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눈물에 비낀 사랑과 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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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외에 있는 궁술장에는 늘 구경군들이 많다.
궁술이란 일종의 전통무예여서 나이지긋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민족의 전통에 대한 숭상이 몸에 배여있는 《림정》계의 로장들도 있고 서울경내의 고풍의 유지들이 있는가 하면 위엄을 중히 여기는 정가의 명사들도 있다.
돈벌이구멍을 만들줄 아는 장사군들이 궁술장주변에 빈자리없이 술집도 차려놓고 음식점도 내오고 장기판까지 여기저기 벌려놓았다.
근래에 와서는 일요일이나 명절날을 여기서 소일하는 사람들이 퍽 줄었다고 하지만 그대로 궁술장은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였다.
정시명은 오래전부터 여기를 자기의 사업무대로 리용하려고 궁리해왔으나 덧쌓이기만 하는 일거리에 묻혀 좀체로 시간을 내지 못하였다. 그가 이곳에 눈길을 보내게 된것은 서울안에서는 대체로 정견에 따라 패가 이루어지지만 여기는 말그대로 초당파적인 서울유지들의 구락부로 되여있다는데 있었다.
각계각층이 모여드는 이 장소는 여러가지 소식들이 모여들고 교환되는 복덕방이기도 하였다.
이즈음에 와서 정시명은 정계의 각이한 인물들에게로 지면을 넓혀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입수되는 자료를 들추어보니 시야가 넓어지는것은 좋았지만 표상이 생동하지 못하고 현실감각은 무디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남조선전역에 거미줄처럼 늘여놓은 조직들의 편성을 전일적으로 관찰해보면 약한 고리가 리승만의 세력권이였다.
원래 리승만의 세력권에서 중추는 그놈과 함께 미국의 빵껍데기를 씹으며 살아온 놈들로 구성되여있는데다가 남조선에서 형성된 추종세력이 광복직후부터 극우익반동들이므로 조직성원들이 그속에 발붙이기를 싫어하고 또 그것이 힘들기도 하였다.
고집이 세면서도 겁이 많은 리승만은 미군정이 알선해주는 인물들이나 제놈과 여러해 미국에서 지내온 놈들을 내놓고는 좀체로 측근에 두려하지 않았다. 리승만의 비서진에 신정섭이만이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는데 그는 정치적후각이 예민하지 못하고 리승만의 상대역으로는 될수 없는 사람이였다.
정시명은 리승만의 주변인물들을 궁술장에서 자신이 직접 찾아내기로 결심하였다.
이날 정시명은 안지생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부유한 실업가차림으로 궁술장에 나타났다.
이날의 사업목표를 이미 설명받은 안지생은 궁술장의 여러 인물들을 살펴보다가 코수염을 기른 쉰살안팎의 기골이 후리후리한 장년을 가리켰다.
《조봉암이라고 합니다. 아직 영향력은 크지 않지만 리승만이 국내에 들어와서 제일 믿음성이 있는 유망인물이라 평가한 사람입니다. 리승만은 자기 비서들에게 〈이남땅에서 인물은 조봉암이야.〉하고 말했답니다.》
《그러니 리승만의 측근인가?》
《아니 아직은 그런것 같지 않습니다. 리승만은 앞으로 선거유세를 한다면 저 사람을 자기의 선거위원회에 동원시키려고 명함장까지 보냈다는데 조봉암은 자기는 누구를 내세울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회답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도 내연관계는 있다고 합니다.》
《조봉암이라…》
듣던 이름이다. 안지생의 말까지 듣고나니 호기심이 부쩍 동해진다.
《그뿐인가?》
《예, 그 사람이 공산주의운동에서 전향하였다는것이야 세인이 다 아는바이고…》
《음…》
새까만 코수염을 짧게 기르고 목에 나비넥타이를 맨품이 흡사 옛날 독립운동자들을 방불케 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선이 굵은것이 어덴가 려운형의 모상과 비슷하다.
조봉암은 마침 궁술터에 들어서려고 안내를 하는 사람에게 표쪽지를 건네주고있었다.
