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하지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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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명이 깨여난것은 동틀무렵이였다.
서병남이 《흥국상회》에서 전화가 왔노라며 그를 깨웠다.
안지생이였다. 그의 목소리가 매우 당황하고 불안에 떨고있었다.
《야단이 났습니다.》
《이야기하오.》
정시명도 불안하기 그지 없었지만 상대방의 흥분을 가라앉혀 주느라고 애써 차분하게 재촉했다.
《집밖을 깡패들이 에워싸고 버티기를 하고있습니다. 사관학교놈들이 많이 온것 같습니다. 이제 새벽바람으로 떠나자고 했는데…》
《사관학교?》
《뭐 대표라고 하는 젊은애들이 대문을 부시고 들어와서는 토방에 엎드려 엉엉 울기까지 하면서 월북의사를 철회하라고 애원하고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짓거리들이요. 좋소. 30분후에 다시 전화하시오. 백범선생의 기분은 어떻소?》
《노발대발이지요. 출발준비는 다 되였는데 밖으로 몸을 뺄수가 있어야지요. 김장군이 기다리시겠는데 이 일을 어찌노 하며 한숨만 쉽니다.》
《비렬한 놈!》
《예?!》
《비렬하다는거요. 하지, 이놈. 이제는 생억지를 쓰는구나. 네놈의 너절한 망동이 이 밝은 세상에 더는 통할상 싶은가.》
단말마적인 발악까지 하는 하지의 너절한 행위에 정시명은 치솟는 격분을 금치 못하여 이렇게 부르짖고는 전화를 끊었다.
정시명은 서병남에게 태릉에 있는 경비대사관학교 교장인 김송일을 전화로 찾아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권재수에게도 30분후에 자동차를 김구의 집근처에 대기시켜달라고 부탁하도록 하였다.
얼마후 김송일이 아직 잠기가 있는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정시명은 지금 사관학교 학생들이 김구의 저택에 와서 망동을 벌려 그의 북행길을 막고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음, 그렇구만. 점심참에 우리 교무처장이 2백명의 생도들을 장택상서울경찰청장이 보내달란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그 판을 벌려놓았군요.》
《김구선생이 도움을 청하여 나한테 부탁하여왔습니다. 백범이 그 사람 한생에 보람이 있는 일에 나선것 같은데 김송일교장이 길을 막아나서서는 안될줄로 압니다.》
정시명은 정중하게 비난하였다.
《아 정선생, 내 알겠습니다. 인차 조처하겠습니다.》
김송일이 잠기에서 벗어나 무겁게 대답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인차 현장에 달려온 김송일은 경교장의대문간에서 리승만의 심복부하인 장택상과 마주치자 고함을 쳤지만 자기 생도들을 철수시킬수는 없었다. 장택상이 미군정청까지 거들면서 김송일의 철수명령을 단마디로 일축해버렸던것이다.
안지생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다소 밝아진 목소리였다.
그는 현장에 길철이가 여러명의 조직성원들을 데리고 나타났다고 하면서 김구를 감쪽같이 탈출시켜 집에서 빼내겠다고 하였다.
정시명이 이제 집근처에 권재수검사가 승용차를 가지고 나타날것이라 하니 그럼 문제없다고 장담하였다.
온밤을 뜬눈으로 밝힌 김구는 아침이 밝아오자 미칠것만 같았다. 지금도 밖에서는 별의별 고함소리가 다 들려온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통쾌한 마음으로 길차비를 했는데 막판에 와서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것이다. 숱한 고민과 곡절을 걸쳐서 마침내 나선 길이 저 무지막지한 불량도배들에게 막혀버리다니. 이게 다 하지놈의 작간일게다. 그놈이 미친 놈이지. 미친 놈 아니고야 어찌 서울장안에서 이렇게도 고약하고 치사스러운 짓을 벌리는거냐. 내 네놈들이 그런다고 물러설것 같으냐. 백범이 웃는 낯에는 침뱉지 않지만 주먹에는 주먹을 내들고 치면 받는 인간인줄 네 아직 모르는구나.
항차 내 소신을 쫓아나선 길을 네 강권으로 막을수 있다더냐. 이 백범은 뜻에 살고 뜻에 죽는다. 나라세우는 일에 네놈들 막아 설바도 아니요, 네놈들 막아선다고 뜻을 바꿀 내 아니다. 백범이 어떤 사람인줄 네놈들 똑똑히 알아라.…
김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이 떠나갈듯 소리쳤다.
