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대결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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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이 지났다.
정시명이 기다리던 3월 1일 동녘이 훤해왔다.
서울시민들은 두패로 갈라져 3. 1운동을 기념하여 좌우익에서 조직한 민중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공설운동장과 고려대학교로 밀려갔다.
좌익은 고려대학교에서, 우익은 서울공설운동장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로동자, 농민, 녀성, 학생대표들이 연설하고 유명인물들도 열변을 토하였다. 군중은 두패로 갈라졌지만 조국의 완전독립이라는 하나의 숨결로 이어져있었다.
《만세! 만세!》
기념식을 마친 수십만 군중은 대렬을 지어 서울의 거리를 물결쳐갔다.
《만세! 만세!》 포도우에 독립과 통일정부수립을 촉구하는 삐라가 눈꽃처럼 날렸다. 만세의 함성이 서울장안을 들었다놓았다.
그런데 낮 열두시 정각, 서울방송이 부풀어오른 민중의 열기를 짓누르듯 중대발표가 있겠다고 숨가쁜 소리를 련거퍼 내질렀다.
중대발표란 1948년 5월 10일전으로 남조선 전역에서 《단독선거》를 한다는 《유엔조선림시위원단》의 성명이였다. 미국놈들이 《유엔조선림시위원단》의 9개의 성원국중에서 5개의 나라가 명백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제법규를 란폭하게 유린하고 일방적인 발표를 해버린것이였다.
이에 접한 삼천리강토는 국토량단이라는 절박한 위기상황을 두고 분노의 활화산이 되여 타번지였다. 분노는 피의 항쟁을 불러냈다.
남조선의 도처에서는 이날 저녁부터 일제히 각이한 형식의 대중적인 투쟁이 벌어졌다. 도시에서는 매일같이 기습적인 시위투쟁과 삐라살포, 봉화투쟁이 간단없이 벌어졌다. 지방에 조직된 야산대들은 경찰지서들과 지방행정기관들, 악질적인 반동들을 무장으로 공격하는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벌리였다. 경상남도 고성에서 600여명의 농민청년들이 5개의 경찰지서의 경비전화선을 절단하고 죽창과 돌, 폭약으로 공격전을 벌려 4명의 반항하는 경찰을 처단하였으며 건물과 공문서를 불태운 다음 무기를 로획하여 가지고 태백산으로 들어간것은 그 대표적인 실례였다. 그들은 태백산에 들어가자바람으로 태백산빨찌산을 조직하고 미국놈들과의 결전을 세상에 선언하였다.
제주도의 30만 도민들은 손에 무장을 들고 력사적인 피의 항쟁에 떨쳐나섰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2차대전후에 처음으로 벌어진 대규모적인 반미무장항전이였다. 조국의 최남단섬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단선단정》이냐, 통일정부수립이냐 하는 문제가 전민족적인 절박한 과제로 나섰다. 이제는 총선거요, 민족통합이요 하는 탁상공론으로 세월을 보낼 때가 아니였다. 행동하여야 할 때다.
(그러면 무엇을 내걸고 어떻게 미국놈들의 흉계를 반격해야 할것인가.)
정시명은 준엄한 력사의 분기점에서 자기 조직의 몫을 찾아 또다시 련일 낮과 밤을 이어가며 모대기였다. 때로는 조직성원들과도, 낯을 익힌 진보적정치인들과도 진지하게 국난을 타개할 출로를 모색했으나 모두들 엄습해오는 민족의 위기를 두고 통분만 터뜨릴뿐 이렇다할 방략을 내놓지 못하였다.
날이 갈수록 정시명은 정국의 전환을 가져올 방안을 내놓지 못하는 자책으로 초조해졌다. 거세차게 타번지는 빨찌산투쟁의 불길은 정시명을 더욱 흥분시키였다.
온 민족이 미국놈과 정면으로 맞서 력사적대결을 하고있을 때 우리는 무엇으로 그 거창한 싸움에 이바지해야 될것인가.
그런데 어느날 흥국상회에는 귀한 손님이 안지생을 앞세우고 기별없이 나타났다.
진회색양복에 자지빛 넥타이를 가쯘히 매고 중절모를 점잖게 눌러쓴 그 손님은 뜻밖에도 은송이였다.
《무고하셨군요!》
장부책이 가득 쌓인 책상에 묻혀있던 정시명은 은근한 인사말에 고개를 들었다가 은송임을 알아보자 너무도 반가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은송선생! 이 어찌된 일입니까? 은송선생이 우리 상회 문턱을 넘어서다니!…》
《허허!… 서안판사 처장이 흥국상회 사장이라… 어디 안아봅시다.》
《허허!…》
그들은 반가움에 겨워 기쁨의 웃음부터 크게 터뜨리며 서로서로 으스러지게 몸을 끌어안았다.
