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불 붙는 대지

3

 

《정부》출범후에 오리라던 미국대통령 트루맨의 특사 무쵸는 《5. 10단선》을 치르기바쁘게 서울에 나타났다.

미군사령관 하지는 무쵸가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왔지만 불원간에 서울에 주재하게 될 미국대사로 내정되여있다는것을 국무성의 후문으로 듣고있었다.

자기뒤를 잇게 될 남조선 총독인셈이다.

무쵸는 워싱톤의 외교계와 안보계통에서 관록이 있는 재사로 공인되고있는 트루맨의 자문역이였다.

련이은 정치적좌절에 시달릴대로 시달려온 하지는 패배자로 쫓겨간다는 미칠것같은 렬등의식에 사로잡혀있으면서도 드디여 정치의 구린내나는 수렁창에서 발을 뽑게 되였다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경무대의 정문에서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으나 몸통이 보기좋게 가로 퍼진 특사를 맞아들였다.

《장군, 그동안 로고가 컸습니다. 장군이 동양을 넘보아온 미국의 력사적숙제를 안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이 반도의 땅을 평정하고있다는 소식을 백악관에서 종종 듣군 하였습니다.

참으로 생소한 곳에서 미국의 서부개척정신을 훌륭히 보여주었습니다.》

좀 처져내린 허옇고 유들유들한 볼편에 우뚝 솟아난 주먹코가 퍼그나 인상적인 무쵸는 억양이 부드러우면서도 박력이 느껴지는 사교적인 어조로 정중하게 대방의 손목을 잡아 적당히 흔들며 치하를 하였다.

무쵸는 외교관들이 항용 그러하듯 까만 양복에 자지빛 넥타이를 빈틈없이 조여매고 가르마를 탄 긴 머리칼을 뒤통수에 넘겨붙이였는데 기름을 뒤집어쓴것처럼 반들반들하였다.

《특사각하, 과분한 치하입니다. 난 사실 백악관앞에서 이 나라의 말로 한다면 초달을 받아야 할 몸입니다.》

《초달이요?》

《매로서 벌 주는 일이지요.》

《하하… 원 그럴수야 있습니까. 미국상표를 단 〈정부〉까지 만들어내게 되였는데 문물이 전혀 생소한 점령국의 총독으로서 그게 어디 작은 수고입니까.

원래 정객들치고 만점을 받는 일은 없으니 괜한 걱정입니다. 만인의 지지를 받는 정치가란 어용매문가들이 만들어내는 허상이지요.》

《허허… 고명한 말씀입니다. 자, 어서 들어갑시다.》

그들은 1층에 있는 광실에서 널직한 원형응접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응접탁가운데는 방금 망울을 터뜨린듯 싶은 황설란화분이 놓여있고 그옆의 어항에서는 파르무레한 지느러미를 부채처럼 아래우로 활짝 펼친 공작어 여러쌍이 한가로이 돌아가고있었다. 방금 뿌려놓은듯 한 서양향수냄새가 너무 지나쳐서 후각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응접실의 뒤벽에는 눈 깔린 알프스의 산정에 저녁노을이 비낀 풍경화가 벽면을 꽉 채우고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워싱톤정가에서 《조야스러운 무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하지의 기호에는 어울리지 않게 아늑하면서도 밝고 은근한 정취가 감돌도록 구색이 맞춰져있다. 상류사교계의 취미와 기호가 몸에 배인 신사에 대한 남다른 례의로서 특별히 왼심을 쓴 주인의 성의가 느껴졌다.

무쵸는 주먹코를 습관처럼 두엄지손가락으로 몇번 쓸고는 방안을 한바퀴 휘둘러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경무대의 배경처럼 되여있는 북악산의 허리가 가까이 보였다. 5월이라 철쭉이 한창이여서 여간 아름답지 않다. 불 타는듯 한 꽃들이 연록색이 짙어가는 송림과 어울려 명쾌하고도 화려하게 안겨들었다.

