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통일은 어디서 시작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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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는 박정인이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정시명을 기다리고있었다.

성격이 호방하여 만사를 웃음으로 넘기군 하는 박정인은 토방에 걸터앉아 민순임과 우스개소리를 하다가 정시명의 방으로 들어왔다. 실은 정시명이 일하는 방에 불쑥 뛰여들기가 뭣하여 일부러 기척을 낸것이다.

마침 정시명은 잠시 돗자리우에 비스듬히 누워 안정을 하면서 이날에 진행한 사업들을 곰곰히 돌이켜보고있었다.

리승만과의 담화는 구역질나게 하는 인상만 남겼다. 그러나 극우익의 왕초라고 할수 있는 리승만을 직접 만나 역적으로서의 체질을 눈으로 재확인한것만으로도 성과가 있었다.

《정선생, 시간이 좀 있겠습니까?》

《아, 어서 들어오십시오. 박선생이 나더러 시간이고 뭐고 물으실게 있습니까. 어서 여기 와서 앉으십시오.》

정시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그에게 방석을 권했다.

례영이 얼른 재털이를 말끔히 가셔가지고 들어왔다.

《내 한가지 소청이 있어서 왔수다.》

《말씀하십시오.》

《다름이 아니라 요즈음 정선생이 바쁘게 지내시는동안 내나름에도 좀 사업을 했수다.》

박정인이 이렇게 말을 떼고는 사업이라는 말이 자기 생각에도 멋적은듯 가벼이 소리내여 웃었다.

《허허허… 박선생이 대단합니다. 그래 어떤 사업입니까? 어서 들어봅시다.》

박정인은 며칠전에 한 청년이 찾아왔기에 만났는데 첫눈에 개체가 아주 똑똑해 보이더라는것이다. 그래 좀 교양을 했으니 한번 만나는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시명은 박정인이 조심스럽게 내비친 말을 듣자 어쩐지 얼음덩이라도 삼킨듯 선뜩한 느낌을 받았다. 놈들의 간계일수도 있지 않는가. 놈들이 박정인의 선량한 마음을 리용할수도 있다.

어느새 정시명의 표정에서 그의 속마음을 엿본 박정인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신의주태생인데 이끌어주면 훌륭한 청년이 될것 같수다. 결패가 있어보이고 진짜배기인것 같은데…》

박정인이 제기한 김형서라는 청년은 《신의주학생사건》에 참가했던 스물셋에 나는 청년이였다.

박정인의 간청을 무시할수 없어 정시명은 다음날 점심무렵에 서울 장춘공원의 들메나무밑에서 그를 만났다.

보통키에 다부져보이는 젊은이였다.

《젊은이는 무엇을 요구하오?》

정시명은 청년의 활달한 성격과 침착하면서도 리지가 풍기는 거동이 어쩐지 호감이 들어 미소를 담고 짤막히 물었다.

《저를 믿으십니까?》

《아직은…》

정시명은 청년의 데설궂은 물음에 여전히 너그럽게 웃어보이며 도리질을 하였다.

《저를 믿지 않는분에게 어떻게 자기 속을 털어놓을수 있겠습니까?》

정시명은 상대가 박정인의 소개말대로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한발 늦추어 주었다.

《나는 박정인선생을 존경하오. 하지만 젊은이는 어떤 믿음도 아직 내게 주지 않았소. 그런데 아직 얼굴도 익히기전에 그걸 요구하니 좀 무리가 아닐가. 목이 마르다고 우물을 들어 마시지야 못하지 않는가. 모든것이 순차가 있는 법이거든.》

《좋습니다. 선생님을 믿고 제 속을 털어놓으렵니다. 까짓거… 이 남쪽에서 속히우며 두해를 살아왔는데 한번 더 속아본다고 크게 허물이 될것도 없습니다.》

정시명은 청년의 솔직하고 어떻게 보면 천진스러울 정도로 가식이 없는 마음씨와 사내다운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말해보오. 사람이 사람을 믿는것보다 사실은 더 복스러운게 없소. 믿음을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은 진실이요.》

《나는 북에 넘어갈걸 희망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무엇때문에?》

《서울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정시명은 상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눈길이 날카로와졌다. 최근에 입수한 자료들은 곳곳에 생겨난 우익계의 정탐, 테로집단들이 공화국에 제놈들의 첩자를 파견하여 살인, 방화, 파괴, 정보책동을 벌리고있다는것을 고발하고있다. 적들이 혁명조직의 보증으로 침투하려고 시도할수도 있다.

