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좌절이 가져온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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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앞에, 겨레앞에 대죄를 졌습니다.》
정시명에게 《국가보안법》의 채택과정을 상세히 보고하고 난 김승원은 자기의 가슴을 살진 두주먹으로 텅텅 두드렸다. 커다란 좌절앞에서 그 둥글둥글하던 모상이 쑥 가라앉은것 같았다. 눈빛이 꺼지고 목소리가 쉬고 금시 통곡이라도 크게 터져나올듯 하였다.
《죄로 말하면 내가 더 크오. 그런 정황을 미리 예견하지 못한 내가 책임이 더 크오. 김선생이야 전렬에서 뛰고있었으니 이 일, 저 일을 살펴볼 겨를이 있었겠소. 내가 주변을 따져보며 문제점을 잡아내야 하는건데 설쳤소. 큰 교훈이요.》
《정선생님, 아무리 봐야 난 아무래도 그 철새같은 인간들을 다스려 낼 재목이 못됩니다. 이제라도 용단을 내려주십시오. 이번 싸움이 뭐 누구의 얼굴이나 체면을 봐줄 일입니까.》
김승원은 자신을 사정없이 채찍질하며 진심으로 청원하였다.
정시명은 그의 순하고도 절절한 빛이 서려있는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심정이 가히 짐작되였지만 오히려 자기를 랭혹하게 타매하는 그에게 더욱 믿음이 가고 정이 갔다. 겨레앞에서 받아안은 사명감에 고뇌를 씹고있는 김승원의 량심이야말로 애국하는 이 나라 충신들의 걸음걸음에 비껴야 할 보석같은것이 아니겠는가. 그것만 있다면, 그것만이 변하지 않는다면 실패를 만회하고 보다 큰 열매를 따올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것이다.
그러나 결코 이번 투쟁을 실패로만 볼것도 아니다. 이번 투쟁을 통하여 미제와 리승만일파는 국회안에도 제놈들의 도전세력이 강력히 존재한다는것을 재인식할것이다. 보안법을 둘러싼 싸움은 인민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줄것이다.
《김선생, 진정하오. 돌아가서 한 이틀 머리를 쉬오. 이번 실패의 교훈을 잘 찾아냅시다. 이제는 미군철거를 위한 본격적인 투쟁을 잘 준비해서 한번 서울정계를 들었다놓기요. 어떻게 모든 일에서 다 쾌재만 올리겠소.》
김승원은 어두운 눈빛으로 창밖만 우두커니 내다보다가 점심상이 마련되였다는 례영의 소리에 일어났다.
김승원은 민순임이 각별히 정성껏 마련한 뚝배기 토장국을 몇숟가락 뜨는둥마는둥 하다가 이내 숟가락을 놓았다.
정시명은 속이 새까매있는 김승원의 심정을 생각하여 더 권하지 않고 떠나가는 그를 묵묵히 바래주었다.
방안에 홀로 남아 서울 일간신문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회의장에서 분노의 노성을 터뜨리고있는 김승원의 불사신같은 모습이 신문에 크게 나 있다. 주먹을 높이 들고 두눈을 무섭게 지릅뜬 모습이였다. 웬만해서는 성내는 일이 없이 만사를 대범하게 넘기는 사나이에게 이렇게도 용맹스럽고 강직한 모습도 있었던가 싶다.
이 사진과 기사는 회의장에 취재를 갔던 김승원의 처 윤미향이 직접 찍고 쓴것이라 한다. 남편의 처절한 모습을 사진기의 렌즈에 담을 때 그 녀자의 심정인들 여북했으랴.
김승원을 위로하느라고는 했지만 너무도 커다란 패배를 두고 지금 정시명도 깊은 회오와 쓰라린 비분을 금할수 없었다.
남조선사회의 반동화를 가속화시킬 악법을 큰 물의가 없이 넘겨보내고 이제 치를 떨고 땅을 친들 깨진 사발이다. 그 후과가 얼마나 치명적이겠는가 하는것을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반정부운동의 사소한 움직임도 국가적범죄로 몰아가는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전체 인민을 대상하는 살륙의 형틀이고 도살대이다. 벌써 신문사들에서 입수된 자료들에 의하면 신문의 편집진에서 정부에 대한 비판의 론조를 느슨하게 할데 대한 지시들이 나온다고 한다.
언론의 어용화, 반동화가 시작된 셈이다. 《보안법》이 몰아온 바람질이 시작된것이다.
