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경무대의 안방
2
그 이튿날.
서울장안에는 또 한차례의 돌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국회》의장 신익희가 참석한 가운데 20만의 어중이떠중이들이 서울운동장에 모여 《반공대회》라는것을 벌려놓았다.
여기서 《대한민국》이 타도해야 할 무리는 공산도배들이므로 《반민법》을 즉각 페기하고 《반공법》을 내올데 대한 결의안이 채택되였다.
이날 저녁에는 서울안의 각 경찰서장들과 사찰계장들이 업무중지를 선포하였다. 그들은 련명으로 반민특별위원회 개조, 반민특별경찰대 해산, 경찰의 신분보장을 걸고 48시간안에 대통령이 대답할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경무대 비서실에 제출하였다.
불응하면 전국의 경찰이 총 사직할것이라고 을러멨다.
이날 밤 자정무렵에는 전국각지의 경찰들이 일제히 반민특별위원회와 반민특별경찰대를 습격하여 무기를 압수하고 기물을 닥치는대로 두들겨부시고 성원들을 공공연히 테로하였다. 감방에 구류된 친일파들을 풀어놓기까지 하였다.
정시명은 즉각 《국회》에서 맞불질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반민법》을 만들어낸 《국회》 소장파가 들고일어났다.
《국회》 소장파의 긴급제의에 따라 며칠후에 비상《국회》가 열렸다. 《수의계》회장 황철산이 국가의 립법기관을 감히 모욕한 《반공대회》의 막후조정자와 대회조직자들을 처벌할데 대한 결의안을 채택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을 둘러싸고 《국회》가 두패로 갈라져 격렬한 싸움을 벌리였다.
싸움은 끝내 신익희가 《반민법》을 채택한 의장으로서 《국회》의 법안을 뒤집어엎는 《반공대회》에 참석한것을 공식사죄하는것으로서 끝났다.
한편 경찰들의 반변을 조사하고 처벌할데 대한 건의서를 채택하여 《국회》내무분과위원회에 위임하였다.
《수의계》의원들은 거듭되는 승리에 기세가 충천해졌다.
김승원이 《국회》쪽에서 미국놈들과 리승만에게 정면타격을 가하는 포문을 열어놓고 급사로 갈겨댈 때에 조태준이 다음과 같은 보고를 보내왔다.
…리승만과 리범석의 사이가 벌어지고있다.
그 계기는 리범석이 《족청》을 《독촉》에 병합시키지 않는다는것이다.
나는 리범석에게 《족청》을 리승만에게 넘겨주는것은 자신을 정치적고아의 신세로 만드는 자살행위라는데 대하여 력설하고있다.
리승만은 우익청년단체들인 《대동청년단》과 《족청》을 《독촉》의 청년회에 편입시켜 《대한청년단》으로 만들려고 하고있다.
이것은 리승만의 독재의 지반을 만들어주는 매우 위험한 시도이다.…
정시명은 이 보고자료를 놓고 김명호와 마주 앉았다.
이미 예견했던대로 리범석을 총리로 밀어줌으로써 리승만의 정치적립지를 약화시킬수 있는 세력을 행정부안에 세워놓았다.
리범석이 총리로 들어앉자 윤치영과 조봉암을 비롯한 여러명의 장관들이 리승만의 축에서 떨어져나와 리범석에게 가서 붙었다.
김명호는 리승만이 제놈의 독재적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권재편성을 집요하게 추구하고있으므로 이를 파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승만에게 제놈이 마음대로 좌우지할수 있는 정치적지반을 안겨주면 민족반역을 아무런 장애도 없이 거침없이 벌리게 될것입니다. 그것이 금후에 가져올 재난은 엄청날것입니다.》
정시명은 그의 주장에 동감을 표시하였다.
《〈국회〉안에서 리승만의 매국행위를 제압하기 위한 투쟁은 이미 시작되였소. 소장파의원들이 주역으로 나섰소. 그러면 행정부안에는 주역을 어떤 인물로 내세워야겠는가. 난 리범석을 축으로 하여 도전세력을 편성할수 있다고 보오. 누구를 붙여놓으면 좋겠소? 력량편성부터 해봅시다.》
그들은 제마끔 자기 의견들을 내놓았다.
김명호는 무임소상이 된 리윤영에게 김아성을 다시 붙여놓는것이 어떠냐고 했다.
