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자기를 지켜낸다는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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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무렵이였다.

불덩이같은 구름장들이 금시 통채로 서산에 주저앉을듯 위태롭게 서녘하늘에 매달려있다. 쌀쌀한 바람이 아직도 잎새가 달려있는 강변의 버들숲을 소란하게 흔들었다. 새들이 깃을 내릴 보금자리를 찾느라고 나무가지들에 앉아 서로 찧고 까불며 꼬리를 달싹거린다.

아까부터 두사람이 강변의 마른 잔디우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정시명과 김승원이였다.

까만색바탕에 줄간 제낀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눌러쓴 김승원에게서는 알싸한 향수냄새가 풍기였다. 언젠가 김승원은 자기 처가 《국회》선거때부터 아침길에 나설 때마다 향수 한방울씩 어김없이 뿌려주는데 의원노릇하기가 옛날 사모관대를 쓰고다니던 정승못지 않게 시끄러워죽겠노라며 너스레를 부렸었다.

김승원은 전날 저녁에 있었던 《동향회》모임에 대하여 보고하고있었다.

《동향회》에서는 《려수사건에 대한 평가》라는 제목으로 간담회를 가지였다.

기조보고가 없이 각자가 자기 의사를 발표하는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다만 려수항쟁에 참가하였던 사람을 찾아내여 려수항쟁의 결과에 대하여 체험한바를 그대로 전하게 하였다.

첫 발언은 김승원이 미리 준비시킨 전라도태생의 젊은 의원이 하였는데 첫 마디부터 무척 자극적이였다.

《려수사건은 사건이 아니라 의거입니다. 항쟁입니다. 민족적봉기입니다.

려수는 조선사람이 더는 미국의 지배와 간섭을 원치 않으며 리승만독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민족의 의지를 천하에 보여준데 그 력사적의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참말로 국민적소망을 자기 활동의 본도로 삼으려 한다면 려수의 6천 영웅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말공부만 할 때가 아닙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항쟁투사들이 추켜들었던 기발을 받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과 더불어 생존하는 정치인으로 살아남을수 있습니다.》

첫 발언자가 격렬한 론조로 말머리를 떼놓자 그에 뒤따른 토론들도 앙양된 분위기속에서 열정적으로 벌어졌다.

한결같이 금후 당면활동과제를 반미, 반리승만운동으로 규정하자고 제기하였다.

마지막으로 황철산이 일어났다.

그는 이미 김승원과 협의한대로 미군철거안을 상정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회원들의 의지를 한곬으로 묶어내기 위한 취지를 가지고 발언하였다.

《나는 말장난을 그만둘 때가 왔다는 로의원님의 토론에 전적인 공감입니다.

그렇습니다. 광복후 이남땅에서 벌어진 반미운동은 막대한 피의 방출을 보이면서 3년째 계속되고있습니다.

국민의 생존과 겨레의 미래를 책임진 우리 의원들이 더는 우리 동포, 우리 형제가 당하는 수난을 방관시할수 없습니다.

미군은 더는 해방자도 아니며 벗이 아닙니다. 하나를 주고 열을 빼가는 미국이 더는 우리의 원조자가 아닙니다.

이제 더 우리가 민족이 당하는 아픔과 수치를 방관시한다면 정치인이기 전에 이 땅의 아들로서의 자격을 내놓아야 합니다.

미군을 몰아냅시다. 대구와 제주도와 려수에서 쓰러진 우리 겨레의 절규에 목소리를 합칩시다.

우린 이미 〈국회〉의장에게 미군철거안을 제기하겠다는것을 공식선언하고 그 취지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나는 〈동향회〉 회장으로서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정식 상정시킬것을 제의합니다.》

황철산은 이렇게 말하고는 책갈피에서 결의안초안을 꺼내들고 엄숙하게 랑독하였다.

미군을 즉시 철거시킬데 대하여 〈대한민국 국회〉는 민족자결이 독립국의 정치적기초로 된다는것을 확인하면서, 미군주둔의 군사, 정치적의미가 현 시점에서 희박하다는것에 류의하면서, 국가로서의 정권존재와 안보를 보장할수 있는 정예무력이 창설되였음을 인정하면서, 북조선에서 쏘련군 철수가 완료되였음을 고려하면서 미군철수에 대한 내외의 강력한 요구대로 미군을 쏘련군의 철수일정에 맞추어 즉시 철거시킬것을 결의하며 본결의리행을 위한 실무적조치를 취할것을 행정부에 위임한다.