이제 생활의 모든 령역에서 《보안법》의 칼날이 닥치는대로 번쩍거리며 겨레의 선혈로 강토를 물들이게 될것이다.
거족적인 투쟁으로 이 악법의 통과를 저지시켜야 하였는데 생각해보면 너무 소극적이였다. 《국회》안의 투쟁으로써만 성사시킬수 있다고 생각한것이 애초에 오산이였다. 사회여론이 끓고 로동자, 농민이 들고일어나고 빨찌산도 이 구호를 들고 행정부안에서도 론의가 분분해서 안팎협격을 들이대야 했다.
어제 저녁 길철이한테서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리승만과 무쵸와의 막후 책동자료가 들어왔다. 리승만과 김성수사이에 벌어진 비밀모의자료도 들어왔다.
리승만은 불원간에 예견되는 내각개조에서 《한민당》에 중핵적인 자리를 준다는것을 조건부로 《한민당》계의원들이 《국가보안법》을 무조건 지지해줄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수의계》의 회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놓고 협박과 회유, 금전매수 등 각 방면의 공작을 들이댄 자료도 들어왔다.
그런데 이쪽은 무사태평이였다. 투쟁을 김승원에게 맡겨놓고 그들의 단순한 산수적계산에 기대를 걸고 탕개를 풀어놓고있었으니 이야말로 얼마나 무책임한 죄인가.
호상간의 협동도 잘되지 못했다. 길철이가 며칠전에만 자료를 가져왔어도 결과가 다르게 될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아, 겨레의 머리우에 들씌워질 무서운 재앙거리를 눈을 시퍼렇게 뜨고 스쳐보내고 말았구나.
김승원의 이야기를 다시 굴려가며 자신의 실책을 뼈아프게 타매하던 정시명은 권혜숙의 오빠가 《수의계》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두고서도 생각이 복잡하게 엉켜들었다.
끝내 권영호를 돌려세울수 없다는건가.
김승원은 그 인간에 대하여 마구 저주를 퍼부었다.
《난 그 희멀끔한 상통을 한대 후려치지 못한게 지금도 후회가 됩니다.
혜숙이 탈가한 리유가 이제야 짐작이 됩니다. 한덩굴에 달리는 오롱이조롱이라고 했는데 한배속에서 나온 그놈이 어쩌문 혜숙이와 그리도 판판 다릅니까.
선생님, 이젠 권영호에 대해 미련을 버립시다. 이 남녘에 그리도 사람이 없기로서니… 길선생 잡아먹겠다고 나섰다는 그 더러운 놈이 난 처음부터 눈밖에 보입디다. 그래도 이따금 처신하는게 혜숙이다운데가 있구나 하고 다행으로 여겨왔는데 이번에 박쥐구실하는걸 보니 막 역겹습니다.》
(권영호!…)
그 이름에 곁묻어 권혜숙의 달덩이같이 복스럽고 환한 얼굴이 다가서는것 같다.
그러니 혜숙이네 문제도 끝내 풀어갈수 없다는건가.
정시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승원은 돌아갔지만 방안에는 그가 쏟아놓은 이야기들이 꽉 들어차서 귀전을 윙윙 울리고 온몸을 들쑤시고 그냥 마음속을 후락후락 휘저어대는것 같다.
그는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가 도로 책상우에 올려놓고 방을 나섰다.
울타리에서 따온 햇당콩꼬투리를 까고있던 례영이가 소붓이 일어섰다.
《어데로 나가시려나요?》
《아니…》 정시명은 고개를 가로 젓고 넓지 않은 뜨락을 무겁게 거닐었다.
금호동의 제일 유축진 곳에 있는 이 집에 온것이 열흘이 된다.
두칸짜리 살림집인데 정시명이네가 이 집으로 오자 주인은 자기 집을 내주고 울타리옆에 붙어있는 사랑채로 나가 살았다.
주인은 칠순에 가까운 늙은이인데 광복전에는 반일운동에 나서고 광복후에는 아들, 며느리를 애국운동에 떠밀어준 뜻 높은 지사였다. 아들은 혁명조직의 위임을 받고 전라도지방에 가있었다.
주인은 슬하에 여나문살되는 손녀를 끼고 살고있었다.
그는 정시명이 집에 오자 대문밖에 싸리를 한바리 날라와서 광주리 엮는 일을 벌려놓고는 낮에 밤을 이어 파수군노릇을 충실하게 맡아주고있었다.
