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열풍을 누르고

1

하지는 당황하였다.

국무성과 펜타곤에서는 련일 급보가 날아왔다.

《불을 끄라.》

《반미구호를 바꾸게 하라.》

《게릴라전을 분쇄하라. 무조건 철저히!》

이미 료원의 불길이 된 무장항쟁은 미국을 겨냥하고있다. 미군을 반대하는 불길이고 미군정을 반대하는 불길이며 미국의 조선정책을 반대하는 불길이다.

아직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반미구호가 이처럼 열광적으로 환영받고있는 례가 없다. 아직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도 반미항전이 이처럼 열화같이 타오른 례가 없다.

마샬이 껑충 뛰고 트루맨이 아연실색하였다. 남조선은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평화의 사도》로서, 《해방자》로서, 《구세주》로서의 미국의 가면을 세상의 면전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있는것이다.

현지를 답사하고 난 맥아더의 정치모사군인 애치슨은 하지의 앞에서 쓴입만 다시다가 종내 신통한 수를 내놓지 못하고 도망치듯 달아뺐다. 애치슨은 이렇게 생각했다.

(불은 네가 지르고 오라는 내가 질수야 없지.)

애치슨은 약바른 정치가이다. 아니, 현명하게 사고하는 자라고 봐야 할것이다.

하지는 그 모든 치닥거리를 안고 계속 수세에 몰려 돌아가자니 가뜩이나 작은 머리가 한줌만큼 졸아들었다.

그는 브라운과 측근들을 불러들여 밤가는줄 모르고 연방 커피잔을 갈아대며 모의를 벌렸다.

두가지문제에서 락착을 보았다.

우선 정치적인 방법으로 치안을 확보하는것이다. 현단계에서 민중의 분노를 달래는 방향에서 《단선단정》구호는 일시 뒤전에 밀어놓기로 하였다. 그리고 시간을 끌면서 명분을 만들어내도록 하였다. 다음으로는 남조선사회의 좌경화를 촉진시키게 될 야산대들의 장기전을 무자비하게 분쇄해버리는것이였다.

정치적책략은 브라운의 몫으로 넘어갔다. 군정청업무에서 마지막과제라는 담보를 받고 이 과업을 맡았다. 하지는 군사적평정을 직접 맡았다.

하지는 곧 야산대에 대한 공세작전을 위한 관계기관장들의 회의를 소집하였다.

여기에는 남조선주둔 미군사단장들과 하지의 정보고문 노불이 참가했고 류동명과 송호정도 끼였다. 치안국과 사법기관의 우두머리들도 참가하였다.

하지가 첫 발언을 하였다.

《우린 남조선전역에서 벌어지고있는 야산대활동이 장기적인 게릴라전으로 이행하고있다는 명확한 정보를 쥐고있소. 치안국에서는 지난해 야산대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내였지만 실패하였소. 더는 치안상의 문제로 방임할수 없소. 사태를 그냥 두면 남조선은 북에 의한 공산화가 아니라 자체의 좌익세력에 의한 공산화를 면할수 없소. 모조리 쳐갈겨야 하오. 무자비하게 철퇴로 짓뭉개버려야 하오. 그러므로 나는 주둔군사령관으로서 야산대에 대한 평정작전을 담당할 군경합동토벌사령부를 조직할것을 결심하였소.》

하지가 예까지 말하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방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는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첫눈이 가는것은 송호정과 그옆에 나란히 앉아있는 류동명이였다. 군대파견문제를 가지고 그들이 제일 불만을 품고있다는것을 알고있는 하지였다.

아니나다를세라 자기를 쳐다보는 그들의 눈길이 례사롭지 않다. 류동명은 헛기침을 몇번 컹컹거리더니 인차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송호정은 사나운 눈초리로 자기를 그냥 쏘는듯이 바라본다. 한동안 그들사이에는 적의에 가까운 눈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는 네속 내 알고 하는 일이니 마음쓸바 아니라는듯 그에게서 먼저 눈길을 거두고는 보다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토벌대사령관으로서는 충분한 협의를 거쳐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을 임명하며 참모장으로는 치안국장을 임명하기로 하였소.》

순간 송호정은 몸을 흠칫거리였다. 입술에 바르르 경련이 일었다.

《내가?!》

그는 목구멍까지 치미는 울부짖음을 참느라고 아래입술을 꾹 깨물었다. 속에서는 세찬 바람이 일어번졌다.