정시명은 주변을 한바퀴 돌아보고나서 안지생에게 표를 사오라 이르고는 개화장을 점잖게 내두르며 궁술장으로 다가갔다. 그는 조봉암이 서투르게 활시위를 당기는것을 보다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아, 좀더 팽팽하게 당기시오. 오른쪽 어깨가 너무 뒤로 기울어졌습니다.… 좋습니다. 그렇지요.… 이젠 당기시오. 천천히…》
조봉암은 정시명의 조언을 공손히 따르며 살 한대 날리고는 난데없이 나타난 푸접좋고 의협심이 있어보이는 사람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정시명이 중절모를 벗어들고 인사를 보냈다.
조봉암은 다시 과녁을 향해 살을 날리였다. 이번에도 정시명이 몸자세와 숨조절을 바로 하게 하면서 《날렷!》하고 구령까지 내리는데 조봉암이 고분고분 따랐다. 하지만 살은 두번 다 과녁원판밖에 나가박히였다.
조봉암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다가 돌아섰다.
그들은 마주 보며 웃었다.
정시명의 차례였다. 그는 앞으로 나가다가 조봉암과 어기게 되자 《내 실언을 했나 봅니다.》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조봉암도 깍듯이 고개를 숙여 답례를 표하고는 《로형께서 념려를 해주시였는데 그놈의 활이 게정을 부렸나 봅니다.》하고 소탈한 어조로 인사를 받으며 웃는다.
정시명은 명궁이였다. 서안시절에 중국의 이름난 궁술가들과 무술가들을 투쟁에 인입하기 위하여 배워둔 재간이였다. 정시명이 명중할 때마다 구경군들속에서는 환성이 터져올랐다. 더구나 조봉암은 자기가 살을 명중한것처럼 좋아하였다. 그는 《그 참 잘한다!》하고 탄성을 올리다가 표를 한장 사들고 와서 나오지 말고 더 살을 날리라고 청하였다. 정시명이 그것마저 다 명중시키고 들어오자 조봉암은 제일처럼 좋아하며 그를 선술집으로 이끌었다.
《참 활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내 마음이 다 후련해집니다.》
조봉암은 사뭇 통쾌해서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비결이 어데 있습니까? 나는 벌써 여기에 다섯번째로 왔는데 생각과는 다르거든요.》
《뭐 비결이라는게 다른게 있겠습니까. 첫째도 둘째도 활을 쏠 때 온갖 잡념을 다 잊어버리는것이 중요합니다. 당겼던 활시위를 놓는다고 생각했다면 그 살은 벌써 물목에 가고맙니다. 그리고 오른팔과 왼팔의 균형을 보장하고 어깨의 힘을 잘 조절해야 합니다. 맥을 놓아 당기는 순간 뒤로 제쳐서도 안되고 너무 긴장하여 앞으로 밀어서도 안되지요. 궁을 자세히 보면 그게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게 만들어져있습니다. 안과 겉은 참대로 탄력이 보장되도록 되여있고 그 중간에 속대로 넣은 박달은 탄성을 제지하도록 되여있는데…》
정시명이 궁술을 지혜롭게 엮어내리자 세상인물들을 굽어보는 타성을 가지고 살아오는 조봉암이 자기도모르게 선망의 눈으로 정시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부드러워보이면서도 예지와 지성이 빛을 뿌리는 상대의 눈매며 실꾸레미처럼 실실이 이야기가 풀려나오는 입술이 조봉암을 매혹시키였다.
《아참, 로형은 어디 계십니까? 로형같은분을 내 어째서 모르고 지냈을가…》
《선생이 나같은 한갖 장사군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니 장사군이라니요?》
조봉암은 다소 실망이 가는듯 반문하였다.
《나는 마카오에서 양복지를 가져다가 팔아먹고사는 무역쟁이입니다. 흥국상회의 사장노릇합니다.》
《그러니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글쎄 내 분수에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하긴 좀 무례한 말씀이긴 하지만 우리 장사군들이 정사를 바라보는 눈도 정객들이 장사군을 보는 눈과 류사한데가 있답니다.》
《어떻게요?》
《우린 정치라면 남을 속여넘기고 속히우기도 하면서 일신의 권세와 부귀를 꾀하는 일종의 투전판으로 알고있습지요.》
《음… 따는 로형께서 하신 말씀이 지당한데가 있습니다. 자, 술잔을 냅시다.》
《정치일선에 몸을 두고 계실 선생이시니 내 무엄한 말을 널리 량해해주시오.》
정시명은 진지하게 그의 말구멍을 열어놓았다.
