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고목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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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명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리승만을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에 대하여 결심을 내리기에는 이제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리승만은 아직은 돌아가는 풍문으로 그 인간상을 리해하고있을 따름이였다. 여직까지 그 인간과는 한번도 마주서본 일이 없었다.

리승만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겠는가. 그와의 사업에 어떤 목표를 설정하며 어떻게 사업해야 하는가.

어쨌든 리승만은 미국이 우익세력의 중심에 내세우려는 두 거목중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확실히 리승만에게 정치적담보를 주고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서 그 인간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에 대한 조직의 립장과 태도를 결정지을수 없다. 거목의 뿌리를 제손으로 헤쳐보고싶었다. 만약 그에게도 우리 민족을 위한 참다운 애국의 싹을 찾을수 있다면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는가.

리승만이 청년시절에는 나라의 개혁을 위한 반정부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한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한적도 있으며 왜놈들의 감방에도 들락날락한바가 있다.

독립전에 바쳐진 50평생이라고, 겨레의 종복으로 살아온 인생이라고 야단스럽게 자랑하는데 거기에 내세워야 도리가 아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정말로 문제의 세 두령을 하나로 묶어 세상에 내놓을수 있는 산파역을 기꺼이 받아안을수 있다.

다만 그 목적에서 하지가 노리는것이 아닌 진정으로 애국적인 련합을 무어내게 될것이다.

돌아가는 풍문으로 거목의 뿌리를 다 알아낼수는 없다. 그것은 력사앞에서도 그리고 그 인간앞에서도 무책임한 일이다.

그러니 리승만의 체질이 듣던대로 매국의 구렁텅이에서 더는 구제할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였다는것이 확인되면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이 내 나라의 족보에서 썩뚝 잘라던지는것이 마땅하다.

그렇게 되면 하지의 요청도 명분을 세워 사절할수 있다. 리승만을 만나보고 하지의 요망을 타진해보았는데 리승만의 광기를 눌러놓고 3파련립을 무어낼 가능성을 찾을수 없으니 그 어려운 짐을 짊어질수 없는것이 유감스럽다고 하면 하지에게도 설득력이 있게 될것이고 류동명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을것이다.

정시명은 리승만의 비서실에 있는 신정섭에게 면담을 주선하도록 임무를 주었다.

리승만은 정시명의 면담요청이 제기되자 비서진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한번 만나보자고 시들하게 면담요청을 접수하였다.

리승만이 거처하는 남산기슭의 영악동은 일본놈때는 량반들이 거처하던 곳이였는데 일제말기에 공원의 나무들을 베내고 다층집들을 빼곡이 들이세워 바람기가 한점 없었다.

리승만은 한여름의 복더위에 확확 달아올라 마치 화독같은 방안에서 헐떡거리고있었다. 방문을 열것 같으면 밖에서는 오히려 더위를 머금은 열풍이 확 쓸어들어 더욱 숨쉬기가 가빴다.

리승만은 연신 부들부채를 흔들어 바람을 일구다가 그 노릇도 귀찮은듯 앞상에 내던지고는 쏘파에 등을 붙이고 두터운 눈시울을 붙이였다.

이따금 프란체스까가 들어와서 바질바질 땀을 흘리며 령감의 상판에 부채질을 하여주다가는 기운이 진하면 멀리 남산을 무표정한 눈으로 내다보군 한다.

윤치영이 정시명을 안내하여 들어온것은 리승만이 쏘파에서 헐떡거리다가 금방 쪽잠에 들무렵이였다.

《정향선생이 오셨습니다.》

윤치영이 크게 소리를 질러서야 리승만은 눈을 무겁게 떴다. 더위에 지칠대로 지친 리승만은 그리 반가워하는 기색은 없이 《어, 반갑소다. 정선생, 게 앉으시우.》하며 부들부채를 흔들기 시작하였다.

《여보게, 구해온다는 선풍기는 어떻게 되였는가.》

리승만은 숨을 다시 헐떡거리며 짜증난 어조로 물었다.

《위원장선생, 인차 들여올겝니다.》

윤치영이 공손히 대답하였다.

측근들은 흔히 리승만이 림시정부의 구미지부 위원장을 하던 시절의 직함으로 부르군 하였다.

리승만에게서는 상해《림정》의 지역책임자라는것이 마음에 차는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일제시기 왜놈순사에게 주먹질 한번 해본 사람도 영웅시되는 시절이라 상대방에게 자신의 항일경력을 군소리없이 상기시키는 전략적인 타산이 있어 《독촉》회장이라는 현재의 사회적직함보다 그렇게 불러주는것을 더 좋아했다.

제 나라 민심앞에서 리승만의 가장 큰 두통거리는 어떻게 하면 사대와 매국으로 일관되여온 한생의 편력을 애국으로 분식하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수치스러운 죄악의 어제날을 애국으로 채색하는 일에 막대한 금전을 뿌리기도 하고 자기의 주변을 《항일경력》을 보여줄수 있게 꾸리는데 왼심을 쓰기도 하였다. 일제시기 군량미 3천석을 헌납한 친일분자며 개성일판의 대지주의 족속인 윤치영이 일약 《애국자 리승만》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된것도 이런 연고에서였다. 리승만이 감옥에서 풀려나온 후 일제관헌의 눈을 피해 그놈의 집에서 한해 여름을 보낸 일이 있었는데 윤치영이야말로 그의 감옥경력을 보증하고 내외에 선전할수 있는 산증인이였다.

