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대결전야
3
이 소식을 가지고 박영수의 처가 만삭인 몸으로 시집의 큰 대문을 두드린것은 어뜩새벽이였다.
그가 들고온 소식은 삽시에 대궐집 높은 담장안을 무섭게 휩쓸어놓았다.
박영수가 잡히고 한무리의 경찰들이 박영수의 집을 습격하여 샅샅이 뒤지고 돌아갔다는 며느리의 말에 박정인도 주씨도 대경실색이 되였다.
주씨는 엉엉 울기부터 하였다.
박정인은 흙빛이 되여 방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부둥켜안고 울고있는 마누라와 며느리에게 꽥 소리질렀다.
《됐다! 청승맞게 울기는 왜 우는거야? 난 왜놈때 그놈들과 맞불질을 하다가 경찰서에 처가집 나들듯 했어도 이렇게 눈이 시퍼래 살아오지 않았느냐.
영수가 죄졌으면 무슨 큰 죄를 지었겠느냐.… 그래 경찰놈들이 집에 와서 뭘 찾더냐?》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그저 방을 수색하고… 책장이랑도 뒤지였습니다.》
며느리가 울음을 씹어삼키며 가까스로 대답하였다.
《그래서?》
《집에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뭐 손님이 온게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전에 왔던 마아저씨와 례영아가씨가 떠난 후에는 집에 누구도 온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 얘기는 꺼내지 않았느냐?》
《안요.》
《잘했다. 너무 소란을 피우지 말고 낮차로 내려가있거라. 나도 인차 따라가겠다.》
박정인은 이렇게 꾹 눌러놓고는 두루마기를 찾아걸치고 집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는데 마침 첫 전차가 정류소에 들어섰다.
박정인은 빠른 걸음으로 가서 무작정 전차에 올랐다. 당장은 지휘부에 소식을 전해야 할것 같다.
새벽차여서 전차안은 조용하였다.
박정인은 주먹에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겼다.
(어쩌다가 잡혔을가?… 그동안 그 녀석이 무슨 일을 맡았을가? 정선생님이 소식을 들었을가?)
자기가 왜놈헌병대에 끌려가 체험했던 무서운 광경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얼찐얼찐 비껴갔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뼈마디가 오싹오싹해진다.
《아-》
그는 저도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형틀에 오른 아들의 피투성이 된 광경이 련상되였던것이다.
(영수가 견디여낼가? 그앤 매한번 맞지 않고 배고픈 고생도 모르고 고이 자라난 애다. 저놈들의 행패를 견뎌낼가?…)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속이 졸아들던 박정인은 부지불식간에 뇌리를 휘감는 또 하나의 걱정에 소스라쳤다.
(그 애가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면 큰 일이다. 이럴 때는 나죽었소 하고 입을 다물어버려야 죄도 덜고 피해도 적겠는데 이게 큰일이구나. 일찌감치 다짐을 두어야 되는건데 정말 큰 야단이구나.)
박정인은 두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또다시 크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 애 입이 열리는 날이면 뭐니뭐니 해도 지휘부가 야단이다. 정선생부터 걸려든다. 아니 그래서는 안되지. 그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사람들이라구.
김장군님께서 알고계시는 그 사람들을 저 귀축같은 놈팽이들에게 넘겨줘서는 안돼.
영수야 견뎌다오. 견뎌다오.… 아아, 이 일을 어쩌노.…)
줄곧 이런 생각에 잠겨 아들과 마음속으로 불같은 이야기를 나누고있던 박정인은 누가 어깨를 가볍게 치는 바람에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전차 차장처녀가 눈이 올롱해서 내려다본다.
《어째서?》
박정인은 화가 났다.
《종점에 다 왔습니다.》
처녀가 해시시 웃는다.
《벌써?…》
박정인은 두리번거렸다.
전차안은 텅 비여있었다. 승객들이 다 내린것이다. 희붐하게 밝아오는 새벽빛속에 서울역사가 번뜻 눈에 띄였다.
《아, 미안하구만. 내가 그만 깜빡 졸다가… 이거 미안한데 난 을지에 다시 가야 한다우.…》
《을지에요?… 호호… 그게 어디라구. 그럼 내리지 마시고 여기 계세요. 우리 전차가 인차 돌아섭니다.》
처녀가 싹싹하게 굴었다.
