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열풍을 누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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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동열이 자정무렵에 박정인의 집대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렸다. 행랑채에서 사는 길봉례가 얼른 나가서 대문을 열었다.
대문이 찌꾸뚱-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열리자 마동열이 땀에 흠뻑 젖어 쑥 들어왔다.
《에이, 대문소리도 요란하다.》 마동열이 눈이 휘둥그래진 길봉례에게 웃어보이며 싱겁게 한마디한다.
대문소리는 정시명이 이곳에 거처를 잡은 후에 우정 더 크게 나도록 박정인이 품을 들여 고쳐놓았던것이다.
과연 대문소리는 이 울타리안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높은 각성을 가지고 정시명의 사업을 보호하도록 부단히 자극을 주었다.
《어째 이렇게 늦게 오나?》
길봉례가 대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물었다.
《그럴 일이 있수다.》
들어오던 때와는 달리 마동열의 대답은 가볍지 않다.
때아닌 깊은 야밤에 울린 대문소리에 정시명이 있는 안채와 본채며 사랑채의 모든 사람들이 깨여나 바깥의 동정을 살피고있었다.
길봉례가 방울을 딸랑딸랑 두번씩 사이를 두고 울렸다. 모두 별일이 없으니 마음을 놓으라는 신호였다.
민순임이 그를 맞아들였다.
《무엇때문이요?》
정시명은 마동열의 손을 잡아 아래목으로 끌면서도 엄하게 물었다. 사업준칙에는 지휘부성원들이 밤늦게 드나드는것을 금하고있었던것이다.
마동열은 정시명의 나무람섞인 어조에는 개의치 않고 괴나리보짐을 풀어놓고 서두름도 없이 개성에서 박정인이 보내온 긴급 련락문을 꺼내놓았다. 박정인은 며칠전부터 대북장사군들을 통해 구해들인 출판물들과 돈을 받기 위해 개성에 가있었다. 출판물은 신문사들에 주기 위해 정시명이 특별히 부탁했던것이다.
박정인은 짐이 많기때문에 이밤중으로 사람들을 빨리 보내달라고 련락을 띄워왔다. 그리고 어제부터 개성근방에 적들의 경비력량이 강화되였는데 무슨 낌새를 맡은것 같다는 소리도 있었다.
《개성행 밤차가 몇시에 있소?》
《2시에 서울역에서 떠나는 차가 있습니다.》
정시명은 웃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간이 없구만. 길차비를 하오. 이거 미안하구만.》
《그런데?…》
《함께 가자구.》
《안됩니다. 련락문에 다 적었다고 하던데요. 지금 개성시가 벌컥 뒤집혀있습니다. 개성시에 대한 출입을 봉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함께 가자는것이요. 박선생이 지금 속이 새까맣게 타고있겠는데… 이런 일에야 깜깜이지. 빨리 떠납시다.》
《제가 혼자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안돼, 박선생이 오죽하면 동무를 통해 내게 이렇게 손을 내밀가. 동무도 홀로 처리할수 없으니 이렇게 숨이 차서 뛰여온게 아닌가.》
마동열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정시명의 말을 듣고보니 정말로 자기도 당황했던것 같다. 지휘부로 달려오지 말고 자기 계선에서 매듭을 봐야 할 일이 아닌가. 모처럼 얻은 귀한 출판물과 돈을 안전하게 빼내와야 한다는 생각에 다몰려 앞뒤를 재지 않고 달려온 자신의 소행이 안타깝도록 후회가 갔다.
정시명이 이 정도로 나오면 마동열이도 돌려세우는 재간이 없었다.
정시명은 박정인이 개성에 묶여서 꼼짝 못하고 조직의 방조를 기다리고있을것을 생각하니 한시도 지체할수 없었다.
까딱 잘못하면 출판물과 많은 돈을 적들에게 떼울수 있다. 그러면 이것이 단서가 되여 조직에 불티가 날아올수도 있는것이다. 더구나 출판물을 걸고 놈들이 묘하게 반북깜빠니야를 벌릴수도 있다.
