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불 붙는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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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동틀무렵에 제주항을 떠난 려객선 《남해》는 추자섬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해질녘에야 진도를 에돌기 시작하였다.
아침부터 조심스럽게 내리던 가랑비는 멎었다. 뿌잇한 안개를 걷어낸 하늘에는 누데기같이 갈래갈래 찢긴 구름들이 정처없이 헤매고있었다.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던 황혼도 꺼져들고 바다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바다는 해종일 몹시도 갈개며 기운을 뽑더니 이제는 기진해버린듯 얌전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길길이 뛰여오르던 사나운 성깔은 못버리겠는지 《남해》를 단숨에 삼켜버릴듯 때없이 휘말린 얼음장같은 파도를 쥐여뿌린다. 그러나 그렇게 한번 요동을 치고는 후회가 되는지 이내 고개를 떨구고 어서 갈길을 가라고 길을 틔워주며 드센 힘으로 려객선을 떠밀어준다. 《남해》는 련이어 감겨드는 파도와 종작없이 쓸어드는 질풍에 애처롭게 허우적거리면서도 용케 항로를 잃지 않고 시커먼 연기를 거칠게 토하며 쉬임없이 길을 축내고있었다.
《잘못했군. 바다우에서 이틀이나 보내다니…》
아까부터 배전에서 옷자락을 물어뜯는 바람에 몸을 맡긴채 어두워지는 바다를 근심스럽게 바라보던 정시명이 초조한 어조로 나직이 중얼거린다.
제주도경찰청 부청장 신균이 바다길을 념려하면서 마침 서울에서 날아온 군정청 경무국의 직승기가 떠나가니 그편으로 가라고 권했었다.
그러나 정시명은 경찰기관의 고위인물들과 제주도에서 마주 앉는게 께름직해서 려객선에 올랐는데 배길이 굼떠서 여간 짜증이 나지 않는것이다.
제주도를 돌아보고나서 걱정거리가 한아름 더 늘어났다.
그래서 더구나 배길을 택한것이 더 후회가 되고 마음이 촉박해지는것이다.
《아버님!》
정시명의 옆에서 거세게 꿈틀거리는 바다를 불안스럽게 그러면서도 신비롭게 바라보던 젊은 녀성이 정시명의 시름을 가셔주듯 다정히 불렀다.
례영이였다. 옥색쟈케트에 하얀 바지를 받쳐입고 명주목도리를 두른 그의 아릿다운 자태는 파도우를 종횡무진으로 날아예는 갈매기처럼 희매해보였다.
《그래도 전 아버님을 모시고 바다구경을 실컷 하게 되니 다행스러워요. 머리가 거뜬해지는것 같아요. 처음에는 몹시 무서웠는데 지금은 보기가 좋아요. 바다를 억센 사나이라고 하는 말이 그럴듯해요.》
제주도에서부터 정시명의 무거운 표정을 걱정스럽게 보아온 례영은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고싶어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정시명은 례영의 마음이 헤아려져 흔연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뒤따랐다.
《하지만 어디 바다구경에 취해볼 흥이 있다더냐.》
그는 다시금 어둠이 짙어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시름겨운 생각에 묻히였다.
제주도에서 보고온 처절한 광경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여 정말 정시명은 망망대해의 웅건한 광경에 심취할 경황이 못되였다.
정시명이 제주도로 갈것을 결심한것은 《5. 10단독선거》를 치른 날이였다.
제주도경찰청 부청장이 전해온 소식이 그더러 서울을 급히 떠나게 하였다.
신균은 길철과 가깝게 지내면서 애국사업에 나선 사람이였다.
그가 보내온 자료에는 제주도에서 활화산처럼 타번지고있는 항쟁소식이 방불하게 그려져있었다.
제주도 본토배기인 신균은 반미성전에 떨쳐나선 항쟁자들에 대한 끓어넘치는 애정과 불안을 안고 근 100페지에 달하는 지면에 제주도사람들이 외세를 반대하여온 항거의 력사와 이번 《4. 3항쟁》의 구체적인 실태를 비교적 깊이있게 분석하고 평가하였다.