정시명의 생각대로 조봉암은 술잔을 쭉 비우더니 기염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아니아니, 옳습니다. 로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투전판이라… 허허허. 내 일찌기 공산주의운동에 나섰다가 박헌영이 파쟁놀음을 광복후에까지 벌려놓는데 신물이 나서 맑스도 레닌도 줴버린놈입니다. 지금은 여러 지기들이 하두 보채서 리승만의 보수파에 몸을 담고있지만 실은 로씨야동방공산대학까지 다닌 레닌정통파입니다. 공산대학졸업생이 반공일선에 서있다! 허허허… 이거야말로 정치희비극이지요. 참 사람의 운명이란 천태만상이라니까요.》
조봉암은 대바람에 정시명을 푹 믿고 속을 털어놓았다. 옆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서 술을 마시다가 그에게 눈길을 돌리기도 했으나 조봉암은 그런 눈치에 할 말못하는 졸장부가 아니라는듯 계속 떠들었다.
정시명은 조봉암의 대범한 행동거지와 호방한 성미에 접하자 그가 앞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될수 있다고 짐작되였다. 그리하여 그와의 친교를 더 깊이 하기 위하여 승용차에 태워가지고 모나리자다방으로 갔다.
그들은 따끈한 차를 들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우리 실업가들도 정치의 보호속에 어차피 들어있는 사람이니 세상 돌아가는데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냄새맡기를 좋아한답니다. 요즈음에는 리승만의 〈단선단정〉소리가 김이 빠진것 같습니다.》
정시명이 이렇게 넌지시 리승만의 정치전망에로 화제를 비틀어갔다.
사실 리승만은 최근에 와서 단독선거소리를 하지 않고있었다. 하지도 립장표명이 없었으며 김성수의 《한민당》도 조용하였다.
김승원이 알려온데 의하면 미군정청측으로부터 《한민당》에 《단선단정》주장을 당분간 보류하라는 강한 지령이 왔다 한다.
문봉제의 《서북청년회》 깡패들만 여전히 피대를 돋구어 남조선에서의 단독정부선거를 고아대는데 망둥이들의 수작이라 새겨듣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정시명은 별스럽게 조용해진 보수진영이 심상치 않았다.
《그 령감이 입을 다문데는 다 쪼간이 있지요. 이제 사흘후 아니 정확히는 이틀후… 다 알게 될겝니다.》
조봉암은 의미심장한 어조로 슬쩍 내비치고는 정시명의 눈치를 살폈다.
《알고싶습니까?》
《물론이지요. 나도 이 나라의 백성이니까요.》
《로형과는 참 맥이 통할것 같습니다. 지금 하지와 리승만은 단독선거를 하는가 마는가가 아니라 어느 놈을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누구를 국무총리로 내세우겠는가를 놓고 쑥덕공론을 펴는 정도입니다.》
《그러면?…》
《허허허… 그게 정치지요. 래일모레, 그 다음날 아침이면 다 알게 될겝니다. 내앞에서 하지가 리승만에게 묻기를 당신을 대통령으로 앉히면 누구를 국무총리로 내세우겠는가 합디다. 리승만의 대답인즉 첫째로는 리윤영이… 거 북에서 쫓긴 시라소니가 있지요. 촉망이 높은분이라지만 기가 막힌 궤변이지요. 두번째로는 리범석이를 꼽습디다. 사람잡이에 이골이 난 녀석이지요. 두놈 다 리승만을 업고 제 속주머니를 채울 궁리를 하는 놈들이지요. 정치가 투전판이라… 참 사장님의 말씀 만량입니다.》
《나는 조봉암선생도 리승만의 대단한 신임을 받고있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정시명은 조봉암의 자존심을 조심스럽게 흔들어보았다.
그러나 조봉암은 탓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천연스럽게 빙긋 웃더니 흔연히 말을 받았다.
《글쎄, 그 말도 과히 틀리지는 않아요. 김구가 엇서기만 하지, 김규식이 앵돌아졌지, 안재홍, 홍명희… 유명인물들이 다 리승만을 왼눈으로도 안보니 이 이름없던 조봉암이도 졸지에 거인이 돼서 리승만의 눈에 든 모양입니다. 리승만에게는 내 머리가 아니라 이름이 필요한겁니다. 공산주의배신자 조봉암이말입니다. 그러니 내 또한 민족주의자 리승만을 싫다고 돌아설수 없지요. 리승만은 내 이름을 팔아 제 몸값을 올리고 나는 리승만의 힘을 빌어 나를 쫓아낸 박헌영의 따귀를 후려치고… 정치란 그저 그런거랍니다. 정치가 투전이라… 그 말씀 참 마음에 듭니다. 허허…》
조봉암이 여전히 너털웃음을 터쳐놓지만 정시명은 따라 웃을 여유가 없었다.
