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적가문의 족보

역적가문에서는 역적이 나오기마련이다.

《유신》독재자 박정희의 가문은 대대로 사대와 민족반역만을 일삼으며 그 더러운 피줄을 이어온 희세의 역적가문이다.

박정희의 애비 박성빈은 원래 떠돌아다니는 건달군으로서 여기저기를 싸다니면서 못된짓이란 못된짓은 다 골라한자였다.

박성빈은 1894년 우리 나라에서 봉건통치배들과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봉기를 일으킨 농민군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다못해 나중에는 일제의 밀정이 되여 봉기군을 밀고하는데 앞장섬으로써 수많은 농민들이 비참하게 학살당하게 하였다. 그 공로로 하여 이자는 녕월군수라는 벼슬까지 해먹었다.

한편 박정희의 외가켠도 친일친미에 쩌들대로 쩌든 족속들이였다.

박정희의 에미 백남의는 경기도 수원에서 소문난 친일주구의 딸이였다.

그리고 가시애비 륙종관은 대대로 농민들의 피땀을 가혹하게 짜내기로 소문난 충청북도 옥천벌의 대지주의 집안에서 태여난자였다.

륙종관은 제 애비와 같이 《한일합병》때 역적 리완용 등과 손잡고 나라와 민족을 통채로 팔아먹은 공로로 하여 이또 히로부미의 추천을 받아 일본천황의 친척과 귀족의 자식들만이 다니는 학습원에서 공부했으며 그후 일본귀족의 딸과 짝을 맺고 일본 도꾜경시청의 고등밀정으로 미쳐날뛰였다.

8. 15이후에는 미중앙정보국의 전신인 첩보전략국의 고등밀정노릇을 하면서 수많은 애국자들을 밀고하고 학살한 극악한 친일친미특무였다.

그러니 애비 륙종관의 더러운 피줄을 타고난 박정희의 녀편네 륙영수가 과연 어떠하였겠는가는 불을 보듯 명백한것이다.

륙영수로 말하면 제 애비의 뒤를 이어 일찍부터 미국의 삽살개노릇을 하였다. 륙영수는 8. 15직후 리화녀자대학에 다닐 때 벌써 미군정청의 정치고문이며 첩보기관의 두목이였던 노불의 심복부하인 헌병대위와 련계를 맺고 그자의 첩질을 하면서 밀정으로 사람잡이에 미쳐날뛰였다.

그런가 하면 박정희의 조카사위 김종필은 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49년부터 계속 특무노릇을 한자이다. 이자는 5. 16군사정변때까지는 륙군본부 정보참모부에서 반장 등을 해먹으면서 반공에 미쳐 애국자들에 대한 피비린내나는 학살소동에 광분하였고 5. 16군사정변이후에는 중앙정보부 부장, 민주공화당 의장, 《국무총리》 등의 요직에서 매국배족행위를 감행하여온자이다.

이처럼 박정희의 일가족속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대대로 나라와 민족을 외세에 팔아먹고 그 앞잡이노릇을 해온 민족반역자들이였다.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고 박정희는 역적집안의 막내아들로 삐여져나온 그때로부터 사대와 매국, 배신과 반역만을 일삼던 조상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던것이다.

2

 

오까모도중위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를 거쳐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는 동안 자기 집안을 《일어사용모범가정》으로 꾸리는데서 단연 으뜸이였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박정희는 경북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원노릇을 하면서 철없는 학생들에게 일본군국주의사상인 《야마도다마시》를 강압적으로 주입시키기 위해 미쳐날뛰였다.

또한 앞에서는 살기띤 웃음을 짓고 뒤에서는 동료교원들의 일거일동은 물론 학부형들의 동태까지 내탐하여 일제에게 고자질하였다. 그러나 친일앞잡이의 더러운 피줄을 이어 남달리 출세욕이 강했던 박정희는 고작 그런것에 만족할수 없었다. 보다 충실한 일제의 앞잡이가 될것을 결심한 박정희는 면도칼로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로 만주군관학교 《지원혈서》를 썼다.

당시 일본인으로서 문경군 학무과장을 해먹던자는 군내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박정희에 대해 이렇게 력설하며 추어올렸다고 한다.

《박생도야말로 황국신민의 본보기다. 반도인들은 효자라야 단지를 한다는데 박생도는 천황페하를 위하여 단지를 하였으니 이보다 더한 충신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혈서까지 쓰면서 상전의 환심을 얻은 박정희는 1940년 봄에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한 침략군장교를 길러내기 위해 세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학교를 떠날 때 학생들앞에서 《내가 군관학교에 갔다가 긴 칼차고 대장이 되여 돌아오면 군수보다 더 높다.》고 씨벌여댄 박정희는 그후 만주군관학교에서 문경소학교에 보낸 첫 편지에 《만주의 아득하게 넓은 황야를 말을 타고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리고있는 옛날의 박생도의 모습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주고싶다.》고 써넣기도 하였다.

만주군관학교에 다니면서 박정희는 일제의 충실한 주구로 준비하기 위해 《야마도다마시》를 뼈속까지 다져넣느라 악을 썼으며 특히 검도, 유도, 총검술을 련마하기 위해 광신적으로 날뛰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구와바라라는 일본검도교관이라는 자는 남들이 다 잠자는 시간에도 유독 검도장에 나와 《동방요배》(숭일사상을 키우기 위하여 동쪽에 있는 일본을 향하여 절하는것)를 한 다음 검도련습에 열을 올리는 박정희를 보며 《야마도다마시를 이을만 한 남아》라고 그를 적극 춰주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만주군관학교 교장이던 미나미 구보라는자는 오까모도라는 일본이름까지 달고 광기를 부리는 박정희의 꼴이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전체 학생들을 모아놓고 《자! 제국군인의 모범을 이 학생에게서 보아라.…》고 하면서 훈시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날 이 학교에 극악한 친일앞잡이로서 일본침략군 중장자리에까지 바라오른 홍사익이라는자가 찾아와 전체 학생들앞에서 《제군은 철저한 황국신민이 되여 <대동아공영권>의 성업을 완수해야 한다.》고 떠벌여댔다. 이자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남먼저 앞으로 달려나간 박정희는 그 훈시를 반드시 실현하겠다고 다짐하는 답사를 하였는데 후날 남조선의 한 신문은 그때의 사실을 이렇게 전했다.

《홍중장의 격려가 끝난 후 박생도가 답사를 하였다.

그 답사가 구절구절 어떻게 통절하고 심금을 울렸는지…

장군은 박생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만족해하였다.》

1942년 12월 만주군관학교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졸업생들중에서 일본천황에게 가장 충실한자로 뽑혔으며 그 표창으로 금시계를 받은것이 너무도 황송하여 《왕도락토를 보위하며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에서 저는 사꾸라와 같이 희생될것을 삼가 맹세합니다.》라고 엮어대기도 하였다.

대일본제국을 위해 이처럼 죽을지 살지 모르고 헤덤비는 박정희를 저들의 충견으로 더욱 완벽하게 키우기 위해 그후 일제는 그를 일본륙군사관학교에 전입시켰다.

당시 일본륙군사관학교에 들어가는것이 일본인들속에서도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힘들었다는것을 미루어볼 때 이것만으로도 박정희가 일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얼마나 무진 애를 썼는가를 잘 알수 있다.

그후 박정희는 상전의 눈에 들어 일본륙군사관학교에 들어간것이 너무도 감개무량하여 짬만 있으면 코가 땅에 닿도록 《궁성요배》를 하면서 《야마도다마시》를 다져넣기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1943년 3월 당시 일본 아이찌현 다까시하라에서 야영훈련을 할 때 있었던 일이다.

훈련중에 소대장으로 뽑힌 박정희는 같은 학생들을 어찌나 못살게 굴었던지 일본인학생들이 박정희를 욕질하면서 두고보자고 별렀다. 차츰 소문이 나면서 그것이 야영훈련을 책임진 교관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러자 교관은 학생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떠벌이였다.

《박군은 비록 반도출신이기는 하지만 정신에 있어서는 완전한 일본사람이다. 박군처럼 천황페하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일본인치고도 드물것이다.》

그러면서 교관은 박정희가 《일본인치고도 드문 특등일본인》이라고 하면서 극구 추어올리였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학생들속에서 《특등일본인》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특등일본인》이라는 칭호를 받고 일제의 충실한 앞잡이로 길들여진 박정희는 1944년 4월 일본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군 제6관구 8련대에 륙군소위로 배치되여 모조리 빼앗고 모조리 불지르고 모조리 죽이는 이른바 《3광정책》의 집행자로서 악명을 떨쳤다.

그런가 하면 《공산군을 소탕해야 한다.》고 떠벌이면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항일유격대와 자기의 조국을 찾기 위하여 무장을 든 중국인반일부대를 《토벌》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섰으며 발이 닿는 곳마다에서 무고한 인민들을 닥치는대로 탄압학살하는 야수적인 살륙만행을 수많이 감행하였다. 박정희가 얼마나 포악하고 히스테리적인 살인마였으면 같이 《토벌》에 동원되였던 일본군장교들까지도 살인, 방화, 강탈에서 《오까모도군을 따를수는 도저히 없다.》고 혀를 찼겠는가.

이런 공로로 하여 박정희는 일제로부터 여러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학교를 졸업한지 1년만에 중위로 바라오르고 중대장으로 승급되게 되였다.

중대장이 된 박정희는 졸병들에게 《여러분, 공산주의자는 우리 모두의 적입니다. 언제든지 이들을 소멸시키지 않고서는 우리들의 국가와 민족에 자유라고는 있을수 없으며 진정한 행복도 있을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군들은 대의를 위하여 생명을 희생할수 있는 결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한국정계7인전》 97~98페지)라고 지껄이였다.

당시로 말하면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박두한것으로 하여 일본침략군까지 풀이 죽어 무리로 뺑소니치는 판이였는데 박정희만이 일제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희생을 결심하라고 강박하였으니 이보다 더한 주구가 과연 어디에 또 있겠는가.

그러나 박정희가 그처럼 하늘처럼 떠받들고 모든 《충성》을 다해 섬기던 일제는 패망하고야말았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남의 나라 땅에서 주인을 잃은 개신세가 되고말았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뼈속깊이까지 다져넣은 친일근성을 버린것은 결코 아니였다.

3

 

선발된 꼭두각시

 

1946년 5월 중순 중국 천진근방의 어느 한 항구에서 장개석도당이 알선한 미제의 상륙함 한척이 인천을 향해 출발하였다.

바로 이 배에 죄많은 족제비낯짝을 가리운 박정희도 타고있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무장해제를 당한 후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이리저리 피해다니던 박정희가 남조선에 기여드는것이였다.

미제의 상륙함에 박정희가 실렸다는것자체가 암시해주듯이 이때 벌써 그에게는 미국첩보기관의 꼬리표가 붙어있었다. 일찍부터 중국에 침략의 마수를 깊숙이 뻗친 미국첩보기관은 패망한 일제로부터 중국에 대한 각종 첩보모략자료와 함께 박정희에 대한 자료도 넘겨받았던것이다.

박정희가 보기 드문 《특등일본인》으로 일제상전을 섬겼고 남달리 잔인하고 출세욕과 물욕이 강하다는 점은 미제첩보기관의 주목을 단번에 끌어당겼다. 하여 미국은 박정희를 저들의 쓸모있는 특무로 써먹을 계획밑에 그를 남조선에 끌어들여 주《한》미군첩보대에 넘기고 미군정보장교의 감시하에 두었다.

도적고양이처럼 고향땅에 기여든 박정희는 처음에는 자기의 죄행을 아는 마을사람들의 눈총이 무서워 집안구석에 두더지처럼 처박혀 제대로 나다니지도 못했다. 이따금 누가 자기에게 지난날의 일을 물으려 할 때면 박정희는 《술이나 마시세.》라고 하면서 어물쩍해 넘어가군 하였다.

남조선의 정세가 민주세력에게 매우 유리하게 전변되여가고 그 영향력이 군부안에도 급속히 파급되여 가고있을 때 미국은 민주력량내부에 저들의 밀정을 박아넣기 위해 교활하게 책동하여나섰는데 당시 미군정청의 정보두목이였던 노불은 괴뢰군안에 박아넣을 특무로 박정희를 선택하였다.

하여 륙군사관학교를 2기로 졸업한 박정희는 상전의 적극적인 뒤받침에 의하여 1947년 2월에 벌써 륙군본부 작전처 참모로 되였으며 그후에는 륙군사관학교 전술교원으로 임명되였다.

첩자로서 박정희의 쓸모를 계속 감시해오던 미제첩보기관은 저들에게 그를 더 바싹 끌어당길 목적밑에 이미 검증된 밀정과 짝을 무어주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17살에 결혼하여 딸을 둔 본처와 리혼하고 리화녀자대학에 다닐 때부터 미제의 첩자로 채용되여 비밀활동을 하던 륙영수와 짝을 뭇게 되였으며 결혼식도 하지 않은채 서울 효자동에 살림을 펴놓게 되였다.

바로 그때 남조선에는 복잡한 정치정세가 조성되였다.

미국과 리승만일당이 벌려놓은 망국적인 5. 10단선과 《정부》조작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거족적인 투쟁이 터지고 제14련대의 애국적장병들이 려수, 순천일대에서 군인폭동을 일으켜 거기에 적극 합세해나선것이였다.

극도로 당황망조한 미국은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벌리도록 하는 한편 괴뢰군이 이 투쟁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발악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호남지구사령부 작전참모로 있던 박정희는 미국상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을 더없이 좋은 기회로 여기고 뒤에 숨어서 군대안의 혁명조직과 애국적활동을 하는 군인들을 내탐하여 상전에게 고자질하였다. 미국은 그 밀고자료를 가지고 폭동군에 대한 대규모적인 《토벌》을 벌렸으며 1차로 군대안의 애국적장교 70여명과 수많은 병사들을 쉽사리 잡아내였다.

그들가운데는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도 있어 법관들까지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극악한 특무이며 밀고자인 박정희가 저지른 이때의 매국배족적죄행에 대해서는 당시 륙군참모총장이였던 채병덕이 미군고문단장 로버트에게 한 다음과 같은 보고를 통해서도 능히 짐작할수 있다.

《박정희가 아니였더라면 려수반란사건은 어떻게 되였을지 모른다. 신생대한민국을 살려놓은 숨은 공로자의 한 사람은 박정희이다.》

당시 륙군정보국 차장으로 있던 고정훈도 이 일을 두고 박정희를 《숨은 제1급공로자》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은 이처럼 교활한 밀고자이며 특무인 박정희의 정체를 숨겨두고 계속 써먹기 위해 그를 일시 잡아가두는척도 하였고 려수, 순천군인폭동자들에 대한 재판놀음때에는 판사가 증거문건으로 박정희가 제출한 밀고서를 공개하려 하자 그를 황급히 저지시키기도 하였다.

그후 추악한 반역행위를 저지른 공로로 하여 소령이던 박정희는 륙군정보처 정보과장으로 출세하였다. 직업적인 특무로 옮겨앉은 박정희는 군부안의 애국적장병들과 청년들 지어 량심적으로 살아보겠다고 모대기는 군인들까지 모조리 적발하여 처형당하게 하였다.

1949년 10월까지만 하여도 박정희에 의해 서대문형무소, 마포형무소에 감금된 량심적인 장교들은 650여명, 병사들은 1 000여명이나 되였다.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엄청난 죄악이지만 이것은 친미주구, 첩자로 전락한 박정희가 우리 민족앞에 저지른 죄행가운데서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는 1948년부터 공화국북반부에 무장악당과 테로단을 들이밀어 도발과 략탈을 감행하는 조직자로 악명을 떨치였고 미국이 조선전쟁을 도발하자 특무부대 대장이 되여 애국적인민들에 대한 학살만행의 앞장에 섰다.

이런 공로로 하여 박정희는 륙군준장으로 출세하였고 련이어 륙군포병학교 교장, 사단장, 제1군사령부 참모장이 되였으며 그로부터 또 얼마후에는 제6관구 사령관, 군수기지사령관 등으로 하늘이 높은줄 모르고 껑충껑충 뛰여올랐다.

한편 미국은 박정희를 요긴한 때 크게 써먹기 위해 본국에 데려다 특별훈련을 주었으며 교체할 주구로 내세울 흉책의 일환으로 리승만을 욕질하면서 《애국》과 《민족》에 대해 떠들게도 하고 《군내부의 정리》를 들고나와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지반을 닦게도 하였다.

남조선에서 4. 19인민봉기에 의해 리승만독재정권이 붕괴되자 미국은 식민지통치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림시변통으로 허정《과도정권》을 조작한데 이어 많은 품을 들여 장면《정권》을 또다시 조작해냈다. 그러나 장면《정권》은 파국에로 줄달음쳐가는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게 하였다.

그러자 미국은 무능한 장면일당을 차던지고 식민지정권을 이끌 역마를 혈기왕성한 군사깡패들로 갈아대기로 결심하였다.

남조선에서의 《정권》을 포악한 군사깡패들이 담당하도록 하고 그들이 무지막지한 군사파쑈통치를 실시하여야 한다는 《대책안》이 이때 처음 제기된것은 결코 아니였다.

1959년에 벌써 미국회 상원외교위원회 위원장 플브라이트는 남조선에서 《군인정치에 의한 교체를 생각해야 한다.》고 떠벌이였다. 그런가 하면 1961년에 미국대통령으로 들어앉은 케네디앞에서 당시의 주일미국대사였던 랴이샤워라는자는 《한국의 미래를 계승할 사람들은 전쟁의 마당에서 자라난 새로운 젊은 군인들이다.》라고 고아댔으며 당시 많은 극동문제전문가들속에서도 《한국정치를 위탁할수 있는것은 우익독재체제밖에 없다.》는 소리들이 쏟아져나왔었다.

그후 미국의 정책작성자들속에서 비밀리에 모의되여오던 우익군사불한당들에 의한 군사정변은 미국의 정책으로 채택되게 되였으며 그 준비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게 되였다.

우선 교체할 주구로 올려앉힐 앞잡이를 선택하는 문제가 제기되였다.

미국은 여기서 CIA(미중앙정보국)가 이미 작성해놓은 《한국최고통치자 적격기준》에 부합될뿐아니라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탈취할수 있는 군사깡패여야 한다는 점에서 견해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이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키고있는 대상자로 박정희를 점찍었다.

당시 남조선강점 미제침략군 8군사령관을 오래동안 해먹으면서 이른바 《국군의 아버지》로 자처하던 밴플리트도 박정희가 《100%반공산주의자이며 100%친미적》이라고 하면서 그를 적극 지지하였다.

저들에 의해 특등친미주구로 길들여지고 검증된 박정희를 미국이 군사정변의 주동분자로 선택한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였다. 권력의 자리에 올려앉힐 저들의 꼭두각시를 선택한 미국은 군사정변의 준비와 수행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였다.

결국 박정희는 미국의 적극적인 보호와 비호밑에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을 감행함으로써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감투를 뒤집어쓰게 되였다.

4

 

미국산 삽살개

 

친미주구인 박정희는 권력의 자리에 올라앉기 바쁘게 《미국과 우리와의 관계는 우방중의 우방으로서 공동운명체적불가분의 관계》,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과의 군사적, 정치적뉴대를 긴밀히 하는것만이 우리 민족이 사는 길》, 《미국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끝마다 외우면서 미국산 삽살개로서의 자기의 정체를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내놓았다.

그것은 박정희가 미국의 우두머리들이 케네디, 죤슨, 닉슨, 포드로 교체될 때마다 선참으로 미국땅에 달려가 상전에게 던진 역겨운 아첨과 추태놀음이 잘 말해준다.

1961년 11월 당시 《정권》을 가로챈지 다섯달밖에 안되던 때에 박정희는 미국대통령 케네디의 호출을 받게 되였다.

그 순간 주구의 마음은 말그대로 콩알만해졌다. 그것은 자기와 같은 식민지앞잡이따위는 제 비위에 한번 거슬리기만 해도 식은 죽 먹기로 떼여버리기도 하고 죽여없애치우기도 하는 상전의 상투적수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혹시 상전을 괴롭힌 일이라도 없는가 하여 미국으로 날아가는 전기간 근심과 고민속에 사로잡혀있던 박정희는 비행기승강대를 내리자마자 당시 미국부대통령이던 죤슨앞에서 《죤슨 미국부대통령 각하!》라고 차렷자세로 부른 뒤 돌부처처럼 굳어져버렸다. 상전이라면 크든작든 덮어놓고 우상화하고 존대하는것이 하나의 체질로 굳어져버린 박정희로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례사로운 행동이였다.

그 꼴이 얼마나 가관이였던지 당시 미국의 적지않은 신문들은 박정희의 그 몰골을 묘사하는것으로 《환영기사》를 대신하였다.