주위를 서두름이 없이 천천히 돌아보고난 무쵸는 코안경을 벗어 들더니 《과시 명소입니다.》하고 무등 감탄해마지 않았다.

《예, 좋은 고장입니다.》

《그래 여기가 이제 대통령궁이 되는가요?》

무쵸는 손가락으로 주먹코를 살살 긁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물었다.

《글쎄요.》

하지는 자신없는 투로 받아넘기다가 이 사람이 은근히 자기를 힐책한다는 생각이 피뜩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가 애초에 들지말아야 할 곳에, 군침은 나더라도 종당에는 비켜가야 할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무언의 책망이 느껴졌던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하지는 이것때문에 맥아더에게서도 곱지 않은 소리를 들은바가 있었다.

어느 술좌석에서 맥아더가 슬그머니 한다는 말이 《맥아더가 이 나라의 궁성을 차지한다면 일본국민이 뭐라고 할가.》 하는것이였다. 네가 서울에 가자바람으로 총독관저부터 타고앉았는데 정복자에 대하여 고도로 예민한 현지주민들의 감각쯤은 계산해야 한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그뒤로 하지는 경무대를 괜히 타고앉아 가뜩이나 변덕이 심한 맥아더나 매끄러운 국무성것들의 입에 오르게 되였다고 속구석이 늘 쯤쯤하였다. 그렇다고 들어간 자리에서 물러난다는것은 무관답지 못한 섬약한 노릇이라고 지금껏 버티여 왔던것이다.

그런데 대통령특사가 또 그걸 건드려놓는 바람에 하지는 속이 뿌드드해져서 은근히 열이났다.

무쵸는 상대방의 표정에서 자기 말뜻을 헤아렸다는것을 감촉하자 속으로 쓰겁게 웃었다. 언제나 회담에 들어가기전에 그 무슨 트집을 걸어 상대방의 의기를 눌러놓은 다음 본문제를 꺼내놓군하는 무쵸의 대인외교술에 걸려든 하지는 공손한 자세로 앉아 괜스레 펜대를 매만지며 무쵸의 유들유들한 상통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번에 서울방문을 앞당긴것은 제주도소요때문입니다. 46년 10월에 대구폭동이 미국의 면상을 후려쳤는데 이번에는 제주도가 미국에 대고 전면전쟁으로 도전해 나섰습니다. 대구사건은 아놀드의 해임을 몰아왔고 미쏘공동위원회의 패배는 브라운을 내쫓게 했고 지난 4월 남북련석회의는 러취군 정장관을 쫓아냈습니다.

물론 나는 제주도에 대한 책임소재를 찾으러온것이 아닙니다. 그밖에 두가지 문제에 대한 합의를 보고 세가지 문제에서 대통령에게 올릴 건의를 채택해야 합니다.》

무쵸는 이렇게 서두를 떼고는 하지의 안색을 살피였다.

하지는 다소 긴장한 빛을 담은 세모눈을 다소곳이 한채 무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사실 미국무성도 무쵸의 서울방문을 사전에 통보는 해주었지만 방문목적에 대하여서는 언급해주지 않았던것이다. 그저 방문일정이 당겨진것은 제주도때문일것이라는 막연한 예측정도였다.

《제주도문제는 료해를 하고나서 내가 결심할 문제입니다. 당신과 함께 합의를 볼것은 다음 회계년도예산안에서 남조선에 대한 경제원조를 어느 한도에서 해야될것이냐 하는 문제와 〈국회〉선거를 치른 조건에서 권력이양을 어느 시기에 하겠는가 하는것입니다. 군정연장문제가 제기되고있다는데 이번 기회에 론의해 봅시다.

결론을 얻어야할것은 서울에 설치할 대사관과 령사관의 규모와 이 나라 통치방식문제, 대통령에 대한 최종선택입니다.》

무쵸는 이미 머리에 차곡차곡 포개두었던 이야기들을 고저가없는 실무적인 어조로 시계태엽이 풀리듯 기계적으로 다 풀어놓았다.