《대체 이틀후에는 뭐가 있다는겁니까?》
《하, 내가 말을 안했던가요? 단독선거 일정발표지요.》
《단독선거일정발표라니요?》
정시명은 금시 가슴이 서늘해져 나직한 어조로 부르짖듯 반문하였다.
《선거는 뭐 5월 중순에 한다나요. 미국사람들이 엉큼하지요. 오늘 아침 미군정의 보도를 들었습니까? 전국적인 선거를 준비해야 한다는 수작을 말입니다.》
《예, 분명 그들은 전국적인 선거라 했는데…》
《허허… 그러니 엉큼하다는겁니다.》
조봉암은 엉큼하다는 말을 련발하면서 8월경에 괴뢰정부를 조작할것이라는 리승만과 하지의 밀담내용을 자기도모르게 내놓았다.
그는 만취되여 정시명과 헤여지면서 앞으로 자기를 궁술의 제자로, 술친구로 사귀여달라고 부탁하였다.
× ×
그를 문밖까지 나가 바래워주고난 정시명은 한동안 구름장이 우중충하게 떠있는 서쪽하늘가에 눈길을 박은채 넋잃은 사람처럼 서있었다.
드디여 분렬고착이라는 민족적대비운이 육박해오고있는것이다.
아, 끝내 내 나라는 둘로 갈라져야 하는가.
불현듯 그의 눈앞에는 오매에도 잊을수 없는 숭엄한 영상이 우렷이 떠올랐다. 조국의 지도앞에 서시여 이 땅에 다가드는 민족의 대재난을 예고하시며 비분을 금치 못해 하시던 민족의 위대한 태양 김일성장군님!
장군님의 가슴속에 맺힌 심려를 가셔드리지 못하고 조국이 둘로 갈라지는 과정을 막연히 바라만 보고 속수무책인 자신이 너무 죄스러웠다.
귀전에서 통탄의 절규가 우뢰처럼 울렸다.
(아, 나야말로 력사앞에, 민족앞에 죄인이구나. 천추만대에 씻지 못할 분렬의 비극을 막아내지 못한 죄인이 되였구나.)
안지생이 등뒤에 조심스럽게 나타나 여느때없이 흥분된 정시명의 옆모습을 살피였다.
《어떻습니까?》
안지생이 이렇게 물어서야 정시명은 자신을 되찾았다.
《괜찮구만.》
정시명은 가슴속에서 타번지는 불을, 절통한 마음을 애써누르며 이렇게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조봉암과의 관계는 오늘과 같이 사귀는 정도로 유지하는것이 바람직스러웠다. 공산주의에 대한 쓰디쓴 환멸을 가지고 살아온 그가 쉬이 돌아설리는 만무하다. 반공은 그의 생활체험을 통하여 체내에 굳어지고 앙심으로 옹쳐있는듯 싶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량심과 지조를 진리의 길, 애국의 길에 되돌려 세우려면 그들에게 또다시 심각한 인생의 굴절이 있어야 하며 세월이 흘러야 한다. 언젠가는 그도 그렇게 될수 있는 사람인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르다. 설익은 과일은 익기를 기다리다가 따야 한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술친구로 사귀여두자. 그가 암시한것처럼 앞으로 조작될 정부에 림하게 되면 리승만의 측근에 좋은 소식통을 묻어둘수 있고 효과적인 지원도 받을수 있다.
하지만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할것이다. 정시명은 새삼스럽게 박헌영의 소행에 대한 반발과 회의심을 금할수 없었다. 어쩐지 원쑤가 될수 없는 인물을 놈들에게 빼앗긴것 같아 분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아직도 공산주의사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있으며 공산주의대렬에서 뛰쳐나온 자신에 대하여 무엇인가 가책을 느끼고있다. 무엇때문에 이런 사람을 적의 진영으로 밀어버리는가. 무엇때문에 대가 바르거나 제 목소리로 자기 주장을 펼줄 아는 사람을 배척하지 못해 몸살을 앓는가.