정시명은 이러한 문제가 조직에 치명적인 타격의 시초로 되군 한다는것을 여러번 체험한바가 있었다. 그러니 어물거리지 말고 불찌는 제때에 비벼꺼야 한다.
정시명이 박정인이 마련해준 고급옷가지들을 떨쳐입는데 그때까지 방구석에 오도카니 앉아서 오가는 말을 듣기만 하던 민순임이 나섰다.
《이보세요. 제가 이사람을 앞세우고 가면 안될가요?》
정시명이 그 말에 《원, 당신이 어떻게…》하며 어이없는듯 씩 웃었다.
《제가 이 사람 장모되여 개성에 나들이 간 령감한테 간다고 하고…》
《그래?!…》
정시명이 희한해서 두루마기팔소매에 오른팔을 넣다가 무춤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마동열이도 좋아하였다.
《아, 그거 멋있는 생각입니다. 개성 박연폭포에 풍류객들이 좀 많이 모여듭니까. 내 언제 그쪽에 가보니 기생차고 놀아대는데… 옳지, 바람난 령감찾으러 떠난 부자집마님으로 하면 개성에 들어가기도 좋고 나오기도 편하겠습니다.》
정시명이 그들의 이야기에 껄껄 웃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궁냥을 해냈소. 그게 좋을듯 싶어.》
벌써 주씨가 마련해준 비단옷을 갈아입고나선 민순임이 눈을 흘기였다.
《저도 이젠 뭘 좀 해볼랍니다. 동열이 이 사람, 빨리 떠나자구요.》
정시명이 한순간에 부자집마나님이 돼버리고 제법 기세를 올리는 안해를 보다가 《허허…》하고 소리내여 웃었다.
그들은 밤중으로 개성으로 내려갔다.
박정인의 말대로 역주변이 봉쇄되여있었다.
민순임이 바람난 령감 잡으러 왔다는 소리를 하자 경찰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통과시켰다.
박정인이 숨어있는 만월동출장소에 가니 그때까지도 박정인은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밝히고있었다.
만월동출장소는 고려상사에 소속되여 개성에 있는 대북장사군들로부터 밀수해온 물자를 넘겨받는 일을 담당하고있었다.
박정인은 마동열이 민순임이를 앞세우고 나타나니 눈부터 휘딱해졌다.
《아니, 어찌된 일이요. 마중위?》
박정인이 책망조로 물었다.
마동열이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였다.
《그래?… 어참, 사모님두 허허- 바람난 령감 잡으러 왔다?…》
박정인이 속이 풀려 껄껄 웃는데 민순임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여들듯 어쩔바를 몰라했다.
《하여튼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이젠 여기서 옴짝달싹 못하게됐다 했는데 사모님이 이렇게 와주시다니…》
《고마운 인사야 제가 올려야지요.》
그들사이에 이런 말이 오가는데 마동열이 푸접없이 말을 막았다.
《어디 있습니까?》
《저 허청간에 있소. 공교롭게도 아래방에 주인의 매부되는 이가 와있다오.》하며 박정인은 그들을 허청간으로 안내했다.
박정인이 손가락으로 허청간의 판자문을 가볍게 때리자 빗장 벗겨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출장소책임자는 짐우에 누워있다가 일어나서 박정인을 확인한 다음에야 얼굴을 내밀었다. 옆에는 커다란 몽둥이가 있었는데 여차하면 까부실 잡도리다. 박정인이 긴급련락을 보내온 심정이 가히 리해되였다.
우선 날 새기전 짐을 뒤뜰안에 파묻도록 하였다.
일을 끝내니 동녘이 희슥해왔다.
마동열이 놈들의 경계가 심해진 원인을 캐묻자 박정인은 별로 단서 잡힐것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당분간 여기에 뒀다가 놈들의 경계가 풀린 다음에 운반해갑시다.》
출장소의 책임자가 책임적으로 지키겠다고 하였다. 날이 밝아 가까이에서보니 책임자는 쉰에 가까와보이는 지숙한 나이의 농사군이였다.
그는 며칠전에 개성1중학교에서 교원들과 학생들이 여러명 붙잡혀간 일이 있는데 그때부터 경찰과 헌병의 수가 2~3배 늘어나고 여기저기 검문소가 설치되여 통행자들을 단속한다고 설명하였다.