《고생이 많으셨지요?… 몹시 축갔군요.》
은송은 여전히 정시명의 몸을 안은채 걱정어린 어조로 그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아니, 일없습니다. 선생님은 무고하셨습니까?》
《그럼요. 나야 뭐 보시는대로… 이렇게 10년은 젊어졌는걸요. 장군님슬하에서 갱소년했나 싶습니다.》
《정말 은송선생은 무척 젊어보입니다. 장군님께서 건강하십니까?》
《예, 건강하십니다. 여전히 젊음이 넘치시여 천지개명을 이끄시고계십니다.》
《예,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우리가 이 험한 곳에서 누굴 바라보며 사는것입니까.… 자, 좀 앉읍시다.》
정시명은 그제야 은송의 몸을 풀어주고 그를 쏘파에 자리를 잡게 하고는 초인종을 눌러 례영이를 찾았다.
례영이는 흥국상회 사장의 서기라는 명함장을 정식 받아가지고 정시명이 다니는 곳에 언제나 붙어다녔다. 사람들은 지어 마동열의 임무를 넘겨받은 안지생이까지도 례영의 소중한 곳에 손바닥보다 작은 어린이장난감같은 권총이 있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례영이, 인사를 드려라. 내가 중국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분이다. 은송선생, 우리 딸이외다.》
《오, 이렇게 곱게 자란 따님이 있었군. 내 이름은 은송이라 부른다. 내 광복전에 세상천지를 향방없이 떠돌다가 너의 아버지를 만나 사람구실을 하게 된 사람이다.》
은송이 헌헌한 소리로 이렇게 례영의 인사를 받아서 정시명이 나무랬다.
《원참, 애들앞에서… 얘, 그 말은 다 실없는 말씀이니 새겨듣지 말고 차 한잔 덥혀오너라.》
《예.》
례영이 두 어른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저도모르게 입가에 방그레 미소를 담고 방을 나서자 정시명이 정색을 했다.
《그런데 은송선생님이 어떻게 여기오셨습니까?》하고 물었다.
《가족들을 데리러 왔습니다.》
《아, 그랬군요.》
《며칠전에 민전의장단회의가 장군님을 모시고 진행되였는데 회의 뒤끝에 저를 따로 만나주시였습니다. 가족들이 서울에 그냥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저를 크게 나무람하십디다. 아무리 일이 바쁘기로서니 평양에 온지 언제라고 그리도 무심하냐고 하시며 만사를 젖혀놓고 서울에 가서 가족들을 다 데려오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왔지요.》
《제가 제 일만 일이라고 관심이 없었습니다. 전 북으로 다 들어갔겠거니 했는데… 참 미안합니다.》
정시명은 은송에게 돌려주신 장군님의 은정이 마치도 자기가 받아안은것처럼 기쁘고 감격스러우면서도 은송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진심으로 사과하였다.
그 소리에 은송이 펄쩍 뛰였다.
《원, 그러지 마시오. 정선생이 여기서 어떤 수고를 하고있는지 다 짐작이 됩니다. 사실은 서울에 오면 정선생부터 찾아 문안이라도 드리고 가자고했는데 이 넓은 장안에서 통 찾을 길이 있어야지요.
헌데 일이 될라구 방금전에 저 안지생이를 만났지요. 안지생이도 걱정이 큽디다. 아무쪼록 신변에 류의하십시오.
김일성장군님께서 저에게 평양에 찾아왔던 려운형선생이나 허헌선생에 대하여 가슴뜨겁게 회고하시면서 정선생의 신변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셨습니다. 정선생이 속탈이 있는것 같은데 그때 며칠동안 눌러놓고 좀 치료를 해서 보낼것이였다고 후회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보시는것처럼 전 이렇게 건강합니다. 우리 장군님께서 건강하시다니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장군님 뵈오면 제걱정은 하시지 말아달라고 말씀드려주십시오.… 그래 언제 떠나시겠습니까? 오늘저녁은 저와 함께 밤을 보냅시다.
주인장이 좋은분이여서 손님대접을 잘합니다.》
《오늘 저녁차로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빨리요?》
《빨리 가야지요. 모두가 바쁘게 뛰고있는데 한가로이 가족데리러 서울길에 오른것만 해도 죄송스러운 일인데… 그래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 소리에 정시명은 인차 대답을 하지 못하고 괴롭게 긴 숨을 내그었다.
례영이 차를 끓여가지고 들어왔다.
그들은 더운 차를 몇모금씩 마시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이야 무척 힘들겠지요.》
은송이 정시명의 무거운 마음속을 가볍게 해주고싶어 이렇게 위로하였다.
