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대결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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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명은 곰방대를 물고 뒤뜰안에 나섰다.

벌써 봄기운을 실은 바람이 숲을 흔들며 우수수 불어와 머리칼을 날렸다.

그는 담장을 에돌아 뒤뜰과 이어진 숲속으로 들어갔다.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길을 천천히 걸었다.

보름달이 중천에 걸려 숲속에 정갈한 빛을 부채살처럼 뿌려주었다. 눈앞으로 김구의 우직한 얼굴이 나타났다.

김구… 과연 그와의 사업이 종장에 이르고있다고 볼수 있는가.

(나는 당신과 한판의 도미노를 겨루고있는것이 아니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다듬어주고저 한다. 당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이 나라 력사우에 새겨주려고 한다. 이걸 알아달라.…)

정시명은 김구가 만약 이 자리에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해주고싶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정시명의 생각은 바닥없이 깊어갔다.

(…우선 김구, 김규식이 립장표명을 사회앞에 공개하면 어떻게 될가? 그러면 미국놈들과 리승만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적진에서는 분명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미군정청이 벌컥 뒤집힐것이다.

이때 우리는 김구와 김규식의 회담제기에 일시 침묵을 지키자.

우리가 침묵을 지키면 적진은 또 어떤 양상을 띠게 되겠는가?

혼란은 역전되여 김구와 김규식은 당황망조할것이며 미제와 리승만은 그들을 독선적이라고 몰아대며 비웃어댈것이다.

그래도 반응은 보이지 말자. 미제와 리승만은 더욱 쾌재를 올릴것이다.

점차 김구, 김규식의 립장은 확고해질것이며 사회계도 이를 지지해나설것이다. 이렇게 되면 남조선의 민심은 또 한번 급선회하게 될것이다.

정세의 비약은 미국놈들의 전술도 바꾸게 할것이다. 아니, 바꾸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정시명의 눈앞에는 하지의 몰골이 떠올랐다.

딱 버그러진 가슴이며 세모가 진 주걱턱, 매눈처럼 날카롭게 반들거리는 오목한 눈, 건축기사의 자격증을 가진 쉰살나는 적수가 떠오른다. 과연 네놈이 우리와 겨룰만한 묘기를 가지고있는 놈이냐?… 정시명은 숲속에서 나와 뒤뜰에 들어섰다.

뜨락에는 노가지향나무가 들어차서 사시절 서늘하고 청신한 기운을 풍기였다.

그는 잘 다듬은 향나무사이를 거닐면서 생각을 무르익혀나갔다.

(미국놈들이 북남회담을 결사반대한다면 아무리 김구, 김규식이 동조해나서더라도 북남정치인들의 회합을 성사시킬수 없다. 미국놈들이 38선을 봉쇄해버리면 한두명도 아니요, 작은 인물들도 아닌 이남의 정객들을 어떻게 평양으로 보내며 그들의 차후활동을 어떻게 담보해줄수 있겠는가.

역시 북남회담문제에 있어서도 암초는 미국놈들의 도전이다. 대사를 성사시키려면 미국놈들까지 형식적이라도 회담을 지지하게 해야 한다. 그것도 단 한마디라 해도 하지의 입에서 나오도록 해야 한다. 미끼를 물게 하자. 덥석 물게 하자. 미끼라?… 어떤 미끼를 마련해야겠는가?…)

정시명은 다시 원점에로 돌아갔다.

(김구로 하여금 북남협상주장에 더욱 열이 오르게 하자. 우리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자.

이 침묵은 미국놈들에게 우리가 북남협상에 용의가 없다는것으로 해석될수 있다. 미국놈들은 삼켜도 무방할 먹이로 판단이 가면 덥석 물자고 할것이다.

아니 교활한 놈들이니 덥석 물수는 없다. 꼬리로 낌새를 보다가 물자고 할수 있지.)

만세를 부르는 득의양양한 하지의 낯짝이 떠오른다.

(드디여 미국놈들은 결정적인 방향전환에로 넘어가 김구, 김규식의 북남회담론에 목소리를 합치거나 막뒤에서 부추길수 있다. 김구, 김규식에게로 쏠리게 될 북남여론의 지지를 저희들이 헐값으로 사보자는것이다. 그리고는 남북회담은 미국과 남측이 계속 지지하고있으나 북측의 반대로 열리지 못한다, 그러니 통일정부수립은 북측의 방해로 가능성이 없다, 유엔이 결정한 《단독선거》는 유일한 선택이다 하고 세상에 대고 선포를 할것이다.

