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고목의 뿌리
3
한대의 승용차가 방금 한강다리를 넘고있었다.
해질무렵이라 더위는 한풀 죽어들고 차창을 스치는 바람결이 신선하다. 땡볕에 시들었던 가로수의 넓은 잎새들이 저녁바람에 생기를 띠고 흐느적거린다.
승용차는 군정청청사의 앞길을 에돌아 북악산을 넘어 경무대가 자리잡은 세종로 1번지의 울창한 수림속에 들어섰다.
승용차의 앞좌석에는 하지의 부관이 앉아 있고 뒤좌석에는 정시명과 류동명이 앉아 있었다.
정시명은 흥국상회에서 차를 몰고온 하지의 부관과 대기하고있던 류동명을 만나 하지의 관저인 경무대로 향하였다.
마동열이 자신을 정시명의 비서라고 소개했으나 하지의 부관은 《이분을 모시는것은 우리 미군사령부입니다.》하고 동행하는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정시명은 달리는 차안에서 경무대의 연혁을 더듬어보느라니 자연히 의분의 피가 끓어올랐다.
이곳은 6. 10만세사건직후에 왜놈총독이 경복궁을 눌러버리고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룡맥을 끊어버린다고 하면서 이렇게 경복궁 북쪽의 높은 언덕인 경무대에 제놈의 관저를 지어놓았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총독관저자리물색에 몰린 조선의 풍수쟁이들이 왜놈들에게 이 나라의 명당을 고스란히 줄수 없다고 의합이 되여 룡맥에서 벗어난 위치에 자리를 잡아주었다고 한다. 그때문인지 조선총독을 지낸 왜인들은 물론 그후에 이곳에서 주인질한 놈들치고 불행한 말년을 보내지 않은 놈이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곳이 명소인것은 틀림없다. 북으로는 북악산이 서있고 앞에는 남산이 이마를 마주하고있으며 좌우로는 인왕산과 남산이 파수병처럼 서있는가 하면 청계천의 맑은 물과 한강이 감돌아 흐른다.
그런데 벌써 서른해동안이나 이 땅을 깔고앉은 이방의 무리들이 이곳에 도사리고 서울을 굽어보며 떵떵거린다.
(언제면 저놈들을 들어내고 이 나라의 주인을 여기에 모시게 되려나.)
정시명은 이렇게 서글픈 생각을 안타까이 되풀이하느라고 차창밖의 경치구경도 미처 하지 못하였다.
어느덧 자동차는 경무대의 정문앞에서 멈춰섰다.
청기와를 씌운 3층짜리 건물이 우뚝 막아서고있다. 이 건물을 일본의 9대총독 아베가 쓰다가 지금은 하지가 틀고앉아있다. 건국준비위원회가 서울에서 권력기관의 업무를 맡았던 8. 15직후에 어떤 사람들은 한사코 독립국의 체모를 세워야 한다면서 그 위원장이던 려운형더러 차지하라고 요청하였는데 당자가 자기는 이 나라의 옥좌를 바라는 사람은 아니라고 단마디로 사절했다고 한다.
정시명은 하지의 부관을 따라 경무대의 울타리안에 들어서자 통분한 심정을 더욱 금할수 없었다.
두개의 성조기가 파수병처럼 등뒤에 꽂혀있는 넓다란 집무실에서 하지는 군복상의를 벗은채 벌써 오랜 시간 조각상처럼 굳어져있었다.
책상우에는 장개석의 국민당대령옷을 걸친 정시명의 사진과 신원조사문건, 그에 대한 한페지정도의 종합평정서가 놓여있었다.
이제 15분후이면 류동명이 정향을 앞세우고 들어올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지가 생각하고있는것은 그에 대한것이 아니였다. 최근에 들어와 더욱 몸처신이 거북해져가는 자신에 대하여 불편스럽게 돌이켜보고있었다.
일리노이주립대학 건축학부를 졸업하였을 때 그의 인생은 건축학과 군사복무라는 갈림길에서 머뭇거렸다. 그때 만약 건축기사증명서의 무게를 무겁게 인식하였더라면 지금처럼 고달픈 인생을 사지 않았을것이였다. 한발 잘못 내밟아 기사증은 트렁크속에 꾸겨넣고 미국의 1류급 군사학교인 웨스트포인트 륙군학교에 들어갔다.