《글쎄, 힘들다고 해야 할지… 지금 나라의 분렬위험을 두고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는데 난 아직 똑똑한 일거리를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미국놈들의 〈단선단정〉을 짓부시고 통일정부를 세워 완전독립국을 일떠세워야 할게 아닙니까. 우리도 력사의 대세에 빨리 돛을 올려야 되겠는데 딱히 방책이 서지 않습니다.》
은송이 깊은 자책이 어린 정시명의 심중이 리해가 되는듯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다가 《〈단선단정〉이라… 짓부셔야지요. 그걸 놔두면 국토는 동강나고말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지요.》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심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도 이 문제로 해서 크게 심려하고계십니다. 이번에 열린 우리 민전의장단회의에서도 실은 그 문제가 토의되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지난해에도 이와 관련하여 여러차례 가르치심을 주신바가 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이번 회의에서 미제의 〈단선단정〉책동을 결정적으로 분쇄하고 전조선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대책으로써 북남정치인들의 련석회의를 소집할데 대한 력사적인 제안을 내놓으시였습니다.》
《북남정치인들의 련석회의요?!》
정시명은 귀가 번쩍 트이였다. 며칠토록 가슴을 지지누르던 납덩이가 금시 녹아버리였다.
정시명은 불현듯 장군님을 만나뵈옵던 일이 떠올라 뜨거운 감구지회가 뭉클 차올랐다. 그이께서는 벌써 그때에 북남정치인들의 대회합을 마련할데 대한 위대한 경륜과 웅지를 펼쳐주시지 않았던가. 지금이야말로 장군님의 그 숭고한 애국애족의 구상을 꽃피워야 할 시기이다.
(바로 이것이다!)
정시명의 속깊이에서 이런 찬탄의 부르짖음이 울렸다.
(바로 이것이다! 다른 대안이 없다.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정시명은 고패쳐오르는 격정을 누르며 이렇게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북남회담이야말로 미제의 분렬주의선언을 산산이 부서지게 할 벼락이다. 북남정치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앉는다는것부터 이 나라의 새 력사를 빛나게 장식할 장거이다. 미국놈들이 38선에 늘여놓은 철조망을 통일회담사절들이 헤쳐 넘나드는것부터 력사적의의를 가질것이다.
뚫려진 그 문으로 이제 남과 북의 형제들이 오가며 길을 넓히고 종당에는 철조망을 거두게 할것이다. 회담에서 울려퍼질 통일의 목소리야말로 미국놈들을 후려치는 벼락이다. 그 힘찬 목소리들이 겨레의 머리우에 드리운 분렬의 먹장구름을 활활 태워버릴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다! 분렬의 칠흑같은 밤은 가고 아, 동이 트는구나!)
정시명은 온몸에 뻗어오르는 왕성한 기운과 희열에 휩싸여 목멘 소리로 부르짖었다.
《바로 그겁니다!》
은송은 감동과 흥분에 젖어있는 정시명의 얼굴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이 력사적인 회합의 성패를 결정하는 관건적인 고리는 남조선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있는 우익민족주의세력을 참가시키는것이라고 하시였습니다. 그들이 참가하지 못하면 회의가 전조선적인 대표권을 행사하지 못할것이라고 간곡하게 가르치시면서 이 문제에 대하여 크게 심려하시였습니다.》
《예, 장군님의 가르치심이 천만번 지당합니다. 우익민족주의세력이 서울에서는 커다란 영향력과 지위를 차지하고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북남정치인들의 모임에 선뜻 응해나서겠는지?…》
정시명이 자신없는 말투로 이야기하자 은송도 걱정스럽게 이야기를 받았다.
《옳습니다. 그게 제일 큰 걱정거리입니다. 장군님께서도 말씀이 계셨습니다. 우익민족주의세력을 회의에 참가시키는 문제는 반공대결속에 인생을 보내온 그들을 련공합작에로 전환시키는 문제이기때문에 매우 어렵고 복잡할것이라 하시였습니다.》
《예.…》
정시명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심려에 접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방안을 거닐기 시작하였다. 그이께서 심려하시는 문제를 떠맡아야 하겠다는 절절한 마음이 순식간에 가슴 한밑에서 괴여올랐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김구를 비롯한 민족주의운동의 여러 두령들의 얼굴이 눈앞에 얼찐얼찐 떠올라서 여전히 마음의 대문에 무겁게 매달리는것만 같았다.
쉽게 결단을 내리고 가벼이 대답을 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민족의 중대사가 걸려있는 책임적인 과제이다. 하면 좋지만 하지 못하면 어찌할수 없는 그런것이 아니라 자그마한 실책이나 패배가 용납되지 않는 사업이다.
그러나 정시명은 자기가 장군님께서 걱정하시는 문제를 두고 경중을 가리고 실패로부터 차례질 후과부터 생각하는 자기의 소심성이 느껴지자 스스로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맡자. 우리가 맡자. 장군님의 심려를 접하고도 그를 외면한다면 도대체 이 정시명이 왜 서울땅에서 어정거리고있는거냐. 장군님께서 안타까와 하실 때 결사의 각오와 혼신의 힘을 다해 떨쳐나서는것이 그이의 전사된 도리가 아닌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도 그 봄날에 다진 약속을 지켜내지 못하는 의리없는 인간이 되였는가.)
예까지 생각이 이르자 정시명은 마치 장군님앞에 나서기라도 한듯 은송의 앞에 와서 엄숙한 자세로 《은송선생, 우리가 그 일을 맡겠습니다.》하고 나직한 어조로 말하였다.