닷새후이면 또 안지생이 다른 거처지로 옮기자고 찾아올것이다.
정시명은 대문을 열고 울타리밖에 나섰다.
례영이 일손을 멈추고 정시명을 따라나섰다.
대문앞에서는 여전히 로인이 봉당에 퍼더버리고 앉아 광주리를 솜씨있게 엮고있었다.
《나오셨소.》
로인이 정시명을 반기며 광주리를 밀어놓고 담배쌈지를 꺼내든다.
《하루에 얼마나 엮어냅니까?》
정시명은 로인의 옆에 쭈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뭐 하나도 되고 어떤 때는 하나반정도 엮습지요.》
《광주리 하나가 얼마에 팔립니까?》
《대중하지 못합지유. 요즈음은 쌀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기도 하니 광주리값도 삼사십원에서 오를락내릴락한다우.》
《그럼 한달이면 얼마나 수입이 들어옵니까?》
《부지런히 한달을 보내고보면 천원정도는 들어오지유. 허지만 화페개혁후로 물가가 자꾸만 치달아올라 어데 돈이 돈값에 납니까. 게다가 싸리를 구해들이는 삯을 치르고 나면 오륙백원이나 손에 남는지…》
《오륙백원이면 그럭저럭 한달 생계비는 되겠습니다.》
《허…》 로인은 얼기설기 굵은 주름발이 질러간 얼굴에 어설픈 웃음을 짓더니 다시 일감을 잡았다.
《그렇지유. 오륙백원이면 지금 시가로 손녀애에게 하루건너 엿가락이나 물려주고 이따금 소주 한병 사들여 얼추 취해볼수도 있구요.
헌데 정권이라는게 서더니 다달이 새라 새로운 이름을 가진 세금이 생겨납니다. 물세요, 전기세요, 거주세요, 국방세요, 동회세요, 호조세요,… 요즈음은 또 터밭세와 굴뚝세까지 물고 도로세라는것도 받아가는 판입니다.
이래 뜯기우고 저래 뜯기우면 손에 남는건 백원에 조금 우수리가 앉을가 한다우. 꼭 왜정말기를 보는것 같쉐다.》
《네, 그렇군요. 그래 아드님한테서는 뭘 보태오는게 없습니까?》
《아들이요? 허허… 그 녀석 이 애비한테 손내밀지 않으면 다행이지. 허허. 거야 뭐… 통일이 되는 날까지 나라에 병역살이 내보낸셈 칩니다. 허허…》
로인은 아들소리가 나오자 신명이 나서 말끝마다 이발이 하나도 없는 이몸을 보이며 즐거운 웃음을 담는다.
주름진 얼굴에 호함지게 떠오르는 그 웃음이 주림과 고달픔속에서도 통일을 그리며 일일천추 기다리는 이 나라 인민의 절절한 고뇌와 비애와 희망이 그대로 비껴있는것 같다.
《로인님, 고맙습니다.》
정시명은 속안이 뭉클해져서 진심으로 인사를 하였다.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암, 참아야지. 우리 녀석 추석, 단오에 들리군 하는데 꼭 그렇게 얘기한다유.
〈아버님, 아버님이 피흘려 싸운 덕으로 우린 광복의 날을 떳떳이 맞았지요. 이제 저희들이 피 흘리는 덕으로 통일이 오면 이 모든걸 옛말로 외우며 잘 살아봅시다.〉허허… 이러지요. 난 기다립니다.》
《로인님, 기다리십시오. 그날이 꼭 옵니다. 백성이 잘 사는 날이 꼭 옵니다.》
정시명은 그의 터슬터슬한 손을 꼭 감싸잡으며 부르짖었다.
《그럼요, 오구말구요. 지금이야 김일성장군님이 우리 삼천만 백성의 머리우에 해님처럼 계시지 않습니까.
내 아들, 며느리 앉혀놓고 이야기하지유.
김일성장군님은 우리 이남백성을 이 꼴로 그냥 놔두지 않으실거다. 그분을 믿고 기다리느라면 언젠가는 여기도 북조선같은 백성의 천지가 밝아올게다.