그러나 친미사대에 쩔을대로 쩔은 박정희에게는 오히려 그런 기사가 상전을 섬기는 자기의 진정을 알리는 매우 좋은 계기로만 여겨졌다. 하기에 그는 기자회견에서 그 일을 두고 미국의 AP통신 기자가 놀려대는것도 모르고 《적어도 두시간 혹은 그 이상을 차렷자세로 서있어야 했기에 정말 고단했다.》고 실토함으로써 기자들을 아연케 하였다. 하지만 그쯤한것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상전의 부름을 받고 백악관으로 달려간 박정희는 별로 시답지 않은 눈길로 자기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케네디에게 군사정변이후 남조선에서 반미분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하고 미국독점자본의 리익에 배치되는 민족산업은 모조리 목을 비틀어놓았다고 자기의 공적에 대해 늘어놓으면서 남조선이 《그 어느때보다도 굳건히 당신들의 편에 서있다.》느니, 미국의 식민지통치를 희생시키면서 《국가통일을 흥정하지 않을것》이라느니 뭐니 하다가 나중에는 《미국이 우리를 령도하고있는데 대하여 신에게 감사를 드린다.》며 상전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떨었다. 주구의 그 말이 영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던지 상전인 케네디는 박정희가 남조선에서 뒤흔들리는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수습하는데는 그런대로 써먹을만 하다고 생각하면서 만족을 표시하였다. 그러면서 《쿠데타는 잘했다.》, 《모든것을 념려말라.》, 《혁명정부를 지지한다.》고 주구를 적극 추어주었다.

이렇게 케네디의 입김을 쐬인 박정희는 그길로 다른 상전들을 부리나케 찾아다니면서 침략적인 《원조》를 구걸하다못해 나중에는 패전한 살인장군들인 맥아더, 밴플리트까지 찾아가 《한국군의 아버지》니 뭐니 하면서 갖은 추태를 다 부렸다.

그때로부터 4년이 지난 1965년 5월 박정희는 두번째로 미국상전을 찾아갔다. 당시는 케네디가 죽고 죤슨이 새로 대통령감투를 썼으므로 새 상전에게도 주구로서의 《충성》을 보여주어야 했기때문이였다.

죤슨이 보낸 특별비행기를 타고 박정희가 20여명의 졸개들과 함께 미국행각을 떠난 그때 벌써 미국신문 《워싱톤 포스트》는 《박정희는 이번 미국방문을 계기로 한국군 2개 사단을 윁남에 증파할것을 약속할것》이라는 글을 냄으로써 상전에게 바칠 주구의 앞날을 미리 짐작하였다.

사실 그때 박정희는 미국이 시키는대로 윁남전쟁에 괴뢰군을 증파하고 남조선미국《행정협정》을 조작함으로써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침략군이 저지르는 범죄적죄행을 감싸고 합리화하는것으로써 상전인 죤슨의 마음을 사려고 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속심을 미국신문이 빨리도 간파하였던것이다.

미국땅에 발을 내짚기 바쁘게 《적어도 아시아에서 성조기와 더불어 언제까지나 함께 행동할 전우는 다름아닌 한국이다.》라고 씨벌인 박정희는 가는 곳마다에서 《미국에 오고보니 타향에 가있다가 제 집에 온것처럼 마음이 놓인다.》며 별의별 아양을 다 떨었다.

저들이 길들인 친미앞잡이가 노는 꼴이 볼수록 흐뭇해서였던지 박정희를 백악관에 불러들인 죤슨은 그가 제 집에서 기르는 여러종의 남아메리카산 사냥개들과 백악관의 정원에서 한나절동안이나 같이 놀게 하였다. 그때 미국신문들은 귀가 척 늘어진 사냥개와 꼬리를 강군 세퍼드를 비롯한 여러 마리의 개무리속에서 희희락락거리는 박정희의 사진을 크게 실었는데 그 사진이야말로 상전이 길러낸 미국산 삽살개인 박정희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박정희의 추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박정희는 죤슨이 마련한 그 무슨 회담이라는데 나타나 《미국이 윁남증파를 정식으로 요청하면 충분히 고려하겠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고 굴욕적인 남조선미국《행정협정》도 상전의 요구대로 하겠다는것을 다짐하였다. 그런가 하면 미국독점자본가들이 벌려놓은 먹자판에 기를 쓰고 쫓아가서는 갖은 아양을 다 떨면서 침략적이며 략탈적인 독점자본을 남조선에 투입해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박정희가 상전앞에서 언약한 맹세를 집행하느라 미쳐돌아가던 1966년 10월말 미국의 우두머리 죤슨은 더 많은 괴뢰군의 남부윁남파병을 다그치고 전쟁도발을 현지에서 모의하기 위해 남조선에 기여들었다. 그때 박정희는 2만여명의 괴뢰군과 경찰, 밀정들을 풀어 경계망을 펴놓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상전의 침실로 예정된 숙소에 두번씩이나 찾아가 사전에 점검을 하며 돌아쳤다. 그뿐이 아니다. 죤슨이 남조선에 머무르고있는 기간 박정희는 6 300만원의 돈을 탕진하며 전례없는 먹자판까지 벌려놓았다.

박정희가 네번째로 미국을 행각한것은 닉슨이 미국대통령으로 된지 8개월만인 1969년 8월이였다. 이때에도 박정희는 여느 상전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땅에 닿도록 조아리며 닉슨에게 《…미국이 전통적으로 짊어져온 지도적위치를 십분 발휘해달라.》고 빌붙으면서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는 자기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는것을 거듭 강조하느라고 애를 썼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침략적군사동맹을 새로 조작하는데 앞장서며 미국의 윁남침략전쟁을 적극 협조하겠다고 공언하면서 남조선에 대한 미제침략군의 영구강점과 《군사원조》의 증가를 애걸하였으며 공화국북반부를 반대하는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시기가 바야흐로 도래하였다.》는 망발까지 마구 불어댔다.

1974년 8월 하늘같이 믿어오던 상전인 닉슨이 극심한 부정부패행위의 진상이 드러나는 바람에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나고 새로 악명높은 호전광 포드가 그 자리에 들어앉았을 때에도 박정희는 새로운 상전을 남조선에 끌어들여 미제침략군을 남조선에 한사코 붙잡아둘것과 상전이 내놓은 《두개 조선》조작책동을 기어코 성사시킬것을 다짐하였다.

이처럼 상전을 제 주인처럼 따르고 섬긴 박정희이기에 전 미국대통령 죤슨이 심장마비로 죽었을 때에는 억지눈물을 짜내면서 그 은혜를 《영원히 가슴속에 간직할것》이라고 하였고 그보다 앞서 트루맨이 죽었을 때는 《놀라움과 슬픔을 금할수 없다.》느니, 《남달리 슬퍼하고 가슴아프게 생각한다.》느니, 《영원히 잊을수 없는 은인》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쥐가 고양이 죽은데 흘리는 눈물같은것을 쥐여짜며 노죽을 부렸다.

참으로 상전앞에서 부린 박정희의 역겨운 추태는 주인이 살아있을 때에는 주인의 애무를 바라고 꼬리를 저으며 갖은 아양을 다 떨고 주인이 바뀌면 새로운 주인에게 또다시 잘 보이기 위해 별의별 교태를 다 부리는 삽살개의 꼴을 신통히도 닮은것이였다.

5

 

《제2의 을사5적》

 

을사국치의 해가 60년이 되는 1965년 6월 22일 일본의 도꾜에서는 강도적이고 매국적인 남조선일본협정이 정식 조인되는 놀음이 벌어졌다.

이날 일본에서 매국문건에 도장이 찍혔다는 소식이 오기를 초조히 기다리던 박정희는 협정이 조인되였다는 소식이 날아오자 너무도 좋아서 당시 외무부장관이였던 리동원에게 즉시 축전까지 날려보내면서 분주탕을 피웠다.

그러면 《제2의 을사5조약》인 남조선일본협정은 과연 어떻게 꾸며진것인가.

원래 《한일회담》은 그 출발부터 미국의 각본에 의해 시작된것이였다.

미국은 조선에서 도발한 침략전쟁에서 참패를 거듭하자 그를 만회하고 남조선에서 식민지통치를 유지하며 나아가서 조선전쟁을 아시아 전지역에 확대하기 위하여 일본군국주의자들을 조선전쟁에 전면적으로 끌어들이려고 책동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장애로 되는것은 당시 남조선과 일본사이에 국교가 수립되여있지 않은것이였다.

여기로부터 미국은 이 골치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남조선과 일본으로 하여금 《국교정상화》라는 간판밑에 《한일회담》을 벌려놓도록 하였다.

1951년 10월 주일미군사령부의 외교국장 시볼트라는자는 남조선과 일본의 졸개들을 불러다가 《일본의 한국진출은 미극동정책의 기본구성》이며 《조선전쟁에 일본이 공개적으로, 합법적으로 참여》하기 위하여 《한일회담》을 열고 《한일국교》를 실현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1951년 10월 20일 도꾜에서는 남조선과 일본사이에 범죄적인 《한일회담》이 열리게 되였으며 1961년 5월에 박정희가 감행한 군사정변으로 그것이 중단되기까지의 10년동안에 무려 5차례에 걸쳐 진행되였다. 그러나 별로 큰 진전이 없었다.

이에 골머리를 앓고있던 미국은 저들의 손때묻은 주구인 박정희가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자 그를 계기로 《한일회담》을 빨리 결속짓도록 하여 저들의 음흉한 목적을 달성하려고 책동하였다.

1961년 6월에 당시 일본수상이였던 이께다를 워싱톤에 호출한 미국은 일본이 《한일회담》을 빨리 끝내는것이 《아시아에서 서방측의 중요한 정치적제창자로서의 의무를 다할 능력과 의사가 있음을 시험하는 최초의 시험대》로 될것이라 하면서 회담의 급속한 타결을 독촉하였다.

그러자 이께다는 《금후 일본대외정책의 초점을 대한정책에 두며 남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생각하고 자국과 같은 관심을 돌릴것》이라고 발라맞추었다.

미일상전의 이러한 속심을 재빨리 간파한 박정희는 군사정변을 감행한지 두달밖에 안되였던 1961년 7월 10일에 벌린 기자회견에서 《한일관계가 지금까지 부자연한 상태를 계속해온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수 없다. 정부는 한일회담을 년내에 일괄해결할 방침으로 모든 노력을 다하고있다.》고 떠벌이고나서 그 실현에 발벗고나섰다.

그리하여 중단되였던 매국흥정판인 《한일회담》은 1961년 10월 20일에 다시 열리게 되였다. 그러나 그를 반대하는 남조선인민들의 항거에 부딪쳐 《한일회담》은 또다시 난관에 부닥치게 되였다.

이에 바빠맞은 미국은 1961년 11월 상전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워싱톤에 기여든 박정희에게 《한일회담》을 빨리 끝낼데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그리고 《원조》를 애걸하는 그에게 그것은 《앞으로 대일국교정상화의 성공여부》에 달려있다고 을러메였다.

박정희는 제 소굴로 돌아오기 바쁘게 《대국적인 견지에서 국민의 비난을 받더라도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위하여 노력할것》이라느니, 《우리 량국은 과거의 감정에 구애됨이 없이 공동의 적에 대비하기 위한 문제로서 손을 잡지 않으면 안될 력사적인 위치에 놓여있다.》느니, 《국교정상화전이라도 일본민간자본을 도입할것》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친일주구로서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놓았다.

그리고는 한켠으로 《한일회담》을 계속 진행하게 하고 다른켠으로는 졸개들을 부추겨 일본과 막후교섭과 비밀흥정을 벌리게 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의 감투를 쓰고있던 김종필도 동원되였다.

1961년 10월 일본에 건너간 김종필은 하꼬네의 한 술집에서 오노(당시 일본자민당 부총재)와 아침부터 술판을 벌려놓고 일본외교부장을 만날수 있도록 《부자지간의 립장에 서서 꼭 협조해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오노의 알선으로 당시의 일본외교부장이였던 오히라를 만난 김종필은 그 자리에서 《배상금으로 무상 3억US$, 재정차관 2억US$, 상업차관 1억US$이상을 주면 한일조약에 응하겠다.》라고 하면서 상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썼다. 오히라는 뜻밖의 소리에 귀맛이 바싹 당겼지만 대답을 뒤로 미룸으로써 배상문제를 보다 강도적으로 타결짓고 그에 침략적인 조건까지 더 첨부할 교활한 속심을 품었다.

그로부터 22일만에 미국에 갔다오던 길에 다시 일본에 들린 김종필은 현지의 졸개들에게서 아직 《재산청구권문제》를 락착짓지 못했다는 보고를 듣게 되자 《아직 해결 못했어?》 하고 고아대고는 그를 수행한 대표부 직원에게서 연필과 타자종이를 받아들고 혼자 합의사항을 정리했다. 이렇게 되여 타자종이에 연필로 메모한 《김종필-오히라비망록》이 작성되였다.

범죄적인 《김종필-오히라비망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국》민의 대일재산청구권은 《한국정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경제협력으로 대치한다.

2. 3억US$를 일본정부로부터 《한국정부》에 무상증여(10년분할)한다.

3. 2억US$를 유상공여한다.(10년간 3. 5%의 리자, 7년 거치, 20년 상환)

4. 일본정부가 보증하여 수출입은행으로부터 1억US$이상을 대출한다. 이는 민간차관으로서 협정발효전에도 할수 있다.

5. 경제협력은 현금이 아니라 설비, 자재 또는 용역으로 제공한다.

6. 이 경제협력에 의하여 《한국》민의 일본에 대한 청구권은 처리된것으로 한다.

김종필은 후에 자기가 오히라에게 6억US$(무상, 유상차관을 다 합친것)를 제기했을 때 《덩지 큰 오히라가 30cm나 펄쩍 뛰여올랐다.》느니, 한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오히라가 《당신 김종필의 력사적인 각오에 감동되였다.》고 했다느니 뭐니 하며 제가 저지른 죄행을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만약 오히라가 진짜로 김종필이 말한것처럼 처신했다면 그것은 그로서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헐값을 김종필이 감히 입에 올리고 무분별하게 나왔기때문이였을것이다.

일제가 지난날 우리 민족에게 끼친 인적, 물적, 정신적피해는 사실상 그 크기와 깊이를 측정할수 없으리만치 엄청난것이다. 그것은 일제가 남기고 간 자료를 가지고 초보적으로 계산하여보아도 수천억US$에 달한다.

오히라에게서 《김종필-오히라비망록》의 기본내용을 보고받은 일본중의원 의장 후네다는 너무 좋아서 주인에게 충실한 삽살개를 애무하듯 《김군은 퍽 좋은 사나이란 말이야…》(《신동아》 1965. 6)라고 하면서 김종필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지난날 《한일합병》을 성사시키고 나라를 일제에게 통채로 팔아넘긴 리완용이 일제로부터 《후작》칭호를, 송병준이 《자작》칭호를 받았다면 박정희는 애비로 섬기는 일제로부터 변함없이 충직한 《아들》로, 김종필은 《퍽 좋은 사나이》라는 평가를 받았던것이였다.

당시 일본은 1905년에 을사5적을 매수하여 《을사5조약》을 날조하였던것처럼 박정희를 몇푼의 돈으로 더 단단히 틀어쥐고 다른 현안문제들도 저들의 요구대로 처리함으로써 남조선일본협정을 기어이 성사시키려 하였다.

이에 따라 남조선에 기여든 일본경제사절단과 일본독점재벌들은 박정희에게 저들의 음흉한 기도가 깔린 거액의 돈을 찔러주군 하였다.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전후하여 일본상전에게서 받아먹은 정치자금은 2 000만US$를 넘었다.

그후 미일상전의 적극적인 뒤받침으로 1963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감투를 따낸 박정희는 《제3공화국의 운명을 걸고라도 한일회담을 추진시키겠다.》고 하면서 상전의 지시에 따라 1964년 《3월결속》, 《4월조인》, 《5월비준》이라는 일정까지 꾸미고 굴욕적인 협상에 더욱 악을 쓰며 매달렸다.

하지만 박정희의 이 매국일정은 분노한 남조선청년학생들의 3. 24, 6. 3투쟁에 의해 실현될수 없었다.

바빠맞은 박정희는 비상계엄령을 내려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을 최루탄과 총칼로 마구 탄압하는 한편 《한일회담고지점령내각》이라고 불리운 《정일권내각》을 꾸며내고 필사적으로 발악해나섰다.

이 내각의 외무부 장관으로는 8. 15직후 우익반동학생깡패들의 집결처였던 학생련맹의 위원장노릇을 한 공로로 하여 미국에까지 가서 류학생활을 하면서 극악한 친미분자로 전락된 리동원을 앉혔다.

당시 타이주재 남조선대사로 있던 리동원은 상전의 뜻밖의 호출을 받고 남조선에 돌아와 박정희에게 인민들의 《돌팔매에 맞아죽는 한이 있어도 한일회담을 타결짓겠다.》는 맹세를 하고 외무부 장관의 감투를 따냈던것이다.

그후 리동원은 박정희와 함께 《선경제, 후국교》라는 간판밑에 일본독점자본가들에게 남조선침투의 길을 활짝 열어주는 한편 《한일회담》의 현안문제들을 일괄타결짓기 위해 일본외교부장 시이나를 만나러 갔다.

리동원이 시이나와 마주앉아 한짓이란 박정희의 지시대로 《한일회담》의 현안문제들을 전부 상전이 하자는대로 내맡기고 일본신문들이 토의에서 《일본측의 양보》, 《호상양보》라는 식으로 글을 내보내도록 힘써달라고 빌붙은것뿐이였다.

한편 박정희는 심복졸개들을 련달아 일본에 보내여 《한일회담》의 현안문제들을 매듭짓기 위한 추악한 흥정판을 벌리게 하고 그것들을 상전의 요구대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결과 어업문제와 같은 《한일회담》의 개별적인 현안문제들이 실질적으로 락착되였다. 1964년 12월 3일 제7차 《한일회담》이 열리게 되자 일본의 출판물들은 막후교섭에 의해 문제해결의 열쇠는 이미 주어졌다고 큼직하게 보도하였다. 그 열쇠란 바로 일본상전이 박정희에게 오금을 박고 저들의 강도적요구를 내려먹이는 담보를 마련한것이며 남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경제침투의 출로를 열어놓은것이였다.

하기에 《한일회담》이 바야흐로 마지막고비에 다달았던 1965년 1월 7일 일본측 수석대표 다까스끼 싱이찌라는자는 기자회견을 열고 《이 교섭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정치술만으로는 안되며 더 큰 배짱으로 대국적립장에서 진행해야 한다. 우리는 형이 된셈 치고 큼직하게 먹어치워야 한다.》라는 폭언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줴쳐댔다.

결국 14년간이나 끌어오던 상전과 주구의 흥정판인 《한일회담》은 마침내 일본상전의 강도적인 요구가 관철됨으로써 1965년 2월에는 서울에서 《한일기본관계조약》이 가조인되고 그해 6월에는 일본에서 남조선일본협정이 정식 조인됨으로써 끝을 맺게 되였다.

매국문건에 도장이 찍혔다는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큰뜻이 성취되였다고 하면서 졸개들과 같이 축하연을 벌려놓았으며 이어 《국회》에서 《한일협정비준동의안》을 단 30초사이에 날치기로 상정시키고 일제가 패망한지 20년이 되는 바로 전날인 8월 14일 민주공화당패거리들끼리 순식간에 비준하여버렸다.

박정희가 이렇게 남조선일본협정을 강다짐과 날치기로 통과시켜버리자 당시 미국대통령 죤슨은 그것이 미국에 력사적인 리익을 가져올것이라고 좋아하면서 박정희에게 편지까지 써보냈다.

이처럼 박정희는 미국의 비호밑에 남조선을 통채로 일본상전에게 팔아먹는 천추에 용납 못할 매국배족적죄행을 저지른 《제2의 을사5적》이다.

6

 

되살아난 조선총독부

 

1973년 7월 1일 미국에서 발간되는 한 재미교포신문에는 이런 글이 실렸었다.

《옛날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두고 일본의 기업이 필요로 하는 토지와 저임금의 로동력을 확보할수 있었으며 때에 따라 일본군이 필요로 하는 위안부를 징발할수도 있었던것이다. 오늘날의 일본인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것을 박정권을 통하여 욕망을 채우고있는것이니 구태여 서울에 총독부를 설치할 필요가 없는것이다. 박정희가 총독이며 그의 정부는 한국총독부이므로 일본은 하등의 불편과 부자연한 일이 없는것이다.

지금 한국총독직을 맡아보고있는자는 경상북도출신의 제국군인 오까모도 미노루(박정희)이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 사는 한 남조선동포는 일본잡지 《세까이》(1973. 10)에 이렇게 썼다.

《… 지금 일본은 옛날식으로 조선총독부를 … 세울 필요가 없다. 박정권을 기른다면 훨씬 값싼 방법으로 일본은 자기가 요구하는 모든것을 손에 넣을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이러한 평들은 결코 틀린것이 아니였다.