《그래요.》
은송도 정시명의 저력있는 이야기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자리에서 충동적으로 일어나서 정시명에게로 한걸음 다가섰다.
《우리가 맡겠습니다.》
정시명은 다시금 나직이 그러면서도 천근의 무게가 실린 드팀없는 어조로 분명하게 자기의 결심을 밝히였다.
은송이 정시명의 두손을 덥석 틀어쥐였다.
《정향선생, 선생이 그 일을 맡아준다면 우리 장군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마 그이께서는 마음을 푹 놓으실것입니다. 이거 내가 서울에 왔다가 큰 기쁨을 안고 평양에 돌아가게 되였군요.》
《장군님께 그렇게 말씀드려주십시오. 장군님의 애국의 거룩한 뜻과 혁신적발기가 겨레앞에 알찬 열매로 주렁지도록 저희들도 땀과 피를 바쳐가겠습니다.
그런데 련석회의날자는 언제쯤으로 예견하시였습니까?》
《4월 중순으로 정하시였습니다. 일부 일군들이 회의준비사업때문에 걱정을 하였는데 그이께서는 지금 미국놈들이 유엔까지 업고 〈단선단정〉놀음을 벌리는 조건에서 더는 미룰수 없다고 하시였습니다.》
《4월 중순이라?… 옳습니다. 더는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미국놈들의 〈단선단정〉놀음을 통일정부의 수립으로 짓눌러버려야 합니다.》
정시명은 다시금 또박또박 결의를 다지였다.
《우리가 꼭 해내겠습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은송은 정시명의 두손을 뜨겁게 잡고 좋아 어쩔줄 몰라하다가 바쁜 사업일정을 더는 지체시키지 않겠다고 하면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정시명은 모처럼 만난 귀한 손님을 하루밤이라도 쉬우지 못하고 떠나보내는것이 미안하기 그지없었으나 그의 걸음을 굳이 막지는 않았다. 그는 길철에게 김아성과 권재수를 불러 은송선생과 가족들의 안전한 귀환을 보장할데 대하여 지시하였다.
그러자 은송이 펄쩍 뛰였다.
《정향선생, 그러지 마시오. 고생하는 동지들에게 그런 페까지 끼치다니요. 저는 조용히 왔으니 조용히 물러가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은송선생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장군님앞에 무슨 면목이 서겠습니까.》
그러나 은송이 굳이 사양을 해서 김아성이만 개성까지 동행하도록 타협을 하였다.
그를 떠나보내자 정시명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을 곰곰히 되살리며 깊은 생각에 갈마들었다.
언뜻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수염을 짧게 기른 려운형이 흰구름에 실려 벙글거리며 다가온다. 오래오래 살겠다고, 동지라는 고귀한 이름을 부르며 열정에 넘치던 사람이 지금 살아서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얼마나 기뻐하랴. 아마도 중간세력은 자기가 다 맡아안을테니 걱정 말라고, 그들을 다 데리고 평양에 가겠노라며 윽윽할것이다.
(아, 몽양!)
달이 바뀔수록 더욱 그리워지고 그의 무게가 얼마나 컸던가가 재인식이 된다.
정말로 아직까지 그가 비워놓은 큼직한 자리를 메워주는 사람이 없다.
근로인민당은 지금도 조용하지 않다. 인민당의 출신들과 그들의 두령으로 선출된 장건식이라는 사람이 자기들에게 려운형이 차지하였던 당수직과 령도권을 달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백남운과 리영은 그건 몽양의 몸값이지 인민당계렬의 세습물이 아니라고 드세게 반발하고있다.
이때문에 정시명도 근로인민당의 지도인물들을 만나 3인거두지도체제를 존속하고 4인조의 역할을 높여 당안의 분파적기도를 시급히 청산할것을 요구하였다.
이번 투쟁에 근로인민당이 중심이 된 《13정당협의회》를 선봉에 내세워야겠는데 려운형이 없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다음으로 떠오른것은 김구와 김규식의 모습이였다. 반공을 필생의 리념으로 제창해온 그들이 공산주의자들과 무릎을 맞대고 분렬배격과 국토통일을 함께 론의한다면 장군님께서 가르치신것처럼 련석회의의 범국민적의의가 만방에 과시될것이다. 뿐더러 김구나 김규식의 영향권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질것이다.
정시명은 력량편성부터 하였다. 물론 그들의 측근자들속에는 안지생을 비롯한 조직성원들이 여러명 있었다. 그러나 그들만으로서는 단 시일내에 김구와 김규식세력을 련공, 합작에 돌려세우는 과업을 수행하기 어려울것 같았다.
그는 송호정도 인입시키기로 하였다.
김구나 김규식은 그가 자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것에 대하여서는 좋지 않게 생각하고있었지만 정치적인 대결대상으로 되지 않고있는 이상 담을 쌓아두고있는것은 아니였다.
정시명은 인차 관계자들을 만났다.
남북회담문제를 꺼내놓자 얼싸 안고 돌아갔다. 그러나 김구, 김규식문제에 들어서는 모두가 굳어진 모습들이였다.
