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사람이 사람이라 불리우는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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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명의 회신을 받은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곧 《유엔조선림시위원단》을 찾아갔다. 거기서 련명으로 외국군대를 철거시키고 남북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를 세우며 당면해서는 이를 위한 준비사업을 위해 남북회담을 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서는 그날 석간신문들에 긴급뉴스로 실리였다. 이것은 서울시민들의 첫째가는 화제거리가 되였다. 서울이 끓기 시작하고 뒤미처 남조선 전역이 웅성거리였다. 인민들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반대로 적진영은 쑤셔놓은 벌둥지처럼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날 하지도 밤 11시경에 노불로부터 성명서가 실린 신문을 받아들었다.
성명서를 건성 훑어내리던 하지는 점점 눈이 퀭해졌다. 다 읽자 어찌나 급해 맞았던지 걸상에서 솟구치듯 일어나서 막 구겨진 신문을 노불에게 던지기까지 하였다.
《노불국장! 도대체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요? 사태가 이 지경되도록 당신네는 뭘했느냐 말이요. 이건 분명히 우리의 정책적목표에 대한 도전이요. 아니, 이건 미국의 대조선정책을 정면강타한것이요.》
하지는 악이 치받쳐서 울안에 갇힌 야수처럼 주단이 깔린 넓다란 방을 급하게 오락가락하며 노불의 정보국을 바보라거니, 천치들의 서식장이라거니 내키는대로 욕설을 퍼부어댔다.
하지는 말끝마다 《노불국장!》하며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찌를듯이 겨누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노불은 몸을 흠칫거리며 떨었다.
노불은 자정이 퍼그나 지나서야 후줄근해져서 사무실을 나섰다.
하지가 성명서를 보고 아찔해진 대목은 남북회담대목이였다.
사태를 토의하기 위하여 하지는 브라운부터 찾았다. 요새 브라운은 사단지휘부에 들어박혀있었다. 여러가지 구실을 붙여가며 미군정청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하지도 평양회담후부터 나날이 그와의 관계가 어성버성해져서 웬만한 일거리가 없으면 그에게 전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도 엄청난 문제에 부닥치게 된 지금에 와서 그래도 찾게 되는것은 브라운이였다. 외교관들에 대한 선입감이 있어 브라운의 존재를 무시하여오군 했지만 그래도 협상에서는 소문대로 재능이 있는 인간이고 계책을 꾸며내는데서도 단수가 있었다. 그래 브라운에게로 별수없이 내려갔다.
하지가 남북협상문제를 김구가 들고나왔다는것을 이야기하자 처음에 브라운은 시답지 않은 태도를 취하였다.
《어째서 우리가 현지정객들의 동향에 대하여 일일이 점검해야 합니까? 난 그 정도의 반응을 각하가 왜 중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정말 그걸 모른단말이요?》
하지는 브라운이 너무 천진한 소리를 하는것 같아 놀랐다. 그러나 그는 고쳐 생각하였다.
브라운은 미국의 대조선정책이 어떻게 집행되여왔고 어떻게 좌절되여왔는가에 대하여 아직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있다.
자기로 말하면 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책의 정수를 파악하고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중의 하나이다.
하지는 품을 들이기로 생각하고 남북회담이 성사되는 경우 어떤 후과가 초래되겠는가 하는 문제를 미국의 대조선정책과 결부시켜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브라운에게는 역반응을 일으켰다.
브라운은 우여곡절로 빚어진 정치문제에서 완전히 발을 뽑을 심산이였다.
이 서울의 정계에 다시 뛰여드는것이 목숨까지 위태롭게 하는 일이라는 지긋지긋한 생각도 있었지만 하지의 말을 듣고보니 이제는 사태를 돌려세우기 어렵다는것을 판단하였던것이다.
이제 북측만 동조해나서면 동포끼리 만나겠다는걸 미국이 무슨 계교로 막아낸단 말인가.
너무도 명백하고 단순한 문제다.
하지도 미쏘협상이 물건너 갔으니 자기를 군정업무에 얽어매놓을 권한은 없다. … 예까지 생각이 이른 브라운은 요새 38°선에서 무장충돌기미가 보인다는 구실을 걸고 좀 생각할 기회를 달라고 하였다. 사절한다는 외교적발언인데 그런데도 말귀가 어두운 하지가 짜증난 어조로 달라붙었다.