해방전에는 특등일본인으로 일제의 천황에게 멸사봉공했으며 군사정변으로 권력의 자리를 차지한 다음에는 매국적인 남조선일본협정을 조작하여 친일사대매국노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박정희는 사실상 일제시대의 조선총독이나 같았으며 박정희《정부》는 그야말로 일제시대의 조선총독부나 다름없었다.

되살아난 조선총독부의 총독인 박정희가 칼을 물고 남조선에 다시 기여든 일본상전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얼마나 무진 애를 썼는가를 보여주는 몇가지 실례가 있다.

범죄적인 《한일회담》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써 남조선에 주재할 일본대사를 임명하고 월급까지 지불하던 일본은 남조선일본협정이 조인되자마자 서울 한복판의 반도호텔에 일장기를 띄워놓고 대사관간판을 내걸었다. 련이어 부산에는 총령사관을, 인천에는 령사관을 설치하였다.

그것을 보는 남조선인민들은 치를 떨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격분을 더욱 자아내게 한것은 박정희가 서울의 남산에 일본대사관을 지어바치려 한것이였다. 남산으로 말하면 서울시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일뿐더러 일제가 《아마데라스 오오미까미(일제가 일본민족의 조상이라고 내세운 귀신)를 모신다.》고 하면서 신궁을 지어놓고 우리 민족에 대한 《황국신민》화책동의 수단으로 삼던 곳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정때가 그립다.》고 입버릇처럼 외워대던 박정희는 남산에 일본대사관을 건설해놓음으로써 거기에 지난날의 조선총독부와 같은 위풍을 부여하려 하였던것이다.

그러다가 그 흉계가 남조선 각계의 비난과 항의에 부딪쳐 실현되지 못하게 되자 박정희는 련이어 서울 한복판에 있는 력사유물을 포함한 일대를 통채로 상전에게 대사관터로 넘겨주려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남조선인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실현되지 못하게 되자 박정희는 중앙청의 맞은편 서울 종로구에 아시아의 각국에 있는 일본대사관건물들중에서 가장 큰 대사관건물을 지어 일본상전에게 섬겨바쳤으며 그 정문에 금속으로 만든 길이 1m 68cm의 간판을 보란듯이 내걸게 하였다.

일본상전을 위해 바친 박정희의 《충성》은 일본의 남조선재침을 보장하고 다그치게 할 범죄적인 목적밑에 상전과 공모하여 수많은 기구들을 조작해낸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박정희는 외교부장급이상 각료들이 참가하는 상설적인 기구로 《한일정기각료회》(1967년), 정치군사협의기구로서 《한일국회의원간담회》(1968년), 《한일민간합동경제위원회》(1969년), 《한일민간협력위원회》(1970년) 등과 같은 침략기구들을 련이어 꾸며냈다. 이 침략기구들에서 박정희는 상전의 요구대로 매국배족적인 조세협정, 해운협정, 공업소유권협정 등을 조작하여 남조선의 재부를 팔아먹고 인민들을 일본독점자본가들의 수탈에 서슴없이 내맡겼으며 수출자유지역을 설정하여 남조선의 땅덩어리를 조계지로 떼주다못해 남조선경제를 일본의 경제권내에 완전히 통합종속시킬 음모까지 꾸미였다.

뿐만아니라 박정희는 1971년에만 하여도 경제조사단이니, 자본협력환경조사단이니, 《한국상품수출촉진사절단》이니, 《한일협력위원회대표단》이니, 민간경제사절단이니 하는 일본독점자본가들을 끌어들여 투자환경을 조사하게 하고 자본침투를 강화하도록 하였다.

박정희가 일본을 위해 이처럼 온갖 편의와 조건을 다 보장하자 극심한 경제위기에 허덕이던 일본독점자본가들은 《현재의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운명을 걸고 한국에 진출할 각오이다. 우리 회사의 운명은 한국인들을 어떻게 쓰는가에 달려있다.》고 하면서 앞을 다투어 략탈적인 자본을 들이밀었다. 그리하여 1975년 12월말 남조선에 침투한 일본독점자본은 공공차관 6억 7 870만US$, 상업차관 8억 3 580만US$, 직접투자 6억 1 620만US$로 모두 무려 21억 3 070만US$에 달하였다. 단독 또는 합작투자로 남조선에 벌려놓은 기업체만 하여도 800여개나 되였다.

일본상전에게 바치는 박정희의 《충성》은 《한일회담》에서 남조선일본어업협정을 조작해내여 남조선의 황금어장을 이른바 공동규제수역이라는 딱지를 붙여 섬겨바친데서, 남조선의 고등학교들과 대학들에서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하도록 하고 수많은 일본어강습소를 만들어낸데서,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군사정보수집활동을 더 잘할수 있도록 상전에게 문을 열어주고 부산-시모노세끼를 오가던 원한많은 과거의 관부련락선을 다시 복구해놓은데서 뚜렷이 표현되였다.

그리고 1970년 8월 일본인위령탑을 세워놓은데 격분한 6명의 청년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탑에 새긴 더러운 위령문을 쳐없애고 탑자체를 도끼로 까부시려고 할 때 경찰들을 풀어 그 청년들을 잡아가두게 한데서와 졸개들을 내세워 《일본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한국의 래일은 없다.》고 하면서 교육헌장, 국토개발론 등과 같이 상전이 써먹을대로 써먹은 낡아빠진 반동시책들까지 그대로 모방하여 리용한데서도 상전에 대한 주구의 《충성》은 여지없이 과시되였다.

뿐만아니라 경제적리권과 땅덩어리를 통채로 팔아먹다못해 남조선녀성들까지 일본호색한들의 노리개로 섬겨바침으로써 해마다 50만~60만명의 일본호색광들이 무리지어 쓸어들어 온 남조선땅을 일대 국제매음소굴로 전락시킨것은 박정희가 상전의 환심과 신임을 충분히 사고도 남는것이였다.

오죽하였으면 미국의 어용출판물들까지도 《한때 일본인들의 훈련을 받았고 일본황군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낡은 일본군대정신을 아직도 지니고있다.》고 야유했겠는가.(미국신문 《크리스챤 싸이언스 모니터》, 1974. 5. 22)

7

 

해외파병의 돌격대

 

1960년대초 미국은 남부윁남에서의 거듭되는 참패로 하여 심각한 위기에 부딪쳤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해오던 특수전쟁을 계단식으로 확대하여 추종국가와 지역에서 더 많은 군대를 끌어들여 국제화하는것으로써 위기를 수습하려고 획책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저들의 추종국가와 지역들에서 대포밥으로 써먹을 고용군을 날로 확대되는 윁남전쟁판에 끌어들이기 위한 외교활동을 맹렬하게 벌리였다. 그러나 수차에 걸치는 미국의 파병요청은 어디서도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상전의 요구에 선참으로 응해나선자가 바로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미국이 외로운 립장》에 처했는데 《강건너 불을 보듯》 하지 말고 《남들이 꺼려하고 주저할 때 나서서 도와야 한다.》고 떠벌이면서 그 어느 주구들보다 먼저 그리고 보다 많은 병력을 남부윁남의 전쟁터에 미국의 대포밥으로 내몰았다.

이렇게 되여 1차파병은 1964년에 이동외과병원을 파송하는 형식으로 감행되였으며 2차파병은 1965년 2월과 3월에 걸쳐 《비둘기부대》라는 이름밑에(공병수송부대를 기본으로 하여 2 000여명) 감행되였다. 련이어 6월에는 《비둘기부대》보충이라는 구실밑에 3차파병이 감행되였다. 그뿐이 아니다.

박정희는 괴뢰군의 남부윁남파병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놓고 1965년 5월에는 직접 상전에게 찾아가 대규모전투병력을 파병하겠다고 맹세까지 다지는 추태를 부렸다. 그리고는 제 소굴에 돌아오자마자 이른바 《국무회의》를 열고 1개 사단규모의 전투병력파병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여 4차로 1965년 9월과 10월에 또다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가 남부윁남의 죽음터로 끌려갔다.

박정희는 또한 1966년 2월 더 많은 괴뢰군을 남부윁남에 파병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서울에 기여든 험프리(당시 미국부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개 사단과 1개 련대규모의 병력을 5차로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이 윁남에서 벌린 침략전쟁에 총알받이로 끌려간 괴뢰군은 상주인원이 5만여명, 연인원이 30여만명에 달하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것으로도 성차지 않아 그 무슨 군속이니, 용역단이니, 후방요원이니 하는 간판밑에 수만명의 남조선청장년들을 남부윁남에 추가로 더 파병하였다.

박정희는 이 엄청난 범죄적파병을 뒤받침하기 위하여 남부윁남에 청장년들을 끌어갈 때마다 《경비명령 제1호》를 내려 파병을 반대하는 애국적인민들을 대량적으로 검거하는 소동을 일으키고 남부윁남에 파병된 병사들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글을 쓴 기자들에게 《국군파견계획에 악영향을 주려는 음모》를 한다는 죄를 들씌워 잡아가두었으며 지어는 《국회》에서 야당의원들을 참가시키지 않고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망동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미국은 저들의 지시라면 그 어떤 매국배족행위와 범죄적책동도 서슴없이 감행하는 박정희의 이러한 파병놀음을 본보기로 삼고 《미국의 윁남정책을 무익하고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는자는 한국을 본받으라.》고 널리 선전하였다.

당시 일본잡지 《세까이》가 《가장 곤난할 때 막내아들이 제일 잘 도와준다.》는 격언이 꼭 맞는다고 하면서 미국의 전쟁머슴군인 박정희를 조소한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박정희의 친미사대매국책동에 의해 남부윁남에 전쟁대포밥으로 끌려간 괴뢰군의 처지는 과연 어떠했는가.

남조선괴뢰군은 전투마당과 고역장에서 미군으로부터 극심한 민족적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가장 위험한 전투지역에 총알받이로 내몰려 재난과 죽음을 당하였다. 남부윁남에 간 군속과 민간인들이 담당한 용역이요, 군납이요 하는것도 모두 미제침략군을 위한것이였다.

남부윁남에 파병된 괴뢰군병사들이 당한 민족적차별과 멸시는 그들이 받은 보수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전투수당을 포함하여 남부윁남에서 미군사병이 받는 보수는 월에 235.5US$인데 비하여 괴뢰군은 겨우 30.96US$밖에 받지 못하였다.

같은 전쟁판에서 괴뢰군은 가장 위험한 곳에 내몰리우면서도 미군이 받는 보수의 8분의 1밖에 안되는 월 30US$정도의 적은 돈을 지불받았다.

이 사태를 두고 당시 남조선의 한 주민은 이렇게 분노를 터뜨렸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낯선 땅의 전쟁터에 간 병사들의 하루수당이 1US$(당시 남조선돈으로 250원)가 뭡니까. 교통사고로 죽는다 해도 10만원~20만원씩 지불되는데… 사람의 죽음이 그렇게 값싼것이라면 억울하고도 원통한 일입니다.》(《동아일보》 1966. 1. 15)

남조선괴뢰군은 무장장비에서도 극심한 차별대우를 받았다.

미국은 남부윁남땅에서 같은 싸움을 하는 미군에게는 신식《M-16》소총을 공급하면서도 괴뢰군에게는 무겁고 고장이 많은 낡은 《M-1》소총을 내주었다. 괴뢰군이 장비한 무전기도 공칭유효능력의 절반도 안되는 낡은것이였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남부윁남전쟁판에서 제일 힘들고 위험한 전투지역을 골라 괴뢰군에 떠맡겼다. 그리고 모험적인 큰 작전을 벌릴 때마다 그 앞장에 괴뢰군을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괴뢰군이 남부윁남에서 벌렸다고 하는 1 100여회의 대대급이상의 큰 작전은 모두 이런것들이였다.

한편 파병된 괴뢰군병사들가운데는 동맹군이라고 하는 미군에 의해 무참히 죽은자들이 적지 않았다.

1965년 3월 11일 한 미군장교는 전투의 앞장에 총알받이로 나서라는 자기의 명령을 거부하였다고 하여 6명의 괴뢰군병사들을 권총으로 쏘아죽였다.

또한 1965년 8월 5일에는 비엔호앙주의 탄동 히에프마을에서 미군장교가 격추된 미군용기의 잔해를 걷어오라고 괴뢰군 한개 소대를 파견하고 거기를 폭격하여 13명을 살상하였다. 미제침략군은 1965년 11월 4일에 괴뢰군의 병영을 폭격하여 52명을 참살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미제침략군은 1967년 1월 19일 랑남주 탄빈군 투앙투웅마을에서 괴뢰군이 현지주민들을 혹독하게 다루는데 격분하여 남부윁남군과 사격전이 벌어졌을 때에는 싸움을 말린다는 구실밑에 그들에게 기총사격과 폭탄을 퍼부어 70여명의 괴뢰군병사들을 참살하기도 하였다.

1965년 2월에 남부윁남에 파병된 5대독자 남효인(21살, 《비둘기부대》 공병대대 2중대 3소대 일등병)은 현지에 도착한지 석달만에 미국의 총알받이로 죽었다. 그의 가슴엔 어머니와 같이 잘살아보겠다는 소박한 꿈이 있었다. 그가 남부윁남땅에서 한달에 두번씩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7통은 모두 제대되면 함께 모여 잘살아보자는 내용이여서 어머니의 가슴을 부풀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8번째로는 아들의 편지가 사망통지서가 되여 날아왔다. 그것을 받아쥔 어머니는 너무도 기가 막혀 《5대독자를 죽이다니… 우리 남씨대가 끊어졌다.》고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실신하였다.

1965년 9월에 파병된 《맹호부대》소속 하사 정태량은 남부윁남땅에서 어머니의 사망에 대한 부고를 받았다. 자식이 곁에 없는 그 어머니의 령전에는 《젊었을 때 남편을 징용으로 빼앗기고 외아들을 윁남에 보낸채 눈을 감아야 했던 어머님》이라는 글이 놓여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마저도 미군이 벌려놓은 전투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남조선당국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자료에 의해도 남부윁남에는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의 기간에 연 32만여명이 파병되였는데 그중 5 000여명이 사망하고 16 00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다고 한다.

청장년들이 낯설고 물이 선 이역의 죽음터로 줄줄이 떠나갔다가 유골함에 담긴 한줌의 재가 되여 꼬리를 물고 돌아올 때마다 남조선의 항구와 비행장들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넘쳤다.

결혼한지 넉달만에 남부윁남에 파병되여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유골함을 받아안은 안해를 비롯하여 김포비행장에서는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다시 만나볼수 없게 된 녀인들의 가슴치는 울음소리가 그칠새 없었다. 그런 나날이 거듭될수록 박정희에 대한 남조선인민들의 분노와 원한은 하늘끝에 닿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미국의 지시에 따라 박정희가 감행한 남부윁남파병이 빚어낸 비극적인 이야기들중에서 한토막에 불과하다.

그러나 남부윁남에 끌려갔던 남조선청장년들의 죽음과 재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남조선에서는 남부윁남전쟁마당에 파병되여갔던 5만여명의 사람들이 그 범죄적전쟁의 후유증으로 신음하며 속절없이 죽어가고있다.

윁남전쟁때 미제는 밀림과 쟝글의 무성한 나무잎이 저들의 전투행동에 장애로 된다고 하면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엄청난 량의 독성고엽제를 뿌렸다. 미군은 그 독성고엽제를 괴뢰군이 주둔한 지역에 비행기로 마구 뿌리였으며 심지어 괴뢰군병사들에게 지정된 지역의 나무잎을 고엽제를 뿌려 제거할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기도 하였다. 고엽제에 독성물질이 섞인것을 알리 없고 살포수단도 없었던 괴뢰군은 미군의 독촉에 못이겨 그것을 철갑모에 담아 손으로 뿌리는 자살행위와 같은 우둔한짓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 몸에 밴 고엽제의 독성물질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들속에서 치료할수 없는 각종 질병을 일으켜 목숨을 빼앗아갔을뿐아니라 후대들에게까지 치명적인 후과를 미치고있다고 한다.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 후대들에게까지 이처럼 치명적재난을 들씌운 박정희의 남부윁남파병책동은 두고두고 용서할수 없는 죄악중의 죄악이다.

미제는 남부윁남파병의 전행정에 남조선통치배들을 기만우롱하고 배신하는 죄악을 덧쌓았다.

후날 미제가 남조선에 강요한 파병이 미국과 남조선사이에 청장년들의 피와 딸라를 바꾼 《용병거래》라는 여론들이 떠돌기도 하였지만 미국은 그 거래의 약속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미국은 괴뢰군의 파병을 성사시키기 위해 박정희에게 군의 《현대화지원》이니, 《군사원조지속》이니 하면서 파병되는 병력에 따라 최신장비제공과 비용부담 등 많은 협약을 맺고 각서를 교환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어느 하나도 리행하지 않았다.

1965년 괴뢰군의 남부윁남증파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비용 20억원을 자기들이 전부 부담하겠다고 한 미국은 돌아앉자마자 3억원을 남조선에 떠넘겼으며 나머지 17억원에 대해서도 이미 제공한 《원조》자금으로 충당하도록 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그 전액을 남조선인민들에게서 짜내였다. 하지만 박정희만은 수많은 청장년들을 미국이 강요한 전쟁마당에 총알받이, 대포밥으로 내몬 대가로 매해 상전으로부터 1억 5 000만US$를 받아 제 배를 채웠으니 이것이야말로 친미사대에 환장한 천추에 용납 못할 민족반역자가 아니고서는 감히 저지를수 없는 매국배족행위였다.

8

 

파쑈악법조작의 능수

 

《정치를 하자면 히틀러와 같은 무자비한 용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의 질서회복을 위해 히틀러식통치방법만으로는 될수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당시 《완고한 독재자》, 《파쑈교형리》, 《미친 사냥개》, 《최고감옥간수》로 악명을 떨친 박정희의 지론이였다.

하기에 박정희는 사회의 민주화와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하여 싸우는 남조선의 의로운 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기 위하여 전대미문의 파쑈악법들을 수많이 조작하였다.

박정희는 일제의 식민지악법, 미군정의 악법, 리승만, 장면《정권》이 꾸며낸 무수한 악법우에 보다 폭압적이고 파쑈적인 살인악법을 조작하여 피비린내나는 살륙만행을 끊임없이 감행하였다.

박정희는 권력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원래 악랄하기 그지없는 《보안법》을 더욱 개악하고 《특수범죄 처벌특별법》, 《특정범죄처벌특례법》, 《정당법》, 《정치활동정화법》,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인신구속에 관한 특별법》 등을 비롯한 무수한 악법들을 새롭게 조작하였다. 당시 《법제처장》이란자가 발표한데 의하더라도 5. 16군사정변후 1962년말까지 1년 반동안에 박정희패당이 공포한 《법령》총수는 2 261건으로서 8. 15후부터 군사정변에 이르기까지 15년간 선행한 우두머리들이 조작공포한 《법령》총수(3 325건)의 70%에 달하였다.

박정희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국회》의 기능을 맡은 《비상국무회의》에서 불과 4개월 남짓한 기간에 꾸며낸 악법만 하여도 271건에 달하였다. 이것은 8대《국회》가 1년간 조작해낸 39건의 악법에 비해 거의 7배에 달하는것이였다.

그것도 모자라 박정희는 1975년 3월 19일 제91회 림시《국회》때에는 전등불마저 꺼버린 《국회》도서관열람실에서 단 50초동안에 25개의 《법률안》과 함께 《형법중개정법률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놀음도 저질렀다.

아침에는 《비상법》을 만들고 저녁에는 그 무슨 《특별법》이라는것을 꾸며내고 이튿날에는 또 그것을 뜯어고쳐 《특례법》이라는것을 만드는 등 박정희의 파쑈악법조작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것이였다.

오죽했으면 남조선의 법조계에서까지 《꼬리를 물고 쏟아져나오는 악법들의 내용을 미처 알수 없다.》(《국제신보》 1961. 12. 28)고 아우성치는 사태가 빚어졌겠는가.

그러면 박정희가 조작해낸 파쑈악법들가운데서 몇가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박정희는 《민정이양》후 미국의 지시밑에 여러 악법들을 개악보충하여 즉결심판의 적용범위와 종류를 크게 넓히였다.

즉결심판은 닥치는대로 검거투옥한 사람들을 재판도 없이 즉석에서 무데기로 처형함으로써 더 많은 인민들을 손쉽게 잡아가두고 벌금을 빼앗아내는 동시에 남조선전역에 일상적으로 살벌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박정희가 즉결심판의 대상으로 정한 《경범죄처벌법》에는 처벌종목이 무려 100여가지, 《도로교통법》에는 그것이 50여가지나 되였으며 이밖에도 《소방법》, 《오물청소법》, 《숙박업법》 등 80여개 악법에 실로 수백가지 처벌종목이 포함되여있었다. 이 악법들로는 자유로동자를 《건달군》으로, 청년학생들을 《도적》으로, 노래부르면 《고성방가죄》로, 담배불을 빌면 《폭력우범자》 등으로 몰아 마구 체포할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경찰들에게는 《검거책임제》라는것을 하달하여 주위의 사정을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어떠한 죄를 범했거나 또 범하려 하고있다고 의심할 리유가 있는자는 마음대로 검문검색하고 체포투옥할수 있게 하였다.

