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통일은 어디서 시작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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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알같이 굵은 비방울이 창을 후려치고있었다. 이따금 안개가 시뻘건 불줄기로 하늘을 가르고 뒤따라 우뢰가 무섭게 꽈르릉거린다. 그때마다 너렁청한 흥국상회 사장실의 창유리가 부르르 떨고 밟고있는 마루바닥이 찡 울린다.
《가을장마가 걷힐 때가 되였는데…》
연기가 몰몰 오르고있는 곰방대를 입귀에 물고 시꺼먼 구름장들이 도망치듯 분주히 오가는 하늘을 쳐다보던 정시명이 혼자소리로 중얼거리였다.
그의 앞에는 방금 들어선 안지생이 수건으로 비에 함뿍 젖은 얼굴을 벅벅 닦으며 처음 들어선 사장실을 둘러보다가 흘끔 눈길을 돌려 정시명의 안색을 살피고있다. 어지간히 긴장한 표정이였다.
정시명은 그가 젖은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은 다음에야 곰방대를 재털이에 툭툭 털고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서울에 와서 그동안 마동열을 통해서만 련계를 가졌는데 정시명이 직접 호출하기는 처음이였던것이다. 정시명은 김구, 김규식과의 사업은 자신이 맡기로 하고 이날 안지생을 찾았던것이다.
《비옷을 쓰고 앉지. 고뿔에 걸리겠소.》
《일없습니다. 한바탕 소낙비를 맡고보니 한강에 나가 자맥질을 한것만큼 시원합니다.》
안지생이 처녀처럼 생글거리면서도 어서 과업을 달라는듯 눈빛이 예리해진다.
《그럼 좋소.… 지생이는 김구와의 사업을 좀 생각해봤소?》
정시명은 롱기어린 눈을 반짝이며 자기를 쳐다보는 안지생을 사랑스럽게 지켜보며 이렇게 말을 떼였다.
《김구를 애국의 편으로 돌려세우는것이 최종목표요. 그냥 미국놈의 곁에 세워둘수야 없지 않소.》
《예? 김구를 돌려세운다구요?!》
안지생이 껑충 놀라 한길 뛴다. 당초에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는 심산이였다.
정시명은 그의 반응을 미리 짐작하였던지라 안지생의 놀라움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며 가볍게 웃었다.
타고난 반공투사로 자처하는 김구의 행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안지생이였다.
8.15직후에 김구가 남북조선의 혁명세력에 집요하게 도전해나설 때 안지생이 거기에 제동을 걸어보려고 여러모로 마음을 썼으나 종시 김구의 고집을 꺾을수 없었다.
김구의 그러한 망동의 근저에는 물론 지난날 공산주의운동을 말아먹고 항일운동에 적지 않은 혼란과 장애를 주었으며 민족주의세력에 대한 무분별한 배척과 모해를 감행하여온 종파분자들에 대한 뿌리깊은 환멸과 원한이 놓여있었다.
거기에 새로운 시대적조류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김구의 력사적감각을 무디게 했다.
안지생도 이에 대하여 잘 알고있었지만 그가 우려하는것은 다른 문제였다.
김구가 혁명앞에 저지른 죄를 어떻게 타협할수 있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김구는 돌아서야 할 사람이요. 우리의 애국대업이 그것을 요구하오.》
정시명이 결론부터 내놓자 안지생은 눈을 가느스름히 내리감으면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내키지 않는 대답이였다.
정시명은 감수성이 빠르고 언제나 진취적인 안지생이 선뜻 조직의 지시를 받아안지 못하는것을 보자 이 일의 어려움을 더욱 절감하였다.
우선 안지생이나 전우들의 사고방식부터 돌려세워야 할것 같다. 우리가 무엇때문에 통일운동에 나섰는가. 이것부터 깊이 깨달아야 한다.
정시명은 방도를 협의하려고 당초의 계획을 뒤로 미루고 필요성과 가능성문제를 가지고 이미 정리되여있는 생각들을 다 털어놓았다.
