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자기를 지켜낸다는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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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호는 무시로 쓸어드는 갖가지 상념에 휩싸여들었다. 그는 방안을 오락가락하다가는 누이동생의 편지를 정신없이 읽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동생의 이름을 슬프게 부르기도 하고 쏘파에 던지듯 몸을 싣고는 머리를 싸쥐고 또 한참 방금 던지고간 정시명의 이름을 되새겨가며 갈래 없는 생각에 쫓기였다.

누이동생의 편지의 구절구절이 마치도 총알처럼 가슴팍을 노리여 날아드는것 같기도 하고 피방울처럼 튀여올라 자기의 옷섶을 붉게 물들이는것만 같았다.

그는 천정을 멍하니 쳐다보기도 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가에서 어둠이 깔리는 서울의 밤거리를 무섭게 노려보기도 하였다.

이 땅의 악을 끝없이 저주하고 이 땅의 선을 끝없이 례찬하는 혜숙의 그 절통하고도 결곡하고 아름다운 넋앞에 그는 자기의 인생을 견주어보았다.

그 수염쟁이의 입을 빈다면 분명 혜숙인 이 나라의 고운것을 다 그러모은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그의 원쑤가 되고 그의 총구앞의 표적이 된 나는 이 나라의 더러운것을 다 그러모은 죄악의 극치라는건가.

혜숙이 단죄하는 말에는 그 어떤 허위도 가식도 불의도 없다. 그는 비단결같은 이 나라 평민의 눈으로 선과 악을 갈라보고 선을 찬미하고 악을 징벌하고있는것이다.

수염쟁이가 던지고간 엄숙한 말도 다시 고막을 울린다.

《어떻게 살아왔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그 소리에 당당하게 자신과 긍지를 가지고 대답할게 없다.

명확해지는것은 살아온 인생은 자기자신만을 위한 부귀와 축재와 공명과 아부로 이어져 있다는것이다. 내가 찍어온 30여년자국의 그 어디에 겨레라는 신성한것이 비껴있는가.

권영호는 혜숙의 편지를 또 한번 읽어보았다. 정시명이 던지고 간 말들을 되뇌여보기도 하고 매부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안방에 들어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시대의 기류에 날쌔게 날개를 펴서 어지럽게 챙긴 수많은 죄의 보따리들을 난생처음으로 량심의 자대를 가지고 랭철하게 재여보기 시작하였다.

돌이켜보면 광복후에 시작된 정치권에로의 첫 걸음부터 근본적으로 잘못된것 같다.

모든것은 그만두고라도 미국놈들의 턱밑에 붙어 돌아가며 그놈들이 던져주는 적산이라는 미끼를 아무런 생각없이 꿀꺽 삼키고 끝내는 그놈들이 마련해준 의원감투까지 쓰고 리승만의 심복자로 자처해오지 않았던가.

《단언하건대 미국놈들과 절교하시오!》 수염쟁이는 이렇게 경고를 하지 않았는가.

미국놈들을 《해방자》로 굳게 믿고 날래게 미군정 부산장관에게 접근한것부터 인생의 탈선이였다. 모르고 시작한 일이여서 점차 인생의 얼룩점으로 짙어가고 이제는 지워버리기 힘든 치욕으로 두터워졌다.

그러니 그 죄많은 과거를 어디다가 꾸겨던지고 혜숙이를 따라설수 있는가.

매부도 혜숙이도 그 수염쟁이도 희망하는것은 그것이다. 자기들을 따라서라는것이다. 하지만 몸을 담가온 세계에서 빠져나오자니 발목을 잡는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아버지가 걱정스럽게 남기고 간 말이 무심하지 않다.

집재산을 등록해가고 털보놈을 유인해낸것은 리승만의 작간일것이다. 수틀리면 의원으로서 정치적존재는 고사하고 생존의 기둥뿌리까지 뽑아버리겠다는 신호이다.

요즈음에는 좌익이라면 덮어놓고 쇠고랑을 채우고있으니 소장파에서 보여준 활동들에 색갈을 붙이기 시작하면 만사는 한순간에 끝장이 난다.

김승원이 길철의 동지라는것이 알려지면 《국가보안법》의 칼날에 란도질당하기가 십상이다.

리승만은 제놈과 척을 진 일체의 계파와 인물들과 움직임에 대하여 《보안법》을 휘둘러 가차없이 타격하고있다.

