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하지의 고백
2
김구는 막상 북조선이 남북회담제안을 접수하자 여러가지 복잡한 심회가 잦아들었다.
이제는 남북회담이 하나의 탁상공론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남북회담이란 결국 공산주의자들과 마주앉는다는것이다. 공산주의자들과 민족대의를 협의한다는것이다.
김구는 눈앞에 회담장이 련상될 때마다 때없이 가슴에 천근추를 달아놓은듯 무거워만 졌다.
공산주의자들과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나누며 어떻게 하나의 생각으로 곬을 좁혀갈수 있으랴. 정작 만나자고 하니 반공전선에서 수많은 죄를 지어온 지난 날의 행적도 큰 두통거리다. 엎지른 물은 이제 주어담기나 할테냐. 세상천지가 다 아는 그 일들을 이 백범의 본의는 아니였노라고 낯 간지럽게 발뺌을 할수도 없지 않느냐.
물러서자니 이미 모아들인 민심이 배수진이 되여 퇴로를 막아선다.
벌써 북의 결정이 발표된 그날중으로 《한민당》을 제외한 100여개의 정당들이 회담참가의사를 표명하였다. 남조선의 거의 모든 세력을 포괄하고있다.
게다가 미국놈들이 매일처럼 찾아와 성화를 먹인다.
그의 고민은 정시명에게 낱낱이 통보되고있었다.
정시명은 지휘일군들에게 미국놈들이 새로운 암초를 만들어내리라는것은 명백하므로 놈들의 일거일동을 제때에 장악하여 보고할것을 간곡히 당부하였다.
안지생에게서 들어오는 새로운 자료들은 정시명을 한시도 마음을 놓을수 없게 하였다. 적은 맹렬하게 움직이고있었다.
오늘 오전에 미군정청 정보국장 노불이 김구를 찾아왔다.
그는 김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당신이 북의 공산주의자들과 만나겠다는것을 구태여 막지는 않겠다. 나는 다만 정보국장으로서 하나의 정보를 알려주고저 찾아왔다.
지금 38선에는 남쪽의 테로단들이 당신을 모해하기 위하여 대기하고있다는 정보가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대책을 세울것이다. 그런데 이북에서도 당신이 입북하는 즉시로 처리해버릴 방안을 연구하고있다고 한다.
이북의 협상제안에서 남측대상은 이북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세력이지 당신이나 김규식을 상대로 한것은 아니다. 나는 당신에게 경거망동을 삼가할것을 권고한다.
당신의 정치적슬로간은 그대로 내걸면서도 남북협상제안을 파기할수 있는 방도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가 연구하여 당신의 정책보좌팀에 넘겨주겠다.》
이에 대하여 김구는 《알려주어 감사하다.》고만 대답하였다.
김구와의 담화. 안우생도 참가.
《미국사람들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글쎄 그 사람들의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내가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는건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그 리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크게 마음을 먹고 그네들에게 손을 내민다고 해도 그 사람들은 손을 잡아주기가 힘들게 되여있어.》
《어째서요?》
《털어놓고 말해서 공산주의자들은 내게 회계를 치를게 많단 말이야. 내 불민했던 탓으로 죄를 많이 졌거든.》
《공산주의자들은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한답니다. 그리고 회계를 친다면 돌팔매 한번이라도 왜놈에게 더 하셨겠지요.》
《거야 물론.》
《이북사람들은 백범선생님의 항일기개를 중히 여기고있는것 같습니다.》
《그건 정치하는 사람들의 상투적인 수법이야. 지금은 내가 필요하니깐 그럴수도 있지. 자네도 내 말이라고 다 곧이 듣지는 말게.》
《예?》
《허허, 아무튼 나도 정치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내 답답해 자네를 불러들인게 아닌가.》
오늘 오전 10시경 하지가 김구를 찾아왔다.
그는 매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의 권고에 침묵을 지키는 당신이 리해되지 않는다. 당신이 평양에 정 가겠다면 보내주기는 하겠지만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말라. 당신은 게도 놓치고 구럭도 잃게 될것이다.》
《무엇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가. 당신도 얼마전에는 우리에게 남북협상을 지지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때는 그때다. 정세는 달라졌다. 내가 특별히 찾아온것은 당신이 미국의 벗이기때문이다. 신변과 정치적운명이 걱정된다.》
《위협인가?》
《좋도록 생각하라. 나는 무관이다. 외교를 하고싶지 않다.》
김구는 그가 돌아간뒤 매우 침통하고 착잡한 기색이였다.
