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통일은 어디서 시작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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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시를 알리는 싸이렌소리가 서울의 밤하늘에 처량한 여운을 남기고 사라진무렵이였다.

마동열이 정시명의 방에 들어섰다. 금방 김명호의 전화를 받았는데 려운형선생이 꼭 만나줄것을 바란다는것이였다.

그 소리에 정시명은 두말없이 하던 일을 미루고 집을 나섰다.

그들은 전차를 타고 흥국상회로 갔다.

정문에 이르니 그들의 도착을 기다린듯 정문밖에 있던 자동차가 천천히 굴러왔다.

자동차에서는 김명호가 려운형의 비서와 함께 내려서 마주왔다.

《려운형선생이 어디에 계시오?》

《한강변에 계십니다.》 비서가 대답하였다.

《한강변에? 무슨 일이시오?》

《뭘 좀 좋지 않은 일이 생겼나 봅니다.》

《좋지 않은 일이라니? 기자회견때문이요?》

정시명은 얼른 짚이우는바가 있어 물었다.

아까 서울신문 저녁호에 려운형의 기자회견소식이 실린것을 보았다. 거기에는 근로인민당이 김규식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에서 탈퇴한다는것과 홍명희의 독립당과 리극로의 건민회도 립장을 같이하기로 했다는 려운형의 공개발표가 실려있었다.

《옳습니다. 그 일때문에 하지의 호출도 받고 김규식선생도 만났는데 거기서 충격을 크게 받은것 같습니다. 그냥 한강변에 계시다가 정선생을 미안한대로 모셔와달라고 했습니다.》

비서가 간단히 사유를 설명하자 정시명은 《그랬댔구만. 어서 갑시다.》하며 먼저 자동차에 올랐다.

김명호는 당사에 가야 할 일이 있다해서 떨어지고 비서와 마동열이 따라섰다.

자동차는 어둠에 잠긴 서울의 밤거리를 쾌속으로 달려 인차 강변숲속에 들어섰다.

달빛어린 강변에서 그들은 려운형을 인차 찾아냈다.

려운형은 반가움에 홈싹 젖어 종종걸음으로 마주가서 그의 손부터 덥썩 잡았다.

《정선생, 이거 야밤중에 정말 죄송하오.》

《아니 일없습니다. 몽양선생님의 부름인데 야밤중이면 어떻습니까. 이번에 장한 일을 하셨습니다. 부산에서 또 변을 당했다는 소식에 걱정이 컸는데 몸성한 선생님을 뵙게 되여 정말 기쁩니다.》

《내 두루두루 심사가 뒤틀려서 정선생을 모셔오라고 했소. 자, 아서원에 갑시다.》

《지금쯤은 문을 닫을 때가 되였습니다.》

비서가 말했다.

《일없소. 아서원은 이 몽양에게 스물네시간 문을 열어주게 되여있는 곳이요, 자 정선생, 오늘 좀 선생과 함께 실컷 마시고 취하고싶소.》

정시명이 희미한 불빛에 어린 려운형모습이 례사스럽지 않아 불안해졌으나 응하는수밖에 없었다.

《몽양선생님의 뜻이라면 제 두말없이 술친구가 돼주렵니다.》

아서원의 나들문에서 비서가 뛰여내렸는데 늙은 수위가 단마디로 지금이 몇시냐며 이제는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딱 막아나섰다. 비서가 길게 설명해서야 수위가 두덜거리며 안으로 사라졌다.

이어 40대의 몸집이 풍만한 아서원의 녀주인이 꼬리치마를 끌면서 문가에 나타났다.

《아유 몽양선생님, 오신다고 먼저 사람을 보내야지… 야밤에 문득 어찌된 일입니까?》

《허허… 아서원의 문턱이 높다더니 말 그대로군. 이분은 내가 존경하여 마지않는 벗이니 인사를 하게. 정선생, 이 마담이 왜정때 날 따라서겠노라 몸살을 앓던 내인이라오. 허허…》

녀주인이 곱게 눈을 씽긋거리는것으로 보아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아서원이 자기에게 스물네시간 문을 열어주게 되여있다고 한 려운형의 말도 헛말이 아닌듯 하다.

그들은 유쾌히 웃으며 녀주인의 안내를 받아 2층의 잘 꾸려진 방으로 들어갔다.

《우린 다 배가 부른 사람들이요. 그러니 좋은 술 몇병과 북어 몇쪼각이면 되겠소.》

《아유, 몽양선생님이 모처럼 오셨는데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허허, 그저 밤시간을 지체한다고 내쫓지나 말아주오.》

잠시후 접대원들이 줄을 서서 들여오는데 순식간에 상다리가 부러지게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녀주인이 술을 칠양으로 정시명에게 다시 한번 곱게 인사를 하고는 그들사이에 다소곳이 자리를 잡았다.

《허허 참 이렇다구야. 마담, 내 이래서 마담 보고싶어 올라고 해도 발길이 쉽게 돌아서지 않아. 이건 저쪽 방의 젊은이들에게 갖다주라구. 우리는 조용히 시간을 보내겠소.》

《예, 그렇게 하시지요. 그런데 저쪽 방도 이렇게 차려드리니 편히 즐기세요.》

녀주인은 호젓한 자리를 갖고싶어하는 려운형의 속말을 알아차리고는 술잔에 술을 부어놓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 방에서 나갔다.