(내가 토벌대사령관이라니… 이런 치욕을 내가 받아안다니… 네놈들이 이 송호정을 어떻게 하자는거냐. 네놈이 나를 지금 어떤 일에 목을 매여 끌어넣었느냐. 안돼, 안돼. 백번 죽어도 이 송호정은 동포를 토벌하는 만고역적은 안될테다.)

송호정은 벌컥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소리치고싶었다.

그런데 옆에서 송호정의 눈치를 보고있던 치안국장이 그가 끝내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일어났다.

그는 방안의 팽배해진 공기를 의식한듯 《신임에 보답하겠습니다.》 하고 재빨리 말해놓고는 자리에 도로 앉았다.

송호정은 그에게로 열기가 번득거리는 눈길을 보냈다.

(신임이라니?!… 저눔이 제정신 가지고 하는 소리냐. 그래도 독립군에서 일본놈을 향해 총탄을 날렸다는 놈이 민중도살지령을 신임이라니 저게 쓸개빠진 놈이 아닌가. 신임이란 뭐냐. 미국놈들이 믿어준다는것이냐. 보답이란 또 뭐냐. 저눔들이 부르는대로 동포들의 목을 베겠다는건가.…)

송호정은 여럿의 송곳끝 같은 눈길이 자기의 얼굴에 와박히는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속은 그냥 와글와글 끓기만 하였다.

(내가 고개를 숙이는구나. 이 못난이… 고개를 숙이는구나. 동포를 해치려는 이방무리들앞에서 왜 고개를 숙이느냐. 장개석앞에서도 할소리는 해대던 무사의 기개는 어느 시궁창에 처박고 쭈그러진 우상만 남았느냐.

아, 천하의 저주를 내가 몰아안게 되였으니 이 일이 장차 어떻게 번져질가. 송호정, 너도 이젠 끝장이다.)

송호정은 그후 어떻게 하지의 방에서 나와 그놈의 《친절한》 바래움까지 받으며 사령부에 왔고 다시 집으로 들어섰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앞을 막아서는 안해를 밀친 다음 위스키 한병을 제손으로 찾아 단숨에 마셔버리고 어떻게 침대에 쓰러졌는지도 모른다.

《난 지금껏 겨레앞에 죄지은게 없어. 그러니 더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 이젠 더는 살아남을 의미가 없어졌다. 아니, 산다는것이 범죄로 되게 되였어.》

송호정은 이렇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안해에게 권총을 가져오라고 호통을 쳤다. 안해가 총탄을 날쌔게 뽑아내고 가져다 주자 서슴없이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는 총을 던져버리고 미칠듯이 울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이 달려와 울며불며 매달렸다. 안해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그 어떤 비상한 사건이 벌어졌다는것을 짐작하고 정신없이 헤덤비며 남편을 진정시키느라고 했다.

살아오며 처음 보는 남편의 광기에 슬피 울며 매달렸으나 송호정은 그 눈물, 그 울음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다.

《내가 토벌대사령관이야? 하하하… 젠장, 토벌대는 또 무슨 토벌대야. 쪽발이새끼들처럼 하하, 이름도 더럽지. 토벌대사령관이라…》

송호정은 아이들이 달라붙는바람에 자리에 누웠다가는 다시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소리치고 울고 하였다. 그렇게 몇번 거듭하더니 기력이 진한듯 눈을 감고 중얼거리다가 잠들어버렸다. 새벽무렵에야 가슴에 불이 이는듯 한 갈증에 깨여났다.

《아, 물! 여보, 나 물 좀!…》

안해가 물사발을 가지고 들어온다. 그런데 남자의 소리가 들린다.

《아주머니, 인주시오.》

(가만… 내가 지금 어데 와있나?…)

송호정이 그제야 눈을 떴다. 눈물이 자욱한 안해의 얼굴이 아슴푸레 보였다.

(젠장 울기는… 뭣때문에 눈물을 흘린담. 저 사람은 눈물이 너무 많다니깐… 물이나 빨리 주오.…)

송호정이 손을 내미는데 정작 다가오는것은 안해가 아니라 정시명이다.

(가만, 저 량반은 어떻게 내방에 와있나?)

《마시게.》

정시명이 이마살을 찌프리고 물사발을 입술에 대준다.