미군정청 정보국장 노불이 두명의 미국무성관리(이름과 직무는 미상)를 대동하고 찾아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북에 들어가면 어차피 서로 타협을 하면서 그 무슨 결정도 만들어낼것이다. 그러면 쏘련군도 물러가고 미군도 더 있을 체면이 없어 물러가게 될것이다. 그 얼마후면 전조선이 공산화될것이며 당신들은 무자비하게 숙청될것이다.
장개석이 얼마전에 대만으로 쫓겨갔다. 당신들은 교훈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한 3년후에 공산화된 서울에 장미 한송이를 들고와서 당신들의 묘지를 찾아가겠다.》
이에 대하여 김구는 결이 나서 맞섰다.
《우리 백성이 나더러 땅속에 들어갈 때가 되였다고 귀띔을 하면 이제라도 들어가는것이다. 그러나 난 장개석이처럼 동족에게 밀려 쫓겨다니는 겁쟁이가 아니다.》
측근인물들도 김구, 김규식과 자주 만났다. 일단 굳힌 결심에서 물러서면 력사의 웃음거리로 전해 질것이라는것을 력설하였다.
김구, 김규식의 측근속에서 미국놈들과 내통하는 인물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대로 미국의 지령에 따라 바쁘게 돌아치고있었다.
《13정당협의회》에 소속된 정당대표들도 매일처럼 찾아왔다.
《초지를 굽히지 말라. 나라 위한 일에서 남의 눈치 볼것 있느냐.》
그들은 한사람같이 입을 모았다.
…정시명은 초조하였다. 불안스럽기 그지없다. 그는 자꾸만 달력을 본다.
예정된 회담날자가 다가온다. 너무도 빨리 달려오는것만 같다. 그런데 김구의 주변소식은 어느 하나 귀가 번쩍 트일게 없다. 쉬임없이 김구의 대문을 두드리는 그 하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목소리들에 김구인들 견뎌낼수가 있겠는가. 이게 제일 근심이 갔다.
김구가 제아무리 고집이 센 인간이라도 그도 인간이다. 심장에는 피가 끓지 무쇠가 박혀있는게 아니다. 자료를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벌써 기가 죽고 심장이 파렬될것만 같은 상황이 무시로 김구의 주변에서 벌어지고있는것 같다.
그러니 어쩌면 좋은가. 그와 다시 마주 앉고 싶은데 만나야 그 수다한 목소리들중의 하나가 될것이니 길게 여운을 남길것 같지 못하다. 그래도 이대로 볼수만 없지 않느냐.…
정시명은 방금전에 안지생이 보내온 보고자료를 손에 든채 책상앞에 굳어져서 불꺼진 곰방대를 입에 물고 그냥 이 생각만 쫓고있었다.
안지생의 보고는 종합적인 성격을 띠고있었는데 매우 심상치않은 내용을 담고있었다.
… 백범은 지쳤다. 녹초가 되였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다 지쳤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접수구에 줄을 서있는 방문객들이 중구난방으로 저마끔 주의주장을 펴고 돌아가니 옆에 있는 우리도 지쳐있다. 듣는 말마다 너무 충격이여서 백범의 마음도 조변석개로 바뀌는가 싶다.
일체 방문사절이라고 패쪽을 걸어야 소용이 없다. 모두가 그냥 대문을 밀고 들이닥치니 어찌할수 없다. 우리는 미군정청에 경교장 보위경찰을 열배로 증강해줄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어제야 겨우 2명의 경찰이 증원하여왔다.
백범을 정신착란에로 의도적으로 몰아가는 놈들이니 그것만도 큰 선심이라고 할수 있다.
백범은 어제부터는 식음을 전페하고있다. 밥알이 모래알 같다고 한다. 이게 큰 야단이다. 안미생누님이 꿀을 탄 물을 들여가면 어째 꿀물이라는게 이리도 쓰냐고 한다.…
정시명은 안타까움속에서도 보고서의 마지막대목을 보고서는 제풀에 허거프게 소리내여 웃고말았다.
자기도 례영이보고 똑같은 소리를 했었다.