그때가 수십년전이다. 그 수십년 하지는 줄곧 군복을 걸치고 살아왔다. 명예와 무공으로 이어진 비교적 화려한 길이였다. 필리핀에서 바탄의 도주병으로 세상에 더러운 이름을 남긴 맥아더와 함께 치른 그 운명적비극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눈부신 고속승진으로 3성장군까지의 행보를 순조롭게 달려온셈이다.
태평양전쟁에서 하지는 미군의 선견대를 이끌고 오끼나와에 처음으로 상륙하였다.
이로써 하지는 미국인들속에서 일약 사무라이땅에 앵글로 색손족의 위세를 떨친 첫 미국장군으로, 영웅으로 전해졌다.
련이어 서부도이췰란드와 같은 비중이 실린 반공대결의 극동보루로 된 남조선을 타고앉음으로써 일약 일리노이주의 목수의 아들이 세계적인 인물로 되였다.
그러나 이즈음에 와서 자기에게로 쏠리는 내외의 여론은 어둡기만 하고 어깨에 올려놓은 장군별이 무겁기만 하다. 혁혁한 무공으로 수놓아진 인생이 이 조선땅에 들어서서부터는 끊임없는 좌절과 실패로 이어져 근래에는 걷잡을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였던것이다.
지금 하지는 워싱톤에서 겪었던 불쾌한 일들을 생각하고있었다.
… … …
몇해전까지만 하여도 직계상관이였던 국무장관 마샬은 이례적으로 자기의 저택에서 그를 만나주었다. 이야기는 저녁을 같이 한다음 시작되였다. 그사이 몸이 퍼그나도 축이 갔다고 걱정을 해주던 마샬은 느닷없이 서너페지짜리 얇다란 문서를 주면서 그걸 먼저 본 다음에 이야기를 하자고 하였다.
미쏘공동위원회와 관련한 그 무슨 추궁이라도 받은듯 싶어 사전에 막료진을 불러 적당한 변명거리를 만들어왔던 하지는 마샬의 례외적인 환대와 부드러운 인상에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마샬이 된벼락을 들씌우기 위한 전주일수 있다고도 생각하면서 긴장된 마음으로 문서장을 번지였다.
그것은 뜻밖에도 하지의 본국호출에 앞서 워싱톤정가를 돌아친 리승만에 대한 자료였다.
리승만은 하지나 브라운이 후견인행세를 해온 구펠로를 쫓아보낸 뒤로 정치의 주패장을 이쪽저쪽으로 돌려가면서 자기와는 적당히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분통을 참을수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결연히 태평양을 넘었던것이다.
리승만일행에는 녀편네와 측근비서들 그리고 하지의 통역으로 들이민 자기의 이전 정부들인 《대한녀자국민당》위원장 임영신과 모윤옥을 비롯한 요염한 녀인들도 다수 끼여있었다.
리승만은 자기의 친미통로인 《한국위원회》의 구펠로와 올리브를 비롯한 미국동료들을 앞세우고 워싱톤정가로 뚫고 들어갔다.
리승만은 마샬을 만난 후 트루맨대통령까지 만나려고 무진 애를 다 썼지만 백악관대문만은 끝내 열수가 없었다.
리승만의 녀편네인 프란체스까와 녀인들은 치마자락을 휘저으며 상류급 인물들의 침방에 슴새여 들어가 리승만선전에 열을 올렸다.
리승만은 마샬을 비롯한 국무성과 국방성의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하지를 《미국의 리권을 공산권에 팔아먹는 국제공산당의 프락찌야》, 《한반도의 공산화를 획책하는 빨갱이》, 《미국의 외교력을 약체화시키는 3류급외교관》이라고 이미 씌워놓았던 감투를 또다시 마구 씌워놓았으며 당장 소환하여달라고 성토를 했다.
하지는 빨간 밑줄을 쭉쭉 그어놓은 그런 대목들을 볼 때마다 주먹을 꽉 틀어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분이 어떻소, 장군?》
마샬이 하지가 문건의 마지막페지를 넘기는것을 보고 물었다.