신균은 보고서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놈들의 반격이 예견되고있다. 나는 차후의 일이 걱정스럽다. 도와 달라. 제주도를 도와 달라.》
정시명은 자기 고향사람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담은 이 절절한 호소를 접수하자 서둘러 서울을 떠났다. 자기 눈으로 제주도에서 벌어지고있는 적아간의 대결정형을 직접 접해보고 나름으로 할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내고싶었던것이다.
안지생이 막아서고 김명호가 어쩌자고 반동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나서려 하는가고 펄쩍 뛰였다.
그러나 앉아서 제주도의 항전을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례영이 따라 나섰다.
정시명은 손을 내저었다. 뭣하러 따라 가겠느냐고 단마디로 잘라버렸다. 민순임도 치마두른 아낙네가 어째 그 불속으로 가려느냐고 눈을 흘겼다.
그래도 례영은 서기가 회장님을 따라 가는것은 회사규률이라고 사글사글 웃으며 부득부득 따라나섰다.
정시명이 가는것을 막지 못하게 된 안지생이 미리 무슨 약조가 되였는지 이번에는 《누님이 가시는게 옳습니다.》하고 례영을 편들었다.
그 바람에 정시명도 종시 승낙을 하고야 말았다.
례영의 몸에 아이들의 장난감같이 앙증한 소형권총이 숨겨져있다는것은 안지생이만이 얼마전부터 아는 비밀이였다.
정시명은 흥국상사의 대리점을 내온다는 명목으로 제주도에 올라 신균의 안내를 받으며 섬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벌써 온 마을이 재더미가 된 조천면일대도 돌아보고 한나산에 올라 빨찌산대장도 만나보았다. 죽창을 들고 동구밖의 버들방천을 지키고있는 봉개리의 30명 로인들도 만났고 항쟁대오에 참여하고있는 량심적인 군정측의 직원들도 만났다.
작별하는 자리에서 체소하고 이마가 밭은 신균은 다소 떨리는듯한 어조로 말했다.
《회장선생, 난 솔직히 말해서 걱정이 됩니다. 이 항쟁의 결말이 어떻게 될려는지… 이번에 러취를 대신하여 군정장관이 된 띤이 인차 시찰나온다고 합니다. 본토에서 깡패들만 끌어와서 안되겠으니 국방경비대를 몰아온다고 합니다. 선거놀음이 끝날 때까지 그놈들이 기다렸는데 이제 곧 쓸어들겁니다. 제주섬이 통채로 피바다에 잠길겁니다. 미국놈 물러가라는 구호를 내건 싸움이니 그놈들이 물러가기전에는 끝이 나지 않을 싸움입니다.》
정시명은 신균의 말에 대답을 주지 못하고 배에 올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항쟁의 전망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해주며 제 고장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우려를 무슨 말로 풀어줄수 있으랴.
《음…》
지금도 정시명은 고막을 찌르던 신균의 말이 아프게 떠올라 거친 숨만 톺아올렸다.
그는 제주도가 있는 남쪽에서 처절한 눈길을 거두지 못하였다.
신균의 말이 옳다. 미국놈들이 이 땅에서 없어지기전에는 끝이 나지 않을 싸움이다. 그런데 당장은 우리가 무엇을 도와줘야 하겠는가. 저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바는 무엇이겠는가. 제주도가 이번 싸움에서 승리하자면 전역이 들고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당장은 가능성이 없다. 이번 《선거》를 통하여 사처에 빨찌산대오가 무어져 투쟁의 강도가 거세진것은 사실이지만 저 제주도를 지켜낼만한 힘은 없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있어서는 안된다. 쓰러지는 동지들을 외면해서야 우리가 무슨 이 나라 민중을 위해 나섰다고 하랴.
정시명은 한시바삐 송호정을 만나고싶었다. 이미 형세가 기울어진 항쟁을 건져내는 묘안을 송호정도 내놓을것 같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사람은 없는것이다.
정시명은 이제 파견된다는 《토벌대》사령부에 파악이 있는 동지들을 끼워넣는것이 현 단계에서 《흥국상회》가 내놓을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토벌》작전을 파탄시키며 항쟁투사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게 된다면 다소 무거운 속이 열릴것 같다.
적임자로 여러 인물이 떠올랐다. 우선 김승원의 동생인 김정원이 헌병대의 계장으로 있다. 그를 《토벌대》사령부안에 들이밀면 악질장교들의 무지막지한 행패를 자기의 직권으로 억제할수 있을것이다.