벌써 여러날째 밤을 밝히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시달려서 그런지 도무지 밥맛이 없었다. 그래 노상 숟가락을 들었다 마는데 바로 오늘 점심후에 례영이 주인집에 말해서 꿀물을 타가지고왔다. 그런데 한모금 마시니 꿀물이라는게 쓰겁기 그지없었다. 그래 《얘, 꿀물이라는게 어째 이리도 쓰냐.》하며 웃었던것이다.
그러니 김구의 각박한 정상이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에게서는 실로 인생의 전환이다. 그게 쉽게 될리는 만무하다. 그것도 말그대로 악전고투속에서 벌어진다. 김구가 이 고비를 넘기면 될것 같다. 그런데 이 고비를 넘길수 없을것만 같은 조바심으로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그를 막아선 벼랑턱이 너무도 험하고 뿌리깊고 집요하다.
8. 15전에 김구가 련공합작에로 끝내 이어지지 못하고 만것은 손을 내밀어주는 지인이 없었고 그래서 계속 무지와 편견이라는 울타리에 갇혀있었기때문이다.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그의 수족을 단단히 그러쥐고있다. 그를 반공이라는 진창에서 선뜻 용솟음치지 못하게 누르고있다.
정시명은 안지생의 안타까움이 다 리해가 된다. 그 보고서에 그려진 김구의 눈물겨운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와 그의 속에도 재가 차게 하는것이다. 늙마에 만시름을 끌어안고 한초한초를 초들초들 애간장을 태우게 한 불륜의 죄가 자기에게 있기라도 한듯 죄스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김구가 나를 얼마나 원망할가? 고요한 수면우에 샛바람을 일구어놓고도 얼씬거리지 않고 늙은이가 세간에 쫓겨 허둥거리는것을 보고있으니 원망을 들을법도 하게 되였다.
그렇지만 별도리가 없지 않는가. 거기서 나는 지금 할 소리가 없다. 이제 찾아가야 나역시 《미국놈들의 말 믿지 말라. 한번 다진 마음 굽히지 말라.》
이 소리밖에 없는데 안지생이만 해도 그런 소리는 하루에 열백번도 하고있을것이다.
하여튼 인차 가보기는 해야겠다. … 정시명은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곰방대에 다시 불을 달고 한모금 길게 빨았다.
담배맛도 좋지 않다. 창밖은 어둑시그레해졌다. 또 하루가 덧없이 지나간다.
정말 요새는 세월이 너무 빠르다.
발자국소리가 났다. 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례영이 들어왔다.
《아버님, 저녁진지 드십시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어머니보고 저녁생각 없으니 기다리지 말고 저녁을 치르라고 일러라.》
《아버지!》
례영이가 가까이 뛰여와서 엉석을 부리듯 그의 팔을 끈다.
《어서 내려가시자요. 오늘은 어머니가 특별음식을 마련했답니다.》
《허허 참… 그럼 어디 가보자.》
정시명이 례영의 살뜰한 청을 마다할수 없어 끝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주간에 내려서니 민순임이 밥상머리에 있다가 얼른 일어나 부엌에 가서 새까만 오지단지를 들고왔다. 상우에 접시를 놓고 그 우에 단지를 놓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구수하고 향긋한 냄새가 물씬 코를 찔렀다.
《이건 뭐요?》
정시명이 눈이 커져서 물었다.
《닭곰이랍니다. 당신이 벌써 며칠이 되였나요. 아무리 일에 다몰리기로서니 때식을 건네서야 어찌 일을 보시겠나요. 그래 례영이가 아까 시장에 나가서 깜장닭 두마리를 사들고왔군요.》
《그래?…》
정시명이 무등 고마움에 차서 례영에게로 고개를 돌리는데 례영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머닌…》하며 민순임을 향해 곱게 눈을 빤다.
《주인어른도 크게 걱정하셔요. 입맛 돋구는데 닭곰이상 없다며 몇마리 고아드리라고 등을 떠밀더래요.》
《괜한 걱정을 시켰구나. 하여튼 고맙다. 우리 다같이 먹고 기운을 내자.》
정시명이 이렇게 헌헌하게 웃으며 팔소매를 걷어올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단지뚜껑을 덮었다.
《어서 드세요. 식기 전에.》
민순임이 웬일인가 싶어 의아스러워하며 다시 뚜껑을 열려고 하였다.