황철산이 랑독을 마치자 우렁찬 박수가 터졌다.

결의안초안은 수정없이 《동향회》의 문건으로 채택되여 《국회》에 상정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모두가 결의안 뒤장에 자기들의 이름을 엄숙하게 써넣었다.

모임이 순조롭게 진행되여 김승원은 기뻤다.

다만 권영호의 거동에 자주 눈길이 돌아갔다.

이 회의에서 누구보다도 자기 주장을 강하게 펼듯싶던 권영호가 쓰다달다 일체 표현을 삼가하면서 남들이 손을 들어올리면 같이 손을 올리고 박수를 치면 마지 못해 따라서는것 같았다.

(어찌된 일인가?)

김승원은 길철에게서 권영호가 달라질것이라는 소리도 들은바가 있어 기대가 컸는데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그를 띄여보자 속이 허우룩하기 그지없었다.

부회장이 회모임에서 침묵을 지키고 꿔온 보리짝처럼 앉아있는것은 이상증세이다. 무엇인가 위축당한 자세였으며 못난 일에 나서지 않는다는 표현이 틀림없었다.

… …

《푹 꺼져든 상이였습니다.

전 돌아오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미군철거안을 성사시키는 문제는 매우 예민하면서도 판가름을 각오하는 투쟁이다. 그래서…》

김승원은 정시명이 무척 관심을 두고있는 인물이므로 가볍게 결심을 내놓을수 없어 예까지 저저히 엮어오다가 말꼬리만 남겨놓고 입을 다물었다.

정시명은 그 무슨 주장이 있는듯 한 김승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싶어 어서 말끝을 맺으라는듯 고개를 끄덕여보이다가 앞질러 말곬을 열어주었다.

《부회장이 그런 꼴이니 〈동향회〉성원들에게 주는 영향이 좋지 않겠구만.》

《옳습니다. 그래서 황철산회장의 의견을 말할것 같으면 그런 기회주의인간은 미리감치 전렬대오에서 추방해버리자는겁니다.》

김승원은 조심스럽게 전하며 제가 미안해서 목덜미를 슬슬 긁었다.

《추방한다고?…》

정시명은 김승원의 의사도 반영되여 있는 소리에 자못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김승원은 정시명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던지라 두볼이 벌깃이 물들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정시명은 크게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는듯 그의 제의를 썩뚝 잘라버리며 간곡하게 타일렀다.

《회장에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전하오. 그건 권영호와의 사업을 포기하는것으로 되오. 권영호와의 사업을 포기한다는것은 우리 사업의 후퇴를 인정하는것으로 되오.

권영호의 눈치를 보는 의원들이 여러명이 된다하지 않았소.

그리고 권혜숙동무를 저대로 놔둘수가 없지 않소.

어떻게 하든지 그를 건져내야 하오.》

정시명은 이어 《국회》일정과 《동향회》의 결의안을 정식 의정에 상정시키는 문제를 협의하고 나서 곰방대를 꺼냈다.

김승원과 헤여지자 정시명은 어쩐지 명치가 묵직해왔다.

김승원이 권영호문제에 대하여 자신이 얼마나 마음을 쓰고있는가를 잘 아는 사람이다. 저 사람이 헐치 않게 저 말을 꺼내놓기 위하여 아마도 열백번을 속으로 굴려보았을것이다.

일이 심상치 않다. 정말 권영호는 《국회》투쟁이라는 큰 일을 위하여 이제는 대담하게 무시해버리고 밟고 넘어가야 할 장애물이 아닐가?

결사의 각오가 있어야 하는 새로운 단계의 투쟁에서 하나같이 움직여야 할 투쟁대오의 부책임자가 아직도 어정쩡해서는 안될 일이다. 저들의 제의를 받아들이는것이 원칙적으로 옳은 결단일수 있다.

그러나… 정시명은 방금전에 김승원에게 주었던 대답을 상기하였다.

옳게 대답을 준것 같다. 《흥국상회》의 책임자로서 마땅한 립장을 지킨 대답이다.