하지는 마샬의 찌르는듯한 눈길을 마주 쏘아보다가 《허허허-》하고 창자가 텅 빈듯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가 어이없어 하는 꼴을 주의깊게 응시하던 마샬도 빙긋 웃었다.
하지는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서장을 무례할 정도로 앞상에 던졌다.
《그래서?… 련방수사국에 넘기려고 호출했습니까?》
하지는 거친 어조로 반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샬이 어이없는듯 손을 내저으며 통쾌하게 웃었다. 그는 앞상을 에돌아 하지에게로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차피 손잡고 일할 인물이니 더 깊이 그 인물됨을 알라는거요.》
《손잡고 일할 인물이라니요?!… 그러니 그 늙은이의 워싱톤행각에 참모총장각하도 바람을 쐬인듯 싶군요.》
하지는 여전히 랭담하게 말했으나 참모총장이라는 어제날의 호칭을 씀으로써 자기의 이야기를 부드럽게 윤색하였다.
《그래 뭐 다른 선택이라도 있다는거요?》
《다른 선택이라니요. 난 아직도 그 누구도 선택한바가 없습니다.》
하지는 시치미를 떼고 고집을 부렸다. 속에서는 마샬에 대한 노여움이 고여올랐다. 리승만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고있는 미행정부의 주관에 불만이 컸다. 왜 미국의 고위층이 리승만을 선호하고있는가.
리승만이 군정청의 문턱을 넘어서서도 공공연히 주종관계를 혼돈하는듯 한 방자한 언행을 의도적으로 퉁퉁 던지군 하는것도 리승만의 몸값을 잘못 계산한 미행정부 고위인물들의 한발 앞선 립장에 기인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는 자기의 불만을 일부러 표현하면서 말을 이었다.
《난 리승만에 대한 국무성의 기성공론을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현지파견관들도 미국의 립장에서 자기 견해를 피력하고있다는것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서울의 미군사령부나 군정청에는 유감스럽게도 미국의 리권을 팔아먹는 국제공산당 프락찌야는 없습니다.》
마샬은 하지의 로골적인 불평을 자기에 대한 믿음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이며 크게 소리내여 또 한바탕 웃었다.
《중장, 너무 노염을 쓸건 없소. 좋소, 그 문제와 관련하여선 시간을 주겠소. 그런데 멀지 않아 우린 남조선에서 자기의 무력을 철수시켜야 할것이요. 그러니 군정도 시한부적이라는것을 당신들도 알아야 하오. 시간이 없소. 그때까지 당신은 조선반도에서 미국의 리권을 지켜낼수 있는 현지인들의 통치집단을 만들어놓아야 하오. 현 시점에서 당신이 준비한 남조선의 정치세력은 북조선의 공산집단에 대적이 되지 않는다는것을 다시한번 당신에게 상기시키오. 어디 한번 리승만보다 더 무게가 가는 미국적인 인물을 수완껏 선택해보시오.》
마샬의 마지막이야기들은 비꼬는 어조로 그러면서도 마지막말미를 주는듯 한 랭혹한 선고처럼, 하지의 정치적력량에 대한 불만으로 들렸다. 마샬은 포도주를 잔에 부어주고 그의 성공을 빌었다.
하지는 마샬이 부어준 잔을 입술에 대는척 하다말고 불쾌한 마음으로 그의 방을 나섰다.
대기실에서 뜻밖에도 자기의 통역으로 이따금씩 나타나는 임영신을 만났다.
며칠전부터 통역관들속에서 보이지 않는것을 범상하게 생각하고있었는데 결국 리승만의 워싱톤행에 합류한 모양이다.
임영신이 드문히 밀실에 나타날 때면 늙다리가 파먹던 몸뚱아리라는 느끼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대로 아직도 요염한 자태와 사내들의 간을 쉽사리 녹이는 포실포실한 봉사에 환락의 저녁시간을 보내온 하지는 여기서 그 녀자를 만나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녀자도 미국무장관의 대기실에서 하지를 만난것이 너무도 뜻밖이여서 얼굴이 활딱 붉어져가지고 자리에서 냉큼 일어났다.
