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박달에도 못 들어갈 자리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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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정시명에게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달려온것은 길철이였다. 아무 일이나 말떨어지기 바쁘게 해제끼는 일군이다.
치안국의 수사지도과장과 문서계장이라는 요직을 겸직하고있다는 김창기라는 인물을 포섭해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길철의 이야기를 듣자 그의 대담한 발기가 놀랍고 기쁘면서도 쉽게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이모저모로 간단히 대답을 줄 문제가 아니였던것이다.
괴뢰경찰기관의 노란자위라고 볼수 있는 자리다. 군침이 돌지만 삼키기에는 뻐근한 자리다. 게다가 김창기의 경찰경력이 10년이나 되고 일제말기에는 국경지대의 어느 경찰서서장까지 했다고 적혀있다.
경찰서들치고 국경지대의 경찰서라면 항일의 선각자들의 원한의 표적으로 되였던 반동의 소굴이다. 어제도 오늘도 반혁명의 핵심기관에서 복무하여오는 반동분자를 포섭대상으로 내놓는 배경은 무엇인가.
길철이 타산이 없을리는 없겠지만 대상포섭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듯 싶어 그가 다시금 결심을 굴려보게 하였다. 길철은 이미 최남수와의 공작에서 실패한 일도 있는것이다.
《가능하겠소?》
길철은 예상했던 질문이라는듯 거침없이 대답했다.
《예.》
그러더니 《이건 그의 경력자료입니다.》하며 사진까지 붙여놓은 김창기에 대한 료해자료를 꺼내놓았다.
길철이 최남수와의 공작이 실패된 후 주눅이 들지 않고 여전히 공격적인 패기와 정열을 보여주는것이 우선 마음에 들어 정시명은 료해자료를 깐깐히 훑기 시작하였다.
사진을 보니 퉁퉁하게 옆으로 부풀고 볼에 무엇인지 고민거리를 안은듯 우울한 빛을 담고있는 커다란 눈이 어리무던해보였다.
《왜 만년순사라고 불렀다오?》
정시명이 문건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물었다.
《10년 순사로 있으면서 무슨 큰 사건 하나 들춰낸것이 없고 한번도 출세한적이 없다해서 고향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도 광복될 때에는 비록 한해동안이지만 경찰서장노릇까지 하지 않았소?》
《그게 문제가 있다는겁니다. 국경지대가 살벌하여 누가 쉽게 가겠다고 합니까. 그러니깐 10년 복무라는 경력에 도꾜법정대학물까지 먹었다는 그를 올려놓았지요. 결국 서울에서 쫓겨난것입니다.》
《쫓겨났다?…》
정시명이 뜨아해서 되물었다.
《누구소리요?》
《그의 처조카가 정진호라고 저의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 일제시기부터 저와 같이 일했는데 지금은 전국농민조합 선전부장입니다.》
정시명이 문건을 덮고 고개를 들자 길철은 거기에 설명을 더 붙이였다.
《들어보니 옛날에는 벌거무레한 색갈이 돌다가 만 사람이랍니다. 본래 삼척에서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났는데 도꾜에 가서 고학으로 법정대학을 다니면서 적색독서회에 참가했답니다. 검거선풍에 놀라서 조국에 도망쳐와서 일자리를 찾아다니다가 군청서기노릇도 하고 순사시험을 쳐서 경찰서에서 근무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고향사람들은 그 사람이 고약한데가 없다고 〈량반순사〉요, 〈허재비순사〉요 했다고 합니다.
국경연선에서 근무할 때도 그닥 못되게 놀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 얼마전에 그곳 경찰서에서 몽둥이찜질을 몇번 당하고 풀려나온 사람을 만났는데 김창기가 그 사람을 풀어놓으며 했다는 말이 걸작입니다.
