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영원한 사랑의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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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호는 사흘이 지나서야 의식을 회복하였다.

돌멩이가 매달린듯 무거운 눈덕을 올리려고 애쓰는데 옆에서 녀인의 정찬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들어요?… 미음을 할가?…》

눈앞이 운무에 싸인듯 희붐하더니 운무속에 달덩이가 미끄러져나오듯 녀인의 둥글고 어질게 생긴 얼굴이 안겨왔다.

《오마닌 누구십니까?》

《혜숙이가 엄마라고 부르며 함께 살던 녀자라오. 자네도 그렇게 불러주게나.》

《제가 여기 온지 며칠이 되였습니까?》

《꼭 사흘이 됐네. 령감과 같이 문안왔다가 난 여기에 떨어졌지.》

녀인이 머리맡에 앉으며 손목을 꼭 잡는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그런데 여기가 어딥니까?》

《경찰병원이라네.》

《경찰병원?…》

권영호는 다시 눈덕을 내리였다.

녀인이 입술에 숟가락을 갖다대며 다심하게 권했다.

《아-하게. 꿀물일세. 좀 속을 채워야 기운을 내지.》

권영호는 녀인이 시키는대로 입술을 아-하고 벌렸다. 달달한 꿀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권영호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내가 왜 여기 와서 누워있을가?… 그래, 그래… 내가 수면제를 먹었지… 죽자고 했댔는데… 그런데 살아났다는거지…)

권영호는 녀인이 조금씩 떠주는 꿀물을 넘기며 속으로 중얼거리였다.

사흘전에 있었던 일들이 더듬어졌다. 자신에 대한 끝없는 환멸과 수치, 고독과 절망으로 몸부림치던 일들이 악몽처럼 줄레줄레 이어졌다.

일은 경무대비서실의 호출을 받은 그 야밤삼경으로부터 시작되였다.

경무대에서 리승만부처의 바래움까지 받으며 현관문을 나설 때 벌써 권영호는 반넋이 나가있었다.

경무대비서실에서 안내하는 승용차에 오른 권영호는 전용숙소에 이르자 내릴념을 하지 않고 불이 꺼져있는 자기의 침실을 올려다보았다.

《다 왔습니다.》 운전사가 일깨워주었다.

《혜화동으로!》 권영호는 명령조로 말했다.

《혜화동으로요? 떠날 때 이야기할거지. 이거야 끝에서 끝으로 오지 않았나요.》

운전사는 게두덜거렸으나 권영호는 기척을 하지 않고 그냥 틀고앉았다.

운전사가 쉬이 움직이려 하지 않자 권영호는 부아가 나서 꽥 소리쳤다.

《너도 경무대의 밥을 먹는다는거냐. 내가 누군지 알아?》

그제야 운전사는 마지 못하여 또 뭐라고 두덜거리며 차를 돌렸다.

혜화동에는 처가가 있다. 처가에는 그래도 말상대가 돼줄 경찰병원에 다니는 처남이 있다.

왜정말기에 일본에서 의학대학을 마친 처남은 서울일정에서 외과의로 명성을 날리고있었다. 그는 원래 자그마한 개인병원을 차려놓고있었는데 치안국장이던 장택상이 왼다리신경마비로 한번 치료를 받고 나서 그를 억지다짐으로 경찰병원에 입직시켜놓았다.

권영호는 장모가 나라 한끝에 서울서 곱게 자란 딸을 보냈다고 크게 재세를 해서 처가에는 발길이 떴다.

그러나 이날 저녁에는 앞뒤로 꽉 막힌 답답하기 그지없는 속을 그 누구에게서라도 위로를 받고싶어졌다.

그래 권영호는 야밤에 뛰여들어 눈이 휘둥그래져서 대문을 열어주는 처남에게 《술 한잔 얻어먹고싶어 왔소.》하고 침중하게 말하며 들어섰다.

장모가 깨여나 어째서 서울길에는 색시를 달구오지 않느냐고 칭얼거리였다. 처남댁은 닭모가지를 비트느라고 닭장에 손을 들이밀었다가 여러놈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꼬꼬댁소리에 진저리를 치며 부엌에 뛰여들었다.

처남까지 나서서 닭잡고 술상을 차렸다.

그러느라니 새벽녘이 다 되였다.

처남, 매부는 술상에 마주 앉고 장모는 벽에 비스듬히 기댄채 야밤삼경에 추한 꼴로 뛰여든 사위를 곱지 않게 쏘아보고있었다.

권영호는 가깝지만 어렵게 상종해야 할 처가집 사람들의 놀라고 당황하고 조소어린 눈길이 지켜보는 속에서 묵묵히 술잔을 비웠다.

《어찌된 일이요, 매부?》

처남은 모처럼 찾아온 매부의 몰골이 너무도 처량해서 그의 어깨를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 또 한잔… 아주머닌 가서 새벽잠에 드시지요.》

권영호는 술상옆에 무릎을 세우고 곱게 앉아 술주전자를 드는 처남댁을 보며 권하였다.

《이 사람아, 이젠 술 그만 들고 잠자리에 들게. 죽은둥산둥 얼씬하지 않다가 이 무슨 꼴로 나타났담.》

아직도 잠에 취해서 사위를 멀거니 보고있던 장모가 또 옆에서 나무랬다.

《장모님도 가서 쉬시구요. 난 좀 처남께 할 소리가 있어요. 제 지금 리승만을 만나고오는 길입니다.》

《대통령을?… 그럼 또 한자리 준다던가?》

장모가 귀가 벌쭉해서 술상에 무릎걸음으로 나앉아 사위의 무릎을 쳤다.

《허허… 장모님은 그저 한자리지요.》

권영호가 만사를 초탈한 사람처럼 창자가 텅빈듯한 웃음을 크게 터뜨리는데 처남이 《어머님은 괜한 말씀. 매부가 이 나이에 〈국회〉분과 위원장이면 더 바라볼게 뭘 또 있겠다구 또 한자리요?》하고 핀잔하며 망신스러운듯 어서 나가 쉬라고 녀인들을 방에서 몰아냈다.