정시명은 자기가 권영호를 만나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 이튿날 정시명은 어슬어슬해지자 길철이와 함께 그가 거처하고있는 조선호텔로 갔다.

한사코 막아나서는 길철이를 겨우 설복하였다. 안지생도 의원전용숙소에 나타나는것은 흔적을 남길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려수항쟁소식에 접하여 크게 흥분되여 있는 정시명의 걸음을 지체시킬수 없었다. 더구나 2단계의 《국회》투쟁을 설계하면서 절박한 과제로 내세운 권영호문제가 암초에 부닥친 이상 그의 결심을 돌릴수 없었다.

호텔접수실에서는 권영호의원의 아버지가 찾아와서 몇시간전에 밖에 나갔다고 하였다.

김구가 권영호의 아버지를 불렀다고 하더니 서울에 올라온 모양이다.

김구가 그와의 사업을 어떻게 했는지 못내 궁금하였다. 일이 잘되였다면 권영호에게도 좋을것이고 부정적이였다면 권영호에게도 나쁜 정서를 주게 될것이다.

《이왕 떠나온 길이니 기다립시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좋지 않을것 같습니다. 돌아가는게 어떻습니까?》

길철은 썩 내키지 않은 걸음이라 이렇게 권하였다.

《내친 걸음인데 돌아서긴…》

정시명은 접수대기실에서 신문을 찾아들고 눌러붙었다.

하는수없이 길철이 자기의 《국회》의원 보좌관증명서까지 맡겨놓고 열쇠를 받아가지였다. 그들은 권영호의 숙소인 5층 1호실에 들어가서 그를 기다렸다.

길철이 자주 창밖을 내다보며 권영호가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정시명은 권영호의 서가에 가서 책 한권을 뽑아들고 인차 글줄에 파묻혔다.

그러나 정시명은 혜숙의 아버지가 김구한테서 어떤 인상을 가지고 아들을 불러댔겠는가 하는 생각때문에 도무지 독서에 집중할수 없었다.

혜숙이 아버지 권씨가 동래를 떠난것은 어제 새벽이였다.

권씨는 김구의 부름을 황공한 심정으로 받아들고 경교장에 들어섰다. 일제때부터 김구의 이름을 구세주처럼 외워왔던 권씨는 광복이래 김구의 일거일동에 무턱대고 경모심을 가지고 주시해왔고 김구의 말이라면 섶을 지고 불속에라도 뛰여들만큼 열렬한 숭배자로 되였다.

그런데 김구는 권씨가 나타나자 인사도 없이 불호령이였다.

《자네가 동래에 살고있다는 〈한독당〉 후원회 부산책임자가 적실한고?》

권씨는 불러올린 영문을 알길 없어 아마도 한자리 줄려는가부다 하는 막연한 기대도 없지 않았는데 첫 마디부터 호령기고 마주보는 눈찌가 마뜩지 않아서 단박에 뼈마디가 지끈해왔다.

《그렇소이다.》

《자네가 이 백범을 따른다는 말도 적실한고?》

《두말이 있습니까.》

《백범이 어떤 사람이라는걸 알고있는가?》

《그렇소이다.》

권씨는 영문없이 성이 독같이 오른 김구의 앞에서 고양이앞의 쥐상이 되여 무르팍을 떨었다. 여차하면 대청에 끌려나가 곤장을 받든지 목이 건들거릴 형국이다.

《그렇다?… 그런데 이놈! 어째서 백범과 뜻이 일맥상통한 따님을 외인 취급하고 사위되는이는 문전퇴객하였단 말인고?》

《예?!》

권씨는 백범의 입에서 튀여나온 딸소리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저 두상이 그 일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리고 백범이 혜숙이년과 뜻이 일맥상통한다는것은 무슨 헌 소리냐.

그래도 혜숙이를 따님이라 정을 담아 불러주는것이 창황중에서도 귀가 번쩍 트이는 일이였다. 도대체 그년은 저 갈범같은 두상과 어찌된 연고가 있다는건가, 혹 이 집에 와서 드난살이라도 하는게 아닌가?

《네 이놈, 나살이나 건사한게 세상에 자랑할만 한 따님을 벌써 광복전부터 박대해왔다고 하니 그게 대체 혼맹이가 있는짓인고?