여러시간이 지나서야 안지생이 《해보겠습니다.》하고 대답은 했으나 여전히 뜨아해하는 빛을 다 지우지는 못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게 쉽지 않지. 그건 하나의 예술이라고도 할수 있소. 그러나 순차를 뛰여넘어 받아물지 못할 요구를 처음부터 들이대지 말고 서서히 움직여야 하오. 나무뿌리로 말하면 김구는 해묵은 그루터기지. 썩어서 부스러질건 부스러져도 그안에 있는 속대는 굳어질대로 굳어져있소.
그게 뭔가 하니 우국충정이요. 여기에 불을 질러야 하오. 김구가 공산주의에 빚진것이 많지만 〈공산주의자〉들도 그들앞에서 빚진게 많소. 그러니 옛날이야기로 시야비야하지 말고 그 인간의 나라걱정부터 귀하게 여겨주고 빛이 나게 해주자구.》
안지생은 여전히 말없이 고개만 끄덕끄덕거리였다. 정시명의 말이 다 리해되고 공감은 갔으나 아직도 심장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마음의 실토였다.
안지생이 이제 나이가 스물을 갓 벗었지만 말그대로 외유내강한 인간이다.
처녀처럼 귀여워보이고 생글거리는 웃음을 가볍게 판단하고 허투로 대하다가는 누구라도 경을 친다. 아마 맑스의 자본론을 가지고 론쟁을 벌리면 안지생을 당할 사람이 없을것이다. 안지생이 《림정》의 늙은 두령들을 내키는대로 휘동해내는것이 우연이 아니였다.
《잘해보자구. 이 사업은 내게 분담되였소.》
정시명이 이렇게 말해서야 안지생이 긴장을 풀며 일어났다.
이튿날부터 정시명에게 전해오는 안지생의 보고는 그전보다 내용이 달라졌다. 지난날의 보고자료들에는 자료마다에 고집스럽고 심술사나운 김구의 얼굴만이 그려져있었다면 이제부터는 그옆에 안지생의 대바르고 귀염성있는 얼굴도 그려져있었던것이다.
김구와의 담화.
《선생님은 어째 림정사람들을 뿔뿔이 헤쳐지게 합니까?》
《어떻게 하겠나. 각자 제 갈길을 가는걸.》
《리승만은 한사람이라도 자기 편에 더 끌어들이기 위해 아득바득 애쓰고있는걸요.》
《리승만?… 난 그 량반처럼 자파확장을 떠들며 요사를 떠는 사람이 아니야. 하와이에서 꼬아리장사나 하면서 미국놈의 식객이나 한 주제에 일국수뇌가 되여보겠다구? 오죽했으면 우리 림정이 국무회의를 열어 그 좀스러운 돈벌레를 쫓아버렸겠나. 원체 리승만을 초대대통령으로 내세운것이 우리 림정의 최대의 수치였어.》
《리승만은 그렇다고 하고 한민당을 보십시오. 력량이 계속 늘어나고있답니다.》
《그 쪽발이들의 삽살개들이야 돈줄을 쥐고있으니 그럴수밖에. 하지만 백범은 명실공히 정통정부의 주석이야. 제땅잃고 떠살이하면서도 이 나라의 법통을 지켰는데 광복된 제땅에 와서 그걸 내놓을가.》
《그러니 문제가 아닙니까. 지금처럼 선생님의 주위에서 하나둘 떨어져나가면 장차 누가 선생님을 지지하여 주먹을 들어주겠습니까.
리범석이 얼마나 많은 림정식솔들을 걷어안고 나갔습니까. 리청천이 그렇지요.
더는 림정사람들을 놓아버려서는 안됩니다.
이제라도 김규식선생님과 손을 잡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김규식이?… 좀 생각해 보자.…》
어느날 안지생이 보내온 자료겉봉에 그려진 연필속사를 보고 폭소를 터뜨렸다. 성난 호랑이앞에 눈이 올롱한 다람이 한마리가 앞발을 쳐들고 열심히 종알거리는 그림이였다.