리승만은 이런 맥락에서 정향이 이름난 반일지사라는 윤치영의 소개말을 반갑게 받아들였던것이였다.

《빨리 들여와요. 자네 솜씨가 그러하니 귀한 손님 받아놓고도 이렇게 인사불성이 아닌가. 정선생, 이거 안됐소다.》

리승만의 대인외교가 시작된셈이다. 그는 늙은이다운 변덕을 재치있게 활용할줄 아는 로회한놈이였다.

리승만은 무시해서는 안되는 손님을 더위에 눌려 소홀히 했던 잠시전의 실수를 이런 방법으로 어벌쩡하게 넘기고는 프란체스까가 쟁반에 가져온 수정과를 정시명에게 권하고 자기도 한사발을 쭉 들이마시였다.

《내 선생의 명함을 익히 들어 알고있소. 그래 지금도 경교장(김구가 거처하는 곳)을 위해 뛰고있는가?》

리승만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직선적이고 시비조였다.

《위원장선생, 내가 경교장을 위해 뛰여다닐 리유가 어데 있겠습니까. 내가 누구를 위해 뛰는가는 나의 명함장에 다 적혀있습니다.》

《명함장?… 어떻다고 했드라?…》

리승만은 정시명의 명함장을 자기 눈밑에 두고도 아닌보살하고 윤치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흥국상회 사장으로 계십니다.》

윤치영이 공손히 대답하였다.

《거 이름이 좋다! 그러니 나라를 흥하게 하는 장사를 한다는건데 장사는 잘 돼갑니까?》

여전히 리승만은 상대방을 자기의 세계에 끌어들이느라고 화제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딴전을 부렸다.

《네, 그럭저럭… 장사일이 워낙 밑지고 돌아가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딴은 그렇지요… 우리 〈독촉〉을 좀 후원해주시구려.》

리승만은 지나가는 말투로 슬쩍 말을 던지고는 게슴츠레해진 눈언저리에 가느다란 미소를 담고 정시명의 표정을 일별하였다.

정시명은 그 눈빛에서 늙은이답지 않은 예민한 빛을 포착하고는 리승만이 늙었어도 정치적감각이 있고 사람을 후려내는 재기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정히 요구되신다면… 하지만 나는 미국이 리선생을 막강한 재력으로 후원해주고있다고 알고있습니다.》

정시명이 슬그머니 반격에로 넘어갔다.

《허허… 그건 옳소. 지금 항간에서 정치를 한다는 일부 녀석들이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닌다는데 그게 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탓이지.

미국이 누구한테 이 나라의 룡상을 맡기고저 하는가?… 이걸 알아야 한다는 그 말이요. 난 올해 초에 워싱톤에 있는 〈한국위원회〉로부터 받은 기부금 1천만은 웃돌고있으니 정선생한테까지 손을 내밀지 않아도 되우. 아직은 이 나라에 정치자금규제법은 없으니 뭐 미국사람들의 돈을 얻어쓴다고 쇠고랑 찰 걱정은 없지.

그래 정선생, 한푼을 놓고도 결투까지 벌리는 양인들이 어째서 나에게 크게 도박을 걸고있을상 싶소?》

리승만은 미국의 후원을 초면인 정시명에게 꺼리낌없이 뇌까리였다.

그러나 이것도 리승만의 타산된 공작의 한 고리인것 같다. 분명 리승만은 미국의 후원을 공개하는것으로 제놈의 몸값을 최대한 높이고 그 값으로 주변을 두터이하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민족의 존엄에 대한 무시이고 외세의존의 극치이다. 리승만의 친미도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가히 짐작되였다.

정시명은 매국과 사대를 자랑스럽게 지껄이고있는 늙은 두상의 상통을 되게 후려갈겨주고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참았다.

늙다리의 체질에 대한 판단이 서자 담화를 빨리 끝내려고 다음문제를 꺼내놓았다.

《내 얼마전에 하지중장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는 리선생이 김구나 김규식세력과 합작할것을 강하게 희망하고있습니다. 하지중장은 리선생이 관용과 아량을 가지고 그네들을 포용할것을 바라고있습니다.》

《허, 그 량반 양인치고는 고집이 세거든. 하긴 하지중장의 관상을 보면 건축기사노릇이 어울려. 쟁인바치가 그 상에 나타나 있거든. 그 사람이 돌쫏는 석수쟁이나 집짓는 목공노릇을 한다면 재간있다는 말을 들을것 같애.…

이 사람, 당신도 북을 올려다 보오. 백두산호랑이로 소문났던 김장군이 국민의 머리우에 우뚝 솟아 정사를 한손에 거머쥐고있소.

헌데 어찌하여 이 남한땅에는 아직도 주인이 없는고?