박정희가 이와 같은 파쑈악법을 휘둘러 무고한 인민들을 횡포한 즉결심판에 처한 건수는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만 하여도 1966년에 35만 3 000여건, 1967년에 37만여건, 1968년 8개월동안에 무려 70만건에 달하였는데 이것은 한명의 판사가 20~30초에 한건씩 하루평균 1 000건이상을 이른바 재판한것으로 된다.

박정희가 조작공포한 《긴급조치 9호》라는것도 역시 가장 악랄하고 포악무도한 파쑈악법들중의 하나였다.

1975년 5월 13일 박정희는 《정례국무회의》를 열고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라는 간판밑에 《긴급조치 9호》라는것을 조작공포하였다.

박정희는 이른바 《긴급조치 9호》에서 그 무슨 류언비어를 퍼뜨리는 행위,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외곡, 비방하거나 그 개정과 페기를 주장하고 청원, 선동, 선전하는 행위들 그리고 학생들의 집회, 시위, 정치관여행위와 이 조치를 비방하는 행위 등을 금지한다고 하였으며 이상과 같은 사실의 위반내용을 방송, 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 배포, 판매, 소지, 전시하는것도 금지한다고 선포하였다.

또한 남조선의 재산을 해외에 이동, 은닉, 처분하는것도 금지하며 부정한 방법으로 해외에 이주하거나 도피하는 행위도 금지한다고 박아놓았다. 그런가 하면 《정부》관리들에게 《긴급조치 9호》의 위반자와 그의 소속 학교, 단체, 사업체에 대하여 해임, 제적, 휴업, 페간할수 있는 권한을 주는 한편 서울, 부산시장과 도지사들이 치안질서유지에 괴뢰군병력의 출동을 요청하고 보장받을수 있게 하였다. 뿐만아니라 《긴급조치 9호》의 위반자에 대해서는 징역형과 10년까지의 자격정지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다시말하여 박정희가 조작한 《긴급조치 9호》는 류언비어로부터 《유신헌법》의 개헌청원운동과 학생들의 정치관여에 이르기까지를 모조리 금지하고 그를 위반하면 개인이건 단체이건 할것없이 닥치는대로 해임, 제적, 투옥하고 페간, 해산, 페쇄하며 나아가서는 무력까지 끌어내여 총칼로 다스리겠다는것이였다.

실로 박정희의 《긴급조치 9호》는 그 이전에 만들어낸 모든 형태의 긴급조치들을 모조리 한데 묶어놓은 최대최악의 살인폭압령이였으며 남조선의 애국적인민들과 민주인사들은 물론 반대파들의 일체 언행까지 봉쇄하고 노예적인 굴종만을 강요하기 위한 무지막지한 파쑈악법이였다.

력사에는 살인악당들과 파쑈미치광이들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말살하고 추악한 잔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꾸며낸 수많은 악법들이 있었지만 박정희가 날조해낸 《긴급조치 9호》처럼 가장 야만적이고 횡포한 악법은 일찌기 없었다.

제반 사실들은 박정희야말로 세상에 보기 드문 파쑈악법조작의 능수라는것을 적라라하게 폭로해주고있다.

9

 

음모와 테로의 주범

 

박정희는 자기의 집권안보와 장기집권을 위해서라면 별의별 모략과 음모를 다 꾸며내였으며 국제법과 인륜도덕도 서슴없이 짓밟고 유린하며 악명높은 테로행위를 감행하였다.

1973년 8월 8일에 벌어진 김대중랍치사건은 음모와 테로의 주범으로서의 박정희의 정체를 또다시 만천하에 드러내놓았다.

이 사건으로 세계의 신문, 방송들은 죽가마끓듯 하였고 사람을 랍치해다놓고 그 몸값을 받아먹는데서 솜씨를 보이던 미국의 깽들도, 세계축구선수권대회의 우승컵을 훔쳐낸것으로 하여 명성을 떨친 런던의 날도적들도 모두 혀를 차게 하였다. 그것은 이 랍치사건이 《법치국가》라고 하는 일본의 수도 한복판에서 내외의 이목을 모으고있던 인물을 대상하여 그것도 대낮에 너무도 뻐젓이 감행되였기때문이였다.

당시 영구집권을 꾀하던 박정희는 남조선의 야당계인사였던 김대중이 자기를 누르고 올라설가봐 두려워하면서 오래전부터 그를 제거하기 위한 모략과 음모를 꾸며왔다. 박정희는 이미 김대중이 《국회》의원, 《대통령》후보로 활동할 때 그를 제거하기 위하여 《정계에서 물러서서 조용히 살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무려 11번이상이나 편지와 전화로 협박하였다. 또한 김대중을 죽이기 위해 그의 집마당에 폭발물을 설치하기도 하였고 그가 탄 자동차를 3번이나 들이받게 하는 살인음모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나중에는 해외에까지 따라가 그의 일거일동을 미행하고 감시하던 끝에 마침내 면밀한 랍치계획을 세우게 되였던것이다.

박정희는 처음에 김대중이 미국에 가있을 때 랍치하거나 죽이려고 하였다. 1973년 4월 김대중이 쌘프런씨스코에서 대중강연을 할 때 손칼을 잘 쓰는 10명의 깡패들을 내몰아 그를 해치려 하다가 실패하자 5월 중순에는 또 다른 음모를 꾸며냈다. 당시 미국주재 남조선대사관에서 공보관장으로 근무한 리재현이 구체적으로 폭로한데 의하면 김대중을 해치거나 랍치하기 위한 작전에 쌘프런씨스코주재 남조선총령사관의 령사라는자와 중앙정보부(당시)의 요원들이 끼여있었다고 한다.

이 음모 역시 실패하자 박정희는 김대중이 남조선과 가까운 일본에 왔을 때 어떻게 하나 그를 랍치하거나 살해할데 대한 엄명을 하달하였다.

박정희의 직접적인 지령에 따라 악명높은 중앙정보부가 일명 《안개작전》이라는 비밀대호를 붙이고 품을 들여 조직하고 집행한 이 작전에는 잘 훈련된 36명의 특무들과 50만US$의 자금, 최신형자동차들과 군함, 고무뽀트 등이 동원되였다.

한때 남조선의 중앙정보부 부장이였던 김형욱이 후에 미국회 하원 국제기구분과위원회에서 폭로한데 의하면 박정희의 엄명에 따라 당시의 중앙정보부 부장, 차장, 차장보와 같은자들은 서울에 앉아서 김대중랍치를 지휘, 감독하고 일본에서의 현지지휘는 일본주재 남조선대사관 공사의 가면을 쓴 중앙정보부의 일본지부책임자 김재권이 맡았다. 그리고 랍치를 직접 실행할 행동조에는 서울에서 도꾜로 급히 파견된 중앙정보부의 요원들과 현지에 있는 남조선대사관의 참사관, 서기관들, 요꼬하마주재 령사 등 외교관의 탈을 쓴 특무들이 망라되였다. 또한 김대중랍치행동조에는 1967년에 이전 서부도이췰란드에서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남조선에 랍치해가는 작전을 총지휘한 직업적인 특무 량두원과 정보수집에서 뛰여난 실적을 지닌자로서 당시 총련에 대한 정보수집을 위하여 중앙정보부의 특별밀정으로 일본에 와있던 김동운이 보충되였다. 김대중을 랍치하기 위한 구체적인 안을 세운 그들은 여기에 돈을 주고 매수한 일본깡패들도 인입하였다. 그들은 처음에 김대중을 회유하여 야회에 가는 자동차에 태우고 그 차를 통채로 랍치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이 그러한 흉계를 미리 알고 이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작전은 실패하였다.

회유의 방법에서 실패하자 랍치범들은 다음방안으로 넘어갔다. 그것은 랍치행동조가 직접 나서서 김대중을 붙잡고 무기로 협박하여 정기항공편으로 남조선에 랍치해오는것이였다.

그러나 이것도 자기 신변에 위험을 느낀 김대중이 거처하는 숙소를 비밀에 붙이고있은 까닭에 실현할수 없었다.

거듭되는 실패에 약이 오른 박정희는 비상수단을 써서라도 김대중을 없애버리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김대중을 없애지 못하면 자기들이 죽어야 하는 급한 고비에 든 행동조의 성원들은 그때 일본에 와있던 남조선의 한 정상배를 엄청난 돈으로 매수하여 김대중이 도꾜 한복판에 있는 한 호텔의 2211호실에 들어있다는것을 끝내 알아내였다. 그자의 말을 통해 김대중이 인차 숙소를 옮길수 있다는것까지 알아낸 그들은 곧 행동을 개시하였다.

김대중의 방에 백주에 뛰여든 랍치범들은 그를 에테르로 마취시키고 승강기로 끌어내려 지하주차장에 끌어갔으며 거기에 대기시키고있던 자동차에 실었다. 그리고는 자동차안에서 김대중의 눈을 싸매고 귀를 틀어막은 다음 고속도로를 달려 오사까에 끌고 갔다. 그 다음 항만에 미리 대기시켜놓았던 중앙정보부소속의 함정에 김대중을 옮겨싣고 바다로 나갔다. 이어 팔다리를 묶은 김대중을 상자에 넣고 큰 돌덩이를 지질러놓은 랍치범들은 먼바다에 나가 적당한 곳에서 그를 바다에 처넣으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김대중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깊은 바다에 수장될 위험에 처하게 되였다. 끔찍한 범죄가 바야흐로 감행되려던 그 시각 갑자기 상공에 직승기 한대가 나타나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다. 함정의 항로와 배에서 벌어질 일까지 다 알고있는 그 직승기는 두말할것도 없이 김대중랍치를 조직지휘하는자들이 황급히 띄워보낸것이였다.

대낮에 도꾜 한복판에서 김대중랍치사건이 벌어지자 일본은 물론 남조선과 세계 도처에서 여론이 물끓듯 하고 그것은 박정희와 그를 배후조종하는 미국에 대한 강력한 비난과 책임추궁에로 이어졌다.

CIA는 김대중랍치와 살해음모에 대해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알고있었다.

이로 하여 김대중랍치를 묵인한 미국은 세계의 면전에서 흉악한 랍치, 살해음모의 공범자로서 준엄한 심판대에 오르게 되였다. 미국은 그 책임을 모면하고 김대중을 구원한 구세주로 둔갑하려는 목적으로부터 저들의 주구들에게 《김대중살해중지》를 요구하고 공해상의 범행현장에 직승기까지 파견하였던것이다.

실신상태에 있던 김대중은 8월 11일과 12일 울산의 한 비밀장소에 감금되여있다가 랍치된 때로부터 6일만인 13일 밤 서울의 자기 집에 실려가 연금되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흉악한 랍치범이고 국제테로왕초로서 세계적인 규탄과 단죄의 단두대에 오르게 된 신세에 처한 박정희는 제 살구멍을 찾아보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다. 랍치범들은 어리석게도 김대중랍치사건이 그의 자작자연이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하고 황당하게도 《북조선의 모략》이라는 랑설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랍치범행을 직접 조직지휘한 중앙정보부 부장 리후락은 파렴치하게도 《우리 기관, 우리 부원이 한사람이라도 사건에 관계해있다는것이 판명되면 전적인 책임을 지겠다.》고 제법 희떠운 소리를 하며 앙탈을 부리기도 하였다.

리후락이 이렇게 철면피한 발언을 한지 며칠되지 않아 김대중이 랍치된 장소에서 랍치하수인인 김동운의 지문이 발견되고 김대중을 오사까에 싣고 간 승용차가 다름아닌 일본주재 남조선대사관의 자동차라는것이 판명되였다. 부정할수도 덮어버릴수도 없는 객관적인 물적증거였다.

얼마후 김대중랍치사건에 대해 집요하게 추적한 미국기자 잭크 핸더슨이 박정희를 만나 구체적사실자료를 들어가면서 랍치의 책임소재를 캐물었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박정희는 신경질을 부리면서 김대중랍치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소행이라는것을 인정했으며 중앙정보부장에게 책임을 지워 그를 해임했다고 말하였다.

김대중랍치의 팔다리가 되여 움직인 졸개들을 희생시키고 그 원흉인 자신은 책임에서 벗어나보려는 비렬한 행위였다. 그러나 뛰는 놈우에 나는 놈이라고 횡포무도한 파쑈통치와 랍치와 테로, 살인만행의 장본인인 미국은 저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주구의 체면같은것은 보아주지도 않고 제 살길만 찾아 몸빼기를 하였다.

그것은 김대중랍치사건당시 미국무성의 남조선담당 과장으로 있던 레이나드가 미국회에서 사건의 진상에 대해 밝히면서 《박정희가 사건의 꼭대기에 있었으며 리후락이 명령을 내렸다.》라고 한 사실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그리하여 김대중랍치사건은 파쑈교형리, 흉악한 국제깡패, 테로왕초로서의 박정희의 정체를 다시금 만천하에 드러내놓았다.

김대중랍치사건은 음모와 테로의 주범으로서 박정희가 저지른 수많은 죄악가운데서 그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박정희와 그 하수인들에 의해 1967년 7월과 8월사이에만도 해외에서 100여명의 학자, 문필가, 류학생들이 남조선에 랍치되여왔으며 1973년 4월부터 1년동안에만 하여도 일본에서 간첩사건에 걸어 랍치된 류학생은 9명이나 되였다. 또한 1969년 5월에는 일본에 있던 윤유길상공인도 같은 수법으로 랍치되였다.

후날 미국에 망명한 김형욱이 쓴 책 《대지의 가교》에는 1964년 도꾜올림픽경기대회때 박정희와 그 졸개들이 공화국의 신금단선수를 랍치하려 했던 비렬한 음모와 삿뽀로동기올림픽경기때 한필화선수를 랍치하려고 한 추악한 행위들이 밝혀져있다. 박정희는 자기의 집권유지를 위해서라면 파쑈독재를 뒤받침해준 전 중앙정보부 부장 김형욱을 미국에서 유괴랍치하여 살해하는 비렬한 악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외에도 박정희가 감행한 음모와 테로행위에 대해 다 렬거하자면 끝이 없다.

10

 

피에 주린 살인마

 

일찌기 일제의 악랄한 《3광정책》집행의 《돌격대장》으로 피비린 살륙만행을 감행한 박정희는 미국의 뒤받침밑에 권력의 자리에 올라앉자마자 피에 주린 살인마의 본색을 또다시 드러내고 온 남녘땅을 하나의 거대한 피의 무덤으로 만들어놓았다.

한달동안에 10여만명, 하루에 900여건, 30초에 한건씩…

이것은 박정희가 남조선의 우두머리로 등장하자마자 벌린 체포소동과 살인재판놀음을 종합한 수자이다.

당시 남조선당국이 공식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군사정변이후 첫 8개월동안에 검찰이 조작해낸 그 무슨 범죄사건은 14만여건이나 되였으며 그와 관련하여 체포한 무고한 인민들의 수는 23만여명에 달하였다. 이것은 8개월동안에 남조선주민 100명중 1명을 체포한것으로 된다.

박정희의 이 피비린내나는 폭압만행과 살인광증은 《유신》파쑈독재를 꾸며낸 후 더욱 절정에 달하였다.

박정희는 그 무슨 통일혁명당사건, 적화공작단사건,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혁명조직사건, 정심회사건, 인민혁명당사건,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임자도사건 등 수많은 사건들을 날조해내고 남조선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을 닥치는대로 체포, 투옥, 학살하는 야수적인 살인만행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이 어떻게 날조된것들인가 하는것은 이른바 인민혁명당사건의 조작과 재판과정을 통해 명백히 알수 있다.

당시 박정희와 그 졸개들은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인민혁명당을 탄압말살하기 위하여 1964년 6. 3투쟁직후 이 당이 공화국북반부의 《지령》을 받고 《정부》전복을 기도했다는 터무니없는 구실을 꾸며내여 그에 망라된 41명의 애국자들을 체포투옥하였다. 그후 저들이 꾸며낸 이 사건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애국자들에게 전기고문, 물고문, 비행기고문, 죽침고문 등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치떨리는 만행을 매일과 같이 감행하면서 허위진술을 강요하였다.

이 야만적인 고문만행을 두고 당시 남조선신문들은 이렇게 전하였다.

《발가벗긴 라체에다 물을 머리로부터 온몸에 끼얹고 피흘리는 신체 각 부분에는 붕대를 감아 흔적을 남기지 않게 했고 머리와 량다리만을 남겨놓은 몸에 잠수복 비슷한 가죽옷을 입혀 물을 끼얹은 다음 량다리에다 전류를 통과하여 피를 토하고 졸도케 하였다.》(《경향신문》 1964. 9. 12)

박정희의 살인명령을 집행하는 도구인 중앙정보부는 당시 이러한 야수적고문으로 친구를 만나면 접선으로, 술을 나누면 회담으로, 악수를 하면 비밀약속으로 규정하여 날조한 심문자료를 서울지방검찰청에 넘겼다. 이에 기초하여 서울지방검찰청의 날고뛴다고 하는 4명의 검사들이 동원되여 20일동안이나 수사를 들이댔다. 허나 원래 아무런 죄도 없었던탓에 기소할만 한 아무런 건덕지도 잡아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사건의 피의자들이 중앙정보부에서 문초를 받을 때 자백을 했다고 하나 근거는 없다.》,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수 없다.》(남조선도서 《해방20년사》 182페지)고 하면서 기소장에 서명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박정희는 이 4명의 검사들이 《상부의 명령에 항거한다.》고 욱박지르다못해 자기의 심복졸개를 내세워 또다시 수사하도록 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기소장을 만들겠다고 박정희앞에 맹세한 졸개였지만 사건자체가 철저히 날조된것이였으므로 그 어떤 단서도 잡지 못하였다. 이런것으로 하여 골머리를 앓던 졸개는 《심의》를 오래동안 끌어오던 끝에 미국이 시키는대로 《피고인들이 북조선에서 남파한 간첩들과 접선했다는 확증은 잡지 못했으나 북조선이 내세운 평화통일론 등을 내세웠으며 북조선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한 혐의는 있다.》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사건조서를 만들어 재판에 넘겼는데 이에 근거하여 살인적인 공판정에서는 애국자들에게 중형을 들씌우는 파쑈적만행을 감행하였던것이다. 이런 공로로 하여 한 아무개라는자는 후에 치안국장으로 출세하였다.

박정희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수많은 사건들을 날조하여 수많은 애국자들을 재판하는 놀음을 벌려놓고 그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이른바 남파간첩사건, 학원침투간첩사건을 비롯한 모든 사건들도 다 이런 방법으로 조작된것이였다.

바로 이 사건아닌 사건들의 날조행위로 당시 남조선에서 무기징역이나 학살을 당한 애국자들의 수는 이루 헤아릴수 없었다.

한편 박정희패당은 외세를 배격하고 민주와 통일을 념원하여 투쟁한 남조선의 수많은 청년학생들을 야수적으로 탄압하고 처형하였다.

군사파쑈패당은 매국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하여 떨쳐나선 남조선청년학생들의 1964년 3. 24, 6. 3투쟁을 탄압하기 위하여 위수령,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수만명의 중무장한 경찰과 군대 지어 장갑차와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무고한 시위자들에게 유독성가스와 총탄을 마구 퍼부음으로써 항쟁의 거리를 피로 물들였다.

당시 군사파쑈광들은 서울에서만도 수많은 경찰들과 수도경비사단, 전방의 제6사와 제28사단까지 끌어들여 건물마다 기관총을 설치하고 10m에 한명씩 병사들을 배치하여 대학들을 점령하는 야만적인 폭거를 감행하였을뿐아니라 1 000여명의 학생, 교수, 언론인들을 야수적으로 체포투옥하였다. 그런가 하면 1965년에는 남조선일본협정을 반대하는 청년학생들을 총칼과 최루탄으로 탄압하는 한편 거미줄같은 수사망을 펴놓고 시위에 참가했던 840여명의 청년학생들을 야수적으로 체포하여 재판하는 만행을 거리낌없이 감행하였으며 1967년에는 6. 8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청년학생들을 7 000여명의 경찰들을 내몰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또한 청년학생들의 머리우에 비행기까지 띄워놓고 질식, 타살하는것으로도 모자라 서울대학교에서 700여명, 경상북도에서 l만 2 700여명의 학생들을 퇴학, 정학시키는 만행도 거리낌없이 감행하였다. 뿐만아니라 1973년 10월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 300여명이 《유신》독재를 반대하여 평화적인 교내집회를 벌리자 500여명의 경찰들과 특무들을 동원하여 200여명의 학생들을 체포하고 100여명을 즉결심판에 처하는 만행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청년학생들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야수적인 탄압만행은 박정희가 1974년 4월에 조작한 민학련사건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1973년말부터 남조선에서는 박정희가 꾸며낸 《유신헌법》에 대한 100만명개헌서명운동이 힘차게 벌어졌다. 불과 1주일동안에 40여만명이 참가한 이 대중적인 서명운동은 박정희를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하였다.