지금 이남땅을 둘러보면 어지럽기 그지없고 사람들 살아가는 모양새도 한심스럽기 그지없는데 그래도 따님은 늦은가을 국화처럼 제 모양 흐트러뜨리지 않는 어지러운 이 세상의 일점홍이라 이 아니 자랑인고.

페일언하고 자네 일은 참말로 그릇됨이 많네.》

《죄송합니다. 백범선생님.》

권씨는 아직 무슨 케속인지 알 길 없으면서도 이렇게 개올리는수밖에 없어 머리만 조아렸다.

《그래 이제 또 따님과 사위되는분 괄세하겠는가?》

《저… 그건…》

《저런 벽창호 봤나. 백범을 따른다면서 백범의 훈시에 뭘 꼬리를 달아 기우뚱할고.》

《황송합니다.》

《괄세하겠는가?》

《선생님의 분부이신데 무슨 저의 대답을 들으실게 있습니까.》

권씨는 엉덩이가 요글요글해와서 숨가쁘게 대답을 하였다.

《사위는 받자 하겠는가?》

《예… 뭐 그것도 선생님께서 바라신다면…》

《암, 바라고 말구. 얼마나 금쪽같이 귀한 사람들이라구.》

《그렇다면야…》

《허허… 좋네, 좋아. 그렇게 돼야지. 자, 이리 가까이 오게. 자네 해묵은 탈을 시원스럽게 벗어던지겠다니 내 술 한잔 내려네.》

김구는 권씨를 이 정도로 후려대고는 크게 웃으며 그를 끌고 융숭하게 차린 식당방으로 들어갔다.

김구는 아직도 얼떠름해 있는 권씨에게 술잔을 권하면서 자신이 평양에 갔다온 이야기부터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장군님을 뵈웠던 이야기도 상세히 전하면서 권혜숙이 장군님의 뜻을 앞장에서 받드는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딸이니 잘 돌봐주고 내세워주어야 한다고 여러시간에 걸쳐 각근히 당부하였다.

권씨는 그저 제 딸을 크게 자랑하는 김구의 말이 선뜻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죽을 죄를 졌노라는 말만 곱씹어 할뿐이였다.

권씨는 김구가 소매를 잡는바람에 그의 곁에서 하루밤을 함께 보내기까지 하면서 숱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구는 잠자리에 든 다음에도 혜숙의 이야기를 길게 하였다.

《부녀간의 정이란 하늘이 이어준 인연이 아닌가. 그러니 부녀의절이란 하늘을 거역하고 인륜법도를 깨치는 죄라 하겠거늘 항차 그 리유라는게 얼마나 황당한가.

따님이 그 어린 몸으로 일찍부터 광복성전에 나섰고 광복후에는 나라의 큰 재난인 국토량단을 막고저 사내들도 뒤걸음치는 어려운 길에 나섰거늘 이게 족보에 금문으로 올려 자자손손 전해야 할게 아닌가.

그런데 부친되는 사람이 그 리유 하나로 부녀의절이라니 무슨 당치 않은 수작인가.

자넨 〈한독당〉이라는게 뭔지도 모르고 후원을 하는것 같네. 자네 행한 일은 정말 불법무도한 불륜일세.》

김구는 권씨를 바래워주면서도 앞으로 딸을 보낼터이니 다시는 망녕된짓을 삼가하라고 재차 당부하였다.

김구의 집을 나선 권씨는 그 길로 동래로 내려갈가 하다가 아들을 찾아볼 생각을 하였다. 아직도 갈피를 잡을수 없어 권영호하고도 의논을 하고 싶었던것이다.

그는 조선호텔에 가서 권영호를 찾아가지고 곧장 강변으로 데리고나왔다.

권씨는 아들에게 김구를 만났던 이야기를 자초지종 다 들려주었다.

《나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구나. 백범선생이 그년의 일을 어떻게 그리도 잘 알고있는지…

그년이 도대체 어디에 가 있는것 같으냐. 좀 알아봤느냐?》

장탄식을 하는 권씨의 소리에 권영호는 눈이 둥그래졌다.

김구가 혜숙이를 안다는게 리해되지 않았던것이다. 그러면 혜숙이나 길철이가 김구수하의 인물들인가?