《자, 우선 마십시다.》

려운형이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요즈음 조직부장이 걸싸게 해제낍니다. 사람이 순해보이는데 당을 다스리는걸 보니 웬걸 얼마나 손탁이 센지… 그 사람이 없었다면 이번에 〈좌우합작〉문제도 쉽사리 꼬아내지 못했을거요.》

《아 그래요? 그것 참 어려운 일을 일사천리로 해놓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우린 선생님께 지금 좌우를 살피며 가운데서 동요하는 여러 정당들과 단체들을 잘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했습니다.》

《아, 그게 헐치 않소. 내 방금 하지에게도 불리워갔고 만호와도 만나 절교선언까지 던지고오는 길이요. 돌아서니 일석에 막역지우를 버린것 같아 가슴이 답답한데 어디 비벼댈 곳이 있더라구. 그래 실은 화술이라도 들고싶어 정선생을 모셔왔던거요.》

《그런데 김규식선생님과 절교선언은 왜 하셨습니까?》

정시명이 려운형을 통해서 김규식을 움직이려고 생각해왔는데 왕청같은 절교선언소리가 나오니 랑패스러워 물었다.

《이렇게 된 일이요. 정선생도 이런 말씀하신적 있잖소. 내가 김규식의 〈좌우합작〉에 끌려가 민족의 대의를 버리지 말고 김규식을 끌어와 애국의 길에 세우라고. 그래 내가 〈좌우합작〉에서 탈퇴하는걸 통고할겸 그 사람과 얘기를 했는데…》

하며 려운형은 김규식과 하지를 만났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 …

서울에 들어서는 길로 홍명희와 리극로를 찾아가 자기의 의거에 보조를 맞추기로 합의를 한 려운형은 그 길로 김규식을 찾아갔다. 그앞에서 근로인민당의 탈퇴를 선언하고 김규식이도 《좌우합작》을 걷어치울것을 력설하였다.

이 놀음의 주창자인 김규식이 예상했던대로 삿대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말싸움은 점심상까지 차려가며 세시간이나 끌었다. 차분하게 자기식의 구태의연한 론조를 빙빙 돌려가면서 들이대는 김규식의 반발이 점차 려운형을 아연하게 하였다.

《만호!(김규식의 호) 어째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는가?》

《눈을 크게 뜨고도 앞뒤를 보지 못하는건 몽양 자넬세. 〈좌우합작〉이 뿔뿔이 흩어진 각당각파를 묶어세우는것이라는걸 그래 몽양이 모른단 말인가.

바로 누구도 아닌 자네가 탈퇴하다니, 그게 제정신 갖고 행한 일인가.》

《아, 만호! 누구를 위한 〈좌우합작〉인가? 누가 바라는 〈좌우합작〉인가?》

매사에 빈틈이 없고 사리가 정연한 김규식이 《좌우합작》의 부당성을 충분히 납득하면 기존의 립장을 훌훌 털어버릴줄 알았는데 그냥 고집을 부리고 심술을 쓰자 려운형은 지쳐버렸다. 끝내 려운형은 김규식과의 대화를 울화를 터뜨려놓는것으로 마무리짓고 말았다.

《만호! 어째 이리도 요지부동인가. 이 몽양은 일언이페지하고 외세에 기생하려는 그 어리석음을 깨버리기전에는 천추로 등을 돌릴것이요.》

김규식의 고집으로 화가 천둥같이 난 려운형은 솟구치는 울분을 어데다 비벼댈 곳이 없어 윽윽하다가 곧장 구락부로 차를 몰아갔다.

려운형은 행동적인 인간이였다. 일단 자기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일거리가 생기면 끝장을 볼 때까지 주저없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몸을 적시였다. 그리고는 심혼을 깡그리 태워서라도 매듭을 짓고야 물러서는 투사다운 기질을 보여주군 한다.

려운형은 즉시 기자회견을 열고 근로인민당은 이 시각부터 《좌우합작》에서 탈퇴하며 쏘미량군의 즉시적인 동시철거를 요구한다는것을 다시금 선언하였다.

그렇게 해놓으니 속이 후련해지기는 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김규식과 절교까지 하고 온것이 떠올라 가슴이 알찌근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까지 밀어던질것은 없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김규식의 소행은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친구가 성심으로 내놓은 충언을 깊이 씹어보지도 않고 그렇게도 가벼이 뿌리칠수가 있느냐. 홍명희나 리극로는 군소리 크게없이 받아주는데 그 사람은 어찌된 소갈머리기에 40년지기가 힘들게 내린 또하나의 운명적인 결단을 리해하여주지 못하는가.

(만호! 당신이 나한테 그럴수 있느냐?)

려운형은 이렇게 입속으로 부르짖으며 집안에 들어섰다.

그는 한달만에 만난 가족들의 인사도 받는둥마는둥 하고 침실의 쏘파에 깊숙이 몸을 잠구고 앙앙불락하며 좀체로 마음을 다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저녁머리가 가까와 와서 비서가 조용히 들어와 하지중장의 부관이 왔다고 알렸다.

《헝! 또 불질을 해오는군. 들여보내오.》

려운형은 귀찮아서 시들하게 말하고는 응접실에 나가 팔걸이걸상에 방정하게 앉았다.

이미 면목이 있는 하지의 부관은 문가에서 손을 건듯 들어 깍듯이 인사를 올리고는 하지중장이 저녁만찬에 각하를 초대한다고 전하였다.

려운형은 아무래도 또 하지와 맞서서 겨루어야 할 트집거리를 만들어놓은 이상 그와의 면담을 미룰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여 초대에 응하였다.

하지가 벌써 자기의 지방순행과 기자회견소식을 일일이 보고받았으리라는것은 뻔했다.

하지가 언제나처럼 경무대의 현관문에서 려운형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그 길로 려운형을 연회실로 쓰는 별관에 안내했다.