송호정이 벌떡 상반신을 세워가지고 물을 받아마시였다. 가슴이 시원하게 열리였다. 정신이 버쩍 들었다.

《이 사람, 이 무슨 짓인가?》

정시명이 꾸짖었다. 밤중에 송호정의 처가 맏이를 데리고 달려왔었다. 그래서 야밤에 뛰여와서 지금껏 송호정의 머리맡에 앉아있었던것이다.

《내가 어쨌기에. 허허…》

송호정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정시명과 안해를 번갈아보다가 웃었다.

《여보, 당신 지금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송호정의 처가 어이없어 눈살이 꼿꼿해가지고 짭짤하게 물었다.

《허허, 참.》

송호정이 또 싱거운듯 소리내여 웃었다.

《당신 그렇게도 생각나지 않으세요. 토벌대요, 사령관이요 했는데 그렇게 생각없이 하신 말씀인가요? 눈물까지 뚝뚝 떨구며… 원 참!》

《뭐?!》

그만에야 송호정은 술기운이 싹 지워졌다.

하지의 방에서 벌어진 일들이 언뜻 뇌리를 스쳤다.

안해의 눈빛도 깔끔해지고 정시명의 눈도 예민하게 번쩍거렸다.

송호정은 급기야 꺾어질듯 고개를 툭 떨구었다.

《정형, 자네가 옳았네. 끝내 이 송호정에게 국민전쟁의 지휘봉이 차례졌네. 날 좀 도와주게. 어쩌면 좋은가. 엉, 정형!》

《호정, 좀 차근차근 말해주게. 어찌된 감투끈인가?》

정시명이 이렇게 말하자 송호정의 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가 더 앉아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것이다.

《아주머니도 나가지 마십시오. 함께 듣고 의논을 합시다. 주인신상에 중대한 일이 벌어진것 같은데 아주머니도 아셔야 할 일이 아닙니까.》

정시명이 그 녀자도 자리를 같이하는게 좋을듯싶어 이렇게 말했다.

송호정이 어제 있었던 일들을 뜨직뜨직 이야기하였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이제 나가서 당장 사직서를 내기는 하겠는데…》

송호정은 이렇게 자기의 이야기를 마치였다.

《그래도 자네휘하의 군대가 토벌에 나설게 아닌가. 그리고 첫번째 토벌대사령관이라는거야 면할수 없지 않나.》

《역적의 오명이야 피로써 씻어야지.》

《자네의 해결책은 너무 간단하구만. 옷은 벗어버리고 이마에 연덩이를 박아넣으면 자네의 명예는 깨끗해질수 있다 그 말인가? 자넨 언제부터 자기만을 생각하는 비렬한이 됐나?》

《뭐라구?… 제발 날 모욕하지 말게. 내 지금 제정신인줄 아는가.》

《그래서 하는 소리야. 제정신을 찾아야지. 우리가 나라잃고 집떠나 죽음도 겁내지 않고 뛰여다닌게 그래 제 한몸 향락이나 명예를 위함이였던가?》

《여보게, 날 자꾸 몰아대지 말게. 난 지금까지 내 할바를 하느라고 했어. 나라앞에서 나 이상의것을 바쳐왔어. 그러나 이젠 대세는 내손에서 벗어났네. 이 송호정이 더는 필요없게 되였단 말일세. 그러니 내가 구태여 제자리 지키느라고 어정거릴게 없지 않는가. 이제 내 필사의 몸부림을 해봐야 바위에 닭알던지기야.》

《이보게, 마음을 가라앉히게. 아주머니, 물 두사발 더 갖다주시오.》

두사람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가슴을 조이며 듣고있던 송호정의 안해가 얼른 일어나 물 두사발을 다반에 들고왔다.

《한사발은 주인께 드리시오.》

정시명도 송호정도 물 한사발씩 꿀꺽꿀꺽 마시였다.

《정신이 드나?》

《어서 말을 하게.》

《난 자네에게 길게 설명을 하지는 않겠네. 다만 자네가 자기 자리를 지켜줄것만 바라네. 객기는 부리지 말구.》

《뭐요, 토벌대두목자리를?!》

《그럼.》

《아니, 난 못하겠네. 객기가 아닐세. 어차피 내 자리에서는 미국놈들의 장단에 춤을 추게 되여있네. 지금까지는 그래도 도전해왔지. 난 이제야 그것이 하나의 망상이고 궤변이고 자기의 존재에 대한 보호술에 불과하다는걸 똑똑히 깨달았네.》

《난 바로 자네가 그걸 깨달았기에 계속 남아있기를 바라는걸세. 만약 자네가 물러나고 그런 량심조차도 없는 그야말로 미국놈개가 타고앉는다면 민족이 당하는 재난이 얼마나 더 크겠는가.