《가만… 이걸 꼭 들어야 할 사람이 따로 있소.》
《예?… 누군데요?》
《자, 난 밥을 갖다 주오. 랭수 한그릇도… 이건 가마에 가져다가 그냥 덮어놓소.》
《아버지.》
례영이 또 웃몸을 흔들며 엉석을 부린다.
《원 당신두. 례영이 성의를 봐서 좀 드시는척이라도 하시라구요.》
민순임도 나무람을 하였다.
《여보, 백범선생이 어제부터 식음전페했다고 하오. 그래 그러오.》
《백범선생이? 그분이 어째서요? 평양 가신다구 하더니만.》
《그것때문에 골머리 아픈 일이 많지. 대사를 앞두고 그 어른이 넘어지면 큰 랑패요. 례영아, 네가 갖다 드리도록 해라.》
《그랬구만.… 그럼 이건 당신드세요. 사실 한마리는 래일 아침에 드릴려구 준비만 해놨는데 아침 일찍 고아서 갖다 올리자요.》
《아니, 내 말대로 해주오. 시간이 금쪽같소. 례영아, 얼른 랭수 한사발 들여오너라.》
하는수없이 례영은 얼른 일어나서 물 한사발을 떠가지고왔다.
《이젠 나도 밥맛이 생겼다. 자, 봐라.》
정시명은 정말 물사발에 밥을 말아가지고 고추장을 곁들어 잠시사이에 밥사발밑굽을 내였다.
민순임이, 례영이 눈이 퀭해졌다.
《왜 그러오? 허허…》
정시명이 껄껄 웃었다.
밥상을 치우고 례영이 길차비하는데 민순임이 따라 나섰다.
《저도 같이 갔다 올랍니다.》
《뭘? 닭 한마리 가지고 생색을 내듯 둘이 가겠소?》
정시명이 만류하였다.
《아니, 저도 좀 그 집 내인들이라도 만나 말을 좀 해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정시명이 웃었다.
《왜 그러세요. 저도 례영이한테서 다 듣고있어요. 그 어른 북쪽사람들을 무서워한다지요. 어디 나보구 무서워할게 있느냐 하구 좀 말하고 올랍니다.》
《당신이 정말 그렇게 하겠소?》
정시명이 놀라서 다시 물었다.
《왜요. 제가 못할것 같습니까? 그전에 송사령관댁도 저의 말을 얼마나 명심해 들었는지 몰라요. 송사령관댁이 절더러 북쪽의 대표라고 부러워했답니다.》
사실 민순임이 언젠가 정시명의 말을 들은 이래 제스스로 세워놓고 애를 쓰며 지켜가는 속기둥이 하나 있다.
그게 뭔가 하니 북쪽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그 자각이다. 거기서 한해반 되게 살았지만 어쨌든 서울사람들과는 다르다. 또 달라야 한다.
난 장군님치하에서 살아본 사람이다. 그것도 리녀맹부위원장까지 했다. 그러니 매사에 북쪽에서 살아온 사람답게 말 한마디 해도 걸음 하나 옮겨도 이 고장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 내가 잘못하면 남편망신은 젖혀놓고서라도 이북망신을 시킨다. 장군님치하에서 살았다는게 저꼴이냐고 누구라도 손가락질하면 어쩌랴.
그리고 민순임은 자기를 이 길에 세워주신 김정숙녀사의 말씀도 자주 생각하군 한다.
(내가 처신을 잘못하여 남편에게 짐이 된다면 그분께서 얼마나 실망하시겠는가. 그분의 뜻대로 남편의 일에 보탬이 되고 의지가 되게 살아야 한다.)
민순임은 노상 이렇게 마음을 다잡는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하루일을 곰곰히 돌아보며 다시 마음에 다져넣는다.
그렇게 사는게 헐치 않다. 마음 씀씀이 고와야 하고 일손도 부지런해야 하고 례의범절까지도 흠할데 없어야 한다. 그렇게 속을 써가는게 여간 부담스럽지 않지만 그때마다 그 녀자는 마음속으로 나는 장군님품에서 온 사람이라고 곱씹는다.
점차 이렇게 버릇붙여가니 어렵기만 하던 주변사람들 대하기도 한결 편해졌다. 아무렴, 서울사람들치고 나만큼 밝은 세상살이를 해본 사람이 몇이나 되랴 하는 배심이다.
