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거목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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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침실은 남향받이여서 아늑하였다.
방가운데 나무침대가 있고 머리맡에 상두대와 쏘파가 있을뿐이다. 상두대우에는 문건이 아름되게 쌓여있다. 안지생이 김구가 침실에서 나오지 않고 며칠동안 자료를 본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방안에 들어선 김구는 상두대에 가서 자료철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통의 얄팍한 문건을 찾아들자 정시명에게로 다가가 내밀었다.
《우선 이것 좀 봐주시오. 정처장, 내 저놈들의 말을 이젠 콩으로 메주 쑨다 해도 곧이 듣지 않소. 저눔들이 이 백범을 어떤 머저리로 만들어놓았는지 기가 막히오. 내 이자 정처장 오신줄은 모르고 지체시킨것은 저눔들 보내놓고 이 문건을 다시 들춰보기 위함이였소.》
김구의 목소리는 전에없이 맥이 진하고 처량하였다.
그것은 연장성이 보내왔던 《반탁》운동자료였다. 《반탁》의 실상이 김구에게 크게 충격을 주었다는 말이 옳은것 같다. 김구의 머리속에 폭풍전야와 같은 무겁고 침통한 기운이 드리운것 같았다.
《선생은 앞으로 어떻게 이 혼란된 정국을 수습하시렵니까?》
정시명은 자기앞이라 터져오르는 분통을 가까스로 참고있는 김구의 심정을 위로해주듯 인차 화제를 돌렸다.
《내게라고 무슨 방책이 있겠소.》
김구는 혼자소리처럼 시들하고 맥락이 없이 내뱉았다. 그리고는 이내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
《북에서는 지금 공산주의자들이 제 할 일을 해나가고있는데 이게 화단은 화단이 아닌가. 문을 닫고 돌아앉고 말자니 그 한민당의 왜놈패거리들이나 리승만에게 나라를 빼앗길것 같고 좀 해보자니 저마끔 딴 꿈을 꾸며 제멋대로 놀아나지 않나… 처장 말한대로 김규식이, 최동오, 류동명이 다 달아났소.
리범석이, 리청천이 무슨 청년단이라는 망둥이패들을 무어가지고 자기 세력을 늘구어보겠다고 미쳐돌아가오. 그놈들은 내가 두번세번 살려주었는데도 내 등뒤에 돌아서서는 내 주머니를 야금야금 털어내거든. 거기다가 양놈들은 이렇게 이 늙은것을 살살 꼬이고 속여먹기를 식은죽 먹기로 안단 말이요.》
김구는 제풀에 울화가 치밀어올라 쏘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안을 오락가락하기 시작하였다.
정시명이 김구가 으르렁거리는것을 보자 안지생이 그려왔던 그림이 생각났다. 성난 호랑이… 정말로 신통한 비유다. 그앞에 귀엽게 앉아서 재롱스럽게 호랑이를 달래는 다람쥐… 안지생이 용타. 저런 인간과 마주앉아 자기 주장을 내놓는다는 자체가 얼마나 담력이 있는 일인가.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하다.
다람쥐의 순간실수로 성난 호랑이가 앞발을 쳐들기만 하면 만사는 끝장이다.
김구가 안지생이쯤은 눈섭 한오리 까딱하지 않고 처리해버릴수도 있다.
나무쪽무이로 된 바닥이 이따금 김구의 무거운 몸을 떠이고 삐거덕거리였다.
방안을 무겁게 거닐던 김구는 정시명을 잊어버린듯 벽한가운데에 걸려있는 족자앞에 서서 떠날줄 모른다. 그는 두눈을 부릅뜨고 족자에 박힌 시구절을 오르내리 훑다가 궁글은 목소리로 읊기 시작하였다.
《득수반지 무족기
현애철수 장부아… 허허허.
나무가지를 잡고 발붙일데 없으면 차라리 절벽에서 손을 놓아버리는것이 대장부라…
내 일찌기 모시였던 은사의 가르치심이였는데… 그래그래, 손을 놓아버리는것이 대장부야.
정처장, 70객이 혼란된 시국의 복판에서 어정거리니 될법이나 할 일인가.》
김구는 족자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허구픈 웃음을 터치다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정시명도 김구의 옆으로 다가갔다. 족자의 글을 더듬었다.
