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금문자 《김 일 성 1994. 7. 7.》
주체83(1994)년 7월 7일 려명을 앞둔 짙은 새벽어둠에 대조되게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집무실창가에서는 여전히 밝은 불빛이 쏟아져나오고있었다.
집무실에서 꼬박 한밤을 새우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하건만 문건을 보시는 그이의 모습에서는 피로감보다는 환희, 열정의 불이 일어번지는듯싶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그이께서 그렇듯 커다란 흥분을 안으시고 자자구구 따져보시며 사색의 심연속에 한장 두장 번져가시는 부피두터운 문건은 다름아닌 바야흐로 눈앞에 다가오고있는 북남최고위급회담과 관련한 문건이였다.
민족이 분렬된지 50년을 한해 앞두고있는 이해의 이달에 북남최고위급회담이 열리게 된다. 이제 18일후에 민족분렬이후 처음으로 북과 남의 수뇌들이 마주앉아 민족의 운명문제, 통일문제를 두고 진지하게 상론하며 결단을 내려야 하였다.
북남최고위급회담은 지나온 모든 년대기들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향해오신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과 남의 수뇌들이 마주앉는것은 민족의 중대사로서 통일을 위한 실제적인 조치를 념두에 두어야 한다고 보시였다. 마주앉아 겉발림소리나 하고 차나 마시며 한담이나 하는 상봉, 민족앞에 그 어떤 희망도 안겨주지 못하는 그런 상봉은 백번 해야 소용없다는것이 그이의 지론이였다.
김영삼은 집권하면서 북남최고위급회담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수 없다.》고 하면서 《백두산과 제주도 그 어디에든 가리지 않고 남북정상이 만나 통일문제를 허심탄회하게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지난 기간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덕을 많이 입은 사람이였다. 그가 민주화투쟁에 나서서 활동할 때나 정치적으로 어려운 고비를 겪을 때마다 북이 보낸 지지와 련대의 목소리들은 다 위대한 수령님의 뜻이였다. 정치인으로 자처하며 《대통령》감투까지 쓴 그가 그것을 모를리 없겠건만 언제 한번 감사의 마음을 비친적이 없었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좋게 해석하시고 일정한 기간 그의 행동거지를 지켜보시였다. 그런데 그 역시 자기를 《대통령》자리에 앉혀준 미국에 머리를 조아리며 은혜갚음에 동분서주하는 친미사대분자일따름이였고 그의 민주화투쟁경력이란 《대통령》감투를 뒤집어쓰기 위한 지참품에 불과한것이였다.
그가 집권하면서 북남최고위급회담의 문을 두드려댄것도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심을 낚기 위해서였다.
김영삼은 집권이후 미국, 일본과의 공조를 떠들며 반공화국적대시정책실현의 앞장에 서서 조선반도정세를 전쟁접경에까지 끌고감으로써 반공화국대결광신자로서의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놓았다. 그러면서도 제입으로 뱉아놓은 말도 있는지라 북남관계에 있어서는 줄타기를 하였다.
당시 미국은 랭전종식과 더불어 국제무대에서 힘의 균형이 파괴된것을 기화로 《유일초대국》으로 자처하며 힘에 의한 세계의 지배를 실현하는데 박차를 가하면서 사회주의보루이고 반제자주력량의 기수이며 저들의 세계지배질서수립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강력한 력량인 사회주의조선을 제압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만전쟁을 계기로 기고만장해진 미제는 공격의 화살을 공화국에 집중하면서 공화국에 대한 집단적인 제재를 가하겠다고 위협공갈하는 한편 이미 중지했던 《팀 스피리트》합동군사연습을 재개한다는것을 공포하고 20여만의 대병력과 현대적대량살륙무기들을 동원하여 사상최대규모의 《팀 스피리트93》합동군사연습을 벌리였다. 미국과 합세하여 남조선의 호전세력이 강행한 《팀 스피리트 93》합동군사연습은 조선반도의 핵위기를 극한점으로 몰아가고 어느 시각에 전쟁이 터질지 모를 일촉즉발의 초긴장상태를 조성하였다.
세계는 불안과 위구속에 조선이 《유일초대국》의 횡포한 핵공갈과 전쟁책동에 어떻게 대응할것인가를 주시하였다.