최근에는 감옥들이 넘쳐나서 다섯개의 감옥을 신설하기 위한 긴급예산이 《국회》에 상정되기까지 하였다.

근래에 미국대사관이나 리승만이 제일 주목하고있는 곳이 저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고있는 《국회》와 정권기구안의 반대세력이다.

《국회》진출은 한발자국을 나서도 그 여운이 야단스럽게 커지고 갖가지 도전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현재의 처지에서 한발 내짚는것이 쉽지 않다. 여차하면 리승만의 족쇄를 차고 형틀에 올라서야 한다.

그렇게 되면 권영호라는 이름은 정치권에서 쉽게 지워질것이며 집안도 란가가 되고 말것이다. 인생도 끝장이 났다.

아- 어쩐단 말인가?…… 권영호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다가는 혜숙의 얼굴이 떠오르면 수십수천의 바늘이 온몸을 마구 찔러대는듯 뼈와 살이 저려나는 아픔과 속죄를 금할수 없었다. 혜숙이 그 크고 억실억실한 눈으로 자기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고있는것 같다.

하기는 이 시각도 혜숙이는 오빠와 아버지가 겨레앞에 지은 죄를 계산해가며 제나름으로의 성의를 다해 보상을 하고저 자기의 피와 땀을 뿌리고있을것이다.

(아, 오빠가 지은 빚을 동생이 떠안고 갚다니… 하지만…

조용히 살아야 한다. 매부도 받아들이자. 아니, 좀 더 대세를 지켜보고 생각을 정리해보자.…

그러나 혜숙이는 빨리 데려와야겠다.… 아, 아니 아직은 좀 더 두고볼 일이다.…)

온밤을 지새우며 끝내 눈을 붙이지 못한 권영호는 새벽녘이 되여 온통 빠개지는듯 저려오는 머리빡을 왼손으로 싸쥐고 길철에게 보내는 한통의 짤막한 편지를 썼다.

 

매부!

죄스러운 마음 측량할 길 없으니 다시 뵈올 면목도 바이 없습니다.

혜숙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오빠로서 그리고 부모님들을 대신하여 지난 날에 있었던 좋지 못한 일들을 심심히 속죄하면서 매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정향선생님께 전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최근년간의 혼란스러운 시국을 주시하면서 그리고 내가 걸어온 정치의 행보가 겨레앞에 심히 잘못되였다는것을 인정하면서 금후 애국민족세력에 해로운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언약합니다.

지금 미국과 리승만일파는 좌익에 대한 총공세를 벌리고있으니 모두들 각별히 류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권영호는 인차 전하지 못하고 며칠동안 편지의 구절구절을 다시 수정하며 골머리를 앓았다.

며칠후 권영호는 《동향회》모임에 참가하였다가 모임이 끝나자 김승원에게 슬그머니 넘겨주었다.

김승원으로부터 처남의 편지를 받아본 길철은 대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기회주의! 이건 완전히 기회주의이군.》

길철이 분개한 어조로 나직이 부르짖었다.

《어떻게 썼기에 그러오. 나도 좀 봅시다.》

길철이 씨근덕거리며 그에게 말없이 편지를 넘겨주었다.

편지를 보고난 김승원의 안색은 길철과는 딴판이였다.

그는 밝아진 어조로 《어째서 욕질이요? 이건 길철선생을 물귀신으로 만들려던 권영호로부터는 상당한 전진이 아니요? 당장 혜숙에게 알립시다. 두분의 결혼을 승인하며 길철선생도 가문에 받아들이고 사죄도 했다구 말이요.》하고 좋아서 떠들었다.
그러나 길철은 그냥 도리질이였다.

《아니, 필요없습니다. 혜숙이 바라고있는건 이런것이 아닙니다.

혜숙이 뭐 집을 버리고 날 버리고 간게 사위취급 안해준다는 투정인줄 아십니까. 이 편지를 보십시오. 이건 도대체 무슨 놈의 말장난입니까.

내가 너한테 짐으로 안될터이니 더이상 날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넉두리가 아닙니까.

난 그래도 전번에 만나보고는 다른 소식을 기다려왔습니다.

정치사기군! 역시 이런 인간에게 미련을 가진다는건 하늘의 구름잡기처럼 허망한 일입니다.