정시명은 안지생의 사업정형을 극명하게 묘사한 그림을 음미하며 홀로 배를 그러쥐고웃었다.
안지생이만이 생각할수 있는 기발한 착상이였다.
그는 그림밑에 《호랑이를 움직이는 다람이》라고 써서 안지생에게 돌려보냈다.
김구와의 담화.
《선생님은 무엇때문에 지금까지도 탁치(신탁통치)를 반대하십니까?》
《자네 같은 풋내기가 그 깊은 속내를 알수 있겠나. 탁치는 외세의존이야. 조선사람 못난게 뭐가 있다고 남의 손끝에서 춤을 추겠나.》
《그래도 신문에는 모스크바3상회의결정이 꼭 그렇게 된것은 아니라고 썼던데요.》
《그게 바로 공산당의 선전이야. 자네도 상해에서 공산당패에게 적게 속아왔나.》
《장차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요즈음은 김규식선생님의 이름이 신문에 쫘하구만요.》
《허, 지생이앞에서는 나도 속을 그예 뽑아놓게 된다니. 이봐 신동이, 아직도 민의는 이 백범을 쳐다보고있네. 그리고 미국도 이걸 알고있어. 하지가 리승만을 싫어하는게 까닭이 있는거야. 이 양인들이 김규식을 내세우는건 날 건드려보자는짓이야.》
김구와의 담화, 안우생도 동석.
《북에서는 지금 강하게 쏘미량군동시철거를 주장하고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이 여겨보면 속대 굳은것이 많아. 친일파도 숙청하고 토지개혁도 하구 내인들도 골방에서 풀어놨어. 김장군이 나섰으니 쏘련사람들이 함부로 수작질은 못할거네. 외세가 없어도 우리가 해를 볼것은 없네.
그러니 우리도 정신을 바싹 차리고 정권인수준비를 다그쳐야 해.》
《우리도 의사표명을 해야지요. 민심도 미군철거쪽으로 기울어지고있습니다.》
《거야 내가 벌써 해놓은게 아닌가.》
《한마디로야 부족하지요.》
《허, 거참… 내 오늘 아침에도 하지중장을 만났는데 미국사람들이 문제거든. 당장은 어렵다는거야.… 그 말에도 일리가 있어. 자네 한번 궁리를 내놓아보게…》
※ 요즈음 하지가 대령계급장을 단 미국놈을 보내오고있다.
김구는 그놈과 김신(김구의 아들)의 통역밑에 단독으로 만나는데 그와 헤여진 다음 매우 기분상태가 좋아지군 한다. 하지가 김구에게 추파를 던지는것이 틀림없다.
어느날 안지생이 《신탁》에 대한 립장을 바꾸도록 하는것이 김구로 하여금 자기의 정치적견해를 재검토하게 하는 하나의 파렬구로 될것이라고 전하여왔다. 그러면서 좌익계의 신문글을 통해서는 김구의 《반탁》견해를 바로 잡을수 없다고 덧붙여왔다.
정시명은 길철과 이 문제를 상론하였다.
인차 미군정청 여론조사과장 연장성에게서 신탁통치와 관련한 미군정청의 극비문건이 입수되였다.
《반탁운동지도서》라는 표제를 단 그 문건은 다음과 같았다.
루즈벨트(트루맨전의 미국대통령)는 남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구상을 오래전부터 하여왔다. 1943년 12월 1일 《까히라회담》이 있은 얼마후인 《테헤란회담》에서 루즈벨트는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후견정치를 모델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문제를 제의하였다.
1945년 2월 《얄따회담》때 루즈벨트는 또다시 이 문제를 제기하고 조선에 대하여 20~50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쓰딸린은 《조선사람이 자기 정부를 스스로 수립할수 있다면 신탁통치가 필요없다.》고 반론을 폈다.
모스크바에서 미국과 쏘련은 이러한 엇갈린 주장을 내놓다가 신탁기간을 5년안으로 설정하자는쪽으로 의견이 좁혀들었다.