김구가 이따금 마음이 심란해질 때면 곧잘 외우는 그의 좌우명이다. 김구가 19살되는 해에 신천군 청계동에서 안중근과 함께 당대의 명망높은 선비였던 고능선의 밑에서 학문을 닦고있을 때 고능선이 손수 지어서 그에게 준것이였다.
정시명은 김구의 동향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련이은 좌절과 실망에 모대기고있는 늙은 호랑이-백범… 무엇인가 운명적인것이 그에게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하는것 같았다.
그가 만약 정계에서 퇴진을 선언해버리면 가까스로 맥을 이어오는 《림정》집단은 녀왕벌을 잃은 벌떼처럼 흩어지고말것이다. 김구를 이러한 운명의 막바지에 몰아넣는것이 미국놈들의 마지막선택일수 있다. 김구가 정치에서 손을 떼면 좋아할것은 미국놈들과 리승만세력이다.
정시명은 때마침 찾아왔다고 생각하였다. 자칫 늦잡았더라면 기회를 놓칠수도 있었다.
김구는 자존심이 강하고 과단성이 있는 반면에 자포자기에 빠져들면 헤여나오기 힘들어하는 성격이였다. 그래서 이따금 모든것을 체념하고 결패있게 마음을 훌훌 털어서 비워버리는 괴벽한 성미를 표출시켜 주변사람들을 아연하게 만들군 한다.
정시명은 불현듯 《림정》이 중국의 장사에 쫓겨갔을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어느날 《림정》이 국무회의를 열어놓고 또 한차례의 언쟁을 벌려놓고있는데 한패거리의 조선청년들이 발길로 대문을 걷어차고 쳐들어왔다.
그들은 경비원들을 주먹으로 쳐눕히고는 다짜고짜 총을 휘둘러 김구쪽으로 총탄을 마구 란사하였다. 그 총탄에 옆에 앉아있던 심복인물인 현묵관이 즉사하고 김구도 부상을 당했다.
동족의 총탄을 받은 김구는 대경실색하였다.
그날 저녁 김구는 부상당한 팔을 한손으로 받쳐들고 잡아들인 청년들앞에 나섰다.
《이눔들, 네놈들이 정히 조선 씨를 받은놈들이 맞느냐?》
김구는 발을 구르며 대청이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질렀으나 청년들은 소영각소리라도 듣는듯 담벽같이 맞서기만 하였다.
《두상! 그래 어쨌단 말이요?》
《네놈들은 분명 고려공산당놈들이 보냈겠다. 이실직고해라.》
《공산당은 무슨놈의 공산당?…》
청년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우린 분명히 왜놈에게 쫓겨온 조선청년들이요. 당신들이 우리 백성들의 피땀이 서린 군자금을 모아가지고 밤낮으로 편싸움만 한다기에 응징을 하려고 했소. 당신도 제명을 다 살고프면 이제라도 〈림정〉이라는 물건짝을 버리고 산골에 들어가 부대기나 일궈먹소.》
《뭣이?! 저눔을 그저…》
청년들의 추상같은 대답에 김구는 억이 막혀 자기 가슴만 텅텅 두드렸다.
《림정》을 하느님처럼 버티고 파란만장의 고난과 시련으로 엮어온 한생이 졸지에 허무하게 느껴져 이제까지 지켜낸 억장이 가슴에서 일시에 허물어져내렸다.
김구는 청년들앞에서 돌연 고개를 푹 꺾고 절통하게 부르짖었다.
《다 풀어주도록 하라. 마땅한 징벌을 받았으니 나도 이젠 너희들 소원대로 속세를 벗어나련다. 절간의 중노릇이나 할테니 이 백범은 세상에 다시 없는줄 알아라.》
그리고는 초연히 사라져버려서 측근들이 산지사방 그를 찾아다녔다.
일후에 그를 복귀시키느라고 정시명이까지 나서야 하였다.
(정말 발붙일데를 잃고 천길나락에 떨어져 정치행각의 파란만장을 끝내려는게 아닐가?…)
그때 일이 떠오르자 정시명은 분연히 벽에서 족자를 떼내였다. 이놈의 시구가 이따금 김구의 정신에 역설로 울리여 그로 하여금 정신적허탈에로 떠미는것만 같았다. 없어서 좋을것이면 일찌감치 없애버리는것이 좋다.
