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사람이 사람이라 불리우는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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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무렵에야 박영수는 깨여났다.
박영수가 깨여났다는 보고를 받자 인차 수사과장이 나타났다. 그놈은 낮에 받은 정신적타격으로 흐리마리해있는 박영수의 기색을 살피다가 조롱하듯 씨벌이였다.
《이봐요, 과장님. 우리가 당신을 잘 모시자고 했는데 서울어른들이 모시겠다고 하는구만. 하지만 기뻐할 까닭은 전혀 없어. 승냥이를 피하니 이리를 만났다는 말 들어봤소? 당신 김창룡일 알아요? 경비대 총사령부 김창룡방첩과장말이요. 좌익에서는 울던 애도 그 사람 온다면 그친다고 해요.》
《왜 내가 군방첩으로 간단 말이요. 난 랍치당한 사람이 아니요?》
박영수는 새 소식에 오금이 저려물었다.
《랍치? 하하… 아직도… 좋소, 좋아. 당신 이제 김창룡의 따귀를 몇개 건사해보면 그따위 수작을 집어던질거요. 당신을 이관하는건 치안국의 결심이요. 빨찌산과 내통하였으므로 군의 관할에 넘기라는거요. 래일낮에 치안국에 호송되여 김창룡에게 넘겨질거요. 자, 행운이 있기를…》
그놈은 실상 그를 서울에 보내는것이 싫었다. 다 익혀놓은 감을 도적맞히는 기분이였다. 더구나 그를 려관에 가두어놓고 서울의 일등부자라는 그의 아버지의 돈을 몇달동안 갉아먹자던 노릇이 틀어지고말았다.
그놈이 일어나서 문쪽으로 걸어가자 박영수는 이제껏 입속에서 맴돌기만 하던 말을 꺼내놓았다.
《가만, 수사과장. 한마디만… 당신은 평양에서 통일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못 들었소?》
《통일회담?》 과장놈이 흠칫 놀라며 홱 돌아섰다.
그러나 그놈은 눈을 몇번 꺼벅거리고 나서 다시 히물거리며 뇌까렸다.
《그게 어쨌다는거요? 통일회담을 할 사람들은 하라지. 우린 그따윈 몰라.》
그놈은 꽥 소리지르고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걷어차며 나가버렸다.
박영수는 문쪽을 노려보다가 나직히 중얼거리였다. 《그걸 모른다구?… 그래도 네놈이 조선사람이냐?… 그래, 네놈들에겐 통일회담이 안중에 없겠지. 네놈들은 애당초 나라걱정을 할 놈들이 아니지. 네놈들도 무슨 사람인가. 어리석구나, 야만들더러 사람다운 흉내를 내보라고 했으니… 이 땅이 다시 합쳐지자면 사람구실 못하는 저런 놈들부터 솎아내야 할가부다.…》
그놈이 돌아가자 박영수는 새로운 공포에 빠져들었다. 그도 김창룡이라는 이름을 들은바가 있었다. 그는 완전히 무아몽중에 휘말려들었다. 속안에 큰 방아질이 시작되고 무시로 공포의 전률이 등줄기를 오싹오싹 죄여놓았다.
박영수는 몸도 마음도 파김치처럼 후지레해지고말았다. 그는 침대우에서 딩굴며 《김창룡… 김창룡…》하고 얼이 빠져 중얼거리였다. 《뱀과 같은 놈》, 《주린 이리같은 놈.》, 《여우같은 놈》,… 그놈의 이름뒤에는 세상의 못된 이름이 다 붙어다닌다.
낮에 보고온 그 피비린내나는 끔찍한 광경들이 떠올라 그는 머리끝까지 모포를 뒤집어썼다.
(내가?… 내가 그런짓에 견디여낼수 있을가. 그래 견디여내야지. 처녀들도 견디여내는데 사내라는게 견디여내지 못할가.)
그 흉측한 광경이 떠오르자 이발이 덜덜 맞쫗는다. 전기의자에서 꿈틀꿈틀 거리며 악을 쓰던 사나이의 처절한 모습도 생각났다.