《이보오, 브라운. 지체할 시간이 없소. 아직도 평양일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군. … 브라운, 술 좀 내놓소.》
하지는 이제는 이 친구와 마지막담판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노상 어성버성해져서는 아무 일도 해낼수 없다. 그런데 복통을 터지게 하는것은 브라운을 더는 직속 부하로만 볼수 없고 그앞에서 자기가 상관이라는 권능을 마음대로 휘두를수 없는것이다.
그래서 요즈음 이 사람과의 관계에 결단을 내리는것이 피차에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고 자주 생각하면서 전에 브라운이 제출한 사직서를 찢어버린것을 후회하였다.
브라운은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하지는 단숨에 마셔버리고 이야기를 폈다.
《브라운, 우린 미국의 운명에 자기나름으로의 큰 책임을 가지고있는 사람의 립장에서 지난날의 그 불행한 사건을 다시 생각하여봅시다. 만약 당신이 나의 처지에 있었다면 미국의 정책이 막바지에서 뒤흔들리고있을 때 속수무책인 지역장관으로서 어떻게 워싱톤이 결심한 문제에 개입할수 있겠소.》
하지는 평양에서 있은 암살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변명하였다.
《당신은 나에게 뭘 설교하자는겁니까?》
브라운이 그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상기하자 아물어가던 상처가 덧쑤셔진듯 오만상을 찌프리고 불쾌하게 반문하였다.
《내 하와이 진주만이야기를 좀 하겠소.》
《진주만?…》
《당시 루즈벨트대통령은 태평양전쟁의 불꽃으로 되였던 진주만에 대한 일본의 불의공격작전을 스물네시간전에 알고있었소. 스물네시간이면 일본놈들이 불의성이라는 무기를 사용할수 없도록 하는데 필요한 군사적공간이요. 그런데 루즈벨트는 그 정보를 묵살해버렸소. 무엇때문이였는가? 하와이섬이 아니라 미국전체를 지켜내야 했기때문이며 장차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한 기회를 얻어내야 했기때문이였소. 루즈벨트에게는 그때 2차세계대전에 뛰여들기를 두려워하는 국민의 심리를 돌려세우고 국회가 걸어놓은 중립이라는 제도적올가미를 벗어던질 커다란 도박이 필요했던거요. 그래서 그는 태평양함대의 대부분의 함선과 유생력량을 버리는 길을 선택하였소. 도박치고는 엄청난 도박이였소. 이것이 미국이요. 실익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것이 미국의 정치철학이 아닌가. 그런즉 이제 와서 미국의 실존주의 통치방식대로 움직인 루즈벨트에게 누가 책임을 물은바가 있소?
내가 당신앞에서 이 객적은 강의를 하는걸 용서하오.》
브라운은 하지가 전례없이 장광설을 늘여놓는것을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하지의 빈술잔에 말없이 술을 부어주었다. 자기도 잔을 내고는 다시 술을 부었다.
하지가 일어났다.
《브라운, 저녁에 전화를 하겠소. 난 올라가야겠소.》
브라운은 하지가 떠나가자 혼자서 병에 남은 술을 천천히 마시며 복잡한 생각에 얽혀들었다.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꺼낸 하지의 궤변에 실은 심오한것이 있다.
미국은 실리가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라다. 나를 위하여 네가 죽을수 있게 돼먹은 나라다. 미국의 정치사를 거슬러보면 정적의 총탄에 제명을 살지 못한 대통령들이 여럿이 된다. 나라의 대통령도 국익이라는 리유로 서슴없이 죽여버리고도 시치미를 떼는것이 미국의 체질로 되였다.
그래 립장을 바꾸어보자. 내가 만약 하지의 립장에 섰다면 어떻게 했을것인가?