이제는 슬슬 낚시줄을 당겨보자, 따라 올테지. 꼬리지느러미로 톡톡 쳐봐야 구미를 돋구는 미끼다. 이쯤 되면 하지는 득점하는셈이다. 헐값으로 사서 비싼 리윤을 얻어낸것이다.

좋다. 낚시는 단단히 삼켰다. 이제는 용빼는수가 없다. 때가 됐으니 낚시는 들어올려야지.

이때 우리는 남북총선거를 다시 힘있게 주장할것이다.

미국놈들이 그쯤 되면 버둥거릴테지. 그렇지만 목구멍을 넘어간 낚시를 마음대로 뱉기는 어려울게지. 그렇구말구. 당기는대로 끌려오고야 말것이다.…)

기절초풍해질 원쑤들의 몰골이 선히 보인다. 하지의 음험한 눈에 떠오를 경악이 보인다. 하지정도라면 이 정도로 손끝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휘둘러댈 자신이 있다. 정시명은 하지를 만나본 후부터 그와같은 정치초년생을 이 나라의 통수권자로 내세워야 하는 미정치권의 무능과 지성의 결핍에 대하여 고소를 금치 못하군 하였다.

그러나 이번 거사는 미지배층의 대조선정책을 타격하는 공작이라는 의미에서 속안이 뻐근해져오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하지의 뒤에는 백악관의 로획한 외교정책진이 있다. 현대문명이 도달한 최고의 높이에서 세계를 굽어본다는 미국의 유력한 두뇌진이 하지를 지원할것이다.

정시명은 어차피 미국놈들과 걸음걸음 부딪쳐야만 하는 공작의 특수성으로부터 미국의 정치방식에 대한 연구를 깊이있게 하여왔다.

이 과정에 그는 흥미있는것을 찾아냈다. 한마디로 미국의 정치란 정치인들의 몫이 아니라 박사팀의 몫이라는것이다. 미국의 도처에 있는 각이한 재단에 고급한 인력들이 틀고앉아 정치와 경제, 국방과 외교와 관련한 자기의 주의주장을 연구하여 내놓는다. 미국의 정치가들은 다만 그들이 내놓는 구상과 방안들을 선택하여 그 집행자로 될뿐이였다.

결국 미국을 움직이는것은 정치가들이 아니라 박사들인셈이다.

그러므로 정시명은 하지의 배후에 대하여 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정시명은 동녘이 희붐해올 때에야 불쑥불쑥 튀여오르는 하많은 걱정과 판단과 결심들을 덮어버리고 마음속에 단단히 그루를 박았다.

(좋다. 하지, 네가 이기느냐, 내가 이기느냐. 아니, 미국이 이기느냐, 조선사람들이 이기느냐 겨루어보자. 다시한번 실력을 견주어보자.)

 

×     ×

 

정시명은 무르익힌 전술방안을 다음날 저녁에 지휘부모임에 제기하였다. 구체적인 세부까지 펼쳐보이느라니 시간이 길어졌다.

정시명의 말이 끝나자 좌중이 흥성거리였다. 기쁨과 찬탄의 목소리가 튀여나왔다.

《승산이 있는 싸움입니다. 고도의 책략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성입니다.》

안지생이 막혔던 숨구멍이 열린듯 기쁨에 겨워 환영해나섰다. 안지생은 젊음이 발산하는 기백과 용기도 있지만 어디서나 대상을 가림이 없이 자기의 주장을 꺼리낌없이 내놓는 성격이다.

《현실성도 있습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작전의 제요소들이 과학적으로 제시되고 전술적세부들도 훌륭히 착상되였습니다. 그대로 밀고나갑시다.》

김명호도 선뜻 지지해나섰다. 그런데 생각에 골똘해있던 길철이만은 《전 좀 의견이 있습니다.》하고 나섰다.

정시명이 기탄없이 말문을 활짝 열라고 고무해주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작전 대상에 대한 고려가 미흡하지 않는가 싶습니다. 상대가 김구나 김규식인 조건에서 그들이 만약 우리의 전술적의도를 포착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항차 그들과의 사업을 그런 방식으로 벌리는것이 도덕적인것이 되겠는가 이겁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상정되는가. 그건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인 까닭입니다.》

길철은 자기의 주장을 짤막한 설명으로 마치였다.