바빠맞은 박정희는 1974년초에 《유신헌법》을 비난, 반대하는 모든 요소들에 15년까지의 징역형을 들씌울것을 내용으로 한 《긴급조치 1, 2호》를 공포하여 수많은 청년학생들과 민주인사, 언론계인사, 종교계인사들을 체포투옥하였으며 그들을 《비상군법회의》에 넘겨 중형에 처하도록 함으로써 온 남녘땅을 거대한 도살장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남조선의 애국적청년학생들은 박정희의 살인적인 폭압만행에도 굴하지 않고 6개 도시의 24개 대학들과 서울을 비롯한 지방의 여러 고등학교들에 민주주의적인 학생조직들을 내왔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전국민주청년학생총련맹(민학련)을 조직하고 민족의 영구분렬을 반대하고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을 더 힘있게 전개하였다.

그러자 바빠맞은 박정희는 완전무장한 경찰들을 내몰아 평화적시위에 떨쳐나선 청년학생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한편 민학련에 《공산주의조직》이라는 터무니없는 감투를 씌우고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여 무려 4 000여명을 체포투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박정희의 이러한 파쑈적인 탄압만행으로 매해 70만~80만명의 무고한 인민들이 체포, 투옥, 처형되였다. 당시 법무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박정희에 의해 검거된 인원은 1963년에 65만여명, l964년에 79만 9 000여명, 1965년에는 88만 9 000여명, 1966년에는 77만 2 000여명에 달하였다. 1974년 4월 한달동안에는 서울과 부산 두개 도시에서 무려 1만 5 000여명이 체포되였으며 그해 8월 한달동안에는 100여명의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이 사형을 비롯한 중형을 받았다.

당시 미국과 일본의 정계, 사회계에서까지도 박정희를 두고 《겨레를 배신한 미치광이독재자》, 《무서운 미치광이 살인귀망령이 배회하고있다.》라는 규탄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박정희는 저들에 대한 국제적여론이 나쁜것은 그 무슨 《인식부족》과 《오해》때문이라고 변명하면서 그를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실로 박정희가 저지른 피비린내나는 인간살륙만행은 피에 주린 살인마, 흡혈귀가 아니고서는 감히 저지를수 없는 천추에 용납 못할 죄행이였다.

11

 

외자에 환장한 매국노

 

1966년 7월에 이르러 박정희는 이미 조작한 《외자도입촉진법》, 《차관에 대한 지불보증법》, 《장기결제방식에 의한 자본재도입에 관한 특별조치법》 등 예속적인 법들을 개악하고 단일화하여 새로운 《외자도입법》을 꾸며냈다.

이 악법은 한 기업체자본의 25%이상을 투자해야 한다던 종래의 《제한조건》을 완전히 철페하였고 외래독점체들이 투자자본에 대한 리익금도 제한없이 송금하고 경제기획원 장관의 허가만 받으면 곧 재투자할수 있게 규정하였다. 뿐만아니라 미국의 회사, 상사, 미국정부대행기관에 대해서는 《관세》, 《소득세》, 《법인세》 등 모든 세금을 면제하기로 했고 심지어 여기에 고용되는 미국인들과 그 가족들에게까지 대사관성원과 동일한 대우를 적용하기로 하였다.

이 악법이 얼마나 예속적이였으면 당시 남조선의 《동양통신》(1966. 7. 16)은 《외국인투자에 대한 무제한한 권한》이 주어졌다고 론평했다.

그러면 박정희가 조작해낸 《외자도입법》이 남조선사회에 가져온 후과는 과연 어떤것이였는가.

무엇보다먼저 박정희의 외자도입책동은 남조선이 외래독점자본가들의 채무노예로 더욱 얽매이게 하였다.

당시 박정희가 갖가지 이름밑에 남조선에 끌어들였거나 끌어들이기로 확정한 외래독점자본은 1976년말에 무려 121억 2 780만US$에 달하였다.

이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1959년부터 1964년까지의 6년동안에 남조선에 끌어들인 외자총액은 1억 300만US$였다.

그런데 1971년 한해동안에 끌어들인 외자총액은 우의 6년동안에 끌어들인 외자의 6. 7배인 6억 9 000만US$에 달하였으며 1976년에는 31억 1 860만US$로 늘어났다.

이를 당시 남조선돈으로 환산해본다면 1975년도 재정예산총액의 4. 7배에 해당되는 5조 8 800여억원이라는 천문학적액수에 달하는것이였다.

이 엄청난 채무에 의해 남조선이 외래독점자본가들에게 갚아야 할 원리금은 1973년에 4억 4 000만US$, 1976년에 11억 4 200만US$에 달하였다.

당시 남조선주민들속에서 《이 빚을 어떻게 다 갚겠는가. 결국은 빚값으로 태백산개발권을 외국독점자본에 넘겨주든가 철도부설권을 내준다든가 해야 하며 나아가서는 제주도를 떼주는 식으로 땅덩어리를 통채로 내줄수밖에 없을것이다.》라고 하면서 박정희의 외자도입책동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울려나온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다음으로 박정희의 《외자도입법》은 외국독점자본이 남조선의 모든것을 닥치는대로 략탈할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박정희가 외국독점자본가들의 식민지략탈에 유리한 물질적조건을 마련해줄 목적밑에 《정부》의 이름으로 끌어들인 재정차관은 전체 외자의 약 32%를 차지하였다.

그러한 외자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던 상업차관에 대하여 말한다면 박정희는 상환기간이 보통 4년밖에 안되는것을 년리 6~7%라는 고리대적인것으로 끌어들이였다. 외국독점자본가들에게 최대한의 식민지수탈을 보장해주기에 미쳐난 박정희는 례컨대 미국독점자본가들이 일본에 줄 때에는 5%의 년리를 붙이는 상업차관을 7%의 년리를 물겠다고 다짐하고 받아들였다. 뿐만아니라 《정부》의 이름으로 굴욕적인 지불보증을 약속하게 하고 20~23%까지 착수금을 물기로 하였으며 현금차관의 경우에는 상환기간 3년, 년리 6~7%라는 날강도적조건으로 받아들였다.

그런가 하면 외국독점자본이 남조선에 직접 투자되는 경우에는 온갖 편의와 강도적요구를 다 충족시켜주었다.

실례로 남조선의 울산에 기여든 일본독점자본은 지대정리와 토목공사, 도로닦기, 공업용수까지 보장된 건설용부지를 평당 5 000원에 불하받았다. 당시 일본에서 그만한 땅을 얻자면 적어도 평당 20만원은 내야 한다는 사정과 비교해볼 때 얼마나 헐값으로 부지를 섬겨바쳤는가를 쉽게 알수 있다.

외국독점자본가들은 보잘것없는 임금으로 남조선로동자들을 어렵고 품이 많이 드는 일에 고용하고 마음대로 착취함으로써 본국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리윤을 짜내는 한편 생산된 제품을 비싼 값으로 실현할 책임을 박정희에게 부과함으로써 거기서만도 엄청난 판매리익을 짜내였다. 또한 남조선에 기여든 외래독점자본은 세금과 물자수입분야에서도 최대의 특전을 보장받아 막대한 리익을 얻었으며 자기 나라에서는 그렇게도 심각한 사회적문제로 되여 규탄받고있는 공해문제 같은것은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러니 박정희의 매국적책동으로 하여 아무러한 제한도 받지 않고 오히려 특전을 보장받으며 남조선에 직접 투자된 외국독점자본이 얼마나 엄청난 리윤을 뽑아냈겠는가.

그것은 당시 신문 《동아일보》(1968. 8. 13)가 남조선에 직접 투자되는 외래독점자본은 자기 나라에서보다 적어도 5배이상의 투자리윤률을 얻고있다고 하면서 그들이 《판매수익률 45%, 투자리윤률 90%, 자본회전률 년 1. 95회》라는 영업상기적을 만들어내고있다고 한 사실이 잘 말해준다.

현실적으로 남조선에 직접 투자된 외국독점자본은 1973년에는 2억US$를, 1974년에는 3억 2 500만US$를, 1975년 상반기에는 2억 3 400만US$를 과실송금(외국자본가들이 다른 나라에 자본을 투자하여 얻은 리익금을 자기 나라에 송금하는것)으로 본국에 빼돌렸다.(《중앙방송》 1975. 8. 22)

박정희가 남조선에 직접 투자되는 외래독점자본가들에게 보장해주고있는 이러한 특전에 대해 당시 일본의 한 신문은 이렇게 폭로하였다.

《토지에서 벌고 기계에서 벌고 세금특혜로 벌고, 기술료로 벌고 리자로 벌고 상품판매로 벌고, 경영지도로 벌고 그리고 또 저렴한 로임에서 벌고 이래서 한국은 돈푼이나 갖고 들어온 외국인들에게는 더할것 없는 지상의 락원이다. 그러나 이 락원은 한국백성들의 피땀우에 서있는 락원이요, 이들 외국인의 향락을 지탱하고있는 한국백성들에게는 몸서리치는 생지옥이다.》

박정희의 매국배족적인 외자도입책동으로 말미암아 외래독점자본들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식민지초과리윤을 짜내는 반면에 남조선경제는 더욱 외래독점자본에 예속되게 되였고 남조선의 대외채무액은 하늘높은줄 모르고 껑충껑충 치달아오르게 되였으며 남조선인민들은 더 큰 불행과 고통속에 허덕이게 되였다.

12

 

미국의 추악한 전쟁하수인

 

박정희는 침략과 전쟁의 원흉인 미국의 전쟁정책집행을 위해 미친듯이 광분한 가장 추악한 전쟁하수인이였다.

당시 미국은 어리석게도 핵공갈로 그 누구를 놀래워보려고 책동하는 한편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이른바 《9일전쟁계획》, 《5일전쟁계획》이라는것까지 짜놓고 침략전쟁연습소동에 더욱 열을 올리고있었다.

불을 즐기는 부나비처럼 전쟁열에 미쳐날뛰는 미국상전의 침략전쟁정책에 발맞추어 박정희는 새 전쟁도발책동에 계속 박차를 가하였다.

미국의 전쟁하수인인 박정희는 새 전쟁도발준비를 다그치면서 남조선을 미국의 핵공격기지로 제공하였다.

미국은 박정희가 집권한 이듬해인 1962년에 벌써 유도탄을 남조선에 끌어들였으며 련이어 핵무기와 유도무기는 물론 《F-5A》, 《F-100》, 《F-105》와 같은 신형비행기들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미국은 해마다 수많은 비행기와 함선, 각종 포, 전차, 보병무기들을 박정희에게 넘겨주어 장비를 현대화하게 하고 특수부대들을 만들어냈으며 수많은 원자무기들을 군사분계선일대와 남조선 도처에 배치해놓았다. 이에 대해 괴뢰군의 전 해군참모총장 리룡운은 《남조선에 핵무기가 있는것은 사실이다.》, 《내가 한국주둔 미군을 시찰했을 때 나이크와 호크와 같은 미싸일이나 핵탄두가 배치되여있는것을 보았다.》고 고백하였다.

남조선에 수많은 핵무기들을 끌어들인 사실을 미국도 숨기지 않았다.

당시 미국방장관 슐레징거는 기자회견에서 《전술적핵무기를 한국에 전개하고있다는것을 당신들도 잘 알고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자랑삼아 떠벌이였으며 미국의 어용신문인 《크리스챤 싸이언스 모니터》도 아시아에 있는 《전술핵무기의 대부분이 한국에 배치되여있다.》고 실토하였다. 또한 미국방정보쎈터에 근무한 미제침략군 퇴역소장 라록크는 《한국에 전개되여있는 핵탄두는 미싸일, 포, 지뢰 등에 사용되는것》들이며 《이러한 핵탄두는 북조선과의 군사분계선가까이에 전개되고있는것도 많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박정희가 남조선을 통채로 미국의 핵공격기지로 제공하였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는 실례로 된다.

박정희는 무력증강책동에도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박정희는 1971년에 남조선에서 미국의 식민지통치위기가 극도로 심화되자 무분별한 불장난에서 살구멍을 찾아보려는 목적밑에 이른바 《국군현대화 5개년계획》이라는것을 꾸며내고 괴뢰군의 장비를 강화하기 위해 미친듯이 발악하였다. 미국의 적극적인 뒤받침속에 박정희가 꾸며낸 《국군현대화 5개년계획》은 1971년부터 5년동안에 미국으로부터 15억US$의 《군사원조》를 받아 괴뢰군을 신형비행기, 대량살륙무기, 핵무기로 장비하며 군수공장들을 세우는것을 내용으로 하고있었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정전협정을 란폭하게 유린하면서 미국본토와 기타 지역들에서 수많은 무기와 작전물자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이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박정희는 이른바 《국군현대화 5개년계획》이 끝나는 1975년에는 《방위세》라는 수탈악법을 조작하고 이를 통하여 남조선인민들에게서 5년동안 40억~50억US$의 세금을 수탈하여 괴뢰군의 《현대화계획에 충당》할것을 획책해나섰다.

그리고는 1975년 8월 미하원의원사절단이 남조선에 기여들자 김종필을 내세워 저들이 《방위세》를 조작한 목적은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특별한 노력의 표시》라고 하면서 아양을 떨게 하였다.

련이어 박정희는 1976년부터 《군수산업육성》을 포함하여 괴뢰군의 무장장비개선에 중심을 둔 도발적인 《제2차 국군현대화 5개년계획》이라는것을 내놓고 무력증강책동을 더욱 미친듯이 감행하였다.

전 해군참모총장 리룡운이 1977년 4월 뉴욕에서 진행된 《미국의 대한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요구하는 국제회의》에서 박정희의 이런 증강계획이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되겠는지 알수 없다고 하면서 《이런 증강계획이 추진될 때마다 조선반도에서의 긴장은 격화될따름》이라고 한것은 박정희가 《전투능력완비 3개년계획》(1968-1970년), 《국군현대화 5개년계획》(1971-1975년), 《제2차 국군현대화 5개년계획》(1976-1980년) 같은 계획을 련이어 꾸며내면서 《장비현대화》놀음에 얼마나 박차를 가해왔는가를 잘 알수 있게 한다.

새 전쟁도발준비를 위해 박정희는 또한 미국의 침략도구이며 대포밥인 괴뢰군병력을 늘이기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최소한의 군사비로 남조선에서 항시적으로 최대의 침략무력을 유지하려는 상전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박정희는 남조선의 모든 인적자원을 미국의 대포밥으로 만들려고 책동하였다.

박정희는 권력을 차지한 그날부터 더 많은 인원을 괴뢰군에 끌어내기 위하여 《병역법》을 뻔질나게 뜯어고쳐 40살까지의 청장년들은 소경이나 병신이 아니면 전부 끌어낼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한주일에 한번씩 전체 경찰무력을 동원하여 《가두검문》놀음을 벌려놓고 수많은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붙잡아들이였으며 기피자는 가차없이 면직, 투옥하는 소동을 벌렸다.

또한 박정희는 군강제징집을 강화하기 위해 1970년에는 군징집을 전문적으로 맡아보는 중앙병무청을 새로 조작해내고 그밑에 지구별로 6개의 병무청을 내왔으며 시, 군에는 상설적인 《징병서》라는 반인민적기구도 만들어놓았다. 한편 미국의 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사건과 대형간첩비행기 《EC-121》사건후 괴뢰군의 복무년한을 늘이고 후방예비사단들을 전투사단으로 개편하는 소동도 벌려놓았다.

그리하여 괴뢰군은 미제의 대형간첩비행기 《EC-121》사건을 전후하여 거의 10만명이나 불어나 70만명에 달하게 되였다. 륙군만 하여도 정전직후의 16개사단으로부터 29개 사단과 4개 려단으로 늘어나고 원자 및 유도무기부대들이 새로 편성되였으며 해군과 공군병력도 크게 확장되였다.

상전에게 눅거리 대포밥을 긁어모아 바치기에 눈깔이 뒤집힌 박정희는 1968년에 향토예비군이라는것을 꾸며내고 여기에 군제대자들을 중심으로 250여만명의 남조선청장년들을 강제로 끌어다 넣고 괴뢰군의 지휘체계에 향토예비군을 망라시켜 군사훈련을 강화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뿐만아니라 박정희는 남조선의 모든 청년학생들을 침략전쟁의 대포밥으로 써먹기 위해 리승만역도의 본을 그대로 따 1975년 5월 20일 국무회의에서 《학도호국단 설치령》을 조작하고 남조선의 전체 대학, 고등학교 학생들을 학도호국단에 망라시켜놓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박정희는 전시에도 보기 드문 《민방위기본법》이라는 악법을 조작하여 민방위대라는 군사조직에 17살부터 50살까지의 모든 남자들을 강제로 끌어다 넣었다.

이밖에도 입만 벌리면 《모든 국민이 병사》라고 떠들면서 각 기관, 단체들에 자위단, 녀자들속에 부녀방위단, 부녀자위대, 안보구국간호대 등 반공군사조직들을 련달아 꾸며내고 매일과 같이 《전시체제확립》이요, 《림전태세확립》이요 뭐요 하는 소동을 벌려놓았다.

미국의 무모하고 발악적인 새 전쟁도발소동과 때를 같이하여 박정희는 전쟁연습책동에 광분하는 한편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적대적인 정탐행위와 무장도발을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박정희군사파쑈패당은 군사분계선과 전방군부대들을 싸다니면서 전쟁발작증을 터뜨렸고 괴뢰군의 륙군, 해군, 공군사관학교의 졸업식들과 《향토예비군날 기념식》이라는데서 전쟁도발을 고취하였다. 미국이 본토의 수많은 무력과 전투기재, 본국에 3개밖에 없다는 《만능통신장비》까지 남조선에 끌어들여 《미군사상 최대, 최초의 장거리공수작전》(《포커스레티너작전》)이라는것을 벌렸을 때 박정희는 미제침략군과 함께 북을 반대하는 악랄한 군사연습소동을 벌리였고 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에는 군사분계선가까이에 수많은 군부대들을 끌어들여 정전후 최대규모의 군사연습을 강행하였으며 그후에도 《상륙훈련》이니, 《기동훈련》이니, 《해상훈련》이니, 《유격훈련》이니 하는것들을 련속 벌려놓았다.

뿐만아니라 군사분계선일대에서 공화국북반부지역에 대한 무장공격을 끊임없이 감행하였다.

1968년에만 하여도 그 회수는 2 000여차에 달하였다.

미국의 전쟁우두머리 죤슨이 남조선에 기여들어 저들의 주구들을 더욱 광란적인 새 전쟁도발에로 부추긴 후 1년동안에 박정희패당이 공화국북반부지역에 쏘아댄 총포탄은 정전후 13년동안에 쏘아댄 총수의 5배를 넘었다.

《정전협정은 완전히 휴지화되였다.》, 《필요한 전투개시도 불사한다.》고 마구 떠벌이면서 새 전쟁도발책동에 미쳐날뛴 박정희야말로 미국의 가장 추악한 전쟁하수인이였다.

13

 

북남공동성명의 비렬한 배신자

 

1972년 5월초 평양에서는 북과 남사이에 첫 고위급회담이 진행되였다. 그로부터 얼마후 북과 남은 력사적인 7. 4공동성명을 통하여 조국통일3대원칙을 온 세상에 선포하였다.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3대원칙은 조국통일문제를 민족의 의사와 리익에 맞게 민족자체의 힘으로 풀어나갈수 있는 근본립장과 근본방도를 천명한 조국통일의 초석이였고 민족공동의 통일대강이다.

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북과 남, 해외의 전체 조선민족은 목청껏 만세의 환호를 터치였으며 삼천리강토는 그야말로 기쁨과 감격으로 끝없이 설레였다.

이 크나큰 감격에 대해 당시 남조선의 《경향신문》은 《통일, 북남의 통일이 오는가, 전국은 저마다 감격에 벅찼다. 기대, 놀라움, 감격, 환호… 마음들은 다시 통일될 날의 기대로 치달았다.

온 강산이 감격으로 젖어흘렀고 TV앞에 모여앉았던 국민들은 북남대표래왕에 눈이 휘둥그래졌고 자주평화통일원칙합의에 목이 메였다.》고 썼다.

또한 언론계, 학계, 종교계 등 남조선의 각계각층속에서는 조국통일3대원칙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북남공동성명을 《통일을 위한 민족의 공동강령》, 《새 력사의 기원》으로 열렬히 지지환영하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갔다.

그러나 남조선인민들의 이와 같은 통일열기는 공동성명에 대한 박정희의 비렬한 배신행위로 하여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되여버렸다.

그에 대해 보기로 하자.