정시명은 얼굴에서 웃음발을 지우고 엄숙히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신의주란동에 참가하였소? 무엇때문에 남으로 도망쳐왔소?》

《선생님은 평생을 옳게만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혹 후회되는 일은 없었습니까?》

《뭐?!… 이것 봐라…》

정시명은 자기도모르게 또다시 웃음이 나갔다.

당돌한 청년이였다. 더욱 구미가 동하고 사랑이 갔다.

(매워야 고추지. 여문 밤알일수록 까기는 힘들어도 맛은 더 있는 법이다.)

정시명은 이렇게 생각하며 그의 담기가 어린 물음에 허심하게 대답을 주었다.

《흠… 그렇지, 후회되는 일이 많지. 사람은 기계가 아니니깐. 아니 기계도 고장이 생기는 법이거든.》

《우리 집은 부자집이였습니다. 나는 공산주의를 민족을 무시하는 주의로 알았고 공산당의 로선은 광복된 조국을 쏘련에 팔아먹는것이라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신의주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장군님의 연설을 직접 들었습니다. 생각을 고쳐하게 된 저는 집에 박혀서 처음으로 맑스와 레닌의 저작들을 읽었습니다. 공산당신문도 열심히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자기를 뉘우치기 시작할 때 동료들이 련이어 보안서에 붙잡혀갔습니다. 나는 리성을 잃었습니다. 분별없이 남으로 뛰여오고말았습니다.》

《이제 돌아가면 보안서가 회계를 치르자고 할텐데…》

《예, 각오합니다. 벌을 주면 받으렵니다.》

《벌을 주면 받는다?… 그건 좋은 품성이야. 사람이 살아가며 지은 죄를 감추고 살면 죄는 자꾸 커져서 나중에는 거기에 깔려서 일어날수가 없지. 더구나 나라앞에 죄를 지으면 제때에 벌을 받아서 깨끗이 허물을 지워야 하는거요. 그래 자넨 자기가 지은 죄를 어느 정도의 벌로 갚아야 할것 같은가?》

《난 주동인물이였으니 가볍지는 않을겁니다.》

《주동인물이였다면 이 남쪽땅에서는 환영받을만 한데… 듣자니 신의주학생소요의 주동인물이였다는 장도영은 경비대사령부에 들어가 어깨에 무거운별을 올려놓고다닌다고 하던데…》

《나도 그런 권고를 받지 않은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산것만큼 더 살아야 합니다. 난 자기를 바쳐 아까울것이 없는 제도라면 죽기를 겁내지 않고 그걸 위해 바치렵니다. 청춘시절에 모르고 지은 죄때문에 일생을 마음에 없는 일에 던지고싶지 않습니다.

소식을 들으니 우리 형도 북조선의 중요기관에서 사업한답니다. 언젠가는 동생이 돌아올것이라고 보안서에 가서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박선생을 찾아왔소? 젊은이는 비행학교도 졸업하였겠다, 권투도 하고 유술도 꽤 한다는데 장사치들도 활개치며 다니는 38선이야 뚫지 못하겠소?》

그 말에 김형서는 인차 대답을 하지 못한채 아지랑이에 가리워 아슴프레하게 보이는 삼각산마루를 잠시도록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정시명의 묻는듯 한 눈길에 다몰린듯 말을 이었다.

《사실 저에게는 처녀동무가 생겼습니다. 웃지 마십시오. 제주도태생인데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던중에 려수항쟁이 터졌습니다. 부모와 어린 동생들이 다 죽었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정신을 잃고 한강에 뛰여들었습니다. 마침 그때 저는 그 근방에서 하역작업을 하고있었습니다. 세상일이 왜 이리도 뒤죽박죽입니까?》

불찌같은것이 튀여나오는듯싶던 두눈에서 명민하고 어글어글한 빛이 삽시에 꺼지면서 눈귀에 맑은것이 맺혔다.