권영호는 권씨의 눈길을 피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도 참 무정하구나.》 권씨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였다.

《좀 찾아보려무나. 백범선생님이 혜숙의 행처를 알고있는듯 한데 대주지 않더구나. 난 점심차로 떠나겠다.

너도 서울에 붙박혀만 있지 말구 틈을 내서 한번 내려오도록 하거라. 내 전번편지에 대강 쓰기는 했지만 요즈음은 어찌된 영문인지 시청에서 우리 집재산목록을 만들어가지고 갔다. 집을 어떻게 받았느냐, 김양식장은 언제부터 관리하느냐 하고 끈끈히 묻더라.》

《그래요?!…》 권영호는 그 소리에 또 뒤통수라도 맞은듯 한길 되게 뛰였다.

《그래서요?》

《뭘, 그리고는 다시 만나자고 갔는데 아직은 소식이 없다. 털보녀석도 나가버렸다.》

《그놈은 왜요?》

《글쎄 무슨 조간인지 낸들 알겠느냐. 일자리를 딴데 봐두었다구 하더라.》

권영호는 뇌리에 번개치듯 떠오르는 예감이 있었다.

이건 리승만계의 도발일수 있다. 분명 그쪽에서 일으킨 바람이다. 그 바람이 벌써 동래에 들이닥쳐 집안기둥을 흔들어대기 시작한것이다. 집안기둥을 흔들어서 자기속에 가까스로 세워놓기 시작한 마음의 기둥을 흔들어보려는 모양이다.
저들의 비위에 거슬리니깐 그따위로 뒤에서 바람을 일으켜 울안으로 몰아넣자는 수작이다.

권영호는 눈섭이 바르르 떨렸으나 이내 찌르는듯 한 아버지의 눈길을 느끼자 대수롭지 않다는듯 헌헌하게 웃었다.

《그까짓거 내버려둬요. 〈국회〉의원은 신성불가침이예요. 괜히 이 금빠찌 달고다니는줄 아세요.》하며 양복깃에 달려있는 의원휘장을 들어보이며 부러 호기를 부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무엇인가 음험하고 무시무시한것이 자기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것 같은 막연하면서도 지꿎은 공포가 가슴에 쓸어들었다.

아버지와 함께 식당에 들려 저녁을 치르고 난 권영호는 그가 렬차에 오르는것까지 봐주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의 접수실에서는 매부가 방에서 기다린다고 일러주었다.

《매부라니?…》

권영호는 순간에 낯색이 재빛이 되였다. 혜숙이와 함께 만났던 길철의 얼굴부터 먼저 눈앞에 그려졌다.

무엇때문에 그 사나이가 나타났는가? 보복하러 왔는가, 아니면 다시 인연을 이어보려고 혜숙일 달고온게 아닐가?…

려수사건후 지금 정계가 혼란하기 그지없는데 그가 나타난것이 우연치 않다.

조용히 처리해버리려고 했던 사람이니 어데 숨어지내다가 십분 회계를 치르러 올수 있다. 아니 아버지에 대한 김구의 호출과 관계되는 일이 아닐가.

그는 쾅쾅 울리는 심장의 박동에 온몸을 떨며 마당에 서서 자기의 사무실인 5층 1호실의 불밝은 창문을 혼빠진 사람처럼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돌아서자니 《국회》의원전용숙소에서 쫓기는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권영호라는 위인이 그리도 배가죽이 엷어졌느냐.

그렇다고 또다시 매부를 잡으라고 경찰을 불러대는것도 비렬한짓이다. 아버지도 혜숙이와 사위될 사람소리를 그전과는 달리 정을 담아 하였다.

(에라, 다시한번 마주서보자. 그리고 혜숙이를 다시 만나보자.)

그는 용기를 내여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5층복도로 기울어지자 자기도 모르게 무릎이 후들거리고 또다시 속안에서 방망이질이다.

그는 만약의 경우에 대처할 준비를 하면서 잠시 자기 호실문앞에 서있다가 문을 활짝 열었다.

숙소는 두칸으로 되여 있는데 한방은 침실이고 또 한방은 사무실 겸 응접실로 사용하게 되여 있었다.