당시 박정희의 사촉을 받은 중앙정보부 부장 리후락은 북남공동성명발표와 관련하여 기자들앞에서 벌린 공동성명에 대한 《배경설명》이란데서 《오늘부터 우리는 대화없는 북남대결에서 대화있는 북남대결의 시대로 옮겨가고있다.》(《합동년감》 1973년판 612페지)고 떠벌이면서 북남공동성명발표후에도 북과의 대결을 계속하겠다는것을 공언하였다.

또한 《국무총리》라는자는 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된지 이틀후에 열린 《국회》에서 《공동성명은 조약이 아닐뿐아니라 조약의 성격도 띠지 않는다. 이 몇장의 성명에 우리의 운명을 점칠수 없으며 또 믿을수 없다.》, 《국민은 북남공동성명에 대한 기대를 가지지 말라.》(《동양통신》 1972. 7. 8)고 뇌까렸다. 그리고 《공동성명반대를 위한 원외운동은 막지 않겠다.》고 하면서 북남공동성명반대운동까지 선동하였다. 이 시기 남조선의 《CBS》방송은 《평화통일을 하자고 해도 몇백만이 죽고 무력을 가지고 통일하자고 해도 몇백만이 죽는다. 몇백만명까지 죽으면서 통일해야 할 리유는 무엇인가.》라는 황당한 잡소리를 줴치면서 영구분렬을 고창해나섰다.

한편 역적패당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 《절대로 미국이나 일본의 앞잡이가 되지 않을것을 확실히 맹세한다.》고 떠들어대던 그 입으로 《대미교섭을 전개하여 미군의 계속주둔을 위해 노력하겠다.》, 《한국에 있는 유엔군은 외세가 아니다.》라고 고아대면서 미일상전들을 뻔질나게 찾아다니며 외세의존정책에 미친듯이 매달렸다. 그것은 당시 리후락과 김종필이 일본상전을 찾아가 《사상은 피보다 진하다.》, 《일본만 믿으니 함께 뭉치자.》, 《일한 량국은 단결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에 있다.》는 침발린 소리를 마구 늘어놓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알수 있다.

박정희는 《지금이야말로 총력안보태세의 내실을 거두어야 할 시점에 있으며 모두다 총을 들고 일어나서 싸우는 국민총력의 조직화가 필요한 시기다.》(《중앙방송》 1972. 10. 1)라고 떠들며 군사분계선일대에서 《산악지대비상훈련》, 《유격훈련》, 《수색작전훈련》, 최대규모의 《도하작전훈련》, 《방공훈련》 등과 같은 침략적인 군사훈련들을 련이어 벌려놓고 대결과 전쟁책동에 더욱 광분하였다. 이와 함께 박정희는 졸개들을 청와대에 매일과 같이 불러들여 《보안법》이나 《반공법》을 풀어놓아서는 안되며 《이런 때일수록 더 조여야 한다.》는 지시를 주어 남조선 도처에서 피비린내나는 살륙과 탄압만행을 감행하게 하였다.

서울에 사는 표 아무개라는 사람이 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되던 날 솟구쳐오르는 격정을 참을수 없어 하루빨리 국토가 통일되여 자유로운 북남래왕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것이 죄가 되여 《반공법》위반에 걸려 기소되고 70고령의 한 로인이 일본을 거쳐 공화국북반부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여 잡혀갔으며 풍랑을 만났다가 북녘동포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간 160여명의 어민들이 《보안법》, 《반공법》, 《수산업법》에 걸려 가혹한 형벌을 받은것은 다 박정희에 의해 감행된 만행들이였다.(《합동통신》 1972. 9. 8)

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인 1972년 7월 7일과 15일 나라의 통일을 위해 투쟁한 29명의 애국자들에게 사형과 무기징역을 들씌운 주범도, 같은 달 13일과 15일, 28일에 남조선사회의 민주화와 조국의 통일을 위해 투쟁한 여러명의 애국자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한 장본인도 다름아닌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북과 남사이의 대화도 사사건건 악랄하게 방해하여나섰다.

박정희는 교활하게도 량면전술과 지연전술에 매달리면서 북과의 대화에서 북남관계의 개선과 통일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그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을뿐아니라 북측이 제기한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문화 등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류에 대해서는 말로는 다 찬성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자고 하면 《지금은 론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한사코 거부해나섰다. 그리고 북과 남사이의 군사적대치상태를 해소하고 긴장상태를 가실데 대한 현실적이며 절박한 문제도 시기상조라고 하면서 그 론의부터 극구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북과 남사이의 대화에서는 아무런 성과도 이룩될수 없었다.

오죽하였으면 당시 일본잡지 《세까이》(1972. 4)가 《통일이라는 력사적과제앞에서 왜소하고 수치스러운 집단》이라고 락인하면서 《지금까지의 보수적이며 반동적인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을뿐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이상으로 매달리고있다.》고 규탄하였겠는가.

북과 남이 합의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3대원칙을 그 성명에 서명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휴지장으로 만들어버린 박정희야말로 북남공동성명의 비렬한 배신자이다.

14

 

《두개 조선》조작책동의 원흉

 

박정희는 1973년 6월 23일 이른바 《특별성명》이라는것을 발표함으로써 극악한 분렬주의자로서의 자기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놓았다.

박정희는 《특별성명》이란데서 국제정세추이가 어떻다느니, 북남대화가 어떻다느니 하는 잡소리를 늘어놓다못해 나중에는 그 무슨 평화를 위해 북남이 유엔에 동시가입해야 한다고 마구 지껄여댔다. 여기에는 북과 남이 제각기 유엔에 가입함으로써 민족의 분렬을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한편 우리 나라를 《두개 조선》으로 영원히 갈라놓으려는 음흉한 기도가 깔려있었다.

극악한 대결선언이며 민족분렬선언인 박정희의 이러한 《특별성명》은 미일상전들의 직접적인 조종밑에 발표된것이였다.

당시 한 일본잡지가 《<두개 조선>정책은 미국의 각본과 감독, 일본의 연출에 의하여 박정희정권이 춤추고있는 연극》이라고 폭로한것은 결코 우연한것이 아니다.

민족분렬의 장본인인 미국은 북남공동성명발표이후에도 남조선을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 군사침략기지로 틀어쥐려는 교활한 야망밑에 대화의 막뒤에서 남조선당국을 분렬책동에로 적극 부추기면서 《두개 조선》조작책동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이에 뒤질세라 일본도 남조선을 저들의 잉여상품판매시장으로 계속 틀어쥐려는 목적밑에 미국의 책동에 맞장구를 치면서 북남대화와 우리 나라의 통일을 방해하는 책동을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미일상전들은 《두개 조선》조작을 어떻게 하나 성사시키기 위해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한 박정희의 졸개들을 미국과 일본에 뻔질나게 불러들이고 그 실천을 위한 지시를 주는 한편 남조선의 외무부 장관을 서부도이췰란드에까지 보내여 나라를 두개로 만든 경험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의 《아사히신붕》(1973. 6. 23)이 김종필이가 미국에 불리워가던 길에 일본에 들려 수상과 외교부장에게서 방향전환에 대한 감촉을 받았고 돌아오던 길에 방향전환의 구체적지시를 받았으며 이에 기초하여 박정희가 《두개 조선》의 구상을 결정하였다고 언급한 사실과 미국의 AP통신이 박정희가 《특별성명》에서 떠벌인 《새로운 정책》이 《남조선, 일본, 미국의 오랜 회담들에 뒤이은것》이라고 소개한 사실을 통해 잘 알수 있다.

또한 박정희가 《두개 조선》조작을 정책으로 선포하자마자 당시 미국무장관이란자가 《지난 25년동안에 있어보지 못한 가장 건설적인것》이라며 《전적으로 동의하며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떠들다못해 남조선에까지 날아들어 《북남이 유엔에 동시가입하는것을 적극 지지》하며 그를 위해 《미국은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떠든 사실과 일본 역시 《두개 조선 유엔동시가입》이 《현실적이며 건설적인 시책》이라고 하면서 그를 지지하여 남조선에 《새로운 원조협조를 줄것》을 다짐한 사실들이 뚜렷이 실증해준다.

이처럼 미일상전들의 직접적인 조종밑에 《두개 조선》조작책동을 정책으로 선포한 박정희는 그 실현을 위한 범죄적책동에 악을 쓰며 달라붙었다.

이른바 《6. 23선언》이후 박정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300년이 걸렸다.》느니, 《통일보다 분렬이 낫다.》느니, 조국통일3대원칙이 《북남공존원칙》이라느니 뭐니 하는 악담을 늘어놓으면서 분렬을 영구화하고 북남대화를 저들의 영구집권목적실현에 써먹기 위해 갖은 발악을 다하였다.

박정희는 무엇보다도 반공소동에 더욱 열을 올리였다.

박정희는 《정신적인 반공》으로부터 《실질적인 반공》으로 넘어가야 한다느니 뭐니 하는 반공광증을 일으키고 군사깡패들의 소굴인 민주공화당을 《반공태세의 강화를 제일목적》으로 하여 개편하였으며 남조선 도처에서 《반공대회》, 《반공강연》, 《반공전시회》를 비롯한 그야말로 추악하기 이를데 없는 반공행사들을 련이어 벌려놓았다.

당시 군사파쑈패당이 벌려놓은 반공소동이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는것은 동물의 피나 붉은 물감으로 쓴 혈서를 거리바닥에 내다붙인 사실, 《반공법시행령》을 개악하여 사람잡이에 쓰는 상금을 50만원에서 최고 500만원으로 높이고 반공집회에서 《배를 가르는자》에게 30만원, 손가락을 자르는자에게 15만원, 혈서를 쓰는자에게 3만원, 반《정부》언행에 대한 고발자에게는 3 000~5 000원의 격려비를 준다고 선포한 사실만으로도 능히 짐작할수 있다.

박정희는 각종 모략사건들을 련이어 꾸며내고 있지도 않는 《남침위협》에 대해 요란스럽게 불어대면서 공화국북반부를 비방중상하는것도 성차지 않아 반공소동을 《승공》, 《멸공》소동으로 확대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자들과 더불어 살수 없다.》, 《공산주의자들과 싸워 이기는것이 생존투쟁이다.》라는 악담도 서슴없이 줴치며 반공소동에 열을 올렸으며 횡포무도한 긴급조치를 비롯한 파쑈악법들을 무데기로 꾸며내여 남조선사회전반을 더욱더 군사파쑈화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중앙정보부(당시)의 지하고문실에서 처참히 학살당하였으며 지어 목사들까지 감옥에 갇히우는 사태도 빚어지게 되였다.

한편 박정희는 미국의 호전적인 《새 아시아전략》에 추종하여 남조선을 미국의 《전선방위지역》으로 내맡기고 《미, 일, 한군사동맹》조작실현을 위해 미쳐 돌아쳤다. 또한 미국의 《9일전쟁계획》과 《5일전쟁》론에 편승하여 《총력안보》요, 《속전속결》이요, 《출동태세완비》요 뭐요 하는 구호밑에 괴뢰군병력과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륙무기들을 군사분계선일대에 집중시켰으며 그 누구를 《초전박살》시키겠다는 나발을 마구 불어대며 공화국을 반대하는 침략적인 각종 군사연습들과 무장도발책동들을 끊임없이 감행하였다.

박정희가 침략전쟁의 불집을 터뜨리기 위해 감행한 군사연습소동과 무장도발책동은 1972년부터 1975년 상반년까지의 기간에만도 무려 6만 5 000여건에 달하였다.

그런가 하면 《공산주의자들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고 볼수 없다.》는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민족이질화》에 대해 미친듯이 불어대면서 나라의 분렬로 고통을 겪고있는 우리 민족의 혈맥마저 끊어놓으려고 책동하였다.

다음으로 박정희는 《두개 조선》조작책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박정희는 《두개 조선》조작을 외교의 기본목표로 정해놓고 어떻게 하나 유엔에 뚫고들어가 괴뢰정권에 합법적인 《국가》의 껍데기를 씌우기 위해 집요하게 책동하였다.

이를 위해 그 무슨 대표단이요, 사절단이요, 방문단이요, 특사요 뭐요 하면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비롯한 졸개들을 꼬리를 물고 외국으로 파견하여 저들이 유엔에 들어가는것을 《반대하거나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구걸놀음을 벌리다못해 나중에는 《초청외교》놀음까지 벌려놓았다.

지어 역적패당은 쁠럭불가담나라들의 모임에까지 코를 들이밀었다.

당시 언어와 피부색이 다른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박정희가 벌리는 외교의 특성이 《두개 조선을 위한 딸라와 미인, 집요한 추적과 성화와 같은 애걸》이라고 야유한것은 우연한것이 아니다.

박정희패당은 《한국의 안보는 미국과 일본의 안보에 직결된다.》느니, 미국이 저들의 《국가안보의 초석》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아양을 떨면서 미군의 남조선영구강점을 애걸하는 한편 일본에게는 《정치적뒤받침과 군사, 경제적원조》를 늘여달라고 구걸하였다.

당시 《두개 조선 유엔동시가입》보따리를 들고 뉴욕에 간 김종필은 《주되는 관심사는 통일이 아니다.》, 《북조선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겠다.》고 뇌까리면서 민족을 영구분렬하는것으로 상전들앞에 《충성》을 다할것을 다짐하는 추태도 서슴지 않고 감행하였다.

또한 저들의 《유엔동시가입》책동이 하늘로 날아나게 되자 《단독가입신청》이라는 매국배족적보따리를 들고 또다시 유엔에 찾아가는 놀음도 벌려놓았다.

모든 사실은 박정희야말로 전체 조선민족의 한결같은 숙원인 조국통일을 외면하고 《두개 조선》조작책동에만 미친듯이 매여달린 천추에 용납 못할 극악한 분렬주의자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15

 

날치기로 뒤집어쓴 《유신》감투

 

미국의 조종밑에 군사정변을 감행한 군사깡패두목 박정희는 권력의 자리에 계속 눌러앉기 위해 체면과 수치도 모르고 비렬하기 짝이 없는 수법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군사정변직후 박정희는 《군사정권은 잠정적인것이고 가급적으로 빨리 량심적인 정치가에게 집권을 맡기고 우리들은 군대에로 돌아가겠다.》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장기집권의 지반을 닦기 위해 날치기로 《재건국민운동》을 꾸며내는 한편 재향군인회를 자기의 별동대로 개편하고 군사깡패무리들로 민주공화당을 비밀리에 꾸며내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박정희는 우두머리자리를 놓고 자기와 맞설수 있는 정치적경쟁자들을 탄압하고 그들의 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정치활동정화법》이라는 악법을 꾸며내여 약 4 000명의 정치인들이 1968년까지 정치활동을 못한다고 못을 박아놓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남조선인민들과 사회 각계의 강력한 반항에 부딪쳐 군정을 무기한 연장할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박정희는 앞에서는 자기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또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대통령출마를 포기하겠다.》는 입에 침발린 소리를 떠들며 2. 18성명을 발표하는 놀음을 벌려놓고 뒤에서는 그 성명을 뒤집어엎기 위해 졸개들을 시켜 《군정을 연장하라》는 시위를 벌리게 하는 한편 수도방위사령부의 장교들까지 끌어내여 류례없는 시위놀음을 벌리다못해 《민중의 요구에 의해 군정을 4년 연장》할것이라는 이른바 3. 16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미국상전의 지시밑에 력사에 일찌기 없었던 희비극을 연출한 박정희는 민정이양을 요구하는 사회여론앞에서 자기의 《대통령출마는 내외정세로 보아 부득이한것》이라는 4. 8성명을 내던지고 군복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대통령》감투를 뒤집어쓸 속심을 마침내 드러내놓고야말았다.

그리고는 즉시 미국의 적극적인 조종밑에 《헌법》을 《대통령》감투를 가로채기 쉽게 뜯어고치고 그것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지 않으면 군정을 연장하겠다고 위협하는 한편 총칼을 휘둘러 《선거법》도 더욱 반인민적인것으로 개악하였다.

《정권》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박정희의 이러한 술책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강도적이였던지 미국의 어용출판물인 《뉴욕 포스트》(1963. 2. 27)까지도 《박정희정권은 무한히 철면피하다.》고 쓰지 않을수 없었다.

비상경계의 공포분위기속에서 투표로부터 개표까지 완전히 사기와 협잡의 방법으로 감행한 1963년 10월 15일의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감투를 가로챈 박정희는 사실상 이 선거에서 46. 6%의 지지표밖에 얻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그 선거에서 박정희와 《대통령》감투쟁탈전을 벌렸던 윤보선이 박정희는 《가짜대통령》이고 자기가 《정신적대통령》이라고 광고하며 다녔겠는가.

이렇게 《대통령》감투를 뒤집어쓰고 온갖 매국배족행위와 살인만행을 저지르면서 돈과 권력의 맛을 본 박정희는 1967년 5월 3일에 있은 《대통령선거》에서 또다시 사기와 협잡의 수법들을 모조리 발동하여 《대통령》감투를 가로챘다.

그러나 집권욕에 환장한 박정희에게는 그것도 성차지 않았다.

그의 속심은 영원히 《대통령》감투를 자기가 독차지하자는것이였다.

여기로부터 박정희는 먼저 그가 누구든 《대통령》을 연거퍼 두번이상 해먹을수 없다는 《헌법》의 조항을 뜯어고치는 망동을 감행하였다.

1969년초부터 자기의 심복졸개들을 시켜 《개헌》여론을 퍼뜨려 대중의 여론을 살피면서 《헌법》을 뜯어고치기 위한 준비를 벌려온 박정희는 이해 7월 25일에는 이른바 《특별담화》라는것을 발표하여 뻔뻔스럽게도 《개헌》책동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다.

또한 자기의 군사깡패기질을 리용하여 《개헌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국회》를 뛰여넘어 먼저 《3선개헌안》을 공포하는 날강도적인 행위를 감행하였다. 그리고는 괴뢰군전체에 비상경계령을, 전연과 해안지대의 괴뢰군에 특별근무령을 내렸을뿐아니라 서울시내에는 경찰과 특무들을 3배이상이나 집결시킨 가운데 1969년 9월 중순 《국회》를 열었다. 《국회》에서 《개헌안》을 취급하는 기간에 《국회의사당》근처의 뻐스정류소들은 모조리 페쇄되였고 《국회의사당》으로 통하는 길목마다에는 무전기까지 갖춘 경찰과 특무들이 배치되여 오가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단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분위기속에서 열린 《국회》에서도 반대파들의 항거로 하여 《개헌안》을 통과시킬수 없었다. 그러자 박정희는 군사깡패식음모를 또다시 꾸며냈다.

이 음모에 따라 역적패당은 《국회》를 휴회했다가 하루후에 다시 열자고 반대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는 제 패거리들만 한밤중에 《국회의사당》의 건너편에 있는 뒤골방에 뒤문으로 모여들어 태반은 앉지도 못한채 회의형식을 극히 간략하고 내려읽기만 하여도 한나절은 잘 걸릴 《개헌안》을 불과 25분만에, 《국민투표법안》은 단 3분동안에 날치기로 통과시켜버렸다.

그리고는 정치모략기구인 민주공화당의 기구를 전시체제로 개편하고 《3선개헌안》에 대한 이른바 《국민투표》놀음을 벌려놓고 1967년 《대통령선거》때 뿌린 자금의 2배나 되는 200억원의 돈을 마구 뿌리면서 류례없는 부정과 협잡으로 이를 통과시켰다.

그러면 박정희패당이 날강도적인 방법으로 날조해낸 《개헌》이란 과연 어떤것이였는가.

그것은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련임할수 있다.》는 《헌법》 제69조 3항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계속재임은 3기에 한한다.》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국회의원 30인이상의 발의가 있어야 하며 그 의결은 재적인원 과반수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는 《헌법》 제61조 2항에 대해서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국회의원 50인이상의 발의와 재적인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로, 《국회의원은 법률이 정하는 공사의 직을 겸할수 없다.》는 《헌법》 제38조를 《국회의원은 법률이 정하는 공사의 직을 겸할수 있다.》로 고친것이였다.

한마디로 역적패당이 날치기로 통과시켜버린 《개헌안》이라는것은 박정희에게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주고 1인독재를 《법》적으로 합법화한것이였다.

날강도적인 《3선개헌》놀음으로 연거퍼 3번이나 《대통령》을 해먹을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박정희는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의 당선과 《총통제》로 넘어갈 지반을 닦기 위해 더욱 발광하였다.

박정희는 청와대《소내각》으로 불리우는 청와대비서실을 자기의 집권연장을 보장하는 파쑈독재의 본거지로 확대하는 한편 행정부의 하부말단에까지 민주공화당의 악질분자들을 박아넣었으며 관제어용단체의 우두머리들도 자기에게 충실한 심복들로 교체해치웠다.

이에 기초하여 박정희는 1971년 4월의 《대통령선거》를 위해 1년전부터 공무원들은 두말할것도 없고 통, 반장들과 관영기업체의 졸개들까지 합쳐 100만명을 선거운동원으로 정하고 《법정한도액》의 100배인 1 000억원을 선거자금으로 뿌리면서 미친듯이 선거운동을 벌렸다.

