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고목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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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선생님, 정선생님이 전해온 말씀이 날씨도 무더우니 서늘한 강변에 모시는것이 어떠냐고 합니다.》
정시명과 전화를 하고난 김명호가 이렇게 전하자 《내 집에 모시자고 했는데… 전일에 내가 대접을 허술히 한바도 있고…》하며 려운형이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였다.
려운형일행과 김명호를 태운 자동차는 이내 시의 복판을 벗어나서 한강변을 끼고 질주하였다.
려운형은 요즘도 빳빳하게 말려돌아가는 일정에 시달리면서도 정시명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해왔다.
(정향이 어떤 사람인가?)
고마운 사람이다. 서울장안에 몽양을 위해 준다고 주변을 돌아치는 사람은 많지만 누가 그렇게 소리없이 조용히 흉변을 막아주고도 생색을 내는 일없이 잠자코 제볼장에 묻혀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것만 봐도 그 인간의 진가가 가늠이 된다. 장사치가 됐다는 풍문도 있어 어줍잖게 여겼는데 대면하고보니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말한마디도 범상치 않고 다 씨알이 꼭꼭 배겨있다. 행동거지가 기품이 어려있고 박력과 자신만만하여 별수없이 끌려들게 된다. 거동이 가볍지 않고 무게가 실려있는가 하면 은근한 멋이 있어 헤여지고보니 그리움이 커진다.
그런데 수상쩍은데도 없지 않다.
흥국상회 사장자리를 차지하는것으로 보면 분명 저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수면밑에서 가리워살기를 바라는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나에겐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든다는 이야기를 분명히 밝혀놓았다.
무엇을 노리여 가리운 자기의 신분을 내게는 서슴없이 드러내놓았을가? 믿음이라는것인데… 무엇을 위한 믿음인가?
신변을 걱정하여 직접 찾아와서 위험을 예고해주고 사람까지 붙여준 처사도 이를데 없이 고마우면서도 가량하기 힘든것도 있다. 통보해준대로 테로가 이틀후에 있었고 그가 붙여준 청년들에 의해 위험이 가셔졌다.
이 모든것이 정말로 우연한 일치이겠는가.
그렇다면 정향은 내가 믿을만 한 인물이겠는가? 믿을만 한 인물이라면 이야말로 하늘이 점지해준 은인이고 그렇지 못할진대 대단히 유해로운 또 하나의 암초일수 있다.
려운형은 며칠동안 이런 생각에 옴하여 직접 만나 인사도 하고 확인도 해보자고 별러왔었다.
지금 또 이런 생각이 머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자 천천히 도리질을 하였다.
그에게 남기고간 정향의 인상은 너무도 가식이 없이 진실하고 열렬한것이였다. 그에 대해 저울질부터 하는것이 사람의 법도를 벗어난 역스러운 일이다.
《이보우, 김선생. 하나 물읍시다.》
흥국상회에서 반나절 말상대가 되여준 김명호가 옛지기 대하듯 하는 려운형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예, 어서 말씀하십시오.》
《당신네 사장이 어느쪽 태생이라고?》
《글쎄요. 북쪽태생인것만은 사실인데 딱히는…》
《북쪽태생이라고?… 음… 그런데 항일전에 나섰던 사람이 어째서 서울에 왔는가?…》
《선생님도 그분이 평양정권에 뒤발질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으신게 아닙니까?》
김명호가 빙긋 웃으며 묻자 려운형은 얼굴에 열적은 빛을 담고 말을 받았다.
《듣기는 했어도 난 원체 그러루한 험담을 믿지 않아요. 만나보니 그 소문은 헛수작임이 틀림없거던.》
《아마 와야 할 사정이 있었나 봅니다.》
《그렇겠지…》
려운형은 김명호의 짤막한 대답을 음미하며 다시금 정시명과의 담화를 더듬었다.
잠시후 려운형은 김명호에게 직통 들이댔다.
《그런데 말이요, 김선생. 이건 실례되는 얘기같소만 당신은 어느 쪽이요?》
김명호는 대답을 인차 못하고 고개를 돌려 려운형의 맑은 눈을 마주 보았다.
려운형의 얼굴에서 가장 인상적인것은 우묵하게 패여든 눈확에서 언제나 불줄기같은 세찬 빛을 발산하며 이글거리는 눈이다.
그 눈이 지금은 석연치 않은 그 무슨 속말을 가리우고 고요히 빛나고있다.