그는 자기의 이야기를 요약하여 적느라고 부지런히 펜대를 놀리는 하지의 짧게 깎은 머리칼과 세모난 주걱턱이며 밭은 이마를 보며 잠시 숨을 돌리였다.

어쩐지 첫눈에 상대가 너무 만문해 보인다. 범접하기힘든 말짼 인간이라는 워싱톤의 평가가 너무 야박한듯 싶다.

무쵸는 아직 자기의 서울방문에서 기본으로 되는것은 꺼내놓지 않았다. 그것은 남조선에 틀고앉은 미군의 철병문제였다. 미군을 그냥 주둔시키겠는가 아니면 철수시키겠는가, 철수시키면 어느 시기에 어떤 방법으로 어느 정도에서 철수시키겠는가.

최근 미국 정계에서는 미군의 남조선주둔문제가 일정에 올라 심각한 론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정식 들고나선것은 미륙군성이였다.

미륙군성은 2차세계대전후에 《국회》로부터 군비예산을 삭감할데 대하여 해마다 압력을 받아왔다. 유럽과 중동지역, 태평양과 아메리카의 광활한 지역에 분포되여있는 미군기지와 주둔미군을 더 이상 유지하는것이 미국의 실리에 부합되는가, 2차대전이 끝난 지금에도 막대한 군사비부담을 미국의 세납자들이 걸머지고있을 리유가 무엇인가고 공화당의원들이 행정부와 집권당인 민주당을 공격해나섰다.

미국회 하원은 지난해 국가예산을 통과시킬 때에도 군비예산이 필요이상 책정된데 대하여 강하게 반발하였다.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까지 그에 합세하여 군비예산을 절반으로 삭감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국무장관과 륙군장관이 국회청문회에 여러번 불리워나가 땀깨나 뽑았다.

그런데 다음 회계년도예산편성을 눈앞에 두고 또다시 국회가 군비삭감을 주장하여 법석 고아대기 시작하였다.

물론 반대파들의 도전은 집권당과 행정권을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선거자들의 환심을 사고 저들의 몸값을 높이려는 정치적의도로부터 출발한것이지만 그에 직면한 관계기관들, 특히는 륙군성은 움직이는척이라도 하는수밖에 없었다.

륙군성에 눈독을 처음으로 들인것은 남조선주둔 미군과 일본주둔 미군이였다.

원래 해외파병군은 본토군의 5배에 달하는 인건비를 쓰게 되여있다.

그러지 않아도 미륙군성의 일부 고위관리들은 동북아시아에 군사정치적견지로 보아 미군주둔이 요망되지 않는다는 설을 내돌려왔다.

이러한 주장들은 도꾜에 자기 공국을 차려놓은 맥아더와 남조선주둔 사령관 하지 그리고 국무성의 강력한 반대로 계속 무시되여왔다. 그런데 지난해 국무성안의 극동중시파 인물이던 국무차관 애치슨과 극동국장 빈센트가 해임되고 그대신 유럽중시파인 로버트와 버트워즈가 각각 그 자리에 들어앉았다.

그리고 대쏘봉쇄정책의 주창자로서 유럽에서 미국의 지위를 강화할것을 시종일관 주장하여 온 국무성의 실력자인 케난이 정책기획국장으로 등용되였다.

케난은 조선이 전략적가치가 없다는 륙군성의 주장에 동조하여 미군은 남조선에 정부가 서고 군대가 조직되는 즉시에 철군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만들어 마샬의 주최로 열린 미국무성 관계자회의에 제출하여 지지를 받았다.

백악관 안보리사회는 국무성이 작성한 정책안을 《에스 씨-8》이라는 문서로 정식화하여 제기하였다.

국회의 군비축감압력으로 몇해째 몸살을 앓고있다가 제주도에서 미국을 반대하는 전민항쟁이 터졌다는 보고까지 접하자 트루맨은 얼른 이 문건에 수표를 하여 버렸다.