결국 쏘련측의 결의안에 기울어지고 말았는데 빠른 시간안에 외군의 군정제도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림시정부를 수립하여 조선인민의 자결권을 존중히 하는 방향에서 정치일정표가 제시되였다.
지금 김구를 비롯한 남조선의 우익세력이 맹렬히 벌리고있는 《반탁》은 모스크바3상회의결정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미국의 정책적목표로부터 출발된것으로서 이에 찬물을 끼얹는 언동을 일체 하지 말아야 한다.
미군정청은 정치적으로 우매한 조선의 민족주의세력의 《반탁》운동을 계속 고무추동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안지생이 기쁨에 넘쳐 뛰여왔다.
김구가 그 자료를 보더니 한길 놀라 껑충 뛴다는것이였다. 그리고 측근들에게 그 자료의 신빙성을 검토하고 즉시 보고하라는 임무를 주었다고 한다.
정시명은 김구의 모습이 방불하게 느껴졌다.
정시명도 기뻤다.
《그러면 그럴테지!》
《반탁》운동의 최선두에서 미제의 장단에 맞춰 춤추어온 김구였다. 정시명이 예견했던대로 그것은 김구의 본의가 아니였다. 외곡된 정보에 따르는 정세판단에서의 심각한 실책이였다.
그런데 그 심각한 오유가 바로 미국놈들의 조작이였다는것을 드디여 깨닫게 된것이다.
안지생은 이렇게 보고하였다.
《백범은 으르렁거리고있다. 〈그 양놈들! 심통이 바르지 않는 양놈의 새끼들. 도대체 이 늙은것을 뭘로 아는거냐.〉
어제 백범은 또다시 찾아온 미군정청의 대령을 문전에서 쫓아보내게 했다.》
연장성은 또 여러건의 자료를 보고하여왔다.
김구에게 전해졌다.
《맥아더사령부의 정치보좌관 애치슨은 미국무성에서 있은 한 회의에서 〈현재 남조선내의 분위기를 보면 리승만의 인기가 단연 으뜸이다. 리승만을 중심으로 핵심집단을 꾸릴데 대한 미국무성의 립장은 맥아더의 지지도 받고있다.〉고 하였다.
애치슨의 주장은 노불의 정황보고에 기초하고있다.
노불은 이렇게 평가하였다.
남조선에서 미국이 상대할 정치세력에서 유망한것은 〈한민당〉이다. 실업계와 유식층인 보수주의자들이 〈한민당〉의 중추를 이루고있다. 그들중 대부분은 일본과 협조한 사람들이기는 하나 그러한 락인은 궁극적으로 지워질것이다.
이들이 다수파는 아니지만 단일친미집단으로서는 아마도 가장 큰 집단이다.
그런데 특기할수 있는것은 이 정치세력이 리승만을 지지하고 그의 집권을 원하고있다는 사실이다.》
김구는 자료를 넘겨받을 때마다 일정한 회의심을 가지고 안지생이더러 출처와 진위를 깐깐히 따지고들었으나 부닥치는 현실을 통하여 그것이 진실을 담고있다는데 대하여 부정할수 없었다.
그는 뒤에서 다른 측근인물들을 내세워 재확인을 시키기도 했는데 대답은 같았다. 가슴속에 얼어붙은 응어리가 차츰 한꺼풀한꺼풀 녹아내리기 시작하였다.
안지생이 련속 들이미는 자료들은 김구의 심중에서 일고잦는 이 물리적반응을 더욱 촉진시키는 촉매가 되여 그의 굳어진 가슴을 끊임없이 뒤흔들었다.
마침내 정시명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찾게 되였다.
《김구와 리승만은 완전한 결렬도상에 있다. 김규식도 될수록 리승만에게서 멀어지려고 한다. 미국은 리승만에게 기대를 걸고있다. 김구는 미국에 차츰 반기를 들고있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는 리승만에게 집중공격을 가하는것이 필요하다.》
정시명의 제의는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따라 좌익계의 출판물들은 일제히 김구에 대한 지명공격을 중지하였다.
공격의 화살은 리승만에게 집중되였다.
이것은 김구의 태도에서 눈에 뜨일 정도의 변화를 일으키게 했다.