매부가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말거리를 안고온것 같았다.

《무슨 일때문이였소. 무슨 일이 있어서 이 야밤중에 대통령이 친히 불렀다는거요?》

《흥… 이 권영호 세상에 나서 심지바른일 좀 하니 대통령이 눈에 쑤악스러운거지… 거 처남 한마디 해주오. 이 매부가 박쥐구실을 해가지고 한자리씩 벼슬자리 껑충껑충 뛰 오르는걸 보고싶소, 아니면 세상 막바지에 딩굴더라도 사람탈 쓴 값을 치르며 사는 꼴 보고싶소?》

《허허, 거 참… 오늘은 웬 일이시오. 거 뭐 사람답게 사는거지. 이루 더 말할나위 있소. 벼슬자리 높아지는것도 사람사는 재미니 과히 싫지 않겠구… 허허…》

《그러니 둘 다 놓기는 아쉽다는거겠소… 허허… 둘중에 하날 내놓아야 한다면 어쩌겠소?》

《에, 매부 인젠 좀 쉬오. 맑은 정신에 이야기를 해봅시다. 뭐가 뭔지 알겠나. 대통령이 무슨 말했기에 이렇게 실성이 됐소. 단단히 염통에 병들었군. 그령감 로망난 소리 듣고와서 이렇게 실성될거야 있소.》

처남이 권영호가 건주정을 부리는것 같아 엄하게 타일렀다.

《실성이 됐지요. 암, 실성이 되구 말구. 이 금빼지값을 제대로 물자면 실성이 되지 않을수가 없지.… 에라, 잠이나 잡시다.  나 잠이나 푹 자게 수면제나 있으면 좀 주시오.》

《그렇게 하시오.》

처남이 매부의 주정에서 밤샘을 하게 될가봐 걱정스러웠는데 인차 풀려나는게 다행스러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앉음뱅이 책상서랍을 들춰서 자그마한 유리병에서 알약 몇알을 꺼내주며 물까지 한고뿌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자기 처가 금방 펴주고 나간 잠자리에 억지로 눕혀주고 《자, 어서 한잠 푹 자오. 내 오늘 병원에서 일찍 들어올터이니 좀 얘기합시다.》하고는 불을 꺼주고 방에서 나갔다.

처남까지 나가자 불시에 온몸에 끝없는 고독과 비애가 휩쓸어들었다.

그는 눈을 붙이자고 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정신은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수십가지의 생각이 쉬임없이 떠올랐다가는 지워지고 또 생겨나 머리를 마구 쑤시였다. 방금전에 만나봤던 리승만의 상통이 두억시니처럼 무섭게 다가들기도 하였다. 그놈은 흉물스러운 괴물의 웃음같은것을 짓고 두손가락을 갈퀴처럼 우그러가지고 눈알이라도 후벼낼듯 덤벼든다.

권영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음-》 무거운 신음소리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등골로 차디찬 땀이 쫙 내돋아 굴러내렸다. 온몸이 선뜩선뜩해졌다.

리승만이 느글느글하게 짖어대던 말이 한마디 두마디 다시 귀전을 세괃게 때리였다. 가슴을 에이는듯 한 고통과 애수와 설음이 그냥 쓸어들었다. 무기력하고 나약한 자신에 대한 극도의 혐오로 가슴이 옥죄여들고 천길나락에 굴러떨어져 다시 헤여날 길 없는 함정에서 허우적거리는것만 같다.

《그래, 두길이다. 두길… 이건…》

김승원의 얼굴이 문득 다가든다. 그렇게도 엄하게 책망하던 그 사람이 또다시 리승만에게서 배신의 유혹과 협박을 당하고 이렇게 곤드레만드레 취해있는줄을 알고나 있을가.

길철의 모습이 떠오른다. 허리를 꽉 끌어안고 더운숨을 끼쳐주던 매부.

아, 내가 왜 그 사람 찾을 생각을 못하고 이리로 왔담.… 그 수염쟁이가 뭐라고 했던가?… 매부는 전선의 사령관이 되는 사람이요, 사람으로 보면 서울장안에 짝이 없다고 했지. 확실히 매부의 일거일동에는 무게가 실리고 뜻이 서있고 기품이 서려있다.

혜숙아,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네가 어서 두길중 하나를 선택해주려마.

내가 네앞에 지은 죄를 깨끗이 씻자고 했는데 또 이런 함정에 빠지는구나… 혜숙의 얼굴이 떠오르니 자기도 모르게 두볼로 눈물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목놓아 통곡이라도 하고싶다. 답답하게 조이는 울적한 심기와 암담한 전도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통곡으로 뿜어올리고 눈물로 좔좔 씻어내고싶다.

하지만 소리쳐 울만 한 용기도 힘도 없다.

어느 길이냐?

늙다리, 그것만은 옳게 말한것 같다. 한길은 미국을 업고 춤추는 길이다.

그놈들의 무녀가 되여 이방인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놈들이 뱉는 턱고물을 받아삼키며 놈들의 품에 기여들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벼슬길이다. 그 길은 혜숙이 규탄한것처럼 분명히 겨레에 도전해나서는 매국의 길이요, 혜숙이를 영영 잃고 마는 길이다. 다른 길은 혜숙이를 따라나서는 길, 생사기약이 없는 가파로운 험산준령 넘어야 하는 길이다. 려수와 제주도가 앞장선 길이요, 정의와 진리에 눈을 뜬 인간들이 나선 길이다.

벼슬길은 혜숙이를 잃는 길이요, 인간 권영호를 버리는 길이다. 험산준령길은 재산도 명예도 다 털어버리는 길이요, 부모처자도 잃는 길이다.

그 길에서 바랄수 있는것은 인간된 존엄과 깨끗한 량심과 이 나라 백성의 혼이다. 그 수염쟁이는 분명히 밝혀주었다.