(차장처녀들의 입살이 드세기로 소힘줄 같다더니 실없는 입방아질들이였군.)
박정인은 이렇게 고마와하며 고개를 끄덕여보이고 그냥 앉아있었다.
전차는 다시 덜커덩거리며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박정인은 을지에서 내려 곧장 서병남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서병남의 집 솟을대문을 멀리서 띄여본 박정인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목을 잡히였다. 지난해 가을에 림인준이 경찰을 달고 집에 달려들어 지휘부가 곤경에 빠질번하게 했던 일이 떠올랐던것이다.
(이거 내가 환장을 했나. 독립군노릇 헛했지. 지금쯤은 경찰놈들이 남몰래 뒤따르고있다는걸 생각해야지. 정신을 차려. 애녀석 잡힌게 무슨 큰 일이라구 멍청해서 돌아가.…)
박정인은 자기의 처사에 울컥 화를 내며 돌아섰다.
다시 전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나갔다.
역대기실에서 서병남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박사장올시다. 식전에 페를 끼쳐 죄송합니다.》
저쪽에서는 서병남의 처가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안녕하셨습니까? 주인을 바꾸어드리겠습니다. 밖에 나가 계십니다.》
서병남은 온밤 계속된 지휘부의 모임을 지켜주느라고 대문간에 나가있었다.
《아니, 그만 두십시오. 례영이를 깨워서 여기 보내주십시오. 곧 말입니다. 내 지금 역전에 와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인차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한시간쯤 지나서 례영이가 역전앞마당에 나타났다. 박정인은 나들문옆에 서서 전차정류소쪽을 지켜보다가 례영이 나타나자 《례영아, 나 여기 있다.》하고 큰소리로 부르며 마주 걸어나갔다.
《큰아버님, 그동안 옥체건강하셨습니까.》
례영이 나붓이 허리를 굽히는데 박정인이 지금 그 인사를 받아줄 계제가 못되였다.
박정인은 그의 손을 잡고 역전공원으로 끌고갔다.
《이거 야단이 났구나. 얼른 가서 아버님께 전해드려라. 우리 영수가 잡혔단다.》
《영수오빠가요?》
박정인이 전례없이 황황해하는 거동에서 그 어떤 심상치 않은것을 예감했던 례영이는 뜻밖의 소리에 화들짝 놀라 새된 소리를 냈다. 《저걸, 어쩌나?… 어째서 체포되였답니까?》
《글쎄 크게 걱정할것 없다. 체포리유는 모르겠다. 나도 얼른 대전에 내려가겠다. 그런데 아버지가 지금 집에 계시더냐?》
《예, 밤을 새며 회의를 했습니다.》
《음, 전일에 미국놈들과 또 크게 붙어볼 일이 생겼다구 하시더니… 일은 참 맹랑해졌는데… 하여튼 전해라. 당분간 피해계시라구.》
《피해계시라구요?》
례영이 뜨아한 표정을 짓자 박정인이 목이 갈린 어조로 설명했다.
《너도 그 애를 몇번 보지 않았느냐. 영수는 아귀가 세지 못해. 그러니 저놈들의 행패를 견디여낼상 싶지 않구나. 어쩌겠니. 아버님께 다들 피해달라구 말씀드려라.》
《알겠습니다, 큰아버님.》
《어서 가봐라. 어서!》
례영이 먼저 돌아가자 박정인은 그제야 한가지 시름은 덜어놓은듯 저으기 속이 가벼워졌다.
그는 고려상사로 향하였다. 집에 돌아가야 마누라의 눈물겨운 정상을 마주 해야겠는데 그게 더 가슴에 저려드는 일이다.
사무실에 들어가 장부책을 꺼내놓았으나 도무지 생각을 가다듬을수가 없었다. 글줄을 조금 더듬느라면 인차 영수의 얼굴이 나타나 책장을 꽉 메운다. 눈을 감아버리면 아들의 살점을 물어뜯는 채찍소리가 귀청을 찢는다. 박정인이 한시간이 지나도록 종시 마음을 진정할수 없어 주전자를 들고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하는데 례영이 불쑥 나타났다.
《네가 어떻게?》
박정인은 방금 헤여진 례영이였으나 이렇게 다시 나타난것이 반가왔다.