그러나 사내들을 다루는데 이골이 난 그는 쥐구멍이라도 기여들고싶은 심정을 감추고 그 요염한 눈길을 내리깔며 《저, 국무장관각하를 힐톤호텔에서 열리는 저녁파티에 모시게 되여 제가 초청장을 가지고왔습니다. 사령관각하도…》하며 랑랑한 영어로 말하는데 마디마디에 애교가 찰랑인다.
순간 하지는 피끗 뇌리를 스치는 한 생각이 떠올랐다. 마샬도 리승만의 이러한 뒤공작에 걸려들어 그의 지지인물로 둔갑하고있는것이라는 생각이였다.
자기에게 섬기는 리승만의 막대한 돈과 주색이 이 워싱톤정계에도 골고루 흘러들고있는것이다. 결국 리승만은 제 나라의 리권을 팔아 모아들인 돈을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밑천으로 이렇게 뿌리고있는것이다.
《그렇군.》
하지는 자기의 정치적단순성과 무지를 절감하며 탄식과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임영신에게 가시가 돋힌 말을 해주고싶었으나 여러 손님들이 있는 자리라 《즐거운 저녁을 보내주기 바랍니다.》하고 점잖게 인사를 남기고는 얼른 마샬의 집을 나와버렸다.
불쾌한 려행이였다. 하지는 미국무성과 국방성의 실무진을 만날 때에도 자기에게 와닿는 의혹과 불신, 지어는 모멸의 눈길들을 의식하군 하였다.
하지는 돌아오자바람으로 현지인들로 구성된 통역관실에 임영신의 출입을 정지시킬데 대한 명령부터 내렸다. …
지금도 하지는 미국에서 있은 그 불쾌한 일들이 련이어 떠올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리승만을 불러다가 그 늙다리를 방첩대의 애숭이 장교들한테 던져서 실컷 주리를 틀고싶었다.
그러나 하지의 고민거리는 어차피 마샬의 뜻을 따를수밖에 없게 된 자기의 궁한 처지였다. 그는 아직까지도 남조선의 정치인들속에서 리승만이보다 더 친미적이고 반공적인 인물은 고를수가 없었다.
이제 나타나게 될 정향이라는 인물은 어떻겠는가.
류동명은 이 인물의 정치적중량을 상당하게 떠놓았었다.
류동명은 모든것으로 보아 리승만이나 김구가 지는 달이라면 정향은 솟는 별이라고 한마디로 그의 인간상을 극명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면담시간이 이제 5분이 남아있었다.
그는 정향에 대한 문건철을 다시 뒤적거리기 시작하였다. 노불이 빨간 연필로 밑줄을 그어놓은 글줄들이 먼저 눈에 밟혀왔다.
《중국관내에서의 일부 활동에서 좌익에 기울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그는 이 글줄에 밑줄을 그어 상관의 주목을 끌게 한 노불의 속궁리에 쓰거운 웃음을 지으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리였다.
《리승만이도 쏘련에 기웃거린적은 없었나?…》
하지는 리승만에 대한 료해문건에서도 1930년대에 쏘련에 들어가자고 여러차례 시도했으나 끝내 쏘련측이 입국사증을 주지 않아 쏘련행을 포기했다는 글줄밑에 빨간줄을 그어놓은것을 보았던 생각이 났다. 그래서 리승만의 반공체질이 더 드팀이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때 리승만이 크레믈리에 들어갔더라면 그의 인생행로가 달라질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하지가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문이 열렸다.
부관이 들어와서 통위부장 류동명이 손님을 모시고 대기실에 도착하였다고 보고하였다.
《1분후에 들여보내.》
부관이 나가자 하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군복상의를 입고 거울앞에 다가가 흘러내린 머리를 빗어올렸다.
그들은 그리 크지 않은 원형탁상에 마주앉았다.
정시명은 하지와의 담화에서 일관하게 정치에 대한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두가지 원인이였다.
첫째로 정시명이 만약 정치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박식을 보여주면 장사에 나섰다는 그의 신분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게 될것이다.
둘째로 정치일선에 복귀할것을 강하게 권유할것이며 어떻게 하든지 밀접한 뉴대를 가지려고 할것이다.