정시명은 그의 불만이 대뜸 리해가 되였다. 길철은 역시 머리회전이 빠른 지휘관이다. 문제포착도 빠르고 그에 대한 론거도 재빨리 세울줄 안다.

김구나 김규식은 애국자들이다. 그런 인간들에게 그 어떤 뒤공작을 들이댄다는것이 그 인간들에 대한 우롱일수 있다는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정시명도 생각해 두었던바다. 길철의 말이 옳다.

정시명은 고개를 내리저으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길철은 깨끗한 인간이다. 공산주의자이기때문에 리념도 원칙도 도덕도 방법도 투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것이다.

그는 깨끗한 인간이다. 생활도 깨끗하다. 애인을 곁에 두고도 그는 그 깨끗한 마음때문에 고민이 크고 간격을 좀체로 좁히지 못하고있다. 그들의 문제는 이미 지휘부모임에도 상정되였다.

《길철동지는 옳지 않다. 혜숙동무가 돼가는 꼴 보라. 긴세월을 넘어온 애정을 버린다는게 사실인가?》

어느 회의 뒤끝에 안지생이 이렇게 격렬하게 터쳐놓았다.

안지생은 권혜숙을 자기 밑에 두고 사업하고있다. 그 녀자의 변해가는 모습에 마음을 쓰다가 끝내 그들의 사랑에 균렬이 생겼다는것을 알아냈던것이다. 그는 어느날 용기를 내여 길철을 만났다. 재결합을 호소했으나 길철은 요지부동이였다.

정의감이 강하고 속대가 야무진 안지생이 전우들의 사랑의 비극앞에서 침묵을 지킬리가 만무였다. 그래서 이날 들고나선것이다.

김명호도 김승원도 그 소리가 금시초문이여서 벙벙해졌다. 안지생과 길철을 번갈아볼뿐이였다.

그게 안지생에게는 더욱 열을 오르게 했는지 인차 빠른 말씨로 총알같이 쏘아갈기기 시작했다.

《아니 모두들 모르고계시였습니까? 이럴수가 있습니까. 혜숙동무는 말을 안합니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길철동지가 이 문제에서 책임이 있다는겁니다.

사랑의 파멸을 놓고 울고있는쪽에 책임을 물을 여지가 있습니까.

난 지휘부가 이 문제를 정식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난 길철동지를 물론 존경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놓고서는 단단한 착오가 있다고 봅니다.》

안지생의 열기 오른 소리에 길철이 대척이 없이 창밖으로 꼿꼿이 눈길을 보내는데 그를 지켜보는 전우들의 눈길이 여느때없이 차거워졌다.

정시명은 안지생이 너무 서뿔리 불질을 했구나 싶으면서도 이왕 헤쳐놓은 일이라 잠자코 있었다. 차라리 속에 맺혀 커만 가던 종처를 활 터쳐놓은게 시원스럽다.

《길철동무, 어찌된 일이시오? 이건 뭐 동지간 륜리문제이니 간섭한다고 섭섭히 생각말고 함께 의논해봅시다.》

김명호가 자못 안타까운 어조로 권고하였다.

그러나 길철은 한번 그에게로 고개만 돌렸을뿐 여전히 창밖만 내다본다.

잠시 방안에는 무겁고도 침울한 분위기가 서려있었다.

김승원이도 침묵이 괴로운듯 《어험》하고 헛기침을 크게 한번 하고는 자기의 립장을 밝혔다.

《우린 사람들을 이끌어주어야 할 남다른 일감을 가지고있다고 봅니다. 사랑에 대한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가 한 인간의 가슴에 설음을 주고 원한을 남겨놓는다면 어찌 자기들을 혁명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를 바라겠습니까.》

그 소리에 길철이 흠칫 놀라며 서서히 전우들을 일별하였다. 그 눈길이 정시명과 교차되였다. 정시명이 그를 격려하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리유가 별거 아닙니다. 전 사실 녀자가 있는 사람입니다.》

《??》

그 소리에 다들 와뜰 놀랐다. 누구나 처음 듣는 소리다. 그렇다면?… 길철이라는 인간의 면모는 다 허위였는가?… 정시명도 놀랐다. 숨이 가빠왔다.

그러나 다시 안지생이 그 말 떨어지기 바쁘게 맵짜게 반박했다.

《길철동지! 왜 자신을 그렇게 비하하십니까? 광복전에 사귀였던 첫 애인이 대전감옥에서 옥사한걸 제가 모르는줄 아십니까. 그거야 혜숙동무도 잘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안지생의 소리에 정시명은 막혔던 숨이 후- 나갔다.