《김구, 김규식과의 사업에서 우리가 애초에 세웠던 목표는 이미 달성되였습니다. 오늘 나선 과업은 그들을 련공회담에로 이끄는 새로운 단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사업은 남북회담의 성패를 가르는 사업이며 그들의 평생의 리념을 전환시키는 운명적이고도 복잡한 사업이므로 쉽게 이루어질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해내야 하는 과제이므로 목숨을 내대는 각오와 용기를 가지고 해봅시다.》
정시명은 간곡하게 말하면서 좋은 안들을 내놓으라는 말로 그들과의 협의를 끝냈다.
며칠후에 통보하여 온 안지생의 첫 보고는 정시명의 머리를 무겁게 하였다.
김규식과의 담화.
《선생님의 〈단선단정〉반대결의는 이북의 호응을 받고있습니다. 이북과 손을 잡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괴이한 소리, 내가 공산주의와 손을 잡아?》
김구와의 담화.
《이북의 공산주의자들과 합작의 길로 나가는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어떻게?》
《이를테면 남북정치인들이 모여앉아 국토통일회합을 가지는것이 어떻겠습니까?》
《반공은 항일애국 다음으로 내건 내 필생의 구호야. 공산당과 마주 앉아야 얻어쥘건 아무것도 없어.》…
4월을 한달 앞둔 때의 김구, 김규식의 동향이 이 정도이니 정시명이 답답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김명호를 근로인민당의 밀사격으로 파견하여 담판을 해보았다. 북반부와의 합작문제에 대하여 꺼내자 김구는 두툼한 입술을 돌문처럼 꾹 닫아붙이고 응대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북과의 련공합작을 쌍수들고 환영하는 리극로도 파견하였다. 《13정당협의회》에서 북과의 합작문제를 공식토의해보자고 제의하게 하였다. 김구는 즉석에서 그것이 《13정당협의회》의 공론으로 될것 같으면 《한독당》은 거기서 탈퇴하겠노라고 을러멨다.
안타까움속에 날자가 흘러가자 정시명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하루는 안지생이 자료를 가지고 흥국상회에 찾아왔다.
이날도 안지생이 들고온 자료에는 심술스러운 김구의 얼굴이 그대로 찍혀져있었다.
안지생은 인차 자리를 뜨지 않고 문건을 받아들고 페지를 넘기는 정시명의 옆에 조용히 앉아서 그가 마지막페지를 넘길 때를 기다리였다. 여전히 전진이 없는 자료보고만 제출하게 되여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구름이 낀 정시명의 기분을 밝게 해주려고 자료를 꾸며낼수도 없는 노릇이여서 안타깝기는 정시명이 못지 않았다.
이윽고 정시명이 자료에서 눈을 떼고는 쏘파에 비스듬히 기대여앉아 눈을 감았다. 무거운 생각에 시달릴 때면 정시명이 항용 보여주는 몸가짐이여서 안지생은 그게 자신이 불민한 탓인듯 더욱 죄스럽고 그럴수록 김구가 미워지는것이였다.
《70년 굳어진 담벽에 닭알던지는 격이군.》
정시명이 혼자소리로 나직이 내뱉고는 길게 숨을 내그었다.
《왜 가지 않소?》
잠시후 정시명이 물었다.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안지생이 영채가 유난한 두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정시명이 그냥 눈을 감은채 고개만 끄덕이였다.
《날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김구나 김규식선생이 반일적인 민족주의세력에서 중심을 이루고있는것은 사실입니다.》
안지생이 거침없이 말을 꺼내다가 여기서 중단했다. 자기가 꺼내려는 말이 정시명에게 접수되겠는가 하는 우려에서였다.
《그래서?》
정시명은 벌써 안지생의 속생각을 알아차렸으나 그 스스로 진속을 다 털어놓도록 뒤말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그건 결코 김구, 김규식선생들이 민족주의세력의 전부가 아니라는것입니다.》
안지생이 닭알침을 꿀떡 삼키고는 또렷이 주장을 폈다.
《그건 그렇소.》
《광복된 오늘에 와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전 그를 돌려세울수 없을바에는 차라리 철저히 고립시켜 련석회의에서 배제하며 그들의 영향권에 있는 세력을 포섭하는것이 회의성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공작은 제가 하겠습니다.》
《고립시킨다?…》
정시명이 그제야 눈을 뜨며 나직이 반문하였다. 안지생이 불만이 어린 정시명의 눈길을 받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련석회의에까지 배제되면 영영 애국의 기회를 놓치게 되지 않을가?》
《어쩌겠습니까. 그들에게는 반공이 필생의 선택인데. 운명이라고 봐야지요.》
안지생은 이미 단단히 자기의 결심을 굳히고 이날의 상면에 나선듯 여느때없이 정시명의 앞에서 단호하게 고집을 부렸다.
《운명이라구? 음…》
정시명은 다소 놀란듯 한 눈으로 아직도 애티가 있어보이면서도 주장이 있고 분석이 예리한 안지생의 모습을 응시하다가 다시 눈을 감아버리였다.