하지의 관심인물이 되면 행동반경이 좁아질것이고 종당에는 그것이 자승자박이 되여 사업을 자유롭게 벌려나갈수가 없게 된다.
정시명은 어디까지나 쏘미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현 조건에서 미국의 정책적동향과 남조선의 정치세력들에 대한 하지의 평가를 유도하는데로 담화를 조심스럽게 끌고나갔다.
《통위부장은 당신이 나의 좋은 벗이 될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나라를 위해 나의 가까운 상담역이 될 의향이 없습니까?》
하지는 상대방에 대한 류동명의 평가를 확인하느라고 정시명의 언행에 대하여 주의를 집중하여 관찰하고있었다.
《당신의 신뢰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지만 이미 이 나라의 훌륭한 정치가들이 장군의 업무에 고견을 드리고있다고 들어왔습니다.》
《훌륭한 정치인?…》
하지의 얼굴에 언뜻 랭소가 스쳐갔다.
《그렇지요. 훌륭한 정치가들이지요. 이 나라가 배출한 민족의 명망높은 영웅들이지요. 하지만 정선생, 미국이 리승만이나 김구를 배제한 제3의 동반아를 찾는다면 당신은 누구를 제기할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김규식선생을 내세울수 있겠지요.
려운형이는 여러모로 보아 미국의 환영을 기대하기 어려울것이고…》
《그들도 이 시대가 요망하는 지도자가 될수 없다면?…》
하지의 눈빛이 예리해지는것 같았다. 그 우묵한 눈확에서 노란 동자가 반짝 빛을 내며 정시명의 얼굴을 투시하는듯 싶었다.
정시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가 들리는 말대로 정치세력의 기둥으로 공인되고있는 리승만과 김구, 김규식에 대하여 환멸을 가지고있는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자는 앞으로 어떻게 정치세력을 움직이려고 하는가?)
《글쎄요. 나는 미국이 이미 리승만에게 정권이양을 하게 될것이며 그밖의 인물들은 리승만의 둘러리격으로 내세우려고 할것이라고 들어왔습니다.》
정시명은 하지의 속심을 발가내기 위하여 슬쩍 문제를 던져보았다.
《둘러리격이라? 하하하… 옳습니다. 정선생의 판단이 명석합니다.
헌데 나에게 지금 필요되는 인물은 그 개별적인물들이 아니라 그들 세 세력을 묶어세울수 있는 그런 인물이 필요합니다.… 리해가 됩니까? 우리는 이 나라의 통치권이 아니라 북조선세력에 맞세워놓을수 있는 그런 련합된 정치권이 필요합니다. 우린 남북총선거에 대처할 준비를 시급히 갖추어야 합니다.》
하지는 비로소 자기의 속심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미제의 대조선정책의 핵심적요소가 이제야 껍데기를 벗고 돌출된셈이다.
《남북총선거를 주장한 쏘미공동위원회가 이미 무산되지 않았습니까?》
정시명은 하지의 이야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는 느슨하게 물었다.
《총선거는 현단계에서 우리가 바라는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면에서 거부할 리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총선거를 치르는 방법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남조선에서의 단독정부의 수립은 일부의 호응은 받고있지만 유일한 선택은 아닙니다.》
하지는 이렇게 정시명의 이야기에 딴전을 부리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시명은 그의 세모진 눈가에 언뜻 어리는 야릇한 미소를 포착했으나 여전히 무표정한 낯빛을 한채 그의 심중을 파헤쳐나갔다.
《그러니 중장각하는 단독정부수립에 대하여서는 현 단계에서 고려하지 않는다는것입니까? 나는 남북간에 조성된 력량대비로 보아 총선은 가능한것이 아니라는 론조에 기울어져왔습니다.》
《두가지에 다 대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승산이 없는 전투는 피하는것이 군사적으로 보면 전술적으로 옳습니다.》
《피할수가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피할수 있도록 가능성을 찾아야지요.》
여기저기서 입수한 자료들이 일시에 하지의 이야기로 종합, 함축되는듯 싶다. 지금까지 종합된 자료에 의하면 미국의 대조선정책은 금후 조선을 극동의 반공보루로 만든다는 전략적인 목표밑에 두단계의 전술적로정을 긋게 될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첫 단계는 전조선적인 판도에서 친미적인 반공정부를 조작하는것이며 둘째 단계는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이남에 단독적인 친미정부를 세우는것이다.