《펜과 종이를 가져오너라.》
안방문을 지키고있던 둘째 아들이 얼른 펜과 종이를 가지고왔다.
김구는 자기의 격앙된 울분과 의지를 일필휘지로 단숨에 종이에 담았다.
《비서, 내 다시 북상선언을 해야겠네.》
김구가 소리쳤다.
비서가 얼른 펜과 종이를 가지고왔다.
보름전에 안우생이 새로운 임무를 받고 홍콩으로 떠나간후 안지생의 추천에 의하여 안중근의 막내동생인 안공근이 비서실에 인입되여 김구의 옆에서 그를 보좌하고있다.
그도 정시명의 영향을 받고있는 사람이였다.
김구는 방안을 오락가락하면서 생각을 가다듬다가 펜을 잡더니 단숨에 써내려갔다. 격앙된 감정과 의지를 담은 주먹같이 큰 글발들이 그의 눈앞에서 춤을 추는것만 같았다.
길다란 종이가 빼곡 차자 김구는 《자네 한번 큰소리로 읽어주게.》하며 비서에게 넘겨주었다.
비서가 다 읽어주자 김구는 《음, 내 하고픈 소리는 대충 들어 갔으니 더 어물거리지 말고 나가세나.》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성명문을 들고 2층로대에 나갔다.
그러자 대문안팎에 장사진을 치고 롱성을 벌리고있던 망나니무리들이 벌떼처럼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북행반대!》,《남북회담결사반대!》
한패의 무리는 백범이 나타나자 엉엉 곡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김구는 두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추태를 벌리는 각설이무리들을 노려보다가 고함을 질렀다. 《조용들 하라. 백범이 죽기나 했는가?》
그러자 비서가 옆에서 큰소리로 소리쳤다.
《조용들 하라! 이제부터 상해림정 주석이며 한국독립당 위원장 백범선생님께서 성명을 발표하시겠습니다.》
비서가 이렇게 장중하게 선언하자 갈가마귀떼처럼 소란스럽던 놈팽이들이 물뿌린듯 잠잠해졌다.
김구가 돋보기를 꺼내 코등에 걸고 종이장을 눈앞에 가져갔다.
《어험!… 삼천만동포에게 울며 고하노라!…》
그러자 어느 놈이 시작했는지 요란한 박수가 터졌다. 드디여 김구가 항복선언을 하게 되였다고 판단했던것이다.
《나, 백범은 삼천만 동포에게 백번 절을 드리면서 다시한번 엄숙히 고한다. 나는 이미 공언했던 그대로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않을것이다.
나는 평양으로 가는 길이 애국의 길이요, 통일의 길임을 굳이 확신하는 마음에는 티끌만한 동요도 없다는것을 다시금 엄숙히 선포하는바이다.
지금 분렬추종무리들이 나의 북행길을 끝끝내 차단하려 하지만 백범은 국민께 다진 약속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것이다. 나는 내 생전에 38선이북에 기어이 가서 통일국사를 의논하고야 말것임을 삼천만동포에게 다시금 맹약한다.》
김구의 뒤말은 또다시 란잡한 목소리들이 삼켜버렸다.
《백범은 국민을 버렸다!》
《백범은 미쳤다!》
《백범은 즉살하라!》
그러나 김구는 종이장에 빼곡이 쓴 성명문을 마저 읽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돋보기를 벗고 부릅뜬 눈으로 악을 쓰는 무리들을 노려보았다.
《들어갑시다, 어서!》
비서가 이 자리에 더 지체하다가는 돌벼락이라도 뒤집어 쓸것같아 그를 안으로 억지로 끌고들어갔다.
이때를 기다려 안지생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안지생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꽉 메우고있는 깡패들에게 길을 내라고 욕설을 퍼부어 대다가 큰소리로 백범선생님께 미군정에서 손님이 왔노라고 전하라고 하였다. 깡패들때문에 2층으로 올라갈수 없었던것이다.
한놈이 김구가 거처하고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김구는 두루마기까지 걸친채분을 새기며 망연자실해서 창문밖을 내다보고있었다.