정시명은 반대하였다.
김아성이 리윤영을 쥐고흔들기에는 책략이 부족하다는것이였다. 그리고 리윤영이 서울에 와서 리승만밖에 의지할데가 없는 처지이므로 그를 리승만과 맞세운다는것은 가능성이 없었다.
문제는 리범석을 흔들어대야 한다.
정시명은 조태준을 옮겨앉힌것을 이야기하자 고개를 저었다. 조태준은 《족청》쪽에 앉아있으므로 영향력이 이전같지 않다는것이였다.
리범석은 행정권에 옮겨앉으면서 《족청》안에서 자기를 대신하는 인물이 나오는것을 바라지 않은데로부터 집단지도체제를 만들어놓고 그들에게 지휘권을 일임한 이래 한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는것이였다.
그들은 담배를 태우며 장시간 리범석의 턱밑에 접근시킬 인물을 두루 물색해보았으나 끝내 골라내지 못하고 헤여졌다.
김명호가 며칠후에 리청천의 밑에 있던 몇명의 수하인물들을 빼내여 총리부에 넘겨주었다.
《대동청년단》을 원쑤처럼 미워하던 리범석은 리청천에게 반기를 들고 자기에게로 돌아선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힘으로는 리범석을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더구나 리범석은 그들의 명단을 《족청》에 넘겨주어 우선은 훈련소에서 수련을 시키고 검토단계를 걸친 다음 《국군》편성을 할 때 써보자고 하면서 총리부에 접근시키지 않았다. 아직은 측근에서 멀리하겠다는 수작이였다.
새로운 공격전의 주역을 선발하기 위한 사업이 긴장하게 벌어졌다.
그런데 하루는 물색하던 적임자가 정시명에게 제발로 찾아들었다.
정시명이 례영이와 함께 시내에 나가 《국방부》고문으로 들어앉은 류동명을 만나 최근에 진행되고있는 《한미행정협정》을 알아보고 돌아오는데 회색코트를 입은 사나이가 자기를 따르고있었다. 례영이 먼저 알아차리고 나직이 귀띔하였다.
《아버님, 분명 꼬리가 붙은것 같습니다.》
정시명이 그 소리에 뒤쪽을 살피니 확실히 미행이였다.
서병남집에 이사하여온 후로 아직까지 다른 기미가 없었는데 어떻게 되여 이런 일이 생겨났는지 모를 일이다.
정시명이 미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시를 여러번 갈아타고 서울시내를 종횡무진 달리는데도 미행자는 훈련된 솜씨로 집요하게 따라왔다.
어느 골목에서 불쑥 차에서 내린 정시명은 미행자를 공원의 으슥진 곳으로 달고갔다. 그런데 우연히 김아성이 몇놈의 경찰들을 데리고오다가 마주쳤다.
김아성이 례영의 곁을 지나치다가 우정 부딪쳐 손가방을 떨어뜨려놓았다.
《아 참 미안합니다. 아가씨.》
김아성이 허리를 굽혀 례영의 손가방을 들어주면서 정중하게 사죄하였다.
례영이 재빨리 위험신호를 하였다.
《공원입구에서 기다리겠어요. 꼬리가 달렸어요.》
공원입구에서 례영이를 만나 미행자를 알아낸 김아성은 경찰한명을 보내여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집요하게 따라오는 회색코트사나이를 단속하게 하였다.
사나이는 바쁜 사람을 왜 잡아놓고 시끄럽게 구느냐고 으르딱딱거리다가 김아성이 경무대 근무경찰관 명함장을 휘둘러대서야 응하였다.
그는 자기가 리범석총리의 개인비서 문진국이라는 사람인데 자기가 찾던 사람을 금방 거리에서 보고 따라오던중이라며 빨리 놓아달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당신이 알아서는 뭘하겠소. 내 오랜 친구되는 사람이요. 당신은 도대체 무슨 리유로 날 단속하는거요?》
사나이는 리범석을 업고있는 사나이라 권력의 냄새를 풍기며 맞갖지 않게 따지고들었다.
그러나 김아성은 여전히 눈을 부라리며 걸고들었다.
《찾는 리유는 뭐요?》
《이봐, 경찰은 제 할 노릇이나 하란 말이요. 까마귀옷을 입으면 세상이 온통 코밑으로 보이는 모양이군. 경무대면 단줄 아오. 두고보자.》
시간이 지체되자 문진국은 정시명일행을 따르기를 단념하고 투덜거리며 가버리였다.
