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불 붙는 대지

2

서울역은 여느때없이 살벌하였다.

수원역에서부터 철갑모까지 눌러 쓴 경찰들이 방망이를 휘두르며 여러차례 차칸을 훑으며 돌아갔는데 서울역에 이르자 또 한차례 검열이 진행되였다.

《왜 이리 야단들이유?》

정시명의 맞은편 자리에서 꺼떡꺼떡 졸다가 차가 덜커덩거리며 서는바람에 잠에서 깨여난 40대의 신사가 앞뒤문을 걸어놓고 경찰들이 손님들의 짐과 몸을 뒤지자 눈을 사납게 부라리며 물었다.

《갑호비상계엄령이란 말이요.》

지나가던 경찰이 어느새에 그의 푸념을 듣고 퉁명스럽게 쏴붙였다.

《그건 왜 벌려놓은게요?》

《챠 이 량반 시국 돌아가는데 영 밤중이군.》

법석 소동을 부리고 나서야 승객들은 차칸에서 풀려났다.

역구내의 여기저기에서 검정옷을 입은 경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승객들을 개찰구로 몰아가느라고 꽥꽥거리며 돌아갔다.

개찰구에서는 여러명의 경찰들이 주런이 서서 좁다란 틈새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가시눈길로 훑다가는 무엇인가 의심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은 옆으로 끌어내다가 문초를 하였다.

아마도 선거를 치르고나니 서울정국이 팽팽해진 모양이다. 이미 제주도에서 선거후의 첨예한 좌, 우익의 충돌을 보고 온터여서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서울풍경이 리해되였다.

개찰구에서는 분홍색샤쯔에 파란 치마를 받쳐 단정하게 양장을 한 리순애가 살틀하게 그들을 맞아주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순애가?!…》

뜻밖에 처녀가 나타나는바람에 정시명도 놀라고 례영이도 놀랐다.

순애가 자기들의 제주도걸음을 알길없는데 차림새로 보면 길 떠날 차비가 아니다. 분명히 자기들을 기다리는중인것 같다.

정시명의 뇌리에 언뜻 불길한 예감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어서 가십시다. 아성씨가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아성이가?…》

정시명은 의아한 표정을 가무리지 못한채 례영의 손목을 잡고 총총히 걸음을 옮기는 처녀를 따라섰다.

역앞마당을 꿰질러가니 풍을 친 찦차가 서 있었다.

그들이 다가가자 자동차문이 열리며 김아성이 운전대를 잡은채 고개를 돌리고 벙긋 웃는다.

《안동지가 마중을 나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래?…》

정시명은 더 캐여묻지 않고 뒤좌석에 례영이와 함께 올랐다.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순애까지 오르자 찦차는 큰 길을 따라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한강다리와 마포구 차단소에서 두차례 검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김아성이 시뻘건 줄을 가로지른 특수경찰관 명함장을 내들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통과하군 하였다.

그런데 자동차는 서병남의 집이 있는 약수동이 아니라 그 반대방향으로 달리였다.

정시명은 자기가 떠나가있는 사이에 거처지에서 무슨 일이 터진것이라고 짐작하였으나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김아성의 뒤모습만 지켜보았다.

그는 은연중에 자기네를 영접하는 김아성과 순애의 침착하고 천연스러운 거동에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언제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게 태연히 막힘없이 자기할바를 정확히 한다.

한해전에 그들을 처음으로 만나던 생각이 떠올라 정시명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즐거운 미소가 감돌았다. 총각은 지나치게 자유분망하면서도 직선적이고 처녀는 너무 연해보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 아쉽게 느껴지던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세련되고 틀이 잡힌 믿음직한 모습이다.

(투쟁속에서 투사들이 자라고있구나. 싱싱하게…)

자동차는 어느 한 벽돌양옥집 앞마당에서 멈춰섰다.

김아성이 세번 짧은 경적을 울리니 대문이 열리고 안지생이 나타났다.

《선생님, 그럼 저는 가겠습니다. 안형, 안녕히 계십시오.》 안지생이 그에게로 다가가더니 《닷새후 저녁시간에 와주오.》하고는 물러섰다.

《그럼 회장선생님…》

김아성은 둥글모자에 손을 올리며 정시명과 례영에게 넉살좋게 히쭉 웃어보이였다. 그리고는 순애를 옆에 앉힌채 오던 길로 씽하니 자동차를 몰아갔다.

