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혜숙이네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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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나 다들 돌아가려고 하는데 서병남이 례영이와 함께 들어왔다.
《다들 우리 집으로 건너갑시다.》
서병남이 이렇게 말하자 례영이 덧붙이였다.
《서선생님이 집들이기념으로 한상 차리겠답니다.》
《아, 그렇지… 이럴줄 알았으면 성냥 한곽 사들고 오는건데…》
김명호가 반죽좋게 받으며 따라나섰다. 팽팽하게 압축된 모임장의 분위기에서 벗어지는게 다행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길철의 쓰라린 속을 다소나마 위로해줄수있는 좌석이 생긴게 고마왔던것이다.
연회상같은 커다란 원탁에 잘 차려놓은 점심상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상이 차려진데는 연고가 있었다.
례영이 어제 저녁에 마실을 온 서병남의 처에게 동래에 갔다온 이야기를 하다가 혜숙이 떠나올 때 동래감술 여러병을 보내며 여러 선생님들에게 자기 성의로 부어올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 소리가 서병남의 귀에 들어갔다. 마침 《흥국상회》모임이 오늘 열린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점심상을 마련해놓고 가져온 술을 다 가져오라고 례영에게 말했던것이다.
모두 자리에 앉자 례영이 돌아가며 잔들에 노르무레한 빛갈이 도는 감술을 부었다.
김명호가 술잔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에 코날개를 쭝깃거리다가 《거 향이 기가막히군.》 하며 례영에게서 술병을 받아들고 상표를 들여다보았다.
《동래감술이라… 허, 그러니 례영이 내는 술잔이구만.》
그러자 자리를 뜰가말가 망설이던 례영이 얼른 말을 받았다.
《김선생님, 제가 올리는 술이 아닙니다. 저… 혜숙이 저에게 가져왔더랬습니다. 자기 마음을 대신하여 선생님들이 모이는 기회에 부어올려달라구 했습니다. 혜숙의 정성으로 받아주십시오.》
《그래?…》
김명호가 술병을 눈가에서 밀어내며 부르짖는데 다들 삽시에 눈들이 뿌잇해졌다.
례영이 아래입술을 감쳐물고 종종걸음으로 방안에서 나갔다.
모두가 술잔에 손을 내밀다말고 또다시 울컥 치밀어오르는 격정을 눌러앉히며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자, 왜들 이러십니까. 자, 듭시다. 좀 취해봅시다. 자요.》
길철이 이렇게 큰 소리로 떠들며 선참으로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어, 달다. 속이 화끈해지는구나. 자, 안동무. 부어주오.》
안지생이 술병을 들더니 길철의 잔에 붓다말고 《길철동지! 하, 참!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런 날벼락도 있습니까?》하고 목이 메여 절통하게 부르짖었다.
《차, 이렇다구야. 총각이 무슨 눈물이 이리도 헤푸담. 내 시 한수 들려줄가. 승원선생, 들어주시겠소?》
《그래 들려주시오. 그리고 마음껏 취해보시오. 정선생님, 우리도 듭시다. 혜숙이 끝내 눈물을 짜내고야 마는구만.》
김승원이 연거퍼 비워버리는 길철의 잔을 채워주며 코멘 소리를 하고는 자기도 잔을 냈다.
길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잠시 천정을 올려다보다가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즉흥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층암절벽 바위우에
우뚝 솟은 락락장송
세월의 거친 바람
모질게 휘감겨도
푸른 갑옷 떨쳐 입고
지심깊이 버렸으니
하늘로 치솟은
네 모습 장하도다
대장부 뜻을 품고
장도에 올랐거늘
꽃구름아 까불지 말아
눈바람아 대들지 말아
오가는 바람새에
뿌리 잠시 흔들린들
그 무슨 장송인가
장부의 기개런가
길철이 다시 잔을 들어 마셔버리고는 즉흥시를 계속 이어가려는데 정시명의 매몰찬 소리가 그를 막았다.
《그만하지 못하겠소! 뭐 꽃구름은 까불지 말고 눈바람은 어떻다고?… 그래 동문 혜숙의 마음을 그렇게밖에 받아들이지 못하겠소?… 동무들! 내 좀 말합시다. 길철선생은 미안한대로 좀 앉아주시오.》
정시명도 자기 잔을 들어 쭉 마시고는 추상같은 얼굴로 일어났다.
《내 아까 모임에서 이야기하려다 그만둔게 하나 있소. 여러 동지들의 감정이 너무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라 난 잠시 물러서기로 했던거요. 그러나 더는 참지 못하겠소.
혜숙동무의 편지가 말이요. 그래 바람새정도이겠는가.
아니요, 아니란 말이요.
그의 편지가 우리에게 뭘 호소하고있는가, 그가 뭘 울부짖고있는가, 우린 거기서 뭘 찾아안아야 되겠는가?