하지의 생명과 국익을 표방하는 백악관의 지령을 두고 분명히 나도 후자를 선택할것이다. 그래야 내가 살아남을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니 국록에 살쪄온 내가 벌어진 사건을 놓고 분별을 잃는것은 안될 일인것만은 사실이다.…
이렇게 굴려가니 하지의 처지에 점차 리해가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더는 이 나라의 정사에 깊숙이 관여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정치가 온통 모순투성이다. 정치인들은 다 제가끔이다. 여기에 미국의 정책은 근본적으로 이 나라 국민의 정치적리상과 대립되여있다. 게다가 이 나라 국민은 견줄바가 없이 똑똑한 민족이다. 어수룩하게 보고 달려든게 원체 미국의 정책적과오다. 그러니 단한걸음도 생각대로 해나갈수 없다. 점점 헤여날길 없는 진창에 빠져들뿐이다. 내가 만약 워싱톤의 명령자라면 《노!》하고 구령을 내릴것이다. 일찌감치 발을 빼는것이 상책이다. 이미 쓴맛만 보고 명예고 체면이고 땅바닥에 구겨박혔으니 내 구태여 나설 리유가 없다.
어느놈이 또 이 브라운을 제상에 올려놓을 흉계를 꾸밀지 어떻게 알겠는가.
안다면 누가 막아주고 또 어떻게 막겠느냐. 남북회담문제에도 나설바가 아니다. 조용히 은둔해있다가 무난히 물러가는게 현명하다. 이제는 이 브라운이 섶을 지고 불에 뛰여드는 우둔한 놀음에는 관여안할테다.…
립장이 이렇게 굳혀지자 브라운은 제먼저 하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장각하, 최근 38°선에서 일련의 무장충돌이 예상됩니다.》
하지는 아까 들려주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는것이 이상스러워 《그래서?》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불안정지역인 개성, 옹진에 틀고앉은 사단의 지휘관이 자리를 뜨는것은 힘들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장각하, 당신께서 걱정하는 문제들은 사실 매우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과제를 안고있습니다. 미쏘협상때보다도 더 어려운 상황입니다. 나는 당신께서 그 난해한 문제를 혼자 끌어안고 속을 썩이지 말고 마샬장관에게 그대로 보고하여 국무성의 지원을 받을것을 권고하고싶습니다.》
《그래서?…》
하지는 브라운이 둘사이에 오간 문제에 대한 언급을 피하면서 말재간을 부리는듯 싶어 신경질적으로 외마디로 몰아갔다.
브라운도 약이 올랐다. 자기는 정통 앵글랜드족후예로서 참는데 습관되여왔다고 자부해왔는데 서울에 와서는 걸핏하면 흥분되고 성을 내군 한다. 어떤 때는 내가 왜 이래지는가고 자기를 질책해보기도 하지만 흥분주기가 짧아지기만 한다.
지금도 그는 마른 섶에 불달리듯 확 달아올랐다. 그쯤되면 자기의 의사표명이 리해되고도 남겠는데 뭘 계속 《그래서》인가. 그는 끝내 자기를 걷잡지 못하고 가시같은 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사령관각하, 나를 더는 이 나라 정치의 제물로 만들지 않도록 도와주시오.》
그러자 수화기에서는 인차 대답이 없고 씨근덕거리는 하지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하지는 순식간에 두눈에 쌍심지를 켜달고 마치 브라운을 면전에서 노려보듯 창밖의 한점만 뚫어지라 응시하였다.
불손하기 그지없다. 당장 호출하여 한방 먹이고싶었다. 저런 방약무인을 그대로 두다니… 저게 옥스포드출신의 례절인가. 저게 정통 앵글랜드인의 말본샌가.
하지는 마구 태질을 하는 밸머리를 참아내자니 심장이 파렬될것만 같았다.
그러나 상대는 브라운이다. 하는수가 없다. 브라운앞에서 이제는 빚진 종이 되고만 하지는 그가 어떻게 나오든지 할 말이 없다. 하는수가 없다. 브라운, 너는 내가 준 마지막기회마저 놓치고말았다. 나를 원망 말라.
하지는 인사도 없이 수화기를 던져버리고는 담배를 붙여물었다.
《빌어먹을 자식!》
그는 울화를 어데다 비벼댈데가 없어 주단우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다가 눈앞에 레코라우스의 얼굴을 세워놓고 귀먹은 욕질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죽은 네놈이 쒀놓구 거두매는 나더러 시키는거냐. 목대를 분질러놓을 놈! 네따위도 정탐이냐. 일을 꾸밀바에는 똑똑히 꾸며야지.》
하지는 잠시후 다시 책상에 가서 맥아더에게 보내는 긴급건의서를 만들었다.