려운형이 한마디씩 퉁퉁 던지는 이야기이지만 거기에 그의 복잡한 심중이 실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명호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건 어떻게 나뉘여지는쪽입니까?》
《당신도 김장군을 따르는 사람인가 묻는거요.》
려운형은 여전히 주저없이 직방으로 대답한다.
김명호도 자신을 밝히기로 하였다. 려운형의 물음에 벌써 그의 지향과 뜻과 은근한 기대가 깔려있으니 그를 구태여 실망시키고싶지 않았다.
《몽양선생님, 선생님께서 물으시는 취지가 딱히 가량이 되지 않지만 대답드릴수 있는것은 저는 김일성장군님의 건국대업을 받들려는 우국충정에서 정사장님과 손을 잡았다는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동지로 결합시킨 공통의 립장이고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몽양선생님한테서 우리들을 동지로, 벗으로 결합시킬수 있는 근본적인것을 확인하였기때문에 뜻을 합치고저 합니다.》
려운형은 자동차 등받이에서 허리를 떼더니 김명호의 순해보이는 둥싯한 얼굴을 생각깊은 눈매로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그리고는 시창에 언뜻언뜻 스쳐가는 강반의 풍경에 다시 눈을 박은채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자동차는 멈춰섰다. 강물이 두길로 갈라져 흐르는 가운데 자리잡은 뚝섬에 들어가려면 허궁다리처럼 매달아놓은 널다리를 건너야 한다.
려운형은 따라온 비서에게 몇마디 일러 자동차를 돌려보내고 뒤뚱거리는 널다리를 천천히 걸어갔다.
정시명과 마동열이 섬기슭에 있는 아름드리 수양버들밑에 자리잡고있다가 려운형이 널다리에서 내려 버들숲에 들어서는것을 보자 마중을 나왔다.
《몽양선생님, 무사하신 선생님을 뵙게 되여 참으로 반갑습니다.》
《정사장덕인줄 아오. 실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내 그날 선생의 진속이 가늠이 되지 않아 인사불성이였는데 백배로 사죄를 합니다.》
려운형이 그 름름한 허리를 깊이 꺾어 사례를 표하자 정시명이 얼른 만류하였다.
《됐습니다, 됐습니다. 몽양을 따르는 민심에 나도 성의를 더했을뿐입니다. 나는 그날 선생님이 우리의 성의를 사절할가봐 걱정이 컸습니다.》
《하, 아닌게아니라 의심이 가기도 했지요. 지금도 뭐 의심이 다 풀린것은 아니고… 하하…》
려운형이 코날개를 인상적으로 벌름거리며 슬쩍 속내를 틔워보이고는 껄껄 웃었다.
《자, 우리 이 숲속에 묻혀 한바탕 말싸움을 벌려봅시다. 사실 나는 요즈음 누구하고라도 한번 멱살을 쥐고 속주머니를 활 내던지고싶어 못견디겠습니다. 어떻소, 정향선생, 내 상대역이 돼주시겠소?》
그러면서 려운형은 잘 울리는 목청으로 또 숲이 들썩하게 웃으며 두눈을 장난스럽게 쭝깃해보인다. 코대높기로 세상에 뜨르르한 려운형이 이런 때는 아이들처럼 순진하고 티없이 맑아져서 재미있게 주위의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예, 그렇게 합시다. 누가 입심이 더 센지 한번 겨루어봅시다.》
정시명도 맞장구를 치며 덩달아 큰웃음을 터뜨려놓았다.
려운형은 정시명의 팔을 잡고 껄껄 웃다가 발을 옮겼다.
그들은 먼저 강가에 나가 웃옷을 벗고 시원히 몸을 씻은 다음 버드나무밑에 모여앉았다.
언제나처럼 마동열은 좌석에 끼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다른 나무밑에 자리를 잡고 이따금 이쪽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김명호도 일어서려고 하자 려운형이 그의 옷섶을 잡고 《이 분은 어떻게 됩니까?》하고 정시명에게 물었다.
《김선생은 우리 흥국상회의 두번째되는 리사입니다.》 정시명이 웃음속에 선뜻 대답하였다.
《나는 오늘 처음 만났지만 마음에 푹 듭니다. 김선생, 우리 더 면목을 깊이 합시다.》
김명호가 자리에 눌러앉자 려운형이 먼저 《정선생, 무슨 얘기부터 할가요?》하고 정시명의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그 소리에 정시명은 다소 얼떠름해졌다. 이 아름이 큰 거인에게 이렇게도 세심한데가 있다는것이 쉽게 믿음이 안갔던것이다.