그건 김구나 김규식이 내 뒤다리를 잡아당기고있기때문이요.

도대체 하지 그 량반 김구와 나를 억지결혼시키고저 몸살인데 그게 될상 싶은가.

김구가 세상에 대고 미국놈 물러가라고 저들의 뒤통수에 주먹질인데 이 소란스러운 남한땅에서 미군까지 빠져나간다면 38선은 누가 지키고 당초에 미국사람들은 뭣하러 서울에 기여들었나말이요.

남북삼천리에 붉은기가 날리는걸 봐야 하지 그 량반 정신을 차릴가.

안되지, 절대로 안돼. 김구는 절대로 나의 반려가 될수 없어. 국민의 심리란 곬을 째는대로 흐르는 물과도 같은거야. 글쎄 룡상마련도 안되였는데 뭘 왈가불가하는지 답답들 하다니까.》

리승만은 더위에 지쳐 눈두덩이도 무거워 하던게 언제였더냐 싶게 기고만장해서 소리를 지르며 앞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려댔다.

그는 제놈만 내세워놓으면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따라 나선다는것이다. 그러니 지금에 련합이요, 3파통일이요 하는것이 부질없다는 수작이다.

정시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리선생, 선생의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리승만은 자못 인자한 모습으로 변해져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히 가시우. 지금은 내가 도와달라고 이렇게 손을 주오.》

리승만은 석쉼한 어조로 부탁하며 비죽이 웃었다.

리승만은 대문까지 나와서 그를 바래주었다.

대문이 찌꾸뚱소리를 야단스럽게 내며 닫기자 정시명은 이상스럽게 가슴속에 꽉 차있는 분노의 감정은 사라지고 어쩐지 서글퍼졌다.

저건 완전히 이 땅의 넋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늙다리다. 어떻게 아름다운 이 강산에 저렇게 역스러운 역적이 나타났는가. 선과 악을 가려보지 못하고 밝은것과 어두운것에 대한 감각이 없고 비렬한것과 고귀한것에 대한 판단력이 전혀없는 저런 인간이 어떻게 이 나라의 옥좌에 군림하려고 저렇듯 버둥거리고있는가. 저런 인간의 주위에 포진되여있는것들이 과연 이 땅의 얼혼을 가진 놈들이냐. 저런 위인을 내세워 이 나라의 운명을 맡기려 하는것은 얼마나 큰 죄악이고 수치인가. 저 인간에게는 자나깨나 제 말대로 이 나라의 룡상만이 얼른거릴것이다. 겨레의 아픔이나 국운이 저 인간에게는 지나가는 바람새처럼 무심한것이다. 룡상마련을 위함이라면 무슨 짓도 꺼릴게 없다는게 저 두상의 사상과 도덕과 생활의 전부일것만 같다.

결국 그렇게도 자화자찬하는 《50년독립전인생》도 오로지 이 나라의 룡상을 차지하려는 그 하나의 야심때문이였다.

그의 눈앞에 불현듯 려운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생토록 백길폭포처럼 큰소리를 내며 조국의 비운을 맞받아 주저없이 심혼을 던져왔건만 권력에 대한 티끌만 한 야심도 없이 여전히 동분서주하고있는 그 깨끗한 인간과는 얼마나 상반되는 더러운 추물인가.

아, 불행한 일이다. 저런 인간을 어떻게 정객이랍시고 용납한단 말인가.

그런데 리승만의 허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니 허세인것만 같지 않다. 전번 워싱톤정가를 휘젓고왔다고 하더니 거기서 다시금 그 무슨 농도가 진한 영양주사라도 맞고온 모양이다.

정시명은 불안해졌다. 서서히 엄습해오는 거대한 바다의 흔들림에서 자기가 자꾸만 가녁으로 밀리는것만 같다.

(이래서는 안된다. 내가 이래서는 안되지… 저런 인간에게 룡상을 무난히 넘겨서는 안된다. 안되구말구. 나라와 겨레의 운명은 안중에 없는 저따위 인간은 민족이라는 대가정에서 철저히 격리시켜 추방해야 한다. 저놈의 넉두리처럼 저런 역적을 서울의 룡상에 올려놓으면 우리 민족은 또다시 민족수난을 당해야 한다. 쳐갈겨야 한다. 철저히!)

정시명은 실꾸레미처럼 연줄연줄 이어지는 생각에 잠겨 언제 집에 닿았는지도 몰랐다.

정시명은 인차 마동열에게 간단한 편지를 들려 류동명에게 보냈다.

편지에 리승만을 만나보니 하지의 요청을 따르는것이 힘에 부친다는것을 실감했다고 썼다.

류동명은 정시명을 크게 내세우려 했던 자기의 성의가 빛을 보이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었으나 그의 대답에 공감이 가서 군말없이 받아들였다.

정시명은 길철과 김명호에게도 긴급지시를 주었다. 조직들을 발동하여 3일안으로 남조선에 조직되여있는 각당, 각파들의 성격을 분석한 실태자료를 작성하여 보고할데 대한 지시였다.

이것은 정시명이 꾸준히 준비해온 대정치전의 서막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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