〈이보라구, 당신은 그전 같으면 사형감이야. 하지만 이 김창기가 광복연에 내놓을 제물이 없어 두루 찾다가 이제야 마련을 봤으니 그리 알라구. 그리구 사람의 정이라는게 품앗이라는 말 잊지 말라구.〉 하하…》
길철은 이렇게 김창기의 흉내를 그럴듯 하게 내고는 웃었다.
정시명도 미소를 지으며 호기심이 동해서 물었다.
《그래 품앗이는 했다오?》
《그 사람이 광복후 품을 갚았답니다. 김창기가 8. 15직후에 붙들려 주구청산위원회에 끌려갔는데 그가 풀어놓은 사상범들이 련명으로 진정서를 제출했답니다.
그래 풀려나서 인차 고향인 삼척에 나갔다가 친구들의 주선으로 다시 치안국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정진호동무가 자기 이모부를 얼마든지 리용자로 만들겠노라 장담합니다. 제 생각에도 가능할것 같습니다.》
길철은 자신있는 어조로 설명을 마치였다.
정시명은 그의 설명에 공감이 갔다. 적과의 대결에서 기본타격대상이라 할수 있는 치안국의 요진통에 있는 김창기를 포섭하면 그야말로 치안국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게 될것이다.
이튿날 길철은 다시 정진호를 만나 공작가능성을 물었다.
《하여튼 만납시다. 난 이모부가 우리를 도와줄것만 같습니다.》
정진호는 이렇게 대답하고 김창기를 찾아갔다. 광복후 북에서 내려와 서울에 와있을 때 김창기가 그의 집에 얹혀 여러날 있은 후로는 피차에 제 일들이 바빠 만나보지 않고 지내왔다.
김창기의 집은 마포형무소에서 멀지 않은 둔덕에 있었는데 형무소 소장놈이 살던 집이라 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아담한 서양식 단층집이였다. 집안에 목욕탕과 위생실까지 붙어있는 현대적인 양옥이였다.
김창기는 정진호가 문턱을 넘어서자 싱글거리며 반기였다.
《이거 무슨 바람이 불어 조카가 우리 집을 찾아주나. 이젠 공산당을 그만 두었나, 아니면 쫓겨났나?》
《그만두었수다. 그러니 서울에서도 반동중의 상반동인 이모부집에 올수 있었지요.》
《허허, 그 말 듣기 씨원하다. 여보, 우리 조카님이 모처럼 오셨으니 술맛 있겠소. 어서 차려오오.》
김창기가 너스레를 부리며 큰소리로 떠들었다. 그는 자기의 처조카가 일제시기부터 자기를 탐탁치 않게 보아온것을 알고있었다.
8. 15전 어느날 정진호가 국경지대경찰서의 서장으로 이모부가 임명되여갔다는 소식을 듣고 기가 막혀 불원천리하고 그를 찾아갔던 일이 있었다. 그는 이모가 있는 자리에서 가지고간 조막도끼를 꺼내놓고 몰아댔다.
《이모부, 내 도끼를 받겠소, 아니면 서장자리 내놓고 이 길로 날 따라 서울 가겠소?》
구들바닥에 내놓은 조막도끼는 날이 시퍼렇게 번뜩거렸다. 그보다 더 시퍼런것은 정진호였다. 이모가 도끼와 조카의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게거품을 물고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정진호는 지난 시기 수많은 혁명가들을 잡아넣은 이곳 국경지대의 경찰서를 민족의 철천지원쑤들이 둥지튼 악마의 소굴로 락인을 찍어놓은지라 정말 너죽고나죽고 할판이였다.
김창기는 조막도끼만 물끄러미 지켜볼뿐 입이 얼어붙은듯 말이 없었다.
그는 정진호가 당장 달려들듯 거친 숨을 씩씩거려도, 안해가 너부러졌어도 낯색을 한본새로 한채 오래도록 한자세로 그렇게 굳어져있었다.
《왜 말 못하오. 이모부, 도끼로 란장질을 해도 한마디라도 이모부말을 듣고야 말겠소.》
죽이겠다는 소리에도 대척이 없이 그저 덤덤히 앉아있자 정진호가 먼저 약이 올라 다시 소리를 질렀다.