무비의 담력과 드센 배짱을 지니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적들의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맞서나갈 대용단을 내리시고 1993년 3월 8일 전국, 전민, 전군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시였으며 그리고 나흘후에는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공화국정부성명을 발표하도록 하시였다.
군사적압력과 핵압력소동으로 공화국을 굴복시켜보려고 날뛰던 미제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취하신 단호한 조치에 된타격을 받고 군사연습을 기일을 앞당겨 중지하지 않을수 없었다.
바로 이처럼 엄혹한 정세속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의 단합으로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고 평화와 평화통일의 앞길을 개척해나가시기 위해 그해 4월에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회의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을 제시하시였으며 그후 조국통일을 위한 중대사들을 포괄적으로 풀어나갈수 있는 획기적인 조치로서 남측에 북남최고위급의 특사교환을 제의하도록 하시였다. 이것은 남조선의 집권자에게 있어서 자기의 죄를 씻을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은 공화국의 이 아량있는 제안과 온 민족의 통일념원을 외면하고 민족자주가 아니라 계속 외세의존의 길, 북남대결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을뿐아니라 남조선의 각 정당, 단체대표들, 각계 인사들에게 보낸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이 담겨진 공화국의 편지를 전달해주지조차 않았다.
한편 제국주의반동세력은 반공화국압력소동을 계단식으로 확대함으로써 조선반도정세는 최악의 국면에 이르게 되였다. 국제원자력기구서기국은 1994년 6월 10일 기구관리리사회회의에서 공화국의 군사대상들을 개방할것을 요구하면서 조선에 대한 《기구협조를 중단》하는 천만부당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것은 명백히 공화국에 대한 기구의 제재였다. 이 부당한 처사는 공화국의 존엄과 자주권에 대한 엄중한 침해였다.
이에 대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6월 13일 국제원자력기구로부터 즉시 탈퇴한다는것을 천명하였으며 제재는 곧 공화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한다는 립장을 재확인하였다.
공화국의 국제원자력기구탈퇴선언은 자기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정정당당한 자위적조치였으며 제국주의반동들과 기구의 불순계층에게는 심대한 타격으로 되였다.
세계의 공정한 여론은 조선에 제재를 가하려는 제국주의세력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였으며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할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온 겨레는 분렬이 50년을 넘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있었지만 현실은 이렇듯 너무도 엄혹하였다. 제국주의자들의 가증되는 고립압살책동속에 북남사이에는 오해와 불신, 반목과 대결이 그 어느때보다도 첨예화되고있었다.
평화냐 전쟁이냐, 통일이냐 민족의 공멸이냐, 우리 민족은 이 두 길중의 하나를 택하여야 했다.
바로 이러한 때인 주체83(1994)년 6월 중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양을 방문한 미국 전 대통령 지미 카터를 두차례에 걸쳐 접견하시고 호상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진지한 담화를 하시였다. 카터는 공화국을 방문한 후 조미사이의 직접대화가 재개될것이며 핵문제를 둘러싼 모든 문제들이 순조롭게 풀려나갈수 있을것이라는 확신을 표시하고 조선에 대해 제재조치를 취하는것은 매우 심각한 오유로 된다는것을 강조하였다.
6월 22일 미국대통령 클린톤은 유엔안보리사회에서의 공화국에 대한 제재론의를 정식 철회하고 미국이 제3단계 조미회담에 나서겠다는것을 밝히였다. 련이어 조미사이에 일련의 실무적교섭들이 진행되고 1994년 7월 8일 제3단계 조미회담을 제네바에서 시작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세기류의 급격한 변화에 급해맞은것은 남조선당국이였다. 김영삼은 상전으로부터 소외된 궁색한 처지에서 벗어나는 출로를 북과의 대화에서 찾고 평양을 찾아가는 카터에게 자기의 의사를 밝히였다.
민족분렬의 력사를 반세기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것이 위대한 수령님의 확고한 지론일진대 그러자면 그야말로 큰 결단을 내려야 했으며 바로 지금이 그러한 력사의 순간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과 남 수뇌들의 최고위급회담개최가 우리 민족의 최대의 숙원인 조국통일의 전환적계기가 될것을 내다보시고 남측당국자의 속심이 어떻든 그와 마주앉기로 결심하시였다.