정시명이 대문안에 들어서는데 뜻밖에 치안국 수사지도과장 김창기가 신발을 꺾어신고 마중나왔다.

《회장선생님, 먼길을 수고로이 다녀오셨습니다. 이게 저의 집입니다.》

김창기는 반가와하며 손님들을 본채옆에 있는 사랑채로 안내하였다.

문을 여니 민순임이 반갑게 맞아준다.

정시명은 확실히 무엇인가 상서롭지 않은 일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상대쪽에서 말 꺼내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사랑채에 들어갔다.

김창기가 《안선생, 그럼 난…》하고 안지생의 귀바투 뭐라고 속삭이더니 본채로 돌아갔다.

《닷새동안 여기 계셔야 하겠습니다.》

안지생의 말이였다.

《김창기동무에게 페가 되지 않을가?… 그런데 어찌된 일이요?》

《선생님이 떠나간 다음날 서병남선생댁이 중부경찰서놈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습격?… 어째서?》

《김창기동무가 알아본데 의하면 그전에 박정인선생댁에 계실 때 드나들던 반장년이 그 양자놈을 끼고 지금껏 선생님을 찾아 다녔다고 합니다. 그놈들은 박선생댁에서 우리가 철수한이래 선생님의 행방을 찾다가 박선생까지 까닭없이 사라지자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중부경찰서에 고발하였다고 합니다.

그 거리에서 풋낯이나 있는 사모님이 서병남댁에 드나드는것을 우연히 봤다고 합니다. 넌덜머리가 나는 놈팽이들이였습니다.

선생님이 제주도에 가신게 천만다행입니다. 떠나신 바로 이튿날 새벽에 기습하였는데 사모님더러 주인 간곳을 대라고 을러멨답니다.》

《강원도에 약초구입을 떠났다고 그냥 뻗치였지요.》

민순임이 이렇게 이야기에 끼여들다가 《사모님이 용케 둘러댔습니다.》하고 안지생이 치하하는바람에 말을 뚝 그치고 얼른 부엌으로 나갔다.

《음, 그런 일이 있었구만. 헌데 거기에 문건이 있었는데…》

정시명이 걱정을 하였다.

《서병남선생의 태풍신호를 받고 아성동무가 뛰여다녔습니다. 놈들이 집안을 벌컥 뒤질 때 아성동무가 저와 함께 갔댔습니다.》

《동무가 그런 일에 나서야 되겠소?》

정시명이 나무라기는 하면서도 뒤말이 궁금하여 마저 들어보자는듯 안지생을 쳐다보았다.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너무 급하다나니 당장 내세울 사람이 생각나야지요. 그래 아성동무더러 저를 꽁꽁 묶게 하고 저는 죄인이 되여 함께 갔습니다.》

《안선생을 묶어가지고 갔어요?》 례영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안지생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의 침실에서 아성동무의 손찌검을 몇번 당하기까지 했지요.》

《어마나 저걸 어쩌나…》 례영이 아성이가 안지생에게 매를 든 모습이 방불한듯 비명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아성동무가 참 그럴듯하게 연기를 합디다. 이 집 손님과 련계가 있는 놈을 잡아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대질심문을 하는겁니다. 사모님더러 이 사람 모르느냐고 을러멥디다.》

《허허, 아성이 원래 그런 장기가 있는 사람이야.》

정시명이 안지생의 소리에 즐겁게 웃었다.

《기습을 해온 중부경찰서놈들이 김아성동무의 서슬에 질려 마당으로 비켜나간 사이에 문건을 빼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심문을 위해 데려가겠다고 아예 사모님까지 자동차에 모셔가지고 여기로 줄행랑을 놨습니다.》

《허허, 일은 그럴듯하게 해제꼈구만. 수고들 했소. 그런데 위험은 멋들어지게 넘겼는데 후환이 없을가. 김아성동무에게 의심이 가게 해서는 안되오. 그리고 김창기동무의 집을 리용하는것도 좋지 않고…》

《아성동문 뒤일은 자기가 처리하겠으니 걱정 말라고 했는데 다른 기미가 없는것 같습니다. 이 집으로 말하면 량주가 다 무던하고 그리고 등잔밑이니 다른 념려는 없을것 같습니다.》