그런데 려운형이 상대에게 말고삐를 그들이 눈치채지 않게 슬쩍 넘겨주는데는 딴 궁냥이 있었다. 그는 정시명과의 담화를 어떤 방향에서 끌고나가야 할지 아직도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있었다.
이 사람을 어느 정도 믿고 어느 정도까지의 속말을 꺼내야겠는가. 정말로 도움을 받을수 있는 재목감이 돼주겠는가. 그의 말대로 나를 따르는 민중의 한 사람이겠는가, 아니면 경계해야 할 인물이겠는가.
이걸 타진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나에게서 관심하는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하여 먼저 아는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였다.
정시명도 려운형의 물음이 단순히 순진한 구석에서 솟아난것이 아니라 보다 엉큼한 타산이 있는 물음이라는것을 간파하였다.
그는 려운형의 심중을 넘겨다보자 얼굴에 느긋하게 떠돌던 웃음발을 지웠다. 그리고는 저력있는 어조로 단도직입적으로 따지고들었다.
《나는 몽양선생님이 지난해 봄에 기독교회관에서 수천 청년들을 울렸던 만세의 선창을 지금도 할수 있겠는가 하는데 대한 분명한 태도표명에 관심이 있습니다.》
《만세선창?!》
뜻밖의 소리에 려운형이 급소를 찔리운듯 흠칫거리였다.
그것은 지난해 3월에 있은 일이였다.
평양에 가서 한달동안이나 김일성장군님을 가까이에 모시고 가르치심을 받고온 려운형은 서울에 돌아오자 하지와 대결하고나서 서울기독교회관에서 평양귀환강연회를 가지였다. 거기서 장군님의 위대한 인간상을 격조높이 칭송하고나서 이렇게 강연을 마치였다.
《동포여러분, 나는 60평생을 살아오면서 세상에 제노라 하는 명사들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어느 누구를 호칭하여 만세를 부르며 장수를 기원한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몽양은 이제 비로소 그렇게 부를수 있는 대영걸을 찾아냈습니다.
우리 다같이 부릅시다.
조선민족이 낳은 자랑스러운 희세의 영웅 김일성장군 만세!》
려운형의 선창에 따라 기독교회관이 떠나갈듯 폭풍같은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그날의 환호성이 이 순간 그의 흉벽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이 사람이 단칼로 내 명치를 후벼대는구나.)
려운형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에 대하여 걱정해주는 이가 많아졌다. 그게 제일 가슴아프다.
그러나 이 문제라면 누구의 공격을 받든지 당당하게 맞설수 있다.
지금도 려운형은 괴로움을 꾹 누르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에 대해서라면 어떤 이의도 있을수 없소. 당신들 모두가 주시하는바와 같이 김장군은 나의 절대적인 숭배의 화신이요. 내가 일정때부터 우러러 경모한분이 그분이였고 지난해에 갈팡질팡 로심초사 거듭하다가 가르치심을 받고저 찾아간분도 바로 그이이시오. 장군님 만세를 죽으면서도 부를 이 몽양의 절개는 송죽같다는걸 믿어주시오.》
그의 목소리는 마디마디에 진정이 고여있었고 신념과 열정이 비껴있었다.
《그러나…》 려운형이 오른주먹을 불끈 쳐들었다가 앞으로 후려치며 말을 이었는데 말투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왜놈재판정을 쩌렁쩌렁 울리던 그 목소리다. 노기가 서리고 원한이 맺혀있다.
그는 정시명과 김명호를 불이 펄펄 이는 눈으로 노려보다가 다시 주먹을 흔들었다.
《당신네가 왜 그 문제에 관심이 있는지 알겠소. 지금 좌익권이 날 량심법정에 내세우라고 고아대는데 내 얼마든지 응할 생각이요.
내 전일에 정선생한테 곱지 않은 소릴 하다가 말았는데… 오늘은 툭 터놓고 내 속말을 다 꺼내놓겠소.
박헌영이 8.15직후에 날 찾아와 인민공화국을 만들되 미국의 눈치를 봐가면서 리승만을 가급적으로 대통령으로 내세우자고했소.