커다란 연회상에는 두 사람의 자리만 마련되여있었다.

하지는 려운형을 맞을 때면 대체로 통역을 세우지 않고 단독으로 나서군 했다. 려운형의 영어화술이 류창하여 중간인물이 필요없는데도 있지만 주되는 원인은 딴데 있었다.

하지는 미군정의 력대 장관들은 물론 자기까지도 눈아래로 굽어보는 려운형의 기를 꽉 눌러버리려고 여러번 기회를 마련하고 수를 썼으나 매번 마주서면 자기도모르게 속이 졸아들고 위압이 되고만다. 자기 스스로도 화나는 일이지만 어쩌는수 없다. 그래서 아예 려운형과 만날 때는 언제나 이렇게 다른 인물들을 옆자리에 두지 않는것이 마음이 편하였다.

그들은 조용히 접대원이 부어주는 술을 마시였다.

이윽고 려운형이 좋아하는 조선국수가 나오고 만찬이 끝나갔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까지 씻고나자 하지는 말끔히 비운 려운형의 국수사발을 흡족하게 넘겨다보다가 뒤자리에 서있는 접대원을 눈짓으로 내보냈다.

드디여 초청용건을 내놓았다.

《립법의장한테서 말을 들었습니다. 좌우합작에서 탈퇴한다는게 당론으로 선언되였다는것이 사실입니까?》

하지는 언제나처럼 에돌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늘에야 비로소 들은것처럼 얼굴에 놀라운 표정을 띄우며 정중하게 물었다.

《예.》

《김규식의장은 나에게 려선생의 립장을 돌려세워줄것을 친구로서 부탁하여왔습니다.》

《친구로서 부탁하여 왔다구요?》

려운형의 얼굴이 대뜸 거칠어졌다. 만호가 그런 부탁을 하지에게 하다니?

… 그래 이 몽양이 외세라면 사족을 못쓰는 반편같이 보이던가. 만호가 환장을 해도 크게 하는군. 그게 어디 뼈대있는 사람의 짓인가.…

하지가 욱 끓어오르는 의분을 가까스로 누르고있는 려운형의 안색을 그 세모눈으로 핥다가 말을 이었다.

《실은 당신들, 정객들이 모여 좌우익이 합작하자고 합의한것을 당신이 이제 와서 파기하는것이 리해가 안되여 이렇게 만나자고 했습니다. 당신이 지방에 가서 한 강연내용들을 매일 통보받군 하였는데 리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때문인가요. 당내 일부 불순인물들의 압력때문인가요? 공산당세력이 좌우합작의 의미를 달리 해석하면서 지도부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있다는 통보도 받았습니다.》

《중장, 이 몽양은 평생 소신에 살지 그 누구의 눈치나 보면서 안팎 다른 말을 해본적이 없소. 난 지금껏 좌우합작이 당신들의 고안품이라는걸 딱히 몰랐소.》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미국의 고안품이라니?…》

하지는 벌레라도 깨문듯 상을 찡그리고 말꼬리를 높이였다. 그러나 인차 자기를 수습하고 역시 무인답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 우리의 고안품이라면 어떻단 말입니까. 우리는 당신들이 서로 물고뜯으면서 쓸데없는 싱갱이질로 세월을 보내지 말고 합작하여 우리가 권력을 이양할수 있는 정부를 세우도록 도와줄뿐입니다.》

론리에 앞서 힘의 무게가 느껴지는 하지의 직선적인 도전에 려운형은 대뜸 눈이 번쩍거렸으나 인차 낯빛을 풀고 《우릴 도와줄뿐이다… 허…》하며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몇번 끄덕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중장의 솔직성이 마음에 드오. 그러니 나도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중장, 우리 조선속담에 고양이 쥐생각한다는 말이 있소. 당신이 애당초 이 나라 국민의 리권을 존중하였더라면 인민위원회를 해산하지 말아야 될것이고 군정이라는걸 펴지 말아야 할것이였소.》

《려운형선생, 당신은 인민위원회가 공산당의 정권이였다는것을 정말 모릅니까?》

《해산리유가 공산당정권이라는데 있다? 허… 그렇다면 이제 와서 당신들이 좌익에 손을 내미는 리유는 뭐요? 당신들은 좌익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해석했소? 외세의 풍에 놀아나는 그런 좌익을 념두에 두는거요? 아니면 미국에 끈이 달린 우익과 한동아줄에 얽어맬수 있는 그런 좌익을 말하는거요? 우리 근로인민당은 명실공히 근로하는 인민을 대변하는 당으로서 당신들이 요망하는 그런 좌익세력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두오.》

려운형은 말싸움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안깐힘을 다 쓰는 상대방을 그냥 밀어부치면서 여유작작하게 오금을 박았다.

《려운형선생, 당신은 이 나라의 정치적장래를 우리가 담보하고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랭정하게 접수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가리켜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한 리상형의 정치가라는 평가도 내리고있는데 참고해야 되지 않을가요.》

《하하하…》

려운형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너렁청한 연회장이 떠나갈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의 세모눈이 점점 표독스러워졌다. 암팡지게 패여든 눈에서 뭇사람들이 전률을 느끼는 새파란 류황불빛 같은것이 팔팔 일었다. 그러나 려운형은 상대방의 기분쯤은 내 상관할바 아니라는듯 한바탕 웃고는 그 시원스러운 목청을 높였다.

《리상형의 정치가라? … 옳소, 난 리상속에 살아왔고 앞으로도 리상을 위해 살아갈것이요. 나는 현실에 아부하면서 자기의 리상을 조변석개로 바꾸는 그런 서푼짜리 정치인은 되지 않을거요.