김구가 그놈이 기척도 없이 방에 들어서자 《무슨 놈의 본때냐?》하고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저… 군정청에서 손님이 왔다고 비서선생이 전하라고 했습니다.》
《내 비서는 어디 있고?》
《복도에서 기다립니다.》
김구는 분명 안지생이 무슨 수를 쓰고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평양에 함께 갈 비서와 아들을 돌아보며 《따라 서게.》하고 먼저 방을 나섰다.
복도에 웅크리고 앉아 웅성거리던 망나니들이 이미 안지생의 소리를 들은지라 두말없이 길을 내주었다.
아래층에서 기다리고있던 안지생은 그들을 뒤문으로 안내하였다.
김구일행을 태운 승용차는 쏜살같이 서울을 빠져나와 38선으로 달리였다.
대표들의 북행길을 개척하는데는 김명호가 포섭한 연선군경찰서장 리해진이 많은 일을 하였다. 그는 장단북쪽 고랑포방면을 비롯한 여러곳에 목탄제조장을 펴놓고 조직성원들에게 목탄제조업허가증을 내주어 북상통로를 개척하도록 하였다. 물론 미국놈들은 이미 김구, 김규식과 사회여론앞에서 북남대화를 지지하는 립장을 보여주었기때문에 민주인사들의 북행길을 공개적으로는 가로막을수 없었다. 그러나 도중에 테로분자들을 내몰수 있었다.
김구일행은 려현쪽으로 들어오다가 군사대치선으로 규정된 지점에 이르러 사진을 찍었다.
하나로 뻗어간 지맥우에 무겁게 들이박힌, 아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계선에서 조국의 남과 북을 둘러보는 김구는 감개무량함을 금할수 없었다.
방금전까지도 있었던 일들이 벌써 아득한 옛말처럼 떠오른다.
김구는 어쩐지 정시명이 보고싶어졌다.
《정선생을 회의장에 가면 만나게 되겠지?》
김구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아마 그렇게는 안될겁니다. 서울에 남아있을겁니다.》
《어째서?… 그 사람이야말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어른이 아닌가?》
《우릴 떠나보내면서 미국놈들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있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더랍니다.》
《그래?… 음… 정선생께 빚만 가득 짊어졌네.》
《선생님, 정말 이렇게 결단을 내린건 훌륭한 일입니다. 타도 김구라고 하던 민심이 애국충신 김구로 돌아서게 되였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장거입니까.》
《그네들이 정말 날 그렇게 받아줄가?》
《정향선생은 오래전부터 학수고대하여 왔습니다. 그것이 김일성장군님의 뜻이라고 했답니다.》
《그게 김장군의 뜻이라고?!… 그래, 그랬구만!》
김구는 고개를 끄떡끄떡하고는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는 걸음을 쉬이 옮기지 못한채 그 무슨 미련이 있어서인지 남쪽 하늘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새파란 봄하늘에는 구름송이들이 뭉게뭉게 떠있다. 풀어놓은 솜뭉치처럼 희고 부드럽고 탐스러운 구름송이들은 유유히 떠돌며 조용히 대지를 굽어본다. 그 밑에 일망무제하게 펼쳐진 벌과 그 변두리에 잇닿아 있는 차령산줄기의 높고낮은 산발들이 젖빛운무에 싸여 안겨온다. 봄볕에 한껏 무르녹는 산과 벌은 바야흐로 푸른 옷을 떨쳐입었는데 사이사이 붉고 희고 노란 꽃들이 아름답고 선연한 대조를 이루어 새봄의 정취를 한결 이채롭게 해준다.
하지만 지금 김구에겐 펼쳐진 남녘의하늘밑이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았다.
저 산발들이 김구에게는 너무도 눈에 익다. 남으로 북으로 세월없이 뻗어간 구불구불한 오솔길조차 뜬금으로 그려낼수 있다. 얼마나 많은 한숨과 눈물과 피를 날리며 숱한 자욱을 찍어온 길들이랴. 저 하늘과 산발들에 잇닿은 기슭에 한껏 서린 뿌연 운기가 지금 그의 눈앞에는 먼지구름처럼 안겨온다. 그 먼지속을 헤치며 솟아오르는 기발, 기발들…
김구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와! 와! 귀전을 두드리는 함성! 함성!
조정을 들부셔라!
탐관오리들을 몰아내자!
전봉준이 추켜들고 동학당이 추켜들고 자기도 추켜들었던 기치! 기치!