내가 리승만을 좋아하지 않는건 만인이 다 아는바요. 나는 상해시절 리승만이 림정의 림시대통령으로 돼가지고 그곳에 왔을 때도 끝내 내가 맡아보던 거류민단은 한명도 환영행사에 내보내지 않았소. 그런데 바로 그 박헌영이 지난해에는 조선이 궁극적으로는 쏘련의 한개 가맹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소. 이것은 일본총리대신놈이 나더러 조선을 일본의 자치국으로 만들자고하던 소리나 같구같은 말이요. 그래 내가 쏘련의 가맹공화국이 되고저 하는 박헌영의 밑으로 기여들수 있는가. 내가 물러서니 인민당도 신민당도 과반수가 날 따라서겠다는거요. 공산당에서도 리영이하 숱한 사람들이 내밑에 모여들었소. 그런데 박헌영이 오금이 저려나니 모든 죄를 내게 씌우는구려.》
《선생님의 뜻이 헤아려집니다. 박헌영의 소리는 우리 장군님의 사상과는 어방도 안되는 수작입니다. 나도 최근에 와서 박헌영이 정말로 공산주의자인가 하는데 대해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몽양선생님, 제가 감히 말씀드려도 될가요?… 네, 그럼… 개별적인간의 허튼소리에 악감을 가지고 시대와 인민의 요구를 외면하여 당을 분렬시켜서야 안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선생님도 로동당지붕아래에 들어가 옳은 로선을 세우도록 투쟁을 벌리고 애국세력의 분렬을 막는것이 현명지책이였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애국세력이 뿔뿔이 헤여져서 각축전을 벌려나가면 리득을 볼건 미국놈들이고 손해볼건 통일운동입니다.
그리고 제가 한마디 더 말씀드리면 최근에 근로인민당의 우경화에도 불만이 있습니다.》
《우경화?… 우경화라니?!》
《들려오는 소식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 근로인민당이 김규식의 민족자주련맹과 함께 〈좌우합작〉에 나섰다고 하는데 〈좌우합작〉이란 미국놈들의 지휘봉밑에 벌어지고있는 놀음이라는걸 선생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보시오, 정선생, 나는 일정시기에도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되는것이라면 민족주의자로도 되였고 공산주의자로 되기도 했다오. 그뿐이겠소. 왜나라의 궁성문턱도 서슴지 않고 넘었단 말이요. 지금 시국이 건국을 위해 민심을 합쳐줄것을 요망하는데 미국놈들이 주도하는 합작이라면 어떻다는거요. 우선 뭉쳐가지고 나라를 세워놓는것이 초미의 과제가 아닐가. 그러느라면 미국놈들도 어차피 물러갈것이고 반동도배들도 국민적심판에 기가 눌리게 될게 아닌가. 이건 전술에 관한 문제요. 1보전진 2보후퇴라는 레닌선생의 훈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오.》
《몽양선생님, 미국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미국의 조선정책을 어떻게 접수하는가, 이것은 전술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건국대업의 기본원칙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조선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에 관한 문제입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미국이 우리 나라를 타고 앉기 위해 백년간 집적거렸는데 그 야망을 실현하기전에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것이라고 저에게 간곡히 가르쳐주시였습니다. 그러니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다면 공산주의자이건 민족주의자이건 미국놈들이 하는 짓에 북을 쳐주거나 그놈들의 북장단에 춤을 추지 말아야 합니다. 〈좌우합작〉이 괴뢰정권을 만들어내려는 미국놈의 고안품이라는거야 선생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음, 그건 그렇소. 그래 확실히 문제가 있구만. 〈좌우합작〉이라… 좀 알쑹달쑹한게 있어…》
려운형은 방금전의 그 도고하고 울분에 찼던게 언제이더냐싶게 눈에서 이글거리던 광채가 꺼지면서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이 단박에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것이 측은하면서도 정이 푹 들게 한다.
김명호가 어깨가 푹 처진 려운형의 모습을 보기가 안되여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마동열에게로 갔다.
정시명은 려운형의 손목을 꼭 잡았다.
《몽양선생님, 장군님께서는 선생님을 푹 믿어마지 않습니다. 장군님의 뜻을 변치 말고 따릅시다.》
《정선생, 고맙소. … 헌데 근로인민당이라는게 원래 갈래많은 무리에서 삐여져나온 사람들이 모여든지라 코코에 집안싸움이고 바람 잘 날 없소. 내 기미년에 상해에 건너가 처음 거류민단이라는걸 무어가지고 독립운동을 시작한이래 서른해 넘기지만 지금처럼 앉은 자리가 바늘방석같기는 처음이요. 그런즉 그릇이 크고 복잡하기 이를데없는 당을 다스려가는게 내 체질에는 아마도 합당하지 않은것 같소. 선생도 익히 아시겠지만 나야 왜정때부터 단병접전에 습관된 사람이 아니우.