(아, 난 견디지 못할것 같애. 난 자신이 없어.… 정신착란도 된다는데 난 견디지 못할거야.…)
이처럼 자기 아픔과 닥쳐올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며 치를 떨고있던 박영수는 문득 갈마드는 한 생각에 소스라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내가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면 우선 송선생님이 잘못된다. 그 다음차례는 정선생님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무사치 못할것이다. 례영이도 그리고 집안에 드나들던 여러 선생들이 걸려든다. 그래 그렇지. 내가 지금껏 이걸 잊고있었구나.… 어떻게 하면 좋을가? 말안하는 재간이 없을가? 혀를 꽉 깨물어 끊어버릴가?…)
이렇게 생각하는 박영수의 이마에 식은땀이 돋았다. 그는 앞이발로 혀바닥을 지긋이 씹어보았다.… 아픔이 느껴지자 그는 흠칫거리며 뒤로 넘어졌다.
한참후에야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박영수는 혀바닥의 알알한 감촉을 느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겐 혀바닥을 물어 끊을 용기도 없구나. 하지만 부질없는짓일것 같다. 펜을 가져다가 강박을 하면 그것도 허사다.
아, 그러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통일의 날도 가까와오는데 내가 그 위대한 대업에 몸바친 애국자로 남아야지 그 길에 나선 의로운 사람들을 물어메칠수야 없지 않느냐.… 그건 사람이 할짓이 아니다.…)
정시명을 처음 만났던 일들이 떠올랐다.
… …
《선생님, 애국자로 되는데도 어머니의 승인이 있어야 합니까?》
그건 분명 나의 말이였지.
그래, 그때 나는 결심을 했다. 나는 애국자라는 말이 부러웠다. 애국자로 살아가리라 맹세를 하였다.
《얘가 경성제국대학을 나왔다고 그러시오? 아니면 외아들이라고 마음쓰시는게 아니시오?》
그건 아버지의 목소리다. 아, 아버지, 불쌍한 나의 아버지, 독립군에서 물러난것을 일생의 치욕으로 두고두고 후회하던 아버지! 그래서 자기를 대신하여 이 아들을 애국하는 길에 내세우고저 하였지.
《그런 생각도 바이 없는게 아닙니다. 아드님까지 우리 일을 하면 결국 선생님의 집안은 3대가 다 어려운 길에 나서게 됩니다.》
《원, 3대가 다 나라통일을 위해 나선다면 그보다 영광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직도 두분의 대화가 쟁쟁하다.
《난 영수한테 아무런 약속도 해줄수 없소.》
정선생님의 말씀이였지.
《알고있습니다.》
《좋아. 다만 내가 믿고싶은것은 우리가 나라의 운명을 자기의것으로 받아들이고 겨레의 고통을 덜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나간다면 후손들이 우리를 애국충신으로 불러주리라는것이요.》
《더 바랄것이 없습니다.》
… …
(그래, 그래, 그래… 후손들이 애국충신으로 불러준다면 난 더 바랄것이 없어. 통일의 날도 멀지 않았는데 내가 구차하게 제목숨 건지겠다고 한다면 뒤날에 후손들이 날더러 나라분렬을 고집하던 저 악마의 족속들을 도와준 역적이라 부를거다. 그건 너무나도 엄청난 치욕이다. 3대를 내려가는 애국의 우리 가문족보에 영원한 치욕을 남기는 용렬한 짓이다. 사람은 사람다와야 한다. 사람을 사람이라 부르는 리유가 바로 그게 아닌가. 옳다, 내 생각이 옳다. 동지들을 배신하는 덕으로 내가 얻을건 역적의 오명밖에 없다.…)
박영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모포를 개여서 베개우에 얹어놓고 방구석에 밀어놓았던 저녁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여러날 먹는둥마는둥 설때여왔는데 이번에도 깔깔한게 꼭 모래알 씹는것 같다. 그래도 박영수는 꽁꽁 씹으며 밥사발을 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나니 창밖이 푸릿푸릿해왔다. 그는 나들 문을 쾅쾅 때렸다. 문을 지키던 경찰들이 들어왔다.
《펜과 종이를 가져와!》
박영수는 처음으로 경찰들을 쏘아보며 화난 어조로 꽥 소리쳤다.
이른 새벽에 내린 박영수의 호령에 경찰들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공손히 대답했다.