지금도 민순임이 그런 심정으로 선뜻 례영이를 따라나선것이다.
이북사람들의 마음씨가 장군님의 치하에서 천하없이 고와졌다고 그 집의 안사람들에게라도 말해주고 오고싶었다.
민순임이 당장 일을 낼듯 기세를 올리는 바람에 정시명은 크게 웃고말았다.
(저 사람도 크게 달라지는구나.)
지지리도 무직하던 가슴 한귀퉁이가 달랑해지는것 같다.
문득 눈앞에 귀중한 모습이 비껴온다.
그 잊지 못할 평양의 눈내리는 밤에 민순임을 서울로 꼭 데리고 가라고, 부부간의 사랑은 절대로 짐이 되지 않는다고, 힘이 되고 의지가 될것이라고 그리도 살틀하게 마음을 써주시던 김정숙녀사!…
(그분께서는 무고히 지내시는지?…)
뜻하지 않게 가지를 쳐간 추억에 정시명은 그 자리에 우뚝 굳어져서 북녘의 하늘에서 오래동안 눈길을 거두지 못하였다.
김구는 불꺼진 방에 홀로 앉아있었다.
방금전에 리승만의 비서가 편지를 가지고왔었다. 북행길을 그만두라, 그러면 난 당신을 내세울 용의가 있다, 이에 대해 언론에 공개해도 좋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김구는 비서를 돌려보내자마자 편지를 초불에 태워버렸다. 그리고 비서실에 지금 와있는 방문객들에게 래일 아침 와달라고 이르라고 하고는 일찌기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버렸다.
네놈이 정말 이 백범을 권력에 환장한 놈으로 기어이 만들어놓으려고 안달복달이구나.
김구는 야등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천정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입속말로 중얼거리였다.
권좌를 가지고 북행길을 희롱하는것이 역스럽기 그지없다. 북행은 민족의 출로를 찾기 위한 길이거늘 네놈이 그따위 수작으로 나를 모함하려들어…
아침부터 지금까지 맞아들인 방문객들과 나눈 이야기를 더듬어보니 도무지 종잡을수 없다.
오늘도 여라문명 만났다. 이놈이 이 소릴 하고 저놈이 저 소릴 하고 달아났는데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어째서 이 백범이 평양나들이 한번 갈라는데 이렇게 모두들 법석들이냐. 아무리 공인의 몸이라 하지만 너무 소란스럽다.
련공이라… 내 아직 그런 말을 내비친적 없건만 그걸 코에 걸고 찧고 까분다.
하지도 리승만도 그 소리다. 평양행을 련공이라는거다.
하기는 공산주의자들과 마주 앉으면 그건 벌써 련공에로의 일보인것만은 사실이겠다. 그러니 정처장의 말대로 북은 공산주의자들이 타고앉았는데 그들과 마주 앉지 않고서야 어찌 나라의 흥망성쇠를 론할수 있으며 통일은 어떻게 한다는건가.
평양길만이 나라의 완전독립을 성취하는 길임은 틀림이 없다.
그런데 정말 이북사람들이 나를 건국대업에 같이 참가시키겠는가.
하지와 미국것들이 날마다 주어섬기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놈들의 수작질이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무심코 넘어가지는 않는다.
정말 그네들이 평양에 불러놓고 옛적일을 회계하자고 들면 이 백범은 건국대업은 고사하고 무주고혼으로 사라질수도 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을가?… 설마 그럴수야 있는가. 세상여론이 있는데 그런 무엄한 짓이 있을고?… 아니 아직은 기약이 없는 일이다.…
요새 김구는 북쪽소식이 실린 신문들을 구해들이게 해서 짬짬이 읽어본다.
위안거리를 제눈으로 찾아내고싶은 심정에서였다. 읽을수록 끌려드는데 시간이 없어 파고들지 못하는게 야속하다.
줄지어 달려드는 방문객들을 치르고나면 하루가 덧없이 지나고 그렇게 보낸 하루끝에 잠자리에 들면 온몸이 천길나락에 떨어지듯 녹초가 되고만다.
방문객들을 제한하니 그 다음에는 편지공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제는 비서실에서 편지를 다 들여보내지 않는다.
보고에 의하면 편지들에 별 주장이 다 있다고한다. 애걸, 협박, 고무… 보내오는 사람들의 직업도 주소도 천태만상이다. 어떤 때는 담장너머로 편지가 날아들기도 한다.