어느날 김구는 안지생에게 희색이 만면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보게, 자네 한번 좌익계의 방송을 들어보게.》
《왜요?》
《그 사람들이 이제는 날 리승만과 한줄에 세워놓지 않는구만.》
《그게 그리도 좋습니까. 공산주의자들이 선생님을 욕하는게 어제 오늘에 시작되였습니까.》
《그래도 리승만과 같은 치사스런 역적옆에 내 이름을 나란히 올리는게 난 정말 싫었다네. 그 사람들의 험담치고 제일 싫은게 매국노라는 말이였지. 이제는 날 그렇게 보지는 않는구만.》
《그게 민심이라는게 아닐가요?》
《옳거니. 그네들도 내가 미국사람들과 가까이하는것이 싫었던 모양이지. 하긴 을사오적들도 매국노라는 말은 싫어했지. 정신을 바싹 차리고 민심을 제때에 파악해야 돼. 우리가 현하정세에서 고삐를 늦추면 50년꿈이 나미아미타불이 될걸세.》
이 자료를 보고난 정시명은 안지생과 안우생을 함께 만났다.
자료를 여러번 훑었으나 아직도 김구라는 인간의 체질이 석연치 않았다. 민족주의라는 토양우에 솟아난 뿌리깊은 독버섯으로 김구를 몰아붙이고있지만 정시명은 거기에 쉽게 공감할수 없었다.
김구를 그렇게만 보아야 하겠는가. 김구의 체질평가를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권력을 위해서만 인생의 수난을 이겨온 인간이란 말인가. 김구라는 인간이 리승만처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그와의 사업이 필요하겠는가. 썩은 뿌리를 가진 거목은 제아무리 가지를 다듬어주고 바람막이를 해주어도 종내는 넘어져 썩고만다.
정시명은 이렇게 생각할 때마다 괴로웠다. 어떤 날에는 너무도 안타까와 그가 써낸 책도 읽고 그의 인생의 토막일화들을 되살려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날 김구와 오래 살아온 두 형제를 불렀던것이였다.
《어떻소?》
정시명은 누구라 대중없이 물었다.
안우생과 안지생은 모색도 성격도 한배속에서 나온 형제같지 않게 판판 다르다. 안지생이 언제나 상글거리고 해맑은 둥근 얼굴이라면 안우생은 좀체로 웃음을 보이지 않는 철빛의 과묵한 상이다.
《허참… 요즈음 백범이 과대망상증에 걸린것 같습니다.》
안우생이 묻는 취지를 인차 알아차리고 이렇게 대답한다.
《과대망상증이라니?》
무엇인가 그들에게서만은 가슴이 트이는 말을 듣고싶었는데 안우생의 대답이 처음부터 시쁘둥스러워 실망이 앞섰다.
안지생이 대답하였다.
《어느때는 자기 주위에서 다 떨어져간다고 우는 소리였는데 좌익의 지명비난이 중지되고 철병주장에 대한 지지여론이 커지자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되였습니다. 다시금 한바탕 집중포화를 들씌웠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건 신중한 문제지. 이제 다시 좌익이 공격을 들이댄다면 김구가 더욱 뿔이 나서 엇서나갈수도 있지.…》
안우생은 동생의 격한 주장이 념려스러운듯 조용히 반박하였다.
정시명은 안우생의 얼굴에 언뜻 비끼는 엷은 빛갈의 음영을 놓치지 않고 살피며 생각을 더듬었다. 그러니 안우생도 그 인간을 총체적으로는 사랑하고있는것이다. 김구에게 기울이는 념려는 그 어떤 리성적인 판단에 의해 생긴것이 아닌것 같다. 옆에서 관찰하고 체험한 감정의 표현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좀더 지켜보면서 백범이 현실에 대한 정확한 견해를 가지도록 하는 사업을 계속했으면 합니다.》
정시명이 아직도 사업에서 답보를 주장하는 안우생의 말이 허전하여 안지생에게 고개를 돌리자 안지생은 딴 소리를 하였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되여서는 집권도 애국애족도 할수 없다는것을 눈으로 보고 체험하게 하는것이 필요할것 같습니다.》
그 역시 큰 전진이 못되는 얘기이다. 한바탕 때리자는것을 고집하는것이다.