박영수는 경찰들이 펜과 종이를 들여보내주자 옷을 입고 상두대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아버님전상서
불초한 자식은 이렇게 슬하를 떠나가니 용서를 비나이다.
이제 새날이 밝으면 저는 악귀들의 소굴이라 불리우는 김창룡의 손아귀에 넘어간다고 합니다. 아무리 고쳐 생각해야 이 불민한 자식은 그놈들의 행패에 견뎌내지 못할것 같습니다.
제가 만약 본의아니게 저놈들의 행패에 못 이겨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한다면 목숨이 붙어있다 한들 무슨 살아있는 목숨이고 어이 고개들고 밝은 해를 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차라리 깨끗이 부모님께서 마련해주신 생을 마감 짓는것이 편하리라는 결심을 하게 되였습니다. 저도 사람답게 살렵니다.
저를 아껴주신 여러분들에게 소인은 애국충신으로 후회가 없이 살았노라고 자랑스럽게 전하여주십시오. 부탁은 이제 세상에 나올 자식을 애국의 혈통을 바르게 이어나가도록 해주십시오.
아버님! 어머님! 저도 여기서 북남회담에 대한 꿈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멀지 않아 맞게 될 통일 내 나라에서 저의 몫까지 부디 만복을 누리며 만년장수하시소.
또 한통의 편지를 썼다. 도지사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죄 지은것없이 행패만 당하니 너무도 분하고 억울해서 마지막길을 간다는 짤막한 유서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유서를 나직이 소리내여 읽고는 차곡차곡 접어서 밥사발안에 넣었다. 거기에 아버지의 주소를 적어넣고 방에 드나들던 접대원더러 전해달라는 부탁도 써넣었다.
도지사에게 보내는 편지는 상두대우에 펴놓았다.
그는 창가에로 다가갔다. 창문이 열렸다.
(이놈들! 내가 여기서 뛰여내리리라고는 감히 생각을 못했겠지. 뭐 골방샌님이라고? 그래 난 속이 모진 놈은 못된다. 이제 봐라! 그 골방샌님이 어떻게 하는가를…)
박영수는 이렇게 나직이 중얼거리며 동터오는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한점 없는 봄날의 하늘은 티없이 맑고 높다. 그는 아침공기를 탐스럽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시원히 열린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가볍고 평온해졌다. 지금까지 온몸을 쑤시던 아픔도 가뭇없이 사라지고 온 심혼을 무겁게 짓누르던 공포도 불안도 깨끗이 지워졌다.
(아버님! 저는 갑니다. 어머님, 울지 마세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던 박영수가 고개를 홱 저었다. (엥이, 뭘 자꾸 지체할가.) 그는 이미 세워놓은 결심이 흔들릴가봐 걱정스러운듯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복잡해지면 뛰여내리지 못한다.
그는 두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그의 입에서 별안간 대전시내를 들었다놓을듯 굵고 우렁찬 웨침이 튀여나왔다.
《조국통일 만세!》
그는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새벽무렵이라 그의 심장의 터침을 그 누구도 들어준 이는 없었다.
려관나들문에서 꺼떡꺼떡 졸고있던 문지기령감만이 비몽사몽간에 오락가락하다가 때없이 울린 만세소리에 화닥닥 깨여났을뿐이였다.
그러나 만년토록 억년토록 이 땅을 부드럽게 안아온 깨끗한 대기와 이 땅의 뭇생령들을 번성시켜온 대지는 이 나라의 충직한 아들의 그 피에 젖은 절규와 불사신의 모습을 묵묵히 새겨넣었다.
… …
이제까지 내려온 우리의 이야기에서 그리 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묻혀있던 한 주인공은 이렇게 떠나갔다.
박영수!
평소에는 말이 없고 조용하고 소심하여 정시명조차 념려가 앞서던 청년!
그는 스물일곱해라는 짧은 인생을 이렇게 순결하게, 장렬하게 마치였다. 자기의 고결한 량심에 티한점, 남기지 않고 그는 이렇게 순국하였다.
원컨대 나의 책이 통일된 조국에 전해진다면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삼가 부탁드리노니 이 젊은 애국충신을 잊지 마시라.