잠시후 김창기가 무겁게 몸을 일으켜세우더니 웃방의 농짝에 들어있는 자그마한 자개함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는 자개함을 그의 눈앞에서 열었다. 거기에서 초지로 쓴 한장의 문서장이 나왔다.
그는 말없이 조카에게 그걸 던지며 꽥 소리쳤다.
《읽어! 큰 소리로!》
정진호가 영문을 몰라 받아들고 읽었다. 거기에는 스무나무명되는 사상범들의 이름과 그들의 《죄》가 루루이 렬거되여있었다.
《이건 뭐요? 어찌라는거요?》
정진호가 여전히 이모부의 속마음을 대중할수 없어 묻자 그는 와락 그의 손에서 문서장을 빼앗아 자개함에 넣고는 자물쇠를 덜컥 채워버렸다.
그리고는 《내가 여기에 내려와서 1년사이에 내놓은 사람들이야. 네가 적색에 미쳐돌아간다지만 내 나라의 백성을 위해 해놓은 일 뭐냐? 어서 대봐!》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일후로 그들은 여직까지 호젓이 마주앉은 일이 없었다.
갓 마흔을 넘긴듯 한 그의 이모가 술상을 들고 들어왔는데 아마도 그때 일이 생각났던지 반가워는 하면서도 정진호의 눈치를 살피고있었다.
《이모, 내 오늘은 조막도끼 없이 왔어요.》
정진호가 이모의 눈치가 짐작이 되여 이렇게 말을 꺼내며 히죽이 웃었다.
그제야 이모가 가볍게 소리내여 웃고 김창기도 어깨를 흔들며 소리내여웃었다.
안해가 자리를 뜨자 김창기가 술잔을 권하며 정색해서 물었다.
《왜 공산당이 마음에 안드나?》
《글쎄요.》
《시작한바에야 끝장을 봐야지. 아이들의 장난인가. 나같은 사람이야 이제 받아주소 해도 도리질할테니 할수 없지만…》
김창기가 무심중 한 말이였지만 거기에는 그의 속심의 일단이 드러나있었다.
《이모부는 나를 떠보자는거요?》
《아니, 떠보자는게 아니라 욕을 하자는걸세.》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이모부가 공산당에서 물러났다고 날 욕질한다면 이모부는 대체 어찌된 사람이요? 난 칭찬받을줄 알았는데…》
《사람이 앞뒤를 잘 볼줄 알아야 하네. 내가 반생토록 공산당과 싸웠는데 이제 와서 뚝 부러지게 말한다면 공산당한테는 못 견데.
내 국경에 나가있을 때 항일빨찌산을 한두번 접해보았다구. 그 사람들이 산속에서 고생할 때도 100만관동군이 벼르기만 하다가 끝내는 패하고말았지? 그들이 이제는 이 반도의 절반땅을 차지하고 얼마전에는 자기 군대까지 가지게 되였는데 대한제국이 다 뭔가.
중국을 보게. 장개석이 동북까지 타고앉아 허장성세했지만 말로가 어떻게 되고있나. 량심적으로 말해서 나는 북조선정치가 나쁘다고 생각지 않네. 자기에게 나쁘다고 해서 덮어놓고 나쁘다 할수야 없지.
그들은 일본을 반대해서 싸운 사람들이고 나같은 사람은 일본놈에게 붙어서 산 사람이니 그네들이 어찌 우리같은 사람을 좋다고 하겠나.
난 자네도 공산당을 한다고 해서 나쁘게 생각한 일은 없네. 우리 처가에 대세를 볼줄 아는 눈이 바로 박힌 인물도 있구나 했는데 이제 와서는 또 물러나?