지나온 70평생에 인생고초 다 겪어왔는데 지금처럼 자신을 지탱하기 어려웠던적이 없었던것 같다.
《에잇!… 살아있다는게 이리도 고달프냐!》
김구는 저도모르게 화가 나서 부르짖었다.
그때 딸깍소리가 문밖에서 나더니 불이 켜졌다.
김구는 방안이 환해진것이 귀찮아서 누운채로 소리쳤다.
《놔뒀거라.》
그러자 맏며느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오냐, 맏이냐?》
김구의 목소리가 인차 부드러워졌다. 김구는 아무리 노엽거나 화나는 일이 있어도 맏며느리앞에서는 절대로 내색을 내지 않아왔다.
《내 홀로 있고싶어 그러니 그런줄 알아라.》
《여기 저녁진지 가지고왔습니다.》
《원, 먹고 싶으면 내발로 내려가지 않으리. 갖다두어라. 생각이 없으니 너희들끼리 하거라.》
《그런게 아닙니다, 아버님, 이건 전번에 오셨던 정선생님댁에서 손수 만들어가지고 왔습니다.》
《뭣이?… 정선생님댁에서?!…》
김구는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안미생이 하얀 보자기에 싼 단지를 들고서있다.
《그건 뭔데?》
《닭곰을 해왔다고 합니다.》
《닭곰?… 원, 이런!…》
안미생이 원탁우에 있는 서류들을 차대우에 옮겨놓고 그 우에 들고온것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접시를 놓고 거기에 단지에서 꺼낸 닭을 놓았다. 그러자 방안에는 구수한 닭고기냄새와 함께 삼과 황기의 향기롭고 달큰한 냄새가 가득 찼다.
김구가 원탁에 와서 닭고기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는데 안미생이 나직이 아뢰였다.
《정선생님의 말씀이 아버님이 큰 대사를 앞두고 식음전페하신다니 웬 말이냐 하시며 갖다드리라구 했답니다.》
《원, 이런…》
김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신통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듯 이렇게 입속으로 중얼거릴뿐이였다.
한참후에야 김구가 말했다.
《부인께 전해드려라. 내 맛있게 들겠다구.… 그래, 맛있게 먹어야지.》
《어서 드세요. 아버님 드시는걸 보고야 오라고 했답니다.》
《오냐, 오냐! 들어야지… 내 먹으련다.》
김구는 이렇게 목이 갈리여 중얼거리며 쏘파에 앉아서 안미생이 옆에서 한점한점 뜯어주는 고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김구는 아무말없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닭한마리를 앉은 자리에서 다 먹었다.
그는 안미생이 내주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일어섰다.
안미생이 요새 좀체로 입맛이 돌아서지 않아 얼굴이 꺼칠해지던 시아버지가 닭한마리를 다 녹이자 기쁨에 젖어 말했다.
《아버님, 이젠 끼마다 닭곰을 올리겠습니다.》
《허허허!… 뭘 그렇게 하겠느냐. 그래, 내 용렬한 놈이구나. 천가지 일들에 먹는 일이 으뜸이라 했거늘 대사를 앞두고 식음을 버리다니… 허허… 이런 념려까지 끼쳐드리다니…》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시아버지의 웃음소리에 안미생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여올랐다.
안미생이 단지를 도로 보자기에 싸들고 나가려 하는데 김구가 손을 내밀었다.
《인다오.》
《예? 제가…》
《자, 앞서거라.》
김구가 단지를 받아들고 계단을 내렸다. 며칠만에 달게 포식을 하니 팔다리에 기운이 뻗치는것 같다.
그는 사뭇 가벼운 걸음으로 부엌간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부엌에서 둘째며느리와 함께 동자질을 해주고있던 민순임과 례영은 김구가 들어서는바람에 모두 화닥닥 놀랐다.
그들은 얼른 행주수건에 손을 닦고 인사를 했다.
《선생님께 문안드립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러자 김구도 허리를 깊이 숙여 정중히 인사를 차렸다.
《부인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자, 저 방으로 모두 갑시다.》
김구는 녀인들을 응접실로 안내하였다.