그는 김구의 눈앞에서 족자를 벅벅 찢었다.
김구는 정시명의 돌발적인 행동에 기가 막힌듯 처음에는 눈이 둥그래졌다.
족자로 말하면 수십년세월 마치도 호신부처럼 고이 보관해오며 그와 함께 다난한 세월의 풍파를 겪어왔다.
정시명은 상대가 이러거나저러거나 아랑곳 없다는듯 쪼각난 족자를 창문을 열고 바깥에 던져버렸다.
김구는 입술을 꾹 닫아붙인채 사나운 눈길로 정시명을 노려볼뿐이다.
《백범답지 않습니다.》
정시명의 말투가 상대의 격노한 자세에 또 다른 일격을 가할듯 시퍼렇게 날이 섰다.
《그래 이 나라의 최하층막바지에서 신음하는 백정과 범부들과 고락을 같이 하고저 백범이 되여 뜻을 펼쳐온 선생이 저따위 시구나 읊조리며 한숨을 토할수 있습니까. 왕년에 왜왕을 요정낼 칼을 벼르던 백범이 이럴수 있는가 말입니다. 이건 만백성의 기대를 저버리는것입니다.》
《그러니 날더러 어찌하란 말이요?》
김구는 처절하게 소리를 쳤다. 정시명의 맵짠 입침이 사그라져가던 의기를 예리하게 찌른것이였다.
《겨레앞에 평생을 바치겠노라 했으면 심사가 꼬인다고 초지를 놓아버려서는 안될줄로 압니다. 끝까지 인생을 다듬어야 합니다.》
《그래서?…》
《딴 꿈을 꾸는 놈들이 달아나는것은 불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지금 선생은 자기 주위에 더 많은 사람을 뭉치게 해야 합니다. 고군약졸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리승만이 떠드는 대동단결인가?》
《아니올시다. 시국을 옳게 보고 알맞는 방략과 구호를 내놓아 민심을 모으고 애국을 도모하는 각당, 각파와 손을 잡는것입니다.》
《무슨 말씀… 난 이젠 한물이 진 인간이요. 이 나라 국민이 이제는 백범이 쓸모없다고 등을 돌려버렸소. 나더러 뭐라고들 하는지 아시오. 권력야심에 환장이 된 두상이라 하오. 권력에 눈이 뒤집혀서 양놈들에게 추한 꼴을 보인다는거요. 권력에 미쳐서 백성들 숫보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거요. 정처장, 어디 당신이 좀 말해주오. 내 이 백범이 그래 일흔넷되는 이날이때까지 나라임금되고저 살아왔단 말이요? 엉, 정처장…
말 좀 해주오. 처장의 말이야 언제 그릇됨이 없지 않았소. 내가 정말 권력에 환장이 된 놈으로 보이는가 말이요?》
김구는 정시명의 팔을 쥐여 흔들며 부르짖었다. 방안을 울리는 그 소리가 처절하다. 그것은 이야기라기보다 흐느낌이나 비명에 가까운것이였다.
정시명은 굳어진듯 움직이지 않고 김구의 처진 볼과 울기가 번쩍거리는 눈확을 유심히 지켜볼뿐이였다. 고민에 부대끼는 한 인간의 처절한 모습앞에서 정시명은 고즈넉이 차드는 련민과 동정의 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김구의 다음말을 기다리며 조용히 그를 지켜볼뿐이였다.
정시명이 부동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자 김구는 더욱 격해져서 온몸을 와들와들 떨며 울부짖었다.
《내 요즘 홀로 앉아 70평생을 돌아보군 한다오. 아득한 창해에 물결은 사나운데 돛배 한척 아물거린단 말이요. 억만파도를 천신만고 이겨내고 드디여 가녁에 닿게 되였는데 이미 돛은 찢겨지고 배창은 갈라져 가라앉게 되지 않았겠소. 내 평생이 그렇게 조락이 되는데 그 슬픔을 알아주지 못할망정 협잡군이라는 락인이 찍혀지게 되다니… 아, 허무해, 허무하거든. 고진감래란 다 헛소리야. 고만있고 감은 없는 인생, 백범이 한만 가득 남겨놓고 떠나게 됐은즉 세상이 너무 야하단 말이요.》
김구는 이렇게 소리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창문가로 비칠거리며 다가갔다.