도대체 이 나라의 애국자들이라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자네처럼 일신의 명예나 지켜 그렇게 보신하고 은둔해버리면 경각에 다달은 나라의 분렬은 누가 막으며 외세는 어떻게 쫓아낸단 말인가. 문제는 어디서 복무하는가가 아니라 어디에 복무하는가 하는것이야.

민중, 민중! 첫째도 둘째도 우리의 복무는 겨레에 바쳐져야 할것이 아닌가.》

《그럼 북조선에 복무하라는건가?》

《그건 자네의 신념대로… 나는 강권하지 않겠네. 자네가 씹어보고 쓰면 뱉는것이요 달면 삼키는것이지…

하지만 내 진심으로 바라는건 자네도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에 함께 나서주었으면 하는거야.》

《나도 이따금 북조선방송을 듣지. 김장군의 연설도 듣고… 물론 그분의 말씀은 다 지당해.》

《그렇다면 망설일것이 무언가. 난 이미 장군님을 만나뵙고 그분의 통일조국건설의 높은 뜻을 받들겠노라 맹세를 다진 사람이야. 뜻을 합쳐주게.》

《정형이?!》

송호정이 소스라치듯 놀라며 부르짖었다.

《장군님께서는 말씀하셨네. 강토의 분렬을 용인한다면 우리 동시대인들은 공산주의자이건 민족주의자이건 력사의 죄인으로 전해질것이라 하셨네. 장군님께서는 내 이 두손을 꼭 잡으시고 간곡히 말씀하셨네. 외세가 없고 평화롭고 자주적인 인민의 통일국가를 세워 삼천리강토우에 인민의 락원을 세우자, 겨레앞에 애국충신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자… 이렇게 말일세. 난 장군님의 뜻을 선뜻 나의 리념으로, 한생의 목표로 받아안았네.》

《그렇다면?…》

《두 길이 있네. 장군님을 따르는 길은 애국애족의 길이요 다른 길은 매국배족의 길이야.

호정, 나와 함께 동지가 되여 애국의 길, 애족의 길을 함께 걸읍세. 난 이게 소원이야.》

《정형!》 송호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정!》 정시명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호정이 와락 정시명을 끌어안았다.

《진작… 진작 말해줄것이지…》

송호정이 눈을 슴벅거리며 중얼거리였다.

두 친구들이 서로 얼싸안고 뜨겁게 달아오른 심장을 비비자 더욱 기뻐한것은 송호정의 안해였다. 그 녀자는 홍시 한바구니를 들고와서 옷고름으로 연신 눈귀를 닦으며 말없이 그들앞에 내놓고 방에서 나갔다.

《나를 받아주게. 장부일언 중천금이라 어찌 일구이언을 하겠나. 내 열백번 형장의 이슬이 될지라도 겨레를 위하여 의롭게 죽겠네.》

《그래, 나도 이젠 자넬 놓아주지 않겠네. 절대로.》

정시명은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턱을 들고 큰소리로 웃었다.

송호정은 웃지 않았다. 놓으면 다시 잡아보지 못할가봐 걱정되여서인지 그저 힘을 주어 정시명의 손목을 그악스레 잡아쥘뿐이였다. 그러나 그의 눈만은 웃고있었다. 가느스름한 눈시울이 들리고 그밑에서 맑은 눈이 고요히 빛나고있었다.

정시명은 그 눈에서 송호정의 마음을 재빨리 읽고있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면서 살아가는 보람을 잃은채 행복에 대한 막연한 갈망으로 하여 우수가 비껴있던 그 눈에 따뜻하고 청신한 봄기운이 약동하고있다. 래일에 대한 불안도 가슴을 지지리도 태우던 자기 운명에 대한 불만도 찾아볼수 없다. 정시명은 고뇌와 절망이 깨끗이 지워진 그 맑은 눈을 보는것이 더없이 반갑고 행복하였다.

서울에 온 때로부터 늘 마음 한구석에 송호정의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워 속을 태우게 했는데 비록 그사이에 두해 가까운 세월이 야속하게도 가로질러갔건만 한시름이 풀렸다.