김정원은 광복전에 베이징쪽으로 형을 찾아왔다가 그를 따라 혁명운동에 나섰는데 정시명과도 련계가 있던 사람이였다.
자기 형과는 겉모양새부터 판판 달랐다. 김승원은 첫눈에 누구나 멋진 사나이라고 부를만큼 키꼴이 민틋하고 몸통이 실팍하며 얼굴생김새가 둥글다면 김정원은 보통키의 다부진 몸에 볼편이 연연하고 눈꼬리가 우로 들린게 록록치 않겠다는 평부터 듣는다. 속내도 김승원은 맺고 짜르는것이 부족하고 매사가 느릿느릿하지만 김정원은 결패가 있고 재빠른 성미다.
김정원은 지난해에 경비대 사관학교 교장인 김홍일의 보증으로 헌병대의 계급장을 박고 헌병사령부에 들어갔다.
김정원은 광복전에 일본 베이징 파견군에서 중대장으로 있었는데 그때 몇번 만난적이 있고 투쟁에 인입했던적도 있다.
(그더러 한두명 더 데리고 가서 배후에서 제주도인민들을 도와주게 하자. 그들만이라도 《토벌대》지휘부에 들여보낸다면 제주도의 항쟁자들에게 무엇인가 필요한 방조를 줄수 있을것이다. 송호정이 그들을 들여보낼수 있을것이다.)
제주도문제를 이렇게 일단 아퀴를 짓자 새로운 문제들이 배전에 달려드는 파도처럼 밀려든다.
미국놈들이 벌려놓은 《단독선거》를 통하여 남조선에서 행정권의 수립은 공론이 아니라 현실로 되였다.
변화된 정세는 정시명과 그의 전우들에게 모든것을 새롭게 시작할것을 요구하였다. 투쟁전략과 전술도 새롭게 세워야 하고 력량편성과 투쟁무대도 다시 설정해야 한다.
이것은 조성된 정세앞에서 조선의 애국자들, 우국지사들을 자주통일을 위한 새로운 투쟁에로 부르시는 김일성장군님의 간곡한 뜻이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며칠전에도 미제가 벌린 《5. 10단선》의 반인민적본질을 발가놓으시면서 북남조선의 모든 애국세력이 일치단결하여 미제를 우리 강토에서 내쫓고 리승만을 비롯한 친미매국세력을 최대로 고립약화시켜 삼천만 조선인민의 진정한 대표들로 통일정부를 구성하며 나라의 통일독립을 성취해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평양방송이 전하는 장군님의 말씀을 자자구구 새기며 정시명은 새로운 투쟁의 거창함과 간고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정시명은 지난 봄에 서울에 온 은송이 들려주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은송은 쏘련군철수가 인차 시작된다고 하면서 김일성장군님께서 그걸 성사시키시기 위하여 크레믈리에 몸소 가시여 쏘련수반 쓰딸린과 회담하시였다고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쏘련군철수를 쏘련측의 주동적조치로만 생각했던 정시명은 은송의 말을 통하여 거기에도 장군님의 로고가 어려있다는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장군님께서는 벌써 이미전에 나라의 완전통일독립을 성취하는데서 외세의 간섭을 끝장내는것이 선결문제라고 보시고 북남판도에서 전인민적인 투쟁을 벌려나가실 구상과 준비를 하여 오신것이다.
배달의 씨알과 백의의 순결을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는 우리 겨레가 이제 김일성장군님의 통일애국의 성업을 받들어 미제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의 불을 더욱 활활 피워올릴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력사, 민족의 현대사를 바로 잡기 위한 투쟁이며 외세에 전당잡힌 절반땅의 국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다.
외세의 군력이 이 땅에 틀고있는 한 민족의 자주권이 담보될수 없다는것은 미국놈들의 군화발에 짓밟혀온 지난 3년세월이 증언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는 미국놈들에게 국권이 유린 당하는 민족의 수치스러운 력사를 수수방관해서는 안된다.
정시명은 불현듯 눈앞에 떠오른 맥아더와 하지의 상판들을 쏘아보면서 주먹을 불끈 틀어잡았다.
새로운 싸움은 그놈들의 면상을 정면으로 쳐갈기는 대결전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뻐근해왔다. 아직은 막연한, 손에 잡히지 않고 딱히 이름 지을수 없는 거창한것이 심장을 서서히 격동시키고 비장하게 하였다.