마동열은 조성된 정황을 여러모로 따져보았다. 그러루한 일이라면 지금 남조선의 도처에서 드문히 일어나는것인데 놈들이 이렇게 소동을 피울게 없다고 생각되였다. 혹 이것이 박정인의 움직임을 내탐한 적들의 움직임이 아닌지?… 아니면 정말 그 어떤 다른 사건이 터져 색출소동을 벌리는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박정인과 관련된 정황이라면 서울까지 가는것은 고사하고 밖에 나다니는것부터 위험한것이다. 그렇다고 좁은 개성바닥에 그대로 있다가는 언제 적들의 수색에 걸려들지 모를 일이다. 한시바삐 박정인을 서울로 데리고가는것이 급선무일것 같았다.
그들은 허청간에서 아침요기를 대강하였다.
출장소책임자에게 시내에 나가서 적들의 동정을 알아보고오라고 부탁하였다.
책임자는 개성역전부터 돌아보았다. 여전히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있다. 가는 곳마다 경찰과 헌병들이 욱실거리고있었다. 역에서는 매표구와 개찰구에 경찰과 헌병이 갈라서서 개성에서 나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열하고있었다.
역구내에도 경찰들이 늘어서서 기차에 오르는 사람들을 다시금 조사하고있다.
기차로 개성을 떠나는것은 불가능할것 같았다.
뻐스정류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경찰과 헌병들이 뻐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깐깐히 훑고있다.
놈들의 잡도리로 보아 수사책동이 인차 해제될것 같지는 않다.
책임자로부터 정황을 보고받은 마동열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여기서 지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방도를 찾읍시다.》
마동열이 한동안 이것저것 궁리해보고나서 몇가지안을 내놓았다.
이런 정황에 처음 당해보는 박정인은 그저 눈만 껌뻑거리면서 마동열의 얼굴만 지켜볼뿐이였다.
어물거리다가는 놈들의 수사에 걸려들수 있다는 예감이 마동열을 초조하게 하였다. 제 한몸이라면 자신이 있지만 귀중한 짐과 일행의 안전을 책임진 자신으로서 모험을 해서는 안되였다.
마동열이 우선 당황해하는 박정인의 심정을 늦춰주고싶어 말하였다.
《급해할건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게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배짱이 아닙니까. 적들을 리용하는게 상수일것 같습니다.
경찰이나 헌병놈들의 차를 리용하여 봅시다. 만약 선생님이 로출되여 생긴 정황이라 하더라도 적들은 감히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리라고까지는 생각도 못할겁니다. 이런 때는 상대방의 생각이 미칠수 없는 곳에서 돌파구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저 선생님과 사모님은 부자집 량주흉내만 잘 내주십시오.》
마동열이 한 생각이 떠올랐다. 외부에서 갑자기 막대한 력량이 투입되였으므로 그들의 왕래도 많을것이다. 잘만 하면 놈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서울로 가닿을수 있다. 마동열이 침착하면서도 자신만만하게 사태수습안을 내놓자 그제야 박정인도 마음이 가라앉아 마동열의 이야기에 주를 달았다.
《거참 마중위의 배짱이 여간만 아니구려. 옛 병서에도 가장 믿을만한 방어는 공격이라고 썼다우. 정황에 맞게 지혜를 낸 다음에는 필요한 대목에 목숨을 내대고 돌진하라는 뜻이지.
우리 걱정은 말고 마중위의 생각대로 해주게.》
마동열은 역전려관쪽으로 가다가 개성경찰서쪽으로 향했다. 려관에 가야 송사리들이나 만날수 있다고 생각하였던것이다. 자동차를 리용할바에는 화물차보다도 승용차가 낫고 승용차를 구해볼려면 경찰서에서 찾는것이 빠를것 같았다.
마침 개성경찰서정문앞에 몇대의 승용차가 주런이 서있었다. 운전사들은 다들 려관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에 세워놓은 자동차에서 쇠붙이 덜거덩하는 소리가 났다. 경찰복을 입은 운전사가 차체밑에 들어가서 수리를 하다가 나오고있었다.