이런 인간은 다른 길에 들어설수 없다. 벗들앞에서 보석같은 량심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은 나라앞에서도 곱게 살기마련이다.

친구의 진정을 끝내 믿어의심치 않고 이날을 기다려온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

(아, 좋구나! 이같은 행복을 맛볼수만 있다면 내 열백밤을 패운들 무슨 고됨이 있고 백천번 쓰러진들 무슨 한됨이 있으랴.)

부지중 정시명은 사개가 풀린듯 열에 떠서 소리질렀다.

《이보게, 한바탕 겨루어보자나?》

《엉? 좋지!》

둘은 끌어안고 허리를 굽히더니 방안을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두사람은 다 씨름에 조예가 있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정규적인 교련을 받은 송호정도 만만치 않고 마동열한테서 격술을 배워둔 정시명의 솜씨도 짝지지 않는다. 둘은 황포강기슭의 모래불에서 맞붙어본 일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세월이 퍼그나 흘렀다. 서로 수를 써보려고 상대방의 약한 구석을 노리며 헛다리질도 해보고 바지끈을 지그시 당겨 상대를 무릎우로 들어보려고 하지만 생각처럼은 되지 않는다.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도 두사람은 인차 맥이 진하고 숨이 차서 헐떡거리였다.

이때 송호정의 안해가 잣죽을 쒀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귀밑머리가 희슥해지는 사람들이 끌어안고 돌아가는것을 보자 《에그머니, 이 량반들이!…》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만둬요!》

기쁨과 념려가 압축된 그 쇠된 소리에 두사람은 약속이나 한듯 《엉?!》 하며 화닥닥 놀라 손을 놓아버렸다. 그 바람에 둘다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하하하…》

방안에는 사나이들의 장쾌한 웃음소리가 우뢰처럼 터졌다.

《호호호…》

송호정의 안해도 허리를 꼬부리고 즐겁게 웃는데 눈귀에 쌀알만 한것이 돋혀 반짝거린다.

셋은 노르무레한 잣죽을 맛나게 먹었다.

정시명은 곧 군부상층에 유력한 조직망을 구성하고 책임자로 송호정을 임명하였다.

송호정의 련락은 마동열이 하기로 하고 필요한 때는 그의 처도 나서기로 하였다.

며칠후 정시명은 마동열의 아지트인 을지로입구에 있는 크로바차점에서 그를 소개하였다.

송호정은 입술이 두툼하고 시커먼 눈섭이 왕붓처럼 굵고 뼈대가 실한 마동열을 보자 대바람에 마음에 쑥 들어하였다.

《아까운데…》

송호정이 마동열이 부어주는 잔을 받아들고 롱조로 말했다.

《뭘말인가?》

《이 사람은 내밑에 와있었어야 할 큰 장수감인데…》

《허허… 욕심은 젠장… 지금은 뭐 장수질을 하지 않는줄 아나.》

정시명이 껄껄 웃는데 당자는 시치미를 떼고 천연스럽게 《하기는 제게도 송선생님의 장군복이 어울릴것 같습니다.》 한다.

《원 무슨 소리. 이건 개껍데기야. 부러워할만 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물건짝이지.》

송호정이 정색하여 팔을 내젓는데 정시명이 몸을 흔들며 껄껄 웃었다.

《개껍데기라니요?》

마동열이 의아스러워 물었다.

《자네 어른께 물어보라구.》

송호정이 이렇게 퉁명스럽게 대답해놓고는 정시명을 따라 몸을 크게 흔들며 웃었다.

정시명이 한참 웃고나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서로의 관계를 명확히 가지고 일관시켜야 하겠네. 마동무가 앞으로도 자네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계속 찾아다닐수야 없거든.》

《딴은 그래.》

《자네들의 호상관계를 삼촌과 조카사이로 하게.》

《옳네, 그럴듯 해. 음, 앉은 자리에서 장수같은 조카를 얻었군. 그러면 정형과 우리 조카의 사이는 어떻게 하지?》

《우리사이?… 그렇지. 자네앞에서 동열이와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한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시명의 눈가에 언듯 미소가 어렸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것이다.