통일된 조국에서 애국충신으로 불리워 지기를 한생의 소원으로 남긴 젊은 투사를 부디 추억하시라.
그리고 그가 남긴 웨침을, 그의 심장의 노래를 함께 불러다오. 《조국통일 만세!》
삼가 바라노니 그 노래와 더불어 다시는 헤여지지 마시라. 만년을, 억만년을 하나로 뭉쳐 이 나라 애국충신들의 그 소원을 빛내여가시라. 조선을 만방에 떨쳐가시라.
… …
치안국 수사지도과장 김창기가 파견한 호송차가 려관에 도착한것은 그가 투신자결한 때로부터 두시간후였다. 김창기는 자기의 조직성원들로 호송조를 무어서 파견한 동시에 서울로 오는 로상에도 조직성원들을 파견하여 《탈환공격》을 하도록 하여놓았다. 탈환한 후에는 즉시로 부산으로 빠져나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박영수의 자결로 하여 계획은 틀어졌다.
김창기는 박영수의 투신자결을 경찰의 과잉폭력에 의한 결과로 눌러놓았다.
그래서 사건은 마무리되고 그 여파가 서울쪽에 몰려올 위험은 제거되였다.
박영수의 처가 려관접대원에게서 넘겨받은 유서를 가지고 그날중으로 시집으로 올라왔다.
동래온천에 가있던 박정인내외도 급보를 받고 돌아왔다.
너무도 아쉽고도 돌발적인 박영수의 자결에 지휘부는 비장하고도 숭엄한 분위기에 휩싸여있었다. 박영수를 평소에 알고있는 사람들은, 지어 박정인까지도 그가 그렇게도 단호하고 영웅적으로 자기 목숨을 끊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던터라 그 충격은 더욱 컸다.
박정인이 큰 싸움을 벌려놓은 때에 부담이 된다고 간곡히 막았으나 정시명은 기어이 서병남의 집에서 추모모임을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지휘부성원들과 함께 집주인인 서병남과 박정인내외 그리고 민순임과 례영, 권혜숙도 참가하였다.
정시명이 먼저 추도사를 하였다. 모두가 눈물을 머금고 고인의 뜻을 받들어 통일성전을 힘차게 벌려나갈것을 맹세하였다. 그들은 당면하여 북남회담을 기어이 성사시켜 박영수가 애타게 그리던 통일의 날을 당겨올 불같은 맹세를 다지였다.
추모회가 끝난다음 정시명은 박정인에게 그동안 아들이 벌려온 책임적이고도 위험한 공작에 대하여 다 이야기하여주었다.
《영수가 잘못된데는 저한테 큰 책임이 있습니다. 너무 힘에 겨운 임무였지요. 그리고 여기 일에 다몰려 뒤를 각근히 봐주지 못했습니다. 날 욕해주십시오.》 정시명이 너무 절통하여 비분을 금치 못했다.
《아니, 그러지 마시우다. 그 길은 자기가 선택한 길이지요. 장한 길이지요. 그 앤 소원대로 애국자가 되였습니다. 그 앤 애비처럼 한생에 티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시우다. 정선생이 마음 쓸 일이 오죽 많소.》
박정인이 오히려 절통해하는 정시명을 위로하느라고 여러말을 하였다.
박정인은 대문밖에 바래워주러 나온 정시명에게 자기는 고향에 가지 않겠노라고 말하였다.