그때면 이 나라 백성의 5천년 한이 다 풀리게 될게다. 난 그날을 꼭 봐야겠다. 그러니 애비 걱정말고 열심히 해다오. 허허…》
《로인님!》
정시명은 그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깊이 숙이였다. 자기도 이름할수 없는 거창하고 든든한것이 온 육신에 쭉쭉 뻗치는것 같다. 어깨가 무거워오고 흉중이 뻐근해왔다.
이게 이 나라 백성의 본심이다. 이 나라 민심의 향방이다.
통일은 반드시 오며 통일이 오면 백성의 5천년 한이 풀리리라는 그 절절한 소망이 이 나라 민심의 추이이다. 그런데 통일애국을 역적모의로 몰아대게 될 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다니…
정시명은 로인의 옆에 장시간 앉아서 말없이 싸리가지를 방망이로 잘근잘근 두드려 섬겨주다가 해떨어질무렵에야 례영이와 함께 마을앞에 있는 동뚝길에 나섰다.
그는 천천히 동뚝길을 걸으며 다시 김승원이 남기고 간 이야기들을 되살려보았다.
무엇인가 서서히 줌에 잡혀온다. 이번에 당한 커다란 실패가 가져온 교훈이 명료한 륜곽을 드러냈다.
《국회》연단을 매국과 분렬의 연단으로부터 애국과 통일의 연단으로 만들자면 그 담당자들부터 열렬한 애국자로, 통일선각자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선결과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국회》의원들에 대하여 출신과 현재의 동향만 생각하면서 그들의 이른바 정의감과 자존심을 리용하고 그를 기초로 삼고 투쟁을 벌려왔다.
젊은 혈기가 발산하는 열정과 배심 그리고 량심의 자그마한 파편쪼각들을 하나하나 모아들여 왔다.
이것이 가지는 제한성, 한계선이 이번에 드러났다.
높은 강도의 투쟁에 따르는 요구가 제기되자 정의감이나 배짱이라는 연약하고 보잘것 없는 영양소에서 공급되는 자양분은 밑창이 드러나 실조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주저앉을수밖에 없다.
이제는 그들자신에게 더 높은 인간으로서의 높이를 설정해주어야 한다. 그들도 시대의 용용한 대하에 뛰여들게 해야 한다. 그들도 우리에게는 통일은 반드시 올것이며 통일된 이 나라는 세상에 떨치는 만민복지의 지상락원으로 될것이라는 인민의 찬가를 따라부르게 해야 한다. 그 도도한 인민의 대합창에 목소리를 합칠 때만이 이 땅에서 생존할 조선사람의 권리가 있다는것을 그들자신이 깨닫게 해야 한다.…
이렇게 이번 투쟁의 좌절이 가져온 교훈을 찾아내자 자신에 대한 무거운 자책이 가슴을 지지리 눌렀다.
나는 사람을 키우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큰 열매부터 따려고 하였다. 대상들의 준비정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목표를 조급히 설정하였고 승리에 대한 과학적인 타산과 있을수 있는 제반 장애요소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 참으로 주관에 빠진 독단이고 투기였다. 때늦은 후회지만 다시 빠져들어서는 안될 함정이다.
이제부터의 투쟁은 미군을 철거시키고 나라의 자주화를 실현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보다 고급한 정치전이다.
이 투쟁의 주역이 되자면 죽기를 두려워안하는 투사가 되여야 하고 백성과 호흡을 같이 하는 애국자가 되여야 한다. 중요한것은 미군철거를 현 시국에서 최대의 애국으로 접수하도록 해야 한다.
대안은 다른게 없다.
권영호도 마찬가지다. 그가 애국자로 되기를 기다린다는것은 감나무밑에서 입 벌리고 익은 감 떨어지기 바라는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언제인가는 익은 감 꼭지 물러나 떨어지련만 무슨 세월에 기다리고있는단 말인가.
권영호와도 이제는 본격적으로 사업해서 나라에도, 가정에도, 혜숙에게도 의로운 인간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례영이 안지생에게서 받아온 긴급보고가 그의 일정을 다시 결심하게 하였다.
첫번째 보고는 김구가 다시 입산할것을 결심하였다는것이였다.
《백범선생은 이렇게 저에게 말했습니다.
… 내가 다시 입산을 결심한것은 김장군께 다진 맹약을 지키자는데 있다.
요즘은 무쵸대사가 여러 사람을 겨끔내기로 보내오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이번에 정부를 다시 짜는데 총리로 들어오라는것이다.
내가 요구한다면 헌법도 내각책임제로 바꾸어주겠다 한다.