그러면 미군을 내쫓기 위한 전인민적투쟁에서 우리는 어떤 임무를 맡아 안으며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 투쟁을 벌려야 하겠는가?
정시명은 아직은 그 해법이 묘연하였다.
이번에 선거된 이른바 《제헌국회》라는 미제의 식민지립법기구나 미구에 조작될 남조선통치구조물을 두고도 많은 생각을 굴리였다.
그 어느것이나 조국통일에 역행하며 민족의 리익에 도전하며 외세에 기생하는 꼭두각시들의 정치도박장, 정치유희장이 되리라는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가만 두어서는 안된다. 쳐야 한다. 무자비하게 타격해야 한다.
온갖 가능성을 다 찾아내여 무자비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림없이 타격해야 한다.
이번에 김승원을 《국회》의원으로 들이미는데 성공한것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반동들이 권력의 몫을 놓고 각축전을 벌릴 립법기구안에 우리의 발판을 만들고 새로운 형식의 투쟁을 벌려나가야 한다.
김승원의 선거자금조달책임자로 최남수를 붙여놓은것도 훌륭한 착상이였다.
이건 길철의 발기였다.
그 사이에 길철은 기업가인 최남수를 돌려세우기 위하여 여러모로 품을 들였으나 전진이 없었다. 사심이 없는 자기의 순결한 지원을 비렬한 기만으로 유린한 정치권에 대한 환멸과 저주가 그에게서 좀체로 사그러들지 않았던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길철이 전라도태생인 김승원을 소개해주어 그의 선거자금조달책임자로 붙여주자고 제기하였었다. 최남수를 실지로 정치의 울타리안에 깊숙이 끌어들여다 놓고 스스로 생활을 통하여 정치의 참과 허위를 가려내도록 하자는것이였다. 그리고 그에게 박정인이 남기고 간 고려상사를 접수하도록 하고 그가 자기도 모르게 사업에, 정치에 발을 들여놓도록 하게 하자는것이였다.
그 방안이 옳았다. 최남수는 자금문제라면 한번 뛰여보겠노라고 어렵지 않게 응해나섰다.
길철은 여러명의 조직성원들과 같이 김승원의 선거운동참모로 활약하였다.
최남수는 그들과 어울리면서 눈에 띄게 달라져갔다. 일상생활 자체가 날마다 그의 마음에 신선하고 고상한 숨결을 불어넣어주었다. 김승원이나 그를 위하여 밤잠을 모르고 동분서주하는 전우들사이에 나누는 말한마디, 오가는 눈빛 한점에서도 애국과 진실, 신념과 열의가 넘쳐흐르며 최남수, 그의 마음도 샘물처럼 씻어주고 불덩이처럼 달구어주었다.
길철의 말이 선거운동이 끝나고 김승원의 당선이 확정되였을 때 최남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확실히 리승규따위 〈민주동맹〉무리들과는 다르단 말이요. 말 한마디한마디에 씨가 있고 넋이 있단 말이요. 이젠 어떻게 할가. 나도 따라 다닐수 있을가? 길철선생과도 더 사귀고싶고…》
그래서 길철은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보겠다고 대답하지 않을수 없었다.
새로운 투쟁에 대한 설계를 어렴풋하게 그려본 정시명은 떠나올 때 김승원에게 《국회》안에서 사람들을 선발하여 최단기간에 초당파적인 조직체를 무어보라고 하였다.
(그 일은 어떻게 되였는지? 다문 열명이라도 좋겠는데…)
반동의 무리들속에서 애국적인 집단을 꾸리는것이 식은죽 먹듯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시명은 막연한 기대를 안고 소식을 기다리고있었다.
김명호에게는 《유엔조선위원단》과의 사업을 재개하라고 하였는데 그 일 역시 진척여부가 궁금하기 그지 없다. 김승원이 《국회》선거차로 그들과의 사업에서 빠져나왔으므로 김명호가 그 사업을 떠안게 되였다. 《5. 10단독선거》의 부당성을 그들에게 납득시켜 《단독정부》수립의 비법성을 고발하는것이 기본이라고 김명호에게 단단히 당부하였는데 아직도 《유엔조선위원단》에서 성명 하나도 내는것이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안지생은 여전히 김구와 김규식의 곁에서 돌아가고있다. 평양에서 다지였던 그들의 립장이 흔들리지 않도록 옆에서 잘 도와야 한다.