김아성은 경찰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공원입구로 갔다.
정시명은 례영이와 함께 공원입구에 있는 측백나무숲에서 김아성이 사나이를 다불리고있는것을 재미나게 보다가 김아성이 팔을 활활 내저으며 다가오자 숲에서 나왔다.
《선생님,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김아성이 종전의 서슬푸르던 기상이 언제였더냐 싶게 싱글벙글 웃으며 허리를 깊이 숙이였다. 그 다부진 몸이 경찰옷에서 튀여나오기나 할듯 팽팽하고 어깨가 떡 버그러진게 보기만 해도 믿음직스럽다.
《허허, 역시 홍길동이야. 귀인이 되여 이렇게 나타나다니.》
정시명이 껄껄 웃으며 반갑게 맞았다.
《순애랑 잘 있소?》
《뭐 저도 만나본지 두어달 잘됐습니다.》
《그래?… 오, 요즈음 순애가 장교합숙으로 거처를 옮겼다 했지. 순애가 일을 잘하오. 빨찌산동지들에게 참 요긴한 자료를 보내군 하는데 순애동무의 공로요. 그래 어디서 굴러온놈이라우?》
《큰 일 날번 했습니다. 리범석의 개인비서라고 합니다.》
《리범석의 개인비서?》
《시내에 나왔다가 눈에 띄여보고 따라오던중이라 합니다. 제말로는 뭐 선생님이 오랜 친구라나요, 자식…》
《오랜 친구? 이름은 뭐라구?》
《문진국이라나요.》
《문진국?!…》 정시명은 벌써 오래전에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던 이름에 깜짝 놀랐다.
《아십니까? 정말 친구가 옳습니까?》
《허허… 친구지… 날 잡겠노라 자객까지 끌고다니던 오랜 친구지, 허허…》
정시명은 다시 껄껄 웃으면서도 어지러운 기억이 되살아나 심기가 무직해졌다.
또다시 모해하려고 따라왔는가.… 그러면 왜 경찰더러 위험인물이니 잡아달라고 고소하지 않았는가.
정시명은 그가 리범석의 개인비서라는 소리에 구미가 동하기도 하였다.
수원훈련소장으로 있을 때 조태준이 앞으로 건드려보겠다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조태준은 지내보니 뼈대가 굵은 놈이라고 평가하였다.
《큰 일 날번 했습니다. 누님이 모시고 다니기를 잘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따라다녔을가?》
김아성이 례영에게 물었다.
《〈국방부〉청사앞에서부터인데 얼마나 검질기게 따라다니는지… 정 못되게 굴면 좀 혼내주려고 별렀어요.》
《누님이요?! 어떻게요?》
《다 방법이 있어요.》
례영이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하자 김아성이 《누님이 대단하시네.》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정시명도 껄껄 웃었다.
김아성은 정시명이 돌아서자 오늘은 자기가 바래드리겠다면서 그냥 따라나섰다. 그는 길가에 나서자 곧 택시를 불러세웠다.
셋은 승용차를 타고 서병남의 집으로 향했다.
마주치는 경찰놈들이 금줄을 두른 둥글모를 쓴 김아성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올리군 하였다. 그때마다 김아성은 손바닥을 척 이마전에 틀스럽게 올리며 거드름을 뺐다.
《아성의 팔자가 과시 상팔자군.》
《선생님이 제 팔자를 고쳐주었지요.》
김아성이 너스레를 부렸다.
《허허, 팔자 고쳐주는 사람이 따로있을가. 제멋에 사는게 인생이라는데 아성이도 제가 갈 길을 제가 찾아낸거지.》
이렇게 흔연하게 말하면서도 정시명의 생각은 깊어졌다.
정말 김아성이 이 길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저렇게도 구김살 하나 없는 웃음을 안고 살겠는가. 자기 삶에 대한 긍지, 오늘의 인생에 대한 희열, 래일에 대한 믿음이 청년을 씩씩하고 용감하고 의젓하게 다스려주는것이다.
참말로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을 아름답게 해주는것은 애국이다. 애국에 뜻을 둔 사람들의 모습이야말로 고생은 해도 당당하고 시름은 많아도 희망찬것이다.
집에 도착한 정시명은 인차 전화로 총리부의 비서실을 찾았다.