그 뒤를 이어 끝간데없이 이어져온 그 무수한 좌절과 피와 몸부림과 눈물의 바다… 고행에 찬 난바다가 저 푸른 하늘밑에서, 저 평화로운 송이구름밑에서 조용히 잠들어버렸는가. 김구는 다시 눈을 뜨고 남쪽을 바라본다.
두툼한 입술새로 가느다란 한숨이 새여나왔다. 그는 돌아섰으나 북쪽하늘가로 련련히 뻗어간 산발들을 망연히 바라본다. 그 눈빛이 착잡하기 이를데 없다. 이제 가야 할 길, 한발 떼면 북쪽땅이다.
북쪽의 대지에 선뜻 발이 나가지 않는다.
《정말 날 그렇게 받아줄가?》 혼자소리처럼 되뇌이는 김구의 소리다.
그 소리에 비서가 충동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연해졌다. 남과 북의 경계선에 이르니 다시 배속깊은 곳에서 불신과 의혹의 매연이 몰몰 피여오르는 모양이다. 또다시 두터운 입술을 붙인채 굳어진듯 싶다. 들었던 한발을 다시 뒤발에 갖다붙이고 북쪽하늘만 얼없이 쳐다본다.
(저 인간은 언제면 환생을 할려나?)
비서는 속깊이 탄식하면서 《백범선생님, 어서!》하고 화가 동해서 길을 재촉하였다. 그리고 제가 먼저 크게 걸음을 옮겼다.
《그래, 가야지.》 그제야 시름겹게 북쪽으로 첫 자국을 옮겨놓는다.
오래동안 반공의 심연에 휘말려들어 우왕좌왕 방황하면서 모대겨온 김구의 곡절 많은 모습을 옆에서 보아온 비서는 북쪽에 들어서는 이 순간의 그 인간의 감정이 리해는 되였다. 그렇지만 자신도 어쩔수없이 화가 났다.
(저래가지고 회의에 가서 좋은 소리를 하게 될가? 장군님도 뵈워야 되겠는데…)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거 야단이 아닌가.…)
평양에 가서 트집을 걸고 심술을 부리면 들인 공이 의미가 없어진다. 예까지 이른 김구의 행적이 일시에 떠오른다. 그에게 들인 품을 어찌 천으로 만으로 헤아리랴.
장군님의 간곡한 뜻과 도량이 없었을진대 정시명도 물러선지 오랬을것이다.
어제 점심무렵에 정시명이 자기의 손목을 잡고 걱정하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동무가 옆에서 잘 해주어야겠소. 백범이 길 떠났다고 마음놓을거 못되오. 난 오히려 장군님앞에 나설 백범을 생각하느라면 가슴이 죄여들기만 하오. 그는 지금 미국놈들에게서 떨어져나와 북행길에 오르기는 했으나 한번 가보자는 심리가 다분하오.》
정시명의 걱정도, 이 순간의 비서의 우려도 사실 공연한것이 아니였다.
… …
평양에 들어섰어도 김구는 여전히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아름답지 못한 여운을 남기군 하였다. 안내를 맡은 일군들도 무색해지군 하였다. 그러나 체류일정이 하루이틀 지나감에 따라 김구는 완전히 모습을 바꾸었다.
세기의 태양을 받들어올린 만경대의 수수한 초가, 실안개 피여나는 들에서 거름지게를 지고계시는 장군님의 조부모님들과의 뜻깊은 상면, 장군님의 은혜로움을 눈물속에 이야기하는 용해공들, 장군님 은총을 받아 건국대업의 앞장에 나선 옛 련인 안신호…
70년 묵은 고목의 밑뿌리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그 해묵은것이 마침내 장군님의 품에 안겼을 때 언제였더냐 싶게 그의 육신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야말았다.
위대한 태양의 자애와 뜻과 열을 받아안은 김구, 그 넓고도 깊고도 뜨거운 품에 매혹되여 선뜻 여생을 맡긴 김구.
세상에 널리 알려져 후손들에게도 길이 전해갈 그 전설같은 이야기…
비로소 장군님의 사랑의 품에 안겨서야 인생의 봄맞이를 한 김구의 인생전환의 사연들을 금방 38선을 넘은 이 시각에는 상상할수 없었다.
지금도 비서는 그처럼 그리웁던 북녘의 하늘밑에 들어섰건만 김구에 못지 않게 걸음이 무겁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