창문가의 쏘파에 두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방문이 벌컥 열리는바람에 고개를 돌린다. 한사람은 채수염을 길게 드리운 로인이고 또 한사람은 분명 매부인 길철이 천천히 일어서서 몇발자국 마주왔다.

길철과 권영호는 서로 쏘는듯 한 눈길로 노려보며 방안 한가운데에 장승처럼 뻗치고 섰다.

《처남, 이렇게 다시 찾아왔소. 이제야 자기 소개를 할 필요 피차에 없겠지요.》

하며 길철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권영호는 여전히 긴장하고 불안한 기색으로 길철과 그 뒤쪽에 앉아있는 정시명을 번갈아 살필뿐이였다.

《또 날 내쫓을 생각을 하는게 아니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난 이미 혜숙이와 부부간이 된 사람이고 당신에게 매부되는 사람이요. 오늘은 내앞에서 경거망동할 생각은 아예 거두시오.》

길철은 랭담한 어조로 인사말을 뱉아버리고는 쓰거운듯 쳐들었던 손을 내리우고 자기 자리로 물러났다.

권영호는 길철이 정시명의 곁으로 다가가 앉은 다음에야 감탕에 묻어둔 다리를 뽑아내듯 무겁게 발을 저겨디디며 맞은편 걸상에 가서 앉았다.

《이분은…》

길철은 권영호가 정시명에게로 경계하는 빛을 담은 눈길을 보내며 신경을 도사리는것을 보자 이렇게 소개말을 뗐다.

그런데 정시명이 쏘파의 등받이에서 허리를 떼고 스스로 자기 소개를 하였다.

《나는 정향이라고 하오. 〈흥국상사〉리사노릇합니다. 누이동생과의 관계를 말하면 난 그를 비서로 데리고있던 사람이요. 혹은 이 사람들 중매군 비슷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구태여 자기를 더 밝힌다면 나도 정의와 진리에 살려는 사람이고 겨레앞에서 나라의 통일위업에 나서겠노라 언약을 다진 사람이요. 따라서 난 미국놈들과 현 정권에 선전포고를 하고 나선 사람이요.》

정시명의 탈속한 소개말에 권영호도 아연해 하고 길철이도 놀랐다.

길철은 너무 섣부른 일이 아닐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상대가 아직은 그를 받아줄만 한 그릇이 안된다고 보고있었던것이다.

권영호도 그 무엇에 홀린듯 한 심정이였다. 당장 문을 박차고 도망이라도 치고싶었다. 좌익에 동조한다는 그것만으로도 교수대에 오를수도 있고 컴컴한 먹방으로 끌려갈수도 있는 때다.

공산당계 당원증만 발견되면 리유없이 3년간 징역을 가야 하며 공화국기발이 나오면 즉결재판으로 사형이 되는 판국이다.

자기도 동조하여 손을 들었던 《국가보안법》이 바로 그런 폭거를 법적으로 보장해주고있다.

그런데 저 수염쟁이가 감히 무슨 담으로 자신을 서슴없이 밝히는가. 그것도 의원전용숙소에 와서…

권영호는 자기에게 예리한 눈길을 보내고있는 정시명을 다소 신비한 눈빛으로 마주보았다.

보기 좋게 패워진 눈확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이 유정하고 훤칠하게 벗어진 이마와 그밑에 진하게 가로 지른 새까만 눈섭이 인상적이다. 우뚝 솟은 코마루와 철장같이 무거워보이는 입술이 다시는 열리지 않을듯 꾹 닫혀있는데 반석의 무게와 의지가 온몸에 어려있는듯싶었다. 뜯어보니 채수염을 길게 드리우기는 했어도 아직은 정력이 왕성하고 젊음이 느껴진다. 언젠가 한번 봐두었던 모습이다. 언제였더라?…

권영호가 기억을 더듬는데 정시명이 말을 이었다.