《나와 동열이와의 관계는 장인과 사위관계로 해두지.》

《네?!》

그 말에 마동열이 단박에 얼굴이 새빨개지며 당치 않은 소리라는듯 고개를 흔들었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아무리 위장이라 해도…》

송호정이 마동열의 행동이 이상스러워 《내 생각에는 좋을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게 우리 조카가 바빠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정시명이 마동열의 숫진 모습을 보며 즐겁게 웃었다. 《까닭이 있지.》 청높은 정시명의 웃음소리가 커갈수록 마동열은 더욱 어쩔줄 몰라한다.

얼마전에 민순임은 마동열과 례영을 말이 난김에 결혼식을 차려주는것이 어떠냐고 박정인에게 말을 비친적이 있었다. 정시명에게 이야기하면 지휘부일에 참여한다고 당장 불호령을 내릴가봐 박정인을 통해 말이 들어가도록 했던것이다.

박정인이 그 말을 제소리처럼 정시명에게 전했으나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정시명은 이야기가 민순임에게서 나왔으리라는것을 짐작하고 그날 저녁상을 물리며 한마디 하였다.

《지금이 어느때라고… 변변한 싸움도 치르지 못했는데…》

그때 일이 생각나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속구구를 했다.

(그래 이제 벌어 질 싸움은 해볼만 한것이렸다. 잘 치른 다음 너희들 문제도 락착을 짓자.)

《그럼 난 자연히 정형과 사돈간이 되겠네. 아, 생각나네, 생각나. 자네네 례영이가 있지. 례영이 서울장안에 보기드문 처녀이기는 하지만 우리 조카야말로 서울장안에서 일등짜리신랑감이지.… 아, 그렇군. 하하하…》

송호정이 그제야 정시명의 내흉스러운 생각이 건너 짚이여 또다시 큰 몸을 들썩거리며 폭소를 터뜨렸다.

뜻하지 않게 펼쳐진 웃음판에 한참 흥겨웠던 정시명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가슴이 알찌근해왔다. 혜숙이네 문제였다.

며칠전에 박정인이 때없이 찾아왔다.

《이거 큰일이 났습니다.》

박정인이 이렇게 대포부터 한방 쏘아 상대방을 놀라게 해놓고 말을 꺼냈다.

《거, 혜숙이네 문제 있지 않습니까.》

《혜숙이네 문제?…》

정시명은 요란스럽게 시작된 박정인의 이야기에 저으기 긴장되였다가 그만 웃고말았다.

그러나 박정인의 낯색은 여전히 신중하다.

《아, 웃으실게 못됩니다. 전일에 선생님 주신 공작을 냅다 밀자니 그 사람이 지금… 야단났습니다.》

정시명이 또다시 소리내여 웃었다. 일전에 권혜숙의 제기를 정시명은 심중히 생각하였다. 그는 권혜숙이 시원스러운 그 성미에 길철과의 관계를 놓고 두루 처신하기가 조심스러워 그런 제기를 하여온것 같았다. 그래서 거처지는 옮겨주되 우선 길철과 결혼시켜 살림을 펴게 하자고 박정인과 상론하고 될수록 빨리 결혼식을 차려주자고 《공작》을 맡겼던것이다. 그런데 박정인의 거동을 보면 정말 야단스러운 문제가 생겨 《공작》이 난관에 부닥친 모양이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무슨 애로가 생겼습니까?》

《아, 글쎄 신랑쟁이가 신부를 멀리하는것 같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길동무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정시명이 깜짝 놀라 이렇게 큰소리로 박정인의 말을 가로챘다.

《하, 그럼 어디 정선생님이 만나보십시오. 어참, 로총각 견마잡히기 쉽지 않다더니…》

박정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러가자 정시명은 하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길철이 혜숙이를 마다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권혜숙이 례영이와 세워놓으면 인물맵시야 따라가련만 혜숙은 그대로 아름답고 정이 가는 처녀다. 매사에 씨원씨원해서 우선 마음에 든다. 무슨 일이 차례져도 군말이 없다. 더구나 그가 부모까지 다 버리고 길철에게 몸과 마음을 의탁하고있는데 이게 무슨 괴이한짓이냐.

그래서 혜숙이 예서 내보내달라고 했구나. 도대체 길철이 어쩌자는건가. 처녀의 순정을 깡그리 앗아내고는 이제와서 헌신짝 버리듯 하면 혜숙은 어찌 되고 저는 또 뭐가 된다는건가.