《우리는 조선사람들이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정계에 들어선 사람으로 그 구실하는게 이렇게 어려운줄 그네들은 모를게다.

늙다리 리승만은 분명히 협박을 했다.

제놈 손짓 한번에 너의 집, 너의 재산, 네 부모의 명줄이 붙어있는 어장이 다 없어질것이라구.…

《애국자》라구?! 흥… 제놈 따라 《애국》을 하라고?… 세상을 웃기는 말을 그 두상태기 잘도 외워대지.… 네가 애국자라면 이 나라는 망해빠진 꼴이다.… 그러니 어쩐단 말인가?

당장 날이 밝으면 《국회》가 열린다. 《미군철거안》을 놓고 주먹을 들던지 《미군계속주둔안》에 옮겨앉던지 운명의 선택을 해야 한다.

(내가 왜 당초에 이 길에 나섰을가? 영어… 그놈의 영어가 인생을 망가뜨렸고나. 영어만 몰랐다 해도 양놈들과 어울리지 않았을것이고 정치라는 투전판같은 놀음에 껴들지도 않았을것이 아니냐. …에잇, 배라먹을!…)

왕청같은 생각에 권영호는 더럭 화를 냈다.

권영호는 쉴새없이 입속으로 웅얼웅얼거리다가 불을 켰다.

《콱 죽어버리면 씨원하겠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발을 으드득 갈며 이렇게 침통하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다른 사람의 일깨움처럼 들려 그 말을 되씹었다.

《콱 죽어버린다고?…》

그는 더 높은 소리로 숨막힐듯 한 절망속에 부르짖었다.

《콱 죽어버린다고…》

그는 몸을 으스스 떨었다. 죽는다는 그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가슴을 토막치는듯 한 공포와 애수가 쓸어들었다. 무시무시한 전률이 온몸을 죄이며 지나갔다.

정말 이젠 살아남을 아무런 리유도 없다. 살아남아야 그 누구에게도 반드시 후환을 끼치게 마련이다. 이쪽에 붙어버리면 저쪽에서 밀어낼것이고 저쪽에 붙으면 이쪽에서 덮쳐들것이다.

그래, 유일한 선택은 죽음이다.

어차피 량심앞에 죄많은 인생을 끝내버리면 혜숙이도 길철이도 내 마음을 알아줄것이다.

내가 죽어버리면 시끄러운 인물 하나가 시야에서 영영 꺼져버렸으니 리승만쪽에서도 더는 내라는 인간을 놓고 부모처자 건드리는 비루한 일은 하지 않을거다. 아니 그놈들이 나를 죽음에로 몰아가기 위하여 안팎으로 죄여드는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어야 할 리유는 더 커진다. 콱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에잇 세상살이 시끄럽다.

… …

생각이 예까지 가지쳐 가자 권영호는 책장앞으로 엉금엉금 무릎걸음하여 갔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책상빼랍을 당겼다.

그는 손더듬으로 아까 처남이 꺼내주던 수면제약통을 찾아 한웅큼 무작정 입에 쓸어넣었다. 그리고는 물 한모금 마신 다음 옷을 입은채 이불을 쓰고 반듯이 누웠다. 살아온 인생에 대한 극도의 허무와 환멸, 앞날에 대한 비관과 절망은 이미 사라졌다.

그는 만시름을 놓은듯 공허한 눈길로 천정의 한점을 올려다보다가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 …

달고도 따스한 꿀물이 한모금 또 한모금 입안을 적시고 목으로 흘러들었다.

권영호는 스르르 눈을 다시 떴다.

《어머니!》

《됐소, 좀 더 들자구. 그래야 기운을 차리지. 어서… 아-》

머리맡에서 울리는 인자한 목소리에 권영호는 가슴이 훈훈해져서 다시 눈을 감고 녀인이 시키는대로 입을 아-하고 벌리였다.

《우리 령감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고. 혜숙의 오빠가 이렇게 몸을 가누지 못하는걸 보시구 락심천만해서 돌아갔다우. 하루에도 몇번씩 소식을 물어오는데… 자, 한술만 더… 용쿠만… 자, 한술만 더…》민순임도 병상에 든 어린 자식을 달래이듯 이렇게 이야기하며 꿀물을 떠넣어주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원, 그런 인사 마시우. 혜숙이 내 옆에서 뱅글뱅글 돌면서 얼마나 정들었다구.》

《어머니는 어떻게 내 동생을 그리도 잘 아십니까?》

《원, 내가 혜숙일 어째서 모르겠소. 혜숙이 머리 얹어주게 한것도 사실은 나였다우. 그것때문에 권선생이 매우 불편해 하셨다는데 날 욕해주시유. 그렇지만 혜숙의 서방되는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라우. 우리 혜숙이 눈에 차는 남자가 아무렴 범상이야 하겠소.》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매부님 사람됨도 모르고 잡아먹을 생각까지 했으니 제 무슨 혜숙의 오래비고 그 사람더러 매부라 부르겠습니까.》

《됐시다. 너무 자기를 박대하지 마우. 우리 령감님 하시는 말씀이 그래도 권선생님이 근래에 와서 나라앞에 큰 짐을 지고 나섰다고 하더구만.》

《당치않은 말씀입니다. 제 박쥐라는 말까지 듣고있는 인간페물입니다.》

《자꾸 그러지 말라니깐…》

민순임이 그의 손목을 다정히 잡아주며 나무랬다.

《그런데 정말 어머니가 내 동생을 끼고계셨습니까?》

권영호는 생면부지의 녀인이 혜숙이와 깊은 연고가 있었다는게 아직도 아리숭해서 자기를 살뜰히 보살펴주는 녀인의 다심한 마음을 흐릴세라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래 민순임은 《호호…》하고 선한 웃음을 보이고는 혜숙일 만났던 일이며 혜숙이와 길철의 관계를 두고 오가던 곡절많은 사연들을 아는껏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정시명과 전우들이 당자들몰래 수를 써서 벼락결혼상을 차려주던 이야기며 례영이 동래에 가서 혜숙이를 만나보고온 후에 여러 사람들사이에 오고간 눈물겨운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아주었다.