우리의 싸움의 목적도 의의도 본질도 거기에, 바로 여기에 다 써있소.》하며 정시명은 품속에서 혜숙의 편지를 다시 꺼내들고 흔들었다.
《혜숙의 사랑을 우리가 되찾아주어야 한단 말이요. 광복바람을 타고 나쁜길에 들어선 그의 가정을 구해야 한단 말이요. 리념에 따라 나라가 갈라지고있는 판국에 리념에 따라 집안이 뿔뿔이 갈라져 적과 적이 되는 이 눈물겨운 비극을 보고만 있을수 있는가.
우리가 도대체 사생결단하고 통일은 왜 하자고 달려든거요? 겨레의 고통을 덜기 위해, 사람들의 깨끗한 사랑을 지켜주기 위해, 사람들의 행복을 마련하기 위해 나선게 아닌가. 이 나라의 가정들이 길이 한품에서 복락을 누리고 이 나라의 련인들이 자기의 사랑을 눈물없이 행복하게 즐기고 아름답게 가꾸어가기를 바라서란 말이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가까운 전우의 사랑을 외면하며 그의 가정을 외면한단 말이요, 엉?
섭섭하오. 길철이! 그래 자기만이 나라앞에 깨끗하고 굳건하면 대장부라는거요? 필요하면 줴버리는것이 사랑인가?
난 이미 결심했소. 혜숙이를 위하여, 그의 사랑을 위하여, 그의 이그러진 가정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통일성전을 위하여, 권영호를 기어이 통일애국의 대오에 세워주기로 결심했소.
동무들이 다들 물러선다고 하면 난 홀로서라도 해내고야 말거요. 꼭 해내고야 말겠소.
이건 전우앞에서 의리를 지키는것일뿐아니라 앞으로 본격화된 〈국회〉와의 사업을 성과적으로 벌려나가는데서도 필요하오.…
자, 잔을 내고 국수를 합시다.》
정시명이 말을 끝내고는 서병남이 부어놓은 잔을 받아 꿀꺽 마셔버리고 국수사발을 끌어당겼다.
길철이도 김명호도 묵묵히 앉아서 창밖으로 눈길을 보내고있을뿐 쉬이 저가락을 들념을 못하고있었다. 김승원도 안지생도 눈지방이 벌깃벌깃해가지고 국수사발을 앞으로 당겨놓기는 하였으나 후럭후럭 소리를 내며 길다란 국수발을 넘기는 정시명을 생각깊은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자, 어서들 저가락을 드시우다. 국수가 풀어지면 괜히 우리 마누라 욕먹힙네다. …아, 길철선생부터 잡으시유, 어서요.》
서병남이 주인답게 억지로 웃음을 만들어가지고 각근히 권하였다.
《다 잘되겠지요. 난 이따금 생각하지유. 세상사람들이 다 우리 〈흥국상회〉사람들 같다면 어째서 세상사가 이다지도 복잡할텐가 하구요. 이 남쪽땅에 이런분들이 있는데 어째서 리승만같은 미친 무리들이 독을 쓰고 다닐가.…
모두가 우리 사람들 같다면 살아가는게 얼마나 좋을가.… 자, 어서들 국수를 드시우다. 국수발처럼 부디부디 길게 살면서 뒤날에 좋은 옛말로 전해질 일들을 많이 해주시우.
다 잘되겠지유. 제 홀로 살아온 전생을 돌아보며 생각할 때가 있쉐다. 아무리 악스러운게 강해보이고 선한게 약해보여도 그래도 냉중에 선한게 이깁디다. 자, 저가락을 잡으시우. 길철선생부터 어서요.》
이렇게 소박한 진정을 담담히 토로하다가 길철의 손에 저가락을 쥐여주는 서병남의 눈가도 물기에 핑그르르해있다.
점심상을 물리자 한명한명 간격을 두고 뒤문, 앞문, 옆문으로 헤쳐져 갔다.
정시명은 길철이를 맨 마지막으로 떠나게 하고 함께 한강변에 나섰다.
그들은 말없이 한강다리를 향해 제방길을 걸었다.
서로 먼저 말 꺼내기를 저어하였다. 봄날의 해빛이 자글자글 끓고있는 한강의 부드러운 수면을 내려다보며 스적스적 걸음만 옮겼다.
치렁치렁 늘어진 강변의 수양버들가지들이 수면에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비꼈는데 가벼운 훈풍을 받아 남실거리는 잔물결에 뒤치락거린다. 물우에는 여러쌍의 물오리들이 한가롭게 떠돌며 먹이를 찾아 물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군 한다. 아름다운 강반의 풍경도 그들에게는 눈에 설기만 하였다.
정시명이 한강다리에 거의 이르러 걸음을 세웠다.