맥아더는 문건이 채택되자 미친듯이 덤벼들었다. 극동의 문제가 극동군 총사령관의 합의도없이 백악관 골방에서 함부로 채택될수 있느냐, 당장 사직서를 쓰겠다고 으르렁거리였다.

트루맨은 맥아더가 소동을 부린다는 소식을 받자 그를 진정시킬겸 보다 객관적인 검토를 위해 이번에 자기의 측근인물이며 장차 남조선을 통치하게 될 무쵸를 부랴부랴 현지에 파견하기로 한것이다.

무쵸는 서울에 오는 길에 도꾜에서 맥아더를 만나 장시간 회담을 하였다.

맥아더는 무쵸를 앉혀 놓고 첫 마디부터 트루맨을 우직하게 욕하였다. 루즈벨트밑에서 백악관의 식객노릇이나하던 주제에 뭘 군사요 안보요 희떱게 주절거리느냐고 자기의 대통령을 인격모독까지 하며 주먹으로 앞상을 탕탕 치기도 하였다.

사실 트루맨은 루즈벨트밑에서 부대통령으로 있다가 루즈벨트가 뇌출혈로 급사한바람에 선거를 치르지 않고 이렇다 할 정치적치적도 없이 대통령관저인 백악관을 타고 앉았다.

맥아더는 그걸 꼬집고드는것이였다.

맥아더의 맥을 짚어보는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한 무쵸는 그의 반응의 정도를 타진하기 위해 구태여 그를 달래주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무쵸 개인의 립장으로서는 워싱톤을 떠날 때부터 그 무슨 리유와 명분에는 관계없이 맥아더의 립장에 기울어져 있었다. 미구하여 주인노릇을 하게 될 남조선에 미군력이 틀고앉아 있는것이 리로우면 리로웠지 해될것이 없는것이였다.

《백악관이 도대체 태평양을 안다면 얼마만큼 아는가. 지금 국무성의 그 알량한 선비들과 정치군복쟁이들은 태평양의 방어선을 남조선과 대만을 제외하고 일본 본토와 류꾸렬도, 람도를 거쳐 필리핀으로 긋자고 하는데 이게 얼빠진 자들의 궤변이란 말이요.

이런 일이야 그래도 스무해토록 태평양에서 자맥질을 해온 이 로병과 물어서 해야할것이 아닌가. 제주도를 보란 말이요. 미군만 없으면 서울은 당장 제주도폭도들에게 정복되고 말거요.》

회담은 맥아더의 일방적인 넉두리로 여러시간 이어졌다.

끝날무렵에야 무쵸가 조심히 물었다.

《그러면 각하께서는 남조선에서 미군철병시기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맥아더는 장광설에 기진맥진해서 삼복철에 더위먹은 삽살개처럼 가쁘게 숨을 헐떡거리였다.

《두고봐야 할 일이요. 난 구상이 있소. 아직은 내 머리에만 있는… 대통령은 지금 제주도폭동때문에 미군철거론에 동조한다는데 천만이요. 제주도폭동이야말로 미군주둔의 필요성을 확인해준단말이요.》

맥아더는 머리속의 구상이라는걸 내놓지 않았으나 무쵸는 가늠이 되였다.

맥아더는 장개석이 중국 본토에서 쫓겨나게 된 지금 태평양에서 아시아대륙에 대한 봉쇄선으로 두만강에서 시작하여 대만해협을 걸쳐 윁남과 타이를 지나는 《맥아더 라인》을 쭉 긋고싶어 하는것이다.

무쵸는 각하의 립장을 충분히 리해하고 간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하지에게는 자기가 안고온 사명중에서 핵심적인것이라고 볼수있는 미군문제를 피하였다.

그 리유가 있었다.

최근시기 남조선정치정국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온 무쵸는 서울이야말로 정치가나 외교관의 몸값이 흥정되는 주식시장이라는 감상적인 결론을 찾아냈다.