외출을 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집에다가 전화를 돌리니 녀자가 싹싹하게 인차 바꿔드리겠다고 했다.
잠시후 상대방의 늘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오? 말씀하시오.》
《총리부의 문진국씨가 맞는가요?》
《예, 그렇습니다. 내 문진국이요. 당신은 누구요?》
《나는 심양서 살던 정향이올시다.》
그러자 대방의 목소리가 정중해졌다.
《아, 정선생님, 어데서 전화를 하십니까? 제 방금 선생님을 따라다니다가 들어선 길입니다. 경찰녀석이 씨부렁거리는바람에 놓쳤는데… 이렇게 찾아주시니 고맙습니다.》
《무엇때문이요?》
《저는 선생님을 급히 만나야 하겠습니다. 전할 사연도 있고 도움받을 일도 있고… 어데서 만날가요?》
문진국의 목소리가 어데라 없이 절절하면서도 초조하게 들렸다.
《전화로 말씀해주시오.》
《아, 아니 전화로는 안됩니다. 명월관에 오십시오. 꼭 와주셔야 합니다. 이건 대단히 중대한 문제입니다. 래일 열두시, 열두시입니다. 2층 8호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문진국은 정시명이 다른 말을 못하도록 급히 수화기를 놓아버린다.
《허 참!》 정시명은 무엇에 꼭 홀린듯싶어 허거프게 웃고 말았다.
《무엇때문인가요?》
례영이 곁에서 대화를 엿듣다가 물었다.
《나를 꼭 만나자는구나.》
《아버님이 잘 아시는분입니까?》
《그럼… 중경에서도 서안에서도 그렇고… 심양까지 따라와서 날 죽이겠다고 하던 친구지.》
《예?!》 례영이 얼굴이 분노와 함께 겁에 질려 해쓱해졌다.
《그런 놈이… 그래서 따라다녔군요.》
《래일 명월관에서 만나자는구나.》
《안됩니다. 우리가 정하는 장소에 불러내도 모르겠는데… 아버님이 가셔서는 안됩니다.》
《내 혼자 가지.》
《안돼요. 저는 가시지 않도록 제기하렵니다.》
례영은 또렷한 어조로 막아나섰다.
《그러지 말아.》
례영은 아버지와 더 싱갱이를 해서는 이겨낼수 없다고 생각하고 물러섰다.
옆에서 지켜볼진대 여직 그가 하자고하는 일을 막아나선 이가 없다. 일단 입밖에 말을 꺼낼 때면 머리속에 다 행동계획이 짜져있고 결말에 대한 확신까지 명백하기때문이였다.
례영은 정시명에게서 결심채택이란 곧 행동을 의미한다는것을 잘 안다.
그는 부엌에 나가 저녁준비를 하는 민순임에게 급히 가볼일이 있다고 하였다.
민순임이 《원 해질 땐데 이제 뭘하려 밖에 나간단 말이냐.》하고 말했다.
《글쎄 나갔다와요. 늦으면 김승원선생님댁에서 자고오겠으니 기다리지 마세요.》
《그러면 그렇다고 전화를 하거라.》
《그럼요.》
민순임은 례영이를 더는 막지 못하고 놓아주었다.
김승원을 찾고저 하는 리유가 있었다. 김승원이라면 문진국을 알수도 있을것 같았던것이다.
김승원의 집에 들어선 례영은 어째서 왔느냐는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문진국을 아느냐고 물었다.
김승원이 기억을 더듬더니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아버지가 보내서 왔느냐?》
《안요.》
례영은 낮에 있었던 일과 문진국이 중국에서부터 정시명을 암살하겠다고 따라다닌 이야기를 간단히 하고나서 래일 명월관에서 두사람이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승원은 더럭 화부터 냈다.
《무슨 벼락이 날 소리냐. 안되겠다. 나와 함께 늬집으로 가자. 그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제주도폭동후 서울공기가 어떻다는건 너도 알지 않느냐.》
김승원은 이렇게 서두르며 길 나설 차비를 하다가 다시 곰곰히 생각하더니 주저앉았다.