민순임의 이야기가 깊어지자 권영호의 베개깃이 축축히 젖어들었다.

그는 민순임의 손을 더듬으며 아무 응대도 없이 울기만 하였다. 너무 울어 눈시울이 부석부석해올랐다.

민순임은 손수건으로 권영호의 눈지방을 자근자근 닦아주었다.

《이젠 그치시유. 사람이 제잘난 멋에 산다구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가 보우. 믿는게 똑똑하구 이끌어주는게 바르구 주변사람들도 좋아야 되는가 보오. 혜숙이 그 체네가 얼마나 대바르게 살아가우.》

《어머니, 어머님 말씀 참말 그른데 없습니다. 정말 마디마디 뜻이 있습니다. 어머닌 무슨 사업을 보십니까?》

《무슨 사업?…》 민순임이 그 소리에 펄쩍 뛰며 손을 내두르다가 《호호-》하고 소리내여 웃었다.

《그런 말씀 마오. 나야 촌녀자인데… 거저 나그네들의 밥시중이나 들지요. 무슨 사업이라니… 호호…》

권영호가 가식없는 녀인의 순박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히죽이 웃었다.

《정향선생님을 뵐수 있을가요?》

《그렇찮구요. 그 령감이 이제 꼭 찾아올거네.… 이제 다시는 모진 생각 마시우.》

《어머니.》

《죽을 생각까지 한다면야 겁날일이 뭐 있겠다구… 그 젊은 나이에 할 일이 오죽 많다구 명을 끊겠소. 칠순넘은 우리 시부도 나라가 합쳐지는걸 보구야 눈감겠노라 일손놓지 않고 계시는데 다시는 모진 생각 마우.》

《어머니,… 전 오늘중으로 나가야겠습니다.》 하며 권영호는 침대모서리를 잡고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더는 침대에 누워있을수 없었다. 이 녀인을 따라가면 참사람들만 만나게 될것 같고 그러면 새로운 인생의 대문이 활짝 열릴것만 같았다.

민순임이 《어서 자리에 누워요. 처남되는이가 오면 야단을 부릴거웨다.》하고 그의 어깨를 눌러 다시 자리에 눕혔다.

《우리 처남말입니까?》

민순임은 그 처남의 량해를 얻어 벌써 련 사흘째 그의 머리맡에서 병구완을 해왔다.

민순임은 처남으로부터 매부의 음독자살건을 어데다 이야기하지 말며 그 누구의 면회도 불허하며 완전히 회복되기전에는 병원에서 내보낼수 없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권영호의 병구완을 맡았다.

이튿날 저녁무렵에 권영호는 끝내 처남의 만류를 무릅쓰고 퇴원하였다.

권영호는 처남이 병원차를 불러대자 한사코 이 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민순임은 권영호를 달고 손녀와 함께 홀로 살아가는 로인의 집으로 갔다.

로인은 그들을 반겨맞아 주었다.

로인은 독풀이에 쓰라고 웅담을 구해온다, 산청을 구해온다, 잉어를 낚아온다 하면서 성의를 다했다.

민순임과 로인의 지극한 간병으로 권영호는 이내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보다도 일어나서 어서 바삐 의로운 길에 나서야 한다는, 병상에서 마음속에 골백번 새겨넣은 인생전환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그 길에서 죽을 각오로 달려가리라는 비상한 각오가 그의 건강을 빠르게 원상으로 돌아서게 했던것이다.

며칠후 정시명이 왔다.

정시명은 그와 이틀동안이나 함께 지냈다. 론쟁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고 삐뚤어진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준절하게 꾸짖기도 하였다.

《리승만이 그 말만은 바르게 말했소. 우리 조선의 정치인들에게는 길은 두갈래밖에 없소. 매국노가 되는가, 애국자가 되는가,김일성장군님을 따라서는가, 리승만을 따라가는가, 정의인이 되는가, 부정의한 인간이 되는가, 력사에 애국지사로 남는가, 죄인으로 전해지는가.…

통일된 조국은 반드시 올게요. 래일이던지 모레던지 십년후던지 설사 백년후던지 반드시 오고야 말것이요. 그러니 통일된 조국에서 살아갈 우리의 후손들이 자기의 선조들을 부끄럽지 않게 추억할수 있도록 해야 하오. 분렬시대에 사는 정치인으로서 통일조국건설에 피한방울 들이지 않는다면 그런 자들이야말로 민족을 등진 역적이요, 후손만대 저주해갈 죄인들이요.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나를 만나주신 자리에서 통일은 애국이고 분렬은 매국이라 하시였소.

난 권군이 이 나라의 애국자들이 걷는 길에 뜻을 합쳐주기를 진심으로 바라오. 이것이 혜숙동무의 간곡한 소원이기도 하오. 혜숙인 권군이 이 길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기전에는 길철선생을 받아들이지 못할거요. 어떻게 이루어진 사랑인가 말이요. 그 사람들이 꿈마다 오작교를 세워놓고 만나고 헤여지고 하는걸 생각해보구려. 난 이런 생각할 때마다 더구나 권군의 일거일동을 안타까이 지켜왔소.》

정시명은 이틀간에 걸치는 긴 이야기들을 이것으로 마감지었다.

권영호는 혜숙의 이야기만 나오면 그 큰 눈에 눈물이 자오록이 차들군 하였다.

며칠후 《국회》회관 소회의실에서는 권영호의 기자회견이 정계와 언론계의 비상한 관심속에 진행되였다.

《국회》의 징계분과위원장이 《량심선언》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시안의 여러 방송업체들과 신문사의 기자들이 달려와 초만원을 이루었다. 《워싱톤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의 서울특파원과 일본의 《지지통신사》를 비롯한 외국의 통신, 보도기관의 특파원들도 여러명 참가하였다.