내가 나라의 주권을 틀어쥐고 통일회합을 성사시키고싶은 생각도 바이 없는게 아니지만 미군이 있고 미국이 국사에 매양 훈수질하는 이상 그것은 헛생각이다.
그러니 난 속세에서 벗어지는게 좋을것 같다.
남조선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여온 내가 정부수석으로 들어가면 결국 나는 나라분렬의 원흉으로 되고 김장군앞에서 죄인으로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내가 더는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용수가 없는것이다.
그러니 백범이 속세에 남아서 할 일이 뭘고? 계룡산 마곡사에 들어가서 살아온 인생길이나 더듬어 후손들에게 백범의 유지를 남기고싶다.…
백범선생은 맏며느리만 데리고 가겠다고 하면서 길떠날 차빌 하라고 분부하였다.》
정시명은 안지생의 보고를 읽고나서 (이거야말로 눈섭에 달린 불이구나. 만사를 제쳐놓고 백범부터 만나야겠어. 한시바삐…)하고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시명은 지금 이 시각에도 보따리를 꿍지고있는 김구의 모습이 방불히 떠올라 조바심을 금치 못하며 다른 자료를 펼쳐들었다.
그것은 송호정이 보내온 보고자료였다.
《제주도에 또다시 본부에서 박진경대령이 파견되여 갔다.
하우스맨고문이 직접 선발하고 임무를 주었다.
한편 제주도 〈토벌대〉 19련대 부련대장이 어제 륙군정보국 방첩대에 체포되여 끌려왔다.
부련대장은 한렬이 장악하고있는 사람인데 주로 앞에서 활동한 사람으로서 자기가 모든 책임을 스스로 맡아나섰다. 아마도 교수대에 오를것 같은데 리승만이 직접 령을 내렸으니 손을 쓸수 없게 되였다.
김정원과 한렬은 내가 한주일전에 소환하여 최원기한테 보냈다.
최원기려단에서 14련대가 제주도 19련대와 배비변경하게 되여 출동한다.
그런데 14련대는 어제 제주도출동을 거부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좌익선에서 벌린것 같다. 우리를 앞질러 불을 건 셈이다.
나는 김정원과 한렬에게 현지에서 사태를 료해하고 있을수 있는 진압작전시 혼전을 벌리라고 지시하였다.
무쵸가 나에게 긴급호출을 요구하고있다. 려수와 제주도관련문제일것이다.
리승만도 어제 저녁 나에게 려수가 크게 터지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라고 호통질이다.
그런데 려수가 단독접전에는 매우 어려운 지대이다. 장기전에는 견디지 못하므로 김정원과 한렬에게 반변부대들을 될수록 빨리 려수반도로부터 산악지대로 들어가도록 설득해보라고 하였다.》
문진국이 보내온 자료에도 심중한 문제가 있었다.
《리범석은 〈국가보안법〉의 덕을 군대부터 보게 되였다고 하였다.
그는 지금 군대안의 빨갱이가 5천명인데 〈국가보안법〉이면 삽시에 숙군을 끝내게 될것이라 한다.
어제 국방장관실에서 열린 관계자모임에서 륙군정보국의 장도영국장과 방첩과장 김창룡이 국군안의 숙군명단을 시급히 작성할 비밀명령을 받았다.》
김명호가 보내온 자료에도 깊이 주목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다.
《제3차 〈유엔조선위원단〉이 도착하였다.
사무국장 써버스는 이렇게 말했다.
… 빠리에서 유엔총회가 열린다. 총회에서 남조선정부를 심의하고 승인하게 된다.
그런데 총회에서 분명 쏘미량군의 철거라는 문제가 국가독립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수 있다.
쏘련군이 철수를 완료하게 됨으로써 우리 위원단은 미군주둔의 당위성을 유엔총회에 납득시켜야 한다.
이것이 우리 위원단의 당면과제이다.》
길철도 매우 심상치 않은 문제를 보고하여왔다.
《미군 씨아이씨소속으로 있던 최능진이 리승만과 미대사관 노불의 조종밑에 반정부쿠데타음모를 꾸미고있다.
최능진쿠데타에는 300여명의 서북청년단깡패들이 망라되여 있다.
박격포를 포함한 중무장까지 하고있다.
최능진은 정부청사와 〈국회〉청사를 점거하고 총리장관 몇명과 〈국회〉의장 혹은 부의장을 비롯한 〈국회〉관계자 몇명의 목을 칠것을 계획하고있다.