지난 시기 미국에서 날아온 고위인물들이 경솔하게 던진 말 한마디때문에 곤욕을 당했다는 일화를 재미있게 들으면서 무쵸는 그들의 전철을 밟지않기를 여러번 마음속에 다짐했던것이다. 이제 트루맨의 특사가 제주도사태와 관련하여 철병론의를 하러왔다는 말이 새나가기만하면 서울여론이 설설 끓어오를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무쵸는 푸짐한 만찬까지 대접받으면서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 이야기만은 끝내 꺼내놓지 않았다.

하지는 제기된 다섯가지 문제에 대하여 비교적 간단명료하게 자기 립장을 내놓았다.

…《경제원조》는 계속해야 한다. 하나를 주고 열을 챙기는 일인데 뭘 바질거리는가. 국회의 시비군들의 말씨름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권력이양은 정권이 들어서면 인차 해야한다. 이 나라가 끌어안고있는 허다한 골치거리를 미국이 도맡아안고 세상의 뒤손가락질을 받을게 없다. 나도 생각같아서는 군정을 한해 더 연장해서 서울정계를 다시 흔들어대고 싶은데 이모저모 해가 클것 같다.

《이 나라의 통치방식에 대해서는 난 맥아더와는 견해가 다릅니다. 그러나 이미 맥아더가 지난 5월 초에 리승만을 불러다놓고 대통령책임제의 헌법을 만들어내라고 했으니 그대로 따라야 할것입니다.

대사관규모는 서부도이췰란드와 같은 급에서 설정하는것이 합당합니다.

대통령에 대해서는 백악관과 맥아더가 이미 리승만으로 점찍어놓았습니다.

좀 더 젊고 똑똑한 인물을 내세웠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아직 그와 견줄만한 친미적인 인물을 찾아내지 못했으니 어쩌겠습니까.

지금 워싱톤에 앉아있는 혹자들은 이 나라가 미국의 사활권에서 가지고있는 전략적가치나 지정학적의의에 대하여 왜소하게 평가하고 있는데 력사를 재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독립전쟁이래 백년동안이나 이 나라를 손에 넣자고 군침을 흘려온게 까닭이 있을게 아닙니까.》

하지는 무쵸앞에서 마치 트루맨앞에 나선 기분으로 자기딴으로는 한껏 정중하면서도 객관성을 부여하느라고 애를 썼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구하여 물러나야 할 이 땅에 쏟은 자신의 땀과 고뇌가 미국의 리해관계에서 지워지지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미국이 여기에서 손을 뗀다면 애당초 무엇때문에 이 땅에 군화발을 들여놓았고 거의 3년간이나 세간의 지탄에 허둥거리면서도 그냥 깔고앉아 왔는가.

무쵸는 이따금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이야기에 잔손질을 해주며 자기가 다스려야 할 땅과 그 주인들에 대하여 될수록 많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도록 유도하였다.

원체 정책의 집행이 아니라 립안이라는 백악관의 안방살이에 인생의 전성기를 거의 바쳐왔고 또 거기에서 로련한 신사라는 평을 받아온 무쵸는 귀가 크기로 유명했다.

무쵸는 자기의 속심은 가리워놓고 하지가 미군주둔에 대한 자기 주장을 다 뱉아놓도록 담화를 끌고 나갔다.

《나는 원칙적으로 일본과 조선, 대만과 윁남, 라오스, 타이 등을 유라시아대륙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전초기지로 전망적으로 두어야 한다는 맥아더의 구상에 대하여 지지합니다. 물론 맥아더의 구상에는 태평양전쟁의 무훈을 력사에 더 화려하게 장식해 놓으려는 개인적야심이 깔려있는것이 사실이지만 우린 그것이 미국의 현대사에 반드시 수록되여야 할 력사적숙제라는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이야기가 끝나갈무렵에 무쵸는 돌연히 말머리를 돌려 지나쳤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냈다.