내 이젠 정선생께 집안허물을 다 내놓겠으니 용렬한 놈이라 탓하지 말고 들어주시오.》
려운형은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자기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근로인민당이 부대끼고있는 여러가지 복잡한 내부사정을 개괄하기 시작했다.
… 근로인민당에는 3개의 파벌이 있었다.
남로당창립시에 파편처럼 튀여나온 인민당과 신민당, 공산당계렬이였다.
인민당파는 려운형이 중심이였고 신민당파는 백남운이 선두에 있었다. 공산당계렬은 박헌영의 종파적책동에 반기를 들고 떨어져나온 리영을 중심으로 뭉쳐있었다.
그런데 이 파벌들은 서로간의 모순과 알륵으로 하여 행동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있었으며 서로 당의 령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암투를 벌리고있다.
여기에 미국놈들이 당의 체질을 개량화하기 위하여 제놈들의 밀정들을 교묘하게 박아넣어가지고 책동하였다.
당은 좌익으로부터 우익으로 기울어지고있었다. 당론으로 이를 확정해야 한다는 우익분자들의 압력이 점점 거세지고있다.
려운형은 점차 당안에서 통솔력을 잃어가고있었고 기울어져가는 당세를 떠받칠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있었다.
당이 지금껏 버티여오는것은 려운형의 명망과 당의 지도인물들로서 각 파벌의 수장들인 려운형, 백남운, 리영이 친분관계가 두터운데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파벌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을 리용하여 려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당의 지도력을 가까스로 지키고있었다.
《내가 집안단속을 잘못해서 소리를 낼 때마다 가슴을 치군 하오. 맑스주의를 신봉한다고 한 당이 우경화라니 어디 당한 소린가.
장군님앞에서 다진 뜻을 욕되게 하니 이 몽양의 배은망덕이 실로 크오. 내 그래서 시비곡절 많은 당을 깨버리고 옛날처럼 단병접전으로 도전해볼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오.》
려운형이 이렇게 탄식을 하며 크게 한숨을 내쉬는데 그의 비서가 운전사와 함께 갈로 엮은 큰 광주리를 맞들고 버들숲에 나타났다.
《아, 이제야 나타났군.》
려운형이 제가 벌려놓은 숨가쁜 이야기에서 벗어나는게 다행이라는듯 크게 소리치며 일어섰다.
비서와 운전사가 가져온 광주리에는 깡통맥주와 마른 안주가 가득 차있었다.
《자, 김선생도 어서 이리 오시오. 시원히 적셔봅시다.》
려운형이 잔들에 맥주를 채워주며 좌석의 분위기를 즐겁게 바꾸어놓는다.
정시명은 맥주를 들면서 려운형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겠는가 하는 하나의 생각만 하였다.
돌아가는 말이 하도 많지만 려운형의 애국지조는 여전히 금쪽같다. 근로인민당도 잡음이 밖에까지 크게 새여나오지만 그래도 애국적인 정당들중에서 로동자와 농민의 권익을 표방하는 집단으로서는 로동당 다음에 가는 당이다.
아직도 리념으로서는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막연하고 추상적이지만 무산자의 정권수립을 표방하고있다.
앞으로 정당들과의 사업을 벌리는데서 어차피 기둥으로 내세워야할것은 근로인민당과 려운형이다. 그러니 저들이 나라의 완전독립과 민족단합을 위하여 자기앞에 놓인 시대적사명을 다하도록 성심성의로 도와주어야 한다. 어떻게?…
바로 그 방도를 려운형이 튕겨주었다. 광주리에 담은 맥주깡통이 밑창이 날 무렵에 김명호를 대상하여 한담을 늘어놓던 려운형이 마치 그에 대한 인물심사를 끝낸듯 정시명에게 다가앉으며 허물없이 무릎을 건드렸다.
《정선생, 이 맥주가 공짜가 아니우.》
《하하… 뭐 우리도 공짜로 마셔주는게 아닙니다.》
《정선생, 내게 이 사람 주실라우?》
려운형이 엉큼하게 눈을 슴벅거리며 늘어붙는다.
《김선생을요? 하하. 글쎄 날 돌려놓고 김선생보고만 해본다 했더니 딴 궁리가 계셨군요. 안됩니다. 그 사람 빼가면 우리 회사는 어쩔려구요.》
정시명은 딴전을 부려 딱 잘랐다.