《아버님이 선생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가자.》
박정인은 책상우에 펴놓은 장부책을 서류함에 넣고 두루마기에 팔을 꿰며 문지방을 넘어서려다가 돌아섰다.
《안되겠다. 선생님께 일러드려라. 어서 몸을 피하라구. 내가 괜히 이런 청을 드리는게 아니다. 어서 돌아가서 단단히 말씀드려라.》
례영이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종잡을수 없어 머뭇거리는데 박정인이 버럭 성을 냈다.
《어서! 너두 알지 않느냐? 영수입이 터지면 그 파편이 어데부터 날아들것 같으냐. 이것부터 생각해서 너희들이 잘 조처해야지. 내 지금 가서 직접 말씀올리고싶지만 저놈들이 분명 날 따라다닐것 같아서 못 가겠다. 어서 돌아서거라.》
이렇게 분연히 꾸짖은 박정인은 도로 두루마기를 옷걸이에 걸어놓고 장부책을 다시 꺼내놓았다.
례영은 그 소리에 쫓기듯 물러나다가 《그럼 큰아버님은 어떻게 하시렵니까?》하고 물었다.
《나야 이제 숨는다고 솟아날데가 따로 있겠느냐. 여기 일을 정리해놓고 저녁차로 대전에 가보겠다. 내가 자리를 뜨면 저놈들이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릴수 있다. 그렇게 말씀드리구 너도 다시는 여기 얼씬 말아라.》
박정인은 례영을 보낸다음 해종일 사무실에 붙박혀있었다.
저녁시간이 가까와오자 사원 하나를 역에 보내서 대전행 차표를 끊어오도록 하였다.
그는 사무실을 깨끗이 정리해놓고는 조직성원인 부사장방에 가서 대전아들집에 가서 며칠 묵고오겠노라고 말했다.
그리고나서 문을 나서는데 언제 왔었는지 례영이 문밖에서 기다리고있었다.
《례영아, 웬일이냐?》
《아버님이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대전에 가시지 말고 집으로 오시랍니다.》
《그럼 정선생님이 여적 집에 계신다는거냐?》
《예.…》
《아침에 내 한 말 전해드렸니?》
《예.》
《그런데두?… 챠 이거 정말 야단이구나. 좋아, 빨리 가자.》
박정인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례영이를 앞세우고 허둥지둥 큰길에 나섰다.
그는 전차를 여러번 갈아타면서 미행이 붙지 않았는가를 확인하군 하였다.
례영은 박정인의 각성에 크게 깨닫는바가 있어 그를 서병남의 뒤뜰안에 있는 비상문으로 안내하였다.
정시명의 방에서는 길철과 김명호가 불길한 소식에 접하여 협의를 하고있었다.
박정인은 자기에게로 눈길을 보내는 정시명과 동지들을 보자 인사도 없이 책망조로 말했다.
《어째 다들 이러고계십니까? 그리고 나도 여기 들어서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섰습니다.》
정시명이 입가에 미소를 담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박선생님, 례영이에게서 들었습니다.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 영수가 어제 잡혀갔다니 아직은 서울까지 눈돌리지 못할겁니다. 치안국에 아직 보고된게 없다고 합니다.
빨리 손을 써야겠습니다. 그래서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좀 생각해봅시다.》
《뭐 길게 생각하실게 있습니까. 우리 애는 내가 두루 뒤공작을 해보겠으니 선생은 이에 관여마시고 당분간 서울을 떠야 합니다. 난 길선생과 김선생에게 이걸 제기합니다.》
《서울을 뜨라고요?… 내가?…》
《정선생두 우리 애를 잘 아시지 않소. 그 앤 며칠을 견디지 못합니다. 내 이런 일을 당하고보니 3대외독자라 손끝에서 기름발리워 키워온게 여간 후회되지 않습니다. 그앤 화분에서 자라난 봉선화처럼 여립니다. 찬바람 한번 불어도 흐무러져 내릴판인데… 애비가 제새끼 됨됨이야 잘 알지요.》
박정인은 주런이 앉아있는 전우들을 번갈아보며 곡진한 어조로 부탁하였다.