《어서 앉으시우. 체네는 따님이시우?》
《예.》
례영이가 다시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아, 출가를 했군 그래… 어서 앉으라구. 그래 아버님은 무고하시우?》
《예, 그저 선생님걱정을 많이 하십니다.》
《그래, 그래… 두루 생각이 많아 지내지요.…》
김구가 침울한 어조로 말을 받다가 녀인들앞임을 인식한듯 인차 화제를 돌렸다.
《그래 따님은 뭘하지?》
《다방을 맡아봅니다.》
《다방을?… 다방일이 재미있지.… 사위도 끼고계십니까?》
《사위말입니까?…》
민순임이 그 소리에 대답을 흐리마리하며 고개를 돌리더니 옷고름을 눈에 가져갔다.
김구가 례영에게로 묻는듯한 눈길을 돌리자 례영이도 얼른 고개를 숙이였다.
나란히 앉아있던 둘째며느리가 대신하여 대답했다.
《갈라졌답니다.》
《어째서?》
김구가 대뜸 성이 돋쳐 물었다.
《이 꽃같은걸 버리다니?!》
《아버님. 그런게 아니구… 사위라는분이 피치 못할 일로 멀리 떠나갔다고 합니다.》
《그럼?… 녀자란 자고로 어렸을 때는 부모님 따르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서는게 인륜인데 어째 이 꽃같은 젊음을 홀로 보내게 하십니까.》
《글쎄, 그렇게 하느라고는 했는데 저들끼리 의논이 됐다구 합니다. 아버님이 힘에 겨운 일을 맡아하시는데 통일이 되는 날까지 애가 곁에서 시중들기로 했다나요.》
민순임이 말끝에 또 옷고름을 올린다.
《원, 무슨 소린지?… 통일이 언제 되겠는지 뉘 알고…》
김구가 이렇게 다소 침통한 어조로 웅얼거리였다. 그리고는 례영에게로 고개를 돌리였다.
《우리 늙은것들이 길잡이를 잘못해서 젊은이들이 이런 불행을 당하게 하는구나. 그래, 그래, 통일을 해야지. 암, 해야 하구 말구. 나라를 광복하니 새라새로운 인간불상사가 또 시작되였구나.》
마치 사죄를 하듯 말을 하던 김구가 눈을 스르륵 감았다. 한없는 비분이 그의 얼굴에 떠돌았다. 긴숨을 톺아올리던 김구가 눈을 번쩍 뜨더니 잠시 창밖을 노려보다가 민순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부인님, 정선생님께 전해주시유. 지금 내 주위에 억만파도 거칠게 춤을 추지만 내마음 흔들리지 않겠다구 말입니다. 오가는 여러 말을 흘려듣고 날 믿어달라구요.》
김구가 이야기를 마치자 례영이가 자리에서 불쑥 일어났다.
김구의 주름진 얼굴에 비낀 바위같은 기상을 쳐다보는 그의 눈귀에 구슬이 맺혀 불빛에 반짝 빛을 뿌렸다.
례영이는 지금 눈앞에 날이 바뀔수록 더욱 애모쁘게 그리워지는 마동열의 얼굴을 그려놓고있었다.
마동열이 당장에라도 자기를 찾아 되돌아서게 될것 같았다.
그 길에 얼기설기 쳐있는 철조망도 패말뚝도 일조에 사라져버리고 눈물겨운 상봉의 날이 성큼 다가온것 같다.
김구가 더는 드틸것 같지 않던 북행결심을 내려 여적 정시명이 못지 않게 빠질빠질 타던 자기 속도 시원하게 열어준것 같다.
그래 례영은 김구앞에 큰절을 곱게 하면서 눈물에 씻긴 또렷한 어조로 인사를 올렸다.
《백범선생님. 고맙습니다!》
례영의 뜻밖의 절에 김구가 크게 당황해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서라. 이러지를 말아. 어서 일어나거라. 얘야, 내 아직 따님으로부터 절 받을만 한 일을 해놓은게 아무것도 없은즉 어서 일어나거라.》
《선생님, 그애 절을 받으세요. 선생님께서 나서신 평양길이 선생님에겐 백성들을 위한 장하신 걸음이지만 그애에겐 제서방 만나는 발등에 떨어진 불끄는 일이랍니다.》
민순임이 또 한번 옷고름을 눈에 가져간다.
《뭣이?!… 그래, 그렇지… 부인님 말씀이 과시 옳습니다. 옳습니다. 통일은 발등에 떨어진 불입니다.