그리고 중장, 이왕 말난김에 내 솔직히 말해둡시다. 툭 빠개놓는다면 난 당신들 대양건너 온 이방인들이 이 나라의 정사에 왈가불가하는 꼴 보는것이 골치가 아프오. 당신은 어째서 우리 집 식솔들의 마음가짐이 다른데 대하여 그렇게도 군소리가 많소? 뭐 미국의 정치가라는것도 선거때 보니깐 저마다 제소리로 고아대는게 악마구리 끓듯 소란스럽기만 하더구만. 그래놓구도 그게 자유민주주의모델이라 자랑하더구만.

어찌된 영문이요? 중장, 그래 이 나라의 국민은 당신들이 바란다면 군소리없이 생김새를 바꾸는 그런 미개족속으로 보이오? 천만에!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중장, 당신얘기를…》

려운형은 깍지 낀 두손에 턱을 고이고 입가에 느긋한 웃음을 담은채 저력있게 들이댔다.

려운형을 돌려세우려던 하지는 또다시 수세에 몰려 허둥거리면서 이 인물과는 대적이 될수 없다는것을 다시금 통감하였다.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 굴뚝같이 뻗쳐오르고 분노로 하여 얼굴이 피빛이 되였다.

하지는 려운형을 독기가 번뜩이는 매눈으로 쏘아보다가 로골적으로 위협했다. 열한번째의 테로를 조심하라는것이였다.

려운형은 돌아오던 길에 다시 김규식의 집에 들렸다.

《그까짓 하지놈의 위협쯤은 례사로운 다변사이니 개의할바가 아니지만 만호일이 괘씸스럽기 그지없더란 말이요. 저를 믿고 한바탕 아픈 소리도 해봤는데 하지에게 선통을 하다니 세상에 이럴수 있는가. 우린 지금껏 어려울 때 서로 지지하고 부축해주며 살아왔다오.》

려운형이 말끝에 또 술잔을 비우고 왼쪽 가슴을 툭툭 쳤다.

《저도 알고있습니다. 빠리 만국평화회의에도 함께 갔고 모스크바에도 함께 갔다는것을요.》

《내가 일본총리대신 만나러 갈 때에도 다른 사람은 다 눈총을 쐈지만 그 사람만은 나를 기대하고 지지하여주었소. 그런데 이 사람이 두번째로 문턱을 넘어선 나더러 또 삿대질이요.

만호가 확실히 〈립법의원〉의장자리를 타고앉아 미국놈들과 하루가 멀다하게 상종하더니 독립운동가의 얼과 혼은 다 거덜이 난것 같단 말이요.》

《그래 화해는 하셨는가요?》

정시명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궁금해서 물었다.

려운형이 행동형의 다혈질적인 기질이라면 김규식은 사색형의 점액질의 인간이다. 상반되는 두 기질의 인간이 오랜 세월 큰 충돌이 없이 친분을 두터이 해온것이 희한한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가 하나로 뭉쳐줄것을 요구하는 이때 사이가 버그러진다면 큰 랑패다.

려운형이 제 손으로 술을 부어 들이키고는 말이 안된다는듯 팔을 내둘렀다.

《화해가 다 뭐요. 소리를 지르다가 이 길로 달아빼고말았지요. 만호 저 사람이 확실히 제 빛을 잃고있소. 미국놈의 장단에 춤을 추는데 모르고 한짓이 돼도 안되겠는데 내 알만큼 말했는데도 고집이거든. 저 사람이 저래서는 안되지요.》

정시명은 려운형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사람됨에 깊이 머리가 숙여졌다.

세상만사를 굵게 받아들이며 살아오는 세상에 유명짜한 풍운아가 한 친구와의 우정을 두고 이렇게 가슴아파하고 울분을 새길길 없어 어쩔줄 몰라 하는것이다.

정시명은 려운형의 술잔에 술을 채워주며 각근히 위로하였다.

《몽양선생님, 너무 괴로워마십시요. 김규식선생이 언젠가는 몽양선생의 진의를 깨닫고 뉘우칠 때가 반드시 있을것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에도 두분사이에 절교선언까지 내린것은 너무 과하신것 같습니다.》

《글쎄 그렇다니… 옳은 비판이우. 내 이따금 인생길 돌아보며 그르친 일이 많아 자책이 크다오. 그게 다 내 성미가 너무 곧아 휘여져야 할 때도 있건만 휘여들줄 모르고 살아온데서 버릇되지 않았겠는가.》

《두분이 뒤날을 기다리지 말고 다시 손을 잡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나라의 재난을 가시기 위하여 만호선생과도 손잡고 나가야 합니다.

통일을 먼곳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통일은 우리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되는게 아니겠습니까.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이 나라걱정부터 하고 겨레가 당하는 수난을 아파하고 후손들을 념려하는 참다운 인생을 살 때 그리고 온 민족이 애국의 기발아래 하나로 뭉칠 때 비로소 통일은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설사 회초리를 받아도 욕을 당해도 참아내야 하며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깨우쳐서 미국놈들로부터 떼내야 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야 애국자들이 아닙니까. 참고 참고… 그리고 이겨내야지요. … 정말로 제가 선생님의 아프신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위로하여드렸으면 좋을런지 모르겠습니다.》

하며 정시명이 다시 술잔을 채워 내밀자 려운형은 그걸 정히 받아들며 목이 메여 말했다.