권영호가 자기 인생총화와 새로운 정치생활의 출발선언을 사회에 공개하도록 권고한것은 정시명이였다. 권영호가 자기의 의지를 사회에 공개시켜 사회적각광을 받도록 하는것은 차후 그의 신변안전상 견지에서나 정계에 주는 영향에 있어서나 썩 효과가 큰것이라고 타산했던것이다.

사회적무게가 공인될수록 반동들도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워할것이라는 소리에 권영호도 쾌히 나섰다.

그러지 않아도 권영호는 만인앞에서 걸어온 어지러운 길을 시원스럽게 토해놓고 용서를 받고 새로운 길에 나서게 된다는것을 세상에 대고 소리치고싶었던지라 비장한 심정으로 《량심선언》을 작성하였다.

이윽고 카메라의 불빛이 번쩍번쩍거리는 가운데 권영호가 회의실에 나타나 굵고 청청한 목청으로 《량심선언》을 장중하게 발표하였다.

《본인은 부산 을구에서 선거되여 제헌의원으로, 〈국회〉의 징계분과위원장책무를 담당한 〈대한국민당〉소속 권영호입니다. 본인 나이 올해 서른셋으로서 부친은 동래에서 김양식장을 관리하면서 〈한국독립당〉부산후원회 책임자로 있으며 모친은 〈대한녀자국민당〉 당원입니다. 본인은 국토가 갈라지고 외세가 아직도 주인노릇하고있으며 민생고가 최악을 이룬 현 시국에서 옳바른 정치향방에 대한 나름으로의 암중모색과 정치인으로서의 수난을 당하면서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고 국가와 민족앞에 지닌 의무를 투철히 리행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첫째, 광복후 정치권에 본인이 몸담아온것은 본인의 졸속한 사대굴종주의적정치의식과 리기적이며 미거한 자아중심의 생존관의 반영으로 일관된 비국민적이며 비애국적인것이라고 인정하면서 국민앞에 머리숙여 심심한 반성과 속죄를 드립니다.

둘째, 본인이 소속한 〈대한국민당〉은 당의 운영방식과 체질이 본인의 정치활동방식에 도저히 량립되지 않으므로 오늘 이 시각을 기점으로 하여 탈당을 선언하며 이제부터 한 자유인으로서 정치권에 참여하리라는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셋째, 본인은 국토통일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라는 력사의식과 이 시대 정치가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금후 국토통일사업에 매진할것이라는것을 확언합니다.

넷째, 광복후 성숙된 국민의 정치의식은 외세의 간섭을 더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인식으로부터 외세를 몰아내고 국가와 정치권에 대한 외세의 간섭을 척결하여 자주적이고 자결적인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투쟁에 동참할것이라는것을 결의합니다.

다섯째, 본인은 현시기 사회일각에 대두하고있는 정치권에서 1인독재가 낳는 위험천만한 후과에 대한 론조들에 명백한 공감과 련대의식을 가지고 참말로 민주주의적이며 국민적인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운동들에 보조를 같이할것을 선언합니다. 이상입니다.》

권영호의 《비서》로 새로 임명된 길철이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다문 한달이라도 함께 지내자는 권영호의 간절한 요구에 의하여 길철이가 《국회》사무처에 정식 등록을 하고 그의 비서로 되였다.

정시명은 길철을 권영호에게 매여놓을수는 없었지만 당분간 권영호를 가까이에서 돌봐주며 《국회》투쟁에 대한 지도력량도 보강해 줄겸 권영호에게 붙여주었다.

《서울신문》의 녀기자로 이 자리에 참석한 윤미향이 일어섰다.

그는 이날 길철에게서 자기 몫을 맡아가지고있었다.

윤미향은 이미 권영호를 정시명과 함께 취재하러왔던바가 있어서 권영호에게도 반가운 존재였다.

《권선생의 량심선언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축하와 성원을 보냅니다. 그런데 오늘 량심선언을 들으면서 공감되는바가 많습니다만 권선생의 정치적전도와 신변에 대한 모종의 위험에 대하여 생각되는바가 있습니다. 권선생은 이에 대한 각오가 돼있는가요?》

이것은 《량심선언》발표로 인한 적들의 있을수 있는 탄압기도를 미리 사회앞에 경고해놓음으로써 도발자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봉쇄해버리려는 타산된 책략이였다.

권영호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대답을 시원스럽게 토해놓았다.

《그러지 않아도 일부 권력층에서는 이미 행한 본인의 다소 진보한 작은 걸음마저도 보복적인 압력을 해왔으며 보다 큰 탈선에 대해서는 보다 큰 보복을 가할것이라는것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난 무서워하지 않을것이며 선택한 길에서 한치도 드티는 일이 없을것입니다. 뜻높은 한 녀인이 본인에게 귀띔해준게 있습니다. 죽을 생각까지 한다면야 겁날게 뭣인가… 그렇습니다, 죽음을 각오한자 겁날게 뭣이 있겠습니까. 허허…》

권영호는 오른주먹을 불끈 들고 소회의실이 떠나갈듯 장쾌하게 웃었다.

그러자 청중속에서는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것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되찾은 한 젊은 정치인의 어지러운 과거에 대한 단죄와 래일에 대한 밝고 희망찬 소신에 대한 지성세계의 례찬이고 격려였다. 그 어떤 뢰성벽력에도 다시는 드놀지 않을 기상이 력력한 그 름름한 모습을 렌즈에 담느라고 여기저기서 샤타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사진기불빛들이 번쩍거렸다.

박수소리가 잦아들자 《우리 신문》국민생활부의 기자가 일어났다.

《권의원, 제가 알건대는 선생의 누이동생이 광복전에 좌익권에서 활동했다고 알고있습니다. 선생과 누이동생의 관계는 어떠하신지요? 실례되는 물음이지만 앞으로의 선생의 활동을 규정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관심이 됩니다.》

《예, 나와 누이동생은 광복전에도 광복후에도 길이 달랐습니다. 누이동생의 소식을 모르고있지만 그 애는 뜻을 안고 뜻에 사는 이 나라의 훌륭한 딸로 살고있으리라는것을 믿어마지 않습니다.》

또다시 박수가 터졌다.