려운형의 모습이 또 앞을 가리운다.
김규식과 절교선언을 하고와서 그렇게도 자신을 모질게 타매하며 거친 숨을 씩씩거리던 몽양, 만호는 자기에게 맡기라고, 그 사람이 근본이야 버리겠느냐고 절절하게 주장하던 목소리가 쟁쟁하다. 지금도 그 비단같은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버리지 말라고, 그들을 끝까지 데리고가야 할 우리 진의 사람들이라고 뜨겁게 속삭이는것만 같다.
(그래, 그들은 기어이 우리 사람이 돼야 한다. 그것은 몽양의 간곡한 유언이기도 하다. 몽양이 고인이 되여 세상을 하직할 때 우리는 민족의 거목을 쓰러뜨린 미국놈들을 저주하였다.
그를 지켜내지 못한 고민으로 잠들수 없었다.
그런데 이젠 우리 손으로 또 김구와 김규식이 같은 거목들을 애국의 대오에서 찍어넘길수 있느냐.
거목들이 여전히 이 나라의 푸른 하늘에 높이 솟아 제모습을 잃지 않도록 해야지 밑둥에 구새가 먹고 잎새에 황이 들었기로 함부로 찍어버리면 숲은 쉽게 결단이 나지 않겠는가.
이건 외세가 바라는바다. 미국놈들은 어떻게 하든지 이 나라의 동량감이 될만한 거목들을 모조리 애국의 숲에서 뿌리채 들어내려고 갖은 오그랑수를 다 쓰고있다.
내가 지금 그 숲을 가려보지 못하고있다. 눈이 흐려지고있다. 이래서는 안된다. 통일이라는 위대한 창조물은 울울창창한 애국의 숲에서만 솟아오를수 있다.
우리의 싸움은 결국 그 숲을 보호하고 더욱 푸르싱싱하게 가꾸는 일이다.
몽양이 비워놓은 자리에 김구도 김규식이도 자랑스러운 이 나라의 거목으로 자리잡게 해야 한다.
이건 우리 장군님의 뜻이다.)
정시명이 뜨거운 추억과 자책을 안고 여전히 눈을 감고있자 안지생은 더 설명을 펴지 못하였다.
하기는 벌써 오래전부터 생각을 굴려왔던 문제를 다 토해놓은 셈이였다.
그에게는 백년묵은 나무등걸과도 같이 굳을대로 굳어지고 쇨대로 쇠진 김구나 김규식의 운명을 반공에서 련공으로 역전시킨다는것이 헛된 바람이고 무익한 노력랑비라고 판단되였다. 더구나 민족적중대사가 박두한 이 시점에 와서도 그들을 끌어안고 제자리 걸음을 하는것이 황당하게만 생각되였다.
정시명이 잠시후에야 눈을 뜨며 자리에서 무겁게 일어났다.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건… 아니, 그래서야 안되지. 나라 위해 흘린 그네들의 피 한방울한방울을 귀하게 여기자구.… 이렇게 하세. 내가 다시금 이 문제를 가지고 김구선생을 만나러 가겠네.》
며칠후 정시명은 근로인민당의 백남운과 리영, 홍명희, 송호정, 《건민회》의 리극로며 인민공화당의 당수까지 데리고 김구의 집으로 갔다.
일행중에는 류동명의 얼굴도 보였다.
류동명은 송호정의 집에서 우연히 맞다들었다. 모험이 아닐가 하는 아니아니한 생각끝에 남북정치인들의 통일회합문제를 꺼내놓으니 뜻밖에 두말안팍에 환영하였다. 뿐더러 김구, 김규식이 걸림돌이라 해도 차던질 생각말고 꼭 동참시키라고 하면서 쾌히 따라 나섰다.
그들이 왔다는 전갈을 받자 김구는 맨버선바람으로 대문까지 황황히 마중을 나왔다.
정시명의 뒤에 정계와 군부의 실력자들이 수원처럼 주런이 들어서자 김구는 더구나 어기가 질려 그 거구의 몸을 가늠하기 힘들어 하였다. 그들은 다 이남에서 화제의 인물로 받들리는 정계의 거물들이였다.
일행이 둥근상두리에 자리를 잡자 김구의 맏며느리 안미생이 커피를 끓여가지고 와서 모두에게 인사를 하였다.
정시명은 김구가 자기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는게 감촉되여 빙긋이 웃어보이며 커피잔을 입에 대였다.
《웃지들 마시오. 차보다 숭늉맛을 그리워하던 이 백범이 어느 사이에 바다 건너 실려온 커피맛을 들였다오. 근본을 잊었다니, 허허…》
정시명의 거동에 마음을 쓰던 김구는 정시명이 웃는것이 반가운듯 자기도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희색이 돌아 말을 꺼냈다.
좌중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정시명은 한담이 지나가고 화제가 정치문제에로 바뀌여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오늘 이북형제들의 애국애족의 뜻을 지지하여 김구선생님과 국론을 나누게 된 영광을 누리게 되였습니다.》
정시명의 정중한 이야기는 일거에 방안의 공기를 엄숙하게 하였다.