《아니다. 넌 여기서 자고 아침에 가거라. 내 이제 안동무를 찾아가겠다. 뭐 아버님이 그 녀석 만나자고 하신즉은 무슨 타산이 섰을게 아니냐. 안지생동무가 아성일 내세워 아버지의 사업을 보장하도록 하자꾸나.》
《일없을가요, 함정이 아닐가요?》
《글쎄… 잘 살펴보고 등탈이 없도록 해야지. 걱정말고 쉬도록 해라.》
《제가 따라가야 되지 않을가요?》
《아니, 일없다. 따라가서 네 할 일이 따로 없지 않느냐. 마음을 놓아라. 우리 홍길동이 나서서 못하는 일이 있더냐.》
김승원이 인차 권재수에게 전화를 해서 급히 자동차를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
다음날 점심무렵이 되자 김아성은 여러명의 경무대경찰서 경찰들을 데리고 와서 명월관을 수색하였다.
별다른 징후는 없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열두시가 가까워왔는데 수상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2층 8호실은 자그마한 도청탐지기까지 가지고 샅샅이 검사하였다.
그리고 나서 2층 8호실에 점심식사주문을 하였다. 그랬더니 이미 그 방은 예약되여있다고 하면서 손님을 더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식사계약은 두명뿐이라 한다.
그래서 김아성은 시치미를 떼고 《열명짜리 방을 두명식사를 위해 비워두는 법이 있느냐.》고 고함을 쳤지만 고관대작들을 대접하는데 버릇된 안내원은 오히려 눈을 힐끔거리며 《리범석총리실에 고소하지요.》하고 비양거리였다.
《좋아, 그럼 5호실…》
5호실은 그 맞은편 호실이다.
김아성은 경찰들을 보내고나서 례영이와 함께 마치도 다정한 련인들처럼 소반을 가운데 놓고 밥 한그릇에 국 한사발씩 청해놓았다.
열두시가 되자 30대후반의 건장한 사나이가 회색코트를 입고 나타났다.
안내원이 허리를 연신 굽신거리며 그를 방으로 안내하였다.
김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한바퀴 둘러보고 따라오는놈이 없다는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들어왔다.
회색코트가 안내원에게 다짐을 두었다.
《이 방에 더 들여놓지 말아, 들었겠지?》
《예, 분부를 받았습니다.》
열두시를 알리는 고동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리기 시작할 때 정시명이 수수한 한복차림으로 들어섰다.
김아성은 그들의 눈에 띄일세라 미닫이문을 벌써 열어놓고 8호실을 지켰다.
례영이는 거리에서 사들고온 락화생을 까서 입에 넣으면서 복작거리기 시작한 주변의 소음에 귀를 강구었다.
정시명이 방에 들어서자 문진국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그동안 옥체건강하셨습니까.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정시명은 문진국의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례절바른 첫 인사에 다소 어리둥절해서 잠시 그의 모습을 훑어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알아보구 말구. 자넨 그 모습 그대로군. 그래 어떻게 지내오?》
《여전히 리범석의 시중군으로 있습니다. 선생님, 앉으십시오.》
정시명이 자리에 앉자 문진국은 그 앞에 무릎을 꿇더니 《선생님, 지난 일은 다 잊어주십시오.》하며 이마를 다다미바닥에 붙이고 절부터 하였다.
정시명은 더욱 어안이 벙벙해졌다.
문진국이 어째서 내앞에서 무릎을 꿇는것이냐? 절은 무슨 절이고, 지난 날을 잊어달라는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노죽치고는 너무 진중하고 진실로 받아주기에는 너무 상상밖이다.
그래 정시명은 짐짓 데면데면한 표정을 짓고 뚝뚝하게 그의 인사를 받았다.
《이거 이러지 마오. 어서 일어나오. 헌데… 잊다니?… 뭘 잊으란거요, 내목에 칼을 박으려했던 자넬 잊어달라는건가? 내 잊으면 어떻고 잊지 않으면 어떻다는거요. 총리비서인 자네가 나한테 그런 구차스런 량해를 구하는 까닭부터 알고싶구만.》
《전 벌써 한달전부터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무엇때문에?》
문진국은 안주머니에서 유지에 차곡차곡 싼것을 꺼내놓았다.
풀어놓으니 다 퇴색한 사진 한장이 나왔다.
《생각나십니까?》
생각이 났다. 상해에 있을 때 김구가 팔을 잡기에 하는수없이 《림정》요인들과 어울려 찍었던 사진이였다. 이게 어떻게 문진국의 손에 들어갔는가. 이걸 내드는 리유는 뭔가?
