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영원한 사랑의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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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호일행이 떠난 며칠후 정시명은 길철을 불러가지고 어데 가볼데가 있다고 하면서 자동차에 올랐다.
자동차는 강안도로를 따라 질주하다가 남산기슭의 언덕마을로 향하였다.
정시명이 어느 한 대문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자 대문이 둔한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최남수가 나타났다.
《아, 회장선생님도 함께 오셨군요. 저쪽 사랑채입니다. 이 아근에서는 이집이 제일 크구 환하지요.… 마음에 드시겠는지…》
《주인댁은 어데 갔습니까?》
《예, 늙은 내외가 살고있는데 요즈음은 상주에 있는 아들집에 가있습니다.》
최남수가 그들을 사랑채로 안내하였다.
밖에서 나는 인기척소리를 듣고 례영이 《벌써 오셨네.》하며 판자를 깐 토방에 나왔다.
그의 손에는 풀이 발린 솔이 쥐여져있었다.
《아직 끝내지 못했느냐?》
《장판과 도배는 다했는데… 창문장식을 마저 하느라고, 웃방만 하면 돼요.》
그들이 말을 주고받는데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허리를 질끈 동이고 치마꼬리를 올려 괴춤에 꿰지른 민순임이 문을 열고 나섰다.
《길철선생님이 오셨군요.》
길철은 왜 자기가 이 집에 들어섰고 어째서 모두가 환한 얼굴로 자기를 주빈처럼 맞아주는지 영문을 알길없어 두리번거렸다.
《길철선생님, 어서 들어와 보시유. 방들이 아늑해서 부부살림펴기는 좋을듯 싶은데 좀 좁은감이 있어요.》
민순임의 말에 길철이 당황해서 정시명을 돌아보는데 그는 싱글벙글거리며 제먼저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기웃거리다가 길철에게로 돌아섰다.
《어서 올라오오. 이게 왜 좁다고 그러오. 둘이 금술좋게 살아가는데는 방이 좁은것이 좋아요. 이 방이 버그러지게 아이들만 뽑아내라구. 집걱정이야 우리 최선생님이 어련하실라구.》
정시명이 유쾌하게 웃는데 최남수가 따라 웃고 녀자들도 소리내여 웃었다.
길철은 정시명이 때없이 기뻐하는것이며 례영이 허리를 꼬부리고 키득거리는것을 꿈결처럼 받아들이며 정시명을 따라 방안에 들어섰다.
하얀 종이를 정결하게 바른 방안은 분통처럼 환하다.
그들은 최남수의 안내를 받으며 두개의 방과 부엌과 창고들을 차례차례 돌아보았다.
창고에 있는 밤색갈의 독에 흰쌀이 가득 채워져있는것을 띄여본 정시명은 최남수를 돌아보며 즐겁게 웃었다.
그는 마당에 도로 나와서 부엌문가까이에 있는 물뽐프를 몇번 저어보았다.
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올라왔다.
《좋구만! 좋아… 최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집이 꼭 마음에 듭니다.》
정시명은 입가에 기쁨을 가득 담고 진심으로 사의를 표하였다.
《고맙긴요. 집을 거두지 않아서 사모님과 따님이 수고가 컸습니다. 함부로 삯군들을 불러들이지도 못해서 두분이 여러 밤을 새웠습니다.》하며 최남수는 정시명에게 여러개의 열쇠가 주렁주렁 달려있는것을 내밀었다. 정시명은 그것을 받아들고 열쇠를 하나하나 유심히 보고는 길철에게 넘겨주었다.
《자, 열쇠를 받소. 길철선생은 오늘부터 이 집에 계시오. 혜숙이 올 때까지는 피곤해도 이 집에서 지내면서 정을 붙여보오. 최선생, 우린 갑시다.》
길철은 전우들의 각별한 관심과 지성에 그만 코마루가 찡 저려났다.
그는 정시명에게는 아무말도 못하고 최남수앞으로 와서 《최선생님, 이거 또 큰 페를 끼칩니다.》하고 코 멘 소리를 냈다.
《페는 무슨 페요. 부회장선생, 그러지 마시오. 벌써 내가 해야 할 일인데
한주일전에 정선생님 말씀듣고야 아차, 했지요.
어서 들어가보시우. 그런데 회장선생님, 사모님이 저녁상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래요. 허허… 혜숙의 집에서 햇저녁을 얻어먹고 간다!…》
저녁이 큰 두리반에 차려지자 례영이 술잔을 놓았다.
길철이 술병을 넘겨받으며 민순임에게도 술잔을 놓으라고 일렀다.
《사모님, 그동안 우리들때문에 여러모로 고생많으셨습니다.》
《아유, 무슨 고생이라 하겠나요. 전 정말이지 이런게 고생이라면 따라다니며 다 맡아안고싶어요. 얼마나 기쁘시겠나요. 혜숙이도 데려오고 처남도 찾고… 그 마음씨 고운게 어데 가서 속썩이고있는지…》
민순임이 길철이 내미는 술잔을 받아들고 목이 메여 말끝을 흐리며 옷고름으로 눈굽을 닦았다.
《예, 정말 전…정말 전 사람이 바랄수 있는 모든걸 성취했습니다. 전 사실 광복후 인생의 좌절을 맛보기 시작하여 여러가지로 쓴맛을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통일애국위업이 저에게 숱한 복을 안겨주었습니다. 저에게는 혈붙이이상으로 고마운 전우들을 위하여, 우리의 〈흥국상회〉를 위하여 잔을 들렵니다.》
그들은 길철을 따라 잔을 높이 들었다.
잔을 쳐든 다섯명의 전우들은 이 순간 권혜숙을 다같이 그려보며 기쁨과 행복으로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정시명도 혜숙에 대한 생각이 또다시 가슴깊이에 애모쁘게 갈마들었다.