(그런 일도 있었군.)

오히려 가슴안이 달아올랐다.

생활에서나 사업에서나 구김살 하나없이 지내는 길철에게 그렇게 뼈가 저린 아픔이 있었다는것이 선뜻 믿어지지 않는다.

하긴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언젠가 길봉례가 하는 말이 왜놈법정이 일심에서 사형을 판결하고 3심에서 종신징역을 선고했을 때도 하루 세끼 게눈 감추듯 해서 간수들의 눈이 떼꾼해지군 했다 한다.

그런 길철이기에 지금도 웬간한 사람이라면 주접이 들었을 화제거리에 오르고서도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고있는것이다.

길철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리유가 또 있소.… 좋습니다. 조직앞이라 제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겠습니다.… 난 혜숙이와 열두살차이가 있는 아바이총각입니다. 이것이 기본리유이지요.》

그 소리에 갑자기 좌중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아바이총각이라는 소리가 모두의 긴장했던 마음의 끈을 탁 늦춰주고 웃음주머니를 흔들어놓았던것이다.

좌중의 웃음이 잦아들자 김명호가 말을 받았다.

《그게 무슨 리유란 말씀이시오? 혜숙이 좋고 나 좋으면 다지 어쨌다는거요?》

그 소리에 또다시 웃음이 넘실거렸다. 정시명도 즐거운 기분이다. 대수롭지 않게 길철의 맺혀있는 생각을 무시해버리려는 김명호의 스스럼없는 태도도 마음에 든다.

리론으로 말하면 어디에 내놓아도 견줄이가 없고 명석한 김명호가 사랑관에서는 상상밖으로 단순하고 통속적이다. 오히려 거기에 심오한것이 있는지 모른다.

김명호의 말에 방안의 분위기가 다시한번 크게 눙쳐들었다. 그 무슨 복잡하고 심각한 리유가 나설줄로 짐작하고 은근히 가슴을 조였는데 김명호가 그렇게 우스개소리처럼 풀어놓으니 얼마나 쉽고도 흥겨워졌는가.

그러나 다시 이어가는 길철의 주장은 단호하고도 열렬하였다.

《아니, 아닙니다. 사랑에서도 량심을 어겨서야 안되지요. 젊은 시절에는 이런 생각없이 친해졌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애초에 이성으로 사귀지는 말았어야 했지요. 나는 지금 숱한 조직성원들을 책임지고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이렇게나 저렇게나 비웃음을 사거나 말밥에 올라서는 안될 사람이라 그말입니다.

공산주의자란 아무데서나 어느 모로 보나 선한 웃음을 사야지 않겠는가. 인간은 깨끗해야 합니다. 깨끗한 인간만이 공산주의자가 될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혁명에 뛰여들어 이날이때까지 목격했던 생활의 결론입니다.

도덕적인 저렬아가 혁명앞에 깨끗이 사는걸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정향동지나 김명호동지를 존경합니다. 다섯살이나 우인 녀인을 그지없이 사랑하는 그 마음이 참 보기가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옛날 같으면 딸같은 녀성을 맞아들여서야 되겠습니까. 난 자기에게 어울리는 녀성을 선택하게 될것입니다. 혜숙이도 자기에게 어울리는 그런 남성을 선택하게 될것입니다.

나를 투쟁에서나 사랑에서나 깨끗한 인간으로 남게 해주십시오.》

단호한 그의 선언에 좌중에 설레던 웃음은 터졌던 그 본새로 삽시에 사라지고 정시명도 안지생도 목이 꺽 메고말았다.…

아직도 그들의 문제는 락착을 짓지 못하고있다.

권혜숙이를 만나보고온 사람들이 다 좋지 않게 말들을 한다.

… 길철이 리유가 어쨌든지 무정하다. 권혜숙에게서 웃음이 사라졌다. 얼굴이 여위여간다. 대책을 세우자.…

아직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정시명은 저 인간의 깨끗함을 사랑한다.

그들의 사랑이 열매를 맺게 되리라는것도 의심하지 않는다. 길철이도 권혜숙이도 새로운 사랑을 찾지 못하리라고 믿는다. 사랑은 결코 론리로써는 해석될수 없다.

좀 더 뜸을 두어보자.… 정시명은 이렇게 벼르고있다.