정시명의 말에 김구가 당황해하며 앉은 자세부터 바꾸었다.
김구로서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일이였다.
한생을 공산주의와 대결했고 서울에 귀국한 후에도 이북을 반대하는 여러가지 도발을 조직지휘한 자기가 북의 뜻을 지지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국론을 나누게 된다는것이 꿈같은 일이였다.
《그러면…》
김구는 정시명의 좌우에 앉아있는 일행을 둘러보며 아연해서 물었다.
《당신들은?…》
《김구선생, 이북의 형제들이 우리에게 통일건국대업에 뜻을 같이 하고 힘을 합치자고 하는데 내 감히 마다할수 있겠습니까.》
리극로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김구가 다른 사람들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그들역시 동감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정시명은 이미 시작된 공세를 늦춤이 없이 여유작작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이북은 리승만의 〈단선단정〉놀음을 지난날에도 반대했고 앞으로도 반대할것이라 합니다.》
《에… 거기에 관한 나의 견해로 말하면 이미 만인에게 공개된바입니다. 나는 이미 유엔이 채택한 〈단선단정〉제안을 끝까지 반대할것이라고 성명하였습니다.》
김구는 이것이 일종의 회담이라는것을 느끼고 정중하게 대답을 하였다.
《북조선은 외국군대를 다 철거시키고 전조선적인 선거를 통하여 단일정부를 선거하며 국토를 하나로 통일시키자고 주장합니다.》
《천만번 지당한 주장입니다. 선조들이 하나의 강토로 물려준 이 땅에 우리대에 와서 분렬의 패말뚝을 박게 해서는 안될줄로 압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수 없습니다.》
김구는 연신 헛기침을 하면서 고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사뭇 웅건한 어조로 응수하였다.
《북조선은 이러한 정견의 공통성과 애국애민의 리념으로부터 김구선생과도 만나 국사를 허심탄회하게 의논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 잡을것을 희망합니다.》
《나와 손을 잡는다고?》
《예, 남북의 모든 인사들이 모여앉을것을 희망합니다.》
《안되오. 이 백범이 세상에 열두번 다시 솟아도 공산주의와는 손을 잡지 못해요. 그렇게 전하시오.》
김구는 애써 진정해오던 침착성과 아량을 잃고 주먹으로 허공을 내리찍었다.
정시명은 김구를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보다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뭐라구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백범! 내 이자리에서 한가지만 묻고 넘어갈게 있습니다. 백범은 열두번 다시 솟아도 공산주의와 손을 잡지 못한다 하였는데 그러면 상해에서 김일성장군님이 보천보를 들이친 소식을 듣고 〈림정〉이 이젠 장군님을 후원하자며 련락원까지 백두산에 파견하던 일은 한갖 민심을 우롱한 거짓이였습니까? 대답을 정히 듣고싶습니다.》
정시명의 엄숙한 물음에 김구는 예리한 칼날에 찔리우기라도 한듯 몸을 흠칫 떨었다. 정시명이 뜻하지 않게 상기시켜준 일이 순간 눈앞에서 번개처럼 령롱하게 떠올랐다.
1937년 초여름이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보천보를 들이쳤다는 소식이 림정에도 뢰성처럼 날아들었다. 너무도 통쾌하고 속이 후련해서 김구는 지기들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부르짖었다.
《배달민족은 살아있다! 배달의 얼은 살아있어. 이놈들! 배달 민족이 숨이 꺼질상 싶었더냐!… 이제부터 림정은 김장군을 후원해야겠다. 당장 백두산에 련락을 띄워야겠다.》
그후에도 김구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제끼고 《배달이 살아있다!》고 소리치면서 두번이나 띄운 련락원들이 끝내 장군님을 찾지 못하고 돌아온데 대하여 여간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게 거짓이라니?!… 백범이 그런 거짓도 마구 행할 사람인가. 김구는 대바람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는 태연자약해서 분명하게 대답을 하였다.
《정처장, 김장군은 김장군이시오. 그분은 만백성이 추앙하는 배달의 영웅호걸이시오. 그분의 존함을 어찌 공산당과 련결시킨단 말이요?》
《백범, 백범선생은 장군님을 잘 모르시오. 우리의 공산주의는 김일성장군님이십니다. 장군님은 우리의 공산주의입니다.》
《그런 소리마시오. 상해림정에서 제일 못나게 논 놈은 공산당패였소.》
《백범, 심사숙고하시오. 공산당의 간판밑에 공산주의를 모독한 가짜 공산당을 어찌 우리 장군님의 공산주의와 동렬에 세워보십니까.
이것은 나의 개인적의사입니다. 나는 백범선생의 애국애족의 리념을 존경합니다. 선생님이 주장하고있는 정치적구호들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그 실현을 위한 구상에 있어서는 리해되지 않는것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백범선생이 내놓은 외군철거와 총선거, 통일정부수립발기들을 지지하고있습니다.