관권을 총동원한 조직적인 기만선전과 매수공작의 앞장에는 박정희자신이 직접 나섰다. 그는 1969년에 《3선개헌》을 조작한 국민투표때 발벗고나섰던 114명의 악질졸개들과 관제단체들에 표창장과 송아지까지 아낌없이 내주면서 《한번 더 수고해달라.》고 구걸하는 놀음도 서슴지 않았다.

한편 박정희는 선거를 앞두고 괴뢰군과 경찰에 《특별경비령》과 《특별대기태세》를 내리고 인민탄압에 내몰았으며 대학생간첩단사건이라는것을 날조하여 남조선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요구하고 당국의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인민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투옥하였다. 당시 박정희패당이 저들의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각계층 인민들에게 《명예훼손》이라는 황당한 딱지를 붙여 잡아가둔 사람만 하여도 3 200여명에 달하였다.

특히 박정희는 1971년의 《대통령선거》때 미국과 일본에 대한 굴종정책의 반대, 향토예비군의 해체, 정보정치의 중지, 평화통일 등의 구호를 들고 자기와 맞선 신민당의 후보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갖은 비렬한 술책들을 다 감행하였다.

이와 함께 남조선땅이 좁다하게 싸다니면서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쥐여짜며 《나를 지지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선거에 나오는것은 이번이 최후입니다.》라고 허튼수작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치르어진 선거가 바로 1971년 4월의 《대통령선거》였다.

그때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972년 10월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대통령》감투를 구걸하던 박정희의 넉두리는 《종신대통령》, 《총통》을 요구하는 협박으로 바뀌였다.

1971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종신대통령》을 해먹을것을 합법화하기 위한 《독재요강》으로서 《유신헌법》을 꾸며내기 위해 비상사태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파렴치하게도 평화통일이라는 말을 15번이나 주어섬겼다.

《유신헌법》의 조작으로 박정희는 행정, 립법, 사법우에 군림하는 총통으로서 《헌법개정권》과 《통일문제발의권》, 아무때나 제 마음대로 휘두를수 있는 《긴급조치권》과 《계엄선포권》, 《국회해산권》, 《법관임면권》을 비롯한 일체 권력을 제 손아귀에 거머쥐였으며 《대통령임기》를 본래의 4년으로부터 6년으로 늘이고 류임한계를 없애버렸으며 《대통령》을 《국민투표》에 의한 직접선거로 뽑던것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찬성과 반대의 토론이 없이 선거하는 간접선거제로 바꾸어놓았다.

실로 《유신헌법》은 《종신대통령》을 꾀하며 온갖 비렬한 책동을 다 감행하여온 박정희에게 영구집권을 합법화해준 추악한 파쑈악법이였다.

당시 일본의 한 신문이 《유신헌법》이 세계정치사상에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독재요강》이며 박정희가 《국민을 호령하고 국민을 채찍질하고 국민을 우롱하고 국민을 노예로 규정한것》이라고 락인한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미국의 조종밑에 날치기로 《유신헌법》을 조작해낸 박정희야말로 력사에 보기 드문 사기군이였고 협잡군이였다.

16

 

부정부패의 왕초

 

《유신》두목 박정희는 부정축재로 배를 불리우며 온 남녘땅을 사기와 협잡, 모략과 횡령, 뢰물과 허위가 살판치는 썩고 병든 사회로 전변시킨 부정부패의 왕초였다.

몇가지 사실들이 이를 확증해준다.

박정희의 녀편네 륙영수는 총에 맞아죽은 후에 3개의 저금통장과 회색대형트렁크를 유산으로 남겼는데 그 3개의 저금통장들은 하와이와 스위스, 뉴욕의 은행들에서 발급된것으로서 그 저금액은 무려 700만US$에 달하였으며 대형트렁크안에는 값이 엄청난 갖가지 보석품들로 가득차있었다고 한다.

다른 한가지 사실은 박정희가 권력의 자리에 올라앉은지 21개월밖에 안되는 때에 일본의 요꼬하마은행과 미국의 뉴욕은행에 저금한 돈은 500만US$에 달하였으며 1963년과 1967년, 1971년의 《대통령선거》때 그가 뿌린 돈이 60억원, 100억원, 1 000억원에 달했다는것이다.

그런가 하면 박정희는 숱한 돈을 뿌리며 일본에서 쌀을 수입해다 먹었으며 국수도 이딸리아국수만을 사다 먹었다.

당시 청와대의 료리사들이 박정희의 식탁에 매끼 값비싼 미국제술과 고급안주를 올려놓고 한주일에 2~3번은 일본료리를 차려놓았다는 사실과 그가 서울장안의 비밀료정들에서 하루밤새에 탕진한 돈이 300만원에 달하였다는 사실들은 그가 돈을 얼마나 물쓰듯 하였는가를 잘 알수 있게 한다.

그러면 박정희가 어떻게 이처럼 많은 돈을 긁어모을수 있었는가 하는것이다.

박정희가 부정축재한 엄청난 재산은 나라와 민족을 외세에게 통채로 팔아넘긴 매국배족행위의 대가로 이루어진것이였다.

남조선일본협정과 《두개 조선》조작, 각종 조약과 협정의 날조, 괴뢰군의 남부윁남파병, 이민과 인력수출 등 박정희가 감행한 큼직큼직한 매국배족행위의 리면에는 언제나 《원조》와 《협력》, 《정치자금》의 제공이라는 간판을 단 보수금이 뒤따랐으며 그중 많은 몫이 그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갔다.

하지만 치부와 향락에 물젖고 부귀영화에 환장한 박정희는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탐욕적이며 략탈적인 외국독점자본의 부정과 협잡놀음에서 돈맛을 본 박정희는 《외자도입촉진법》, 《차관에 대한 지불보증법》, 《금리현실화》, 《환률현실화》를 비롯한 수많은 악법들과 조치들을 만들어놓고 수백억US$에 달하는 외자를 끌어들여 제 돈주머니를 불구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 서부도이췰란드 등지에서 끌어들인 수백수천건의 차관, 협력, 투자들의 건건마다에는 부정부패의 왕초인 박정희의 검은손이 깊숙이 뻗쳐져있었다.

실례로 박정희는 1969년 포항제철소를 건설한다고 하면서 일본에서 끌어들인 1억US$의 《원조》가운데서 2 300만US$를 가로채여 《정치자금》으로 써먹었으며 1971년 서울지하철도용차량수입을 위해 일본의 미쯔비시재벌로부터 한대에 3 000만¥ 하는것을 6 400만¥에 186대를 사들인것으로 날조하여 막대한 돈을 챙겼다. 박정희는 또한 미국석유독점체에 남조선에서의 석유가공독점권과 인민들의 피땀을 가혹하게 짜낼수 있는 특혜를 주고 막대한 돈을 받아 제 배를 채웠다.

당시 미국석유독점체인 갈프회사 사장이란자는 1975년 5월 16일 미국국회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우리 회사는 한국의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에 1966년에 100만US$, 다음으로 1970년에 300만US$의 헌금을 하였다.》라고 증언하였다.(AP통신 1975. 5. 16)

한편 박정희는 제 돈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녀성들의 정조도 서슴없이 섬겨바쳤다. 매춘관광을 《자금도 시설도 원자재도 들지 않아 수지맞는 외화획득책》, 《경쟁자가 없는 독점기업체》라고 떠들며 그것을 《국가기업》으로까지 선포한 박정희는 남조선의 수많은 녀성들을 강제로 끌어다 매춘부로 만들어놓고 서울과 부산, 인천과 광주를 비롯한 남조선 도처에 매음호텔들을 꾸려놓고 돈벌이를 하다못해 세계 각국에 《한국의 명물인 인삼을 먹고 기생파티를 즐겨보고싶지 않습니까.》라는 매춘광고문까지 내돌렸다.

매춘관광, 기생관광으로 박정희가 뜯어먹은 돈은 1973년 한해에만도 2억 7 000만US$에 달하였다.

박정희의 추악한 부정부패행위는 결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당시 세계에서 인구사망률이 가장 높고 주인없는 고아들의 주검과 인공적사산아, 락태아들이 특별히 많은것으로 하여 골머리를 앓던 박정희는 1969년부터 미국의 시체매매업자들과 죽은 아이들의 장기를 떼내여 대량적으로 팔아먹을 계약을 체결하고 사산아, 락태아의 신장, 기관지를 개당 10~15US$로 팔아먹는 만행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그후 박정희는 이와 같은 야수적만행이 세상에 알려져 비난과 규탄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보건사회부 장관이라는자를 《국회》에 내세워 그 무슨 담화라는것을 벌려놓고 《류산 또는 사산아, 태아의 장기를 … 활용하는것은 조금도 비인도적이라고 할수 없다.》, 《정부로서는 이를 계속 장려할 방침이다.》라고 떠벌이게 하였다.

외국독점체들에게 남조선의 모든것을 통채로 내맡기고도 모자라 녀성들의 육체와 죽은 시체의 장기마저 돈벌이수단으로 써먹으면서 집권기간 천문학적액수에 달하는 돈을 긁어모은 박정희야말로 천추에 용납 못할 민족반역자, 부정부패의 왕초였다.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도 맑다고 《대통령》이라는자부터 부정부패에 눈이 어두워 돌아가니 그 수급졸개들의 부정부패행위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당시 김종필, 리후락, 박종규를 비롯한 박정희의 심복들이 집권기간에 수백억원을 부정축재하여 남조선에서 손꼽히는 재벌들에 못지 않은 벼락부자들로 되였다는 사실은 졸개들의 부정부패행위도 결코 집권자와 짝지지 않는것이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게 한다.

남조선정치사에 기록된 증권파동사건, 워커힐사건, 자동차사건, 빠찡꼬사건, 3분폭리사건과 같은 사건들은 다 박정희와 그 졸개들에 의하여 감행된 부정부패사건들이였다.

이처럼 수많은 부정부패사건들을 조작하여 거액의 자금을 긁어모았기에 당시 한달봉급이 10여만원밖에 되지 않던 박정희의 졸개들은 값이 3 000만원에서 3억원이라는 엄청난 비용이 드는 고급호화주택들을 쓰고살았다. 바로 여기서 그들은 한끼에 로동자들의 몇달분 임금을 처먹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고급료정에서 하루밤에도 수십만원씩 탕진하였다. 뿐만아니라 그 자식들까지도 료정출입비로 매달 40만~100만원씩 뿌리며 다녔으며 졸개들의 녀편네들은 도박장들에서 한판에 1억원의 돈을 걸고 진탕치며 놀아댔다.

박정희의 졸개들이 1973년에 외국에서 수입해다 처먹은 술값과 커피값만 해도 460만US$, 385만US$에 달하였다.

하기에 당시 남조선의 한 시인은 자기의 시에서 남녘겨레들속에서 도적촌, 오적촌이라 불리우는 호화주택들을 지어놓고 온갖 향락과 부귀영화를 누리고있는 몇몇 안되는 박정희의 심복졸개들의 썩고 병든 부정부패행위를 이렇게 신랄하게 폭로하였다.

 

서슬푸른 룡트림이 기둥쳐서 승천하고

맑고맑은 수영장엔 벌거벗은 선녀 가득

몇십리 수풀들이 정원속에 가득가득

백만원짜리 정원수, 백만원짜리 외국개

천만원짜리 수석비석, 천만원짜리 석등, 석불

1억원짜리 붕어, 잉어, 1억원짜리 참새, 메추리

 

문도 자동, 벽도 자동, 술도 자동, 밥도 자동

계집질, 화냥질, 분탕질도 자동자동

녀대생 식모 두고 경제학박사 회계 두고

림학박사 원정 두고, 경영박사 집사 두고

가정교사는 철학박사, 비서는 정치학박사

미용사는 미학박사, 박사박사박사박사

 

잔디 행여 죽을세라 잔디에다 스팀 넣고

붕어 행여 죽을세라 련못에다 에어컨 넣고

새들 행여 추울세라 새장속에 히터 넣고

개밥 행여 상할세라 개집속에 아이스 박스 넣고…

 

지나온 력사를 뒤돌아보면 대만의 장개석, 남부윁남의 느고 딘 디엠, 필리핀의 마르코스와 꾸바의 바띠스따, 이란의 파흐라비와 칠레의 삐노체뜨 등 미국의 앞잡이들치고 부정부패를 일삼지 않은자가 없었다.

하지만 박정희와 같이 나라와 민족을 외세에 통채로 팔아먹으면서까지 부정부패행위에 피눈이 되여 날뛴자는 없었다.

당시 남조선 각계각층이 부정부패의 왕초 박정희와 그 《정권》을 가리켜 《부정부패의 원흉을 처단하라!》, 《부정부패를 일소하라!》, 《부정부패는 현 정권의 대명사》로 락인하고 규탄한것은 너무도 응당한것이다.

17

 

《매음대통령》

 

당시 남조선인민들이 희세의 민족반역자이며 사대매국노인 박정희에게 붙인 수많은 별명들중에는 《매음대통령》이라는것도 있었다.

이것은 패륜과 패덕, 부화방탕을 일삼던 호색한 박정희에게 남녘의 민심이 내린 응당한 평가였다.

그러면 박정희에게 왜 이런 별명이 붙게 되였는가를 당시에 있었던 몇가지 사실들을 놓고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1970년 3월 19일 서울의 한강로3가에서는 정인숙이라는 녀자가 승용차안에서 총에 맞아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비명에 죽은 이 녀자의 몸에서 극히 제한된 상층부의 성원들만이 가질수 있는 특수려권과 자기와 치정관계가 있는자들의 명단, 전화번호를 적은 수첩이 나온것이였다. 뿐만아니라 그 녀자가 탔던 차에는 개별적인물로서는 도저히 달수 없는 청와대소속 공용위장번호가 붙어있었다. 그리하여 수사경찰들이 아연실색하여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서있는데 갑자기 청와대의 고위인물들이 나타나 《이 사건을 잘못 다루면 줄초상이 난다.》고 위협까지 하였다.

이렇게 되자 경찰들은 살인범을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현장검증자료를 없애기 위해 바삐 돌아쳤으며 일체 보도까지도 금지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 녀자의 정체는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 녀자가 700만원을 주고 장만한 고급주택에서는 아직 써보지도 않은 거액의 미국돈과 일본돈, 남조선돈과 저금통장이 나왔다. 또한 3살짜리 아들이 있는 그 녀자자신은 《복잡한 일에서 잠간 몸을 빼라.》는 아이아버지의 권고로 미국, 일본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그때 자기와 관계하는 상대는 외교관도 마음대로 목을 떼고 갈아치울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는것이다.

그러면 이 녀자의 진짜남편은 과연 누구였던가.

남조선에서 돈을 제일 물쓰듯 하고 청와대승용차번호와 특수려권까지 내줄수 있으며 외교관도 제 마음대로 목을 뗄수 있는자는 다름아닌 박정희밖에 없었다. 아래의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정인숙이 살해되기 전에 청와대안방에서는 박정희와 녀편네 륙영수와의 싸움이 매일과 같이 벌어졌다. 그것은 륙영수가 세련된 특무의 솜씨로 박정희와 정인숙의 치정관계를 알아내고 박정희에게 독을 쓰며 달려들었기때문이였던것이다. 이 싸움이 얼마나 치렬했는지 박정희가 재털이로 륙영수의 면상을 쳐놓는 바람에 녀편네가 한동안 바깥출입을 못한적도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와 정인숙과의 관계는 이렇게 맺어졌다.

정인숙은 리승만《정권》때 대구시장의 딸로서 어느 한 대학을 다니였는데 그때 박정희의 꾀임수에 걸려 그의 애첩이 된 년이였다.

그후 4년동안이나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의 아이까지 낳고 아이에게 박성일이라는 이름까지 달아놓았다. 박정희와 치정관계를 맺은 정인숙은 외국을 제 집 드나들듯이 싸다녔으며 비행기에서 내릴 때마다 엄청난 금액의 밀수입보따리를 들고 내렸으며 그에 대해 누가 시비를 걸면 주저없이 박정희의 이름을 부르군 하였다. 이것으로 하여 정인숙은 박정희의 녀편네로부터 끈질긴 질투를 받게 되였으며 자기와 애첩과의 관계를 극력 숨기려고 애쓰던 박정희에게서 미움까지 받게 되였다. 더우기 당시는 박정희가 《대통령선거》를 앞둔 때여서 자기의 추악한 사생활의 진면모가 외부에 흘러나가지 않게 하려고 최대로 발악하던 때였다.

바로 그 흔적을 영원히 흑막속에 묻어두기 위해 박정희는 자기의 졸개를 시켜 실컷 데리고 놀던 애첩을 백주에 쏘아죽이게 하였던것이였다.

그러자 박정희의 녀편네는 너무 좋아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것처럼 씨원하다.》는 말을 내뱉기까지 하였다.

바로 이 사건이 이른바 정미인살인사건이였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호색한인 박정희의 더러운 치정관계는 정인숙의 죽음으로 끝난것이 아니였다. 하긴 원래 제 자식까지 낳은 본처를 배반하고 미국정탐기관이 선발한 륙영수와 짝을 이룬 박정희이고보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였다. 바로 그런자였기에 후에 박정희는 자기와 이불을 같이 뒤집어쓰고살던 제 녀편네마저도 자기의 부화방탕한 생활에 지장이 되여 죽여버리고만것이였다.

정인숙을 쏘아죽인 총구에서 화약내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인간쓰레기 박정희는 윤정희라는 인기배우를 제 애첩으로 갈아댔다.

그리하여 박정희와 그 녀편네사이에는 또다시 개싸움이 시작되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윤정희는 륙영수의 보복이 두려워 프랑스로 몸을 사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후 빠리에서 박정희가 대주는 돈을 물쓰듯 하면서 호화생활을 하던 윤정희는 륙영수가 박정희에 의해 총에 맞아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비행기를 타고 한달음에 개선장군마냥 의기양양해서 남조선의 김포비행장에 내리게 되였다. 윤정희가 비행기에서 내리던 날 비행장은 박정희가 마중 내보낸 청와대의 비서관들을 비롯하여 100여명의 졸개들로 붐비였다고 한다.

륙영수의 수모를 받으며 피난살이까지 한 윤정희로서는 벌써 박정희의 녀편네가 다된듯 하였다. 하기에 한때 남조선에서는 《축 정희군, 정희양》이라는 말까지 나돌게 되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이였다. 윤정희가 남조선에 돌아온지 1년도 채 못되여 박정희의 심복졸개인 장기영이라는자가 경영하는 《한국일보》에는 윤정희가 빠리에 있는 백 아무개라는 피아니스트와 약혼한다는 기사가 주먹같은 활자로 실렸다. 그러자 윤정희는 이를 사려물고 기사의 내용을 부정하기에 급급하였지만 그럴수록 신문은 더욱더 그럴듯한 이야기로 지면을 채웠다.

이에 대해 당시 항간에서는 윤정희가 벌써 중고품이 되여 박정희의 사랑을 잃었으며 녀색에 빠진 박정희가 또 한차례의 인간배신행위를 하고있다는 규탄의 목소리가 나돌았다.

《한국일보》에 실린 기사는 윤정희를 따돌리기 위해 박정희가 꾸며낸 하나의 모략이였다. 박정희는 자기에게 이미 롱락당할대로 롱락당하고 더럽혀질대로 더럽혀진 윤정희에게 더는 호기심이 없었던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윤정희는 어떻게 하나 청와대의 안방에 들어앉아보려고 미친듯이 치마바람을 일구며 돌아쳤다.

그러자 《제2의 정인숙이 되고싶으냐!》라는 협박문과 협박전화가 윤정희에게 꼬리를 물고 날아들었다. 이렇게 되여 그렇게 도고하던 윤정희는 기가 죽어 찍소리도 못하고 종적을 감추게 되였다.

이것은 부화와 방탕을 본성으로 하는 박정희가 감행한 하많은 이야기들중에서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가 얼마나 부화방탕한 생활에 미쳐 돌아갔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이런 사실도 있다.

1961년 11월 상전의 지령을 받고 미국에 불리워갔던 박정희가 돌아오던 도중에 일본의 한 비행장에 내렸을 때 있은 일이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새벽에 비행장에는 《한일회담》의 흥정을 맡은 일본의 대표들이 마중나와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를 싣고 온 비행기가 비행장에 내린지도 오래고 비행사들까지도 뿔뿔이 흩어졌지만 기다리는 박정희만은 비행기에서 나올줄 몰랐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속에서 두시간 가까이 떨다가 약이 오른 일본대표라는자들이 더는 기다리기에 지쳐서 돌아가려 하는데 비행기에서는 한쌍의 남녀가 승강대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앞에 선 사나이는 난쟁이 박정희였고 그뒤를 따라오는 녀자는 비행기안내원이였다. 더욱 놀라운것은 비행기안내원녀자의 머리칼은 마구 흐트러져 까치집같이 되여있었고 옷은 방금 농짝에 구겨박았던것을 꺼내입은듯 한심하게 구겨져있었던것이다. 마중 나온 일본대표들과 마주친 박정희는 마치 도적질을 하다가 붙잡힌듯이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그들의 눈길을 피하려고 애썼다.