정시명은 자기도 이름할수 없는 비분에 떠밀려 자리에서 성큼 일어났다.
그리고 비칠거리는 김구를 쫓아가 그의 한팔을 잡았다. 피줄이 동아줄처럼 굵은 그의 손목을 더듬어잡으니 가슴을 옥죄이는 아픔을 안고 툭탁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피에 절은 절규마냥 정시명의 가슴에도 절절하게 전해졌다.
(이것이 백범이다. 그래 이것이 백범이다. 백범의 심장이 달리야 뛸수 있는가.)
정시명은 속이 일컥일컥 달아올랐다. 전생을 우국충정으로 살아오는 백범을 다시 찾아보는것이 기쁘고 행복스러웠다. 진정을 고여 쓰라린 상처를 애무해주고싶다.
《백범선생, 너무 흥분마십시오. 한생토록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울여온 백범의 로심초사를 어떻게 그처럼 가혹하게 단언하십니까. 들려오는 소리는 백성이 주는 회초리로 받아주십시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백범은 기어이 권력을 잡으려 한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것만이 국민을 위함이라고 판단하였기때문이다, 권력을 잡아야 일본놈들로부터 빼앗아낸 이 나라의 국권을 다질수 있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펴서 국민이 복락을 누리는 나라를 세울수 있기때문이다, 백범은 바로 이것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것이다.… 어떻습니까?》
정시명의 이야기가 깊어지자 김구의 안색이 달라졌다. 어둑침침하던 낯빛이 밝아지고 눈이 커지고 입도 저절로 크게 벌어졌다. 울기가 돋혀있던 두눈에 환희의 불꽃이 확 피여올랐다.
《그게 참말이요?》
그것은 탄성이였다. 비명처럼 어쩔새없이 튀여오른 그런것이였다.
정시명은 빙그레 웃을뿐이였다.
《그게 참말이겠소?》
김구가 기어이 대답을 들어야 하겠다는듯 다시 물었다.
정시명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이 사람이 정말 참말을 하는가?)
김구는 정시명의 눈길을 슬며시 외면하며 입안소리로 웅얼거리였다.
《음-》
김구는 이렇게 신음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고는 방안을 젊은이들처럼 힘있게 오락가락하였다. 그러다가 걸음을 뚝 멈추고 정시명을 넋이 나간듯 바라본다.
넓게 벗어진 이마, 숱진 눈섭밑에서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 눈망울,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알맞는 체구지만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고 억세여보이는 사나이다. 꾹 다문 입술은 다시는 열릴것 같지 않게 반석같이 무거워보인다. 안팎이 없는 진실을 그 입속에 묻어놓고있는듯싶다.
이제까지 이 사나이를 여러번 만났는데 그때마다 좋기는 해도 다른 인상을 주어서 잘 가늠이 안가던 사나이다. 어떤 때는 드팀이 없을것 같은 무쇠같은 인간으로, 어떤 때는 사나운 파도를 한몸으로 막아나선 거인같은 인간으로, 어떤 때는 절해고도에서도 길을 헤칠줄 아는 비범한 인간으로, 어떤 때는 지극히 선량하고 정직하고 아량있는 친구로 되여주던 사나이다.
그 인간이 지금 그 빛나는 눈에 류달리도 따뜻한것을 담고 자기의 아픈 마음속을 어루만져주며 헤아려주는것이다. 가물가물 사그러져가던 삶의 의미를 다시 등불처럼 빛나도록 해주는것이다.
아, 이 험한 세월에 누가 이처럼 내 진속을 알아주랴.
부지불식간에 김구가 그 거구를 허물어 뜨리며 마루우에 넙적 엎드린다. 그리고는 《정처장, 내절을 받아주소.》하고는 흑-하고 오열을 터뜨려놓았다.
늙은이의 투실투실한 어깨가 마루우에서 세차게 오르내리기 시작하였다.