《정선생, 고맙소. 난 참 자꾸 걱정끼칠 일만 하는구려. 내 그 높은 뜻 페부에 새겨 받들리다. 허물이야 찾으면 빨리 도려내버려야지. 래일 서울에 온 재미교포를 만나게 되는데 돌아오는 길에 만호를 찾아가 사죄부터 하리다. 만호를 내게 맡겨주시오. 근본이야 어디 가겠소. 돌아보면 만호 그 사람도 허위단심 나라독립을 안아오겠노라 칠성판을 등에 지고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시명은 려운형이 그 틀진 거동을 허물어뜨리고 진심으로 속죄를 하자 고맙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였다. 그 어떤 세파속에서도 애국의 지조를 굳건히 지켜오는 불굴의 인간이 한점의 허물을 깨닫자 아이들처럼 얼굴을 붉히며 아무런 미련도 없이 깨끗이 잘라던지는 그 순진무구한 자세가 정이 푹 들게 하였다.

《그런데 몽양선생님, 내가 정말 선생님께 비판을 할 문제가 하나 있는데…》

《비판을?… 그건?… 햐, 어서… 정선생이 주는 초달이라면 내 달게 받을 각오가 돼있소.》

려운형이 비판이라는 소리에 당황해 하다가 어줍게 웃었다.

《선생님, 어째서 오늘처럼 복잡할 때에도 이렇게 홀로 밤길을 다니십니까. 우리가 보낸 동무들을 어데다 두고 이렇게 다니십니까?》

《엉? 허허… 난 또 무슨 큰 일이 생겼는가 했지. 원…》

려운형이 정말 정시명의 거동으로 보아 심각한 문제가 생겼나부다 하고 마음을 조였는데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자 숨을 크게 내쉬며 껄껄 웃기부터 하였다.

《싸우는게 두렵고 죽는게 겁나서야 무슨 일을 치겠소. 그러면 이 몽양이 몽양구실 다한거라… 난 지금도 미국놈이 노는 꼴 보기가 하도 쑤악스러워질 때면 산에 들어가 빨찌산의 한 전사로 후련히 불질을 하다가 죽을 생각도 해본다오. 죽을 때면 죽는거라, 허허…》

려운형은 여전히 만사를 초탈한듯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방안이 떠나갈듯 장쾌하게 웃는다.

그러나 정시명은 그 웃음이 더욱 불안스러웠다. 벌써 이 사람은 무엇인가 닥쳐올 불행을 예감하고 각오하고있는듯 하다.

정시명은 절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몽양선생님, 물론 우리는 필요할 때는 목숨을 돌멩이처럼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을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몽양선생님이야말로 민족의 귀중한 재산이라는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일감이 선생님의 어깨에 맡겨져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중간세력을 하나의 애국대오로 묶어내야 하며 통일대업에 관심이 있는 우익민주주의세력도 애국의 기치아래 단결하여 미국놈들과 반통일적인 매국집단에 맞세워놓아야 합니다.

그 기발을 몽양선생님이 들어주셔야 합니다. 그런즉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면 우리의 통일대오가 그만큼 약화되고 나라의 재난이 그만큼 커진다는것을 명념해주십시오.》

《허허허… 맡겨주시는 소임은 내 해내리다. 하지만 자꾸 날 그렇게 구름우로 몰아가지 말아주시오. 내 이제 회갑을 지낸 몸이요. 늙마에 로환에 구차스레 죽느니 투사답게 전쟁터에서 절명하는게 소원인줄 아시오.》

려운형이 여전히 웃으며 장부답게 퉁퉁 대답을 한다.

정시명은 안타까운 눈매로 그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신의 안위에 대하여서는 관심이 없는 이 열혈의 우국지사에게 더없는 믿음과 사랑과 존경이 갔다. 이렇듯 드높은 기개가 있고 나라에 대한 헌신이 있어 그를 사람들이 아끼고 따르는것이 아닐가. 그러나 그럴수록 그를 위해 가는 바람 오는 바람 다 막아주며 그에게로 날아드는 흉탄을 제몸으로 받아주고싶은것이 정시명의 간절한 심정이였다.

정시명은 그에게로 다가가 손목을 잡았다.

《몽양선생님, 나는 걱정스럽습니다. 부디 신변에 류의하여주십시오. 선생님은 이미 로출된 몸이고 노리는 놈들도 많습니다. 나라위해 더 오래 사셔야 합니다. 민족이 사랑하는 몽양선생의 신상에 불상사라도 생기면 우리 김일성장군님께서 애통해하실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제가 전일에 장군님을 뵈웠을 때 선생님의 신변에 대해 무척 걱정하시였습니다. 나는 려선생님이 자기 한몸을 우리의 통일위업의 귀중한 밑천으로 아끼지 않는데 대하여서는 참을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마디마디가 뜨겁고 간곡한 질책에 려운형은 그만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굽이 축축히 젖어들었다.

어느해 어느 시절 어느 누가 독립전에 바쳐진 자기 몸을 두고 이렇게도 다심하게 쓰다듬고 념려하였던가.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들자고 속삭이던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가슴을 달군다.

려운형은 젖은 수건으로 눈굽을 닦아냈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눈귀에는 또 맑은것이 맺혀오른다.

그는 정시명의 따뜻한 손에서 두손을 뽑고 부들부들 떠는 두팔로 그를 꽉 그러안았다.

《정향동지!》

《려운형동지!》

《내 오래오래 살렵니다. 오래 살면서 장군님께 더는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가렵니다.》

《민족의 재결합을 볼 때까지 우리 절대로 죽지 맙시다.》

《오래오래!…》

두 사람은 서로서로 굳게 껴안은채 오래동안 떨어질줄 몰랐다.

 

그것은 늦은 저녁을 치르고 난 뒤였다.