어느덧 어둠을 밀어내며 사위가 밝아오고있었으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시였는지 여전히 문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시였다.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북남최고위급회담의 개최, 남측의 《대통령》을 비롯하여 수원 100명, 취재기자 8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대표단의 평양체류…
이것은 전례없는 일이였다. 1948년 4월 남북련석회의때도, 1970년대에도 고위급정치회담이나 적십자회담 등으로 남쪽에서 여러 기회에 사람들이 드나들었지만 단꺼번에 180명씩이나 들어왔던적은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모두를 혈육의 정으로 따뜻이 대해주고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이미 여러차례 강조해주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신듯 세부적인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깊이 관심하시며 문건을 하나하나 검토해나가시였다.
외세가 몰아오는 핵전쟁의 불구름을 가시고 북과 남이 힘을 합쳐 조국통일을 이룩할 방도들이 바로서있는지, 반세기동안 쌓여온 겨레의 숙원이 제대로 반영되여있는지, 오늘의 세대는 물론 후대들의 행복한 앞날까지도 담보되여있는지, 설정된 문제들에 사상과 리념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접수될수 있는 최선의 합리적인 해결책이 강구되여있는지를 일일이 검토하시면서 자자구구에 담겨진 미세한 의미까지도 깊이 헤아리시여 구체적인 대안까지 밝혀넣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색과 로고는 정녕 끝이 없었다.
그이께서는 품을 들여 북남최고위급회담에 참가할 남측대표단의 한사람한사람에 대해 료해하시였다. 이제 그들과 만나시면 누구와는 어떤 문제를 론하시고 누구에게서는 어떤 문제를 알아보실것인가 등을 생각하시며 사색의 세계를 펼쳐가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심중에서는 벌써 최고위급회담이 진행되고있었다. 과거 수십년동안 이루어지지 못한 최고위급회담을 근 50년만에 성사시키는데 이르렀으니 그것을 계기로 반세기동안이나 지속되여온 북과 남사이의 반목의 력사를 민족대단결의 력사로, 분렬의 력사를 통일의 력사로 바꾸는 위대한 새 민족사를 창조해야 할것이다.
쌍방이 다같이 민족자주정신과 민족적립장에서 출발한다면 북과 남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부합되게 능히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서로 화해하고 단결할수 있으며 단결된 민족주체적힘으로 난국을 타개하고 온 겨레가 념원하는 통일과 번영의 령마루에 올라설수 있을것이다.
마침내 문건을 완성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앞으로 도래할 조국통일대사변의 시각을 예감하시며 펜을 드시고 온 겨레의 통일지향의 무게를 담아 력사적문건에 힘주어 서명하시였다.
《김 일 성 1994. 7. 7.》
그이께서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시였다. 순간 아침해살이 쏟아져내리며 위대한 수령님께서 서명하신 문건을 밝게 비쳐주었다.
활달한 필치의 존함과 흰종이우에서 유난히 빛나는 수자들에 위인의 철석의 통일의지가 어리여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에야 비로소 한 일군이 방에 들어와 다소곳이 서있는것을 보시였다. 이어 그이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우리 겨레가 일일천추로 고대하던 조국통일은 바야흐로 눈앞에 다가왔소.》
확신과 신심에 찬 어조로 말씀하시는 그이의 안광에는 격정의 빛이 력연하였다.
통일을 결심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근엄한 모습을 우러르는 일군의 심장은 걷잡을수 없이 고동쳤다.
《김 일 성 1994. 7. 7.》, 정녕 그것은 반세기를 가까이 하는 민족분렬이 드디여 끝장나고 이제 곧 통일이 온다는 력사의 선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에게 조국통일은 자신께서 우리 인민에게 줄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조국통일의 대사변을 맞이할 준비를 빈틈없이 갖추어나가야 하겠다고 이르시였다.
그런데 조국통일문건에 활달한 필체로 친필을 남기신 이 아침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맞으신 마지막아침이 될줄을 어느 누가 알았으랴.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가 북남최고위급회담의 개최를 크나큰 격동속에 기다리며 그 준비를 다그치고있던 주체83(1994)년 7월 8일 2시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신 김일성주석께서 급병으로 서거하시였다.
