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출진전야

 

5

김정필의 장례를 치르고난 정시명은 안지생을 따로 불렀다.

《지생이도 서울로 떠나야겠소.》

정시명은 발갛게 상기된 안지생의 애리애리한 볼을 응시하며 조용히 말을 뗐다.

《알겠습니다.》

안지생은 벌써 정시명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얼굴에 그 인상깊은 웃음을 벙싯 담으며 짤막히 대답했다.

《먼저 상해에 들려보오. 상해에서 서울로 아직 못 간 김구의 측근들을 다 모아가지고 떠나오. 김구는 광복전에도 망명한 민족주의자들의 두령노릇을 하였지만 앞으로도 남조선사회의 두령노릇을 하자고 덤빌거요. 물론 미국놈들이 김구의 완고한 민족성을 좋아할리는 없지만 김구와 그의 측근들이 앞으로 남조선사회의 주요명맥을 틀어쥐리라는것은 명백한 일이요. 그러니 지생의 위치가 아주 중요해. 지금 단계에서 지생의 임무는 그들과의 련계를 긴밀히 가지는거요. 그들을 지금부터 우리의 영향으로 포섭하는것은 현실성이 없는 모험이요. 조급성은 금물이야. 내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야 우리의 싸움은 오래 갈것 같구만.》

《명심하겠습니다.》

안지생은 령리해보이는 두눈을 반짝이며 짤막히 대답을 남기고는 인차 상해로 떠나갔다.

정시명의 머리에는 이미 안지생이 김구를 대표로 하는 우익민족주의세력안에 장차 뿌리를 내릴 조직의 책임자로 내정되여있었다. 정시명은 그전에도 김구의 비서로 안지생의 형인 안우생을 붙여주어 그들이 반일의 길에서 탈선되지 않도록 마음을 써왔다.

안지생이까지 조국을 향해 출발시키자 정시명은 그동안의 사업정형을 전우들과 함께 총화하였다.

10월 중순에 이르러 귀국을 원하는 교민들이 거의 조국으로 돌아갔으므로 《한교사무처》의 기본임무도 종결된셈이였다.

서울로 돌아가는 교민들을 매번 정시명이 바래주군 하였다. 그들은 몸성히 돌아와 서울에서 꼭 다시 만나자고 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떠나가군 하였다.

드디여 총화모임에서는 《한교사무처》를 해산하고 그 성원들도 귀국하기로 론의되였다. 모두가 숙연하면서도 환희에 넘쳐 귀국에 대한 정시명의 의향을 지지해나섰다.

정시명은 곧 김송일을 만나 조국에 돌아갈 의향을 내비치였다.

김송일은 두말안팎에 《그렇게 하시오다. 나도 인차 뒤따라 돌아가겠소.》하고 대답하였다. 김송일이 인차 뒤따르겠다는 말에 정시명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김형이야 장개석총통의 신임이 있는분이니 피난민들과 함께 떠나서야 안되지요. 내 소견에는 장개석의 보증을 받아가지고 남조선에 귀국함이 어떠시겠소. 조국에 돌아가서도 김형이야 소일거리에 묻혀살분이야 아니지 않소.》

김송일은 처음에는 자기도 한시바삐 서울에 가고싶다고 하였다. 앞서 들어간 어중이떠중이들이 권력의 노란자위는 다 삼켜버리는것 같아 마음이 들떠지고 급해났던것이다.

정시명이 그의 속궁냥을 넘겨짚었으나 시치미를 떼고 자기가 이미 세워놓은 김송일의 운명선에서 리탈되지 않도록 타이르기 시작하였다.

《김형, 내 말을 새겨들어주시오. 김형의 곧은 성미(정시명은 김송일의 우직하고 단순한 성미를 이렇게 불렀다.)를 가지고 서울에 지금 곧바로 들어가야 저마다 제노라고 각축전을 벌리는 권력싸움에서 밀려나기가 십상이요. 그러니 내 생각에는 정치구조가 완비될 때까지 총통과의 교분이나 더 두터이하다가 지레 공직을 얻어가지고 들어서는것이 바람직하오.》

평소에 정시명의 말이라면 조건없이 받아들이는데 습관되여온 김송일은 정시명이 다심하게 조언을 주자 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정향선생, 나를 그렇게 믿어주어 고맙소다.》

김송일은 인차 《한교사무처》의 해산을 선포하고 장개석이 둥지를 틀고있는 난징으로 가서 장개석의 국방부 고문으로 취임하였다.