최능진의 쿠데타는 1936년 일본 도꾜의 극우파들이 벌린 세칭 〈2.26사건〉과 비슷한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최능진으로 하여금 여러차례 경고장(김구의 거처)을 찾아가게 한것이다.
이것은 뒤날에 최능진의 쿠데타를 김구의 조종으로 밀어붙이려는데 있다.
최능진은 한때 상해림정에서 김구의 주변에서 돌아쳤다고 한다.
결국 리승만은 본 쿠데타를 통하여 1석3조의 효과를 거두려고 한다. 즉 리범석을 비롯한 정부안의 도전자들을 거세하고 사사건건 따지고드는 〈국회〉를 어용화하며 김구를 내세워 자기를 견제하게 하려는 무쵸나 미국무성의 움직임을 사전봉쇄하려는것이다.…》
정시명은 자료들을 여러번 곱씹어 읽으면서 제기된 정황을 분석하고 그에 대처할 계획을 대충 세워나갔다.
어느 하나의 문제들도 소홀히 스칠것이 없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당장 움직일것을 요구하는것은 김구문제다. 김구의 입산도 막아야 하겠고 그를 정치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전히 모살해버리려는 리승만의 위험천만한 거사로부터 그를 구원해야 한다.
차라리 최능진의 쿠데타기도를 김구를 통하여 공개해버리는것이 좋을듯싶다.
이렇게 되면 무쵸 몰래 리승만을 업고 돌아가는 노불도 정체를 발가내여 그들사이에도 큰 균렬이 생겨날수 있을것이다.
그는 묵은 돼지같이 흉측한 리승만의 몰골을 그려보았다.
그놈이 어지간히 로망기가 든 모양이다. 안팎으로 조여드는 압력앞에서 이 늙은 로구가 내키는대로 매국배족행위를 할수 없으니 발광증으로 탈출구를 마련해보자는 심산이다.
(세칭 《2. 26사건》이라…)
정시명은 눈에 다시 밟혀오는 자료의 한 구절에 쓰겁게 웃었다.
일본력사에 권력집단의 파벌싸움으로 기록되여 있는 《2. 26사건》이란 일본내각의 온건파를 노린 극우파의 실력행사를 일컫는 사건이다.
1936년 당시 일본 내각과 륙군성안에서는 쏘련에 대한 즉시 침공을 주장하는 황도파와 준비부족으로 쏘련에 대한 서부로부터의 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통제파사이에 갈등이 커가고있었다.
이속에서 황도파의 륙군성 극우익장성들이 1 400여명의 중하층장교와 병사들을 동원하여 이해 2월 26일 불의에 도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일본국회와 경시청, 륙군성, 도꾜도청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수상과 각료들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 정변에서 황도파는 통제파의 두목으로서 수상직도 지낸바 있는 다까하시 사이또를 살해하고 륙군성 군무국장도 총살하였다.
반란이 확대되여가자 통제파는 반란지도자들을 겨우 회유하여 요구조건을 접수한다는 전제밑에 회담을 벌려놓았다. 그 사이에 일본의 정예부대가 반란자들을 포위공격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일본정계의 우익화를 다그치는데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놓았다.
리승만이 최능진을 내세워 벌리려는 쿠데타는 그 배후세력과 의도로 보아 《2. 26사건》에 비할바가 아니다.
리승만은 《국가보안법》이라는 형틀을 마련했으니 이제는 그 형리들마저 제놈의 심복으로 다 꾸려놓을 차비이다. 그리고 자기의 지배체계에 항거하는 그 어떤 세력도 더는 이 땅에서 배겨낼수 없다는 철저한 지배와 굴종의 봉건적왕권의식을 남조선의 전반에 걸쳐 확립할것을 기도하고있는것이다.
이걸 분쇄해야 한다. 서둘러야 한다. 시간을 놓치면 리승만의 우익정변을 놓칠수 있고 그렇게 되면 또 다른 위험이 먹장구름처럼 몰려들수 있다.
이날 정시명은 김명호와 마주앉아 당면한 정치적동란을 타개할 묘책을 찾아 밤을 지새웠다. 부닥친 매듭이 너무도 많았다.
이튿날 아침 정시명은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김구를 찾아떠났다.
그에게 여러가지 일감을 들고가게 된것이 다행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