김명호와 길철이 그의 눈길을 슬며시 외면하는데 박정인의 손목을 말없이 꼭 잡는 정시명의 눈에 뜨거운 신뢰와 감사의 정이 함뿍 어린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우리 애를 구원하여 달라고 하소연해오련만 이 인간은 지휘부에 들이닥칠 위험부터 생각하고 정을 쏟고있다. 이런 고마운 인간의 저 고결하고 아름답고 위대한 넋을 어찌 저버릴수 있으며 저런이의 슬하에서 몸과 마음을 키워온 혈붙이를 어찌 못 미더워할수 있겠는가. 그거야말로 인간에 대한 모욕이고 배신이다.
사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협의를 하면서 길철도 김명호도 정시명이만은 즉시 서울을 떠나있을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시명은 강하게 부정하여나섰다. 서울을 떠날수 없는것은 첫째로 금방 벌려놓은 대정치전을 놓고 한시도 투쟁무대에서 내릴수 없다는것이다. 둘째 리유는 전우에 대한 믿음을 그렇게 쉽사리 버리는것이 될 말이냐는것이다. 정시명은 박정인의 말을 들으면서도 자기의 결심을 더 단단히 굳히였다. 그는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게 아드님을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아니, 아니올시다. 이건 제 아들녀석을 믿고 못 믿고 하는게 아니지요. 김일성장군님의 웅지를 받들어 통일대업을 밀고나가는 지휘부의 운명문제이지요. 그리고 내 재삼 말씀드리는데 그 녀석 실언을 할가봐 그게 두렵습니다. 우리 가문이 나라를 합쳐가는 의로운 길에서 욕된 일을 남기지 않도록 해주시오. 정선생은 이래서는 안됩니다.》
《아니요. 나는 피신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영수를 믿습니다. 선생님은 영수의 어진 마음을 념려하는데 나는 그 어진 마음을 가진 영수동무에게 정이 갔습니다. 그리구 차라리 믿다가 피해를 보는게 맘편한 일이지 지금부터 영수의 속대를 저울질하는것은 내가 그 애를 배신하는것입니다. 나는 동지들의 배신을 받으면 받았지 내 먼저 전우들을 배반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정선생님!…》
《박선생님, 나를 자꾸 막바지로 몰아대지 마십시오. 나는 영수때문에 자리를 옮기지는 않겠습니다. 자, 길철동무, 김창기동무더러 무조건 시급히 박영수구출작전에 착수하라고 하시오.》
정시명은 길철에게 돌아서며 단호하게 명령하였다.
《알았습니다.》
정시명의 새로운 면모앞에서 후더운 감명을 받고있던 길철은 닭알침을 꿀떡 삼키며 힘차게 대답하였다.
다가든 위험앞에서 정시명이 전투좌지를 옮기지 않겠다고 하는것은 단순한 객기나 모험이나 고집이 아니였다. 그것은 동지에 대한 헌신적사랑이며 인간의 고귀함에 대한 무한한 신뢰였다.
그것은 혁명에 대한 투철한 자각과 인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진 혁명가들만이 엮을수 있는 심장의 찬가였다.
(내가 만약 잘못되는 경우에도 저 인간은 저렇게 철석같은 믿음을 가지고 바위처럼 버티고설것이다. 저런 인간을 배반한다는것은 무서운 죄악이다.)
길철은 제가 금시 철창속에 있는듯이 느끼며 영수의 몫까지 합쳐 심심히 고마움을 표시하고싶었다.
《먼저 영수가 무엇때문에 잡혔고 어디에 갇혀있는지 알아내란 말이요. 그 다음에는 기회를 잘 조성해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벼락처럼 해대란 말이요. 정 바쁘면 김창기조직을 통채로 3국에 탈출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영수를 빼내야 하오.
그까짓, 감옥을 통채로 날려도 좋소. 원래 대전형무소는 일정때부터 애국자들의 피로 젖어있는 곳이요. 감방을 들부셔도 좋소. 제일 좋기는 서울로 이송하도록 만들어놓고 길목을 지켰다가 해보오.》
정시명은 두눈에 불을 달고 분노를 금치 못하며 명령하였다.