혜숙이! 혜숙이!… 너는 우리의 승인이 없이 초소를 떠나는 갔지만 너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투쟁과 생활속에 아름다운 자취를 지우지 않고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살아오고있다.
너는 우리 《흥국상회》의 사랑이고 자랑이다.
너는 인간의 깨끗함이 순결하게 고여있는 아침이슬과도 같은것이고 정의에 살려는 지향이 뜨거운 불덩이인것으로 하여 더욱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사람들은 누구나 너의 이름을 자랑으로 부르며 너를 그리워하고 너의 불행앞에 눈물을 흘리며 네가 누리게 될 기쁨에 이처럼 행복에 겨워한다.
아, 이것이 애국자들의 세계, 혁명가들의 세계, 인간들의 세계, 사랑과 믿음으로 엮어진 우리의 세계가 아닌가.…
그의 눈앞에 권영호가 혜숙이를 앞세우고 벌쭉거리며 이 집 마당에 들어서는 그 행복한 광경이 선하였다.
그때면 저 길철의 얼굴이 또 어떻게 될가. 벙긋 웃고 말테지. 아니 우쭐해서 맞아줄수도 있지. 아니면 한번 되게 성을 내는척 할테지.… 아니 저 사람은 사람들앞에서 제 마음속을 구태여 가리우느라고 하지 않을것이다. 어데갔다 이제야 들어서느냐고, 사람들이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왔는지 아느냐고 기쁨에 젖어, 행복에 젖어 젊은 색시를 포옹해줄것이다. 례영이는 또 어떻게 맞아 줄가. 좋아서, 기뻐서 혜숙의 가슴을 치며 또 울거야. 례영이… 너도 이제는 마련을 봐야 할가 보다.
례영이도 리창순에게 권총까지 내밀었으니 서울에 더 머물러있자면 그도 지하로 들어가야 한다.
리창순…네놈이 너절한 개로 굴러떨어지다니?… 백번 변하는게 인간이라 하거늘 사람들의 운명이란 참말로 천갈래, 만갈래다.
리창순이 개로 굴러떨어졌는데 어제날 칼을 박으려하던 문진국은 은인이 되여 찾아오고 어제날의 친미반동인 권영호는 애국자로 우뚝 솟아오르고… 이것도 력사의 변증법인가.… 그래, 사회도 자연도 인간도 달라진다. 꼭 좋게만 달라지지는 않는다.
리창순이… 그는 입속으로 되뇌여본다. 정시명이 그 소리 듣고 례영이를 겨우 달래였다. 아직은 그 말을 입밖에 내지 말라고,입밖에 내면 《흥국상회》가 그야말로 대문에 빗장을 치겠는데 지금 일이 힘들고 중대한 고비에 이른 때라 그때문에 소동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된다고 엄하게 눌러놓았다.
리창순이라… 정시명은 생각이 무겁게 가지를 쳐가자 혜숙이 살집에 와서 청승맞게 당치않은 생각을 한다고 자신을 힐책하며 또다시 혜숙의 미끈한 모습을 눈앞에 그려놓고 즐거운 기분으로 바꾸었다.
례영이 부어주고 길철이 부어주고 최남수와 안해까지 부어주는 잔들을 다 받아들고 달게 마시였다.
잔마다에 혜숙이네 사랑에 대한 깨끗한 축복이 담기고 그리움의 정이 넘쳤다.
길철이는 속깊이 그냥 흐느끼고있었다. 목젖까지 차오른 통곡을 누르느라고 그냥 술을 마시고 붓고 하였다.
사람들은 울고웃으며 행복한 시간에 묻혀 하현달이 기우는것도 몰랐다.
그날로부터 열흘후 권영호가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바람으로 남도의 유격전구에 대한 실태보고를 《국회》에 제출하고 정시명을 찾아왔다.
열흘사이에 산속에서 지쳐서 그런지 눈빛이 꺼져들고 볼이 퍽 처져보였다.
그런데 정시명의 앞에 나서자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입술을 실룩거리며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거동이 이상스러웠으나 정시명은 권혜숙은 어데 와있느냐고 묻기부터 하였다.
그러자 권영호는 대답이 없이 고개를 푹 떨구더니 품속에서 한권의 자그마한 공책을 꺼내 내밀었다.
《혜숙이 어데 있느냐고 묻지 않소. 이건 뭐라는거요?》
정시명이 무엇인가 흉벽을 쿵 때리는 섬찍한 생각에 어성을 높였다.
그러자 권영호는 목이 쉰 소리로 《혜숙이는… 내 동생은…》하고 안타깝게 대답을 갑자르다가 《그 책을 보시면 다…》하고는 눈물부터 왈칵 쏟으며 아래방으로 비틀거리며 내려갔다.
정시명은 순간 눈앞이 아찔해왔다. 커다란 쇠뭉치에 뒤통수를 얻어맞은것처럼 온통 감각이 마비되고 숨이 차올랐다.
《그러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진것 같다. 그가 뱉아놓은 소리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보라는것이 명백해지자 그는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였다.
그는 아래입술을 꽉 감쳐물고 책의 표지에 정하게 써있는 눈에 익은 혜숙의 글을 초점잃은 눈으로 더듬었다. 얼굴생김새처럼 시원스럽고 보기좋게 옆으로 갈겨쓴 글발들이 살아서 움직이는것 같았다.
《너를 보는 나의 눈》
이상야릇한 표제를 단 일기장이였다. 너란 누구며 나의 눈이란 무엇인가?
정시명은 꽉 뭉쳐든 안개속에서 헤매듯 글줄을 자주 삭갈리면서 가까스로 페지를 넘기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