비보를 안고 뛰여나온것은 마동열이였다.

《정선생님! 이 일을 어찌합니까!》

마동열이 몸을 떨며 부르짖었다.

《웬일이요? 무슨 일이요?》

정시명은 아직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억대우같은 마동열이 몸을 부르르 떠는 절통한 모습에서 가슴이 왈칵 무너져내리는 선뜩한것을 느끼며 다그쳐 물었다.

《몽양선생님이… 몽양이 돌아가셨답니다.》

《뭐야?!… 그건 무슨 새빠진 소리! 어… 어제저녁에 헤여지지 않았는가.… 아… 니…》

정시명이 너무 뜻밖의 재변에 당하여 온몸이 굳어져서 말까지 더듬거렸다.

《몽양선생댁에 파견된 동무들이 흥국상회에 와있습니다. 성북동에 가서 재미교포를 만나고 오다가 대낮에 혜화동로타리에서 총탄에 맞았답니다.》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아- 몽양… 몽양이 잘못되다니… 가보기요. 청년들을 만나야겠소. 어째서 몽양을 쓰러지게 했는가. 마동열! 어느 놈이 감히 그따위짓을 했대? 도대체 그 사람들은 숨이 붙어있으면서 몽양을 떠나게 한단 말이야? 이게 어디 당한 일인가!》

정시명은 너무도 절통하여 두서없이 부르짖고 방을 나섰다.

… …

경무대관저에서 려운형을 바래워준 하지는 그가 탄 자동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즉시 노불을 불러 려운형을 처리하라고 명령하였다.

려운형을 처리할데 대한 비밀지령을 받은 노불이 서울경찰청장 장택상을 불러들인것은 자정이 썩 지나서였다.

장택상은 명령을 받자 겁부터 더럭 났다. 지금까지 려운형에 대한 테로를 여러번 직접 조직하고 지휘하였지만 매번 노불은 절대로 생명을 끊어놓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공산권에로의 지나친 접근을 경고하는 정도의 겁을 주라는것이였다.

그런데 그를 완전히 제거할데 대한 명령에 접하자 그 후과부터 생각되여 속이 후드득해졌다. 려운형이 비록 좌익에 기울어져있는것은 사실이지만 그 인간의 비범성에 대하여서는 좌우익이 다 탄복하고 사랑하고있다.

장택상도 려운형을 오래전부터 잘 알고있었다.

노불은 장택상의 입술이 바르르 떠는것을 보자 노랑눈알을 굴리며 거침없는 조선말로 쏘아붙였다.

《미스터 장, 당신이 뭐 이런 일을 한두번 치뤘는가?》

손에 피칠을 한 주제에 이제 선인으로 남아있을것 같으냐 하는 뒤말이 깔려있다.

《글쎄요.…》

장택상이 천추만대에 저주받을 악역을 맡아야 하는것이 기가 차서 우물쭈물하였다. 그러나 죄악의 수렁창에 발을 들여민 장택상이 제 마음대로 발을 뽑기는 힘들게 되였다. 발을 뽑는 길은 죄악의 비밀보따리를 둘러메고 황천으로 가는 길이다.

장택상은 랭소를 담고 반들거리는 노불의 노랑눈에서 그것을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하는수없이 장택상은 《예.》하고 낯빛이 새까맣게 질려가지고 도망치듯 황황히 자리를 떴다.

려운형에 대한 테로는 이미 여러 깡패집단들에 조직되여있었다. 그들이 필요할 때면 《적당한 범위》에서 려운형의 신변을 위협하고서 비밀보조금을 받고 서약서에 지장을 찍고는 해체되군 하였다.

노불에게서 물러난 장택상은 이번 거사는 악질월남자들로 조직된 《백의사》두목 신동운에게 맡겼다.

신동운의 지휘밑에 암살단놈들은 이날 아침부터 려운형을 검질기게 따라 다니기 시작하였다.

려운형은 이날 오전에 이미 정시명에게 말한대로 성북동에 있는 호텔에 가서 재미조선사정협의회 회장과 만나 미국인들속에 조선의 분렬위험성을 널리 선전해줄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점심까지 함께 치르고는 김규식에게 들리려고 인차 호텔을 나섰다.

자동차가 혜화동의 로타리에 이르러 속도를 죽일 때 대기하고있던 한 악당이 정면에서 권총사격을 가하였다. 세발의 총성이 련방 울렸다. 두발의 총탄이 가슴과 어깨를 관통하였다.

자동차는 경성대학병원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려운형은 절명하고말았다.

려운형은 소원대로 통일대업을 위한 전장터에서 투사로 쓰러졌다.

 

효창공원으로 이르는 큰 도로가 소복단장을 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있었다.

려운형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뤄지고있었다. 서울시민들은 이날 슬픔에 잠겨 민족이 낳은 자랑스러운 영웅과 영결하였다.

앞에는 상복을 입은 가족친척들과 호상객들이 고개를 떨구고 무겁게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가족들의 곁에는 김명호와 근로인민당의 지도인물들인 백남운, 리영이 나란히 걸어갔다. 그뒤로 김구, 김규식의 얼굴도 보이고 홍명희, 리극로의 눈물어린 모습도 보였다.

베감투를 쓴 리승만도 묵묵히 걸어가고있다.

하지와 브라운의 상통도 보였다.

피끗 스쳐보면 모두가 비애에 젖어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 슬픈 표정에 가리워있는 속통들은 한결같지 않다.