《그건 지휘부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그래서 따로 부탁드리는겁니다. 난 남과 북이 영수의 소원대로 합쳐지기 전에는 서울을 뜨지 않겠습니다. 내 짐이 되지 않겠으니 저를 쫓아보낼 생각은 마시우다.… 내게 더 중한 일을 주시우.》
《고맙습니다.… 그러나 가셔야 합니다.》
《영수가 어째서 제 목숨을 통일제단에 초불이 되여 불태웠겠습니까. 그래 내가 아들이 못 이룬 일을 뒤에 두고 전장터를 떠나야 하겠습니까. 우리 애가 땅속에서라도 애비가 이 통일성업을 피해갔다는것을 알면 바른 처사라 하겠습니까?》
《박선생님, 선생님의 제기를 다시 토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부탁할게 있습니다.》
《예, 어서 말씀하십시오.》
《우리 며늘애를 이북에 보내주시오.》
《며느리를?》
《예, 손주가 되겠는지 손녀가 되겠는지 이제 태여날 애만은 나서부터 밝은 세상에서 키워보고싶습니다.》
《예, 그렇게 합시다. 평양으로 보냅시다. 장군님의 품으로 보냅시다. 아마 통일렬사의 자식이라고 중히 여겨 키워줄것입니다. 이제 3일제를 치르고 인차 조직하겠습니다.》
박정인이 허리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시하고 큰길에 나서다가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또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그래요? 어서 얘기하십시오.》
《저 다름이 아니고… 나도 지금 우리 지휘부가 벌려놓은 싸움을 대강은 짐작이 됩니다. 어디 다른데 헛눈 팔고있을 때가 되였습니까. 지금 서울장안이 북남회담문제로 얼마나 론난이 일고있습니까. 그러니 이젠 영수의 일은 지휘부에서 페일언하여 주십시오. 그애때문에 부지깽이도 뛰여야 할 판에 여러분네들이 얼마나 크게 힘을 뽑았습니까.… 3일제도 그만 둘렵니다.》
뼈아픈 상실과 슬픔을 안고서도 박정인은 지휘부사업에 페를 끼치는것이 자못 념려스러웠던것이다.
정시명은 그 웅심 깊고도 세심한 정에 못내 감심이 되여 그에게로 다가가 두팔을 부여잡았다.
《박선생님, 영수의 죽음이 우리들을 지치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힘은 백배해지고 우리의 싸움은 더욱 기세충천할것입니다. 우린 기어이 남북회담을 성사시킬것입니다. 아드님의 유지를 가슴마다에 새기고 통일의 대문을 열어나갈것입니다.》
정시명의 이야기는 고인의 령전에서 다지듯 비장하고도 엄숙하였다.
정시명은 박정인과 주씨부인을 바래워주고나서 오래도록 집에 들어서지 못하였다. 그저 박영수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중천에 덩실하게 떠있는 늦보름달을 쳐다보아도 박영수의 희멀쑥한 얼굴만이 보였다.
길지 않은 생을 너무도 조용히 살아온 박영수다. 등뼈가 휘도록 삯짐 한번 져본 일도 없고 불의에 도전하여 피 한방울 날려본 일도 없는 영수다.
그 영수가 투사답게 최후를 장식하였다.
무엇일가?… 무엇이 단아한 가정의 울타리안에서 호의호식하며 자라온 영수를 투사로, 애국충신으로 이 나라의 력사와 후손들앞에 우뚝 솟아오르게 하였는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를 낳아 키워온 부모들마저 믿지 못하던 그 인간이 어떻게 제 한몸을 서슴없이 자결이라는 헐치 않은 인생의 극한점에 던지게 하였을가?
내가 그 아름다운 넋을 소중히 받아들이지 못하였더라면 얼마나 뼈저린 후회를 남기게 되였을것인가. 그렇다, 우리가 그를 철석같이 믿어의심치 않았던것은 잘한중에서도 잘한 일인것 같다.
그의 진정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저울질하였더라면 나는 한생에 씻을수 없는 오점과 수치를 남기게 되였을것이다.
문득 지난해 초에 장울화에 대한 뜻깊은 추억을 들려주시던 김일성장군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장군님께서는 그때 인간이란 태여난 출신이나 자라난 환경에 관계없이 진리를 자기의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람답게 살려는 아름다운 지향을 간직하게 된다면 그처럼 고결해진다고 말씀하시였다. 그것은 우리 장군님의 인간사랑의 출발점이며 인간중심의 정수이며 애국애민의 진수이다.
박영수의 빛나는 최후는 겨레의 운명을 한품에 안아주시는 장군님의 그 위대한 덕망과 도량의 승리이며 그 고귀한 사상이 펼쳐놓은 고결한 화폭이다.
정시명은 은하수가 뻗어간 북쪽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나직한 어조로 그러나 한없는 고마움과 감사의 정을 안고 아뢰였다.
《장군님! 당신의 웅건한 인간중심의 사상은 또 한명의 애국렬사를 이 나라의 민족사에 세워주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