내가 집안단속을 너무도 소홀히 했구나. 어째 이제 와서야 이런 일이 내 귀에 들어오는가.…

정시명은 만사를 젖히고 이 문제부터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길철을 찾아 떠났다.

두사람은 저녁노을 비낀 한강변을 천천히 걸었다.

《어찌된 일이요. 길동무?》

첫 마디부터 정시명은 엄하게 따지고 들었다.

길철은 처음에는 정시명의 엄한 표정과 추궁에 떨떨해진듯 그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말하오. 속이 짚이는게 있을게 아닌가. 혜숙이를 어떻게 한다구?》

정시명의 입에서 혜숙의 이야기가 나오자 길철은 피식 웃기부터 하였다. 그리고는 뒤덜미에 손이 올라가더니 간단히 대답하였다.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무슨 소리요? 길동무, 저기 좀 앉았다 갑시다.》

정시명이 성이 나서 버드나무밑에 있는 나무걸상으로 먼저 씨엉씨엉 걸어갔다.

그들은 잠시 말없이 노을빛이 자글자글 끓고있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석양에 훈풍을 받아 잔물결이 춤추듯 아롱거리는데 물오리들이 한가롭게 떠돌고있다. 그것들은 물속에 곤두박히며 작은 물고기를 물고 나오기도 하고 몸뚱이를 열심히 다듬기도 하다가는 물을 차고 하늘에 날아오르기도 한다. 그럴 때면 잔잔한 수면우에 비행운과도 같은 가느다란 은띠가 일매지게 뻗어간다.

그 아름다운 풍치가 지금 그들에게는 아무런 흥취도 주지 못하였다.

《혜숙이 집을 나가겠다고 제기해왔소. 이래도 개의치 말아야 할 일이요?》

정시명은 추궁조로 물었다.

《집을 내보내도록 하십시오. 그 동문 이제 자기가 일생을 맡길 좋은 벗을 찾게 될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소?》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우린 피차에 갈라지는것이 서로를 위해서 좋을듯싶을뿐입니다.》

《그래 두사람이 합의를 본거요?》

《글쎄… 그렇다고 봐야지요.》

길철의 목소리는 젖어있다. 강물을 굽어보는 그 눈길에 형언할수 없는 애수가 어려있다.

정시명은 저도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갑자기 전신의 맥이 쭉 빠지는듯싶다.

필경 그들사이에 상당히 깊은 골이 패인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해전에 자기가 데리고와서 애인이라고 서슴없이 소개를 하고 인사를 시키던 사람이 이렇게 딴소리를 할수 있는가. 내가 이들사이가 이렇게 벌어질 때까지 너무도 무관심했구나. 이제는 정말 내가 개의할 문제가 아니라는건가. 이들의 사랑이 우리의 관심을 떠나갔는가?)

정시명은 다시한번 길게 숨을 내쉬였다. 더 캐여묻지 않았다. 따져야 이 사람의 가슴만 허벼놓을듯싶다.

사랑이란 마음과 마음의 결합이라고 한다. 사랑이란 감정의 불꽃이다. 그건 리성에 앞서는 개념이다.

정시명은 돌아오자 인차 권혜숙의 거처를 옮기도록 하였다. 안지생이 자기 조직성원의 집을 알선하였다.

처녀는 떠나가며 몹시 울었다.

그런데 그 뒤소리가 정시명의 귀에 아프게 들려왔다.

- 혜숙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 길철이 무정하다. 그럴수 있느냐.

길철이도 요새 얼굴색이 컴컴해서 다닌다.

정시명은 지금 그들 생각을 하면서 자기를 질책하였다. 무엇인가 크고 중요한것을 놓쳐버린것 같다. 그들앞에서 미안하기 그지없다. 그래, 그래서는 안된다. 그 일은 마땅히 내가 끼여들어야 하는 일이다. 무관심… 무책임성… 동지의 신상에서 벌어진 일이 강건너 불구경이 되여서야 될 법인가. 빨리 손을 써야겠다. 그것도 시기를 놓치면 그들에게 일생의 후회를 남기게 할수 있다.

정시명은 이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박정인의 집 대문가에 이르렀을 때 정시명의 뒤에 한걸음 떨어져 말없이 따라온 마동열이 《선생님!》 하고 불렀다.

정시명이 구리로 만든 대문손잡이를 쥐다말고 돌아섰다.