백남운, 리영은 지금 슬픔속에서도 고인의 유지를 어떻게 받들어나가겠는가 하는 근심이 산같다. 려운형이 쓰러지자 벌써 당내부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3거두지도체계를 없애고 당수제를 내오자거니 중앙기구를 재조직하자거니 《좌우합작》에 대한 전당적인 토론회를 조직하여 당론을 재확정하자거니 별별 소리가 다 들린다.

이게 려운형의 사망으로 초래된 바람세다. 그 사람이 앉아있다면 어림도 없다. 백남운, 리영은 이런 생각만 해도 려운형의 급사가 애달프고 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조객들속에서 생각이 제일 복잡한 사람은 김규식이다.

김규식은 어느날 호상을 와서 밤샘을 하면서 김명호로부터 전날에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전해들었다. 자기가 하지에게 려운형의 탈퇴선언을 통보해준 후 려운형이 경무대에 불리워갔다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가 따지고 들고 위협도 했다 한다.

려운형의 피살은 분명 하지의 작간이다.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충동질한것이 내가 아닌가. 하지에게 당초에 그 사람을 되게 다불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저 오랑캐놈이 이토록 엄청난짓을 벌려놓다니… 아, 그러니 내가 저 몽양을 비명에 넘어뜨리지 않았느냐. 그는 만호를 찾아가 사죄를 하겠다며 그 사람은 자기가 맡겠다고, 근본이야 어데 가겠느냐고 했다는 말도 전해들었다.

지금 려운형이 자기 손목을 꼭 잡고 그 얘기를 유언으로 넘겨주는것만 같다.

(에잇 몽양, 이렇게 가다니.… 내 이제 저승에 간들 자넬 무슨 낯짝에 만난단 말이요. 이 만혼 천댈 받아 급살할 놈이야. 아, 몽양!…)

지금 김규식은 반넋이 나가서 닭똥같은 눈물을 떨구며 열번 스무번 사죄를 곱씹고있었다. 그저 이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을 하고싶다.

리승만의 속통은 가볍기 그지없다. 일찌기 상해에서부터 죽기내기로 맞서던 려운형이 쓰러진게 꼭 쏘던 어금이 뽑은것처럼 시원하다. 원래 이 행렬에 끼울 생각조차 없었는데 비서실장 윤치영이 국민정서를 고려하여 꼭 나가야 한다고 건의해서 마지못해 나왔다. 그는 입을 쭉 내밀고 눈두덩이도 무거운듯 반쯤 내리감고 걷고있었는데 더위때문에 당장 숨이 막힐것 같다. 게다가 속은 후련한데 상통에 부러 지어내는 구슬픈 낯색으로 효창공원까지 이어진 10리구간을 내처 걷자니 그것 역시 베찬 일이다. 이따금 고개를 푹 떨구고 안면근육을 통쾌한 심정으로 활짝 펴보고는 다시 슬픔을 강짜로 지으며 얼굴을 들군 한다. 생각같아서는 려운형이 누워있는 상여를 딛고 서서 한바탕 만세라도 부르고싶다.

하지는 하지대로 생각이 복잡하다.

그놈은 살인사건의 장본인으로서 그 수습을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생각에 골몰하고있었다.

서울장안은 물론 남조선전역이 려운형의 살인사건을 놓고 움씰움씰거리고있다. 여기저기서 한시바삐 사건진상을 공개하라는 소리가 비발치고있다.

미군병영들과 경찰서들이 청년들의 돌세례를 받는가 하면 야산대들은 《려운형추모주간》을 설정하고 복수전을 벌리고있다.

급해맞아 우선 살인자인 리섭동을 잡아들여 북에서 려운형을 암살할데 대한 임무를 받고 내려온 한지근이라고 발표해버리게 했으나 그게 통할리 만무하다.

(어떻게 해야 미국에 튀여오는 불티를 막을것인가?)

하지는 가뜩이나 더운날에 이 생각때문에 더욱 비지땀을 짜며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10리 도로를 메운 수십만 장례행렬은 이 모든 눈물과 분노와 고민과 꿍꿍이를 걷어안은채 력사에 굵직한 자국을 찍고 장렬하게 쓰러진 이 나라의 영웅호걸을 앞세우고 서서히 흘러가고있다.

수많은 만장과 조기가 행렬우에 수풀처럼 솟아있다.

《몽양. 몽양. 우리의 몽양!》

《민족의 영웅 몽양선생님. 우릴 버리고 어데로 가시옵니까?》

《몽양! 그대는 삼천리강토와 더불어 영원하리》

《몽양선생님, 민족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만장에 씌여있는 글발마다에 겨레의 한과 슬픔이 피방울처럼 맺혀보는 이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정시명은 이 시각 마동열과 함께 효창공원의 뒤산에 올라 도로를 꽉 메운 인파를 두툼한 입술을 꽉 물고 내려다보고있었다.

벌써 며칠동안 정시명은 그의 령구옆에 나선 심정으로 마음속에 려운형과 나란히 하고 울고웃으며 낮과 밤을 이어왔다. 손을 맞잡고 오래오래 살면서 나라에 충신으로 살자고 언약을 다졌던 그 밤이 바로 며칠전이다.

《정향동지!》하고 얼싸안고 더운 숨을 얼굴 가득히 끼얹어주던 그 정든 얼굴이 선하다. 그 밤에 우리가 동지로 벗으로 사귀지 않았던가. 삶의 희열을 함뿍 머금은 불덩이같은 눈이 지금도 가까이에서 번쩍거리는것 같다. 거짓과 허위를 모르는 그 흑진주같은 눈을 보면서 얼마나 커다란 환희속에 황홀한 꿈을 꾸었던가.