망극지통의 아픔에 온 민족이 오열을 터뜨리고 온 나라가 그대로 추모장으로, 온 강산이 일시에 눈물의 바다로 변하고말았다.
통일이 오다가 갔단 말인가. 수령님은 곧 통일이고 통일은 곧 수령님이시였는데 통일의 날을 정해놓다싶이 하시고 정녕 그이께서 가셨단 말인가. 믿을래야 믿을수 없고 그렇다고 안 믿자니 부인할수 없는 현실이였다.
한평생 통일을 위해 바쳐오신 수령님께서 통일을 눈앞에 둔 이때 가셨다는것을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믿고싶지 않았던 그만큼 가슴속아픔은 헤아릴수 없이 큰것이였다.
바로 이러한 때 공화국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의 명의로 북남최고위급회담을 사정에 의하여 일단 연기한다는 전화통지문이 남측에 공식 통고되였다. 여기에는 참으로 가슴뜨거운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크나큰 상실의 아픔을 금치 못하시며 한 일군을 조용히 찾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절절한 음성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북남최고위급회담을 위한 문건을 보시고 1994년 7월 7일 날자와 존함을 활달한 필체로 쓰신것이 마지막 비준문건이라고 하시면서 수령님께서 마지막으로 비준하여주신 귀중한 문건을 잘 보관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마지막으로 비준하여주신 조국통일관계문건을 민족만대에 길이 전해갈 귀중한 국보로 잘 보관할데 대한 그이의 간곡한 당부에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나라의 통일문제때문에 온갖 심혈을 다 바쳐오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조국통일령도업적을 철저히 고수하고 영원히 빛내이시려는 드팀없는 신념과 숭고한 뜻이 어려있었다.
이렇듯 숭고한 통일의지를 지니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수령님께서 서거하시였다는 중대보도가 나간 7월 9일 북남최고위급회담의 유효성을 선포하도록 해당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당시 일군들은 이제는 북남최고위급회담을 할수 없는것으로 생각하고있었다.
그러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을 잃은 크나큰 상실의 아픔속에서도 북남최고위급회담의 운명과 전도를 두고 깊이 생각하시였다. 그이의 심중에는 그토록 환희에 휩싸여 기대와 희망을 안고 기다려온 북남최고위급회담문제를 놓고 겨레가 받게 될 좌절감과 실망감이 가슴아프게 새겨지고있었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북남최고위급회담준비를 중단하고 손맥을 놓고있는 관계부문 일군들에게 북남최고위급회담과 관련한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회담을 일단 연기할데 대한 전화통지문을 남조선당국에 보내도록 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북남최고위급회담의 유효성을 알리는 공화국의 중대조치가 전화통지문을 통해 남측에 공식 통고되게 되였던것이다.
북남최고위급회담의 유효성을 천명한 공화국의 중대조치는 정세가 어떻게 변하고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든 위대한 수령님의 유훈을 받들어 민족최대의 숙원인 조국통일성업을 반드시 이룩하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통일의지를 내외에 엄숙히 선포한것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 수령님서거 100일 중앙추모회가 거행된 1994년 10월 16일과 그해 12월 10일, 12월 19일 그리고 이듬해 1월 1일을 비롯한 여러차례의 말씀들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위업을 계승완성하며 수령님의 유훈을 관철하는데서 조국통일을 이룩하는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시며 조국통일의 확고한 의지를 밝히시였다.
그것은 민족의 어버이를 잃고 몸부림치던 7천만겨레에게 새 힘과 용기를 안겨주고 삼천리강산에 통일의 열풍을 안아온 거대한 힘으로 되였다.
그때로부터 여섯해가 지난 2000년 6월 온 겨레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력사적인 북남수뇌상봉이 이루어졌다.