길철은 언제나 한본새다. 그에겐 한숨이 없다. 최남수일이 그 실례다. 실패는 했지만 언제 한번 의기소침하지 않고 여전히 공격정신으로 활동한다.

요즈음에 와서 최남수와의 사업을 재개하겠노라 하는걸 정시명이 당분간 좀 더 지켜보자고 했다. 북남회담문제에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지내볼수록 투사다운 기질이 물씬 풍기는 사나이이다.

그는 지금 이 순간도 길철의 인간의 진가를 재확인하면서 자기 방안의 허점을 곰곰히 따져보았다.

방안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김명호가 반론을 제기하였다.

《길선생, 난 선생의 뜻이 일리가 있다고보오. 그런데 우리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농사군은 풍년을 마련하기 위하여 궂은 일을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말입니다. 국토가 쪼각이 나는 이 준엄한 상황에서 그 무슨 체면과 륜리로 해서 반통일적행위에 푸른 신호등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최고도덕과 량심은 현시점에서 민족의 재결합입니다.》

그때 똑똑하는 기척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김명호는 말을 잠시 끊었다.

문앞에 앉아있던 안지생이 문을 여니 례영이 다반을 들고 방그레 웃는다.

《어서 들어와요. 에, 그러지 않아도 목구멍이 텁텁해서 누님 어디 가셨나 화내고있던 참이였는데…》

안지생이 방안의 탁한 공기를 눙쳐주듯 엉너리를 치며 반기였다. 안지생은 마동열을 생각하여 동생벌되는 례영을 누님이라 깍듯이 공대해온다.

례영은 안지생의 익살을 가벼운 미소로 받아들이며 참가자들앞에 말없이 차잔을 놓아주고는 조용히 방안을 나갔다.

《자, 목을 추깁시다. 식기전에.》

정시명이 먼저 더운 차를 훌훌 불며 마셨다.

모두가 그를 따라 차를 마시였다.

그런데 김명호만은 차잔을 들념을 하지 않고 방금 례영이 사라진 문쪽만 우두커니 지켜본다.

《계속하시오, 김선생.》

정시명이 독촉해서야 김명호가 눈길을 거두고 차잔을 잠간 입술에 대였다뗐다. 다시 잇는 그의 목소리는 보다 격조가 높아진듯 하다.

《동지들! 분렬의 비극은 벌써 우리의 생활에, 우리의 몸가까이에 현실로 다가와 눈물을 짜내고있소. 저 례영의 머리를 보시오. 제손으로 틀어올린 저 머리를…》

왕청같은 이야기를 꺼내놓고는 고개를 푹 떨구는데 울대가 크게 움씰거렸다. 뜻하지 않게 터놓은 이야기가 순간 모두의 가슴에 비분의 모닥불을 확 지펴놓았다.

잠시 방안에는 엄숙하고도 다치면 터질듯한 팽배한 정적이 드리웠다. 모두의 숨소리만 크게 들릴뿐이였다.

김명호는 손수건을 꺼내여 이마에 돋은 땀발을 지우고는 안경을 벗어닦았다. 평시에 그다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가슴에 깊숙이 묻어놓고사는 과묵한 사람이 격정을 터뜨리니 그 열도가 배가 되여 청중의 흉중을 되게 달구어놓는다.

정시명도 가슴이 뭉클해왔다. 례영의 틀어올린 머리를 볼 때마다 눈뿌리가 뜨거워지군 하였지만 김명호의 입에서 그 얘기를 듣고보니 더욱 그 의미가 젖어든다. 도미섬에서 제손으로 량태머리를 썩뚝 자르고 동열을 떠나보낸 그 눈물겨운 정상이 눈에 밟혀왔다.

《그래 우리가 이런 비극을 씻고저 하는 력사적인 대결의 상황에서 개개인물들의 체면이나 봐주고 도덕과 륜리에 얽매인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승자박이 아닐가요.

더구나 정동지가 여러번 말씀하셨지만 그네들이 련공의 길에 올라 나라와 민족의 재결합에 한몫을 할 때의 인간상을 그려봅시다. 그자신들을 위하여서도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우리는 이 나라의 애국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다시금 정선생님의 전술방안을 지지합니다.》

김명호는 마지막에는 한결 가라앉은 소리로 차분하게 강조하였다.