그것은 돌아서면 거품처럼 이내 잦아드는 환희가 아니요, 깨여나면 쉽사리 잊혀지는 꿈이 아니였다. 이 나라의 분렬을 막고 겨레의 머리우에 태양의 광휘로운 빛을 안아올 꿈이고 희망이고 환희였다. 그것은 피의 언덕에 함께 나설 꿈이였고 생사를 함께 하고 삶의 노래를 함께 부를 열렬한 사랑의 약속이였다.

그런데 그 대망의 꿈이 며칠도 지탱하지 못하고 이렇게도 무참히 짓밟히다니.

여러번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만나볼수록 정이 가고 믿음이 가고 기대가 커지던 거인이 속세를 떠나 저렇게 고별의 슬픔에 묻혀 하늘나라에 가까이 가는게 그냥 믿어지지 않는다. 그가 들려주던 이야기들이 어느 마디도 잊혀지지 않고 그냥 고막을 흔들고 심장을 울린다. 마디마디가 나라와 겨레에 대한 헌신과 충정이 쇠물처럼 이글거리는 금언들이다. 자기의 인생에 대한 긍지와 앞날에 대한 자신감에 넘쳐있으면서도 사리사욕이란 한가닥도 보이지 않던 그 흰눈같은 인간이 또 있으랴.

번개를 안고 우뢰처럼 살아온 인생이다. 뒤를 돌아보며 울지 않고 앞을 내다보며 웃으며 살아온 영웅호걸이다. 불의앞에서는 천둥번개처럼 무섭게 노호하고 벗들앞에서는 자기 속마음을 비단결같이 곱게 해서 깡그리 넘겨주는 아름다운 인간이다.

이 남녘에 저처럼 강직하고 도량이 크고 아름다운 넋이 다시 나타나줄가. 저렇듯 나라앞에서 사심이 없이 일로 매진하는 참된 성인이 다시 이 남녘민중의 머리우에 혜성처럼 나타나줄가.

아, 어찌하여 이 나라는 저같이 충직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을 지켜내지 못했느냐.

민족이 당한 비극적수난이 다시금 심장을 마구 란도질하여 갈기갈기 찢어내는것 같다.

(내가 죄를 졌다!)

쓰라린 상실과 슬픔속에서 정시명은 지금 이렇게 속깊이 울부짖으며 터져나오는 오열을 참아내느라고 주먹으로 입을 꽉 누른다.

그의 신변에 닥쳐든 위험을 벌써 나는 오래전부터 알지 않았던가.

신변에 류의하라는 말을 듣고도 호걸장부답게 통쾌히 웃음을 터뜨리던 모습이 그냥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 웃음을 두고 제할바를 다해야 될것이 아니였더냐. 하지놈의 그 상서롭지 않은 위협이 가져올 이 엄청난 비극을 미리 막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될것이 아니였느냐.

몽양이 자리를 비우면 통일은 그만큼 멀어진다고 이야기해주면서도 내 속수무책이였으니 나라앞에서 나야말로 죄인이로구나. 저런 옥같은 인간을 끝내 지켜내지 못하고 이 정시명이 어찌하여 서울장안에 버티고있는것이냐.)

정시명은 려운형의 비명횡사가 이 나라의 통일대업을 한걸음 크게 머뭇거리게 한것처럼 생각되였다. 그럴수록 살을 저며내는듯 한 아픔을 금할수 없었다.

당장 펼쳐놓은 정치전이 좌절의 위험을 받게 되였다. 려운형의 패기와 담력과 실력을 누가 대신해주며 근로인민당을 이끌고 애국세력을 묶어세울만 한 동량감을 어디서 찾아낸단 말인가.

참으로 통일이란 저처럼 나라 위해 살아가는 인간들이 많아질 때 이루어질것이 아니냐. 그래서 미국놈들이 민족의 머리우에 우뚝 솟아오른 저런 거목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악을 쓰고 덤비는것이 아닌가.

어제저녁 정시명은 평양방송을 통하여 김일성장군님께서 려운형의 서거에 즈음하여 손수 추도문을 발표하시고 고인의 유가족들에게 조의를 보내시였다는 소식을 들으며 다시한번 가슴을 두드렸다.

겨레가 당하는 슬픔을 다 그러안으시고계시는 그이께서 려운형의 비보에 접하시고 얼마나 절통해하시겠는가.

려운형에 대하여 그리도 따뜻한 추억을 들려주시던 그이의 자애에 겨운 모습이 삼삼히 떠올라 정시명은 더욱 가슴이 타들고 쓰려왔다.

그는 흉벽에 부딪치며 마구 태질하는 통곡을 누르고 입술을 아이들처럼 푸들푸들 떨며 입속으로 나직이 아뢰였다.

(장군님, 어쩌면 좋습니까.

제가 뜻을 받들지 못하여 장군님께서 총애하시는 통일대업의 귀중한 동량지신을 쓰러지게 했습니다.)

… …

장의식이 있은 후 음모자들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는 날을 따라 거세여졌다.

이렇게 되자 장택상은 리섭동을 미국에 보낸다는 담보를 해주고 재판정에 나서게 했다.

노불의 각본에 따라 부랴부랴 《재판》이 열렸다.

살인자로 재판정에 나선 리섭동은 자기가 20일전에 월남하여 《백의사》에 가담한 올해 17살나는 한지근이라고 그냥 뻗치면서 북의 지령을 받았다고 진술하였으나 앞뒤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거짓말을 수없이 늘여놓아 사회계의 집중포화를 받게 되였다.

놈들은 리섭동을 미성년범죄자로 날조하여 무기징역형을 구형하고 소년기결수감방에 처넣음으로써 이 사건을 흑막속에 덮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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