사진에는 리범석이도 있었고 《국회》의장인 신익희도, 김구와 김규식도 있었다.
《이게 어떻다는거요?》
《선생님의 얼굴에 동그라미가 쳐있습지요?… 이건 리범석이 쳐놓은것입니다. 선생님의 명함을 혹 정시명이라 달리 부르지는 않습니까?》
그때 문이 열리고 음식이 들어왔다.
《술을 좀 드시지 않겠습니까? 선생님이 혹 오해를 살가봐 주문하지는 않았습니다.》
정시명은 자신에 대하여 상대가 어느 정도 알고있다는것을 직감하고 《청하오. 하지만 석잔이상은 못하오.》하고는 잠시 생각할수 있는 시간을 얻어냈다.
이러한 정황에서 구태여 피해설 필요가 없을것 같았다.
그런데 상대방은 지금 무엇을 노리고있는가? 놈들의 모략이라면 대담하게 맞받아나가야 위기를 타개할수 있다.
그런데 사나이는 집요하게 정시명의 눈빛에 신경을 도사리다가 정시명이 태연자약하게 덤덤해있자 제 먼저 말을 이어갔다.
《이것은 지난 달에 하지를 통하여 총리에게 전달되여왔습니다. 정시명이라는 명함도 함께말입니다. 넘겨받은 자료에 의하면 지금 서울에는 정시명이라는 상당한 지도력과 수완이 있는 미지의 인물이 정치권의 배후에 깊숙이 개입되여 활동한다고 합니다. 조직적관계로 보아서는 이북과 관계가 전혀 없으나 사상과 리념에 있어서는 일맥상통한다고 합니다. 그는 고향은 북에 있으나 광복후에 서울정치권에 대한 심한 불신과 우려를 가지고 이곳에 왔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북지도부의 신뢰와 관심이 큰 인물이라 합니다.
리범석은 어디서 접수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선생님이 제주도에 내려가서 활동하고있다고 저한테 이야기하면서 우선 정선생님을 찾으면 정시명에게로 통하는 줄을 찾게 될거라는겁니다.
저는 지시를 받고 검찰청에 있는 나의 부하 하나를 붙여 내사를 하였는데 〈흥국상사〉사장으로 계시며 통일애국운동에 관여하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뵙기로 결심한것입니다.》
접대원이 청주 여러병과 마른 명태를 잘게 찢어 기름에 튀겨낸 안주를 들고 들어왔다.
그가 따르려고 하자 《됐어, 나가봐요.》하고 돌려세웠다.
문진국은 잔에다가 술을 따르고는 잠시 정시명의 반응을 살피듯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정시명이 술잔에로 손을 내밀며 말을 받았다. 《무엇때문에 어제날에 나한테 칼을 겨누던 사람이 오늘은 은인이 되고싶어 하는거요?》
《선생님, 그래서 제 사죄부터 올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광복된 조국에 와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광복된 내 나라에 와서도 외세를 등에 업으려고 싱갱이를 벌리고 민족의 리권을 팔아 저들의 정치적야심을 실현하려는 정치간상배들의 꼴을 보면서 더는 이 인간들과 어울려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왔습니다. 물론 저의 결심이 어제오늘에 시작된것은 아닙니다. 환멸, 환멸… 련이어 마시게 되는 환멸의 쓰디쓴 고배끝에 나는 이북의 정치에 대하여, 김일성장군에 대하여 비로소 눈을 돌리게 되였습니다.
나는 〈흥국상사〉의 내사자료를 검토하면서 이 집단이 내가 발을 들여놓을수 있는 집단임을 확인하게 되였고 사장님의 명함을 놓고 저간의 죄를 열번백번 속죄하였습니다. 매국배족을 일삼는자들과 맞서는것이 선생님의 일이라면 저도 그 길에 들어서고 싶은것이 선생님을 뵙고저 하는 리유였습니다.》
《음, 그렇구만. 그런데 내 일을 놓고서는 문군의 인식부터 바로 잡아줄게 있소. 뭔가하니 나쁜놈들과 맞서는것이 아니라 나쁜 인간들도 어떻게 하든지 교화하여 민족의 사활을 위한 애국자로 나서도록 도와주는거요.
지금 이남땅에서 뜻을 품고 정계에 나선 사람들에게는 두 길이 있소. 력사에 죄인으로 남는가, 애국자로 남는가, 헌데 리승만도 〈애국자〉라고 자화자찬하는데 이 계선이 똑똑해야 하거든.