나야 어차피 깨진 인생이니 이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만…》
《말같애서는 이모부가 제법 공산주의자 같습니다.》
《내 옛날 대학시절에 적색독서회에 참가했던 사람인줄 자네도 알지.》
《그럼 이모부는 내가 다시 공산주의운동을 해도 잡아넣지 않겠소?》
《허허… 직업이 직업이니만치 부닥치면 쇠고랑 내드는수밖에 없지만 일부러 찾아다니고 싶지는 않네. 내 운명도 그리 길지는 못할테니.》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미군정청의 운명이자 내 운명일세. 미군이 있으니 말이지 미군만 나가보게. 그까짓 경비대가 다 뭔가. 듣자하니 인민군대는 김일성장군이 지도하던 수하대원들이 주력이라 하더군.》
김창기는 확실히 정세발전의 추세를 내다보고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만큼 자신의 죄과도 언제인가 반드시 회계를 치를 때가 오리라는것도 알고있었다.
정진호는 이모부의 동향으로 보아 그를 포섭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업계획을 뛰여넘어 진속을 털어놓기로 결심하였다.
원래 이날의 상봉은 다시한번 사업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하는것으로 되여있었던것이다.
《이모부, 행동력이 없는 지성은 반송장이라는 말이 있소. 그렇게 대세에 밝은분이 왜 그에 따라 서지 못하시오?》
《아까도 말했지. 난 깨여진 인생이야.》
《그 깨여진 인생을 부정해버리고 그 우에 새 인생을 창조하면 안되겠소. 날 받아주소 할데가 없다 했는데 이모부를 환영하는 곳이면 찾아가시겠소?》
《그런데… 자넨 어떻게 되여 바르게 다듬어온 인생을 부등부등 깨칠려고 하나?》
《이모부, 이모부가 진심으로 내가 걸어온 인생을 바른 인생이라 불러준다면 무엇을 더 감추겠습니까. 난 이모부를 정말로 일생을 망가뜨렸다고 굳이 피해왔는데 우리 애국조직은 이모부를 다른 시각에서 보고있습니다.》
《나를?… 어떻게?…》
《사실 나는 우리 조직으로부터 이모부를 반동의 편에서 떼내여 나라와 겨레를 위해 좋은 일을 하도록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고왔소.》
《애국조직?… 그럼 박헌영이 보냈다는건가?》
김창기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아니… 내가 박헌영을 미워하고 박헌영의 줄을 버린지가 오래다는걸 이모부도 잘 알지 않소.》
《그럼?…》
《우리 대표가 일간 이모부를 만나고저 할겁니다. 그분은 이모부를 잘 알고있습니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십시오. 절대로 무서워하지는 말아요. 이모부가 결심을 옳게 내리면 이모부의 고민도 덜어질것이고 나라를 위해서도 피차에 좋을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누구를 잡자고 그래. 썩 물러가!》
조카가 마음속을 훌 털어놓자 김창기는 당장이라도 자기를 그 누가 붙들려오는듯 급해하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누가 문밖에서 저들의 이야기를 엿듣지 않나 돌아보기까지 하였다. 직업에서 오는 타성적인 공포심이였다.
《이모부, 나를 믿으시오. 나는 마음속으로 옳다고 생각하기때문에 이렇게 찾아와 감히 권하는 바입니다. 난 이모부가 이제라도 애국의 길에 나서기를 부탁하고싶습니다. 솔직한 말로 예나 지금이나 이모부가 내 나라, 내 민족을 위해 복무하고있는건 아니잖소. 난 누구앞에 가서도 이모부의 말을 창피스러워서 내놓지 못하오.》
진심에 넘치는 부탁과 질책에 김창기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다만 부어놓은 술잔만 매만지며 아래입술에 댈듯말듯 하다가는 상우에 내려놓군 하였다.
정시명은 사업정형을 보고받고 보니 마음이 놓이였다. 김창기가 사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깊은 회오와 동요에 빠져있는것이 느껴졌다.