정시명은 출발에 앞서 《한교사무처》성원들을 다 모여놓고 그동안의 수고를 치하하고는 각자 자기 갈 길을 가라고 하였다.

모두가 정향선생을 따라가겠다고 나서는데 김송일이 데려왔던 리창순만은 주저하는 기색이였다.

정시명은 어쩐지 그를 마주할 때마다 믿음이 덜 가고 목덜미에 송충이 기여오르는듯 섬찍하고 께름한 인상을 받아오군 하였다.

그래서 《리군은 백계로씨야인식당에 취직을 한다던데…》하고 그가 내키는대로 마음을 정하라고 일렀다.

정시명은 리창순이 어느새 심양 번화가에 있는 백계로씨야인이 경영하는 고급식당에 인수원자리를 하나 마련하였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리고 그 식당의 접대원과 정분을 나누고있다는것도 알고있었다.

《그런건 아니구…》

리창순이 그동안 함께 지내온 동료들앞에서 죄의식을 느꼈는지 얼굴이 벌개서 입속말로 웅얼거리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정작 일행이 떠나게 되자 자기도 같이 움직이겠노라 결심을 바꾸었다.

정시명은 그의 말이 반갑기도 해서 고향을 떠나온지 10년이 가까워온다는 사람이 돌아갈념을 하지 않은데 대하여 따끔하게 이야기하여줄가 하다가 그런것을 알아들을것 같지 못하여 고개만 끄덕이였다.

천진항에 갈 준비를 갖춘 그들은 출발날자를 미루었다. 피살된 김정필의 딸을 데리러간 마동열의 걸음이 늦어졌기때문이였다. 마동열이 쉬이 돌아서지 않아 걱정이 컸는데 예정보다 이틀이 지난 저녁에 허리가 늘씬하고 목란처럼 복스럽게 생긴 처녀를 앞세우고 헤벌쭉거리며 나타났다.

《에에, 제 이 중국관내에 바람처럼 싸다니며 별일 다 겪었지만 이번 임무처럼 고생스럽게 수행해보기는 처음입니다.》

마동열이 왜 늦어졌는가고 정시명이 묻기도전에 능청을 부린다.

《왜?》

《아니 뭐 늙은 총각이라고 어디 곁을 줍니까. 난징서 예까지 어데입니까.》

마동열이 처녀를 시까스르며 말을 늘여놓는데 마동열의 말이 길수록 처녀의 말쑥하던 두볼이 잘 익은 홍시처럼 발그레하게 물들여지고 가리마가 반듯한 머리가 자꾸만 내려간다. 정시명이 웬일이 있었는가고 하니 마동열이 또 말을 하려는데 처녀가 용기를 내여 마동열의 발등을 살그머니 밟아준다.

그 어질면서도 숫기 어린 동작이 정시명의 눈에 안겨들었다.

처녀가 수집은 태를 짓고도 총각의 발등을 누를만 한 용기를 내게 된데는 연고가 있었다. 마동열이 난징에서 빠져나올 때부터 자기들을 쫓고있는 불량기 있는 눈초리들을 띄여보고 처녀더러 자기 곁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말라고 일렀는데 그게 오히려 처녀의 가슴을 활랑거리게 만들었다. 하긴 피묻은 어머니의 사진 한장 달랑 들고와서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주고 무턱대고 따라서라니 어디 될법이나 한 일인가. 자기를 믿으라고, 자기는 절대로 좋은 사람 해치는 사람이 아니니 그리 알라고, 시간이 없어 더 자기를 밝힐 겨를이 없으니 그냥 태가락을 부리면 오라를 지워 둘러메고 가는수밖에 없다고 달래기도 하고 엄포도 놓는 사내의 이야기에 따라는 섰지만 마음은 잔뜩 도사리였다. 그래 처녀는 될수록 마동열과 간격을 두고 따라나섰는데 마동열에게는 생야단이였다. 렬차에 올라서도 마동열이 처녀에게 자기 옆자리를 마련하였건만 부등부등 등받이를 사이에 두고 뒤걸상에 앉는다.