정시명은 여기에 다음의 문제를 보충하고싶었다. 미국놈들은 첫단계의 목표에 대해서는 실망하고있다. 그러므로 남북총선거를 앞에서는 주장하면서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파탄시키게 될것이다.
어떤 구실을 들고나올것인가?
이미 한차례 작전은 실패하였다. 새로운 작전안은 하지도 아직은 모르고있는것 같다.
그러한 구실은 아마도 미국무성이 모색하고있을것이다.
하지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내가 류부장의 소개에서 당신을 흥미있게 생각한것은 그들 세 두령을 묶어세울수 있는 구심점이 될수 있다는것입니다. 바로 그것때문에 나는 당신에 대한 료해를 위해 전적으로 나의 고문을 한달이나 전담시켜 품을 들이게 했습니다.》
하지는 히죽이 웃으며 료해문건을 손에 들어보였다. 당신에 대한 신뢰도가 이 정도까지 된다는 하지의 엉큼한 속내가 정시명에게 대뜸 파악이 되였다.
하지는 료해문건에 고개를 숙였다가 계속하였다.
《이 료해평정에 의하면 당신이 좌익으로 치우친 시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본이 아니지요. 나도 대학시절에는 공산당이 주도한 집회들에 참가하여 경찰들과 투석전까지 벌린 일도 있습니다.》
하지는 다시 히죽이 웃었다. 무인다운 솔직성과 정치가로서의 교활성이 묘하게 어울려든 웃음이였다.
《내가 당신에게 상담역으로 될수 있다면 파괴된 이 나라의 경제를 어떻게 복구발전시켜 나가겠는가 하는 방향으로 할수 있을것입니다. 나는 귀국하여 정계은퇴를 선언한 후 큰 도매상회를 경영하면서 자신이 정치보다 경제분야에 더 가까운 적임자라는 자부를 가지게 되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나 나에게 지금 당장에 필요한것은 경제에 대한 자문이 아니라 이 나라의 정치세력을 하나로 결집해내는 산파역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걸 기대합니다. 현재로서는 내가 당신의 정치전도에 대하여 명백한 담보를 주지 못하겠습니다. 역시 이 나라의 과도기를 이끌만 한 인물은 유감스럽지만 미운대로 리승만과 김구, 김규식중에서 찾을수밖에 없다는것을 나는 당신에게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당신은 류부장의 평가를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우리의 호의를 받아주기를 부탁드립니다.》
하지는 정시명이 권력에 대한 요구를 드러내지 않는것이 마음에 들어 이렇게 자기의 진속을 말끔히 털어놓았다.
지금까지 하지가 만났던 현지의 정객들은 권력의 줄사다리에 발을 옮길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면 례외없이 흥분하고 그를 놓치게 될가봐 각방으로 접근해왔던것이다.
정시명은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하고는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
하지가 문밖에까지 나와서 대답을 기다리겠노라고 다시금 강조하였다.
대기실에서 정시명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류동명이 문앞에까지 나와서 바래주는 하지의 흡족해하는 얼굴을 보자 대번에 입이 벙글써해졌다.
지금까지 하지는 자기 걸상에서 일어나서 바래주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그래서 이따금 류동명은 양놈들의 례법이라는게 더럽기 그지없다고 돌아서서는 툴툴거려왔는데 정시명이 하지의 마음에 꼭 든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래 어떻게 되였습니까?》
류동명이 길다란 복도에 나서자 성급히 물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자기의 상담역이 되여달라고 하였습니다. 정객들이 다 제 갈래가 되여 아마도 속을 쓰는것 같습니다.》
《그래서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예, 아무쪼록 잘 생각하여 조처하시오. 무릇 정치에는 기회가 있는것이 아니겠습니까.》
류동명은 자동차에 오른 다음에도 정시명이 모처럼 이루어진 기회를 잘 타고올라 겨레앞에 더 큰 봉사를 해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