《잘해보오. 김창기와의 사업을 좀 목표를 높이 설정해보오. 우리 동지로 전취해볼수 없을가? 물에 빠진 사람에게야 손을 내미는것이 마땅하지 않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리용자가 아니라 우리 사람으로 만들겠습니다.》
《왜놈들에게는 허재비였지만 우리 겨레앞에서 영웅으로 된다면 그 자신을 위해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소.》
《알겠습니다.》
길철은 정시명의 말에서 새로운 신선한 충격을 받아안으며 대답하였다. 생각이 깊어졌다. 자기는 조직의 리해관계부터 앞세웠다. 정시명이처럼 인간의 재생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희열이 없었다.
언제나 느껴왔지만 정시명이 진심으로 기뻐하고 티없이 맑은 웃음을 짓는때는 사람들의 인간적성장을 확인하는 순간들이였다. 그 어떤 사람이 동지로 되였다거나 어느 일군이 자기가 저지른 과오를 깨끗이 인정하거나 또는 여늬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자기의것으로 감수하는 일군들의 모습을 볼 때 이 철의 심장을 지닌 인간은 대뜸 다정다감한 표정을 짓고 함께 즐거워하고 웃고 떠드는것이다.
정시명이 언제인가 자기에게 해주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을 아껴야 하오. 혁명이란 근본에 있어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요.》
그때는 생경하게 들리던 그 말이 정시명과 만날 때마다 그 진미가 되씹혀지고 새로워지군 한다.
길철은 김창기의 래일의 운명을 그려보았다.
그가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영웅으로 남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혁명의 공로이고 나라앞에 세운 우리 조직의 공헌이고 자랑이다. 외세에 기생하여 살아온 그의 생애에 외세에 저항하는 인생이 이어진다면 그리고 그와 같은 인생들이 이 땅에 더 많아진다면 내 나라는 얼마나 더 깨끗해지겠는가.
길철은 다시금 생각깊은 어조로 《꼭 김창기를 우리 동지로 만들겠습니다.》하고 다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시명은 길철이 직접 찾아가되 날자를 약속하지 말고 불의에 나타나라고 하였다. 날자를 약속하면 김창기가 겁을 먹고 피할수 있다는데서였다.
애국조직의 위임으로 찾아왔다는 길철의 엄숙한 인사말에 김창기는 처음부터 몸가짐이 굳어졌다. 비록 괴뢰치안국 과장이라는 폭압기관의 벼슬자리에 높은 경찰직급을 가지고있었지만 저지른 죄과에서 오는 공포감과 래일에 대한 불안, 그속에서 안타까이 소용도는 량심앞에서는 그것도 하찮은것이였다.
정진호가 그의 태도를 예견했던지라 마련해온 술병을 내놓으며 술상을 차려달라고 이모에게 부탁하였다.
술상이 들어오자 다소 분위기가 부드러워져 처음에는 서로 속에 없는 겉치레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도 김창기는 길철에게서 이제 당장 폭탄같은 선언이 떨어지지 않겠나 마음속으로는 무척 초조하고 불안해하였다. 그는 상대방의 심중에 마음을 쓰느라고 길철이 묻는 말에 동문서답하는가 하면 이야기도 조리없이 갈팡질팡하였다.
이윽고 길철이 그 잘 울리는 목청을 낮추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나는 먼저 우리 조직을 대표하여 민족을 위한 참된 애국의 길에 나서도록 당신을 가능한 도와줄데 대한 우리의 결정을 알려드립니다. 지난날 엄중한 죄과를 범한 사람일진대 이제라도 인민의 편에 돌아선다면 관대히 용서하여 과거를 불문에 붙이고 완전독립된 조국건설에 함께 손잡고 나가자는것이 우리의 립장입니다.
지금 당신은 이러한 뜻을 감사히 접수하고 애국의 길로 나서느냐 아니면 그 믿음을 저버리고 일제때부터 몸을 담아온 외세의존과 매국의 길을 걷느냐 하는 기로에 서있습니다.