브라운과의 줄당기기를 더는 끌고나갈수 없으므로 결단을 내린것이다.
하지는 전화로도 맥아더에게 간단히 미쏘협상이 끝났으므로 브라운을 교체하여달라는 건의를 하였다. 그리고 문건을 곧 발송하겠으니 여기의 상황을 참작하여 시급히 결론을 달라고 하였다.
맥아더는 정치보좌관 애치슨을 통하여 그들의 관계를 보고받은바가 있었다.
맥아더는 《하지의 지휘권을 흔드는 행위에 대해서는 리유불문하고 문제를 세우라.》고 애치슨에게 강조하였다.
맥아더는 하지의 제의를 심중히 듣더니 즉시에 명령을 내렸다.
《오래 끌게 없소. 래일중으로 도꾜에 도착시키시오. 후임은 우리 사람들중에서 보내주겠소.》
하지는 다음날 김포공항에 나가서 떠나는 브라운을 조용히 배웅하였다.
《미안하게 되였소. 브라운.》
하지는 쫓겨가는 그를 보며 한마디 하였다.
《중장각하, 미안할것은 없습니다.》
브라운이 일부러 무례하게 하지의 작별인사를 일축하며 싸늘하게 웃었다.
《그래 더 할 말이 없소?》
하지는 분을 참으면서도 떠나는 인간의 심정을 고려하여 너그럽게 처신하느라고 애썼다.
《우리는 슬프게도 국익이라는 구실밑에 인간이 파멸되고있는것을 목격하고있습니다. 인간성이 유린된 국민은 전도가 없습니다.》
브라운은 하지의 손을 잡고 몇번 흔들고는 승강대를 뚜벅뚜벅 발소리를 무겁게 내며 올라갔다.
그는 비행기문앞에 이르러 돌아섰다. 그리고는 이 나라의 하늘과 땅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형언할수 없는 감회가 어려올랐다. 부푸는 희망과 야심과 힘을 안고 찾아왔던 땅이였다. 그 땅에서 후회와 한숨을 안고 이제 떠나간다.
이 나라는 아름다운 땅이다. 신선한 공기, 맑은 물, 수려한 산발… 그리고 이 땅의 인간들은 몽매한 사람들이 아니라 뜻에 사는 사람들이다. 권세에 아부를 모르고 힘을 두려워 안한다. 정의에 살고저 하며 불의를 미워하는 강직한 국민이다.
이제 언젠가는 이 나라를 미국이 두려워하고 허리굽히며 아부하는 그런 시대가 올것이다. 백악관은 미국이 마치도 이 나라를 정복한듯이 자부하고있지만 천만이다. 미국민의 인간성이 이 나라 국민의 인간성에 비할나위도 없이 낮을진대 어찌 정복자라고 부를수 있으랴.
온다, 꼭 온다. 이 나라 국민이 미국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내키는대로 흔들어댈 때가 온다. 력사는 순환과 역순환의 회오리다. 때가 올것이다.…
운무비낀 저 지평선에 낯익은 얼굴들이 얼찐얼찐 비껴든다. 려운형, 김구, 송호정, 류동명 그리고 평양보안서장의 얼굴도 다가든다.
브라운은 은근히 두려워지는 마음을 의식하며 한해반동안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을 주던 이 나라의 땅을 향해 손을 이마우에 올려갔다. 그리고는 환송객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비행기안에 쑥 들어가버렸다.
하지는 넓다란 비행장안에 오래도록 우두커니 서있었다. 브라운이 탄 비행기가 땅을 흔들며 하늘에 떠올라 시야에서 사라지자 쏘던 이를 뽑은것처럼 시원할것 같았는데 오히려 마음은 더 무겁기만 하다. 때없이 우수와 고독감이 욱 쓸어들었다.
(아놀드도 갔다. 브라운도 간다. 이제는 내 차례다.…)
브라운은 작별인사로 남긴 말들이 다시 귀전에 울려왔다. 인간성이 유린된 국민은 전도가 없다고?… 무슨 얼빠진 수작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