그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남측 김대중대통령과 그일행에게 김일성주석님께서 생존해계셨더라면 제가 아니라 우리 주석님께서 김대통령을 맞아주셨을것이라고, 사실 북남최고위급회담은 주석님께서 생존해계실 때 실현하시려던것이였다고, 주석님께서 북남최고위급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고령의 몸으로 온갖 로고와 심혈을 다 바치시였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반세기를 넘는 분렬사에 처음으로 진행된 력사적인 북남수뇌상봉소식과 민족의 통일강령인 6. 15북남공동선언을 받아안으면서 온 겨레는 해방후부터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오로지 민족의 통일을 위해 그토록 마음쓰시던 김일성주석의 그 로고와 심혈이 되새겨져 가슴뜨거움을 금치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생전에 가장 현실적이고 공명정대한 조국통일원칙과 방도를 제시하시여 나라의 통일문제해결의 휘황한 진로를 밝혀주시고 조국통일의 강력한 주체를 마련하시여 조국통일운동을 전민족적운동으로 확대발전시키신것은 그이께서 조국통일운동사에 쌓아올리신 가장 빛나는 업적이며 우리 민족에게 넘겨주신 고귀한 유산이다.
그 고귀한 유산이 있어 그처럼 복잡다단하고 엄혹한 시련이 겹쳐드는 속에서도 그리고 세계《유일초대국》을 대상으로 하여 벌리는 장기간의 치렬한 대결전속에서도 조국통일을 위한 우리 민족의 투쟁은 자주의 길을 따라 승리적으로 전진하여올수 있었으며 온 겨레가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밑에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에로 나아가는 6. 15통일시대가 펼쳐지게 되였던것이다.
오늘 력사의 고장 판문점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통일업적을 길이 빛내이기 위해 세운 친필비가 세워져있다.
1995년 8월 11일에 제막된 친필비는 기본주제부분인 비문판과 목란꽃장식부분으로 구성되였다. 비돌의 총너비는 영원히 잊을수 없는 1994년을 의미하여 9. 4m로, 비문판의 너비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생의 마지막 친필존함을 남기신 력사의 날인 7월 7일을 상징하여 7. 7m로 되여있다. 목란꽃장식부분에는 김일성주석께서 탄생 82돐을 맞으시는 해에 불멸의 친필을 남기시였다는것과 그이를 민족의 태양으로 영원히 높이 우러러모시고 끝까지 따르려는 온 겨레의 티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과 드팀없는 신념을 반영하여 82개의 목란꽃송이가 부각되여있다.
비문판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고귀한 생애를 마치시기 하루전날에 친히 조국통일관계문건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김 일 성 1994. 7. 7.》이라는 글발이 그이의 필체그대로 새겨져있다.
그리고 비문판아래 목란꽃장식부분 웃단에는 《민족분렬의 비극을 가시고 조국통일성업을 이룩하기 위한 력사적문건에 생애의 마지막 친필존함을 남기신 경애하는 김일성주석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뜻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가리》라는 비문이 새겨져있다.
주체85(1996)년 11월 24일 판문점을 찾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성업에 바치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업적과 애국애족의 뜻이 어린 친필비를 오래도록 바라보시면서 우리는 수령님의 념원과 의지대로 조국을 반드시 통일하여야 한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참으로 판문점의 통일각앞에 세워진 친필비는 우리 인민에게 주실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조국통일이라고 하시며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과 민족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온갖 로고를 다 바쳐오신 김일성주석의 빛나는 령도업적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며 그이의 조국통일유훈을 끝까지 실현하고야말려는 전체 조선민족의 드팀없는 의지를 담아 세운 불멸의 기념비이다.
언제인가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수령님의 한평생은 참으로 지난날 항일혁명투쟁시기를 제외하면 해방된 조국땅에서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전생애를 바쳐오신 로고의 력사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일군들은 통일때문에 로고하시다 가신 수령님을 생각해서라도 조국통일사업을 잘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후에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는 우리 시대에 어떻게 하나 조국통일을 이룩해야 합니다,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는것은 수령님께서 그처럼 바라시던 해방후 50년간의 념원이였습니다, 이것은 수령님의 유훈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시대에 수령님의 이 유훈을 반드시 실현하여야 합니다라고 힘있게 말씀하시였다.
오늘 북과 남, 해외의 모든 동포들은 6. 15공동선언의 기치를 높이 들고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통일유훈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고있다.
조국통일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으나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밝혀주신 조국통일3대헌장이 앞길을 밝혀주고있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마련된 조국통일의 만년토대가 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또 한분의 천출위인이신 경애하는 김정은장군님께서 계시여 전체 조선민족이 하나의 강토에서 복락을 누리며 통일강성대국만세를 목청껏 부를 감격의 그날은 반드시 오고야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