마동열은 다짜고짜로 그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였다.
《수고합니다.》
《… …》
《어데까지 가시오?》
그제야 운전사는 힐끔 눈을 돌리더니 《왜 그러오?》하고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경찰제복을 입은 값을 치르자는 심산이다.
《하, 그 량반 텁텁하기는 탁배기 한가지다.… 자, 담배 한대 피우소.》
마동열은 푸접좋게 말을 건네며 권연을 꺼내 내밀었다.
운전사는 천쪼각으로 손을 벅벅 문지르더니 담배를 받아 귀쪽우에 건사하면서 《인천까지요.》하고 대답하였다.
《허, 신세를 질것 같군.》
《안되오. 경찰차에 잡인은 태우지 못하오.》
운전사는 마동열의 장수같은 체구를 아래우로 훑어보고는 눈을 빨았다.
《뭘 그러오. 사람이 살아가느라면 신세를 질 때도 있고 지우기도 하지. 공짜는 타지 않겠소.
사실은 서울에 있는 장인, 장모를 모시고 박연폭포구경을 하고 가는 길인데 밤차는 고생스럽고 화물차는 너무 들춰 늙은분들 모시기 어려워 그러오. 그렇다고 서울에 차 보내달라고 전화를 걸기도 힘들고… 신세 져봅시다.…》
마동열은 그에게 늘어지게 붙었다. 운전사는 호부자의 냄새를 물씬물씬 풍기는 마동열의 희떠운 수작질에 구미가 동한듯 다시한번 그의 차림새를 훑어보고는 《좋소. 데리고 오시오.》하고 말하였다.
마동열은 운전사가 한발 물러서자 《아, 이왕이면 수골 해주오. 우리 장인 예까지 어떻게 걸어오시라고 하겠소? 내체면 봐주시오.》하고 장인의 금새를 잔뜩 높이였다.
《허, 그 량반 말타면 견마 잡히고싶다 한다더니… 선죽교려관이겠지요?》
《그럼요.》
선죽교려관이란 예로부터 세도있는 서울량반들만 기생차고 묵어가던 개성에서 첫째가는 고급려관으로 전해온다. 운전사는 마동열의 《장인》을 고관대작이나 큰 실업가로 생각하였던것이다.
마동열은 박정인이 호주머니에 찔러주던 지페뭉치를 꺼내 그의 뒤주머니에 밀어넣었다.
기분이 좋아진 운전사는 이 차가 인천경찰서장차인데 얼른 수리하고 갈터이니 준비해가지고 대기해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자기의 큰아버지라고 할테니 장인더러 그렇게 처신하라고 일렀다.
마동열이 돌아와서 승용차를 리용하게 된 이야기를 하자 박정인은 길게 숨을 내그으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들은 서둘러서 아지트를 떠나기로 하였다.
떠나기 전에 박정인이 돈뭉치를 들고 출장소책임자에게 넘겨주면서 집에 와있는 매부가 어제 피끗 허청간을 돌아보고 갔는데 살림에 보태쓰도록 주라고 하였다.
출장소책임자가 마다하였으나 박정인은 뒤일이 걱정스러워 기어이 그의 손에 돈을 넘겨주고서야 집을 나섰다.
그들이 선죽교려관앞에서 잠시 담배 한모금씩 피우는데 자동차가 나타났다.
박정인은 자동차가 옆에 와서자 팔자걸음을 느릿느릿 옮기며 다가갔다.
그뒤로 민순임이 따라서는데 마동열이 제법 그럴사하게 부자집 마님행세를 하는 그 녀자의 거동과 행장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부자집 량주다운 거드름앞에 시경찰서장의 권위도 한순간에 무색해지고말았다.
이미 운전사의 말을 듣고온 서장은 너무도 틀지고 천연스러운 박정인과 민순임앞에서 앞자리까지 권하며 친절을 보이느라고 했다.