정시명은 과거 남로당에서 싸우다가 박헌영에게 반기를 들고나온 량심적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물음에 맞다들군 하였다.
정시명은 이날밤 잠자리에 들어서도 쉽게 잠들수 없었다. 조봉암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이 그냥 귀전에서 맴돌면서 가슴을 설설 끓게 하였다.
괴뢰정부가 선다는것은 이제는 기정사실로 굳어진것 같다. 이쪽에 《정부》가 서면 38선은 국경으로 되고만다. 38선이 국경이 되다니 그럴수 있느냐.
정시명은 자정무렵까지 잠자리에서 밀려드는 생각에 궁싯거리다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해는 여전히 자고있다. 행복과 안식이 고요히 어려있는 모습이다.
이 밤에 사람들은 다 저렇게 단잠에 들어있다. 자기의 운명에 불길한 먹구름이 밀려오고있다는것을 그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민족의 대재난이 문앞에서 어슬렁거리고있다는것을 꿈결에서나마 의식한 사람이 몇이나 될것인가.
정시명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웃방에 올라가 사이문을 꼭 닫았다.
담배를 피워물고 창문앞에 올방자를 틀고앉아 어둠이 깔린 밖을 내다보았다.
참을수 없는 비분이 가슴을 꺽 메운다.
《단선단정》이 강행되면 국토는 갈라진다.
백두에서 련련히 이어내린 지맥이 두토막으로 동강난다. 논밭이 갈라지고 부모형제가 갈라지고 마을이 갈라진다.
이 참극을 눈뜨고 보고만 있다니…
벌써 밖이 희붐해온다. 동이 트는가부다.
하염없는 생각에 잠겨있던 정시명은 별안간 주먹을 높이 쳐들었다. 《하지, 이놈! 네놈들이 끝내 이 땅을 란도질하는구나!》
당장 칼을 들고 내달리고싶다. 그 강도배들의 복마전에 뛰여들어 속시원히 결투라도 치르고싶다.
《네놈들이 종시 이렇게 하자고 기여들었지.》
정시명이 통탄에 이를 가는데 문밖에서 《딸랑딸랑》 방울종이 울린다.
정시명은 바깥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미명에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중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조용히 주고받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가까와 왔다.
문기척소리.
《동서, 나 좀 보자요.》
길봉례의 소리다.
이 밤에 웬 일인가? 민순임이 조용히 일어나 문을 연다. 이어 나직하면서도 부르짖음에 가까운 민순임의 말이 들려왔다.
《례영아, 네가 웬 일이냐?! 동열이는 어데 두고 너만 왔느냐?》
례영이라니?!… 저건 무슨 소리냐. 례영이 다시 나타나다니…
뭐라고 아래방에서 저희들끼리 나직이 주고받는 소리가 났다.
방문이 열린다. 민순임이 나직이 불렀다.
《여보세요, 주무세요? 례영이가 왔어요.》
정시명은 불을 켰다.
문이 열리더니 《아버님!》하고 례영이 달려와 팔을 부여안는다.
정시명은 이른새벽에 뛰여든 례영이가 이상스러워 앉은 자리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첫눈에 보매 머리형태가 달라졌다. 뒤머리에서 달랑거리던 량태머리가 없어지고 요새 서울 젊은 부인들속에서 류행되는 트레머리로 바뀌였다. 민순임이 부산까지 갔다와서 시간이 없어 그 애 머리를 얹어주지 못했노라 눈물속에 걱정이더니 제손으로 한 모양이다.
《어찌된 일이냐?》
정시명이 아직도 밤을 새운 그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나직이 물었다.
례영은 해죽이 웃기만 하는데 민순임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이것아, 너희들 제정신 가지고 한짓들이냐. 먼길 떠난 나그네를 홀로 보내고 저만 달랑 문턱을 넘어서면 어쩐다더냐.》
《어머니.》 례영이 곱게 눈을 흘긴다.
《거 무슨 괴이한 소리냐. 동열이는 어디 있구?》
정시명이 그제서야 그 무엇인가 속이 철렁해지면서 엄하게 물었다.
《그 사람을 혼자 떠나보냈답니다.》
정시명이 따져묻자 민순임이 옷고름을 눈에 가져가며 대신 대답했다.
