.
마동지, 보고싶구나. 만나면 숙이 마지막길 떠나면서 백년토록 헤여지지 말라고 부탁남겼다고 해줘. 회장선생님이 우리의 결혼식날 해주신 축복의 말씀있지.
《백년해로 해라!》 례영이, 마동지, 백년해로 하세요.
철, 난 이제 리점분대장의 선물인 브로닝과 이 일기장을 묻어놓고 두발의 수류탄을 쥐고 동굴밖으로 나가련다.
거기에는 통일을 반대하는 이 나라의 역적들, 이 나라의 인간되기를 포기한 이 나라의 죄인들이 총을 쥐고 서있다.
방금 그놈들이 1분이 남았다고 떠들어댔다.
이제 나는 펜을 놓으련다. 나는 내 인생의 총화를 두발의 수류탄으로 장식할것이다.
사랑하는 철, 부디 행복하세요.
당신께 한만 남기고 떠나온 죄많은 계집, 용서해줘요.
당신과 더불어, 회장님을 비롯한 저의 귀중한분들과 더불어 우리곁을 먼저 떠난 전우들이 불렀던 자유의 노래, 겨레의 노래를 마지막으로 부르겠습니다.
조국이여, 영원히 번영하라!
우리의 조국통일위업의 승리 만세!
하나로 합쳐 부디 다시는 헤여지지 말아다오!
우리의 해님이신 김일성장군님 만세!
삼가 권혜숙 드림
마지막페지가 넘어갔다.
눈귀로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가는 볼우로 둘둘 굴러내렸다.
페지마다 피방울처럼 진한 눈물이 뚝뚝 떨어져 퍼져갔다.
숨소리가 높아지고 어깨가 세차게 오르내리였다.
그는 혜숙의 심장의 박동이 그대로 뛰고있는 일기장에 얼굴을 묻고 흑흑 흐느끼였다.
동굴!… 치솟는 화염!… 요란한 폭발음! 아-아 혜숙이 가다니… 그렇게 가다니… 이 일을 어쩐담…
권영호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그의 등뒤에 죄지은듯 허리를 구부정하고 섰다. 흐느낌속에서 정시명의 절통한 부르짖음이 튕겨나왔다.
《아, 내가 혜숙일 그 꼴로 되게 했구나. 한달전에 길철이를 보내야 하는건데… 그 사람이 고집부리기에 한달을 미루었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내 생각이 한발 모자라 혜숙일 끝내 건져내지 못했구나!》
정시명은 두주먹으로 책상을 꽝꽝 치며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아닙니다. 제가, 제가 동생을 죽였습니다.》
권영호가 온몸을 후둑후둑 떨고있는 정시명의 두손을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고 앉더니 울음섞인 소리를 하였다.
《뭐라구?…당신이 죽였다구?!…그래, 그래, 그래!… 에끼 이 못난 놈! 도대체 어쩌면 그렇게도 모질게 혜숙의 애간장 말리우고 혜숙일 이 지경 되게 했느냐. 에잇 못난 놈! 내 눈앞에서 썩 사라져! 당장!》
정시명은 그의 두손을 홱 뿌리치며 눈이 화등잔이 되여 마구 소리질렀다.
그 서슬에 권영호가 뒤로 벌렁 넘어져 그대로 헉헉 흐느낀다.
정시명은 머리를 쳐들고 천정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다가 또 혼자소리로 탄식을 하였다.
《아 참! 내가 무슨 일을 저질러놓았담. 혜숙이를 끝내 구하지 못하고 혜숙의 사랑을 되찾아주지 못하고 이렇게 보내다니, 내 어떻게 길철이를 만나고 혜숙이 죽었다는 소리를 어떻게 조직에 보고한단 말이요. 이게 정말 꿈은 아니요? 엉!》
정시명이 오열에 떨며 울부짖었다.
권영호가 무릎걸음으로 걸어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옷섶을 축축하게 적시였다.
《저를 씨원히 욕해주십시오. 볼기를 쳐주십시오. 벌써 일찌기 죽어 없어져야 할 놈이였는데… 혜숙아! 이 못난 오빠가 금옥같은 동생을 죽였구나!》
권영호는 정시명의 옷섶을 탈아쥔채 그냥 턱을 덜덜 떨며 헉-헉거리였다.
《회장님, 혜숙의 유언대로 저를 혜숙의 자리에 세워주십시오.》
《이 사람아! 이 일을 어쩌면 좋소!》
정시명은 그를 와락 끌어안더니 훌쭉해진 그의 볼에 젖은 볼을 비비며 오래오래 섧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