정시명은 저도모르게 정의감이 있고 의협심이 있는 사내의 두손을 꼭 잡아주었다.

《울지 마오. 울지 마오.》

정시명도 어쩐지 목구멍이 확 더워왔다.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패이는 이러한 마음의 상처를 말끔히 가셔주기 위하여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이 세상에 태여난것이 아니겠는가.

일찌기 집을 떠나 이국의 설한풍에 막막한 가슴을 적시던 이국살이가 떠올랐다. 물을 떠나 고기가 살수 없듯이 사람이란 나서 자라난 고장을 떠나서는 어차피 마음 편히 살수 없게 돼먹은것 같다. 압록강을 건넜던 그 아득한 날부터 어느 한시도 고향을 잊은적이 있었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그리지 않은 낮과 밤이 있었던가.

지금 이 젊은이가 그리는 고향에 대한 련민은 자기보다도 더 복잡하고 고통스럽고 절박한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제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자기도 기어코 함께 데리고 가달라고 합니다. 나를 기다리는게 부모형제들만이 아니라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뭐 그렇다고 약속한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두고서야 어떻게 서울땅을 떠난단 말입니까. 그래서 안전하게 38선을 넘을수 있는 길을 찾자고 박선생을 찾아오게 되였습니다. 돈도 좀 빌려쓰려고요.… 박선생이 서울장안에서 마음씀씀이 바른 부호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래, 처녀들이 다니기에는 38선이 험하겠지.》

《좀 알아보았는데 요새 38선문이 예전보다 썩 무거워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이 생기면 일본에 갔다가 중국쪽을 우회하여 들어갈 생각입니다.》

정시명은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자기 생의 목표를 새롭게 정립해보려는 그 리성적인 사고, 정의와 진리에 대한 불같은 갈망과 결단성있는 행동력, 불의에 대한 분노와 인간이 당하는 비극에 대한 깊은 동정, 슬픔과 환희, 비애와 기쁨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할줄 아는 지력 그리고 순결한 젊음이 내뿜는 열정과 매력이 정시명을 크게 흥분시키고 공감을 불러일으켰던것이다.

정시명은 이날 김형서를 데리고 모나리자다방에 가서 간단한 점심식사까지 함께 하였다. 장시간에 걸쳐 남반부에서 혁명을 하여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남반부현실의 우경화가 가지는 파국적후과에 대하여, 미제의 조선강점이 노리는 식민지적야망에 대하여, 조국분렬의 위험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주었다.

마침내 김형서는 북상길을 도와달라던 고집을 버리고 남조선에 남아 조국의 완전독립과 미제와 반동들의 종국적멸망을 위하여 있는 힘껏 싸우겠노라고 맹세다지였다.

그는 작별에 앞서 자기 이름을 고치겠다고 하였다.

정시명이 의아해하자 김형서는 이렇게 열정적으로 부르짖었다.

《김형서라는 이름은 반동들의 유혹에 춤을 춘 한 머저리를 뜻하는 이름입니다. 이제부터 김형서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것입니다.

저를 김아성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이 남녘땅에서 통일조국을 받드는 성새가 되렵니다.》

정시명은 안지생을 통하여 그를 리청천이 조직한 《대동청년단》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안지생이 자주 만나 잘 이끌어주라고 당부하였다.

리청천은 안지생의 권고를 받아 리범석의 《족청》에 대치하는 대동청년단을 조직할 때 안지생을 자기의 비밀고문으로 임명하면서 좋은 청년들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한바가 있었다. 리청천은 안지생에게서 김아성의 경력을 듣고 그를 만나보자 여간 좋아하지 않았다.

정시명은 김아성에게 리청천의 신임을 얻어 점차 경찰상층기관에 들어가 리청천을 업고 권력자들의 가까이에 접근할데 대한 전망적인 과제를 주었다.

그것은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였다.

리청천도 리범석이처럼 청년들을 자기 주위에 끌어당겨 장차 그들을 군부와 경찰, 기타 권력기관에 들이밀어 자기의 정치적지반을 다지려고 꾀하고있었다. 때문에 리청천은 김아성과 같이 대바르고 유망해보이는 청년에 대하여 크게 기대를 가지고 든든히 써먹으려고 시도할것이다. 그렇게 되면 리청천이라는 공인된 《반공》분자, 특권세력의 유력한 우두머리가 그의 비호자가 되여 그의 활동을 보장하여줄것이다.