《밤이 깊었는데 실례지만 한가지만 더… 나는 워싱톤에서도 들었고 맥아더에게서도 들었고 당신도 아까 기정공론으로 확인하였는데 불원간에 세워질 통치권좌에는 리승만이 최적임인물로 되여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자신이 없는 인물을 지금까지 끌어안고 밀어주었습니까. 워싱톤에서도 그의 통치력과 지능도에 우려를 표시하는 인물들이 여럿이 되였습니다.》

무쵸는 워싱톤에서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불만이였다. 그자신도 리승만의 추행을 여러번 들었던것이다.

앞으로 이 땅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자면 어차피 내세워야 할 이 나라의 통수자와 손발이 맞아야 한다.
그러나 리승만비평가들은 그의 인격과 지능도에 대하여 혹평을 하면서 무너져내리는 고목으로 점찍었었다. 하지도 리승만에 대하여 여러말은 하지 않았지만 피끗피끗 스치는 이야기속에서 탐탁치않게 여기는것이 확실하였다.

그렇다면 하지야말로 지금까지 이 나라의 모든것에 대한 무제한의 선택권을 가진 인물이였는데 왜 내키지 않은 인간을 정치권에서 완전히 소외시켜 버리지 못했는가.

하지의 실책을 바로잡을 시간은 아직도 있다. 트루맨도 이번 기회에 리승만의 금새를 정확히 떠보라고 하였다.

《하…》 하지가 급소를 찔리운듯 세모진 상을 찡그리고 입부터 두어번 쩝쩝 다시더니 목이 칼칼해오는지 차잔을 끌어다가 한모금 마시였다.

《이제 당신께서도 만나보시면 짐작이 되겠지만 리승만이라는 인간을 허수룩히 봐서는 안됩니다. 여하튼 그는 전 세기 말엽부터 장장 오백년을 세습해온 리씨왕조를 뒤집어 엎으려고 권력전의 복판에 나섰던 인물이고 추종세력들속에서 〈독립의 어버이〉로 칭송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서유럽의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문화를 깊이 리해하고있지만 통치자의 무제한한 권력이 승계되여온 이 나라의 력사적인 정치구조와 정치방식을 신봉하고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현 남조선정치상황에서는 독재적인 정치스타일이 기필코 요망된다는것입니다. 아직 이 나라의 정치풍토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넘어갈만큼 성숙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맥아더가 리승만의 후견인으로 된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솔직히 말씀 드리면 리승만이라는 인간은 미국을 움직일줄 아는 인간입니다. 결코 그의 정치적지능계수에 낮은 점수를 줘서는 안됩니다. 그는 미국의 장점과 약점을 잘 알고 능란하게 써먹고 있습니다. 리승만은 필요성을 느끼면 대통령이나 미국의 사회계와 언론을 대상하여 여론을 조성하고 여론의 압력을 몰아가는 독특한 기교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측근들속에서는 인사에서는 등신이지만 외교에서는 귀신이라는 말도 돌아가고있습니다.》

《인사에서는 등신이라, 허허…》

무쵸가 껄껄 웃자 하지도 손을 내두르며 한바탕 웃었다.

《자기 사람에 대한 관리에서는 엉망이라는 소리입니다. 비위에 틀리면 당장 쫓아내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습니다. 나이도 나이거니와 자기의 정치력에 대한 지나친 과신으로부터 자기의 팀안에서도 독재적인 영상을 보이는게 유익하다는 단순한 리유일겁니다.》

하지는 리승만에 대하여 좀 더 자극적인 평가를 하고싶었으나 이제 무쵸자신이 아침저녁으로 상종하게 될터인데 공연히 앞질러 객적은 이야기를 늘어놓는게 싱겁다고 생각되여 이 정도로 끝내버렸다.

무쵸도 좀 더 구체적인 표상을 가지고 싶었으나 구태여 더 캐여묻지 않았다.

그들은 열두시를 알리는 남대문의 인경소리가 서울의 밤하늘에 처량하게 울려퍼진 뒤에야 자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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