《우린 구면이지요.… 생각나시오? 언젠가 〈서울신문〉 녀기자와 인터뷰를 했던 일이?…》

《예… 그때 함께 오신 편집부장선생이?!…》

《허허… 그렇소. 그날 권선생을 만났던 기자가 바로 김승원부회장 부인이시오. 그땐 내가 우리 혜숙일 내쫓은 권영호라는 인간의 진짜 모습을 알고싶어 따라갔지요.》

《예, 그랬군요. 그날 제가 인사불성이였습니다.》

《아니 난 그날 좋은 인상을 받고 돌아왔소. 남매가 가는 길은 달라도 참 엇비슷한데가 많다구… 그리고 언젠가는 남매가 한길에 들어서게 되리라는 믿음도 가졌고…》

《그러니 우리 〈동향회〉부회장님과도…》

《잘 알지요. 혜숙이도 그분을 잘 알고요.…》

《아, 그렇군요.》

권영호는 자기도 어쩔수 없는 그 어떤 강한 충동에 떠밀려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굽석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자기 소개를 하였다.

《저는 권영호라고 합니다. 지금은 〈국민당〉에 소속되여 있고 〈국회〉안에서 징계분과 위원장으로 있습니다.》

《다 알고있소. 내 오늘 여기로 찾아온것은 첫째로 당신 누이동생의 혼사를 성사시킨 사람으로서 인사를 받고픈 생각에서였소.

중매란 잘 서면 떡 서말이요, 못 서면 뺨 세매라 했는데 어디 오빠가 주는 인사가 어떠한지 궁금하기 그지없단 말이요.

뭐 듣자니 뺨 세개가 차례질 판이라는데 그건 좀 억울해.

이 사람으로 말하면 우리의 애국전선의 큰 사령관격이구 사람됨으로 말하면 이 서울장안에서도 견줄이 없는 깨끗하고 진실하고 결바른 인간이요.》하며 정시명은 씽긋 웃어보였다.

정시명의 그 웃음이 방안에 서려든 긴장한 불안으로 탁해진 공기를 가볍게 정화시켜주었다.

길철이는 자길 앉혀놓고 춰올리는 그 말에 무색해져서 웃고 권영호는 그의 이야기에 끌려들어 시름을 잊고 벙긋거렸다.

《둘째 찾아온 리유는 이 나라의 백성된 마음으로 〈국회〉의원 권영호선생에게 청원하려고 왔소.

미군철거와 관련한 문제요.

그럼 첫째문제부터 풀어나갑시다.

먼저 보여드릴게 있소. 이건 권혜숙동무가 나에게 보내온 편지요.》

《혜숙의 편지요?!》

권영호가 정시명이 내미는 편지를 받아들며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혜숙인 지금 어디 있습니까?》

《빨찌산에 가 있소.》

《예?! 빨찌산이라구요…》

권영호의 살집좋은 얼굴이 단박에 재빛이 되여 소스라치듯 부르짖었다.

정시명은 그의 모습을 엄숙한 눈으로 보며 말을 이었다.

《이건 산으로 오르기 전에 동래에서 내게 보내온 편지요. 먼저 권선생이 보신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거기에 빨찌산에 들어간 리유도 있소.》

정시명이 내밀고있는 흰 봉투를 받아드는 권영호의 손이 가볍게 떨었다.

정시명은 곰방대를 입에 물고 편지를 읽어가는 권영호의 옆모습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편지를 단숨에 읽고 난 권영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있다가 다시 편지를 더듬어보고는 혜숙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는 종이장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어깨를 떨기 시작하였다.

《처남, 진정하시오. 울고만 앉아있을 때가 아니요.》

길철이 무겁게 깨우쳐줘서야 권영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면서 《리사님, 용서하십시오. 방금전에 전 아버지를 바래주고 온 길입니다.

혜숙이때문에 아버지도 고민이 큽니다. 저 매부님앞에도 면목이 없지요.

오늘은 여러가지로 괴로운 날입니다. 수고스러운대로 오늘은 돌아가주십시오. 제 좀 생각을 해보고싶습니다. 절 좀 봐주세요.》하고 애원하듯 간절하게 부탁하였다.

정시명은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철이도 따라서려고 일어나는데 권영호가 앞차대를 에돌아 급히 다가왔다.

《매부!》 그는 길철의 손목을 와락 틀어잡았다.

《매부는 가지 말아주오. 내방에서 하루밤 지내며 이야기나 합시다.》

《고맙소. 처남!… 그런데 난 정선생님 모시고 가야 하오. 내 래일 오지요.》

길철이 손목을 잡힌채 매달리는 그를 떼여놓을수도 없어 자못 딱한 어조로 말했다.

정시명이 그 소리에 크게 웃으며 나무랬다.