안지생이 마음을 놓게 하느라고 루루히 설명하자 정시명도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서병남선생은 자기 집을 처분하고 경찰들이 얼씬 못하게 서대문구에 더 요란스러운 집을 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여기에 계시도록 하십시오.》

《서선생의 집을 처분하면 어쩐다는거요? 그렇게 되면 주인이 더 의심을 살게 아니요.》

《필요한 대책을 세우려고 합니다. 실은 서선생의 아들이 강릉헌병대에 가있는데 놈들이 의심을 사지 않도록 수를 써보려고 합니다. 김창기동무의 아주머님과는 주인이 경찰서장시절에 신세를 졌던 장사군이라고 소개를 하였습니다.》

《좋소, 안동무의 결심대로 하오.》

정시명은 안지생의 말에 여러가지 미흡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캐여묻지 않고 웃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앉은뱅이책상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았다.

안지생은 며칠동안 자기가 진행한 일들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김구, 김규식과의 사업정형을 이야기한 그는 말쑥한 이마에 주름살을 말아 올리며 심각한 어조로 마지막말을 하였다.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백범선생이 계룡산 마곡사에 들어가겠다는겁니다. 아예 정계에서 꺼져버리겠다는 심산입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정시명은 벽에 붙이고있던 웃몸을 일으켜 세우며 눈을 크게 떴다.

《김신녀석이 계속 그렇게 보채는것 같습니다.》

《김신이?…》

김신이란 김구의 아들이다. 항공부대에 들어가 비행사훈련을 받고있었다.

《아버지에겐 바깥세상이 소란스러우니 절간에 가서 세상을 등지고 여생을 편안히 보내라고 합니다. 미국놈들의 꼬드김같기도 하고…》

안지생은 예상했던대로 정시명이 크게 놀라와하자 말끝을 흐리마리하며 제사 죄스러운듯 고개를 숙이였다.

《계룡산 마곡사라… 옛날 백범이 숨어지내던 절간이구만. 백범이 절간에 가서 중노릇하자는건가. … 그 절은 어느 갈래요?》

《거기 중들은 대체로 〈한민당〉패거리라는 말도 있습니다. 광복후에 일제잔재숙청바람에 기겁을 한 자들이 돈주머니를 공양으로 바치고 그 절간에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백범선생이 이제 와서 무슨 뒤걸음질이요. 또 〈득수반지 무족기현애철수장부아〉라는거요?》

정시명은 이미전에 김구의 면전에서 뜯어버렸던 그 고리타분한 족자가 생각나서 불쾌하게 부르짖었다.

《그런것만 같지는 않습니다. 백범선생을 입산시켜 외계와 두절시켜놓고 차후에 백범명의로 평양을 공격하려는 정략적인 타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허, 무슨 쓸개빠진 수작들인지… 아, 얼마전까지만 해도 미국놈들은 량김(김구, 김규식)을 부대통령으로 내세우려고 안달복달하지 않았소.》

《그분들이 한사코 도리질하니 그따위 꿍꿍이로 백범선생을 영영 매장해버리려는것 같습니다.》

안지생은 그 영민한 두뇌로 놈들의 계략을 짤막짤막하게 발가놓았다.

정시명은 단호한 어조로 즉석에서 지시를 떨구었다.

《안동무, 미국놈들의 흉계를 그대로 내쳐둬서는 안되오. 그분들이 평양에 가서 모처럼 환생을 하고 돌아왔는데 하루를 살아도 그 길에서 빗서지 않도록 해야지 세상을 등져버리면 이제 백범선생에게서 남을것이 뭐가 있단 말이요. 나도 인차 시간을 내도록 하겠소만 안동무가 단단히 옆에서 신칙을 하오. 그래서는 안되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며칠후 미국대통령의 특사로 무쵸라는 놈이 서울에 온다고 합니다.》

《무쵸?》

《백범선생의 말에 의하면 트루맨대통령의 측근인물이라 하는데 앞으로 서울에 대사로 들어앉을 예정이라 합니다. 제주도일때문에 온다고도 하고 군정청페지와 관련한 실무적인 문제들때문에 온다기도 하고…》

《김승원동무를 만나게 해주오.》

정시명은 김승원을 만나 《국회》의원선거에서 승리한것도 직접 《축하》해주고 《5. 10단선》의 전모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싶었다.