방안은 다시 숭엄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통일을 우리 시대의 최고도덕이라고 서슴없이 선포한 그의 토론이 참가자들에게 깊은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토해놓은 뜨거운 열풍이 모두의 심장과 심장에 세찬 격류가 되여 사품치고있었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김승원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김승원은 이 좌석에서 제일 몸이 부대하고 풍채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지휘부회의에 이제까지 세번 참가하였다. 매번 묵묵히 듣기만 하고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번 새롭고도 후더운 충격과 수양과 지식을 받아안군 한다.

파쟁과 정권쟁탈과 친미매국으로 엮어지는 《한민당》의 수많은 밀회에 참가해오는 김승원에게서 여기 《흥국상회》의 모임은 너무도 대조적이였다.

애국으로 피가 뛰고 겨레와 나라의 장래에 대한 책임감으로 사무쳐있는 이 순결하고 깨끗한 인간들의 모임 광경이 언제나 눈물겹게 새겨진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겨레의 운명에 대한 신성한 사명감을 부여안고 슬기롭게 작전을 펼쳐가는 정시명과 그의 전우들에게 열번백번 절을 올리고싶은 충동을 금할수 없었다.

그래서 《동지들! 난 력사앞에서 스스로 걸머진 사명을 위해 깨끗하고 헌신적인 좋은 말씀들을 해준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합니다.》하고 마치도 모임에 초대된 방청객처럼 서두를 뗐다.

그는 잠시 달아오른 마음을 식히려는듯 두손을 맞잡고 꾹꾹 주무르다가 토론을 계속하였다.

《나는 물론 정선생님의 작전방안이 훌륭하게 생각됩니다. 그에 대한 지지토론들도 원칙적으로 옳다고 보아집니다.

그런데 역시 길선생의 견해도 무시할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왜 전술적으로 타당성있게 착상되고 총적방향이 명확한 성공의 가능성을 주고있는 작전안이 무시하기 어려운 장애에 부닥치게 되였는가.

나는 여기에서 작전의 목표물, 사업의 대상선정이 새롭게 선택되여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김승원은 여기서 말을 끊고 좌중을 한바퀴 둘러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정시명은 그가 문제의 정통을 찌르다가 도중에서 입을 다물어버리는것이 이상스러워 그에게 토론을 계속하라는 눈짓을 해보였으나 당자는 더는 일어설념을 내지 않는다.

정시명은 잠시 회의를 휴식하자고 하고는 곰방대에 담배를 다져물고 뒤뜰에 나왔다.

(옳다. 그들의 말이 다 옳다.)

정시명은 제기된 문제들에 이렇게 공감하며 달빛이 깔린 뜰안을 조용히 거닐었다.

사업대상선택을 달리한다?… 어떻게?… 그래… 가만, 그 말이 일리가 있다.

우리의 싸움은 미국놈들과의 대결이다. 그러니 마땅히 사업대상이나 목표가 김구나 김규식이 돼서야 안되지. 그들은 애국의 길을 함께 나선 우리의 린접이다.

가닥이 잡혀왔다. 그는 사색을 이어갔다.

(사업의 목표는 북남회담의 실현이다. 북남회담에서 최대의 걸림돌은 미국놈들이다. 그와 야합한 리승만세력이다. 그러므로 사업대상은 그놈들이 돼야 한다.

우리의 작전은 그놈들의 책동을 분쇄하는것으로 일관되여야 한다. 김구는 마땅히 우리와 같은 참호에 나서야 할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것이 일순간에 단순해졌다. 이미 세워진 전술적대안들을 북남회담을 파탄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도전해올 미국놈들과 반동들을 타격하는 방향으로 풀어나가면 된다.

정시명은 회의가 속개되자 이에 대하여 보충적으로 제기하였다.

김구나 김규식이 북남회담에 응해나선이상 회담성사와 관련한 전술적대책들을 일정한 시기에 가서 다 알려주자고 제안하였다.

초저녁에 시작된 모임은 새벽녘에야 끝났다.

정시명의 제안은 그대로 사업방안으로 결정되였다. 그런데 모임이 끝날무렵에 례영이 종이장처럼 해쓱해진 얼굴로 나타났다.

그가 전하는 소식은 너무도 불길한 소식이였다. 박정인의 아들 박영수가 체포되였다는것이였다.

충청남도의 도청총무과장인 박영수의 체포소식에 모임참가자들은 깜짝 놀랐다.

정시명은 아닌밤중 홍두깨에 뒤통수를 얻어맞은듯 싶었다. 박영수는 송호정과 빨찌산과의 련락을 담당하는 제일 예민한 임무를 수행하고있었다. 정시명은 김명호와 길철이만 남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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