《알겠습니다. 영수동무를 꼭 안전하게 구출하겠습니다. 박선생님, 너무 념려마십시오. 우리에겐 그럴 힘이 있습니다.》
길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정인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길선생, 이거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이 바쁜 대목에 여러분들께 큰 부담을 끼쳐서…》
《원 그런 말씀거두십시오. 이게 어디 박선생님네 집안에 한한 일입니까. 미국놈들과의 통일성전에 바쳐진 우리 동지의 생사에 관한 문제이고 우리의 량심에 관한 문제이지요. 사장님을 너무 괴롭히지 마십시오. 우리도 방금전에 정신이 들게 욕을 먹던 참이였습니다.》
길철은 다시금 그의 손목을 크게 흔들어주고는 벌씬 웃음까지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김선생은 〈13정당협의회〉를 바싹 끌어당겨야 하겠소. 백범이 동요하지 않도록 측면지원을 강화해야 하오. 김구선생의 당지도부가 린접이 굳건하다는것을 알도록 소속된 정당들의 목소리를 더 크게 울려야겠소. 뭘 제기할건 없소?》
《없습니다. 토의된대로 하겠습니다.》
김명호도 박정인의 앞에 와서 너무 상심말라고 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김명호까지 나가자 잠시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정시명이 곰방대에 담배를 다져넣고 연기를 피여올린다. 이윽고 박정인이 먼저 입을 뗐다.
《고맙습니다. 정선생, 그런데… 다시한번…》
《아, 아… 그러지 마십시오. 방금 지휘부모임에서 결정되였습니다. 그러니 박선생님은 대전에 가시는걸 당분간 그만 두십시오. 우리가 찾을 때까지 영수어머님과 함께 동래온천에 가계십시오. 거기 온천주인이 우리 사람인데 길철동무가 인차 조직사업을 할겁니다. 이번 작전을 길철동무가 해낼겁니다. 선생님을 모셔온것은 지휘부의 결정과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시명은 박정인이 또다른 소리를 꺼낼가 보아 실무적인 어조로 지휘부의 지시라는 말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반석같은 무게와 엄숙이 어린 정시명의 말에 박정인은 더는 어쩌지 못하고 자세를 바로 가지였다. 《그럼 전…》 박정인은 더 지체하다가는 정시명의 발부리에 엎드려 통곡이라도 터쳐 놓을것 같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정시명의 바래움을 받으며 서병남의 뒤뜰을 나서자 그뒤에 있는 무성한 솔숲에 들어가 오래도록 꺽꺽 울다가 큰길에 나섰다.
그를 바래주고 방안에 들어선 정시명은 곧 새로운 일감에 달라붙었다.
북남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지휘부의 결정을 집행하기 위한 첫 포성이였다.
그는 천천히 써내려갔다.
김구와 김규식에게서 받은 편지에 대한 회답이였다.
《고견을 높이 평가합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결심을 피력해달라는 부탁을 드리는바입니다. 경의를 표하면서.》
정시명은 회답을 례영에게 들려 안지생에게 보내도록 하고는 곰방대에 다시 담배를 다져넣고 밖으로 나갔다. 박영수의 해말쑥한 얼굴이 그냥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박정인의 이야기들이 귀전에 다시 들려온다.
그의 이야기가 맞다. 너무 고이 자라난 호부자자식이다. 단련도 되지 않은 너무 무른 사람이다. 화분에서 자란 봉선화라… 비바람을 한번 맞아도 꽃잎이 흩날리는 봉선화…
정말 그를 믿고 이렇게 자리를 지킬수 있을가? 이것이 조직책임자로서 옳은 처신일가? 내가 너무 주관에 빠져 모험하는것이 아닐가?
조직이 지금 시작한 싸움은 거창하다. 적어도 나라와 겨레의 운명과 직결되는 싸움이다. 이 엄숙한 시기에 조직책임자가 하나의 커다란 모험을 할 권리가 있는가? 모험이라?… 김명호가 말했지… 아니, 아니 이것은 모험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는, 동지에 대한 사랑이 없는 적구투쟁이야말로 모험이다. 이것은 혁명가를 혁명가라고 부르는 근본적인 품성과 징표에 관한 문제이다.
정시명은 박영수를 앞에 세워놓기라도 한듯 나직이 부르짖었다.
《영수, 난 너를 믿는다. 너의 어진 마음을 믿어. 방금 너의 아버지에게 내가 차라리 너의 배신을 받는게 낫지 내가 너를 배신하여 서울에서 도피하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난 옳게 대답하고 옳게 처신을 한것 같다. 난 그렇게밖에 달리는 말할수 없었다. 동지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이 어려운 싸움을 벌려나갈수 없어. 나는 너를 믿는다. 조금만 견디여다오. 조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