이건 정시명이 특별히 언급되도록 부탁한 이야기였다.

정시명은 재생의 언덕에 우뚝 오른 권영호가 지금 이 시각에도 산발을 헤치고있을 누이를 향해 자기의 밝은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고싶었던것이였다.

그래서 권혜숙의 깊이 패여든 마음속의 상처가 하루속히 아물고 그 밝고 명랑한 웃음이 그 시원스럽고 복스러운 얼굴에 가득해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희망했다.

정시명이 예견했던대로 권영호의 기자회견은 돌풍을 일으켰다. 주먹을 불끈 추켜든 권영호의 사진을 중심으로 실린 《량심선언》이 서울시안의 신문들에 일제히 실리자 권영호는 일약 영웅으로 되였다.

여기저기서 권영호의 의지를 지지하고 고무하는 편지와 전화가 날아들었다.

그를 선거한 부산 을구의 주민들은 정식으로 위문단을 무어가지고와서 그를 축하하였다.

김구도 그를 귀빈으로 정식으로 경교장에 초대하여 《기대하던바 그대로였소.》라고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러나 불길한 소식도 들려왔다.

동래에 있는 그의 2층집이 적산품으로 몰수당하고 권씨가 탈세혐의로 구류되였다는것이였다. 그리고 권씨의 김양식장은 차압딱지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권영호는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올것이 왔다는 배심이였다.

정시명은 최남수에게 사태를 설명해주어 동래에로 내려보냈다.

최남수는 자기의 재산을 날려 물지 못한 세금을 다 물어주고 권씨부터 구류장에서 풀어냈다. 그리고 몰수된 집옆에 한달안으로 꼭 같은 규모의 집을 짓도록 건설청부업자들과 교섭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최남수가 그들에게 지불한 선불금은 되돌아왔다.

부산의 선거자들이 자기네 의원에게 가하는 권력자들의 도발을 규탄하면서 우리 남도사람들을 뭘로 보냐며 승벽이 나서 성금을 모아 권영호의 집 건설비를 마련했던것이다.

《량심선언》을 둘러싼 움직임이 어데라없이 복잡하면서도 날카로운 양상을 띠게 되자 서울에서는 아직 감히 권영호를 걸고들지 못하고있었다.

어느 날 정시명은 길철을 조용히 만났다.

그는 권영호의 기자회견내용이 실린 《서울신문》을 내밀며 《아무래도 혜숙동물 데리러가야 할것 같소. 길철동무가 이 신문을 가지고 리점분빨찌산에 직접 갔다오오.》하고 말했다.

길철이 그 소릴 듣자 무슨 타산이 섰는지 선선히 응해나섰다.

《갔다와야지요.》

길철이 딴 소리를 꺼낼듯 싶어 걱정이였는데 선뜻 받아주니 다행이였다.

사실 길철은 이 문제를 가지고 권영호의 심장의 문을 다시 두드려주자고 결심하였던것이다.

다음날 길철이 다시 왔는데 권영호가 직접 가겠다고 나섰다는것이다. 사회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 어떻게 빨찌산부대를 찾아갈수 있느냐고 하니 권영호가 유격전구에 대한 《국회》의원조사단을 무을 생각을 가지고있다고 대답하였다.

정시명은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도리질했지만 깊이 생각해보니 그럴듯 한 발기라고 생각되였다. 지금 어용매문가들이 총동원되여 제주도와 려수항쟁투사들에 대한 정신도덕적공격을 방송과 지면을 통하여 악랄하게 감행하고있다. 그자들은 폭동군을 빨갱이비적떼라고 모독하면서 항쟁의 력사적의의를 말살하고 항쟁의 애국적성격을 비하하려고 온갖 못된 수작질을 다하고있다.

이러한 때 가능성만 있다면 《국회》조사단이 유격전구를 돌아보고 실태를 세상에 공개한다면 그것도 유격전쟁에 대한 커다란 정신적지원으로 될것이다.

《훌륭한 발기요. 길철동무가 조사단이 합법적으로 무어지고 파견될수 있도록 잘 끌어주오. 문제는 조사단의 조사자료를 통보해 줄 대상과 그 방법이요. 내외에 널리 알리도록 여론전도 잘 준비해보오. 그래도 혜숙이한테는 길철선생이 빨리 갔다오는게 좋지 않을가.》

《뭐 이제야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십년세월을 기다려왔는데 한두달 기다리지 못하겠습니까.》

《젠장 셈평좋은 소리만 하는군. 남은 속이 바글바글 끓는데… 좋소, 생각대로 하오. 처남을 잘 준비시키오. 〈국회〉의장과도 사업해보는것이 어떨가?》

《신익희말입니까?》

《그도 옛날에는 상해 〈림정〉에서 한몫하던 사람이 아니요. 좋기는 조사단파견을 〈국회〉안건으로 통과시켰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당당하게 소리치며 유격전구를 돌아볼수 있을게 아닌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승원선생과도 좀 토론하겠습니다.》

권영호의 《량심선언》으로 하여 《동향회》사업도 크게 전진하였다. 권영호의 눈치를 살피고있던 열두명의 《동향회》회원들이 정식으로 《국민당》과 《한민당》에서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돌아섰다. 《미군계속주둔안》에 이름을 올렸던 회원들이 황철산을 찾아와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미군철거안》에 이름을 옮겨놓았다.

정시명은 이번 회기에는 다시 《미군철거안》을 상정시키지 않도록 하였다.

이미 주둔안이 통과된 조건에서 실효성이 없는데다가 려수항쟁후 적지 않은 회원들이 위축을 받고있었기때문이였다.

정시명은 당분간 회원들을 보다 조직화하고 정치적으로 결속시키기 위한 사업에 힘을 넣는것이 좋을듯 싶었다.

이에 대하여서는 《흥국상회》의 다른 일군들도 지지해나섰다.