《야 날 좀 도와주오. 내 한달전부터 조직부장자리를 비워두고있다오. 흥국상회에는 호두알같은 사람들이 많을것만 같구려. 우리한테 온 청년들만 보아도 내 탄복되는바가 크오. 우리 당을 장군님뜻대로 몰고가려면 정선생수하인물을 실권자리에 두고 도와주는게 여러모로 좋을게 아니요.》
《선생님의 의향이 정히 그러하시다면 우리에 대한 신임으로 받아들이렵니다.》
《고맙소, 정선생!》
려운형은 정시명의 두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정시명은 큰 고리가 풀려나가는듯 싶었다. 근로인민당을 완전히 장악하면 려운형의 기맥을 짚어보려고 하는 중간정당들은 물론 우익민족주의세력들과도 련합을 이룩할수 있을것 같다.
려운형은 김구는 미워하지만 김규식과는 벌써 오래동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오고있다. 려운형이 김규식의 《좌우합작》놀음에 발을 들이민것도 이러한 인간적뉴대가 적지 않게 작용한것이였다. 려운형과 그의 당을 내버려두면 종당에는 그들이 김규식에게 끌려가서 매국배족의 길에 굴러떨어질수있다.
만약 려운형과 그의 당을 도와 애국의 궤도를 탈선하지 않도록 하면 김규식이도 점차 려운형에게 끌려오게 될것이다. 전망적으로 그밖의 중간세력도 려운형의 밑으로 모여들어 애국의 진을 확대해나갈것이다.
정시명의 머리에는 보다 거창하고 희망찬 작전이 서서히 륜곽을 드러내놓기 시작하였다.
정시명에게로 쏘미량군의 철거와 관련한 자료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길철은 정치적분석과 판단이 정확하고 심도가 깊은 김승원과 함께 매일 보고되는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통보하였다.
쏘미량군의 철거문제와 관련한 각 당파들과 인물들의 동향자료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있을뿐아니라 그들의 정치적체질을 평가하는데서 매우 귀중하였다.
미군철수를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이것은 애국과 매국을 가르는 시금석이였다.
첫 보고부터 정시명의 주의를 끌었다.
《리승만과 한민당의 우익반동들은 철병제안을 반대하고있다.
그들은 만일 미군이 철거하면 이북에 조직되여있는 무력이 남진해올것이고 남조선전역에서 좌익의 전면적인 무장반격이 예정되므로 미군은 남조선에 최소한 군대를 양성해놓고 단독정부를 수립한 다음에 철병해야 한다고 떠들고있다.
려운형과 그의 당은 철병지지를 당론으로 결정하고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김규식은 최근 하지와 좀 밀접해졌고 유엔에 대표로 갈것이 예정되여있어 반동화되는 경향이 깊어지고있다. 그는 철병제안에도 조심스럽게 반대의사를 표시하고있다.
그러나 김구는 철병제안을 지지찬동하고있다.
그는 비상국민회의가 주최한 〈마샬제안옹호시민대회〉에서 〈쏘련의 철병제안을 환영하며 감사히 생각한다.〉고 언명하였다.
철병제안지지는 김구의 정치생활에서 고무적인 변화이다.》
김구의 철병지지립장은 미군정청에 커다란 타격으로 되였다.
미국놈들은 저들의 지지기반으로 인정하고있는 남조선정치세력의 쌍두마차중의 하나인 김구세력의 로골적인 도전에 바빠맞았다.
이에 대한 종합보고가 제출되였다.
《거듭되는 모의끝에 하지는 쏘미협상대표 브라운을 다시 정계인물들에 대한 심리작전에 내세우기로 결정하였다.
또다시 정계 거두들에 대한 순행공세가 예견된다.》
평양회담에 갔다가 실상 정시명조직의 덕으로 용케 목숨을 건진 브라운은 지금 이런 일에 나설만 한 경황이 없었다.
그사이 하지가 몇번 호출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노불이 전화로 당면하여 서울정계인물들과의 사업에 착수할데 대한 하지의 지시를 전하자 《노불, 이 브라운이 다시는 중장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겠노라 한다고 전하시오. 난 사직서를 냈단 말이요》하고 퉁명스럽게 일축하였다.
하지는 하는수가 없었다. 지금은 명령불복이라는 딱지를 붙여 군사법정에 세울수도 없게 되였다.
그러나 눈앞의 불을 끄자면 어차피 브라운의 손을 빌리는수밖에 없었다.
바빠맞은 하지는 노불의 보고를 받자 이례적으로 술병을 차고 의정부로 내려갔다.