다음날 일본의 신문, 방송들에는 박정희가 비행기안에서 비행기안내원을 겁탈하려다가 뺨을 호되게 얻어맞았다, 서로 눈이 맞아 같이 놀았다 하는 특종기사들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이처럼 박정희는 제땅에서도 못된짓을 하다못해 남의 나라 땅에 가서도 그 놀음을 하여 망신만 당하였다.

한가지 사실에 대해 더 언급해보자.

워낙 술독에 빠져 진탕치며 놀기에 이골이 난 박정희라 당시 서울바닥에는 그가 단골로 다니는 술집들이 여러개 되였다.

이러한 단골술집에 갈 때마다 극악한 사대매국노인 박정희는 줄곧 일본말로 씨벌이며 새벽 2~3시까지 술판을 벌려놓군 하였는데 술만 마시면 일본군가를 부르고 기생들과 한데 어울려 엉덩이춤을 추었다고 한다.

당시 기생들은 박정희를 《키난쟁이》, 《박곰보》로 불렀는데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박정희가 이른바 《최고회의 의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다닐 때인 5. 16군사정변직후에 벌려놓은 추잡한 술판에서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가 되여 어떤 기생의 무릎을 베고 곯아떨어지게 되였다.

그때 기생이 내뱉은 소리가 가관이였다.

《요 자그마한것이 최고라, 무어가 최고의장이란말이야. 바깥에서는 큰소리쳐도 내앞에서는 어림도 없지.》

박정희가 얼마나 녀색에 미쳐 돌아갔으면 기생들에게서까지 이런 비난을 받았겠는가.

그러니 박정희에게 《매음대통령》이라는 별명이 붙은것은 너무도 당연한것이 아니겠는가.

18

 

응당한 개죽음

 

1979년 10월 남조선의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YH무역회사 로동자들의 투쟁을 도화선으로 하여 청년학생들도 이 대중적인 시위투쟁에 떨쳐나섰다.

《독재정권타도》, 《유신헌법철페》, 《학원의 민주화》, 《언론의 자유보장》을 요구하는 각계층 인민들의 투쟁에 야당까지 합세해나섰다. 서울에서도 청년학생들이 호응하여 반《정부》투쟁에 힘있게 떨쳐나섰다. 정세는 4. 19인민봉기전야를 방불케 하였다.

남조선에는 일대 통치위기가 조성되고 미국의 식민지통치는 밑뿌리채 흔들렸다.

여기에 세계의 진보적인민들도 남조선에 박정희가 살판치게 한 장본인인 미국을 비난하고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였다. 더우기 인권불모지대로 전변된 남조선의 심각한 인권실태는 쩍하면 다른 나라와 민족의 인권문제를 꺼들고 생트집을 걸던 미국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한편 조국통일3대원칙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7. 4북남공동성명의 발표는 미국통치배들로 하여금 경악을 자아내게 하였다. 미국은 북남공동성명의 발표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있었으나 그것이 이처럼 엄청난 파문과 극적변화를 초래하리라고는 미처 타산하지 못하였던것이다.

남조선통치배들의 동향을 늘 장악하고있던 CIA는 이때부터 남조선의 집권자가 저들 몰래 북과 무슨 일을 하는지 알수 없다고 하면서 감시의 촉각을 더욱 곤두세웠다.

CIA는 가장 현대적인 전자기술수단들을 동원하여 청와대에 대한 24시간 도청, 감시를 조직하였다. 그 기술수단중의 하나가 지향성레이자음파탐지기였다. 이 탐지기는 도청대상방향으로 레이자를 발산하면 목표대상물을 찾아가 부딪쳐 그 주변의 소음과 함께 사람의 육성까지 반송하게 되여있다고 한다. 유리와 벽체까지 통과할수 있는 이 전파는 청와대안방에까지 미치여 극비의 대화내용까지 다 알아냈다.

CIA는 이런 도청장치를 미8군사령부가 있는 룡산, 군산 등 여러곳에 설치하고 박정희와 측근들의 전화를 통한 대화내용과 남조선《정부》가 해외의 자기 대사관을 비롯한 중요대상기관들과 주고받은 업무보고와 지령까지 알아냈다.

청와대안방에서 몇명의 심복들과 극비밀리에 모의한 내용이 상전에게 어김없이 알려진다는것을 오랜 첩자의 경험으로 간파한 박정희는 이후부터 중요문제를 사무실이나 자기 집을 피하여 야외에서 모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전이 거미줄같이 조밀하게 쳐놓은 도청, 감시망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청와대에 대한 24시간 도청감시를 통하여 CIA는 박정희가 자기의 범죄적목적을 성사시키기 위해 미국국회 의원들을 비롯한 《정부》요인들을 대상하여 뢰물작전을 벌리고있다는 뜻밖의 사실을 포착하였다. 후에 박동선을 통한 대미뢰물사건이 폭로되였을 때 이를 완강히 거부하는 박정희에게 미국은 《박정희가 박동선의 미국내 로비(막후교섭)활동을 직접 지시했다는것을 대통령에 대한 유선도청과 무선도청, 전자감시 및 2중스파이들의 활동에 의해 알고있다.》(남조선잡지 《신동아》 1989. 2)면서 강타를 들이댔다.

박정희의 대미뢰물사건은 미국정계와 사회계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미국의 분통을 터뜨린것은 하잘것없는 식민지주구가 대아메리카정치의 핵심부라는 국회에 파고들어 제 배속을 채우려 했다는것때문이였다. 그런 무엄하고 못된자의 목을 당장 쳐버리라는 요구가 끓어올랐다.

박정희는 이래저래 상전에게 리익보다 큰 손실을 가져다주는 식민지주구로 락인되여 칼도마에 오르지 않을수 없었다.

한편 박정희는 말기에 이르러 뇌에 침습한 매독균의 후과로 하여 극도의 피로와 로쇠현상, 변태적인 성욕, 느닷없는 로망증을 일으켜 그를 보는 측근자들까지 《저자도 다되였구나.》 하는 강한 느낌을 가지게 하였고 그에 대해 말하는것을 꺼리지 않게끔 되였다. 당시 남조선현지에 취재차로 와서 박정희와 그 측근들과 자주 접촉했던 미국의 어용기자들은 이렇게 썼다.

《한국인들은 박정희이후시기에 남조선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의 임기와 후임문제에 관한 말들이 그의 지지자나 반대자를 막론하고 그들속에서 사적으로나 혹은 공공연하게 점점 더 늘어나고있다.》(《뉴욕 타임스》 1975. 2. 15)

리용가치를 상실하여 안팎으로 고립배격당한 박정희에게 미국상전은 《용도페기》처분을 내리지 않을수 없었다.

미국신문 《뉴스위크》(1977년 11월 7일부)가 이때 벌써 미국정계에서 새여나온 비밀자료를 분석한데 기초하여 《막다른 경지에 달한 미국남조선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박정희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것이다.》라고 쓴것은 미국통치배들의 이런 결정을 반영한것이였다.

미국상전의 이러한 결심은 남조선과 미국과의 관계, 보다 구체적으로는 박정희를 대하는 미국의 립장에서 표면화되였다.

1979년 6월 29일에 남조선에 날아든 미국대통령 카터는 보기 드문 언행을 하였다.

이날 밤 9시에 김포비행장에 도착한 카터는 영접나온 박정희와 악수만을 건성으로 나누었을뿐 도착성명 한마디없이 직승기로 동두천미군기지에 날아가 그날 밤을 보냈다. 이튿날 그는 미군병졸들과 어울려 돌아치면서도 일정에 예정된 남조선미군기지시찰을 대방에 알리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취소하여버렸다. 이때문에 영접준비를 갖추고 대기상태에 있던 괴뢰군은 물론 현지에 나가 영접하려던 남조선고위층들이 몇시간동안이나 속을 태웠다.

다음날 박정희를 만나 남조선의 《인권문제》이니, 남조선미국관계의 문제점이니 하는것들을 꺼들면서 졸개들을 다불러대던 카터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에 부딪쳤다.

그것은 박정희가 세계 《최강국》의 수반이라고 우쭐거리는 카터에게 《우리 나라의 군대는 미국의 요구에 응하여 윁남에 파병되였다. 우리 한국만큼 대부대를 파병한 나라는 없다. 그러나 우리 한국은 아직까지 미국으로부터 무엇 하나 선물받은것이 없다.》고 감히 투정질한것이였다.

물론 이것은 상전에게서 더 많은 지원을 받으려는 어리광이였으나 카터를 격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회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미군사령부에 정한 자기 숙소에 돌아간 카터의 입에서는 온밤 욕설이 줄기차게 쏟아지고 《그놈을 죽여라.》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한다.

이튿날 카터는 환송나온 남조선의 고위관계자들에게 《나의 한국방문으로 한미관계에 새로운 장이 펼쳐질것》이라는 고압적인 폭언을 뱉아놓고 남조선을 떠나갔다.

박정희가 사살된 해인 1979년 하반기에 들어서 미국은 그에게 비공개적인 압력과 경고를 보내는데 그치지 않고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시하고 최후통첩적인 경고를 련발하였다.

카터의 남조선행각후 박정희가 죽기까지의 100여일은 남조선미국관계가 악화와 내리막길을 줄달음쳐간 새로운 장이였다.

카터가 남조선을 행각한 후 CIA요원들이 꼬리를 물고 남조선에 날아들었다. 그들은 남조선에 오면 의례히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접촉하던것과는 달리 되도록 숨어서 제 할 일에만 몰두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해병대가 림전태세에 들어가고 미국대사 글레이스틴과 함께 미국에 불리워갔다온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 윅캄이 10월 26일에 남조선에 있는 미군헌병과 미군모두에게 경계태세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남조선에서는 미군이 경계태세에 들어가면 군대도 같은 명령을 받고 같이 행동하는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이때에는 이례적으로 미군만이 단독으로 하는것이여서 관계자들은 의혹과 이상야릇한 예감에 잠기였다.

윅캄과 함께 미국에 불리워가 남조선정치정황에 초점을 맞춘 협의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미국대사 글레이스틴의 스쳐보낼수 없는 말과 행동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10월 16일에 남조선에 돌아온 그는 여당과 야당, 《정부》의 고위층들을 만나 밀담을 벌리였는데 그들가운데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와는 박정희가 사살되기 수시간전에 비밀리에 접촉하였다.

CIA는 박정희제거방법문제와 관련하여 정황을 구체적으로 검토한데 기초하여 그를 암살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해 CIA남조선지부 책임자로 있다가 1975년에 본부로 조동된 도날드 그레그가 1976년 10월에 텍사스대학에서 한 정책강연에서 《만약 박정희대통령이 차기 6년임기에 다시 도전한다면(물론 그렇게 할것으로 보이지만) 아마도 그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암살당할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때로부터 3년후 박정희가 실지로 암살당하였을 때 반동들과 어용보도수단들은 그레그가 《무서운 예견력을 가진 정세분석가》였다고 극구 찬양하였다.

그러나 그레그가 박정희의 암살에 대해 3년전에 말할수 있은것은 그가 《무서운 예견력을 가진 정세분석가》였기때문이 아니라 그 암살음모의 관계자였기때문이다.

미국상전들이 박정희제거에 군사쿠데타가 아니라 암살을 적용하기로 한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로, 그것은 박정희자신이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경험이 있는 군사깡패라는 사실이다.

도적이 도적의 심보와 수법을 잘 아는것처럼 쿠데타를 일으킨자는 쿠데타를 획책하는자에 대해 잘 안다. 이때문에 박정희는 쿠데타에 각별한 촉각을 세우고 민감하게 반응하여왔다. 박정희가 군부반란을 미리 적발하고 제압하는것을 주되는 임무로 하는 군보안사령부를 자기 턱밑에 두고있은것도 이때문이였다.

현실을 놓고보아도 박정희를 제거하려고 했던 크고작은 쿠데타음모가 모두 실패했다는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였다.

이런 정황에서는 쿠데타를 통한 주구교체가 실현되기 어렵다는것이 CIA의 판단이였다.

둘째로, 그것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과 남이 첨예하게 대치되여있는 상태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 전쟁이 촉발될수 있다는 저들나름의 위구때문이였다.

군사쿠데타를 원만히 결속짓자면 서울과 그 부근에 전개된 《친위사단》들을 제압하여야 한다.

그러자면 전선에서 몇개 사단을 서울에 끌어들이고 희생자가 얼마나 나올지 모르는 전투행동을 피할수 없다는것이 미국의 타산이였다.

이와 관련하여 남조선의 《한겨레》(1989년 2월 12일부)는 다음과 같이 썼다.

《CIA는 당시 박대통령에 대한 쿠데타가 발생할 경우 북한의 대남공격의지를 북돋을지도 모른다는 판단때문에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음모정보를 박정희씨에게 계속 제공했다.》

군사쿠데타로 박정희를 제거하는것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다른 우환거리가 생길수 있다고 타산한 미국은 마침내 뒤골방에서 박정희를 조용히 사살해버리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CIA는 박정희를 사살할 행동대원으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를 지목하였다.

여기에도 미국의 교활한 음모가 깔려있었다.

첫째로, 그것은 김재규가 절대적인 숭미사상의 소유자이고 미국의 오랜 첩자로서 CIA의 지시라면 목숨이라도 바쳐 기어코 집행할수 있다는 점이였다.

둘째로, 그것은 김재규가 천성이 우직한데다가 오랜 기간 군인생활을 하면서 상부의 명령을 무조건 집행하는 일을 덜지도 더하지도 않고 그대로 집행하는 기계적인 사나이라는 점이였다.

셋째로, 김재규가 당시 박정희를 반대하여 폭동적으로 진출한 부산, 마산일대 인민들에 대한 탄압에서 박정희와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서 오랜 기간 쌓인 개인감정까지 드러냈다는것이였다.

넷째로, 김재규가 그해말에 있게 될 《개각》에서 쫓겨날 대상으로 꼽혀 박정희에 대한 원한을 품고있었다는 점이다.

다섯째로, 김재규는 당시 중앙정보부의 부장이라는 직책에 있은것으로 하여 무장을 갖춘채 박정희를 상시적으로 만날수 있고 자리를 같이할수 있다는 점이였다.

박정희를 사살할 행동대원으로 김재규를 선정한 미국은 남조선주재 미국대사 글레이스틴을 내세워 그에게 미국의 의사를 따르라고 바람을 불어넣으면서 권세욕을 돋구어주었다. 글레이스틴은 김재규를 남몰래 만나 남조선정치의 《실제적주인은 중앙정보부장》이라느니, 남조선은 《지금 새 지도자의 출현을 요청하고있다.》느니 하고 그에게 당장 《대통령》감투라도 씌워줄듯이 너스레를 떨면서 《장소는 중앙정보부 별실로 하시오!》라고 최종지령을 내렸다.(《미국과 한국》 1981년 190페지)

중앙정보부 별실이란 변태적인 성욕으로 하여 녀색에 미친 박정희를 위해 중앙정보부가 서울의 궁정동에 꾸려놓고 운영하던 비밀료정이였다.

1979년 10월 26일 밤 김재규는 여기에 먹자판을 차려놓고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과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 박정희의 놀이감으로 될 2명의 녀인을 불러들였다. 술놀이가 시작되여 얼마 되지 않은 저녁 7시 50분경 별치 않은 언쟁이 일자 김재규는 권총을 뽑아들고 차지철과 박정희를 쏘아눕혔다. 박정희를 쓸어눕힌 두발의 총탄중 한발은 가슴으로부터 척추를 뚫고들어갔으며 다른 한발은 머리뒤통수로부터 이마빡을 뚫고나갔다.

1940년대에 벌써 CIA의 특무로 채용되여 온갖 악행을 다하였으며 집권 18년동안 미국상전을 위해 충실히 복무해온 박정희는 이처럼 같은 상전의 지령을 받은 심복졸개 김재규가 쏜 총알에 맞아 죄많은 생을 마쳤다.

박정희가 사살된것과 관련하여 한 해외교포신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수수 락엽지는 가을저녁 북악산기슭의 한 밀실에서 총성은 련달아 올랐다. 비정한 탄환은 여지없이 표적의 심장을 뚫고 두개골을 박살냈다. 믿고있었던 부하의 륙혈포가 섬겨오던 상전을 향해 불을 뿜었던것이다. …

방아쇠를 당긴 김재규의 집게손가락엔 력사의 의지가 없었으나 38구경 리불버에 재워진 탄환에는 거대한 미국의 검은 의지가 서려있었던것이다.》(《해외한민보》 1979. 12. 1)

미국의 검은 의지가 서린 총탄에 의해 박정희가 제거된 후 많은 사람들은 남조선에 날아들었던 카터의 괴이한 언행이 무엇때문이였는가를 새삼스레 재인식하였다. 그리고 박정희가 사살되기 직전 오끼나와주둔 미해병대가 림전태세에 돌입하고 남조선강점 미군만이 이례적인 경계태세에 들어간것이 박정희사살사건이 초래할수 있는 돌발적인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것임을 알았다. 또한 서울에 날아든 CIA의 요원들이 숨어서 벌린 활동과 외교관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암살행위를 뒤받침하고 고무하기 위한것이였음을 느끼게 되였다. 박정희가 사살된것과 관련하여 세계의 언론들이 다음과 같은 평을 내린것은 결코 우연치 않다.

《미국이 박정희를 대신할 새로운 인물을 요구하여 김재규를 시켜 박정희를 사살하도록 하였다.》(NHK방송 1979. 11. 1)

《박정희의 살해는 바로 새로운 보다 신축성있는 지도부를 남조선에 집권시키려는 길을 열어놓기 위한 음모였다.》(《뉴욕 데일리 뉴스》 1979. 10. 28)

《평론가들은 워싱톤이 한때 사이공독재자 느고 딘. 디엠을 처단한것처럼 박정희를 처리했다고 믿고있다.》(AFP통신 1979. 10. 28)

미국이 벌린 또 한차례의 주구교체극, 박정희사살사건의 진상은 그후 세상에 명백히 드러나게 되였다.

이처럼 미국에 의해 길들여지고 미국의 조종밑에 5. 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강도질한 박정희는 집권 18년동안 미국의 꼭두각시가 되여 온갖 못된짓이란 못된짓은 다 골라하다가 종당에는 상전인 미국에 의해 응당한 개죽음을 당하고말았다.

 

*   *   *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일제에 의해 길들여지고 미국의 각본과 조종밑에 《유신》독재의 왕초로 등장하여 박정희가 한짓이란 가장 야만적인 군사파쑈독재로 남조선사회의 민주와 민권을 짓밟고 동족을 교살한것이며 가장 비렬한 사대매국책동으로 남조선경제를 예속과 몰락의 함정속에 처박고 인민들에게 헤아릴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들씌운것이다.

또한 가장 더러운 부정부패행위로 일신의 치부와 향락,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남조선을 사기와 협잡, 온갖 사회악이 판을 치는 썩고 병든 인간생지옥으로 전변시킨것이며 가장 극악한 《두개 조선》조작과 침략전쟁연습책동으로 동족사이의 대결과 불신을 조장하고 조국통일의 앞길에 엄중한 애로와 난관을 조성한것이다.

하지만 죄는 지은데로 가기마련이다.

우리 겨레에게 죄악에 죄악만을 덧쌓던 박정희는 결국 《유신》독재체제하에서 18년동안이나 쌓이고 쌓인 원한과 울분을 더이상 참을수 없어 《독재정권타도!》와 《유신헌법철페!》로 치솟는 분노와 격분을 터뜨린 우리 민족앞에 겁을 먹은 미국이 꾸며낸 교활한 음모의 희생물이 되여 황천객이 되고말았던것이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고 민족반역만을 일삼던 《유신》독재의 몸뚱아리에서 떨어져나온 《한나라당》과 그속에서 《변화》와 《쇄신》을 떠들며 둔갑한 《새누리당》도 다름아닌 민족반역의 무리들이다.

이러한 역적패당, 민족반역당때문에 우리 민족의 화해와 단합은 근 70년동안이나 이루어지지 못하고있으며 바로 이런 매국배족의 무리들이 있기에 우리 겨레가 그처럼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조국통일의 새 아침이 오늘까지도 밝아오지 못하고있는것이다.

이제 더는 민족분렬의 력사가 지속될수 없다.

북과 남, 해외의 7천만 우리 겨레는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우리 민족앞에 저지른 천추의 죄악을 똑바로 알고 올해의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유신》독재부활을 꿈꾸는 리명박과 《새누리당》에 준엄한 심판을 내림으로써 6. 15통일시대의 거세찬 대하가 또다시 이 땅우에 세차게 사품쳐흐르도록 하여야 할것이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