왕년에 눈에 쌍심지를 켜달고 왜놈을 족치고 사형수감방에서도 눈섭 한오리 까딱 흔들리지 않던 70객 늙은이의 몸부림과 오열을 당하자 정시명은 당황하기까지 하였다. 놀랍고 가슴이 아팠다. 김구의 마음속고통이 어느 정도에 와닿았는가 하는것이 헤아려져 머리가 깊이 숙여졌다.
정시명은 《백범선생, 고정하십시오.》하며 무릎을 꿇고 그를 안아일으켰다. 정시명은 그를 부축하여 쏘파에 앉히고 그옆에 나란히 앉았다.
《처장이 어째서 이제야 날 찾아왔소?…》
정시명이 옷걸이에서 수건을 벗겨주자 김구는 그제야 눈물이 질벅한 얼굴을 꼼꼼히 닦아냈다.
《난 혼자 있고싶소.… 아니아니, 가지 말아주오. 내 좀 말합시다. 도대체 처장은 어떤 사람이시우?》
《저야 뭐… 허허허.》
정시명이 소리내여 웃었다.
《그래그래, 내 그걸 몰라서 묻는게 아니요. 당신이야 공산주의자가 아니지. 그럴 사람이 아니요. 그렇게 되여서는 안되오.》
《허허…》
《처장, 날 대신해서 림정을 맡아주오. 내 처장이 우리 림정을 맡아주겠다면 오늘안으로 한독당회의를 열겠소.》
《원, 그러지 마십시오. 백범이자 림정이요, 림정이자 백범인데 그걸 제게 넘겨주다니요.》
《그 말은 옳소… 그렇소. 이 백범은 림정이요, 림정은 국민이요. 그래서 내 림정에 들이닥치는 오는 바람가는 바람 다 막으며 버티고선거요.
그런데 그 유다같은 무리들이 이걸 알아주는가. 그래 내 이제 룡상을 타고앉으면 묘자리에 끌고가겠소? 권력에 환장했다니 그게 무슨 당치않은 수작들인가. 내 이 나라의 주인자리에 올라앉는다면 그 이튿날로 젊은 사람에게 내자리 이어주고 속세에 묻혀버릴 작정을 골백번 하고있소. 하지만 이 서울땅에 지금 누가 림정의 법통을 이어받아 국민을 다스려내겠소.
리승만은 미국이요, 미국은 외세요. 그놈들 하는짓이 어느 하나 이 나라 위한게 있는가. 내가 물러나면 리승만이 어렵사리 정권을 가로챌거란 말이요.
북의 공산화를 용납하면 북이 또 쏘련의 위성국이 될거요. 그러면 북도 남도 다 외세에 붙어살겠으니 우린 다시 독립전을 벌려야 될게 아닌가.
수만 안중근의 선혈이 물로 흐르고 렬사들의 피가 강을 이룰것이란 말이요.
그러니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운명을 두고 이 김구가 미국놈들에게 추한 꼴 보이면 어떻고 내 하나의 지조요, 명예요 돌보게 됐나 말이요. 정치하는 사람 어찌 웃고싶다 웃을수 있고 울고싶다 울수 있소. 모든걸 흔연히 참고견디는거요. 그런데 이젠… 나도 진했소, 진했거든. 사생결단하고 날 따라오던 동지들마저 날 알아주지 않으니 내 어찌 대사를 도모해나가겠소. 그러니 부디 곱씹는데 정처장이 나를 믿어 일하다가 나를 이어 상해림정을 돌봐주오.》
《선생님, 나라와 인민을 위해 초지일관한 선생님께 이 나라 백성의 한 사람으로 다시금 감사를 드리고싶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솔직담백한 말씀에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의 고원한 뜻이 빛나도록 나도 힘껏 돕겠습니다.》
정시명은 진심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여 사의를 표하였다. 정시명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정히 나의 자문을 바라신다면 우선 이런 의견을 드리고싶습니다.
민심에 역행말고 민심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남북삼천리에 분명한 국민의 웨침은 외군을 몰아내고 남북이 총선거를 하며 통일정부를 세우자는것입니다.
이 서울에서는 좌익세력은 물론 〈정당협의회〉에 소속된 애국적인 민족주의집단들이 다 이 구호를 걸고나섰습니다. 이에 도전하는 세력이 어떤 집단인가 하는것은 백범선생이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백범선생도 〈정당협의회〉에 참여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방식이 매우 복잡하다는것은 저도 리해합니다.