《저 사실은…》

《왜?》

정시명은 여느때없이 소심해진 마동열의 태도가 의아쩍었다. 《말하라구. 뭘 동열이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는거야.》

《박영수동무말입니다.》

《박영수?…》

《예… 사실 그 동무가 빨찌산과의 련락을 담당하게 되였는데… 이제 송선생이 우리 일을 도와주면 박동무의 몫이 커지겠는데…》

그제야 정시명은 마동열이 힘들게 말머리를 떼놓고 가무리지 못하는것이 리해되였다.

박영수가 미덥지 않은 모양이다. 임무의 성격으로 보나 부담으로 보나 감당하기 어려우니 적임자를 찾아내자는것이다.

그런데 박영수로 말하면 정시명이 직접 추천한 인물이고 박정인의 아들이고보니 혹평을 하기가 베차기마련이다.

정시명은 마동열의 속말을 다 듣고싶어 우정 말나가는대로 퉁퉁 응수하였다.

《난 박영수가 적당한 몫을 맡은것 같은데… 우선 지리적으로 적중하고 개체가 또 침착하고 말이 적고 조용하고…》

《그게 제 소견에는 흠인것 같습니다. 너무 샌님같이 얌전하기만 하니… 사실 박영수동무는 밤중에 산길을 걷는것도 무서워합니다.》

《밤길도 무서워한다?… 허허허.》 정시명은 마동열의 걱정이 실없는것이 아니라는 짐작이 가면서도 마동열의 말이 너무 자극적이여서 껄껄 웃었다.

《그래, 그렇지.》 정시명은 인차 정색해가지고 말을 이었다. 《밤길을 무서워해서야 그 어려운 임무를 감당할수 없지. … 그럼 당장에 누굴 대신 내세웠으면 좋겠소? 마동무가 누굴 찍어보오.》

잠시 그들은 묵묵히 서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골라내지 못하겠는 모양이군.》 정시명이 말했다.

《글쎄요.》 마동열은 여러 사람을 생각했으나 이모저모로 합당치 않아 애매몽롱하게 대답했다.

《나도 박영수보다 더 좋은 적임자를 골라내지 못했소. 그러니 어쩌겠소. 키워내야지. 나나 마동무나 타고난 혁명가야 아니지 않소. 내 생각에도 박영수는 지내 만만하거든. 하지만 마음은 비단결이야. 그 비단결에 애국의 물을 들여줄 임무가 우리에게 있지 않을가. 마동무가 박영수에 비하면 일반지식은 비길바가 못되지만 지하사업에 들어가서는 반대로 천양지차거든. 배워주라구. 경험도 나누고 교훈도 들려주구. 그리고말이요. 우리가 장군님댁에서 들어둔 이야기가 있지 않소. 그 소중한 이야기를 저만 알고 묻어두지 말고 다들려주라구. 밤길을 함께 걷기도 하고… 사람은 생활속에서 다듬어지고 혁명가는 투쟁속에서 억세여지지.》

《알겠습니다. 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마동열은 정시명의 말을 새기며 자신을 뉘우쳤다.

송호정과의 사업은 정시명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였다.

《국방경비대사령부》위수보초병들도 사령관의 조카가 도착하면 인사까지 깍듯이 개올리면서 사령관의 으리으리한 사무실에 친절히 안내해주군 하였다.

이리하여 남조선군부의 모든 움직임이 제때에 정확히 지휘부에 보고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통위부장》 류동명을 비롯한 일부 인물들을 통하여 제공된 자료들을 합치면 그야말로 괴뢰군부의 일체 움직임이 조직의 감시속에 들어온셈이였다.

특히 송호정이 넘겨준 빨찌산토벌자료들은 박영수를 통하여 제때에 통보되여 유격대의 작전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마동열이 박영수를 곁에서 각근히 도와주었다. 장군님댁에서 들었던 소중한 지하투쟁경험담도 들려주고 자기가 중국에서 직접 체험한 가지가지 인상깊은 사건들도 생동하게 말해주었다. 어떤 날에는 밀림속의 밤길을 함께 헤치기도 했고 지하투쟁의 묘리를 실천에서 다져나가도록 왼심을 썼다.

박영수는 성장하였다. 사실 그가 맡은 일은 누구보다도 아슬아슬한 싸움이였다. 그는 빨찌산으로 통하는 어렵고 험하고 책임적인 길을 쉬임없이 걸었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