《저것들이 글쎄 통일이 될 때까지는 아버지의 곁에서 시중들어야 한다구 저렇게 작정했다지 않아요. 아버지곁에… 이것아, 너밖에 없다더냐. 그래도 그 머리는 어디서 얹었느냐?》
《어머님, 걱정마세요. 통일이 되는 날까지 전 아버님곁에 있어야 돼요. 우리모두 그날엔 평산에 모이자고 했어요.》
《뭐라구?!… 네가 지금 뭐라고 했지?… 통일! 통일이 될 때까지?… 아하,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하나. 으음…》
잦아내렸던 흥분이 다시금 온몸에 뻗쳐올랐다. 정시명의 입새로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울부짖음으로 터져올랐다.
(네가 어이 하필이면 이런 때 서울에 다시 온단 말이냐. 이 서울땅이 지금 무서운 재난을 안고 숨을 헐떡거리는줄 네 상상이나 하느냐. 분렬이다, 분렬이야. 나라가 갈라진단 말이야.… 에익 자식두! …)
정시명은 가슴이 뻐개지는것 같다. 그 무슨 갈퀴같은것이 가슴팍을 뻑뻑 긁어내는듯 싶다. 떠오르는 생각마다 한숨과 괴로움이 서리서리 엉켜 머리를 휘젓는다.
《떠나라! 떠나라! 떠나라!》
정시명은 이 말만 나직이 곱씹으며 팔을 들어 흔들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네, 아버지?》
례영이가 정시명의 앞에 무릎을 꿇고앉는다. 허우적거리는 정시명의 두팔을 잡았다.
민순임이 놀라서 그에게로 뛰여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하였다.
《얘야, 너도 앉아있지만 말구 손발을 주물러드려라.》
민순임은 급해 맞아 소리쳤다. 요 며칠째 계속 밤샘을 하더니 남편의 뭐가 잘못된것 같아 더럭 겁이 앞섰다. 꼭 실성한 사람같다.
《이보세요. 왜 이러세요? 정신 차리세요. 네. 여보-》
민순임이 영문을 알지 못한채 눈물부터 앞세우며 부르짖는데 정시명이 허우적거리던 팔로 례영의 어깨를 감싸안고 한손으로는 그의 잔등을 자꾸 쓸어준다. 입도 닫아매고 눈도 꾹 감고있다. 련이어 들이닥친 충격에 정시명이 터지는 오열을 씹어 삼키며 소리없이 울고있었다.
정시명이 좌절감에 휩싸여 비통하게 앉아있는것이 처음이다. 민순임은 자기 남편처럼 속대가 쇠붙이같고 눈물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흔치 않을것이라고 늘 생각해온터였다. 남편은 이 하루새에 꼭 십년은 더 늙은것만 같다. 모든것을 체념하고 모든것을 일시에 다 버리고 허탈과 방황과 자포자기에 빠져버린것 같다.
《아버지, 제가 온것이 기쁘지 않으세요? 전 아버지축복을 받지 못하지 않았나요. 아버지, 절 축복해주세요. 네, 아버지!》
례영이 물기어린 목소리로 애절하게 부르짖었다.
《여보세요, 그만하세요. 이렇게 갈라사는게 오래야 가겠나요.》
민순임이 여전히 정시명의 팔다리를 주물러주며 위로하느라 했다. 그 소리에 정시명이 고개를 번쩍 쳐든다.
《당신이 무슨 소릴 했소?》
《원 참, 당신은… 이렇게 갈라져 사는게 오래야 갈가 했지요.》
정시명의 눈이 다시 불덩이같이 번쩍거리기 시작하였다.
그 눈에서 예나 다름없이 섬광이 번쩍번쩍한다. 모든것을 불태워버릴듯 세차고 강렬한 불빛이였다.
그는 례영의 작고 동그란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례영의 머리우로 창밖을 노려본다.
바깥이 횅창하니 밝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온다. 정시명의 눈빛이 차츰 부드럽게 빛나기 시작하였다.
《고맙다, 례영아. 그래, 그날이 오래야 가겠느냐. 안되지, 안되구말구!》
다시 온몸에 서늘한 빛이 어린다. 두툼한 입술을 다문다. 세상이 뒤집힌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다시 열리지 않을듯 싶다.
두눈에서는 불이 철철 흐르고있다.
그는 지금 눈앞에 하지의 상통을 떠올려놓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