그렇다해서 일생을 지켜온 마음의 기둥을 허물어서는 안될줄로 압니다. 당파에 따라 뜻을 달지 말고 뜻에 따라 당파를 가려야 합니다. 나는 선생의 립장에 뜨거운 공감은 가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재고할 여지가 있다는데 대하여 숨기지 않으렵니다. 될수록 빨리 미국과 리승만과의 정책적차이를 선명하게 하는 정견이 선언되여야 합니다.
권력문제에서도 외세의존은 망국이고 사대주의는 치욕이라는것이 지난날의 공리공담으로 되여서는 안됩니다. 지금이야말로 이 주장을 더 높이 추켜들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선생의 리념과 주장에 가까운 세력이라면 모든것을 초월하는 아량을 보여야 합니다.》
사리정연하고 애국의 열이 풍기는 정시명의 이야기에 김구는 한마디의 론박도 하지 못하였다. 다만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할따름이였다.
김구의 집에서 돌아오는 정시명의 걸음은 사뭇 가벼웠다. 그 인간의 뿌리, 아름답고 결바르고 아직도 싱싱한 그 뿌리를 확인한것이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백범은 백범이다. 그 인간이 이 나라의 통일력사에 아름답게 새겨지도록 최선을 다하자.)
며칠후 정시명은 김구에게 새로 족자를 마련하여 선물로 보냈다.
거기에는 다음의 시구가 정중한 필체로 새겨져있었다.
득민심 득천하
실민심 실천하
그것은 김일성장군님의 뜻이였다.
지난해 장군님께서는 정시명의 손목을 꼭 잡으시고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고 민심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는것이 자신께서 지켜가는 평생의 좌우명이라시며 통일운동에서도 민심을 중시하라고 다심하게 일깨워주시였던것이다.
마침내 김구는 오래동안의 진통을 끝장내고 서울시안의 신문, 방송의 보도기자들을 경교장에 불러들였다.
그는 1층응접실에 발옮길 자리없이 꽉 들어찬 출입기자들앞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쏘미량군동시철거와 남북총선거를 실시할데 대한 자기의 립장을 엄숙하게 선언한다고 웅글은 목소리로 선언하였다. 그리고는 안우생이 초를 잡은 《남조선동포들에게 보내는 격문》을 자뭇 장중하게 발표하였다.
그는 자기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 …
미군주둔연장을 자기네의 생명연장으로 인식한 몰지각한 도배들은 국가와 민족의 리익은 념두에 두지 않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없이 통일정부수립을 두려워하고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과 권세를 추구하여 단독정권을 세우는데는 결사반대한다.… …》
정견발표가 끝나자 김구는 《한독당》의 이름으로 《정당협의회》의 취지를 승인하고 거기에 참가할것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김규식도 《민족자주련맹》이 정식으로 《정당협의회》에 망라되여 《단선단정》을 배척하여 일로 매진할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렇게 되여 남조선정계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있는 13개의 정당이 하나의 세력으로 련합되였다.
정시명은 여기에 《13정당협의회》라는 이름을 붙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김구, 김규식의 방향전환을 환영하는 모임을 성대히 열어놓고 《단선단정》을 절대반대하며 쏘미량군의 동시철수와 남북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수립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여 세상에 공개하였다.
이것은 《단선단정》음모에 박차를 가하고있던 미국놈들의 막후책동에 커다란 타격으로 되였다.
이에 대하여 남조선에서 출판된 《한국정당발달사》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있다.
《남조선단독선거에 대하여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진영의 각 단체는 열광적으로 환영하였으나 좌익계렬은 전적으로 반대하였다. 뿐만아니라 우익진영에서도 남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13개의 우익중간정당들의 모임인 〈13정당협의회〉가 〈단독선거〉반대를 결의한것이다. 이 모임에는 김구의 〈한독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련맹〉도 늦게나마 참가하였다. 〈단선단정〉을 지지하는 세력은 약화되여 보잘것 없는것으로 되였다. 〈단선단정〉의 합법성을 일관하게 추구하여온 미군정은 참으로 진퇴량난의 곤경에 빠지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