《에, 모처럼 떠난 개성재미 로친덕으로 다 깨졌다. 다 꿰진 령감 그리도 그리웠소?》
《말두 말아요. 령감, 늦바람나도 단단히 났지. 서울량반 개성기생을 정 붙였다가 수염까지 다 털어놓고왔다는 소릴 못 들었수?》
박정인과 민순임의 횡설수설에 경찰서장은 《흐아-》하고 허리를 젖히고 웃어댔다.
점심녘에 차는 문산에 이르렀다. 마동열은 네거리앞에 서있는 《문산면옥》이라고 쓴 정결해보이는 양옥집앞에 차를 세우게 하였다.
《아버님, 여기서 점심상을 받으시는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그것도 좋지. 로친생각은 어떻소?》
《좋을대로 하시우.》
박정인이 민순임과 나란히 식당으로 앞서는데 마동열이 서장과 운전사의 등을 떠밀고 뒤따랐다.
일행은 푸짐하게 점심을 치르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검문소의 경찰들이 이따금 자동차를 세우기도 했지만 운전사의 습관된 위세에 눌려 감히 증명서를 보자고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차가 서울어귀에 들어서자 말 한마디없이 주눅이 들어있던 서장이 《댁이 어디십니까?》하고 공손하게 물었다.
《영악동일세.》
박정인이 대답하자 서장은 《영악동까지 모시도록…》하며 운전사에게 명령했다.
영악동은 옛날 일본총독부 관리들이 살던 곳이였다.
리승만이 지금 거처하고있는 리화장도 그곳에 있다.
그러나 자동차가 서울종로네거리에 들어서자 박정인이 자동차를 세우게 했다.
《이보게, 난 내려서 회사에 들렸다 가겠네. 신세가 너무 많은데 자네도 서울까지 와서도 페끼치지 말고 예서 내려 택시를 잡아타도록 하라구.》
박정인은 이렇게 분부를 내렸다.
《예.》
마동열이 얼른 대답하고 서장이 팔을 잡는것을 굳이 사양하고 차에서 내렸다.
《마중위!》
박정인이 서장일행이 인사를 개올리고 떠나가자 긴숨을 내긋고는 가슴을 툭툭 쳤다. 그의 속옷은 땀으로 질벅히 젖어있었다.
《내 독립군시절에 이런 걸음 수태 했네만 원 이렇게 속이 떨려보기는 처음일세. 사모님, 정말 고맙수다.》
박정인이 그제야 민순임에게 인사를 했다.
박정인은 정시명의 앞에 와서도 마중위의 수가 여간이 아니라고 추어올리고 민순임이 그렇게도 도고한 마님일줄은 몰랐노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동열이 어떻게 일행을 이끌고 왔는가 하는데 대하여 손시늉까지 해가며 이야기하였다.
정시명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히죽이 웃고만 있는 마동열을 돌아보며 생각이 깊어졌다.
앞으로 벌어질 싸움에 비하면 이쯤은 소부연이다. 아직 놈들의 수사는 조직에 닿지 못하고 있지만 투쟁의 심도와 폭이 커갈수록 어차피 조직은 원쑤들과 끊임없는 조우전을 벌려야 할것이다. 그러자면 마땅히 우리는 어떤 정황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담대한 심장부터 가져야 한다.
그러나 지하투쟁에서 대담성은 기질의 어느 한 측면일뿐이다. 혁명가들의 가장 중요한 존재방식은 창발성이다. 지하투쟁에서 교조는 죽음이다. 창조적예지가 없는 일군은 지하공작이라는 거창한 예술의 무대에 오를 자격이 없다.
하기에 세상이 생겨나 적구투쟁이라는 투쟁방식이 수천년을 헤아려 전해지지만 그에 대하여 서술한 교범이나 행동세칙은 없다. 앞으로도 완성된 지하투쟁교범이란 세상에 나타나지 못할것이다. 각자의 싸움교범은 부닥치는 환경에서 오직 그 자신만이 행동으로 서술할수 있는것이며 부단한 창조적사색과 실천으로 완성시켜나갈수 있는것이다. 창조- 창조적두뇌야말로 지하투사들의 생명력이다.…
마동열은 자기의 창조적두뇌로써 하나의 귀중한 경험을 조직의 투쟁사에 적어놓은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