정시명은 김구에게도 회원들을 자주 만나달라고 부탁하였다.

김구는 자기 당의 여러 의원들을 《미군철거안》발기인으로 참가시키고 여러차례 젊은 의원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함께 하면서 로고를 치하하고 성공을 축복해주었다.

설날에는 특기할만 한 일이 있었다.

이날 김구는 《동향회》회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축배를 들었는데 그 축배에《김일성장군님의 옥체건강을 축수하여》라는 의미를 담은것이였다.

뒤날 김구는 이 일을 들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난 좀 아슬아슬한 생각도 들었지요. 아, 글쎄 어느 한 녀석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분위기가 어떻게 되고 그걸 제의한 이 백범은 뭘로 되겠습니까. 헌데 참, 모두가 벌떡벌떡 일어나 잔을 높이 들더군. 얼마나 기분이 좋든지 난 눈물이 다 찔끔 나더군. 허허… 사실 반동이라면 첫번째 반동이라 봐야 할 〈국회〉의원들이 우리 장군님을 위해 축잔을 올렸거던.…정선생의 수고가 참 컸쉐다.》

김구는 자못 흥분해마지 않아 희색이 넘쳐 껄껄 웃었다.

정시명은 《동향회》가 자기 활동을 신축성있게 벌리면서 때로는 다른 정당들에 대한 전술적인 지원과 협동작전도 능란하게 벌려나가도록 하였다.

이해 말에 무쵸는 리범석과 김성수를 내세워 내각제개헌문제를 계속 내밀도록 부추겼다.

그러나 리승만이 이를 사전에 내탐하고 맥아더에게 긴급통보함으로써 무쵸의 계략은 이내 부서지고 말았다.

통치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개싸움은 해를 넘기면서 계속 이어져갔다.

청년단체들의 통합을 놓고 버그러졌던 리승만과 리범석일파간의 모순과 대립은 내각제개헌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첨예화되기 시작하였다.

리승만은 리범석의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하자 려수항쟁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내놓든지 국방장관직을 내놓든지 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리범석은 지지세력을 묶어 리승만에게 더 강하게 반발해나섰다.

황철산은 《동향회》대표단을 무어 가지고 리승만의 권력집중을 분쇄하기 위한 운동에서 리범석과 김성수를 지지할데 대한 립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

윤치영, 조봉암을 비롯한 여러명의 장관들도 리승만에게 반기를 들고 내각제개헌을 지지하였다.

리범석이 들고나서고 《국회》까지 덩달아 움씰거리자 리승만일파는 밀리기 시작하였다.

개헌문제와 정부의 개각을 둘러싼 싸움은 국무회의와 《국회》의 공식적인 무대에까지 상정되였다.

여차직하면 리승만이 너부러지게 되였을 때 맥아더가 개입하고 트루맨의 특명을 받은 미중앙정보국장까지 개입되여 개헌운동이 당분간 보류되기는 했으나 장관직 재분배를 위한 싸움이 계속되였다.

《동향회》는 놈들의 치렬한 정치적란무속에서 자기 할바를 착실히 해나갔다. 끝없이 벌어지는 각설이무리들의 시기와 질투와 패싸움에 환멸을 느낀 의원들이 신선미를 느낄수 있는 《동향회》를 계속 찾아들었다. 《동향회》의 력량은 급속히 확대되여 73명이라는 《국회》안의 가장 큰 력량으로 되였다.

그들은 끝내 《한민당》과 《족청》계의 지원을 받아 유격전구에 대한 시찰단파견결의안도 통과시키고야 말았다.

리범석이나 김성수는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73명이라는 강력한 동맹군을 잃지 않기 위하여 응해나섰던것이다.

남도의 유격전구들에 대한 시찰단단장으로는 아직도 《국회》의 분과위원장 공식직무를 차지하고있는 권영호가 정식으로 임명되였다.

권영호는 출발에 앞서 정시명을 찾아왔다.

그는 이날 정시명과 김승원앞에서 정식 《흥국상회》한 성원으로 가입하는 선서를 하였다. 통일애국의 뜻을 필생의 신조로 삼고 조국과 겨레앞에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다 바치겠다고 서약하는 그의 굵은 음성은 흥분과 격정으로 떨렸다.

정시명은 어제날까지 미국놈들을 등에 업고 일신의 부귀와 공명을 얻고저 천방지축으로 뛰여다니던 한 인간이 조국의 참된 아들이 되고저 목청을 돋구어 언약을 다지는 비장한 모습을 뜨거운 감회에 잠겨 바라보았다.

그는 이 순간 권혜숙을 생각하며 더욱 가슴이 화끈화끈해오고 눈굽이 젖어드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이제 권영호는 권혜숙에게로 간다. 행복한 길이지만 그 역시 위험한 길이다.

권영호를 동생에게로 보내는 문제를 놓고 신변문제가 있어 정시명이 걱정하자 권영호는 장부답게 호탕하게 대답했다.

《이건 꼭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매놓은것이니 꼭 제가 가서 풀려고 합니다.》

그가 출발을 고할 때 정시명은 다시한번 이번 걸음에서 류의할 문제들을 강조하고는 그의 어깨를 꽉 그러쥐였다.

정시명은 그렇게도 지지리 애를 태워온 권영호가 어깨를 실그러뜨리고 실팍한 가슴팍을 무랍없이 자기의 품에 맡길 때 류다른 감개가 뭉클 차들었다.

부정의와 부도덕과 매국의 길에서 그러모았던 재부와 명예와 권력의 두툼한 갑속에 웅크린채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이 사람이 드디여 애국의 용용한 대하에 뛰여들자 얼마나 아름다와진것이냐.

애국의 길에 나선 인간들은 어차피 아름다와지기 마련인가. 아름다운 인간들이란 곡절은 있어도 어차피 애국의 길에 나서기 마련인가.

참말로 애국은 인간들을 이토록 결바르게 가꾸어주며 또 이런 인간들에 의하여 애국은 더욱 고귀해지고 억세고 줄기차고 위대해지는것이 아닌가.