하지와 그의 지령을 받은 리승만측에서 김구와 김규식의 집에 북나들듯 한다는 소식이 매일같이 들려왔다. 그들도 선거에 참가하라는것이였다. 선거가 끝난 이즈음에는 《정부》조작에서 임의의 자리를 줄터이니 대문의 빗장을 벗기라는것이였다.
그자들이 노리는것은 김구와 김규식을 《정부》에 끌어들임으로써 련공합작선언을 파기하고 4월남북련석회의결정을 뒤집어엎자는것이였다.
그래서 정시명은 김구, 김규식의 동향을 두고 긴장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용케도 두 사람은 다 한본새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젓고있다고 한다.
4월남북련석회의의 맥이 아직도 펄펄 뛰고있는데 그게 어디 당할소냐 한다는것이다.
(백범!… 우사!…)
정시명은 그들의 주름깊은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며 입속으로 따뜻이 불러보았다.
길철에게도 긴급과제를 주고 떠나왔다. 당선된 의원들의 동향을 시급히 전면적으로 조사하는것이였다.
새로운 투쟁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매우 요긴한 공정이다. 질질 끌새가 없이 일사천리로 내밀어 정확하게, 선명하게 해야 할 일이다.
(열흘동안에 해냈을가?… 아니, 이제는 열하루째지.)
제주도에서 며칠밖에 보내지 않았는데 가며오며 로상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보니 초조하기 그지 없다.
길철의 결패있는 모습이 미덥게 떠오르자 이상하게도 덩달아 그의 옆에 제주도에서 자주 보이던 준마처럼 체격이 늘씬한 권혜숙의 시원스러운 얼굴이 그려졌다.
《혜숙이…》
정시명은 그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려 놓은채 불꺼진 곰방대를 툭툭 배전에 털어버리고 담배 한대를 뽑아물었다.
혜숙이는 집을 나간 후 한번도 서병남의 집에도 《흥국상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안지생의 말에 의하면 꼭 나타나야 할 경우에도 적당히 구실을 대고는 집안 한구석에 붙박혀 맡겨진 일만 수걱수걱 한다는것이였다. 언제인가는 빨찌산에 가겠다고 떼를 써서 여긴 뭐 안식처이냐고 겨우 눌러놓았다고 한다.
사랑의 번민이 처녀의 맑고 숫진 가슴에 서리를 치게 한것이다.
권혜숙이네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것인가.
박정인도 평양으로 떠나가면서 그 사람들의 문제를 맡아가지고 성사시키지 못해 여간 미안하지 않노라며 탄식을 하였었다. 민순임이도 례영이도 크게 떠들지는 않아도 그 문제를 놓고서는 주변사람들을 나무라는게 알린다.
민순임이 어느날 잠자리에서 한마디 핀잔 비슷한 얘기를 한적이 있었다.
《이보세요, 다들 큰분들이 모여있는데 어째서 혜숙이네 일만은 모두 그들에게 끌려다니며 쩔쩔 매는지 모르겠어요. 저런 일이야 세월을 끌면 재미꼴이 덜한 법인데 어떻게 마련을 보세요.》
(그 사람의 말이 옳다. 그래 이제 더는 끌지 말아야겠다. 큰 일 맡아나선 사람들이 신변잡사로 골머리 앓게 해서야 될법한 일인가. 당장 그들 문제부터 매듭을 짓고 넘어가자. 만사를 젖혀놓고…)
이 일, 저 일 끌어내서 한바탕 씨름질을 하고나니 머리가 마냥 무거워진다. 온통 걱정거리다. 걱정거리가 달을 넘길수록 줄어드는게 아니고 늘어만 난다.
그러자 서울로 가는 길은 더욱 초조해졌다.
(그까짓 비행기로 떠나는건데… 금쪽같은 시간을 이틀이나 바다물에 적셔버리다니…)
정시명이 다시한번 후회막급해서 이렇게 입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례영이 조심스럽게 사위를 둘러 보다가 권했다.
《아버지, 이젠 어두워 졌는데 선실에 가서 뭘 요기라도 하고 쉬세요.》
《그래, 그러자꾸나.》
정시명이 례영의 말을 따르며 배전에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