하지가 술잔을 내밀자 브라운은 팔걸이걸상에 두팔을 거느즉이 올린채 적의에 찬 눈초리로 쏘아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건 고별주가 아닌가요?》
하지는 단박에 화로불을 뒤집어쓰기나 한듯 수수떡처럼 얼굴이 시뻘개졌으나 천연스럽게 받아넘겼다.
《화해잔으로 받아주오.》
《당신은 정말 나에 대한 암살작전이 모의된다는 자료를 입수한것이 없었소?》
브라운은 여전히 하지가 내미는 잔은 거들떠 보지 않고 칼끝처럼 서슬푸른 어조로 들이댔다.
《그건 사실이였소.》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당신은 내가 평양에 떠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브라운은 성이 머리끝까지 치받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꽥 소리질렀다.
그의 두눈에서는 류황불같은 새파란 불이 황황 이는것 같았다. 참고참아왔던 분통이 터진것이다.
《말해보시오, 중장, 난 서울에 와서 당신의 시중군노릇을 충실하게 했소. 뭐가 부족하오? 그런데 동업자에 대한 대접이 고작 암살이요? 하필이면 어째서 부하 사단장을 제물로 제공하게 됐는가말이요. 대답하시오. 중장!》
브라운은 두눈을 사납게 부릅뜨고 당장 그를 통채로 씹어버릴듯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는 술잔을 거두지 못한채 그 맹수앞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양처럼 초췌한 꼴로 서있었다. 어쩌는수가 없다. 이젠 브라운에게서 상급대접을 받기는 어려워졌다. 한걸음 비켜서는수밖에 없었다.
《용서하오, 브라운. 난 사실 그걸 하나의 투서에 불과한것이라고 무시해버렸던거요. 설마 미국이 미쳐났기로 그런 일까지 할수 있겠느냐고 생각했단말이요. 그래 적지에로 떠나는 당신에게 공연한 부담거리를 주지 말자고 생각했던거요. 내가 잘못했소, 브라운.》
하지는 상하간의 계률을 뛰여넘어 공손한 어조로 루루히 거짓변명을 늘어놓으며 용서를 빌었다.
브라운은 하지의 사죄의 말을 확인해보듯 여전히 찌르는듯한 눈초리로 그의 세모꼴눈을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손에서 잔을 받아 단숨에 꿀꺽 마셔버리고는 술잔을 방바닥에 힘껏 팽개쳤다.
유리잔이 땅바닥에 부서져 산산쪼각이 났다.
브라운은 속는척 할수밖에 없었다. 역시 하지는 자기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있는 무서운 직속상관이다.
그러나 하지에 대한 환멸과 배신감은 속안에 차돌처럼 옹쳐졌다.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을것이다.
《자, 이젠 그만 투정을 하고 일을 합시다.》
하지는 브라운이 다소 눈빛이 달라지자 그의 어깨를 눌러앉히며 그제야 상관답게 너그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는 품에서 브라운이 제출한 사직서를 꺼내 찢어버렸다.
《미쏘협상의 결렬이 또다시 골치거리를 남겨놓았소. 미쏘량군철수문제와 관련하여 서울정계가 소란해지고있소. 군정청은 당신이 다시금 정계인물들에 대한 포섭공작을 맡아볼것을 위임하기로 하였소. 국무성과도 의견조정을 보았소.
날 도와주오. 이러니저러니해도 우린 서울감탕에 함께 다리를 묻고있지 않소.》
이리하여 브라운은 호미난방격이 되여 다시 군정업무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브라운에게서 전과 같은 열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브라운은 김구와 정계거물들을 만나 미군철병문제를 당분간 보류해줄데 대한 미국의 립장을 전달하는 정도에 그쳤다.
내키지 않은 일이 제대로 될리 만무하지만 미군철병문제와 관련해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랭소적이였다.
리승만과 한민당인물들만이 예견했던대로 《미군철병이라니, 그게 될말이냐.》고 껑충 뛸뿐이였다.
하지는 그에게 우익계의 련합을 유도할데 대한 임무도 다시 주었으나 이것은 애초에 화제에 올리지도 않았다. 현 단계에서는 그들을 하나로 묶어세울만 한 공동의 분모가 없는것이다.
브라운은 이에 대해 명확하게 리해하고있으나 하지에게는 꺼내놓지 않았다.
그는 개별방문을 마치고 하지에게 돌아와서 제기된 문제들이 대체로 부정적반응을 받았다고 간단히 보고하고는 자기사단으로 내려가버렸다.