얘야, 그럼 내 절도 받아다오. 내 따님인사를 천만마디로 페부에 새기고 평양에 기어이 가련다. 어허… 어허… 어허… 너희 모녀 끝내 날 울리는구나!》
김구는 이렇게 목이 메여 중얼거리다가 오른 다리를 꺾고 례영이 앞에 허리를 깊이 숙이였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꺼내 연신 눈지방을 꾹꾹 눌렀다.
민순임도 안미생이도 맞절을 한채 마루바닥에서 쉬이 일어서지 못하는 두사람을 내려다보며 흐르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김구에게로 또 하나의 경사스러운 소식이 전해왔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친히 보내주신 초청장과 그이의 친서를 전달하러 정향이 찾아온다는 소식이였다.
안지생을 통하여 이 소식을 전달받은 김구는 감개무량하여 어쩔줄 몰랐다.
그는 정문접수로부터 큰길가에 이르는 곳에 촘촘히 안지생이 천거한 측근인물들을 배치하여 방문객을 들여놓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두 며느리를 차에 태워 꽃방에 보내여 향기로운 꽃을 가져다가 여러개의 꽃병에 꽂아 응접실을 꽃향기로 넘치게 하였다.
자기로서는 복잡하게만 서려들던 온갖 시름을 다 털어버리고 오래전부터 경모하여 마지 않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친히 보내주신 초청장을 최대의 성의로 받아들고싶었던것이다.
정시명은 김구의 정중한 환대를 받으면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회의초청장과 편지를 김구에게 내놓았다.
《3천만 우리 인민이 우러러모시는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의 비운을 막기 위한 구국방안을 함께 의논하기 위하여 남북련석회의에 선생님을 초청하시였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단선단정을 배격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시는 선생의 우국충정을 높이 평가하고계십니다.》
《정말 감사하외다, 나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이 불민한 사람도 친히 알아주실줄은 몰랐소이다.
김장군이 몸소 부르셨다면 난 기꺼이 평양으로 가겠소.》
김구는 장군님의 초청장과 편지를 두번세번 읽고 재확인하고 나서 숭엄한 감정에 휩싸여 이렇게 자기 의사를 표명하였다.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초청장과 편지는 그의 신변안전을 담보하거나 회의에 참가해달라는 한갖 통지서가 아니라 일생을 《반공》의 치욕속에 살아온 그의 혼탁한 가슴에 재생의 희열을 가득 채워준 은혜로운 해발이였고 반동의 길에서 애국의 길에로 이끌어주시는 사랑의 손길이였다.
김구는 이날 저녁에 《한독당》의 비상회의를 소집하였다. 김구가 연탁에 나섰다.
《우리의 북상에 대해 기우하는 세력도 있으나 우리의 전도에는 밝은 희망이 보이고있습니다. 우리 〈한독당〉은 민족의 리익에 이바지되는 일이라면 불과 물도 가리지 않고 뛰여들어 건국대업의 선구력량으로 매진할것입니다.
나 백범은 민족통일에 이바지할수만 있다면 38선을 베고 쓰러져도 한이 없습니다.》
김구는 자기의 북상결의를 이렇게 비장하게 선언하였다.
김구의 선언은 우익과 중간파의 정객들속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초청장을 받은 일부 정객들은 우익반동들의 집요한 방해책동과 정치적우유부단성으로 하여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김구가 사는 서대문구의 죽첨동 경교장으로 뻔질나게 나들었다. 남북련석회의에 김구가 어떤 립장을 취하고있는가를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그들도 김구가 비록 《단선단정》반대와 남북회담을 주장하였지만 설마 북의 공산주의자들과 합작이야 하겠는가 하고 생각하였던것이다.
그런데 김구가 비상한 흥분과 열의속에 참가할 용단을 내리고 북행길을 서두르는것을 보자 주저없이 그와 함께 보조를 같이 하기로 하였다.
조소앙은 《북에 갔다가 설사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기어이 김구를 따라서겠다.》고 하면서 만약 미군정당국이 합법적으로 가는 길을 막으면 비밀리에라도 가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이렇게 김구, 김규식세력의 회의참가문제를 일단락 짓게 되자 정시명은 홍명희와 리극로, 백남운, 리영 등 《13정당협의회》의 인물들을 내세워 회의참가를 결의해나선 남조선의 100여개 정당, 사회단체들을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라는 하나의 련합체로 묶어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