《길철동무!》
길철이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모색이 완전히 딴사람 같다. 열정과 패기가 하냥 넘쳐있던 눈빛은 죽어들고 볼은 패이였다. 관골이 두드러지고 보이지 않던 턱수염이 까칠하게 돋아있다. 낯빛은 여전히 휘줄그레해진 백포자락처럼 윤택이 없고 랭정을 지어내느라고 애쓰는게 헨둥하다.
요 며칠새, 더구나 이 반나절동안 얼이 빠지고 기운도 다 쇠잔해버린듯 싶은 그의 헝클어진 모습에 정시명은 가슴이 저려왔다. 방금전에 아픈 매를 사정없이 휘둘렀던것이 여간 미안쩍지 않다.
《내 더 할말이 없소.》
《아니, 아닙니다.》
길철이 정시명의 마음속을 헤아리며 당황해서 떠듬거리였다. 그렇게 무섭게 울부짖고나서는 돌아앉아 괴로움에 눈물짓는 자기의 지휘관의 속을 너무도 잘아는 길철이였다.
길철은 오히려 그를 위로해주고싶어 그쯤한 회초리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생긋 웃어보였는데 어색한 미소가 엷게 비꼈다가 지워지는것을 보기가 더 민망스럽고 가슴쓰리게 하였다.
《내가 이런것을 다 타산해야 했는데… 너무 서둘렀소. 어서 가보오. 며칠은 좀 쉬오. 다시 부산에 가지 않겠소? 최원기가 가지고있는 도미섬이 참 조용도 하고 경개도 좋더구만.》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모든것은 제게 책임이 있습니다.
전 혜숙이 평소에는 씨원씨원하게 지내다가도 한번 빠져든 구뎅이에서는 좀체로 빠져나오기 힘들어하는것을 알고있었습니다. 그야 벌써 소녀시절에 리유는 어쨌든 집을 뛰쳐나오지 않았습니까.
어찌보면 과단성도 있어보이는데 여하튼 드살이 센 녀자지요. 뒤집어보면 소부르죠아적근성이기도 하지요. 지나친 자존심, 일종의 교만 그리고 허영심이라 할가… 사실 이번 일도 선생님은 꼬집어 지적은 안했지만 비조직적이고 자유주의적행동이 아닙니까. 우리들의 관계만입니까. 조직관계도 있고 동지관계도 있고… 그까짓 날 버리고 달아난건 개의치 않으렵니다.
난 혜숙에게 묻고싶습니다. 어떻게 자기 생각에 옴해서 일신상의 문제를 놓고 저하고도, 정선생님과도 한마디 의논도 없이 자기 초소를 리탈할수 있는가? 인륜대사가 아이들의 소꿉장난입니까. 기분내키는대로 깨버려도 일없다는겁니까?
어떻게 그렇게도 쉽게 나에게 창피를 주고 우리의 사랑을 위해 그토록 정을 기울여준 동지들에게 한을 남길수 있는가?…》
길철이 참아왔던 노여움을 마구 쏟아놓기 시작하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그 어조가 격렬하였다.
《길철이, 너무 그렇게만 노염을 갖지 마오. 혜숙의 절박한 사정도 리해하여주오. 엉!》
정시명은 길철이 바른 소리를 하고있다고는 생각하면서도 혜숙이를 타매하는것이 언짢아서 그의 격한 소리를 중둥무이하였다.
《내 아까는 너무 과했소. 내 이따금 돌아앉아서는 후회는 하면서도 자기 감정을 이겨내지 못해 상대방을 거슬리게할 때가 있소. 미안하오.》
정시명은 혜숙이 맞아야 하는 매를 자기가 받고싶어 이렇게 절절하게 사정을 하였다.
순간 길철이 정시명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의 배허벅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어린애처럼 몸을 떨며 소리내여 울기 시작하였다.
《이러지 마오. 이러지 말라니까.…》
《제가 도척같은 놈입니다. 제가 혜숙이를 원망하다니요. 제가 모자라는 인간입니다.》
《원 사람두… 누가 동물 그렇게 보겠소. 동무들의 마음들이 너무도 고와서, 동무들이 모질지 못해서 이런 비극을 당하는것 같소. 에이 참.…》 이렇게 위로하는 정시명의 목소리도 형언할수 없는 비애와 련민으로 마구 떨렸다.
길철이 정시명의 품에서 잠시 태를 치더니 제방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정시명은 눈부리가 따가와났다. 《에잇 참!》 그는 누구에게라없이 증이 나서 이렇게 저도 모르게 크게 부르짖으며 피를 토하듯 거친 숨을 내그었다.
정시명은 길철이 다리에 올라 행인들속에 가리워 보이지 않은 후에도 그냥 뒤짐을 진채 바위처럼 굳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