정시명은 이것을 노리였다.

그의 예견대로 리청천은 김아성을 자기 주위에서 놓칠세라 자기의 돈을 내서 집도 마련해주고 장사밑천까지 대주면서 호의를 보였다. 자기 사람이 되였다는 확신이 생기자 대동청년단의 서북사무국에 자기의 대표격으로 앉혀놓았다.

대동청년단 서북사무국이란 리청천이 자기 세력을 북반부에까지 뻗치기 위해 만든 모략기관이였다.

놈들은 괴뢰경찰당국으로부터 38선일대를 자유로이 드나들수 있는 특권을 받아 북반부에 드나들면서 후방사업을 구실로 모리간상행위를 벌리고있었다.

어느날 김아성은 처녀를 데리고왔다. 내친김에 자기의 녀동무도 만나달라고 정시명을 처음 만났을 때 떼를 써서 한번 데리고 오라는 말을 들었던것이다.

살결이 눈같이 희고 몸매가 곱고 봄철의 버들가지처럼 나긋나긋해보이는 아름다운 처녀였다.

정시명이 이름을 묻자 수집음을 타서 귀밑이 발그레 물이 오르면서 고개만 깊이 숙이였다.

김아성이 옆에서 민망스러웠던지 《김순애라고 합니다.》하고 얼른 대신하고는 《원체 그렇답니다.》하고 덧붙이였다.

정시명은 그를 어데서 일을 시켰으면 좋겠는지 인차 가늠이 가지 않아 몸둘바를 몰라 옷고름만 매만지는 처녀를 앞에 세워둔채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결패있고 손탁도 드센 김아성이 어떻게 되여 봄싹처럼 차분해보이는 처녀를 사귀였을가, 참말로 사람들의 관계는 기기묘묘하다.

처녀가 너무 연해보여서 련락사업이나 거점사업에 적당할것 같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차집이나 미용원 같은것을 맡겨서는 푼전을 놓고 싱갱이질이 벌어질 일을 감당하지 못할것이다.

정시명은 한 생각이 떠올랐다.

《우선 타자수강습소에 들어가 일하는게 어떨가? 차후 직업문제는 그때 가서 연구하기로 하고…》

《선생님이 하시라는대로…》

처녀는 도톰한 입술만 감빨다가 종시 대답을 여물구지 못하고 고개만 떨군다.

김아성이도 그게 좋겠다고 하여 그렇게 락착이 되였다.

정시명은 그들과 함께 전차정류소에 가면서 김아성에게 물었다.

《어느 학교를 다녔다고 했더라?》

《연희전문입니다. 원래 저렇답니다.》

김아성은 정시명이 미덥지 못해 할가봐 마음을 쓰면서 뒤덜미를 슬슬 긁었다.

《허허, 내가 어떻다고 했나… 그러니 김군도 부끄럼을 잘 타는 성미가 눈에 들었던 모양이군.》

《아니, 우린 뭐 특별히 약속한건 없습니다.》

《마음속에야 있겠지. 난 동무들이 사랑한다고 세상에 소리를 쳐도 반대하지 않겠소.》

정시명은 사랑에서는 숫접기 그지 없는 총각의 어깨를 세괃게 흔들어주며 기쁨에 넘쳐 크게 웃었다.

정시명은 항상 마음에 드는 동지들을 새로 찾아낼 때가 제일 기쁘고 즐거웠다. 그는 또다시 믿어 랑패가 없을듯 한 젊고 믿음직한 동지를 사귄것으로 하여 만시름을 잊고있었다.

김아성이도 자기들의 진정을 알아주고 가까이에 받아주는 정시명이 고맙고 그 인품이 정이 들게 하여 티없이 맑게 웃었다.

김아성은 그후 대담하고도 기민한 활동으로 애국자들을 적들의 사찰책동으로부터 보위하는 영예로운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전우들은 그를 《홍길동》이라고 불렀다. 김아성이 정시명과 그의 전우들이 위험한 고비에 처할 때면 번개같이 나타나 놈들을 답새기군 하였기때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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