나라의 통일을 도모하고 남북삼천리를 인민이 만복을 누려가는 락원으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애국이 아니겠는가.
문군이 내뒤를 캐보고 좋은 평가를 해주니 귀맛이 좋구만. 뭐 나뿐이 아니지요. 항쟁에 떨쳐나선 30만 제주도민도, 험산오지에서 고생하는 빨찌산투사들도 그리고 미국놈과 그들과 야합하는 리승만도배를 반대하여 줄기차게 싸우고있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이 서렬에서 각기 자기 식으로 합류되여 이바지하는거요.》
정시명은 이렇게 열을 담아 말하면서 불빛같은 눈초리로 문진국의 낯색을 찬찬히 더듬어보았다.
철빛의 두볼이 강기가 있어 보이고 우뚝 솟은 코사등이 고집이 세보인다.
전체적으로 강하게 다져진 인간이며 호락호락하게 굽혀들거나 내키지 않는 일에 가벼이 제몸을 맡기는 그런 부류의 인간같지 않다. 밸통이 드센 리범석이 오랜 세월 수하에 데리고 다니는 인물이니 그저 만만할수는 없겠지만 마주서보니 호감이 간다.
지금 그의 얼굴에는 진실로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참회하는 빛이 짙게 어려있다.
그는 문진국의 두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무릇 인간의 순결은 눈에 비낀다고 한다. 예전에 사납게 번뜩이던 그 눈이 지금은 벌을 청하는 죄인처럼 공손하고 어찌 보면 절망적인 그 무엇을 기대하며 아래로 접혀져 좀체로 가누기 힘들어 한다.
정시명은 그의 두눈에 고여있는 자기 반성과 보람있는 래일을 갈구하는 열렬한 지향을 찾아보게 된것이 기뻤다.
정시명은 이 남녘에서 량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여곡절은 있어도 마침내는 애국의 길에 들어서게 되리라는 확신을 더욱 깊이 통감하면서 눈빛에 부드러운 빛을 담고 한참이나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문진국이 동지로 될수 있다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정시명은 언제나 교제하는 사람들을 관찰할 때면 그 인간의 진실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게 헐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종일 자리를 같이했어도 자기 속심을 위선과 허위의 보자기로 꽁꽁 싸놓고 진실로 통하는 문을 터놓지 않는다.
이건 특히 정치의 혼란스러운 무대에서 찌들대로 찌든 사람들속에서 하나의 보신술로 통용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과 기어이 함께 나가려고 한다면 어차피 함께 자기 마음에도 연막을 치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진실을 에워싼 허위의 담벽을 뚫고들어갈 수단과 방법을 여러가지로 활용해야 한다.
문득 정시명은 권영호의 잘 생긴 얼굴이 새삼스럽게 얼씬거렸다. 그 인간에 대하여서는 아직도 체질파악을 다하지 못하였다.
지금까지는 《수의계》 간사로서 뛰고있지만 《반민법》관련투쟁에서는 괜찮았는데 《반공대회》를 규탄하는 결의를 채택하자고 할 때는 동요하였다고 한다.
권영호의 진심은 무엇인가, 정말 반동에 머물러있을 인물인가.
대가 바른것 같으면서 어떻게 보면 무르기가 그지없다.
량심이 있는것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계기에서 나타난 동향을 보면 철면피하고 성실성이 부족해보인다.
권영호를 생각하면 혜숙이, 길철이 생각나고 그들을 생각하면 권영호가 밉상이다.
(어데 가 있는가? 무사히 지내는지?)
느닷없이 떠오른 혜숙의 생각에 정시명은 속이 쓰려왔다.
김명호에게 혜숙의 행처를 알아볼데 대한 지시를 주었지만 지금도 숲에 떨어진 바늘찾기라 통 무소식이다.
(무사했으면… 때가 오겠지. 권영호도 이 사람처럼 언젠가는 제발로 찾아올것이다. 문진국… 용타! 량심만 있다면 인간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가부다.)
정시명은 고마운 눈길로 그의 모습에 정을 기울이고 있다가 《반갑소. 자, 편히 앉소. 한잔 또 부어주오.》하고 잔을 내밀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제야 문진국은 불편한 앉음새를 허물고 감사의 마음을 금치못해 하며 잔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