우리는 구태여 당신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는지 결심해야 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나라에 바친 공과 나라를 등진 죄는 력사의 어느 시점에 가서든 반드시 공정하게 계산된다는것은 이미 당신도 체험한 필연입니다. 누가 어떻게 책동하든 통일은 반드시 올것이며 그때에 가서 나라의 통일에 제동을 건 놈들은 인민의 심판을 면치 못할것입니다.
난 당신이 나라의 통일에 지성을 고인 애국자로 후손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길철의 열변은 오래도록 계속되였다. 그의 말이 계속되자 굳어져있던 김창기의 얼굴에 점점 화색이 돌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김창기는 《당신들은 저의 과거를 정말로 불문에 붙일수 있겠습니까?》하고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길철은 그의 두손을 덥석 잡았다.
《그런 담보가 없다면 무엇때문에 우리와 정면으로 맞서고있는 당신을 찾아오게 되였겠습니까. 우리는 당신과 그 무슨 정치적흥정이나 도박놀이 온것이 아닙니다. 나자신만 해도 목숨을 걸고 당신 집문턱을 넘어섰습니다.》
《고맙습니다.》
정진호가 비여있는 잔들에 술을 부었다.
그들은 기대와 사랑과 축복이 담긴 축배를 높이 들었다.
정시명은 그에게 임무를 주되 임무자체가 그의 운명적전환을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줄데 대하여 일깨워주었다.
며칠후 길철은 그를 만나 첫 과업을 전달하였다.
《우리는 당신이 현 위치를 계속 유지할것을 기대합니다. 직무수행과정에서 알게 되는 자료만 우리에게 넘겨주면 됩니다. 자료는 당신의 판단으로 반애국적이고 반통일적이라고 인정되는것이면 됩니다.》
《반애국적이고 반통일적인 자료?》
김창기는 길철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그 의미를 되새기듯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자기가 보고들은 사건들을 훑어보며 거기에서 애국과 매국, 통일과 반통일적인것을 가려내는가 싶었다.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주의하여주십시오. 꼭 해내겠습니다.》
《제가 부탁드리고싶었던것입니다.》
김창기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길철이 그의 두손을 받아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몇달후 김창기는 정식성원으로 되여 조국통일대업에 나서겠다고 서약을 하였다. 치안국의 핵심부서인 수사지도과와 문서계 계장으로서 경찰관계서류들을 책임진 김창기가 포섭되자 조직은 유력한 자료원천을 가지게 되였다. 그가 수집한 자료는 어느것 할것없이 다 긴요하고 가치있는것이였다.
김창기의 자료에는 괴뢰경찰기관이 벌리고있는 좌익세력들에 대한 탄압책동이 구체적으로 밝혀져있었다.
그가 제공한 자료로 하여 수많은 애국자들이 아슬아슬한 위기에서 구원되였으며 대내에 마수를 뻗치려는 놈들의 음흉한 기도를 제때에 좌절시켰다.
김창기의 운명을 여기서 마무리 짓고 넘어간다.
1950년 2월.
김창기는 체포되였다. 모진 고문과 회유가 시작되였다. 그가 입을 열면 지휘부에 직탄이 날아들 상황이였다.
그러나 김창기는 굴하지 않았다.
입을 철창처럼 닫아 붙인 그에게서는 이 한마디만 자랑스럽게 똑똑하게 나왔다.
《난 김장군을 받드는 통일애국자이다!》
그 소리에 적들은 혼비백산해졌다.
놈들은 제놈들의 속비밀을 통채로 안고있는 그를 검찰에 넘기기 전에 교수형에 처하였다.
어지러웠던 인생은 통일혁명의 품에서 아름다와졌다. 누가 그 이름앞에 《량반순사》요, 《만년순사》요 하는 옛 세월의 깨끗치 못한 딱지를 붙일수 있으랴.
김창기! 그 이름은 통일운동의 력사에 길이 전해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