그것은 애국이야말로 인간세계의 최고도덕이며 최고의 륜리이며 최고의 선이기때문이다.

애국의 길에 나선 인간들의 이렇듯 아름답게 가꾸어지는 인생과 더불어 우리의 투쟁도 간고하지만 승리의 종착점을 향하여 한걸음한걸음 톺아오르는것이리라.

정시명은 언젠가 서병남이 무심코 들려주던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혜숙이 빨찌산에 갔다는 소식에 《흥국상회》가 끓던 그날이였다.

서병남은 국수사발을 앞에 놓고 저가락을 쉬이 들지 못하는 전우들에게 각근히 권하며 말했다.

《아무리 악스러운게 강해보이고 선한게 약해보이지만 그래도 냉중에 선한게 이깁디다.》

이 시각에 그 얘기가 유정히도 가슴을 쩌릿이 해주는것은 무엇때문일가.

선이란 과연 무엇인가? 어진것, 고운것, 의로운것… 선이란 개념은 참으로 넓기도 하다.

그런데 서병남은 선한것은 약해보인다고 했지.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선한것은 언제나 악한것보다 모질지 못해 보인다. 세찬 바람속에서 움트는 봄싹처럼 연연하다. 하지만 선은 냉중에 악을 이긴다고 서병남은 자신있게 말했다. 가벼이 다쳐놔도 짓물러질 그 연연한 봄싹이 드디여 광풍을 이겨내고 지심깊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와 잎을 돋구고 꽃을 피워 보란듯이 열매를 내놓는것과 같다고 할가.

어찌 보면 우리가 벌려온 미군철거투쟁이야말로 그 출발의 근본은 선에 의한, 선을 위한것이 아닌가.

이 땅에 들이닥친 악스러운것으로부터 인간들의 바른 량심을 지켜내기 위하여, 깨여져가는 사랑을 다시 이어주기 위하여,  리념의 색갈에 따라 갈라진 가정의 화목을 되찾아주기 위하여,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눈물없는 미래를 안겨주기 위하여, 대를 이어 살아온 이웃들이 화목하고 남과 북이 하나의 품에서 길이 복락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손상당한 겨레의 존엄을 지키고 나라의 분렬을 끝장내기 위하여, 한마디로 선으로 응축이 되는 이 땅의 고결한 그 모든것을 지켜나선 투쟁이 바로 미군을 내쫓기 위한 투쟁이다.

이 땅의 악으로 총칭되는것-인간을 타락시키고 사회를 병들게 하며 깨끗한 사랑을 란도질하고 화목한 가정을 깨뜨리고 이 땅을 영원한 치부와 공명과 략탈의 불모지로 만들려는 매국과 침략의 무리들을 쳐없애지 않고서는 안되는 싸움이 바로 선과 악의 대결이다.

그러나 선은 이긴다. 이겨내고있다. 너나없이 선한것을 위하여 살것을 지향하고있기때문이다.

하지만 선이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공유물도 아니요, 원한다고 차례지는 점유물도 아니다. 선이란 량심에서 우러져나오는 인간의 고유한 미덕이고 생활과 투쟁속에서 검증되는 인간의 가치이다.

권영호는 마침내 자기의 가치를 선에서 찾기 시작하였고 아름다움을 지키는 싸움에 나섰다. 그 거창한 생활속에서 인간 권영호는 드디여 안팎으로 때벗이를 하고있다.

권영호의 갱생은 바로 선의 승리이다. 아름답게 살려는 인간의 숭고한 지향의 승리이다. 이제 권영호는 보다 고결하고 신성한것을 위하여 선의 승리를 위한 싸움에서 자기 삶의 가치를 더욱 높여나갈것이다.

정시명은 환희에 가까운 격정을 자제하며 기쁨에 겨워 들뜬듯한 목소리로 당부를 하였다.

《이보우, 권동무. 백운산유격전구에 가서 리점분대장을 만나면 륜파가 보내는 동지적인사를 전해주오. 그리고 여기의 싸움이 혜숙동무를 필요로 하니 내가 부탁한다고 하오.

아, 얼마나 좋소. 우리 괄랭이가 오빠를 보면 그 큰 눈에 눈물부터 한동이 담을거요. 빨리 길철의 곁으로 데려옵시다. 난 정말 한시가 새롭소. 그 말괄랭이 정말 보고싶소.》

정시명은 이렇게 두번세번 진정을 고여 되뇌이고는 그의 등을 떠밀었다.

권영호는 정시명이 무등 감개무량해서 터쳐놓는 그 후더운 이야기에 눈부리가 찌르르해왔다.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권영호는 이 생각만 곱씹고있었다.

불쑥 그의 눈앞에는 매국과 치욕을 권고하던 리승만의 두억시니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애국과 매국의 량극단에 서있는 두사람의 모습은 너무나도 대조가 된다.

한쪽은 인간중에서도 참인간의 목소리만 낸다면 한쪽에서는 어느 한마디도 인간적인데라곤 없다. 한쪽은 마디마디에 겨레에 대한 참사랑이 맥맥하다면 다른쪽은 그 어느 말마디에조차 겨레와 나라에 대한 책임의식은 고사하고 권력과 탐욕과 사대굴종만이 악취를 풍기고있을뿐이다.

어찌하여 이 나라의 정상에 이런 고결한 인간은 뒤전에 밀어놓고 그 짐승같은 인간페물을 올려놓았는가? 아, 불행한 일이다.

언뜻 내던지는 말에도 내나라에 대한 사명감이 비껴있고 눈빛 한점에도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다함없는 애정이 가득차있는 사람, 아름다운 넋을 등불처럼 추켜들고 그 등불로 뭇사람들의 넋을 선하게 정화시켜 나가는 이 고귀한 인간!

(저런게 사람이지. 사람… 아, 아…)

권영호는 왈칵 더운 눈물이 쏟아져내릴것만 같아 고개를 대충 숙여 인사를 남기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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