그들을 돌려보낸 정시명은 여전히 김구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정시명은 김구, 김규식이와의 사업에 보다 힘을 넣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어차피 김구가 반공집단으로부터 갈라져나와 진보세력권에 들어서게 해야 한다.
안지생의 말이 옳다고 긍정되였다.
자기의 정치적지반이 뒤흔들리고있다는것을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한다. 사실상 김구의 지반은 크게 약화되고 위험수위에 이르렀으나 김구가 이걸 깨닫지 못하고있다. 인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래야 김구, 김규식이 정신을 차리고 저들의 주장을 재검토할것이며 종당에는 정치적지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진보세력에 손을 내밀것이며 장차 반공으로부터 련공합작의 길에 돌아설수 있다.
정시명은 김명호를 만나 이 문제를 놓고 오래동안 협의하였다.
당면해서는 중간정당들을 하나의 진보적인 세력권으로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에 힘을 넣기로 하였다.
정시명은 의미심장한 어조로 덧붙이였다.
《말하자면 가장자리를 쳐서 보짱을 울리게 하는 방법이요. 정당들과의 사업을 다그칩시다. 중간정당들을 포섭하지 못하면 하지에게 지고 마오. 가능성은 있소. 려운형선생을 내세웁시다. 그를 주축으로 중간정당들을 하나의 련합으로 묶어세우는것이 바람직하오. 몽양은 우리가 곁에서 뒤받침을 잘하면 반드시 이 일을 감당할거요.》
《옳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려운형선생이 요즈음 기세충천해서 일을 제낍니다. 당의 체모가 잡혀지고 기풍도 바로 서갑니다. 전번에 당정치위원회에서 〈좌우합작〉문제를 놓고 반대파들이 들고일어났는데 려운형선생이 지금 맞받아 솜씨를 보이고있습니다.
지금 당전체가 움씰거리고있습니다. 〈좌우합작〉에서 탈퇴할데 대한 결정을 당수의 독선행위라고 하면서 집단탈당까지 운운하던 남도의 당지부들이 려운형선생의 정면돌파공세에 뒤걸음치다가 드디여 그의 립장에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하였습니다.
오늘낮차로 지방순회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옵니다. 오자바람으로 〈좌우합작〉에서 탈퇴할데 대한 공개선언을 하겠으니 기자회견을 준비해달라고 전화부탁을 해왔습니다. 참 정열이 대단합니다.》
김명호가 려운형을 버쩍 추켜올리는데 제 말은 한마디도 없다.
려운형을 만날 때면 김명호가 틀고앉아 당안에서 외부세력의 조종을 받는 자들을 축출하고 뼈대있는 조직사업을 해주니 자기는 마음을 놓고 일한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얼마전부터 려운형은 《좌우합작》과 관련한 당상층단의 반대파들과 지방당들의 소요를 제압하기 위하여 남조선 각지를 돌아다니며 류창한 열변으로 주의주장을 꺼리낌없이 내놓아 청중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당내부가 순결해 지기 시작한데서 힘을 얻은데 있다.
김명호의 공로가 크다.
정시명은 전우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을 담아 《하여간 김선생의 수고가 크오.》하고 짤막하게 치하하였다.
《참 부산에서 열번째의 테로를 당했다는데 다친데는 없다오?》
《네, 다행으로 무사하다고 합니다.》
《어느놈들이 한짓인것 같소?》
《뭐 뻔합니다. 려선생이 대바른 소리를 돌아가면서 하자 미국놈들이 겁을 주어 다시 〈좌우합작〉에 몰아넣으려고 그따위짓을 벌렸겠지요.》
《겁을 준다.… 허허… 그렇게만 볼게 아니요. 하여튼 곁에서 잘 돌봐드리오.》
정시명은 신중한 어조로 부탁하고 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