《국회》선거란 사실상 류혈전이다.

김승원의 선거구는 그의 고향인 전라도 고창이였다.

그가 맞선 상대는 리승만의 지원을 받는 《독촉》계의 인물과 리범석의 지원을 받는 인물이였다. 해당 계렬의 중진이라 자처하는 인물들과 겨루고 이겼으니 그게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길철의 말에 의하면 열변가인 김승원의 목이 자주 잠기여 연설도중에 중지한적도 여러번이고 세번이나 졸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시명은 선거후 그를 만나지 못하고 제주도로 떠났었다. 그 어려운 싸움에 뛰여들어 분을 쪼개며 싸워가는 바쁜 일정에 묶이여 뛰고있는 사람이라 길철을 통하여 축하를 보내주고 선거의 실태조사와 다문 열명정도라도 동료가 될만 한 의원을 찾아보라는 임무를 전하게 했을뿐이였다.

정시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안지생에게 길철부터 먼저 보내달라고 하였다. 정보통인 길철부터 만나야 최근정세의 변화된 전모를 파악할수 있기때문이였다.

《그다음에 김승원선생과 김명호선생순서로 보내주오.》

《알겠습니다.》

정시명이 그를 바래워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김창기가 술병을 들고 건너오고 그뒤로 그의 처가 커다란 함지박을 안고 들어왔다.

정시명은 안지생을 도로 불러들여 김창기내외가 마련해온 음식상에 마주 앉았다.

안지생을 돌려보내자 정시명은 썰렁한 방안에 홀로 앉아 곰방대에 담배를 다져넣으며 안지생이 들려준 이야기를 곰곰히 생각하였다.

평양에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에 대하여 하지가 집중적인 공격을 들이대고 그 측근들을 공개적으로 감시하고있는것은 세상에 이미 널리 알려져있다. 우익계 신문들도 이에 합세하여 그들의 평양방문을 까짚어가며 《실패한 인생》이니 《철새의 변신》이니 하며 불어대고있다.

이것은 물론 하지나 리승만의 입김을 쏘이고 하는짓이다.

정시명은 하지가 그들과 벌린 맹렬한 론전에 대해서도 보고받은바가 있었다.

제주도를 떠나기 전에 안지생이 그런 자료를 보고하여왔다.

 

김구와 하지의 담화:

하지- 백범선생, 지금 이남신문들은 당신의 북상을 실패작이라고 평가한다.

김구- 천만에, 나의 북상은 성공작이다. 내가 평양으로 간것은 내 일생의 실패가 아니라 영광에로 이어진 쾌거이다. 북상이 남겨준것을 구태여 보여달라면 한마디로 애국하는 인간의 자세와 립장에 대한 재인식이다.

하지- 여론에 귀를 기울이는것은 정치가가 자기를 지탱하게 하는 첫째가는 비법이라고 한다. 나도 요즈음 당신들에 대한 험구에 많이 접하고있다.

김구-나에 대한 험구를 어디서 꼭지를 떼는지 내 모르는바가 아니다. 어쨌든 난 북으로 갔던것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북에 가보니 거기는 주객의 지위와 위치가 옳바로 잡히였다. 그러나 서울에는 유감스럽게도 주객의 지위와 위치가 전도되였다. 그래서 금번 남북련석회의에서 남조선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찾도록 하자는데 일치합의되였으니 이것이 즉 우리의 성공이다.

하지- 당신의 말뜻이 리해된다. 《5. 10단선》도 그 지위를 당신들에게 돌려주려는 미국의 선의의 표시가 아닌가.

정부가 서고 그에 권력을 이양하면 당신의 고충은 스스로 풀릴것이다. 그러니 당신도 정부를 일떠세우는 일에 나서야 한다.

내가 서울에 와서 들어둔 소리가 있다.

옛날 가난한 농부로서 문무를 겸비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는 제갈량도 촉나라왕이 세번 찾아왔을 때에는 따라나섰다고 한다. 내가 당신을 찾아온것이 수삼차가 되니 동양례법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김구-당신이 동양례법까지 알아가지고 날 찾아온데 대해 사의를 표한다. 하지만 나라의 반쪽만 쥔 《정부》에는 들어가지 않을것이다. 이것은 내가 서울에서도 평양에서도 만인에게 언약한것이니 그를 뒤집는것은 누워서 침 뱉는 어리석은 일이다.제갈량이 촉나라왕 류비를 따라 나선것은 류비의 청탁에 공감을 느꼈기때문이였다.