그 인간과의 관계는 이것으로 눌러놓았으면 합니다.

승원선생이 이제 회장선생님에게 들리는 기회에 이 편지도 전달하고 내 의견도 말씀드려주시오.》

김승원은 길철의 예리한 지적을 듣자 한숨부터 내쉬였다.

길철의 흥분이 리해는 되였으나 공감할수는 없었다.

김승원도 편지에 어려있는 권영호의 우유부단한 얼굴에 실망이 컸다.

이 편지는 기회주의자의 편지인것만은 확실하다.

좀 더 전진이 있는 대답이 기다려졌는데 이런 정도이니 답답한 노릇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해왔지만 권영호처럼 복잡한 인간과 맞다들기는 처음이다. 《국가보안법》을 채택할 때 보인 그 인간의 배신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권영호와의 사업을 놓고 김승원도 립장이 투철해졌다.

정시명이 그를 끝내 놓아주지 않을것이라는 판단때문이였다. 그리고 그를 품에 안고야 손을 떼려는 정시명의 리유가 너무도 원칙적이고 인간적인것이라는데 있었다. 애국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겨레에 대한 참사랑이라는 고결하고 거창하고 그러면서도 소박한 사상이 그 절박한 리유에 뜨겁게 울리고있다.

그러니 그 고원한 리상과 열정을 감히 거역할수 있겠는가.

《부회장동무.》

김승원은 여느 때없이 정중하게 길철을 불렀다.

《난 부회장동무의 의견을 전하지 않겠습니다.

내 좀 〈흥국상회〉의 성원이 아니라 나 역시 혜숙이네 문제에 책임이 있는 부회장동무의 전우로서 그리고 년장자로서 부회장동무의 그 의견에 대하여 의견을 제기하고싶습니다.》

길철이 전례없이 심각해진 김승원의 모습에 놀랐다. 그는 아슴프레해진 눈으로 그를 흘끔 쳐다보고는 어서 말하라는듯 고개를 다소곳이 하였다.

《나도 권영호문제는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호미난방격으로 귀치않게 생각한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립장이 달라졌습니다. 놓치도 잡고있지도 못할 일이 아니라 끝까지 잡고서 우리의 동지로, 전우로 만들 때까지 끝장을 봐야 할 일이라구 말입니다.

권영호가 인생의 길을 근본적으로 갱신하는건데 아무렴 쉽게 이루어지겠습니까. 더구나 우리가 그에게 바라는건 그가 목숨을 내대는 반미성전에 나서는것인데 미국놈의 손끝에서 정치권에 들어선 그에게 그게 헐한 대답이 아니지요.》

김승원은 저으기 흔들리는 자기의 마음을 다시 다져놓듯 마디마디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난 이 편지에서 권영호와의 사업이 크게 전진하였다고 인정합니다. 부회장동무를 자기의 매부로 받아들인것자체가 권영호가 한걸음 진보하였다는것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난 그렇게 보고싶습니다.

난 좀 목표를 더 크게 세우겠다고 제기하겠습니다. 권영호를 우리의 동지로, 혜숙이와 어깨겯고 통일애국성전에 나선 투사로 내세우자고 말입니다.

그 인간도 구원하고 그 가정도 구원하고 혜숙의 사랑도 건져내고 미국놈 내쫓는 싸움도 더 크게 벌릴수만 있다면 회장선생님도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부회장동무, 이 문제때문에 회장선생님의 속을 더 괴롭게 하지 맙시다.

부회장동무는 권영호라는 인간에 대하여 매부와 처남이라는 각박한 처지로만 보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 지나친 요구를 제기하고 너무 조급해하는것 같습니다. 권영호문제때문에 미안해하지 마시오. 그게 어디 한 집안에 당한 일입니까.》

김승원의 무게있으면서도 절절한 이야기에 길철은 눈시울이 뜨끈뜨끈해오고 목구멍이 찌릇찌릇해 왔다.

그는 김승원의 두손을 슬그머니 잡아쥐더니 《고맙습니다.》하고는 홱 돌아서서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

김승원은 언뜻 그의 눈귀에 이슬이 맺힌것을 보았다.

《원, 사람두 저렇다니깐… 내가 안할 말을 했군.…》

김승원은 길철의 뒤모습을 지켜보며 목이 메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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