하지는 두고보자고 윽벼르기는 했으나 지은 죄가 있어 앞에서는 삿대질을 할수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노불이 두툼한 문건을 들고와서 내밀었다. 한달전에 직접 포치했는데 깜빡 잊고있었던 자료였다. 그것은 류동명이 이 인물만 내세우면 정계 상류급인물들을 틀어쥘수 있노라 장담을 하던 정향에 대한 료해자료였다.
드디여 류동명이 자동차를 보내왔다. 류동명의 부관이 마동열의 차점에서 하지가 흥국상회 정향사장을 만나기 위해 저녁 첫 시간에 대기한다는것을 마동열에게 전달하였다.
점심식사를 거두자 정시명은 코수염을 밀어던지고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집을 나섰다.
그의 차림새를 민순임과 례영이 깐깐히 봐주었다.
례영은 자동차에 오르는 정시명을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하고는 정시명을 따라 자동차에 오르는 마동열의 옷섶을 잡았다.
《미군사령부에 가신다지요?》
《그래…》
《하지를 만난다면서요?》
《그럼…》
《조심해요.》
마동열이 례영의 당부를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였다.
자동차가 떠나자 례영이 민순임의 손목을 잡고 속삭이였다.
《어머니, 보기가 참 좋지요?》
《뭘?》
《아버님이 항상 저렇게 차려입으시면 좋겠어요.》
《왜?》
《십년은 더 젊어보이지 않나요.》
례영은 정시명이 항상 수염을 기르고 조선옷에 두루마기를 입고 촌늙은이처럼 변장하고 지내는것이 늘 불만이였다. 그러지 않아도 정시명이 나이에 비해 겉늙어보였는데 옷차림마저 그렇게 하고 지내니 영낙없는 할아버지였다.
간혹 동년배의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아바이》라고 불러댈 때는 그 당자가 미워지기도 하고 한구석으로는 서글프기도 하였다.
《그렇지요, 어머니?》
민순임이 대답이 없자 례영은 안타깝다는듯 눈을 빨며 다그어물었다.
《얘두 참, 아버지가 자꾸 젊어지면 난 어찌하고.》
《호호호…》
민순임이 짐짓 눈을 흘기자 례영은 까르르 웃었다.
민순임도 소리내여 웃었다.
《어머니가 질투하시네. 걱정마세요. 어머닌 20년 더 젊어진것 같애. 호호호.》
《얘두, 넌 정말 못하는 소리 없구나. 20년 더 젊어지다니.》
민순임이 어처구니없이 시죽이 웃으면서도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하긴 이젠 그도 산골에 붙박혀 만시름 안고 속절없이 세월을 보내던 예전의 민순임이 아니였다. 그동안 촌티가 쭉 벗어졌다. 눈에 정기가 어리고 이마와 볼에 때일찍 잡혔던 주름발도 다림질이라도 한듯 멀쑥하게 지워졌다. 타고난 천성으로 옷치장이든지 머리단장이든지 맵시 가꾸기에는 관심이 없던 녀인이였으나 어차피 남편을 찾아오는 뜻이 높은 장정손님들을 겪게 되니 자연히 경대앞에 자주 앉게 되였다. 거기에 례영의 잔소리가 많았다. 오늘은 이러이러한 손님들이 오니 치마는 어떻게 입어라, 머리는 어떻게 틀어올리라는 식으로 따라다니며 성화다. 례영의 단속이 심해서 어떤 때는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한발 내짚어 생각하면 그게 다 남편을 받드는 일이니 따르지 않을수가 없었다.
생활의 이러한 요구앞에서 그 녀인이 어찌 젊어지지 않을수가 있으랴.
하지만 그를 더욱 젊어지게 하는것은 그 녀자의 마음속에 언제나 부풀어있는 삶의 보람과 희열이였다.
그는 순간순간마다 남편과 여러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덧쌓아가며 살아갔지만 그들과 더불어 지내는 매 순간이 그대로 행복이고 기쁨이고 자랑이였다.
그것이 그 녀자를 젊게 해주는 삶의 귀중한 자양분이였다.
《례영아, 네 말이 옳다. 난 이제야 사는것 같구나. 날과 달이 바뀌는게 막 아까워죽겠다.》
민순임이 불시에 눈언저리가 불그레해지며 목이 메여 중얼거린다.
《어머닌 또…》
민순임의 축축한 눈가에 례영이 손가락을 올려 물기를 가셔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