정치가를 움직이는것은 감정이나 례법이 아니라 사상과 지향이라는 말을 명심하기 바란다.

 

김규식과 하지의 담화:

하지-당신은 평양에 가서 우리와의 합의를 깨버렸다. 당신이 련석회의석상에서 한 발언들이나 기자회견에서 북을 찬양하고 외군철수와 통일정부수립을 제창한것은 물론 당신의 의향이 아닌줄을 안다.  이제라도 립장정리를 해야지 않겠는가.

김규식- 난 이미 평양에서 군정청경무부장 조병옥이 그 비슷한 말을 했다는걸 들은바가 있다. 뭐 나의 발언이 북조선의 사촉에 의한것이니 돌아와서 남에서 설 자리가 없노라 위협을 했는데 나를 꼭두각시처럼 생각하는것은 당신과 조병옥이 조금도 기울지 않는다.

하지- 당신은 세상에 그런 의심을 들을 여지를 남기고 떠나지 않았는가. 남북련석회의의 의의를 무시하겠다고 맹약하고 서울을 떠난 당신이 정치인으로서의 평생지조를 거두고 북측과 손을 잡을수 있는가.

김규식- 정치가의 리념이란 고정불변한것으로 되지 말아야 한다. 참된 정치가란 력사의 진실에 발을 맞추어 자기의 리념을 부단히 교정해나가야 한다.

북에 이번에 가보니 남에서 듣던것은 다 오전이였다. 그러니 불가불 남에서 가졌던 예전의 태도를 바꿀수밖에 없지 않는가.

북에서는 모든것이 자주적이며 건설적이였다. 이남과는 완전히 딴판이였다.

내가 애착을 가질만 한 그런 정치를 당신들이 허용할수 있는가?

그렇다면 정부구성에 참가하는 문제도 고려해보겠다.

……

 

이 자료들을 접하고 정시명은 마음이 든든해서 제주도로 떠났다.

그런데 김구가 은둔해버리겠다니 무슨 뼈대없는 소린가.

정시명은 김구의 속마음을 짚어보느라 이마살을 찡그리고있다가 혀를 끌끌 찼다.

남북련석회의와 함께 량김과의 사업도 끝이 났는가 싶었는데 그렇게 생각한것부터 오산이였다.

적이 여전히 맹렬하게 그들을 제쪽으로 끌어당기려고 갖은 오그랑수를 다 쓰고있는데 그들과의 사업에서 손을 떼서야 되겠는가. 오히려 통일애국의 길에서 동지로 된 그네들을 더 따뜻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의연히 거목으로 솟아있도록 보듬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량김뿐아니라 그를 두령으로 받들고있는 민족주의세력들이 다 오직 통일조국건설의 한길로 나가게 하여야 한다.

이날 저녁 정시명은 일찌기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본 가지가지 일들이 악몽처럼 떠돌아 종시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어느 고리부터 뚫고나가야 되겠는가.

제주도실황을 놓고말하면 천하 첫째가는 일거리가 그쪽 일로 잡히는데 서울에 도착하자바람으로 들은 이야기들을 놓고 보면 또한 어느하나 뒤로 미룰일이 없다. 적들은 쉴새없이 이쪽저쪽으로 뒤를 쫓아오고있다. 마무리됐다고 뚜껑을 덮어둔 일들을 다시 꺼내놓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이제 길철이나 김승원은 또 어떤 걱정거리들을 안고 올것인가.

(넘을수록 험산이라… 그래도 참을성있게 넘고 또 넘어가야 한다. 이제 무엇이 문제인가? 미군 나가라! 구호는 명백하다. 피바다가 된 제주도의 원한의 절규다. 더는 늦출수 없다. 미군 철거! 여기에 자주가 있고 통일이 있다. 어떻게?… 어떻게?…)

어둠이 짙게 서린 창밖을 바라보며 곰방대만 매만지던 정시명은 뇌리에 감겨드는 시름에서 헤여나지 못한채 창호지가 환해질 무렵에야 잠시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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