《길선생, 뭘 그러시오. 처남이 인연을 다시 잇고저 하는데 하루밤을 함께 회포를 나누시오. 권선생을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오늘 저녁은 내 한마디만 하고 물러나겠소.

당신의 누이동생 혜숙이도, 당신의 매부인 우리 길철선생도 나라가 아끼는 귀한 사람들이요. 헌데 당신때문에 저 귀한 사람들의 사랑은 깨지고 혜숙은 편지에 있는것처럼 오빠와 부모가 나라에 지고있는 죄를 씻겠다고 총을 잡았소. 당신같이 외세에 기생하면서 국민의 적이 된 자들을 쇠붙이로 징벌하는 싸움에 나섰단 말이요.

그런데 당신은 요전번에 또다시 누이동생앞에 큰 죄를 졌소.

당신이 손을 들어준 법이 혜숙이부터 올가미를 걸어놓게 되여 있는 법이라는걸 당신도 잘 알지 않소.》

《리사님!… 그건…》

《본의가 아니라 타의였다, 이 말인가요?… 그게 무슨 변명거리가 되오. 이젠 엎지른 물이지. 다시 주어담을수야 없지.

그러나 이젠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총화해야 하오. 무얼 위해 살아왔는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무엇을 위해 살겠는가,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 당신은 〈국회〉의원이요. 〈국회〉의원이라면 반드시 자기의 행동에 론거를 가지고있어야 하오. 그런데 당신은 론리가 없소. 우린 조선사람이요. 조선의 피를 가지고 조선의 얼로 살아가야 할 조선의 아들이요. 외세에 매달려 민족을 등지는건 이 나라의 호적을 버리는 길이요, 조상을 버리는 길이요.

한번 더 권고한다면 미국놈들과 절교를 하시오.

이 땅의 넋으로 살자면 딴 길은 없소.

결단을 내려야 하오. 그리고는 움직여야 하오. 이 눈치 저 눈치 봐가며 이쪽저쪽으로 오락가락 하지 말고 정의와 량심이 가리키는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하오. 내 목숨 위태롭다고 걱정이 될 때면 피바다가 된 제주도를 생각해보시오.

6천이 쓰러진 려수를 생각하시오. 권혜숙이 틀어잡은 총을 생각하시오. 동포의 피에 젖은 절규에 정치인들도 귀구멍을 크게 열어놓고 자기들의 맥박도 맞춰야 할게 아닌가.

우리 혜숙이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한 한길에서 청춘을 바쳐온 이 나라의 장한 딸이요.

난 전번에 처음 만났을 때 남매가 한길에 들어서게 될것이고 매부와도 인연을 다시 이어갈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에 이번 다시 이렇게 문턱을 넘어섰소. 자, 난 가겠소.》

정시명이 제 먼저 방안을 나섰다.

문이 닫기자 길철이 다시 미안쩍어 하는 기색을 짓고 량해를 구하였다.

《처남, 날 리해하여 주시오. 우리 리사님의 신변에 대해서는 우리 동지들이 모두가 념려하고있습니다. 지금 저분에 대하여 전국적인 수배령이 내려있소. 오늘 처남 만나러 오는 길도 내가 한사코 막았는데 처남을 그대로 내쳐놓아서는 안된다고 고집을 해서 이렇게 됐소. 날 리해하여 주오.》

《그렇군요. 알만합니다. 내가 또 자기 생각만 했소. 그럼 안녕히 가시오.》

권영호는 길철의 뜻이 인차 가늠이 되고 그럴수록 목젖이 뜨끈뜨끈해 와서 더운 소리로 말하며 인차 손목을 놔주었다.

《따라나오지는 말고… 방에서 헤여집시다.》

권영호가 돌아서려는 길철을 와락 끌어안았다.

《매부! 내 죽일 놈이요!》 권영호의 울대뼈가 크게 움씰거렸다.

《처남! 됐소. 됐다니깐… 이제는 그런말 꺼내지 마오. 굳어진 인생길을 바꾸는게 헐하겠소… 날 찾으려면 김승원선생께 알아보시오.》

《김의원?… 아, 알겠소. 부디 조심을 해요.》

길철은 잠시후에야 그의 포옹에서 풀려나와 정시명을 총총히 따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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