일은 심양에 거의 이르러서 벌어졌다.

마동열이 잠에 곯아떨어지면서 위생실에 갈 때면 자기를 깨워 함께 가자는 말을 잊지 않고 해주었는데 처녀가 그대로 할리 만무였다. 끝내 위생실에 갔다가 불량배들에게 걸려들었던것이다. 당시 중국의 여러 지역에는 불량배들이 처녀들은 물론 유부녀들까지 덮쳐서 술집이나 부자놈들의 노리개로 팔아먹는 일이 드문하였다. 마동열이 처녀를 찾느라고 이틀간 속이 한줌만 해서 돌아쳤다.

《에에, 내 말 그만둔다. 자, 선생님 이제는 맡으십시오.》

마동열이 이렇게 말하고는 그 큰 눈망울을 둘둘 굴리며 《이제 말을 안들었다간 알지. 우리 선생님은 인정사정이 없소. 난 그래도 다행으로 총각이니 마음을 썼지만…》하고 엄포를 놓는다. 마동열이 총각이라는 소리를 련방 내지르며 롱절반 진담절반으로 을러메는 소리에 처녀는 더욱 몸둘바를 몰라 쩔쩔 매고 그들을 맞이한 사나이들은 모두들 껄껄 웃어댔다.

《됐네. 나가보라구.》

정시명이 마동열의 실팍한 어깨를 주먹으로 쿵 소리나게 쳐주자 마동열이 그제야 물러났다.

정시명이 전우의 딸을 맡아 키우리라 이미 속구구가 되여 있던지라 아버지처럼 처녀의 손목을 꼭 잡아쥐고 쏘파에 앉히였다. 정시명은 처녀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저도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동그랗게 선을 지은 복스럽고 탄력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 금방 망울을 터친 목란꽃처럼 싱싱한데 진주같은 두눈에 그윽히 어려있는 정기가 애틋한 인상을 진하게 주었다. 곱게 흘러내린 코마루며 륜곽이 뚜렷한 입술이 잘 다듬어놓은 조각상처럼 흠할데 없이 조화를 이루고 중국처녀들처럼 뒤로 마주 이어놓은 투실한 량태머리가 몸을 흔들 때마다 매츨한 허리에 잘 어울리는 옥색쟈케트우에서 달랑거린다. 난징에서 체신학교까지 다녔다는 처녀는 아버지를 닮은듯 수집음을 잘 탄다. 하지만 정시명은 그 순하게 생긴 모색과는 달리 속알이 여물고 리지가 깃든 총명한 처녀라는 직감이 들었다.

정시명이 자기 이름을 대며 아버지의 오랜 친구라고 하자 사붓이 자리에서 일어나 눈길을 소곳이 내리깐채 조선절을 곱게 하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름은 김례영이라고, 례절 례자에 꽃부리 영자라고 나직하지만 또렷한 어조로 대답했다. 안팎이 절색이라던 김정필의 말이 헛자랑이 아니였다.

《례영아, 이제부터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라. 내 애비구실을 제대로 할지는 모르겠다.》

《아버지!》

오랜 세월 아버지품을 그리며 살아온 처녀는 이렇게 목이 메여 부르며 무랍없이 정시명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윤기가 자르르 도는 처녀의 머리칼에서 풍기는 동백기름의 향긋한 냄새가 물씬 코를 찌르자 정시명은 불시에 김정필의 선한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찌르르 해왔다. 다 큰 처녀가 얼마나 아버지의 품이 그리웠으면 생면부지의 아버지친구에게 수집음도 잊고 담쑥 안길가. 이 자리에 내가 아니라 김정필이 서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부녀상봉의 화폭이 마련되였으랴.

(정필이 이 사람! 며칠만 견디여주지, 이거야 너무 무정하지 않은가. 이렇게 곱고 정한 딸을 남기고 그렇게 가버리다니…)

가볍게 떨고있는 처녀의 함함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시명은 오래동안 창밖으로 뿌잇하게 흐려져있는 하늘을 얼없이 바라보았다.

마가을의 검푸른 하늘에서는 뭇별들이 바들바들 떨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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