그런데 백범선생이 또다시 자기의 주의주장을 지지하는 당파를 고집과 편견으로 배척한다면 모처럼 내놓은 소중한 정치적발기들도 공리공담으로 됩니다.》
백남운이 자기도 한마디 하겠노라며 대화에 끼여들었다.
《백범선생,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합작의 뜻을 대의를 앞세운 그분의 웅지이고 그분만이 내놓을수 있는 민족단합의 대경륜이라고 믿어마지 않습니다.
우리 근로인민당은 그 높은 뜻을 흔쾌히 접수하였습니다.
그런데 까놓고 말해서 백범선생이 북의 공산주의자들과 만나지 않고 어떻게 국토를 통일할수 있으며 단일정부는 어떻게 무어낼수 있겠습니까? 미국이나 리승만과 손을 잡아서는 선생의 고견을 성취할수 없다는거야 불보듯 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백범선생도 북반부형제들의 성의있는 호소와 도량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량심적으로 평가할것을 권고하고싶습니다.》
이날의 담화는 이것으로 끝났다.
정시명일행은 그 길로 김규식이도 만났다. 김규식은 남북회담을 하는 문제에 대하여 김구처럼 완고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뜨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정시명은 이미 심장을 울려놓았으니 반응이 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기다려보자. 고목에 꽃을 피우려면 아직도 품을 더 들여야 한다.)
사흘이 초조하게 지나갔다. 안지생이 사흘째되는 날 의기양양해서 흥국상회에 나타났다. 그는 김구와 김규식이 이틀동안 계속 밀담을 벌리다가 정시명에게 련명으로 편지를 보내여왔다고 하면서 상해림시정부의 인장까지 찍혀진 편지를 내놓았다.
정향귀하.
우리는 귀하가 제기한 문제가 김일성장군님의 애민애족의 발기라는데 특별히 류의하면서 아래와 같이 회신을 보내기로 합의하였습니다.
① 유엔소총회결정으로 채택한 리승만의 망국제안인 《단선단정》을 반대한다.
② 남북총선거에 의하여 자주독립정권을 수립한다.
③ 《남북회담》을 지지한다.
※ 류의할 문제-우리가 이제 곧 남북회담을 제기하면 북에서 찬의를 표하겠는지?…
경의를 표하면서
상해림시정부 주석 김구
상해림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정시명은 그들의 태도전환이 반가웁기 그지없었으나 그들이 북반부와의 련공합작에 응하기로 한 배경이 무엇이겠는가에 대하여 심중히 검토하였다. 물론 나라의 장래를 우려하는 애국적인 감정에서 출발된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그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여기에는 보다 미묘한 정치적타산도 작용한것으로 추리되였다. 정치적수지가 맞지 않을 때는 한걸음도 양보하지 않는 그들의 습벽을 너무도 잘 아는 정시명이였다.
그는 김구와 김규식의 속심을 계산해내느라고 오래동안 주의깊게 편지를 훑었다.
《저는 믿지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래일아침이면 언제 그런 편지를 냈느냐고 생억지를 부릴겁니다.》
안지생이 정시명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제딴으로의 평가를 내렸다.
《이렇게 인장까지 찍었는데도?…》
정시명은 안지생의 말에 수긍은 가면서도 다른 소리를 듣고싶어 이렇게 말했다.
《뭐, 그런 일을 한두번 당해왔습니까. 그런게 없다면 김구가 아니지요.》
김구의 정치적변신에 대하여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안지생의 말에 정시명은 더욱 마음이 개운치 못하였다. 안지생을 떠나보낸 그는 생각에 잠겼다.
점차 그들의 진의도를 가리웠던 허울이 한겹두겹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남북회담을 저들이 먼저 제안하였다고 내외에 선포하겠다는 의향을 넌지시 시사하고있다. 여기서 정치적실점을 따보려고하는것이 분명하였다. 통일의 일선에서 자기들이 활약하고있다는 전인민적인 인정을 얻어 자기들의 정치립지를 다져보려는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반가왔다. 그들이 먼저 세상에 발기를 내놓는다면 어떻다는건가. 동기와 야심이 무엇이든지 그들이 협상의 길에 오르는것은 대견한 일이 아닐수 없다.
여기에서 정치적실익에 대하여 론하는 자체가 민족애라는 근본립장을 포기한 정치적사기행위이다. 나라의 분렬을 막는다면 이것이야말로 남북정치인들이 우리 겨레에게 내놓을수 있는 최상의 정치적열매이며 민족의 실익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것으로 끝낼수 있겠는가. 무엇인가 미덥지 않고 께름직한 느낌이 들었다. 안지생이 별 생각없이 던지고간 말이 명치에 맺혀 내려가지 않았다.
정말로 그들이 래일이라도 이 무겁게 보내온 립장표명을 무효로 선언할수 있을가. 하긴 그들에게 있어서 그쯤의 일은 여반장일것이다.
그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여러가지 착잡하게 갈마드는 생각에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